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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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시대를 따로 떼어놓고 내용만 본다면 이 책은 일정한 줄거리가 없고 섹스, 혼음, 마약, 폭력으로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할 수 있었는가?

 

책 말미에 쓴 무라카미 류의 한국어판 서문(말미에 실어놓고 서문이라 이름 붙여놨다)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1970년대 중반이란 어떤 시대였을까?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제1차 석유 파동을 잘 뛰어넘어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일단 이뤄 내고, 막 사회의 성숙기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일본은 '근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문학이 있다. 그 나라가 가졌던 문화와 근대라고 하는 소위 글로벌리즘과의 충돌을 표현하게 되는데, 그 내부에 살아가는 인간의 갈등과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 근대문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당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극단적인 스캔들에 시달렸다. 마약이라든가 혼음섹스 묘사가 화제가 되었고 이런 것은 문학이 될 수가 없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인간의 내면을 그리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고, 고뇌도 회한도 비애도 없는 작품이라는 비평도 많았다. 나는 현대인의 불안감 따위를 그리지 않았고, 국가와 개인의 불화라든가 가족간의 뗄 수 없는 굴레는 물론,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청춘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25년 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 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전공투 운동이 연합적군의 동료 처형사건을 끝으로 사그러 들고, 일본인들은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 같다. 전통적인 가치, 살아있는 신이었던 천황이 미국에 항복을 해 전국민이 충격에 빠져버리자 일본은 극우와 극좌가 모두 설득력을 갖는 시기를 한동안 보냈던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적군파)로 대변되는 양자 모두가 대안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인들은 그 어느 한쪽에 지지를 보냄으로서 존재이유를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70년대 초중반은 바로 이러한 극단의 선택마저 불가능한 사상의 공백, 상실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러한 시기에 쓰여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래서 불쾌하기 보다는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성묘사와 마약은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이 나에게로인지 타인에게로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마치 꼬뮌전사들의 패배에 절망하여 파리 한 구석으로 도망친 보들레르에 대해 김남주가 말했던 시 <예술지상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퇴폐적인 책은 맞다. 대안을 말하지도 않고(아니, 대안은 커녕 주인공들의 감정 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못하는 인물들만 등장한다. 무라카미 류의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저 3류 쓰레기 소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은 가네하라 히토미의 <애시베이비>가 떠올랐다. 같은 퇴폐라도 절망 속에서 나온 퇴폐는 어느정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형식만을 차용한 퇴폐는 쓰레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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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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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꿈에서 본 소녀

모리사키 레이미가 잠든 사이 사카기라는 청년이 방에 잠입한다. 딸의 방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낀 레이미의 엄마는 엽총을 들고 들어갔다가 사카기를 발견하고 엽총을 발사한다. 가까스로 도망친 사카기가 뺑소니 사고를 내 경찰에 잡히는데,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모리사키 레이미로부터 방으로 와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모리사키 레이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미래의 여인으로 생각해 왔다고 진술한다. 조사를 거듭할수록 그의 말이 사실로 증명되어 사건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사카기의 집을 조사하던 중 그가 어릴적 가지고 놀던 인형 이름이 모리사키 레이미라는 사실을 통해 유가와는 사카기가 어렸을적 함께 놀던 친구의 아버지와 모리사키 레이미의 엄마가 불륜 관계였음을 알아낸다. 인형은 잃어버렸지만 이름만은 기억하던 사카기는 그 이름의 여인을 자신의 미래의 여인으로 생각해왔다. 한편 아이를 낳은 다미오는 자신의 딸 이름을 모리사키 레이미로 지었던 것이다. 사카기는 모리사키 레이미를 우연히 알게되어 운명이라 생각하고 접근해왔고 이를 딸에게서 전해들은 다미오는 자신의 불륜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사카기에게 편지를 보내 딸의 방으로 오도록 한 후 침입자를 엽총으로 살해하려 한 것이다.

 

o 영을 보다

술집에서 일하는 기요미와 사귀게 된 호소다니는 자신의 친구 고스기 고이치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곤란해하고 있다. 고스기가 데려간 술집에서 기요미를 알게되었는데 그녀는 고스기가 먼저 호감을 표시했었기 때문이다. 기요미는 자신이 행운의 사진을 한 장 가지게 되었다는 야릇한 말을 한다. 기요미와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호소다니에게 친구 야마시타가 전화를 걸어오는데, 고스기가 출장을 가면서 고양이를 맡겼다며 고스기의 집으로 와서 함께 마시자고 한다. 술을 마시던 호소다니는 창밖에서 기요미를 얼핏 본 듯한데, 그날 밤 기요미는 자신의 집에서 고스기에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기요미를 충동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 기요미의 손목에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과 '행운의 사진'을 연결시켜가던 유가와는 사건이 전혀 다른 성격임을 추리한다. 기요미가 사진을 찍은 날 교통사고가 있었고 그 교통사고의 범인은 다름아닌 고스기의 여자친구였던 것이다. 우연히 뺑소니 현장을 사진으로 찍게 된 기요미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뜯어낸다. 기요미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고스기는 여자치구에게 기요미와 비슷한 옷을 입혀 고스기의 집으로 보내 야마시타에게 모습을 보이고 그시간 기요미는 손목을 그어 살해함으로서 알리바이를 조작하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o 떠드는 영혼

야요이란 여성의 남편이 실종된다. 그가 들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혼자 사는 다카노라는 아주머니의 집이 수상하다. 아주머니는 남편 실종 전후로 사망하였고 그 집에 수상한 친척들이 대신 들어와 살고 있는데 그들은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외출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없다.

돈이 집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외로운 다카노 아주머니의 집에 들어가 살며 돈을 찾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다카노 아주머니를 윽박질러 돈을 찾으려 하다가 아주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를 목격한 야요이의 남편 역시 살해한 후 방바닥에 시체를 파묻는다. 8시만 되면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현상은 인근 공장의 뜨거운 물이 하수로로 방출될 때의 일어나는 공진현상이었다.

 

o 그녀의 알리바이

빚을 받으러 간 다다아키가 호텔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는데 상처가 무척 날카롭고 깊지만 목을 조른 도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망 전 다수의 생명보험에 가입된 사실이 드러나 부인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녀 역시 알리바이가 희미하지만 하나 하나 결국은 사실로 밝혀져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아이가 공장에서 아버지의 주변에 도깨비불 같은 것을 목격했다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유가와는 다다아키가 두 줄의 활 시위와 타이머를 이용해 시위를 끊어 스스로 자살하였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녀의 희미한 알리바이는 언제 남편이 자살할 생각인지 몰랐기 때문에 여러군데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o 예지몽

나오키의 집 맞은편에서 세토라는 불륜 상대 여성이 목메달아 자살하겠다고 협박을 하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실제 목을 메단다. 함께 있던 후배 미네무라가 그 집으로 달려갔지만 여성은 이미 사망했다.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되는 듯이 보였는데 아파트의 어린아이가 그녀가 며칠 전에도 목메달아 자살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아이가 예지몽을 꾸고 실제와 혼동한다고 생각한다.

미네무라와 나오키의 부인 세이코가 불륜관계임을 안 세토는 미네무라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둘의 불륜관계를 폭로하여 이혼하도록 만들 수도 있으나 나오키 스스로 이혼 얘기를 꺼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며 자살연극을 도와달라고 한다. 미네무라는 ER 유체를 이용하여 철봉이 무게가 가해지면 내려오도록 설계하고 연습때에는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세토를 안심시키고 실제 연극을 하는 날에는 ER 유체를 고체화시켜 세토를 살해한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중 한권으로  후지TV 9시 드라마로 제작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용의자X의 헌신>은 영화로 제작되어 370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읽어 결론을 알고 있어 흥미는 반감되었지만 강제 동원된 체육대회 응원에서 땡땡이를 치고 시간 보내기엔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만화책 제작 과정처럼 문하생을 두고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용의자 X의 헌신>과 같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변신>과 같이 너무도 평이한 작품이 있다. 미야베 미유키와 더불어 의문스러운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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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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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나단 노엘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누이동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으며, 아저씨가 정해준 결혼상대는 4개월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후 튀니지에서 온 과일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 친다. 이런 불상사를 겪은 후 사람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멀리 해야만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은행 경비원으로 취직하고 방 한 칸을 세내었는데 그는 그 방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남들은 불편해 마지 않을 좁은 방을 조나단은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꾸미며 흡족해했고, 드디어 그 방을 살 수 있을 만한 돈도 모아 이제는 은퇴 후 노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방 앞에 비둘기 한마리가 창을 통해 날아들어왔고, 조나단은 비둘기를 본 순간부터 그 동물이 주는 끔찍한 느낌에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비둘기가 혹시라도 몸에 닿을 까봐 한여름에 겨울 외투를 꺼내입고 은행에 출근한 조나단은 이제 자신은 그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며 평온할거라 생각했던 계획도 모두 틀어져버렸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일을 하면서 실수를 연발하고, 가장 싼 호텔을 빌렸을 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고민하는 등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급기야 공원 벤치에 바지까지 찢기는 사건이 일어나고 어렵사리 근무시간을 채운 그는 호텔로 돌아가 정어리와 빵, 포도주, 치즈와 배를 더할나위 없이 맛있게 먹고난 후 <내일 자살해야지>라고 말하며 잠 속으로 빠져든다.

밤사이 폭풍우가 몰아치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전쟁 중 자신이 지하실에 갇혀 있다는 환상에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죽은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치려는 찰나, 요란한 빗소리에 제정신을 차린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서서 '자유 속으로 걸어'나간다. 그리고 되돌아온 방 앞 복도에 비둘기가 남겨 놓은 오물과 깃털이 말끔히 치워지고 비둘기 역시 자취를 감추었음을 발견한다.

 

작년 여름에 집에 쥐가 들어온 적이 있다. 새벽 2시쯤 들어온 쥐는 그저 움직이는 시커먼 덩어리였고 나는 머리 끝이 쭈뼛할 만큼 놀랐었다. 어디 한군데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쥐가 도망쳐 들어간 방문을 잠그고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후 회사에 출근했다. 겨우 문만 열고 쥐덫을 집어 넣어두었지만 그날 밤 쥐덫은 텅 빈채였고, 단지 그 방에 쥐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거의 공황 상태에서 다음날 밤 집에 돌아가길 포기하고 회현역과 서울역을 거쳐 숙명여대 입구까지 비가 오는날 여관을 찾아 전전했다. 회현역 인근 모텔은 성매매를 동반하지 않은 투숙을 거부했고, 서울역의 여관은 들어간지 5분만에 지불한 돈을 포기해야 할 만큼 더럽고 습했다. 결국 숙명여대역까지 걸어가 모텔에 들어섰을 때에는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흠뻑 젖어 자못 처량한 느낌 마저 들 지경이었다. 에어컨 앞에 옷을 널어 말리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설책을 읽는 중간중간 입으로는 내 처지를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비둘기>를 읽으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너무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그리고 쥐가 들어온 그 사건이 뭔가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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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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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헤어진 여자친구 수진에게서 어느날 연락이 온다. 수진은 내가 알고 지내던 대학 선배와 결혼을 하였고, 나는 그동안 캐나다 유학을 다녀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녀는 이혼을 하였고, 원치 않는 10억이란 돈이 생겼으니 카지노에 가서 모두 써버리자고 한다. 나는 쿨한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이나, 이 제안에는 마음이 흔들려 수진과 강원랜드로 향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주인공은 이론적이나마 카지노의 생리에 대해 알고 있어 확률적으로 돈을 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룰렛, 슬롯머신, 블랙잭, 바카라 등을 하는 동안 머리속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고, 수진 역시 돈을 탕진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막상 게임에서는 돈을 따려고 한다.

수진과 한방을 쓰면서도 수진과 육체적으로 엮이는 일을 피하며 생활하는 나는 엄마가 도박을 하는 동안 방치되어 있는 일곱살의 명혜, 그리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스무살의 윤미를 알게 된다. 어느날 윤미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아 모처로 이동을 하는 도중 윤미의 과거에 대해 듣게 된다. 광부로 일하던 윤미의 아버지는 광부를 그만두고 철물점을 운영하던 어느날 지금의 강원랜드가 건설되기 전의 자리에 있던 카지노에 드나들고, 그곳의 주차장에서 히터를 틀어놓고 자다가 숨을 거둔다. 민사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던 윤미는 아버지의 사망과 아버지가 도박에 빠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현재는 대학을 중퇴하고 카지노를 드나들고 있다. 윤미와 함께 찾아간 나이트클럽에서 윤미의 이복언니가 조직폭력배의 동생집에 치정문제로 방화한 사실까지 알게된 나는 윤미에게 애틋함을 느낀다.

한편 엘리베이터에서 수진의 전 남편이자 나의 대학 선배를 만나자 나는 수진이 이혼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수진은 대학 선배의 카지노 출입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는지 의심이 든다. 대학 선배는 나와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고, 운동권이었던 선배는 자신이 변절한 것이 아니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확실성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선배에게 '형이 예전에 원했던 세계와 형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선배는 나에게 '너는 변한 것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술에 취한 나에게 명혜 어머니가 유혹을 하고 나도 자괴감에 그녀와 모텔에 가지만 모텔에 간 그녀는 화장실에서 오래도록 울고 나는 그녀를 보내고 홀로 잠든다.

수진에게 호텔 입구에서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나에게 수진은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전부는 아닐 거야'라는 여운을 남기며 떠난다. 그리고 윤미에게 전화를 걸어 꿈 얘기를 한다.

 

가끔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자를 여기 저기서 느끼는 경우가 있다. 얼마전 읽은 전수찬의 <어느덧 일주일>, 그리고 지금 읽은 <슬롯> 모두에서 나는 하루키의 그림자를 느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담담하게 자신을 제어해나가는 주인공의 태도가 그렇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문학상 수상작(문학동네 작가상, 세계문학상)이고, 공식적으로는 처녀작이며, 작가와 주인공이 겹쳐진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이 이후가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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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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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존 레이 주니어 박사라는 인물이 쓴 것이다. 그는 원고의 저자가 <험버트 험버트>라는 인물로 1952년 11월 16일 구속된 상태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었으며, 원제목은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이며 자신은 편집자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끼호테>에 관해 자신은 번역된 원고의 편집자에 불과하다고 밝히는 것과 같이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인상의 서문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자신이 에필로그에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에서 직접 등장함으로서 존 레이 주니어 박사 역시 등장 인물에 불과한 허구임을 밝힌다.

 

1부

1910년 파리에서 태어난 <험버트 험버트>의 아버지는 리비에라의 호화로운 호텔 주인이고, 어머니는 '피크닉에서 번개에 맞았다'던가 하는 이유로 죽었다. 엄격한 이모 밑에서 자라던 그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애너벨이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해변에서 애너벨과 미숙한 성적인 경험을 하던 그들은 늙은 어부 (The Old man of the sea ; 해밍웨이의 The Old man and the sea의 변형)에 의해 방해받고 넉 달 후 애너벨은 발진티푸스로 사망한다. 이 강렬한 경험은 그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어린 여자만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게 하고, 그녀들 중 특별히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자아이를 '님펫'이라 부르며 갈망한다. 한동안 정상적인 삶을 위해 애를 쓰던 그는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위장하기 위해 폴란드 의사의 딸 발레리아와 결혼하는데 그녀가 어린애다운 점을 다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발레리아가 오히려 바람이 나 <험버트 험버트>를 떠나자 분노와 배신감에 정신이 이상해진 그는 요양원에 수용된다. 하지만 의사들을 속여 동성애자 혹은 성불능 진단을 내리게 만든 후 미국으로 떠나 이모부의 향수 사업을 물려받는다.

미국에 온 그는 램즈데일에서 샬로트라는 여성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열두살 난 롤리타가 있는데 그는 한눈에 그녀가 '님펫'임을 알아보고 격렬하게 사랑에 빠진다. 롤리타는 무심하게 그에게 다가오고 <험버트 험버트>는 샬로트와 롤리타 모두에게 눈치 채이지 않을 만큼 그녀와 신체 접촉을 하며 그녀의 순결을 지켜주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샬로트가 그에게 사랑고백을 하자 그는 롤리타와 합법적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한다. 롤리타와 둘만 있기 위해 샬로트를 살해할 공상까지 하는 <험버트 험버트>였지만 그가 샬로트를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내밀한 욕망을 기록한 일기를 샬로트가 몰래 보게 되고 분노와 수치심에 그 사실을 알리는 편지 몇 통을 써서 우체통으로 가던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롤리타의 합법적인 보호자가 된 험버트는 캠핑 생활을 하던 롤리타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샬로트의 죽음을 당분간 숨기기로 결심한다. 샬로트가 입원한 병원에 가자며 롤리타를 데리고 떠난 그는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호텔에 묵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듯 롤리타가 순결한 아이가 아니고 이미 동성애적 경험과 이성애적 경험 모두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롤리타의 유혹하는 태도에 굴복하여 성적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롤리타와 <험버트 험버트>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험버트 험버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태도들은 사라지고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여러가지 요구를 하기 시작하는 롤리타에게 그는 끌려다닐 뿐이다. 오직 그가 점한 유리한 위치는 롤리타가 고아이며 이제는 갈 곳이 없다는 것 뿐이다.

 

2부

롤리타의 요구를 들어주며 값비싼 호텔을 전전하던 그들은 비어즐리에 잠시 정착하고 롤리타는 학교에 들어간다. 그는 롤리타를 남자들로 부터 보호(혹은 격리) 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롤리타가 시야에서 사라지곤 하는 얼마간의 시간에 악마적인 공상과 질투로 괴로워한다. 그가 괴로와하면 할수록 롤리타는 그에게 포악하고 잔인한 태도를 취한다. 롤리타가 학교 연극에 출연하게 되자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험버트 험버트>는 다시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한다. 롤리타는 자신이 여행경로와 목적지를 결정하겠다고 하고, 그들은 다시 호텔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여행 시작 직후부터 낯선 중년 남자의 추적을 받는 느낌(혹은 사실)에 시달리던 그들은 롤리타가 병에 걸려 어느 마을에 머물게 되는데 병원비를 지불하러 간 그는 롤리타가 병원에서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게된다. 3년을 롤리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리타라는 여성을 만나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롤리타의 편지를 받고 그녀의 소재를 추적해 찾아내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상태이며 그에게 원하는 것은 얼마간의 돈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떠나간 이유가 퀼티라는 극작가 때문이었으며 극작가가 그녀를 버려 현재는 시시껄렁한 남자와 구질구질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자신과 함께 떠나줄 것을 간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라며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는 그에게 그녀는 '너무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게 삶인가 봐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재산을 롤리타에게 모두 남기고 퀼티를 찾아간 그는 퀼티를 살해하고 자신은 경찰에 붙잡힌다.

 

소설은 많은 부분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고 그로 인해 코믹하기까지 하다. 발레리아가 그를 떠날 때에는 '제 인생에 다른 남자가 생겼어요'라고 말하고, 험버트는 <이건, 이 말은 남편이 듣기에 좀 거북하다. 바로 거기, 거리에서 그녀를 때려눕히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회상하며 '도대체 누구냔 말이야?'라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그들이 탄 택시의 기사를 지목하고, 택시기사는 자신이 새로운 남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발레리아가 짐싸는 것을 거들어주고 험버트의 집 변기에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고 나감으로서 험버트가 빗자루보다 좀 나은 무기가 없나 부엌을 뒤적거리게 만든다.

샬로트의 죽는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죽이는 상상까지 하던 그가 일기장이 들통나 곤경에 처한 바로 그 때 그녀는 정말 개연성 없게도 차에 치어 죽어버린다. 죽음의 과정이 너무 사실감이 결여되어서인지 독자는 샬로트의 죽음과 험버트의 비열함을 연결시키기 어렵게 된다.

마지막 퀼티를 죽이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험버트가 총을 쏘는 장면에서 퀼티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여자처럼 아!하고 부르짖은 후 총알이 그를 칠 때마다 몸을 떨었고 '아, 아프군요, 그만! 아, 정말 지독하게 아파요, 내 사랑하는 친구여, 제발 빌 테니 그만 하시오. 아- 아주 고통스러워, 정말 고통스러워......하느님! 하아! 이건 정말 너무 심해요, 정말 이러시면 안-' 이라 말함으로서 반쯤은 코믹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퀼티를 죽이는 장면에서 비장함이라든가 잔인함을 느끼기 보다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비현실적인 느낌을 통해 퀼티라는 인물이 특정지어지는 한명의 인물인지, 아니면 환상에 불과한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바로 이러한 비현실적인 면이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감정을 더욱 사실적으로 대비시킨다.

한편, 험버트는 왜 롤리타를 임신시킨 사내가 아니라 퀼티를 죽인 것일까. 퀼티는 자신이 성불구라고 발언을 하는데,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퀼티는 성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롤리타가 험버트를 버리는 이유가 되었으며, 험버트처럼 작가 언저리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실제 작가로서 명망을 획득한 인물이다. 험버트의 사랑이 상당부분 집착의 색채를 띠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09년 2월 22일에 <행복한 서점>이라는 이름의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몇 번이고 읽으려고 집어 들었다가도 다시 내려놓고 내려놓고 했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 <위대한 개츠비>에 내가 집착하는 이유를 또다시 확인한 기분이다. 롤리타와 <험버트 험버트>가 비극적이 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이들은 <험버트 험버트>가 애너벨이 죽은 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어린 여자아이에 집착한 것이 비극이며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험버트 험버트>가 어쩐지 개츠비인 것만 같고 롤리타는 데이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가 자신이 그려왔던 '님펫'이 아님을 1부의 마지막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굴절된 사랑일 망정 그 사랑을 거두지는 않는다. 개츠비가 돈으로 데이지의 환심을 사더라도, 돈으로 환심을 살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아니 이미 예전에 자신을 떠났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해 자신이 사랑했던 데이지는 환상에 불과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는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집착일까, 사랑일까.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내가 보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경멸을 당하고 비굴함을 강요당하는 상황. 그것이야 말로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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