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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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레텐부르크로 여행을 온 자고랸스끼 장군 일행은 호화로운 객실을 빌려 생활하고 있으나 실상은 빚에 쫓기고 있다. 장군은 블랑슈라는 프랑스 여인에게 반해 결혼을 하고자 하나, 그녀는 장군이 곧 받을지도 모를 유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인 드 그리외 역시 장군에게 빚을 받기 위해 머물고 있다.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장군 일가의 과외선생으로 장군의 양녀인 뽈리나에게 빠져있다. 하지만 그녀는 드 그리외에게 반한 듯 보이기도 하고 영국인 미스터 에이슬리에게도 호감을 보인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것을 거듭 다짐하며 뽈리나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나 그녀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하다. 하인이 된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알렉세이는 그런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 죽음을 맹세하는 알렉세이에게 뽈리나는 길거리에서 남작을 모욕하라는 요구를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결과 해고 당한다.

장군 일행은 모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으니 자신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할머니의 죽음이다. 그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문의하는 전보를 줄기차게 보내는데, 부음(訃音) 대신 할머니가 직접 룰레텐부르크로 여행을 온다. 실망하는 장군 일행에게 독설을 퍼붓던 할머니는 룰렛 도박에 빠져들어 거액을 잃은 후 장군에게는 한 푼도 남겨주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모스끄바로 돌아가고 만다.

할머니의 확실한 의사표시로 블랑슈는 파산한 장군을 떠날 결심을 하고 드 그리외 역시 뽈리나를 버린다. 드 그리외에게 5만 프랑의 빚을 지게 된 뽈리나는 알렉세이의 방을 찾아오고, 알렉세이는 그날 밤 룰렛 도박에서 엄청난 돈을 딴 후 뽈리나에게 5만 프랑을 건낸다. 절망적으로 몸을 맡겼던 뽈리나는 다음 날 표변하여 알렉세이에게 돈을 집어던진 후 광증이 일어 미스터 에이슬리에게로 가고 만다.

전날 도박판에 자신의 운을 맡겼던 알렉세이는 이번엔 엉뚱하게 블랑슈를 따라 프랑스로 가 두달 만에 모든 돈을 써버리고, 프랑스로 뒤따라온 장군과 블랑슈가 결혼하자 또 다시 도박판을 전전한다. 빚을 지고 감옥에 갖히는가 하면 남의 하인 비슷한 일을 하는 등 재능을 낭비하던 알렉세이는 우연히 미스터 에이슬리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뽈리나가 사랑했던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전해듣는다.

 

출판사에게 자신의 저작권을 9년간 저당잡히고 27일만에 썼다는 작품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첫번째 아내 마리야와 별거 중 여대생 아뽈리나리야 수슬로바를 만나 여행을 떠나는데, 먼저 파리로 출발한 수슬로바는 그곳에서 알게된 스페인 의대생에게 몸을 맡기고 얼마 후 버림을 받는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녀에게 다시 사랑을 구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이중적이었으며 작가는 심한 애증을 느낀다. 또 여행 중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으며 전 부인, 형, 뚜르게네프 등 여기저기 돈을 빌려 도박에 탕진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각 나라의 인물을 통해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데 질서가 잡힌 독일과 고상한 형식을 갖춘 프랑스에 비해 러시아는 꼴사납고 품위가 없으며 격렬하고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부의 축적을 단순간에 이루기 위해 도박에 빠져들고, 그런 러시아인들의 성격에 들어맞는 것이 룰렛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러시아인들의 그러한 행태의 이면을 알렉세이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파악한다. "러시아인들은 그 재능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에요. 여기서 문제는 바로 형식에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풍부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도박과 애증, 그 두가지가 동시에 주인공 알렉세이에게 작용하여 그의 행동 방향은 예측하기가 어렵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런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도스또예프스끼에 관해 토마스 만은 "도스또예프스끼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에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고, 이 욕망에 관해 꼰스딴찐 모출스키는 "욕망은 결코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도, 한 인간에 대한 존경도 아니다. 그것은 불합리하고 악마적이고 파괴적이다. 또한 그것은 치명적인 자기 살인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이 그 형태를 지배에의 욕망으로 변화시키는 시작은 부정, 혹은 부정에의 의혹이다. 그 순간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지 못할 때에 사랑은 지배에의 욕구로 변화한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지배에의 욕구로 충족되기 위해서 나 자신의 죽음이나 상대편의 죽음, 그것이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건 기억의 왜곡을 통한 정신적인 압살을 의미하건,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본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당에 갔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용서라는 것은 있었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아픔까지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뽈리나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애증에 빠져 죽음을 수시로 입에 담게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도박을 통해 그런 애증 상태를 해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박은 도박 자체로 알렉세이를 놓아주지 않았고, 돈을 따고 잃는 것보다 도박장으로 향하면서 느끼는 흥분 자체에 탐닉하게 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 들려온 소식은 뽈리나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지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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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97
페터 슈나이더 지음, 김연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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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주인공 '나'는 서독에 살고, 때때로 동독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자친구 레나는 동독 출신으로 '나'와 처음엔 '지각한 내용의 판단을 두고서만 다투었으나, 나중에는 지각작용 자체를 두고 싸우'는 상태이다.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출신 작가 로베르트,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 포머러와 교류하는데 그들과 '나' 사이엔 보이는 장벽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벽도 존재하고 있다.

'나'와 친구들의 대화 속에는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집주인 샬터는 아프리카에서 오기로 한 연인(하지만 오지 않을 것임에 분명한)을 기다리며 동베를린의 공짜 전화를 쓰다가 마침내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버린 사람이고, 카베라는 사람은 삶이 권태로워서 열다섯번이나 장벽을 넘은 인물이다. 서독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세명의 젊은이가 열두 번이나 서쪽으로 장벽을 넘는가 하면, 동독에 복수를 하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쪽 비밀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결국 자기가 어느쪽 간첩인지 헤깔리게 된 발터 볼레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 와중에 열두번이나 서독으로 영화를 보러 갔지만 매번 동독으로 돌아온 점으로 보아 조국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동독 변호사의 말이나, 존재하지 않는 국경을 넘은 것을 처벌할 법률이 없어 정신감정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처벌을 못하는 서독측의 입장 등 희극적인 요소들이 생겨난다.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넘는 것이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으로도 넘는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권태와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이다.

 

남북분단의 상황에 처해 있는 남한 독자인 나로서는 동-서독을 가로지르는 장벽을 DMZ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한동안 어리둥절 했었다. 이러한 혼란은 역자 해설을 읽어보고 나서야 해소되었는데, 분단도시 베를린은 1961년 까지는 상호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매일 5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이 서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동베를린 사람이 서베를린의 극장이나 디스코텍을 방문하였고, 서베를린에서 일하고 장을 보는 것이 일상해 속했는데 1961년 8월 12일 당시 동독의 국가원수 발터 울브리히트가 동-서 베를린 간의 국경을 닫으라고 명령함으로서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단 상황은 1989년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동독에서는 장벽을 국경으로 간주하여 엄중히 감시한 반면에 서독은 장벽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아 기껏해야 불법적으로 세워진 장애물로 치부하였다고 한다. 이는 장벽을 넘는 행위에 대한 처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동독에서는 범법행위로 처벌한 반면 서독에서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치기로 인한 행동으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머리속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무는 데 드는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이고 바람에 있어서는 동독 작가인 포머러와 자신 모두 국가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들을 교육시킨 체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시민으로 살고 있는 국가(서독)가 과연 내 조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만일 국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독일인이라 대답할 것인데, 그것은 동독도 서독도 아닌 한 나라의 역사와 모국어를 지칭하는 차원일 뿐이라고. 

결국 장벽의 동쪽과 서쪽 어느곳도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 한다면, 장벽을 뛰어 넘거나 장벽 위에 서 있는 것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68세대 작가인 페터 슈나이더는 예술의 선동적 기능을 강조하던 입장을 포기한 대신 문학적 공간에 현실의 정치적 사건과 이데올로기를 투사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새로운 문학관을 표명하였다고 하며, 베를린 삼부작으로 불리는 <렌츠>, <에두아르트의 귀향>,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을 써내며 68학생운동에 관한 나름의 정리작업을 해왔다.

 

책을 다 읽은 후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독일 함부르크 편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서독의 급진적인 학생들은 토론할 권리, 질문할 권리, 의견 차이를 드러낼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자유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찰폭력과 검거로 이어졌고 1967년 6월 벤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라는 학생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학생세력은 거세게 반발하였고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나누어준 변형된 주기도문이 인상 깊어 적어둔다.

 

우리의 자본이시여,

서방 세계에서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투자가 임하옵시며,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월 스트리트에서도

이익을 내고 이윤을 증가시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자본의 회전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채권자들에게 신용을 베푸는 것처럼

우리의 신용을 늘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파산하지 않도록 하옵시고,

노동조합의 위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지난 200년 동안 이 세계의 절반은 권세 있는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것이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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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1 - 바이러스
스즈키 코지 지음, 윤덕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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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 기자 아사카와는 택시 기사로부터 기묘하게 죽은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에 사망한 처조카를 떠올린다. 기사를 뒤지던 중 비슷한 시간에 두 명이 더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죽기 직전 극도로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고 심부전으로 사망했는데, 흔치 않은 사망원인으로 동시에 죽는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취재를 위해 네 명의 젊은이들이 놀러간 곳에서 우연히 비디오를 발견한다. 그 비디오는 추상적인 장면과 현실적인 장면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는데 화산의 폭발이나 산(山)이라는 글자가 보이는가 하면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과 노파의 방언, 그리고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비디오가 끝나갈 즈음, 비디오를 본 자는 일주일 뒤에 죽게 되고 죽고 싶지 않다면 무엇인가를 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다른 것이 녹화되어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아사카와는 네 명의 젊은이가 비디오를 본 지 꼭 일주일만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루가 지난 뒤 논리학 강사인 친구 류지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데 류지는 대담하게도 비디오를 시청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도 우연히 비디오를 시청하고 만다.

류지는 비디오를 거듭 연구하여 검은 깜빡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비디오가 카메라로 촬영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본 것을 강한 염력으로 염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산의 생김새와 강한 염력이라는 단서를 통해 그들은 오시마 섬이라는 장소와 야마무라 사다코(山村貞子)라는 인물을 특정해낸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어머니는 야마무라 시즈코로 T대학 정신과 조교수 이구마 헤이하치로와 불륜 관계를 맺어 야마무라 사다코를 낳는다. 시즈코 역시 염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헤이하치로와 시즈코는 매스컴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음해에 대항하기 위해 매스컴 관계자를 모아놓고 증명을 하려다가 도리어 사기꾼으로 확정되고 만다. 그곳에 모인 매스컴 관계자들은 모두 시즈코의 실패를 원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즈코의 염력이 흐뜨러진 것이다. 결국 시즈코는 화산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헤이하치로는 폐결핵으로 입원하고 만다.

사다코는 도쿄로 와서 극단에 입단하지만 극단 관계자들로부터 기분나쁜 단원 취급을 받고, 극단 창립자는 사다코를 범하려 한 다음 날 심부전으로 사망한다. 아버지 헤이하치로의 병문안을 간 요양원의 의사는 천연두의 마지막 발병자였는데 이상한 열에 들떠 사다코를 범하고 만다. 사다코로부터 강한 살의를 느낀 의사는 자기도 모르게 사다코를 살해하고 우물에 떨어뜨려 죽이고 만다. 그리고 의사는 사다코가 '고환성여성화증후군', 즉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다코가 살해된 우물 바로 위에 건물이 들어서고 그 건물에 묵었던 네 명의 젊은이가 죽었다는 사실에서 아사카와와 류지는 사다코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우물을 파서 사다코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아사카와가 비디오를 본 일주일째, 아무일도 없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다음 날, 류지가 사망한다.

아사카와는 자신은 했으나 류지가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사다코의 바램은 자신의 유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끊임없는 증식, 즉 비디오를 복사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바이러스는 끊임없는 증식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1977년을 마지막으로 전세계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천연두 바이러스의 마지막 보균자에게 범해진 사다코가 세상에 대한 원념을 담아 새로운 바이러스를 탄생시킨다는 섬찟한 내용이다. 영화에서와 같이 우물에서 사다코가 걸어나온다든가 하는 장면은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이혼한 남편이 류지처럼 사망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친정 부모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등 약간의 각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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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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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구멍매달기 고문 끝에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소식이 로마 교황청으로 날아든다.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째, 주교(主敎)로서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종교활동을 해왔던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은 교회나 예수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한편,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오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히데요시(秀吉)가 1587년 이래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했고, 도쿠가와(德川) 역시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여 1614년 모든 가톨릭 선교사를 해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637년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천주교를 믿는 이를 중심으로한 4만명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정부는 포르투갈이 연관되어있음을 의심하여 가톨릭 탄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세 명의 젊은 포르투갈 신부는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와 관련된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끊어져버린 일본에서의 선교 명맥을 잇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말라리아로 한 명의 신부가 운신을 못 하게 되고 로드리고와 가르페만이 일본으로 잠입에 성공, 두 명의 사제는 가톨릭을 믿는 마을에 숨어 조심스레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낮에는 관헌의 눈을 피해 움막에 숨고 밤에는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등 제한된 활동을 하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관헌들이 마을로 들이닥치자 서로 다른 피신길에 오른다. 도망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라는 비굴한 인물이 접근하는데, 그는 한 때 가톨릭교도였다가 배교한 전력이 있는 자로 로드리고 등이 일본에 들어오자 다시금 가톨릭으로 회심(回心)하였다. 하지만 기치지로는 또다시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자신은 약하게 태어났을 뿐이며 배교를 거부하고 목숨을 내놓을 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외친다.

감옥에 갖힌 로드리고는 이노우에라는 부교오로부터 배교를 권유받는데, 그는 페레이라를 배교시킨 인물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의 선교 활동을 '추녀의 깊은 애정'에 비유하며 원치 않는 애정을 쏟는 것이 상대편에게는 도리어 해악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노우에는 이미 배교를 맹세한 신도들 마저 살해한다. 통역은 농민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로드리고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배교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라면, 과연 가톨릭에서 말하는 자비나 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급기야 다시만난 가르페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죽고, 페레이라 역시 자신들이 일본에 전파한 그리스도를 일본인들은 전혀 엉뚱하게 변형시켜 믿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자 로드리고는 심한 갈등에 빠진다.

이송된 감옥에서 로드리고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며 기도를 하다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일본인 신도들의 죽음과 자신의 행위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떠올리고 문득 이 모든 일이 희극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감옥에서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밖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이러한 희극적인 감상은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감옥을 방문한 페레이라로부터 그것은 코고는 소리가 아니라 구멍메달기 고문을 당하는 신도들의 고통에찬 숨소리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은 이미 배교를 맹세하였지만, 로드리고가 배교를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로드리고는 예수가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끼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성화를 밟는다.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는 "과연 신자의 기도는 신에게 도달한 것일까, 아니 본래 신이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두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교도의 심정으로도 솔직하게 울려오는 번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로드리고는 극한의 상황에서 기도가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미칠 수 없으며, 결국 선택의 주체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번민에 시달린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 공감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노우에라는 인물 때문이다.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이노우에는 수많은 가톨릭 사제를 배교시킨 인물로 로드리고는 그가 포악한 성정을 지닌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이 나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탄압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논리가 일견 타당한 것은 그것이 당시 일본 정부가 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며 현실에 뿌리를 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편 로드리고의 내세에 관련한 종교적 믿음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견은 좁혀질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고민과 번뇌는 모두 수긍이 가기 때문에 로드리고의 고뇌가 좀더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만약 엔도 슈사쿠가, 로드리고가 악독한 관헌의 탄압에 맞서 끝내 모든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 순교하는 것으로 그렸다면 무척 조잡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종교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고뇌로 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하고 공감하게 만든 것 같다.

읽는 내내 미우라 아야코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미우라 아야코의 <양치는 언덕>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이라든지 <성서에세이>에서 기도를 했더니 원하는 물건이 실제 생겨나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 틀림 없다든지 하는 대목과, <침묵>에서 끝내 침묵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물론 두 작가의 종교관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공감하게 되는 신의 모습은 <침묵>에서 로드리고의 기도 끝에 그리스도가 했다고 생각한 말, '어디에 계셨냐'는 로드리고의 물음에 '너희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말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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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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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벤은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변호사이다. 한때 사진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생활고와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생활고를 해결한 뒤에는 꿈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고, 사진에 대한 꿈은 비싼 사진기를 사들이고 멋진 암실을 꾸미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아내 베스 역시 작가가 되려는 꿈을 꾸었지만 출판사에 보낸 원고들이 거듭 퇴짜를 맞고,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자 어쩔 수 없이 벤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교외로 이사를 하고, 두번째 아이를 낳게 되자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이 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거짓말이 늘고 대화가 엇나가기 시작하자 벤은 베스가 바람이 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의 외도 상대가 이웃에 사는 젊은 아마추어 사진작가 게리임을 알게 된다. 게리는 얼마 안되는 유산으로 살면서도 겉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고, 끊임없이 자신이 사진작가로 성공할 것이라며 허풍을 떠는 인물이다.

게리의 집을 방문한 벤은 게리와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다툼을 벌인 끝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벤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후 게리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동부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서부의 몬태나 주 산간지방인 마운틴폴스로 도주한 벤(이제는 게리)는 그곳에서 게리의 신탁연금으로 생활하는 한편 사진을 찍는다. 몬태나 주의 인물들을 찍은 사진을 <몬태난> 신문사 기자 루디가 좋게 보아 신문사에 소개시켜주고, 신문사에서는 벤의 사진을 싣기로 결정한다. 또 신문사의 사진부장인 앤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오두막에 갔다가 우연히 산불 현장을 목격하고 찍은 사진이 대서특필되고 여러 메이저 신문사에도 팔리게 된다. 벤은 조용히 살면서 신분을 감추려 했으나 사진이 유명해지자 이곳저곳에서 그에게 접촉해오고 이제 벤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루디가 벤의 과거 행적을 캐내어 벤을 협박하는 지경에 으르고, 둘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다. 자동차에서 튕겨나온 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루디는 자동차와 함께 형체도 없이 불타버려 경찰은 벤이 사망한 것으로 처리한다. 또 다시 신분을 잃어버린 벤은 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새로운 신분으로 세탁한 후 앤과 함께 다른 도시로 떠난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벤의 아내 베스이다. 베스는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그 희생양으로 벤을 택한다. 그러면서 벤의 젊었을 적 모습이라 할 만한 게리와 바람을 피운다. 베스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권이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벤에게 집을 비우라고 말한다. 벤이 죽은것으로 되자 이번에는 월스트리트에서 부를 축적한 인물과 재혼을 한다.

베스의 이러한 양태는 벤에게서도 일면 발견되는데, 벤은 성공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고 사진작가로 살길 원한다. 하지만 막상 모든 것을 잃게 되자 자신의 과거 삶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사진작가로 살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것으로 되자 벤이 되돌아간 삶은 과거의 부유한 벤은 아니지만 역시나 앤과 가정을 꾸리고 평온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했던 인물은 게리였으며 그는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우연히 사진용품 판매점에서 만난 성공한 사진작가는 대화를 하고 싶은 벤을 두고 사진에 미친 아마추어 취급을 하며 사진에 대한 열정을 폄하한다.

 

누구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직업이 곧 나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것에 심하게 불편함을 느끼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던 나'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던 나'를 버린 것 역시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는 외면을 한다.

에티엔 바랄의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을 보면 일본의 심리학자 기시다 슈가 인용된다. 그는 "모든 인간은 본능이 부서진 상태로 태어난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상일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모든 욕망은 불가능한 단 하나의 욕망의 표현인 바, 안정된 상태로의 복귀가 그것이라고 한다. 자아는 전능함의 꿈인 동시에 무기력의 경험이며 바로 이 때문에 자아는 불안정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과 '안정된 상태로의 복귀'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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