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한 여자가 대여섯 살 난 아이와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김이나이고, <문창문화>라는 잡지사에서 기자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 여자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한 때 소설을 썼으나 지금은 <문창문화>를 꾸려가고 있는 중년의 사내 정서현이다. 

정서현은 이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하지만 2년간 그녀를 지켜봤으면서도 정작 결혼은 했는지, 남편이 있는지, 등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다. 지금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선, '아들이 있구나' 할 뿐이다. 


태인은 이나와 아이에게 어떤 약속의 말도 건네지 않는다. 이따금 나타나 몸을 섞고 갈 뿐이다. 구속과 위장취업과 도피를 반복하며 운동권의 삶을 사는 태인의 집에는, 유정수라는 현장 노동자 출신의 아가씨가 기숙하고 있다. 유정수는 태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추종하고, 태인은 그녀를 떨쳐내지 못한 채 한 지붕 아래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태인에게 이나는 정수가 '당신의 현재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유일한 지지자이며 유일한 군중이며 유일한 정당성'이기 때문에 내치지 못하는 것이라며 비난한다. 이나가 생각하기에 태인은 '마주쳐야 할 평범한 생의 무게가 두렵'고, '누추한 생에 도저히 굴복할 수가 없'는 사람 같다. 


태인은 이나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운동의 미래도 불확실했다. 소련은 붕괴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물결은 제대로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고, 97년 대선을 앞 둔 운동권 진영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비합법 전위정당에 의문을 품는 자들은 합법정당을 통한 선거투쟁을 부르짖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은 후배를 책임질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실상 전향을 의미하는 복학을 권하기도 했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노동으로 혹사하며 세월을 견뎌내기도 했다.


이나가 태인의 두번째 아이를 밴 뒤 입덧이 시작되자 <문창문화>에 사표를 낸다. 매일같이 병원에 가야 하리라 다짐을 거듭하다 마침내 산부인과에 간 날, 이나는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때마침 이나를 발견한 정서현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정서현은 자신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노라고 거듭 말한다. 심지어 아이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이나의 마음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간 이나가 하혈 끝에 유산을 하고, 또다시 정서현의 도움으로 몸조리를 하게 된다. 이나는 정서현이 거듭 고백하는 사랑의 말들에 진심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한편, 태인은 불확실한 전망과 이나에 대한 그리움에 유정수와의 관계를 매듭지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후배 상기의 인쇄소에 정수를 떠맡기다시피 보내고 이나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회사와 집 어디에도 이나의 흔적이 없다. 초조해하는 태인에게 정수는 거듭 애정을 갈구하고, 태인은 그럴수록 정수를 모질게 대한다. 몇 번이나 편지가 태인에게 배달됐지만 태인은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수가 자립해서 자신을 잘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옷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간 태인은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고 만다. 정수가 약을 먹고 식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자살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달된 편지에서 정수는 자신이 흩어져 버린 유리구슬 같았다고, 태인을 사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황소 고집만 부려서 미안했다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그 편지는 정수의 유서였다. 정수는 태인에게 미안해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태인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폐인이 되고 만다. 


이나와 정서현이 별장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정서현의 바람대로 결혼이라든가, 동거의 형태로 발전되지 않는다. 이나는 자신의 몸을 '허락'하고, 그 연장선에서 자신을 위치짓는 따위의 관계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한다. 옛친구 명혜가 있는 시골로 가서 낮에는 마네킹에게 화장 따위를 시켜주는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는 자신의 내부에서 차고 넘치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쓸 것이었다.


------


90년대 중반 후일담 소설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가장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어둠의 길로 내달려 절망하던 그 시절이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몇 십년이나 지나버린 것처럼, 전혀 새로운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잘도 떠들어댔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잽싸게 탈출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도덕적이지 않았다고, 그들이 악마와 싸우다 악마를 닮아버렸다고, 그래서 현명한 '나'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노라고 왜장쳤다. 

공지영 같은 작가들이 그런 낯부끄런 소설을 잘도 써댔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도 않았던 파렴치한 자들은 함께 기뻐하고 춤을 췄다.  마치 '후일담 소설'의 결과론적 태도가 불의한 시대에 대한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전경린의 이 작품도 굳이 분류하자면 후일담 소설이겠으나, 공지영 따위의 작가가 써낸 잡문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문장에서는 치열한 고통과 아픔이 느껴진다. 

전경린은 패배한 자, 실패한 자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리고 왜 젊디 젊은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지고, 깨어져야만 했는지 아프게 아프게 적고 있다. 작가의 창작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좋은 작품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314086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계곡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찰을 살해한 뒤 에드가 엘런 포의 시구를 남겨두어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연쇄살인마. 전작 <시인>에서 기자 잭 매커보이의 끈질긴 추격 끝에 드러난 그의 정체는 FBI 팀장 로버트 배커스였다. 그가 레이철 월링 요원의 총에 맞아 계곡으로 떨어지면서 사건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로부터 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레이철 월링은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시골 한직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후배 셰리 데이 요원의 전화를 받는데, GPS 하나가 콴티코에 배달되었고 기계가 지정하는 장소인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체만 4구이며 추가로 발굴중이라는 말도. 살해방법과 매장방법, 그리고 GPS에 남겨진 메시지 'Hello Rachel'. '시인'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LA 경찰에서 은퇴한 뒤 탐정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해리 보슈 역시 얼마 전 사망한 동료 테리 매컬렙의 미망인의 전화를 받는다. 테리 매컬렙 역시 '시인'과 관련 있는 프로파일러였는데, 은퇴 후 보트 용선계약으로 먹고 살았다.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심장이식 환자인 그가 반드시 복용해야 할 약들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테리 매컬렙의 보트에 승선했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수상스러운 인물과 사막을 나타내는 지도가 발견되자 해리는 행동에 나선다. 


------


최악의 연쇄살인마를 지옥에서 소환했지만, 귀기 서린 악마가 아니라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꾼 잡범이 나타나고 말았다. FBI와 경찰의 이종교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구성도 정교하지 못하다. 

마이클 코넬리 필생의 역작 <시인>, 그리고 그가 스스로 써낸 아류작 <시인의 계곡>. 괜히 읽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247473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적
박정규 지음 / 문이당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이것저것 막 걸터듬으면서 전개된다. 간략히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주인공 정혁이 IMF로 명예퇴직을 하고 실업자가 된다. 정혁의 아내는 병사했고 슬하에 남매가 있으니 생계가 막막해야 정상이겠으나, 작가는 부잣집 처가를 배치하여 곤란을 해소해준다. 

비록 직업은 없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없으니 주인공으로서 뭐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마침 장인이 뜬금없이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다. 그가 서울역 노숙자가 된 것도 아닐진데, 정혁은 추레한 모습으로 서울역과 용산역을 돌며 IMF로 인해 피폐해진 민중의 삶을 관찰한다. 

장인을 찾지는 못했지만, 장인의 서랍을 뒤지던 정혁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이라는 육필원고를 찾아낸다. (이 원고 내용이 또 가히 대하소설급이다)


뭔가 밋밋하게 돌아가는 소설 스토리가 맘에 안 드는지 작가는 정혁을 까페 트레네라는 곳으로 이동시켜 지연이라는 삼십대 후반의 미모가 출중한 마담과 조우시킨다. 지연은 두 번 만난 정혁에게 몸이 달아 집으로 유인하여 곧 교접을 시도하지만 정혁의 신체가 정신과 따로 놀아 교접은 실패하고, 여기서 지연의 기구한 스토리가 한바탕 펼쳐진다.

지연이랑 예전에 프랑스에서 짝짜꿍 하던 남친이 간첩 조작 비슷한 것으로 비극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지연의 아버지가 안기부 간부! 아버지는 지연의 남친이 그렇게 된 것에 충격을 받아 폐인으로 생을 마감!


지연과의 밋밋한 러브라인에 양념을 치는 의미로 처제 혜인도 정혁을 사랑한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현실화 시킨 작가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 떡밥을 풀어헤친다.

알고보니 정혁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일제 앞잡이로 오인받았고, 아버지는 정치깡패 노릇을 하다 뒤늦게 아버지의 유지를 알고 참회하다 폐인이 되어버리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혁의 장인이 구명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자 위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 


참고로 장인은 행려병자 행색으로 발견되어 끝내 죽는데 유서에 따르면 자신의 재산 대부분은(수십억대임) 사회에 환원! 따를 필요는 없지만 장모와 딸 혜인, 사위 정혁은 흔쾌이 동의! 

  

갑자기 지연이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게되어 독일로 떠나버리고, 거기까지 지연을 찾아간 정혁과 지연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뒤 동반귀국하지만.... 공항에 마중나온 혜인을 본 눈치빠른 지연은 그길로 입산하여 비구니가 되고! (뭐?) 정혁도 시골가서 농사나 짓겠다며 막노동판을 전전, 체력을 키우며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적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시대에 대한 작가의 부채의식은 진지한 것으로 보인다. 작중 정혁이 지연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억에 남아 적어 놓는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들은 자신의 비굴함을 잊기 위해 일생동안 자책의 곡괭이질을 해대며, 그 고통을 느낀 만큼 자신이 면죄되었다고 믿고 싶어 하거나 혹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오류를 저지르게 마련이지요. 

 

책날개에 수록된 정보에 따르면 작가 박정규는 1946년 서울 출생으로 1991년 <문학정신>에 단편소설 <니느웨로 가는 길>로 등단하였고, 소설집 <로암미들의 겨울>, 장편소설 <흔적>이 있다.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237613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전직 마을금고 이사장 최문술이 살해당한다. 칠십을 넘긴 지 한참 되는 나이였지만 아직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했던 최문술은 일층 거실 소파에서 범인의 칼에 가슴과 배를 찔린 뒤 피를 흘리며 안방으로 도망을 치다가 뒤따라온 범인에게 끝내 목이 졸려 죽었다. 죽은 최문술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의 아내 성경애였다. 성경에는 삼 일 전 이십여 리 떨어진 천진암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이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무렵, 아래층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위층은 어두컴컴했다.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평소와 달리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남편 최문술은 의심이 많은데다 여간 조심스러운 늙은이가 아니였기 때문에 문단속을 허술히 할 리 없었기에 그녀는 의아한 생각을 했다. 잠시 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핏자국을 발견하고, 마침내 최문술의 참혹한 시체를 발견한 성경애는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대문 밖으로 달려나간다. 


최문술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이며 순전히 돈만 아는 노랑이 중의 노랑이었다. 토목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였는데 불법 행위를 밥먹듯 했지만 처벌은 한번도 받지 않았다. 육이오 때 참전해서 빨갱이를 여럿 작살냈다고 외장치는 그는 박정희 정권 때 반공연맹 지부장까지 맡았던 터라 인근에서는 물론이고 군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자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술자리에서 다툼 끝에 경찰서장의 뺨을 올려붙이기 까지 했으나 아무 탈이 없을 정도였다.


최문술의 전처는 두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병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찍 상처한 성경애를 다니던 절의 비구니 덕혜가 눈여겨 보았다가 최문술에게 소개하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그게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최문술은 재혼한 뒤 자기 마누라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을 하였고, 그러다 보니 자연 전처 소생인 위의 두 아들과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장남 동연과는 거의 원수가 되다 시피 했다. 


사건 조사에 들어간 장국진 반장은 최문술의 주변인을 중심으로 원한관계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최문술의 장남 최동연이 사흘 전에 집에 와서 돈을 요구했었다는 것을 듣는다. 게다가 사건 당일 날 그가 집에서 허위허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슈퍼 아줌마의 진술까지 겹쳐지자 최동연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최동연의 신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보되고, 그는 체념한 태도로 조사를 받으며 범행 일체를 자백한다. 최문술의 시신은 부검이 끝나자 곧 가족들에게 인계된다. 


둘째 성연이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늦깍이 대학생이 되어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성연은 동연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연은 면회를 온 성연에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하면서도 묘한 말을 건낸다. 성연은 형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 하지만 왜 그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을 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길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아버지 최문술이 범한 어린 식모 연옥. 큰아들 동연 역시 달뜬 사춘기 욕정에 이끌려 연옥과 관계 맺는다. 연옥의 배가 불러오고, 최문술은 그녀를 바보 기덕에게 강제로 시집보내 범죄의 흔적을 지운다. 기덕은 자신의 아내가 최문술의 애를 밴 채 시집왔다며 떠들어대다 의문사를 당한다.  

20년이 흘러 연옥이 낳은 아들 수길이 자신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 모를 최문술을 살해하고, 그 현장을 동연이 목격한다. 자신의 아들일수도, 혹은 동생일수도 있는 수길의 범행을 본 동연은 동생 성연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공교롭게도 또 다른 그림자를 봤어. 아니, 우리들의의 그림자지. 분노에 젖은 채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그림자...... 그래, 우리들의 운명...... 우리들의 죄 덩어리...... 우리들의 형제...... 우리들의 피...... 말이야. 그것은 지옥에서 걸어나온 그림자였지. 지옥에서 걸어나온 그림자 말이야. 후후, 아버지와 난 그것으로 끝이었지.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야.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고 있어. 돌아가게 내버려둬. 알겠니? 원래대로 말이야!" 

 

1984년 <창작과 비평>에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며 등단한 김영현은 아픈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여운이 나는 작품들을 써 온 작가이다. 그런 그가, 추리소설 형식의 <낯선 사람들>을 2007년 발표했다. 박완서가 발문에 "지금까지 진지하게 모색해온 자기 세계의 고독감을 못 이기고 독자에 영합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아 미심쩍어 보였"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그러한한 의구심을 느끼며 읽는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은 곧 해소가 되는데, 사람과 종교 그리고 역사에 관한 작가 특유의 진지한 성찰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현의 소설답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제정 말기 러시아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212689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마리코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혹시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엄마의 애정에는 언젠가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들은 마리코가 엄마와 닮지 않았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래서 마리코는 어쩌면 자신이 엄마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호적을 떼어보기로 한다. 

호적의 부모란에는 아버지 우지이에 기요시, 어머니 시즈에가 기재되어 있었고, 본인은 장녀로 기록되어 있었다. 적어도 입양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마리코가 태어나던 때의 일들을 생생하게 이야기 했기 때문에 의심은 점점 옅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웠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기숙학교로 떠밀리다시피 입학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마리코가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사과차를 마셨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뒤 깨어난 마리코는 집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아버지는 마리코를 피신시켰지만 엄마는 구해내지 못했다. 소방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엄마가 방문을 잠근 채 가스밸브를 열어두어 화재가 난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자살한 것이다.


후바타는 아마추어 밴드활동을 하다가 운좋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후바타의 엄마는 간호사였고, 아버지는 누군지 몰랐다. 엄마는 후바타가 대학에 가서 밴드활동하는 것에 크게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밴드 남자 애들과 함부로 연애하지 말 것과, 프로가 되거나 텔레비전에 나가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후바타는 고민 끝에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고백하고, 엄마는 한동한 불같이 화를 내다가 결국 후바타의 노래가 그럭저럭 좋았다며 쓸쓸해 한다. 

며칠이 지난 뒤 집에 낯선 남자가 다녀간다. 엄마는 남자가 예전에 대학에서 신세를 졌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후바타의 엄마는 뺑소니차에 치여 사망한다. 


마리코와 후바타는 각자 엄마의 석연찮은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고 생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와 마주친다. 그리고 둘을 닮은, 또 한 명의 존재...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 존재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루이비통의 이미테이션이 싸구려로 팔리듯, 아무리 귀중한 문서라도 복사본은 간단하게 파기되듯, 그리고 위조지폐가 화폐로 통용될 수 없듯이 내 존재에도 이렇다 할 가치가 없는게 아닐까?

 

------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복제해 딸을 만드는 과학자,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아버지도 없는 딸을 자궁에서 키워낸 간호사. 그리고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영원히 누리고자 이러한 연구를 지원하는 중견 정치인. 엽기적인 욕망이 과학적 성과와 만나 비극을 양산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중 신기술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변신>의 경우도 다소 조악했고, <레몬> 역시 문제의식과 미스터리 본연의 재미가 적절히 조합되지 못해 어설프다. 다 읽고 나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194449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