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한 여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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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 1회 개최되는 제도대학 미식축구 팀의 OB 모임 참석자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대학 졸업 이후 벌써 십여년이 흘렀으니 모두들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참석이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데쓰로와 안자이, 스가이 등은 섭섭함을 감출 수 없다.

올해의 모임이 끝나고, 2차를 갈까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차에 이들은 미식축구팀의 매니저를 맡았던 미쓰키를 만나게 된다. 미쓰키는 여자이면서도 미식축구 룰에 관해 남자들 보다 박식했고, 결단력도 있어서 좋은 매니저였다. 그런데 미쓰키의 태도는 좀 묘한 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조용히 얘기 좀 하자는 필담만 반복하는 미쓰키를 데쓰로는 집으로 데려간다. 데쓰로의 아내 리사코 역시 제도대학 미식축구부의 매니저였고, 미쓰키를 잘 알고 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데쓰로의 집에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미쓰키가 다시 일행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좌중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체구가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미쓰키였는데, 미쓰키가 "오랜만이야 QB(쿼터백)" 이라고 말할 때 데쓰로와 스가이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부터 들려온 것은 완벽한 남자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미쓰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놀라운 고백이었다. 미쓰키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성정체성 장애를 겪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로 살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미쓰키는 끝내 자신이 남자라는 마음은 버릴 수 없었다. 가출은 미쓰키가 선택한 폭력적인 결론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가출한 뒤 미쓰키는 술집의 바텐더로 일했고, 거기서 가오리라는 여성을 만났다고 했다. 동료로서 제법 친했던 둘은 때로 함께 귀가하기도 했는데, 가오리에게는 도쿠라 라는 이름의 악질적인 스토커가 따라다녔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고 만다. 도쿠라의 행동이 도를 넘어서자 미쓰키가 도쿠라와 옥신각신 하다가 그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에 미쓰키는 도쿠라의 시체와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몸을 피한 뒤, 마지막으로 다정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OB 모임 장소에서 배회했던 것이다. 말을 마친 미쓰키는 날이 밝으면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데쓰로, 스가이, 리사코가 미쓰키를 만류하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세상에는 혈액형별 성격 분류를 믿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A, B, O, AB형의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혈액형에 따라 상대를 차별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혈액형이 달라도 인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네 종류라는 대략적인 방법으로는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염색체의 종류에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성염색체가 XX든 XY든, 또는 그것과 다르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고방식을 왜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나카하라에 따르면 누가 봐도 여자로밖에 볼 수 없고 호적도 여자이고 본인도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성별을 검사하면 여자가 아니라는 판정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검사는 Y염색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조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Y염색체를 가진 여자가 있지요..."

나카하라에 따르면 그런 사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정소성여성화증이라는 병을 가진 사람이다. 이 병을 가진 경우, 세포 안에 남성 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없다. 따라서 정소에서 남성 호르몬이 나와도 육체는 남자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소도 가지고 있고 염색체도 XY지만 체형적으로는 완전히 여자인 것이다.

또 하나는 성선형성이상증이다. 이것은 태아기, 그것도 이른 시기에 정소가 죽어 버리는 병이다. 따라서 남성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 이때도 염색체는 XY지만 남성 호르몬이 없기 때문에 여성형 육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염색체가 XY이기 때문에 성별 확인에서 남자로 나온다.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에 있는 안쪽과 바깥쪽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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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에 있는 안쪽과 바깥쪽으로서의 남자와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인 이상, 더 어떤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순도 100%의 남자와 여자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종교계 일부에서 동성애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구입한 것은 2010년 경인데 8년이나 묵혔다가 읽는다. 사실 제목이 끌리지 않아서 그랬는데, 막상 읽어보니 묵직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일본에서 발표된 것은 2001년이니까, 당시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가장 남성적인 스포츠의 하나인 미식축구와 남녀간의 성정체성 문제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동성애, 스포츠에서 성정체성 문제, 호적교환이라는 방법으로 남녀를 바꾸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지원하는 연극단체 등 다채로운 내용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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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지음, 원은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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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공사이자 귀금속 거래업자인 존 혼비가 거래업체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수령해 금고에 보관했는데, 다음 날 금고를 열어보니 다이아몬드 원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특이한 점은 다이아몬드 원석 위에 올려둔 종이쪽지, 존 혼비가 직접 다이아몬드 원석을 넣은 시각과 서명을 남겨둔 종이 쪽지, 에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있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지문을 남긴 사람이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싱겁게도 금방 밝혀진다.

바로 존 혼비의 조카 중 한 명인 루벤 혼비였다. 그런데 지문이 루벤 혼비의 것이고 그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특정되자, 존 혼비는 물론이고 그의 아내, 그리고 수양딸 깁슨 양 등이 한 목소리로 루벤은 절대 범인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평소 행실이나 사람됨으로 판단하자면, 루벤은 돈에 무심한 편이라는 사람들의 견해는 옳은 것 같았다.


"경찰은 용의자를 체포하면 어떻게든 유죄 선고를 내리려 하지. 만약 그 용의자가 결백하다 해도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경찰이 상관할 문제가 아닌 거야. 용의자 본인이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거라네. 이런 시스템은 치명적이지. 특히 경찰관의 업무 능력이 범인을 얼마나 많이 잡아들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체포한 용의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유도하기 마련이야. 입법 절차라는 게 원래 그렇다니까. 변호사들은 학구적인 토론이나 진실 추구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생각까지도 무시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판에서 이기려고만 해. 바로 그래서 변호사들과 과학적 증인 사이에 마찰이 그렇게 많은 거라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전인 1907년에 R. 오스틴 프리먼이 사법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저 말들이 현재에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R. 오스틴 프리먼이 의사 출신의 손다이크 박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첫 소설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인기를 끌자 <피어슨 매거진>은 '셜록 홈즈 시리즈'로 인기를 끌던 <스트랜드 매거진>에 대항하기 위해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의 연재를 권유했다고 한다. 작가는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소설을 1943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매년 집필했다고 한다.

손다이크 박사는 풍부한 법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물적 증거를 수집해 과학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때로는 법정에서 증거가 어떤 식으로 조작될 수 있는지 실험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가 게임하듯 진행하는 이 실험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들이 모두 참가할 수 밖에 없는데, 언제나 승자는 손다이크 박사이다. 그의 조력자로는 의학박사 저비스가 있고, 손재주가 좋은 충실한 심복 폴튼이 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한다.

한편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은 지문감식법이 수사에 막 도입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씌여진 소설인데, 지문의 위조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지문감식 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린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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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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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화자 '나'가 레닌그라드로 출발하는 기차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책은 상당한 장서가인 이모에게서 빌린 것인데, '마음속으로는 이 책을 돌려주지 않을 작정' 이었다. 너무 낡고 거의 해어져서 새로 제본한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의 회상록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애칭은 페쟈) 부부는 1867년 4월 중순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빌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간 뒤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페쟈는 독일인들이 자신을 속여먹는다고 불평했고, 때때로 불쾌한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신혼부부는 자주 화랑에 갔는데, 이때 죽기 전에 선물받게 되는 <시스틴의 마돈나>를 보게 된다.

화랑에서 페쟈는 그 시절, 즉 사회주의 단체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시베리아에서 4년간 유형 생활을 하던 시절, 을 종종 떠올린다. 간수 크리브초프 앞에서 한없이 비굴했었던 그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밤이 되면 페쟈는 안나에게 가서 '밤 인사'를 했다. 거의 매일밤이었다. '항해'는 순조로울 때도 있었고, 파도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도박꾼>을 쓰던 시절 채용된 속기사였다. 둘은 처음 만나던 순간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을 했다. 하지만 집에는 다 큰 의붓아들이 있었고, 페쟈의 형수도 당연하다는 듯이 생활을 의탁하려 했기 때문에 신혼을 즐길 수 없었다. 그들이 여행을 떠나온 이유였다. 

부부는 드레스덴에서 바덴바덴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곳에서 페쟈는 룰렛 게임으로 큰돈을 벌어 빚을 갚을 작정이었다. 바덴바덴에 머물던 초기에는 운이 좀 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는 사이 점점 잃는 경우가 많아졌고, 안나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화를 내는 빈도 역시 잦아진다.

경제 사정은 최악이었고, 문단에서도 조롱거리가 되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문단의 주류는 투르게네프였고, 문단 동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네크라소프는 그를 피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진가를 인정하여 등단에 도움을 준 벨린스키 마저 떠나갔다. 곤차로프가 <오블로모프>로 장당 400루블을 받고 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토록 가난했는데도 기껏 100루블을 받고 글을 써야했다.

그럴수록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몰두했고, 사소한 것들을 자신의 운과 연결시켰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매번 돈을 잃었고, 안나에게 무릎꿇고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으며, 다음 날이 되면 결혼반지나 단벌옷을 저당잡혀 도박장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 동전 한닢까지 다 잃어서 더 이상 저당잡힐 것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안나가 독한 맘을 먹고 그를 떠나려 하거나, 그녀 스스로 도박에 뛰어들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격정적으로 용서를 빌거나, 간질발작을 일으키거나 했다. 가끔 그가 푼돈을 땄을 때 사오는 조그만 선물, 포도라든가 자두같은 것들, 그런 것들만이 매우 희미한 색채로 그들의 삶을 채색할 뿐이었다. 신혼여행이라 할 만한 그 여행에서 모든 것을 잃은 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화자 '나'의 여행 역시 종착지에 이른다. '나'는 그가 죽어갔던 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고, 아내에게 "나는 오늘 죽을 거야, 아냐"라고 말했다.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호전되리라 했지만, 몇차례 폐출혈로 피를 흘린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눈을 감는다. 안나에 따르면 이것은 저녁 8시 38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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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치프킨은 1926년 구소련 민스크에서 유대계 러시아인 의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그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의사이자 연구자로서 평생을 보낸다. 1950년 스탈린의 반유대정책 때문에 고초를 겪던 그는 1957년에야 모스크바 거주 승인을 받아 터를 잡지만, 아들 내외가 미국으로 떠나자 마찬가지로 1979년과 1981년에 이민 비자를 신청한다. 물론 당국은 그의 비자를 거절하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생전에 단 한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했다. 정식 출판 뿐만이 아니라 지하 출판과도 인연이 없었고, 회람 등으로도 읽힌 적이 없었다. 197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80년 완성한 이 작품 역시 사후에 발견되어 출판된 작품이다. 남에게 읽히기 위한 목적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이었을까!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매료되어 그의 마지막 삶을 추적하는 여행을 떠나지만, 이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유대인 차별과 학살을 피해 평생을 괴로워했던 그가 매료되었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야 말로 유대인을 악으로 보았던 작가가 아닌가!

광기와 도박벽, 뇌전증(간질)과 섹스 중독, 그리고 집요한 자기비하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천재의 불운한 죽음을 추적하는 또다른 불우한 작가 치프킨의 기록은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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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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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자 요수아 골드베르크가 자택에서 처형 자세로 살해 당한다. 워싱턴에서 요직을 지냈고, 백악관 자문을 역임했으며,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임원이었던 그의 죽음은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준다. 

보덴슈타인 반장과 피아 키르히호프가 사건을 배당 받는다. 그런데 피아의 전남편이자 법의학 연구소장인 헤닝 키르히호프가 부검 과정에서 뜻밖의 문신을 발견한다. 왼쪽 팔꿈치에서 20센티미터 위 팔 안쪽에 세겨진 AB라는 알파벳은 분명 나치 친위대들이 자신의 혈액형을 세긴 흔적이었다.

범인이 남기고 간 16145라는 숫자가 시사하는 바는 불분명했고, CIA와 미국총영사를 대동한 유족이 시신마저 회수해 가버렸기 때문에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문다. 유일한 소득이라면 골드베르크가 달력에 남긴 '베라 86' 이었다. 그 메모는 귀족 출신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한 베라 칼텐제의 86세 생일을 뜻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헤르만 슈나이더라는 또 다른 노인이 자택에서 살해 당한다. 역시나 나치 처형자세였고, 혈액형 문신도 발견된다. 그의 집 지하는 나치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헤르만 역시 칼텐제 머신 패브릭에서 보내는 고액의 돈을 주기적으로 받았다는 점에서 베라 칼텐제와 관계가 있었다.


세번째 희생자는 아니타 프링스. 양로원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 사라졌고, 숲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녀 역시 나치 처형 자세로 살해당했고, 베라 칼텐제와 친분이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로버트 바트코비아크였다. 로버트는 베라 칼텐제의 남편이 바깥에서 낳아 온 의붓아들이었는데, 여러차례 폭력과 마약으로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세 명이 살해당하기 전 로버트가 그들을 방문했고, 고액의 수표를 은행에서 교환하려다 무위에 그치기도 했으므로 보덴슈타인의 상사는 섣부른 기자회견까지 자청한다.

그 와중에 로버트의 내연녀 모니카 크래머가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사건의 진상은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로버트가 얼마 뒤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로버트는 자살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앉아있는 마룻바닥 아래만 먼지가 가득하다는 것을 피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살해당했음이 분명했다.


살해에 대한 공포로 베라 칼텐제가 자택 경비를 강화하는 가운데 그녀의 주변 인물들 모두가 수상쩍게 보인다.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해 부유하는 생활에 몸을 내맡긴 베라 칼텐제의 첫째 아들 엘라르트, 어머니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이는 둘째 아들 지그베르트. 그리고 18년간 베라 칼텐제의 비서로 일하다가 그녀의 자서전을 펴겠다는 계획이 밝힌 뒤 일자리를 잃고 앙심을 품은 토마스 리터. 베라 칼텐제 집을 복원해줬다가 상자를 훔쳐갔다는 누명을 쓰고 공사비를 떼인 건축업자 마르쿠스 노박.

한편 살해당한 사람들의 과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들이 이미 사망한 유대인 행세를 해왔다는 것이 밝혀지고 과거의 추악한 범죄 역시 백일하에 드러난다.

범인이 남긴 16145가 45년 1월 16일이라는 추론이 맞다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범인이라면, 범인 역시 80세가 넘는 노령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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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르트는 베라 칼텐제가 질투심에 못이겨 살해한 귀족 부부의 아들이었다. 엘라르트는 베라 칼텐제를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며 육십년을 살았다. 나중에 베라 칼텐제에게 왜 그를 자식으로 키웠는지 묻자 그녀는 소름 끼치는 대답을 내놓는데, 엘라르트는 연적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증거물이었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엘라르트는 친어머니와 만나자 마자 이별하고, 친어머니의 손자이자 자신의 조카뻘인 마르쿠스 노박과 동성애에 빠져든다. 지그베르트는 자신의 이복형제라고 생각한 로버트를 평생에 걸쳐 경멸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치 추종자들이 전쟁통에 동프로이센 귀족들을 살해한 뒤 신분을 세탁하고 60년 이상 부와 명성을 누린다는 설정의 이번 작품은 타우누스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다.

참고로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번째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두번째는 <너무 친한 친구들>, 네번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이며, 다섯번째는 <바람을 뿌리는 자>, 여섯번째는 <사악한 늑대>, 일곱번째는 <산 자와 죽은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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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구) 문지 스펙트럼 10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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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홍성원은 1937년 경상남도 합천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에서 잠시 수학했다. (책 날개에는 수원 출생으로 표기되었으나, 오류로 판단된다)

196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전쟁>이 가작 입선하였고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빙점시대>가, 동아일보에 장편 <디데이의 병촌>이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중단편 70편, 장편 15편, 대하소설 3편을 발표하는 등 다작을 하였으며, 2008년 위암으로 타계했다.


문지 스펙트럼이 꾸민 <남도기행>에는 네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설야>는 <문예중앙> 1979년 봄호에 실린 작품인데, 가난에 못이겨 가출한 딸을 찾는 고물장수 장씨와 시국사범으로 쫓기는 대학생 민군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눈이 푸근히 내리는 가운데 난로불이 주는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삶이 풍기는 스산함이 대조되는 소설이다.


<남도기행>은 <세계의 문학> 1994년 4월호에 실린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여수 인근 바다로 낚시를 하러 가면 만나곤 하던 김선두의 이야기이다. 80년 광주의 불행한 역사와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 소설로 엮고자 하는 작가의 이야기 등이 낚시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진다.


<즐거운 지옥>은 <현대문학> 1970년 5월호에 실린 작품으로 당시 문인들의 가난하고 소탈하면서도 자긍심 넘치는 삶을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이다.


<폭군>은 <창작과 비평> 1969년 가을·겨울호에 실린 작품이다. 작가가 60년대 중반에 우연히 만난 노엽사에게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작품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파견된 두 명의 사냥꾼 이야기이다. 자연에 철저히 순응하고 토착민들의 풍습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호랑이를 사살한다는 목적은 잊지 않는 노엽사와 현대적인 장비와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군인출신 엽사를 대비시킨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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