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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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보이를 읽으면서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을 떠올렸다. <시네마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설정과 <리버 보이>에서의 할아버지, 손녀, 그리고 죽음은 그다지 다른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차이가 있길래 <시네마 천국>에 대한 내 감정은 한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인 반면에 팀보울러의 <리버보이>에 대해서는 지루함과 진부함이 전부였을까 생각해본다.

<시네마 천국>의 미덕은 감정의 절제이다. 성인이 된 토토가 알프레도를 회상하면서 단 한번도 '나는 알프레도가 그립다'는 감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다. 회상 속에서 알프레도와 토토가 그 마을에서 살아가면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은 저절로 차오르고, 마지막으로  토토가 키스씬들을 편집한 필름을 보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게 된다.

반면 <리버 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중 화자는 슬프고, 괴롭고, 안타깝고 도무지 절제란 것을 모른다. 작중 화자가 이미 슬프니 내가 거기 껴들 여지가 있나! 군중들은 아직 무슨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준비도 안된 상태인데 연설하는 사람이 이미 흥분의 도가 지나쳐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는 꼴이다. 게다가 서양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죽음과 삶을 영혼의 영역으로 이미 문화적으로 체득하고 있을 동양권 독자들에게 할아버지의 어린시절 분신인 리버보이의 출현은 그다지 신선하지도, 참신하지도 않다. 강물의 흐름을 인생에 비유한 그 진부함이란!

결국 이 작품은 노인과 어린아이의 우정이라는 점에서의 설득력도 없고-사실 노인과 어린아이의 우정이 가능한 경우란 극히 드물며, 드물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대신 설득력 있는 전개가 반드시 전재되어야 할 것이다-, 리버보이라는 생뚱맞은 할아버지의 어릴적 분신도 판타지적 상상력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만약 단편소설의 분량으로 개작한다면 청소년용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졸렬했다. 도무지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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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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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을 산다는 것이 착각으로 한강의 소설을 샀다. <성탄특선>의 유쾌함을 기대하고 책을 넘겨 작가의 사진을 본 순간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작가를 착각한 것이다. 나는 작가의 얼굴을 보고 작품의 내용을 넘겨 짚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얼굴을 보고 유쾌한 소설이길 포기 하고 읽었으며, 읽고 난 이후의 느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것은 바로 '왜 나는 여성작가를 싫어하는가?' 이다. 남성, 여성의 구분 자체가 이미 비난의 집중포화를 감수한 구분인데다가, 여성작가라니! 그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이며 가부장적 이분법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시원스럽게 내놓지 못하는가.

편견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본다. 편견이란 확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내 성씨인 최씨와 관련된 속담을 들어보자. <산 김가 셋이 죽은 최가 하나를 못 당한다> 라던가 <최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 라는 속담이 있다. 분명 최씨 성을 가진 인물들 중 깐깐하고 고집 센 사람들을 경험한 누군가가 그 강렬한 인상을 주변사람들과 공유했을 것이며, 그런 공유가 공감으로 이어져 속담의 지위까지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편견이다. 나로 말하자면 최씨이지만 고집이 옹고집도 아니요 깐깐한 편이기 보단 우유부단한 경우가 꽤 있다.

미쉘 푸코는 광인에 대해 너그러운 견해를 내놓지만 나로 말하자면 광인, 속칭 미친사람에 대해 극도로 긴장한다. 대학 시절 옆집에 미친사람이 살았었는데 온 동네를 병을 깨고 돌아다니고, 자기 아들을 수시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강렬한 경험은 나에게 광인에 대해 너그러운 인정은 커녕 극도의 긴장감만을 유발할 뿐이다.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편견이다. 따라서 편견은 경험과 확률이다. 무시하고 넘어갈 <개념상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다시 여성작가라는 모호한 편견으로 돌아와보면, 내 편견은 이렇다. 여성작가들의 작품 속 주인공의 직업은 대부분 전문직, 프리랜서들이다. 그들은 생계에 큰 곤란을 겪지 않으며, 그런 이유 때문인지(!) 광기에 쉽사리 휩싸인다. 그들의 연애는 폭력적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그들은 서로 일치점을 찾지 못해 결국은 파국을 맞는다.

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으면서 나는 괴로웠다. 작중 인물들은 작가, 조각가, 실내인테리어디자이너 등 범상치 않은(!) 직업을 갖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돌출 행동들이 잇따른다.  각자의 트라우마로 첫번째 여주인공은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으며, 두번째 여주인공은 어릴적 육손으로 놀림을 받다가 수술을 받은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과거를 묻고 살아간다. 남자 주인공 역시 겉다르고 속다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감정의 기형적 성장을 경험하였다.

'왜'라는 질문에 척척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논리겠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적절한 공감을 독자로부터 끌어내지 못하고,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연원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미숙함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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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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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가장 무섭게 본 영화가 기시 유스케 원작의 <검은집>이었다. 그 영화를 볼 당시,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우체국보험심사지급 업무를 일부 담당하고 있었기에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 그런 좋은 인상을 갖고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유리 망치>를 주문하여 읽게 되었는데 무척 실망하게 되었다.

추리소설의 수작들의 공통점은 추리과정의 단서들을 최대한 독자와 공유한다는 점이다. 단서들이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독자는 그 트릭을 파해하지 못하는 반면, 탐정은 그 트릭을 간파할 때 독자는 아차!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반면 치졸한 작품들은 단서를 공유하지도 않고 결말에 가서야 '사실은 이랬었다' 라는 식이 많다.

수작과 졸작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품들이 바로 결말을 향해 정보를 짜맞춰가는 작품이다. 정보를 공유해가다보면 독자가 눈치챌 것이 두렵고, 그러다 보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결말에 가까이 다가갈때마다 정보를 하나씩 까발려 가며 결국은 최종 결론에 이르러서야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역시 '사실은 이랬었다'는 식의 황당함은 덜할 지언정, 진정한 추리소설의 재미를 독자에게 줄 수는 없다. 독자는 기껏해야 스릴러을 읽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시 유스케는 밀실살인을 설정했다. 너무 고전적인만큼 그 트릭 또한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 소재다. 그러다 보니 기시 유스케는 각종 첨단 과학기술을 등장시킨다. 첨단 과학기술과 추리는 상극이다. 인간이 해내고 인간이 밝혀내는 것이 추리의 기본일텐데,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부분을 첨단 과학기술에 의탁하다 보니 당연히 추리의 긴장감이 반감되고 만다. 게다가 밀실살인을 완성시키기 위해 범인의 직업과 살아온 내역까지 구구절절 읊어가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결말에 억지로 짜맞춘 스토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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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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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날 바로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샀다.

선단(先端)공포증에 걸린 야쿠자, 어느날부터인가 캐처를 믿지 못하게 된 공중그네 곡예사, 입스에 걸린 3루수 등, 자신들이 가장 익숙하게 해내던 일들을 어느날부터인가 낯설어져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는 만사 태평한 뚱보 의사로, 환자들과의 첫 남에서 매우 단순한 치료법을 제시하지만, 정작 환자들은 그럴싸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대로 실행 하지 못한다. 그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연휴 3일을 집에서 쉬었는데 쉬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내내 따라다녔다. 실제 한 것은 없는데 말이다.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뒤쳐질 것이라든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든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든가 하는 문구들에 둘러싸여 숨가쁘게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들 역시 저 환자들과 과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의사 이라부 이치로처럼 천진난만하게 풍덩 뛰어들어 그 일을 재미있게 해보는 것,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닐까. 어짜피 우리는 예전에 유행하던 그 무시무시한 광고처럼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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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의 별빛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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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의 60년대를 살아가는 15세 소년의 이야기이다. 수시로 일어나는 쿠데타, 주변인물들의 억울한 체포와 고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학업의 중단 등으로 사춘기 소년은.... 반체제 신문을 제작하게 된다.

의식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 대한 서술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때 우리는 작품에 공감하게 되고 감동을 느낀다. 반면에 기계적 변증법에 의해, 주인공이 어느 순간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 망설임 없이 신념을 위해 나아간다는 식의 서술은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뇌봉>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새마을 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안타깝게도 라픽 샤미의 <한줌의 별빛>에서도 어느 순간 반체제 신문을 제작하고 있는 주인공을 보게 된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이 서술되기는 하나, 정작 주인공의 의식에서의 망설임, 두려움, 주저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책은 주인공의 일기형식인데도 말이다.

1인칭 성장 소설들에서 흔히 그렇듯, 아직 미성숙한 주인공의 의식을 평가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로 70대 노인이 등장하고 '우정' 이라는 이름으로 관계 설정을 하나, 이 관계 역시 나에게는 그다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지혜가 넘치는 70대 노인과 15세 성장기 소년의 우정이란 것도 흔치 않거니와,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인공의 일기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주인공의 사고의 방향, 작품의 교훈적인 내용의 대부분은 이 70대 노인이 말한바를 주인공이 일기에 옮겨 적으며 곱씹는 형식을 취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1268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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