진리는 시간의 딸 동서 미스터리 북스 48
조세핀 테이 지음, 문용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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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은 조세핀 테이가 1951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침대탐정의 역사사건 탐험'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상해를 입어 병원에 입원한 글랜트 경감에게 연인 마타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마타는 글랜트가 무료할 것을 걱정하여 여러가지 초상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초상화 가운데 리처드 3세의 것이 있었다.

리처드 3세는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형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하자 조카들을 살해한 뒤 왕위를 공고히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글랜트 경감은 초상화를 보고 어쩐지 리처드 3세가 그렇게까지 무지막지한 인물은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방문객들에게 역사책을 청해 읽으며 사건을 재구성하던 글랜트 경감은 마침내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을 잔인하게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과, 후세의 역사가들이(거기엔 토머스 모어도 포함된다) 헨리 7세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리처드 3세를 부당하게 대접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물론, 리처드 3세가 누명을 썼을 수 있다는 가설을 조세핀 테이가 최초로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탐정이 역사적인 사건에 개입하여 추리를 펼쳐나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꽤나 참신한 설정이었다.  탐정소설 평론가 앤소니 버우처는 <진리는 시간의 딸>이 그해 나온 미스터리 소설 중 으뜸이라고 평가했고, 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이러한 설정을 이용하여 '진리란 단선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부각시키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작가는 씌여진 역사책이 모두 진실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는데, 이러한 작가의 의견은 글랜트의 조수역을 자처한 캘러다인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진실은 이야기에 없고 회계장부에 있도다... 진정한 역사는, 역사로 씌여진 것 가운데는 없습니다. 옷값 계산서 속에, 왕실 내정비 속에, 개인의 편지 속에, 재산 목록 속에 있습니다.


역사책은 당대의 권력구도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므로, 실증적인 사료에 의해야 한다는 입장이 잘 드러난 말이다.


<건망증 있는 사람들(The Absent-Minded Coterie)>는 로버트 바가 1906년 발표한 단편집 <유제느 발몽의 승리(The Triumphs of Eugene Valmon)>에 수록된 단편이다. 건망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할부판매를 한 뒤 할부기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하여 돈을 수금하는 악당의 이야기인데, 주인공 유제느 발몽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바람에 악당에게 당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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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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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안한 이름의 주인공 람 모하마드 토마스(흰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카톨릭식 이름의 잡탕)는 퀴즈쇼 <누가 십억의 주인이 될 것인가?>의 첫회에 우승한 뒤 곧바로 구속된다. 프로그램 제작자와 경찰은 슬럼가의 일자무식 웨이터가 전문가들도 맞추기 힘든 열 두문제를 연속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뭔가 속임수를 썼음에 틀림없다는 판단을 했다. 비아냥과 고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지옥을 경험하던 람 모하마드 토마스 앞에 스미타 샤라는 변호사가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데, 람 모하마드 토마스는 자신이 문제를 맞출 수 있었던 긴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1. 아르만 알리와 프리야 카푸르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고아원 시절부터 함께했던 절친 살림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아르만 알리였고, 살림을 따라서 열심히 영화관을 들락거린 덕분에 정답을 맞춘다. 정답은 배신.


2. 십자가에는 어떤 글자가 세겨져 있을까요?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버려진 곳이 성당이었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보던 글자가 바로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였다.


3. 우리 태양계에서 가장 작은 행성은 무엇입니까?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공동주택에 살던 시절에, 옆 방에는 한 때 천문학자였던 샨타람이 살았다. 그는 자신의 딸 구디야를 사랑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 굴복하여 나중에는 딸을 학대하기에 이른다. 구디야는 펄펄 끓는 찻물을 뒤집어 쓴다. 어쨌든 샨타람 덕분에 그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명왕성>


4. 맹인 시인 수르다스는 어떤 신을 찬송했습니까?

람과 샬림은 마만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끌려가 하마터면 장애인이 될 뻔 했다. 샬림은 목소리가 고왔기 때문에 노래를 많이 배웠고, 덕분에 람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크리슈나>


5. 정부는 다른 나라의 외교관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람은 한 때 호주에서 온 테일러 부부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지낸 적이 있었다. 테일러는 첩보영화에 미친 편집광이었는데, 온 집안에 CCTV를 설치해둔 자였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람은 답을 맞춘다. <용납할 수 없는 외교관>


6.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람이 바텐더 하던 시절, 부두교를 신봉하는 아내와 결혼한 사업가를 알게 된다. 그 이야기를 통해 답을 맞추는데, 정답은 <포트 모레스비>이다.


7. 회전식 연발 권총 리볼버는 우가 발명했는가?

람은 기차 강도를 만난 적이 있고, 그 때 콜트 권총을 만져보게 된다. 정답은 <새뮤얼 콜트>


8. 인도 육군에게 수여되는 무공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훈장은 무엇입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람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방공호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퇴역군인을 만나는데, 사실 그는 겁쟁이였지만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떠벌렸다. 정답은 <파람 비르 차크라>


9. 인도 최고의 타자 사친 말반카르는 100점대를 몇 번이나 기록했습니까?

샬림은 한때 아흐메드라는 살인청부업자의 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그의 취미가 크리켓 경기 관람이었다. 정답은 서른 여섯번. 샬림은 기지를 발휘해 사진을 바꿔침으로서 아흐메드가 마만을 살해하도록 하는데 성공.


10. 비극의 여왕 닐리마 쿠마리는 여우 주연상을 언제 받았습니까?

람은 닐리마 쿠마리의 쓸쓸한 노년을 지켜본 사람이다. 그녀는 애인에게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살한다. 정답은 <1985년>


11.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코스터드라는 인물은 어디에 나옵니까?

람이 곤란에 처했을 때 도와준 친구가 샹카르이다. 샹카르 덕에 거처가 생긴 람은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타지마할에서 관광안내원 노릇을 해서 먹고 살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잘 빌려주었기 때문에 인심도 얻는다. 이 시절 창녀 니타와 알게 된다.

얼마 후 샹카르가 공수병에 걸려 죽는다. 샹카르를 구할 돈을 마련하지 못한 람은 그가 사실은 공동주택의 주인이자 왕족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운명의 비극성에 절규한다. 

데비 공주의 돈을 훔친 람은 니타라도 구해내려 하지만, 니타는 가정마다 딸 하나를 창녀로 만드는 인습 베드니의 희생자로서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40만 루피를 병원에서 만난 불쌍한 영어교사에게 주어 아들을 구할 수 있도록 해준 람은 이제 '우정의 힌트'를 쓰기로 한다. 전화를 받은 영어교사의 도움으로 람은 정답을 맞춘다. <사랑의 헛수고>


12. 뭄타즈 마할의 아버지 이름은?

람은 타지마할 안내원이었다. <아사프 자>


13.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작품번호 106번으로 '헤머클라비어 소나타'로도 알려진 곡의 조는?

프렘 쿠마르는 12번 문제를 장난이었다고 얼버무린다. 잠시 막간에 화장실에 간 프렘 쿠마르에게 람은 권총을 겨눈다. 프렘 쿠마르는 닐리마 쿠마리를 학대했고, 창녀 니타의 얼굴을 짓이겨놓은 쓰레기였다. 람은 오직 프렘 쿠마르에게 복수하기 위한 일념으로 퀴즈쇼에 참석한 것 뿐이었는데, 운이 좋아 문제들을 맞췄던 것이다. 프렘 쿠마르는 람에게 싹싹 빌며 정답을 알려준다. <B플랫 장조>


변호사 스미타 샤 덕분에 람은 풀려난 뒤 상금을 받는다. 스미타 샤가 사실은 구디아였다.

퀴즈쇼는 파산했고, 프렘 쿠마르는 이개월 전 사망했다. 표면적으론 자살이었지만, 퀴즈쇼와 연관된 조직폭력배들의 소행일지도 몰랐다. 경찰들이 마만이 운영했던 고레가온을 급습해 장애아들을 풀어주었다. 샬림은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물론 제작자는 람이었다)

람은 니타와 결혼한다. 행운의 동전을 던져버릴 때, 람은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2009년 아카데미 8개 부문 석권, 2009 골든글로브 4개 부문 석권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원작소설로, 소설 역시 2007 파리 도서전 독자상과 2006 남아프리카 부커상을 수상했다. 처음엔 <Q&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영화가 인기를 얻자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재출간 된다. 

<천일야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퀴즈쇼의 질문과 연관을 갖고 이어지는데, 짤막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인도사회의 인습과 고질적인 병폐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6인의 용의자>도 샀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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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유희
시마다 소지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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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네스호가 있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던 로드니 라힘은 어머니가 죽자 마을 주민들에 의해 몬트로즈 왕립 정신병원에 격리된다. 마을 주민들은 로드니 라힘이 동물을 학대하고 엿보기를 즐기는 등 살인음락증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엄밀히 따지면, 로드니 라힘이 폐쇄병동에 격리될 정도로 정신병이 심각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어쨌든 로드니 라힘은 서른 다섯에 병원을 나와 사회에 복귀했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요리사 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 마흔 여덟에 큰 변화가 온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과 선으로 이뤄진 그림들이었다. 그 그림들이 모두 모였을 때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 그림들은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 있는 성을 그대로 복사한 듯 정밀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로드니 라힘의 어머니는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갔고,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벌 때 지하로 가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는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마을 남자들이 자연 꼬여들었고, 마을 여자들은 로드니 라힘의 어머니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어느 날, 로드니 라힘의 어머니가 지하실에서 목을 멘 채 발견된다. 경찰은 이 사건을 자살로 처리하지만, 어느 어머니가 자식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 가서 목을 멘단 말인가?


시간이 흐른 뒤, 로드니 라힘의 어머니에게 해꼬지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들이 하나 둘 살해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시신은 조각조각 찢겨진 채 발견된다. 머리가 개의 몸통에 붙어 있거나, 탑에 꽂혀 있는 등 엽기적인 형태로 발견되는데 어딘지 구약성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계속되는 살인과, 살인을 이미 경험한 듯한 수기. 그리고 미타라이 기요시 교수의 개입. 과연 범인은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자 마을에 다시 돌아온 로드니 라힘일까? 하지만 살인을 이미 모조리 경험한 듯한 그 수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시마다 소지는 1980년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데뷔하며 사회파로 기울어진 일본 추리소설계에 신본격의 부활을 알린 작가다. 후배들의 양성과 발굴에도 힘 쓴 덕에 신본격의 흐름은 아야츠지 유키토, 아비코 타케마루, 우타노 쇼고, 노리즈키 린타로 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작가는 기이하고 괴기스러운 살인사건을 제시하며 독자의 호기심을 휘어잡는 데 매우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반면, 신본격의 거두임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 풀이는 기교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타라이 기요시가 등장하는 소설은 '사실은 이랬다' 식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아 실망하는 독자들도 꽤 있다.


<마신유희>의 범인은 누군지 알아맞추기가 매우 쉽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프롤로그에서 언급되었는데, 주된 줄거리에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범인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수수께끼 풀이를 중요시 하는 미스터리에서 이런 구성은 열에 아홉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꼼수이다.

 

한편 미타라이 기요시는 소설 속에서 거듭 변신을 거듭하는데,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점성술사로 등장한 기요시가 2002년에 쓰여진 이 소설에서는 스웨덴 중동부에 있는 웁살라 대학의 뇌과학 교수로 설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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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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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속도로터미널 화장실에서 소녀가 아이를 낳는다. 누군가 소녀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를 하자 곧 구급차가 오고 소녀가 실려간다. 난리통에 아이는 돼지엄마에게 건네진다. 돼지엄마는 아이에게 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아들처럼 키운다.

돼지엄마와 제이가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은 형사였다. 형사에게는 제이와 동갑인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동규였다. 동규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아서 말을 못했다. 동규와 제이는 함께 놀았는데, 동규가 말을 못하는 것에 대해 제이는 별로 불편해하지 않았다. 어떨 땐 제이가 동규의 심중을 미리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둘은 돼지엄마가 주방을 맡아보는 룸싸롱 창고 따위를 놀이터 삼아 나름대로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낸다.

사학년 때 동규는 갑자기 말을 하게 되고, 일반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런 뒤 둘 사이는 조금씩 벌어진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동규가 이사간 뒤에 둘 사이는 더 서먹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이 제이의 집에 가보라고 한다. 제이가 학교를 계속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가 사는 동네에 가보니, 그곳은 재개발 때문에 을씨년 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돼지엄마는 뽕에 취해 집을 나가버렸고, 제이만 홀로 남아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제이는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세워놓고 악마를 잡기 위해 애를 쓴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는 동규의 뒤를 밟은 사회복지사 등에게 잡혀 대전 논산의 보육시설로 끌려간다.


2장


제이가 수용된 보육시설의 뒷편에는 개사육장과 버섯농장이 있었다. 티켓다방의 아가씨가 두 곳을 오가며 몸과 커피를 팔았다. 그러므로 둘은 동서지간이었겠지만, 사이가 나빴다.

어느 날, 개사육장쪽에 큰 불이 난다. 개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졌고, 개장수는 불길을 빠져나오다 차에 치인다. 불이 잦아든 뒤, 버섯농장에서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버섯농장 주인은 온몸이 난자당한 채였고, 티켓다방 아가씨는 교살당한 것 같았다.

개장수들이 도망친 개를 잡아가기 위해 트럭을 몰고 나타난다. 제이는 트럭 타이어를 모조리 펑크낸다. 성난 개장수들에게 잡혀 온 제이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 설파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아직 체계화 되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얼마 뒤 제이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간다. 처음엔 대학로 부근을 얼쩡거렸다. 거기서 아버지가 영화감독인 목란을 만난다. 목란은 제이에게 호감을 느낀다.

목란과 헤어진 제이는 PC방에서 만난 질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가출한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 여자아이들이 몸을 팔아 푼돈을 벌어오면 그 돈으로 술을 사다 마신 뒤 밤에는 되는대로 짝을 지어 난교를 벌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제이는 그곳에서 총각딱지를 뗀 뒤 다른 애 하나를 맥주병으로 작살낸 후 독립한다.


3장


제이가 동규의 전화기로 목란에게 전화를 건 것이 인연이 되어 셋이 어울리게 된다. 그 당시 제이는 남이 버린 책들을 읽고, 생쌀을 씹어 주린 배를 채움으로써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었으며, 키가 훌쩍 커서 어른처럼 보였다. 제이는 자신의 영혼이 다른 물체에 스며드는 경험을 한다고 뇌까렸는데 어찌보면 정말 그런 것처럼 보였다. 제이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여 자신의 행동준칙을 정하는 등 일면 신비로운 면도 보였다.

동규가 새엄마와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다 가출한 뒤 셋은 원효대교 아래 폭주족 무리와 어울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는 오토바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끌게 된다. 목란의 전 남자친구 태주 역시 큰 무리를 이끌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경쟁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 제이가 워낙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태도로 아이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목란과 동규는 제이에게 열광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정쩡한 위치가 되고 만다. 제이와 가장 친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둘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제이 사이에는 간극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동규는 목란에게 고백하지만, 목란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목란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제이도 목란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4장


박승태는 할리타는 경찰로 유명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누군가에게 동성애적 성향을 간파당해 강간 비슷하게 당한 뒤, 자신도 어린 남자애들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된다.

바야흐로 폭주족들이 3.1절과 8.15 광복절에 대폭주를 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자 박승태에게 대폭주를 잠재우고 아이들을 검거하는 임무가 떨어진다. 박승태는 태주를 힘으로 굴복시켜 강간한 뒤 자신의 끄나풀로 삼고, 동규 역시 자신의 정보원으로 둔다.

한편 제이의 무리는 점점 규모가 커졌고 행동 양식도 기존의 폭주족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제이는 폭주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들이 화가 나 있음을 온세상에 알리는 행위'로 규정하고, 경찰서를 타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경찰정은 박승태로 하여금 어느정도 희생을 각오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다.

대폭주가 시작되자 경찰은 범퍼로 아이들을 박는 것도 서슴지 않고 몰아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가시가 박힌 바리케이트로 아이들을 몰아 넣는다. 제이는 바리케이트를 무서워 하지 않고 질주했다. 질주의 끝에, 제이가 다리 난간 너머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당시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이가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 날 목란은 한쪽 눈을 실명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소설 쓰는 '내'가 한때 연인이었던 Y로부터 동규를 소개받아 전해들은 것을 옮겨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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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90년대 중반 매우 개성있는 글을 써서 인기를 얻었다. 그의 글은 젊은 감성에 세련미를 더했으며, 사유의 깊이에 있어서도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독특한 감성과 세련미는 사라지고 노련한 잔재주와 기교남 남은 글들이 발표되고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도 잔재주로 어찌어찌 마무리는 했지만 과거에 자신이 쓴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과 모파상의 <벨아미>를 연상시키는 제이는 사실 한꺼풀 벗겨놓으면 별 것 없는 인물이다.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책을 주워 채워넣은 난잡한 지식, 악마를 잡는다느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느니 하는 신비로운 언사, 자신의 영혼이 물체에 스며들어 고통을 함께 한다는 발언 등 갖은 똥폼은 다 잡도록 하지만 작가는 거기서 딱히 더 나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니면 되게 귀찮아서 그냥 얼버무리는 느낌도 든다) 

아이들이 제이에게 열광한다는 설정이지만, 그 아이들이 제이에게 매료된 이유가 뭔지 갸우뚱한 상황이 반복되고, 선택적 함구증으로 한때는 영혼을 교감했다는 설정의 동규도 인물을 입체적으로 굴려가기 어려우니(혹은 귀찮으니) 나중엔 자살로 몰아버린다.

그야말로 등장인물들에게 후까시만 잔뜩 줬다가 도저히 제어가 안되니(혹은 귀찮으니) 나중엔 모두 죽는 걸로 처리해 버린 뒤 멋적었는지 '들은 얘기' 운운해버리며 손쉬운 도피처를 찾아가버리는데 소설 전체가 반칙의 연속인 느낌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매우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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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지음, 금정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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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사고로 죽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스나가 안이라는 여성과, 안을 사랑하게 된 타루토라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타루토는 안과 우연히 만화카페에서 만난다. 처음엔 티격태격하다 헤어지는데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얼마 뒤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우연히 그녀와 다시 만난 뒤 타루토는 안에게 빠져들고, 마침내 넌지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안은 자신이 원거리 연애중이라며 거절하고, 타루토는 실의에 빠진다.

그 즈음 할머니가 운영하는 케이크점 '미뇽'에 타루토 또래의 잘생긴 청년이 취직하는데, 이름이 쿠키 나츠히코였다. 나츠히코는 타루토로부터 연애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와닿는 얘기들을 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데... 과연 타루토와 안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주위 사람들은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동정하지만, 사실 그 동정은 애도기간 동안에만 유효하다. 남겨진 사람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면 '헤픈 사람'으로 치부되고, 동정은 거두어지며, 과거의 사랑이 진실이었는지도 의문시된다. 

이러한 것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남겨진 사람에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남겨진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거부하고 과거의 사랑을 미화하기에 이른다. 마치 소설 속의 안처럼. 안은 그래서 자신이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새로운 사랑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대학 후배 중에 일본드라마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드라마 <립스틱>을 그 친구 덕에 봤고, 노지마 신지라는 이름도 그 때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의 별명은 '낙타'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어쨌든, 그 뒤 2005년 경에 <골든볼>을 본 뒤 노지마 신지와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그가 쓴 소설을 발견해서 주문한 뒤 읽게 되었다.

역시나 드라마 작가가 쓴 소설답게 잘 읽힌다. 단숨에 결말까지 읽었다. 게다가 그의 드라마 특징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티격태격하다가 연애로 발전하는 장면이라든가, 1:1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 작가의 주장을 연설하듯이 설파하는 장면, 극 후반의 반전 등이 그렇다. 그런 이유로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인데,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둔 각본이라고 생각하면 봐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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