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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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젊은 여성의 사랑에 관한 태도를 독서와 연결시킨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 콩스탕스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에 푹 빠져 있다. 1914년에 태어난 로맹 가리는 1980년 의문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로 그의 유서를 통해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필명임이 밝혀진다. 이로서 한사람이 한번만 수상할 수 있는 콩쿠르 상을 역사상 유일하게 두번 탄 작가이다. <자기앞의 生>에서 모모가 로자아줌마를 화장시켜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탁월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김형경의 <좋은 이별>을 비롯하여 여자 작가들은 꽤나 자주 언급을 한다. 어쨌든 콩스탕스 역시 로맹 가리라는 작가의 책이 서른 한권에 불과해 자신이 일년에 한권씩 읽더라도 쉰살이면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정도이다.

어느날 다른 작가에 관심을 돌려보기로 마음 먹은 콩스탕스는 도서관에 가서 뒤라스의 <북중국의 연인>, 가스통 루르의 <노란 방의 비밀>, 폴리냑의 <오렌지빛> 세 권을 빌려 오지만 <북중국의 연인>은 따분했고, <노란 방의 비밀>은 끔찍할 것 같다는 이유로(사실 그다지 끔찍한 내용은 없었고 셜록 홈즈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부당한 비난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오렌지빛>은 흥미를 잃었다는 이유로 그만둔다.

그런데 <오렌지빛>의 한 페이지 여백에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책 말미에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 라는 문장을 발견하면서 미지의 인물이 그어 놓은 밑줄에 따라 독서를 거듭하게 된다. 콩스탕스는 <노름꾼>, 로제 니미에의 <이방(異邦)의 여인> 등을 읽어가며 밑줄 긋는 남자와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적인 관계를 갈구하던 콩스땅스는 전혀 엉뚱한 남자와 잠시 애정행각을 벌이고 이내 그 관계를 끝내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밑줄 긋는 남자에게 전달해 달라며 도서관 사서에게 맡긴 편지를 통해, 남자의 정체가 클로드라는 도서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와의 현실적인 관계가 시작되지만 콩스탕스는 이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관계를 끝내려고 한다.

클로드는 편지로 사실 자신이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며 콩스탕스가 밑줄에 따라 독서를 해나가는 것을 알게 되어 중간에 끼어든 것 뿐이며, 밑줄 긋는 남자를 찾는데 힘을 보태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콩스땅스는 그와 밑줄 긋는 남자를 찾는 과정에서 클로드가 밑줄 긋는 남자보다 우월한 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는 자기 살을 내 살에 대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내 살을 그의 살에 대었다. 사랑에는 살을 섞는 일이 필요하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밑줄 긋는 남자를 더 이상 찾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정체는 밝혀 내지 못하고, 콩스탕스는 언젠가 그 남자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프티 로베르> 사전의 단어 <아탕뒤Attendu(e)>(기다리는, 기다리던...)에 밑줄을 그어 놓는다.

 

책을 읽으면서 대리언 리더의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가 떠올랐다. 정신분석에 관한 책인데, 여자는 연애를 하면서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그 편지가 실재 존재하는 상대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 편지는 부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크 카조트의 <사랑에 빠진 악마>를 분석하는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밑줄 긋는 남자에서도 콩스탕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대방을 갈구한다. 로맹 가리(이상) - 다른 작가(현실) - 밑줄 긋는 남자(이상) - 클로드(현실) - 다시 밑줄 긋는 남자(이상) 으로 현실의 관계에서는 이상적인 상대편에 대한 갈망으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이상적인 관계(현실에서는 혼자)에 처하게 되면 다시 현실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결국 여자가 편지를 보내지 않고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은 관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의 투쟁이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의 앞부분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다른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분리를 이겨내려고 하면 할수록 분리는 강화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억압하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질문)은 욕망의 반영인데, 자신의 욕망과 상대편의 욕망이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관계 지속을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분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관계의 해소이지만, 그 경우라도 새로운 관계를 통해 분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부칠 대상이 없는 편지를 계속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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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호텔 - 가을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 우리문학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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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기토 코노스케는 야쿠자소설 '의리의 황혼'시리즈로(<의리없는 전쟁>을 차용한듯)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가이다. 어느날 관동 사쿠라회의 8대 총장 사가라 나오기치가 급서하는데, 주인공의 삼촌인 기토 나카조가 그 사쿠라회의 유력한 차기 총장이다. 나카조는 호텔을 운영하는데 정식 명칭은 오쿠유모토수국호텔, 하지만 야쿠자와 경찰들 사이에서는 프리즌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소설은 이 수상쩍은 호텔에서 1박2일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투숙객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o 기토 코노스케 : 소설의 화자. 아버지는 평생을 팬티와 메리야스만 만들었으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젊은 야쿠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다.

o 기토 나카조 : 화자의 삼촌. 관동 사쿠라회의 유력한 차기 총장. 15세 때에 사가라 나오기치에게 맡겨져 평생을 야쿠자로 살아간다. 신노 미스즈라는 가수와 젊었을 적 짧은 사랑을 나눈다.

o 신노 미스즈 : 일세를 풍미했던 가수이자 사가라 나오기치의 여인. 젊었을 적 기토 나카조와의 사이에 아이를 갖는데 그 아이가 각성제 복용 혐의로 구속되자 프리즌 호텔에서 매스컴의 눈을 피해 머물고 있다.

o 사가라 나오기치 : 사망. 관동 사쿠라회 8대 총장. 기토 나카조가 야쿠자로서 뒤를 두지 않도록, 또 신노 미스즈는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대신 맡아 기른다.

o 가시와기 나나 :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여 어느정도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그저 그런 지방공연을 전전하고 있으며 흥행업자에게 몸을 팔기도 한다. 매니저인 하야시는 나나가 벌어온 돈을 술로 탕진하고 있으며 나나는 프리즌 호텔에 매니저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투숙한다.

o 하야시 쇼다로 : 나나의 매니저. 야망을 품고 나나와 더불어 출세하기 위해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o 와타나베 : 42년을 경찰로 살아왔으나 이렇다할 성과도, 출세도 하지 못했다. 성격 탓에 젊었을 적 기토 나카조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 이후로도 범인을 체포하고 공을 세우는 데는 서툴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씨로 범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다.

o 가가와 신스케 : 젊을 적 전공투 학교 위원장을 반신불수로 만든 사건 이후 사회의 시스템에 불만을 갖고 매스컴의 주목을 끌기 위해 수금강도 짓을 벌인다.

o 하나자와 : 프리즌 호텔의 지배인. 일류 크라운 호텔에서 기토 나카조가 스카우트 해온 일반인이지만 프리즌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 차차 '호텔맨의 길을 가는 독불장군 야쿠자'화 되어 간다.

o 미카 : 기토 코노스케의 정부인 기요코의 딸. 아버지는 살인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 있다. 코노스케가 진짜 아빠였으면 하고 바란다.

 

작가 약력을 읽어보니 작가 자신이 이십대에는 야쿠자로 생활하였고 육상 자위대원이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가와 신스케의 에피소드에서는 전공투 시기에 대한 우익 인사들의 단골 레파토리인 '수업 받을 권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인데, <철도원>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기에 잔잔한 내용을 기대하고 집어들었다가 야쿠자 얘기가 나와 당황스러웠다. 소설 자체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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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8
렉스 스타우트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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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란에는 다음과 같은 거창한 말이 씌여 있다. "렉스 스타우트는...4살때 성경을 읽고, 10살때 고전 1천권을 독파했으며, 15살 때 시를 발표... 문학의 천재..." 그런 "문학의 천재" 께서 1934년 48세 되던 해에 추리소설을 발표했으니, 그저 문학의 천재로로만 남아줬으면 좋았을 걸 굳이 손수 책을 쓰시어 죽도 밥도 아닌 이따위 것을 읽고 내가 정말 분통이 터져서...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날 마리아 머페이란 여인이 자신의 오빠가 실종되었다며 네로 울프란 탐정을 찾아온다. 오빠의 이름은 카를로 머페이, 금속세공사로 일하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책력 봐가며 밥먹는 처지에 빠진 오빠가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 귀농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한 게 엊그제인데, 동생에게 돈문제가 잘 해결될 것도 같고 어쩌고 하다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140kg에 달하는 몸무게의 둔해 빠진 탐정 울프는 자신의 수족 역할을 하는 아치에게 머페이의 하숙집 가정부 안나 피오레를 데려오라고 하여 족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머페이가 신문 기사를 오려내었으며, 그 신문기사에는 저명한 대학총장인 피터 올리버 바스토란 인물이 골프를 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음을 알게 된다.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통해 카를로가 골프채에 '약간의' 장치를 하여 골프공을 치면 독침이 발사되도록 설계를 해주었고, 일의 전모를 알아차린 카를로가 모종의 인물에게 살해당했음을 알게 된다.

독에 의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심장마비라고 진단한 의사가 용의선상에 올라 조사해보니, 의사는 범인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총장 부인일거라 생각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고, 골프채 가방이 없어진 것도 마찬가지의 우려로 딸이 저지른 짓이란 것을 알아낸다. 함께 골프를 친 아들도 딱히 아버지가 죽어서 이득 보는 것이 없다. 하여, 우연히 그날 함께 골프를 친 옆집 사는 E.D.킴벌과 아들인 매누엘 킴벌도 내친김에 조사해보았지만 얘네들도 별다른 혐의가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럼, 추리소설이니까 탐정이 추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탐정은 당일 캐디를 했던 소년들을 모아다가 먹을 걸 주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빠짐없이 얘기를 시켜 듣다 보니, 아니! 그날 우연히 E.D.킴벌의 골프채를 총장이 빌려서 친 일이 있다지 않는가! 그럼 실제 죽어줬어야 하는 사람은 E.D.킴벌이다. 그런데 탐정의 손발 노릇을 하는 아치는 어쩐지 첨부터 그 아들놈이 맘에 들지 않았었고, 게다가 이름도 마누엘이라는 남미계통과 킴벌이라는 영미계 이름의 혼합이라 왠지 범죄자 냄새가 난다. 이제는 마음껏 표적수사를 시작한다. 

E.D.킴벌을 데려다가 얘기를 자꾸 시키다 보니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 가정부는 범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입을 꾹 다물고 청맹과니 행세를 하고 있다. 탐정이니까 이쯤해서 추리를 하려나 했더니 자신의 수하를 시켜 한바탕 강도짓을 벌여 안나가 받은 돈을 죄다 뺏어버려 안나로부터 입을 열게 만들려고 획책한다. 그런데, 얼씨구나, 입만 여는게 아니고 알고봤더니 안나라는 요 깜찍한 것이 초반에 나자빠진 카를로로부터 증거 일체를 봉투에 담긴채로 받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증거 일체를 건네 받은 탐정이라는 이름의 조사관 네로 울프는, 140kg의 몸을 이끌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는 것이 싫은 나머지 계략을 꾸며 E.D.킴벌과 범인 매누엘 킴벌이 동반 자살을 하도록 유도하고, 울프와 아치는 한없이 유쾌해진다...그리고 책을 다 읽은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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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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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학교 2학년 때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뒷맛이 좋지 않았었다. 당시의 나는 인간의 자유란 '투쟁'을 통해서 '쟁취' 될 수 있는 것으로만 여겼던 때였다. 딱딱한 사고의 틀에 책들을 꿰어 맞추던 때였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라쌀레의 조합이론쯤에 경도된 작가가 현실을 도피하는 내용으로 매도하였었다. 

며칠 전 이웃에 사는 친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기에 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을 꺼내보니 누렇게 변색이 되어 종이가 나달나달 하다. 새로 살까 하다가 역자가 이윤기임을 확인하고 조심조심 한장씩 넘겨가며 읽었다. 회사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까지 행복한 일주일을 보냈다.

화자인 나는 그리스 독립투쟁을 위해 떠나는 친구와 헤어진 직후 크레타 섬에 갈탄광을 하나 세내어 들어온다. 나는 갈탄광에서 자신도 노동에 참여하고 수익은 노동자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일종의 노동자조합 공동체를 이루어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으며, '내 삶의 양식(樣式)을 바꾸려고' 결심한다. 이런 그에게 수프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며 조르바란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며 살아온 화자에게 조르바의 삶의 태도는 모든 면에서 신선하다. 그는 녹로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내었으며 '침대에서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청을 거절할 남자는 신이 용서치 않는다며' 여관 주인인 과부 오르땅스에게 집적댄다. 케이블을 사러 갔던 도시에서는 창녀에게 7천 드라크마를 쏟아부어 노닥거리는가 하면 수도승에게 수도원을 방화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독신(瀆神)을 주저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하는 그에게는 하나님이나 악마나 동일할 뿐이다.

말라르메를 읽던 어느날 나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지적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임을 깨닫고, '충분히 먹고 마시고 사랑한 것도,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것을 비운 공(空)의 상태인 부처에 너무 일찍 경도된 자신을 반성한다.

모든 것에 감탄하고 처음 본것처럼 신선함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조르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조르바의 삶이지만 나에게 있어 조국과 애국심은 여전히 깨어지기 힘든 영역이었다. 어느날 조르바에게 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셔츠를 벗어던지고 총알과 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상반신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비정규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어느 날, 그리스인을 살해하는 불가리아 신부를 죽이게 된다. 얼마 후 다섯명의 아이들이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 조르바의 질문에 바로 얼마전 자신이 살해한 신부의 아이들임을 알게 된 조르바는 아이들에게 보급투쟁을 위한 돈을 모조리 털어준다. 그는 그 일 이후로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아... 해탈의 길을 찾고 인간이 되었다' 고 말한다. 그는 '터키 놈, 불가리아 놈, 그리스 놈...하며 사람의 목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질, 강간을 하며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가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 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짓는다. "내 조국이라고 했소? 당신은 책에 씌어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고 있소? ...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는 그 후 마을의 과부에게 느끼는 자신의 욕망을 어느날 실현함으로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하지만 상사병에 걸려 죽은 청년의 아버지에 의해 과부는 다음날 처참히 살해당하고, 오르땅스 부인 역시 감기가 심해져 죽어버린다. 갈탄광이 수지를 맞추지 못해 벌채한 나무를 케이블로 실어 바다로 내려보내 수출하려는 계획도 실패하고 빈털털이가 된 나는 조르바로부터 해변에서 춤을 배운 후 다음날 헤어진다.

화자가 서른 다섯쯤의 일이며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록임으로 보아 이 책의 배경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의 그리스-터키 전쟁과 1929년 세계 대공황 사이로 보인다. 조르바가 읽었던 책은 '뱃사람 신밧드' 한 권 뿐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전쟁이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지, 제국주의자들의 이성없는 욕심에 희생되었던 것이 누구인지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조르바의 경험을 읽으면서 김남주의 시 <예술지상주의>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체험을 통해 남이 주입한 사상이 아닌 스스로의 머리와 가슴으로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 그런 조르바를 보면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화자의 이야기 덕분에 일주일 내내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고, 나도 조금은 더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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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리의 집
야베 타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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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방학이면 나와 우리 가족은 고모집에 방문한다. 올 여름에는 누나가 입시 때문에 엄마와 함께 집에 남아서 아빠와 나만 가게 되었다. 고모집에는 고모부와 할아버지, 할머니, 사오리 누나가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몇달 전에 감기가 심해져 돌아가셨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고모집에 도착했는데 고모가 온통 몸에 피갑칠을 한채 문을 열어준다. 사오리 누나는 어딨냐는 질문에 가출했다는 석연찮은 대답이 뒤따른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세탁기 밑에서 손가락 하나를 발견한다. 할머니가 감기로 돌아가신게 아닌것 같은 의심에 집안 구석구석을 나는 뒤지기 시작하고 여기 저기서 신체의 일부를 발견한다. 할머니와 사오리가 살해당한 것 같은 느낌으로 계속 집을 뒤지는 나는 고모에게 들켜 귀를 잘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뒷자석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오리 누나가 살해당할까봐 차에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고 두사람 분의 시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였으며, 내가 본 할아버지는 아마도 귀신이었을거라고 사오리 누나는 말한다.

 

이 책은 <제13회 일본호러소설대상> 장편상 수상작이다. 응모작이 이 한 편 뿐이었고, 수상작을 안 낼 수는 없는 절대적인 규정이 있다. 그럼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왜 집안 곳곳에 시체 토막을 숨겨야 했는지, 고모는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왜 이런 것들에 대해 모른 척 하는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했다 싶었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난 다른 사람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다'고 바락 바락 악을 쓰긴 하는데, 정말 못봐줄 지경이었다. 하이텔 시절 피씨통신 동호회에 재미삼아 올라오는 그런 공포괴담 수준도 안될 지경이다. 게다가 역자 역시 번역을 제대로 한건지 의심이 갔다. 군데 군데 뜻이 이어지지 않는 대사들이 있고, 일본식 도치법을 그대로 번역해놔서 읽기 굉장히 거슬린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면 권해줄 책으로 추천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23806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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