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폐쇄적인 산악 마을에서 애나 루 라는 10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실종된다. 소녀의 부모는 지역 종교 공동체 내에서 제한적인 교우관계만 맺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원한 관계가 없었고, 애나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애나 루의 부모와 시골마을 주민들은 이 사건이 단순실종 사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스타형사 포겔은 사건에 투입되자 마자 매스컴을 불러 인터뷰를 자청한다. 단순실종이 아니라 납치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 주장함으로써 대대적인 예산 증액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최신장비와 인력을 확보한 포겔은 능숙한 솜씨로 소녀 주변을 훑기 시작하고, 그 결과 소녀를 스토킹하던 마티아의 존재를 알게된다. 조사 결과 마티아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지만, 마티아가 스토킹하면서 찍어댄 동영상은 전혀 다른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낡은 흰색SUV를 타고 다니는 교사 마티니였다.

포겔은 쾌재를 불렀다. 매스컴을 통해 사건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각색하는데 성공한데다, 확실한 용의자 마티니까지 확보했으니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에서 범한 과오를 덮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실 포겔은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 때 증거를 조작했었다. 과자 제조일자가 피의자가 수감된 이후라는 점이 들통나 조작이 걸렸을 때 부하직원을 희생시켜 빠져나오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때 사건을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고지식한 검사가 영장발부를 거부한다는데 있었다. 포겔은 또 다시 증거조작 유혹에 빠져든다.

애나 루의 가방에서 발견된 마티니의 혈흔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체포영장이 발부된다. 매스컴은 이미 언론재판을 통해 마티니를 범인으로 확정짓고 있었고, 마티니의 가족조차 그를 떠난 상태였다. 그로기상태에 몰린 마티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은퇴한 기자가 마티니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공개한다. 빨간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소녀가 주기적으로 실종되던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룬 홈페이지. 그리고 동영상.

매스컴이 쳐 놓은 덫에 포겔이 걸려들고, 마티니는 누명을 벗는다.


사건이 벌어진 지 62일 째 되던 날, 62세의 정신과 전문의 플로레스가 한밤중에 병원으로 불려나가 포겔 형사와 면담하게 된다. 포겔 형사는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차에 혼자 타고 있었으며, 다친 곳도 없다고 주장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의사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그의 옷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도나토 카리시는 1973년생으로 이탈리아 남부 마르티나프랑카 출신이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이고 '폴리뇨의 살인마'라 불리는 연쇄살인범 루이지 키아티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한다. 1999년부터 10년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9년 자신이 실제 참여한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속삭이는 자>로 데뷔, 이탈리아에서만 250만부를 팔아치웠다.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으로 600만부 이상 팔렸고, 후속작들도 속속 영화화되는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이다.


<안개 속 소녀>는 자극적인 것만 쫓는 추악한 매스컴과 부패한 경찰이 만나 한 사람의 시민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서술을 쫓아가는 독자의 긴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꽤나 능수능란하다. 또한 반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마냥 후한 점수를 주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독자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이다.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하고, 특정 인물과 공감하고 싶어한다. 물론, 작품과 독자의 거리를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작가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독자는 작품 속 누군가와 시선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개 속 소녀>는 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희생자 애나 루는 처음부터 희미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주인공 격인 포겔의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마티니 역시 촉이 좋은 독자라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못할 것이며, 매스컴과 종교공동체와 정신과 의사, 그리고 이웃들 모두가 악당이거나 그에 준한다.

결국 독자는 긴장감을 갖고 책을 읽긴 하지만, 관찰자도 몰입자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작가가 마련한 결론까지 함께 가게 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467635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문하는 요리사
뤽 랑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스트레인지웨이즈 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죄수들은 2인용 감방에서 네다섯명이 함께 지냈고,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 뿐이었고, 음식은 꿀꿀이죽과 진배 없었다. 대처가 집권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죄수들은 담벼락 밖으로 벽돌과 나사못 따위들을 던지며 저항했고, 교도소 주변에 위치한 집들의 정원과 지붕이 파손됐다. 피해를 입은 집 중에는 스트레인지웨이즈 교도소의 요리사 헨리 블레인의 집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교도소를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점을 선전해 기자들에게 10파운드씩 받고 출입을 허가해주고 있었다. 

사실 헨리 블레인은 교도소에 오기 전 배에서 요리를 했다. 당시 그는 농축 산화마그네슘으로 음식에 장난질을 쳐 선원들의 뱃속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교도소에 취직을 했으니, 이번엔 죄수들의 위장을 괴롭히는 데 골몰했을 것은 뻔한 이치다. 어쩌면 폭동의 원인은 헨리 블레인의 음식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죄수들이 파손된 이웃들의 집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자신들이 만든 종이꽃들을 담 밖으로 뿌리면서도, '고문하는 요리사 헨리 블레인을 위한 꽃은 아니다' 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자 헨리 블레인이야 말로 이번 폭동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

헨리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신은 요리를 했을 뿐이라고, 도저히 못 먹을 저급한 식재료를 공급한 것은 윗선의 책임이라고 항변한다. 또한, 화장실 가기 귀찮아 식당 구석 아무데나 오줌을 갈긴 거지같은 직원을 채용한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타자 분위기가 반전된다. 교도행정의 부조리와 불쌍한 죄수들의 처지가 부각되면서 국민들의 동정론이 일게 된 것이다. 죄수들 역시 항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유쾌한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여론은 더욱 죄수들 쪽으로 기울었다. 헨리는 얼떨결에 죄수들을 후원하는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된다.

아무도 헨리가 두 명의 부인과 한 명의 정부, 그리고 목격자 한 명을 살해해 자기집 정원에다 파묻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최근 사귄 <앙글리칸 트리뷴>의 노처녀 기자 루이즈 베이커가 숫처녀 딱지를 떼자마자 색정광으로 변해 목을 졸라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자 죽여버렸다는 사실도.


------


뤽 랑은 1956년 파리 출생으로 철학을 전공한 뒤 퐁투아즈의 세르즈공립미술학교에서 미학과 예술사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32세 때 첫 작품 <수평선으로의 여행(88)>을 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추리소설 <리버풀 밀물(91)>, <분노(95)>를 차례로 펴내며 명성을 얻었다.

<고문하는 요리사>는 1998년 작품으로 원제는 <천육백 개의 배(腹)>이다. 1990년 4월 영국 맨체스터의 스트레인지웨이즈에서 일어났던 교도소 폭동사건을 소재로 한 블랙유머인데, 대처가 펼친 신자유주의가 공적 영역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1998년 '고등학생들이 뽑은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는데, 논쟁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 같다. 얼핏 마틴 에이미스의 유머가 연상되는데, 마틴 에이미스 보다는 어둡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437574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자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는 '나'(은미)에게 소꼽친구 민이가 말했다. '성악 콩쿠루에서 구성지게 트로트를 부르는 격'으로 작문시험을 치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어쨌든 이번에도 '나'는 기자 시험에 떨어졌다. 정수리는 원형 탈모로 횡해졌고,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갈비집에 나와서 일이나 배우라고 왜장치는 걸 뒤로하고, '나'는 죽기 위해 수면제를 사모으기 시작한다. 200알을 모은 '내'가 결행을 앞둔 시점에, 할머니의 특명이 떨어진다.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갔다 오라는 것. 


고모는 임신 육개월이 될 때까지 가족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 아버지 이름을 밝히는 걸 거부한 뒤 낳은 아이가 찬이다. 얼마 뒤 재미교포 로저를 따라 미국에 간 고모는 찬이가 다섯 살 되던 해 귀국해 찬이를 맡기고 다시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 뒤로 고모와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할머니는 그 고모가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비행사로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달 찬이 몫의 돈을 보내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자살 소동은 얼렁뚱땅 정리되고 '나'는 민이와 미국갈 준비를 한다. 민이는 어렸을 적부터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었고, 현재는 성전환수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의 가족은 민이가 그쪽 성향임을 알았기에 같이 여행가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주소만 달랑 들고 렌터카를 빌려 고모가 사는 동네로 간 '나'와 민이는 레이첼이라는 부잣집 아줌마를 만나게 된다. 편지 속에 나온 룸메이트였다. 레이첼의 안내로 고모를 만나 이야기꽃을 피운 '우리'는 며칠 뒤 고모가 일하는 NASA에 함께 간다. 고모는 NASA 건물의 한켠에서 스낵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고모의 새 남자친구 조엘도 소개를 받는다. 조엘은 트렁크에 슬리퍼를 싣고 다니면서 해변에서 장사를 하는 욕심 없는 남자였다. 고모와 조엘, 그리고 레이첼 모두 저간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구비길을 돌아 현재의 자신과 대면해 충실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돌아온 '나'는 미국에서 주워온 돌을 월석이라며 할아버지에게 건낸 뒤 고모가 NASA에서 우주비행사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전해준다. 찬이는 고모의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내며 괴로워했지만 차츰 화해모드로 돌아서는 눈치다. 민이는 집을 나와 성전환수술 상담을 받은 뒤 나에게 전화해서 작가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


명랑한 거짓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포용, 새로운 출발을 향한 벅찬 기대. 그 모든 것들이 적절히 조합되어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가득한 소설이다. 술술 읽히고, 술술 잊힌다. 삶이 저렇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408772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가 된 엘레나
양유정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지평리>

 

첸은 펑펑 내리는 눈을 뚫고 이틀을 꼬박 걸었다. 비처럼 쏟아지던 네이팜탄과 새카맣게 타버린 동료의 시체 더미만 간간히 기억날 뿐, 정신은 멍한 상태다.

첸은 38선을 넘기 전 미군에게서 노획한 M-20을 떠맡았고, 그 무기가 이유가 되어 자살특공대에 차출 된다. 랴오, 유엔, 뤄, 그리고 첸, 네 명이었다. 

상관은 포로 한 명과 박격포를 건네주며 미군을 지체시키라고 했다. 훈장과 영웅칭호를 약속하며.

넷은 머리를 짜내 미군 포로를 길 한 가운에 묶어두고 전차부대의 선두가 속도를 줄이면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첸은 수십 대의 탱크를 파괴시키고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계획은 자살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군 전차부대가 나타나자 넷은 M-20과 박격포로 공격을 퍼붓는다. 정신없는 포성과 총성이 오간 뒤, 랴오가 미친듯이 탱크로 돌격한다. 

첸은 살기위해 도망친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것을 첸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9월, 시에라리온>

 

나, 마르셀 라시튀드는 <세계>라는 프랑스 일간지 기자다. 나는 1988년 9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내전의 나라 시에라리온으로 이동한다. 그곳의 특파원 피에르가 아파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마중나온 미셸 그리에는 파충류를 연구하는 동물학자로 캄비아 도마뱀을 연구한다고 했다. 미셸은 캄비아 도마뱀과 관련한 흥미로운 목격담을 들려주는데, 어느 날 도마뱀 오백 마리가 대열을 지은 뒤 패를 갈라 싸우더니 백마리 정도로 줄어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먹이도 풍부했고 구역 싸움도 아니었다. 미셸은 도마뱀의 싸움이 마치 시에라리온의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 같았다고 했다.

미셸은 또 말했다. 피에르가 펜뎀부의 대량 학살 사건을 목숨 목숨 걸고 취재했지만, 단 여섯 줄 짜리 일 단 기사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서 누가 금메달을 따느냐에 더 관심이 많을 거라고 했다.

지사에 가보니 피에르는 건강해 보였다. 피에르 역시 올림픽엔 스물 다섯 명의 기자가 파견되지만, 이곳에서는 기자 하나 달랑 보냈다며 투덜댔다. 기자가 사망해야 오히려 특종이 될 것이라면서.

사실 피에르는 장 폴렝이라는 부사장 아들 때문에 시에라리온으로 오게 된 것이었고, 이질을 핑계로 퇴사하고 싶어했다. 

며칠 뒤 내전이 격화되어 본사가 폭격 당하고, 피에르와 미셸이 사망한다. 나는 '본사 기자 피에르 드 수삐흐, 내전의 와중에서 순직'이라는 이름의 기사를 작성한다. 사람들은 하루 동안 올림픽 대신 아프리카의 이상한 나라에서 프랑스제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동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언제나 그랬듯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팔미도 등대>

 

사람들은 백씨의 아버지가 일제 앞잡이라고 했다. 쌀과 광물을 실은 배가 인천항엣에서 무사히 일본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어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 백씨도 등대지기였다.

어느 날 백씨 집으로 두 명의 삼십 대 남자가 찾아와 성조기를 꺼내 보이며 자신들이 미국 이십사 군단 켈로부대 소속 정보장교라고 말한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백씨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등대를 비춰달라고 부탁한다.

백씨는 종민을 설득해 거사를 하려 하지만 정작 종민은 거부한다. 

'난 형님 아버지처럼 일본 배배를 비추지도 안않을 거고, 형님처럼 미국 배를 비추지도 않을 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 종민에게 백씨는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종민은 '난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남쪽도 북쪽도 아닙니다' 라는 무뚝뚝한 말을 남긴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2003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정보통신부는 180만 장의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에 그려진 등대는 인천 앞바다 팔미도 섬의 등대이다.

  

<Djibouti>

 

Jun은 아프리카 동부의 지부티Djibouti의 이름을 네 번 들었다. 첫번째 들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남자마라톤 동메달 아메드 살라 라는 선수의 출신국가를 들었을 때였다. 두번째는 앙드레 말로의 장편소설 <왕도>에서였고, 세번째는 영국 BBC에서 만든 <인류의 기원>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였다.

마지막은 일주일 전, 친구 J가 보낸 편지에서였다. J는 50만 달러가 필요하니 지부티의 쉐라톤 호텔로 전화하라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에 썼다. J는 살인 용의자로 도주 중이었다.

나는 잘 나가는 회사 때려치고 지부티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비행기 엔진이 폭발하고 예멘에 불시착한다. 선착장에서 배를 얻어 타고 지부티로 간 뒤 닛산 자동차를 구입해 호텔로 간 나는 J를 살해한다. 아무도 Jun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살해 뒤 Jun은 장애물이 없는 도로를 뜻 대로 달렸다. 누구도 간섭할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굴>

 

불도저 기사가 터 파기를 하다 군인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한다. 대구시청 무문화재워원회, 건축과장, 국방부 정훈기획관실, 문화재청, 기자 등이 몰려온다. 발견된 시체가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일본군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부장은 나에게 보고서 작성 임무를 시달한 뒤 소장과 술을 푸러 가버린다. 군복에서 나온 사진을 토대로 그들의 신분을 추정하고, 도서관에서 관련 도서를 뒤져 보고서를 작성하려 애쓴다. 그 와중에 일본 후지TV 기자들이 냄새를 맡아 사건은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 저녁은 딸 지희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1월 1일>

 

4천 년 전 북서쪽 바다에 오십명 가량의 민초가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100년에 한 번 용이 나타났는데, 무명씨가 용의 먹이가 되고 만다. 무명씨의 아내도 슬픔을 못 이겨 바다로 걸어들어가 목숨을 던지고 만다. 


오슬로발 비행기에서 소영씨는 <1월 1일>이라는 이름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다. 스물아홉이고, 2천년에 서른이 된다. 2년 전 결혼 했지만 최근 권태를 느껴 훌쩍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때 비행기에 소동이 일어난다. 에어 프랑스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털보의 손에 끌려 나왔다. 털보는 자신이 제이미라고 소개한 뒤 수류탄을 보여주며 비행기를 잭슨 폴록과 같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잠시 감상에 빠져 이틀 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압생트라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양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여자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털보는 말하더니, 이내 그런 여자가 왜 자기 따위와 말이나 섞겠냐고 조소한다. 소영씨는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털보가 폭발 버튼을 누른다. 


다시 북서쪽 바다 마을로 돌아가서 곽씨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마을 사람들은 무명 씨 아내 몸을 잘라 먹은 뒤 애도하며 액막음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평리 가는 길>


크롬베즈 대령이 출발을 명령한 뒤 전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L중대의 베렛 대위는 부원들에게 탱크에 올라타라고 지시한다. 탱크 위에 올라 탄 자신의 병사들은 중공군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전차부대는 저지선을 돌파할 것이다.

얼마 뒤 중공군의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부대원들이 하나 둘 총에 맞아 전차에서 떨어진다. 베렛 대위도 총에 맞아 전차 위에 눕는다. 한참을 하늘을 보고 있으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수많은 눈송이들과 함께 흐린 하늘 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희생양>

 

1. 라카엘랑라와 네그로스의 축제

 

사람을 가축처럼 키우는 원시부족민이 있었다. 추장이 소녀와 성행위를 해서 희생양 낳으면 사육했다. 그들은 희생양의 사지를 절단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단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악을 제거함으로써 부족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네그로스 섬 원주민들은 일 년에 단 한 명의 희생양을 낸다. 그에 반해 유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희생양이 필요하다.


2. 존의 희망과 절망

 

모파상 같은 위대한 작가가 되는게 꿈이던 존이 참전한다. 그러다 아군끼리 총질을 해서 많은 수의 병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섯 명의 희생양을 고르는데 존이 거기에 끼게 된다. 존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뿐이다. 조국이 무엇이고 애국이 다 무어란 말이냐' 라고 수기에 적는다.


3. 마녀가 된 엘레나

 

동생 미구엘이 절벽에 오르다 떨어져 엘레나와 부딪힌다.  이 사고로 엘레나의 이마에 상처가 생기는데, 이 사건 뒤로 그녀의 외모가 추하게 변해버린다. 엘레나는 시집가는 것도 포기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살아간다. 산티아고의 대지진이 나자 사람들은 엘레나를 마녀로 몰아 화형 시킨다.


------


양유정은 1971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경제학과 졸업 후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마녀가 된 엘레나>는 작가의 첫 창작집인데, 신인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소재를 다루는 기법이 가볍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가는 힘도 상당하다.


작가는 국가(또는 전체)의 욕망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하지 못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소설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개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목숨이다. 그런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극한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욕망, 가치관, 명분, 도덕 등이 모두 합치 된다 해도 일말의 주저함 없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우연이나 상황논리가 내 목숨을 요구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우물쭈물 하거나 그럴싸한 말들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종종 개인의 목숨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목숨값으로 영웅 칭호니, 진실이니, 희생이니 하는 따위의 공허한 말들을 내놓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374180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트램 호텔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5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 중심가에는 택시 운전사들 말고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골짜기 같은 장소들이 꽤 여럿 있다. 하이드 파크에서부터 뻗은 조촐한 길거리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돈 다음 오른쪽으로 한두 번인가 더 돌아 들어가면 어느 한적한 길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그 길거리 오른쪽에 있는 것이 버트램 호텔이다. 

전쟁 중에도 버트램 호텔은 용케 포격을 피해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고, 1955년경에는 약간의 보수를 거쳐 1939년 때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즉, 위엄이 있으면서도 수수하고 또 은근한 가운데 호화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호텔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버트램 호텔의 모습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 호텔은 오랜 세월 동안 고위 성직자들이며,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 미망인들 같은 단골손님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아왔다.


이 버트램 호텔에 모험가 세지윅 부인이 체류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이자 막대한 부를 곧 상속받게 될 엘바이러가 나타난다. 한편, 같은 호텔에 묵던 건망증 심한 페니파더 신부가 회의 참석 일정을 헤깔려 엉뚱한 날에 여행을 떠난 직후 실종되는데... 

얼마 뒤 안개가 낀 어느 날 괴한이 엘바이러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빗겨간 총탄에 맞은 마이클 고먼이라는 호텔 수위가 사망하고 만다.

마이클 고먼은 세지윅 부인이 기겁할 만한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 한데 그 총탄으로 입을 다물게 되고, 세지윅 부인과 딸 엘바이러 모두에게 집적대는 자동차 경주선수 말리노스키가 용의자로 의심 받는다. 


평생 세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을 떠나보지 않았던 마플 양이 하필이면 버트램 호텔에 묵게 되는 바람에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다. 온 세상이 진보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장소인 버트램 호텔은 진정 '전통과 품격'을 지키기 위해 이윤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포기한 장소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전통과 품격'이 필요한 장소일까?


------


세지윅은 범죄단의 수괴로 사회적 저명인사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들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범죄를 저질러 알리바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페니파더 신부가 날짜를 착각해서 호텔방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범죄단은 혼란에 빠지고, 어쩔 수 없이 페니파더 신부를 기절시켜 실종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질적인 단점이 드러나는데, '마이클 고먼과 세지윅이 사실은 과거에 부부였다' 라는, 작가만 알고 있던 사실을 트릭으로 사용한 점이다. 기껏 제공된 단서는 마이클 고먼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고, 세지윅이 질색을 했다는 점 정도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지윅이 고먼과 이혼하지 않은 채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중혼이 되고, 따라서 딸 엘바이러가 받게 될 막대한 유산 역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중혼에 의한 결혼은 무효이므로 엘바이러는 정당한 상속자가 되지 못함)

 

여성의 사회 참여가 한층 확대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작가가 여성 모험가를 범죄단 두목으로 삼아 쓴 <버트램 호텔텔에서 At Bertram's Hotel, 1965>는 그녀의 72번째 추리소설이고 56번째 장편으로 비교적 후기작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355948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