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대 남자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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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여섯살의 전직 보험업자 폴 아셀방크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병에 자신도 걸려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게 된다. 엄습하는 고통과 불면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음식물만 섭취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자를 사서 공허를 달래던 아셀방크는 어느날 문득 자신을 떠난 아내 안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캐나다의 노스베이 소인이 찍혀있었다.

아셀방크는 공항에서 지프를 빌리려 하지만 남아있는 차가 한 대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뷰익을 빌려 <코스텔로 웨이>라는 이름의 모텔에 투숙한다. 모텔 주인 빅터 샨드라이는 인도 출신으로 장사가 잘 됐던 과거에 집착하며 손님들에 대해 히스테릭한 반응을 나타내는 사내였다.

경찰서에서 안나를 수소문한 아셀방크는 그녀가 한 때 사이슨이라는 자연학자의 집에 머물렀음을 알게 된다. 사이슨은 아셀방크에게 안나가 자신과 함께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는 것과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떠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종 격투기라는 야만적인 격투기를 함께 본다면 안나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아셀방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안나가 그런 격투기 관람 취향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아해 한다.

안나가 사이슨을 떠나 만난 사내는 패터슨이라는 남자였다. 패터슨은 건장한 체격의 사냥꾼으로 한 때 바이러스로 인해 심장병을 않았지만 현재는 이식 수술로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서로 얽매이지 않는 조건으로 여자친구 수전과 이따금 만나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녀가 '특별한 성적 유희'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꺼낸 뒤로 왠지 성적 주도권을 잃고 주눅든 느낌에 빠진다. 그리고 부정한 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 심장을 이식해준 남자가 강간살인범이었다는 기억 등도 패터슨을 이따금씩 괴롭히는 요인이었다.

망원경을 사서 패터슨을 관찰하던 아셀방크는 마침내 그의 집으로 찾아가 대면한다. 둘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눈길을 산책 나가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설을 만나 집 안에 고립되고 만다. 불과 오십보 밖에 차가 있고 그 안에 필요한 약이 있지만 가져올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아셀방크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패터슨은 아셀방크를 간호하고 며칠이 지난 후 열이 내린 밤, 아셀방크는 패터슨이 보고 있는 비디오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리고 패터슨이 얼마 전 사고로 얼음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던 말이 바로 자신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셀방크가 떠나고 패터슨은 수전으로부터 걱정 했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패터슨은 그 전화로 '특별한 성적 유희' 운운으로 주눅들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며 어쩌면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눈덮인 벌판으로 사냥에 나선 패터슨은 사슴을 발견하고 석궁을 겨냥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려던 순간, 자신의 배에 석궁이 꽂힌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눈을 들어 아셀방크를 발견하고 도망친다. 아셀방크는 패터슨을 쫓아가 칼로 숨통을 끊는다.

 

소설은 나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와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를 인용한다.

<하나비>에서 니시는 병에 걸린 아내와 살해당한 동료의 미망인을 위해 조폭들에게 돈을 빌리지만 갚지 못해 추격당하고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 장 폴 뒤부아는 아셀방크의 입을 빌려 <하나비>의 결말은 우리네 인생이 끝나는 모습을 눈에 확 띄게, 그리고 좀 더 앞당겨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귀레, 신의 분노>는 1560년,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에스파냐 군대의 이야기이다. 선발대장인 우르수아는 아마존 강의 거센 물살로 배를 더 전진시키지 못하자 퇴각을 명령하지만, 부대장인 아귀레는 황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키고 부대를 정글 깊숙이 이동시킨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창과 화살 세례에 죽어나가고 무자비한 살육 장면에서 주인공인 아귀레는 '나는 늘 생각해왔다. 다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고, 만사가 그런 식으로, 즉 사방이 피로 물든 가운데 끝나야 한다고. 우리 몸을 채우고 있는 피, 만물의 심장에 들어 있는 피. 우리는 늘 이 피에 굶주려 있으므로' 라고 말한다.

패터슨의 숨통을 끊은 아셀방크는 아귀레의 대사를 다시 떠올리고 읊조린다. 대사에 이어지는 말은 '우리는 뗏목을 탄 채 밤을 예고하는 어둠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다.

 

소설 속에서 아셀방크와 패터슨은 안나라는 여자를 끈으로 이어져 있지만, 정작 안나는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아셀방크, 사이슨, 패터슨 모두는 그녀를 그리워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나 떠나간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따뜻하고 아련한 무엇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누구도 그녀를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당장 아셀방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치병에 걸려 있고 나약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고, 사이슨은 '변태같은 자'라 평을 듣는 성불구자이며 야만적인 격투기에 열광하는 광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패터슨은 사이슨이 '완전한 남자'라 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강인한 이미지와 달리 심장을 이식받은 자이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고 수전에게 주눅이 들어 있다.

<남자 대 남자>는 행복이 가까이 있다는 <파랑새>를 비아냥거린 무자비한 현실 버전 같다. 행복은 옆에 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찾으러 나서면 죽어버릴 뿐만 아니라 찾는 자들끼리 살육을 벌이는 것이 인생의 참모습이라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폭풍설이 지나가면 숨겨둔 내면의 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에스키모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 보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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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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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킹스 에보트에는 두 개의 저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킹스 패독으로 페라즈 부인이 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펀리 파크로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고 있다. 어느 날 페라즈 부인이 사망하자 소설의 화자이자 마을 의사인 셰퍼드가 검시를 하는데, 사인은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로 밝혀진다.

로저 애크로이드는 한 때 결혼했었지만 부인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였고, 페라즈 부인 역시 남편이 알코올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다가 사망하였다.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두 남녀가 결혼할 것을 마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사건 직후 로저 애크로이드가 셰퍼드를 불러 페라즈 부인이 사실은 자살한 것으로 보이며, 자신에게 남편을 독살했던 비밀을 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누군가가 페라즈 부인을 협박하여 돈을 갈취해왔다는 이야기였는데, 고백 이후 부인이 죄책감에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 남긴 편지가 로저 애크로이드에게 배달된다.

편지에는 협박범의 정체가 담겨 있었는데 애크로이드는 혼자서 읽길 원하였고 그를 남겨둔 채 셰퍼드는 집으로 돌아간다. 잠시 후 펀리 파크의 집사인 파커가 전화를 걸어와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해당했음을 알려온다.

용의자는 먼저 양아들인 랄프 페이튼 대위로 그는 애크로이드의 사망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다. 또한 마을에 은밀히 들어와 집이 아닌 여관에 머물고 있으며 숲 속에서 양아버지가 사망하면 곧 자기에게 돈이 들어온다는 수상쩍은 말을 하기도 했으며, 애크로이드가 사망한 직후부터 종적이 묘연하다.

다음으로 애크로이드의 여자 형제인 애크로이드 부인이 있다. 로저 애크로이드가 하녀인 미스 러셀과 미묘한 관계가 되자 적극적으로 둘 사이를 훼방한 전력이 있고, 최근 페라즈 부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유산이 줄어들 위기에 있다.

집사인 파커는 사건 당일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애크로이드의 말을 무시하고 대화 내용을 엿들으려한 혐의가 있어 페라즈 부인을 협박한 범인이 아닐까 의심 가는 행동을 한다.

또한 사건 당일 펀리 파크에 방문한 낯선 남자와 정자에 남겨진 거위 깃털, R로 부터라는 글씨가 세겨진 결혼 반지, 마약과 흔적이 남지 않는 독약에 대해 질문을 한 미스 러셀 등 사건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 된다.

포와로는 모든 용의자들의 혐의를 합리적인 소거법을 통해 제거해 나간다. 먼저 사라진 40파운드의 범인이 랄프 페이튼의 사촌인 플로라의 소행인 점을 밝혀내고, 그녀가 도둑질을 은폐하기 위해 한 거짓말로 인해 에크로이드의 사망 시각에 혼동이 생겼음을 지적한다. 다음으로 미스 러셀이 마약에 관한 질문을 한 이유는 사건 당일 펀리 파크를 방문한 낯선 사내 때문이며, 그가 그녀의 숨겨진 아들이자 마약중독자이기 때문이었음을 알아 낸다. 결혼 반지는 랄프 페이튼이 하녀 어슐러 본에게 준 것이며 비밀 결혼 이후 나약한 성격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못하다가 양아버지가 플로라와 약혼하라고 하자 이에 응낙했다가 어슐러와 다투는 과정에서 아버지 사망 운운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애크로이드가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사실을 딕타폰이라는 기계(녹음기와 비슷한 기계인 듯함)에서 흘러 나온 소리이며, 그 소리가 나올 때 이미 애크로이드는 사망한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그 기계를 나중에 회수하기 위해 범인이 의자를 탁자가 가려지는 위치로 이동시켰다는 것을 추리한다.

이러한 소거법으로 범행이 가능했던 유일한 인물이 드러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소설의 화자 셰퍼드였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6번째 장편 소설로 작가의 작품 중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술했던 화자가 사실은 범인이라는 발상은 당대의 추리소설가 사이에서도 찬반격론을 일으켰는데, 반 다인은 떳떳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비난한 반면 도로시 세이어스는 트릭이 훌륭하다고 격찬하였다.

 

번역본으로 읽은 독자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무척 어렵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딕타폰에 대고 말한 애크로이드의 어투가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되는데 <The Murder Of Roger Ackroyd> 페이퍼백을 찾아 보니 '...the calls on my purse have been so frequent of late that I fear it is impossible for me to accede to your request' 이며, 우리말로 옮겨 보자면 '최근에는 지출이 너무 많아서 나로선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겠습니다'이다. 포와로는 이 말이 평상시 말투로는 너무 이상하였기 때문에 상대편이 있는 대화로 볼 수 없었다고 지적하는데, 사실 우리말로 옮겨 놓고 읽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가 없다. 또한, 마지막 <Apologia> 장에서 셰퍼드가 말하는 몇 가지 변명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생생한 인물과 심리 묘사는 돋보인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중 일급 추리소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는 이유는 해문출판사에서 발간한 빨간색 책 값이 싸서(그래서 번역도 싼 값을 한다) 다른 책을 사는 김에 한 두권 사다 보니 모으는 재미가 생겨서였다. 이번에 읽은 것은 고려원미디어 발간분인데 HAPER사에서 발간된 페이퍼북에 도전하다가 도저히 번역이 잘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중고서점에서 들고 왔다.

 

올해도 이제 거의 끝나 간다. 읽었던 독후감들의 제목을 보니 올 한 해 독서가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아침에 들고 나간 책을 읽었을 뿐인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읽은 책을 꼭 기록으로 남기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은 지켜서 뿌듯한 맘도 있다. 힘들었던 시기를 독서를 하면서 견뎌냈고, 이제 좋은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더 충실한 독서의 기록들이 쌓이고 쌓여 나 자신도 계속 변화하기를, 그리고 언제 만나도 이야기꺼리가 있는 재미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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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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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머니로부터 유산 처리를 부탁받고 여행을 떠나온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가련한 레오노레'의 일은 안되었다고 말하며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을 느낀 것에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었는지, 애정을 부추긴 것은 아니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베르테르는 빌헬름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영혼과 접촉하면, 나는 스스로 가능한 모든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의 나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것처럼 느꼈다'고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법무관의 딸 로테를 알게 된다.

베르테르는 무도회에서 로테와 춤을 추면서 들뜬 감정에 사로잡히고, 정신적인 공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상태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베르테르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자기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내심의 불쾌감, 자기 불만이라고 할 수 있고, 어리석은 허영심의 사주를 받은 질투심이 항상 결부되어 있는' 상태에 빠져 든다. 

약혼자 알베르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슬픔 속에서 베르테르는 다른 곳으로 떠나 그곳에서 행정관리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출세를 위해 쓸데 없는 일에 정력을 소모하는 자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베르테르는 '지위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남들보다 뛰어나게 통찰을 하고 남들을 손아귀에 장악하여 스스로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힘과 정열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한 수완과 지략을 갖춘 사람'이 실제적인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 한다. 하지만 백작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쫓겨나다시피 하고, 자신의 신념들이 좌절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후 사직을 하고 다시 로테가 있는 마을로 돌아간다. 과거의 열정이 다시금 되살아나 로테에게 열열히 구애를 하면서도, 이미 결혼한 로테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괴로워한 베르테르는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한다. 어느날 밤 로테 역시 내면의 열정에 굴복하여 베르테르에게 마음 한자락을 보여주지만 곧이어 베르테르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여행을 가기 위해 권총을 빌려달라는 쪽지를 보내고 권총은 로테의 손을 거쳐 베르테르에게 건내진다. 그는 로테에게 편지로 영원한 안녕을 고한 후 자살한다.

 

소위 독일문학의 질풍 노도의 시기(Strum und Drang)에 쓰여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25세 되던 해에 경함한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괴테는 당시 샤로테 부프라는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나 그녀는 이미 외교관 케스트너의 약혼자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한 괴테는 둘에게 편지를 남기고 도망치듯 귀향한다. 얼마 후 그가 알고 지냈던 예루살렘이라는 서기관이 친구 부인에게 연정을 품고 자살하였는데, 자살한 권총이 케스트너가 예루살렘에게 빌려준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의 체험과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사건을 연결하여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소설은 베르테르가 레오노레라는 아가씨의 일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녀는 베르테르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정작 베르테르는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상심했던 듯 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녀의 비극에 어떤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나 가볍게 떠올려 본다. 마찬가지 사건이 베르테르와 로테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어쩌면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대편의 적극적 의사와 상관 없는지도 모른다. 존재 자체가 빌미일 수도 있다. 욕망의 발현은 그 자체로 비극이며, 그 주체가 격정적일수록 비극의 정도는 심각하다.

베르테르의 욕망은 로테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나아가 로테와 현실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첫번째 욕망은 충족되었거나, 충족되었다고 착각된다. 로테가 진정 베르테르를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순간의 정념에 굴복했을 뿐 진심이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베르테르의 수용 태도이지, 로테의 진심이 아니다.

두번째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다. 그래서 첫번째 욕망의 실현 여부도 사실은 미심쩍다. 어쨌든 두번째 욕망의 좌절로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자신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암시하고, 심지어 편지로 죽은 후 시신의 처리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 한다. 한편, 로테는 베르테르의 자살에 쓰일 것이 분명한 권총을 자신의 손으로 하인에게 전달한다.

<돈키호테>에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되는데, 너무 오래 전이어서 내 기억 속에서 윤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둘씨네아라는 처녀 이야기이다. 그녀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마을 총각들은 그녀를 본 순간 반해버렸고, 구애가 실패한 어떤 총각은 자살까지 하였다. 하지만 둘씨네아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누군가가 그녀를 비난한다. 그러자 둘씨네아는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했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도 사랑할 이유는 없으며, 그 욕망이 좌절된 결과로 자살한 것까지 어떻게 책임지느냐 뭐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레오노레는 베르테르를 향해,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해 각기 욕망을 품지만 충족되지 못한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과 관련될 때, 비극은 발생하지만 비극을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부조리하기에 사건의 양상이 종종 광기의 형태를 띤다. 광기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그 엄청난 부조리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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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칼국수를 - 제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김곰치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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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잡지사 기자로 근무하는 헌직은 어머니가 성한 한쪽 눈의 시력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러 귀향길에 오르고, 기차간에서 기형도의 시 <鳥致院>이 꿈속에 틈입한다.

불면증이 있는 누나 혜희의 강권으로 입원한 제림병원에서는 '시신경이 말라 간다는', 병명이 아닌 증상만 되풀이 듣다 차도를 보지 못했고, 결국 약중독에 빠진 어머니를 퇴원시킨다. 퇴원한 어머니는 정신이 나간듯한 행동을 하여 아버지와 가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부산의 종합병원과 서울의 병원을 돌며 진찰한 결과 어머니의 뇌 속에 종양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의사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책임을 덜어내려는 듯 부정적 소견만을 내놓는다.

아버지는 병원을 믿지 못하여 어머니에게 짚과 해삼을 끓인 물을 먹이는가 하면, 토마토나 마늘을 장복해보자고 권하기도 한다. 헌직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자신의 의존적인 대응을 반성하며 회사를 사직한 후 적극적으로 병원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부산의 종합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킨 후 감마시술을 받도록 한다.

감마시술의 경과를 알아보러 가서 종양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는 유예의 말을 들은 헌직과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 분식집에서 칼국수를 먹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어머니와 보내는 이 시간, 언젠가는 추억이 될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추억도 아니고 기억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슬픔의 예감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소중하기만한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 먹는 순간을 소리내어 외쳐본다.

 

새벽 한시다. 사무실이다. 월요일부터 비상당직 근무 체계로 전환 되었고, 졸지에 당직자가 되었다. 당직실에는 침대가 하나 뿐이라 잘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소설은 2011년 개정판이다. 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소설을 12년만에 작가가 대폭 개작하여 천팔백매 분량을 천이백매로 줄였다고 한다.

기형도의 시 <조치원>이 꿈 속으로 틈입하면서 시작된 소설은, 누나의 책꽂이에서 같은 시를 읽으면서 끝이 난다. 기형도의 시집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전형을 떠올리게 된다. 가난한 집, 여자형제 중 한 명의 아들. 그 아들은 공부를 잘해 서울 유수의 대학에 합격하고, 그리고 기자가 된다. <입 속의 검은 잎>을 부끄러워 하지만 결국 데모대의 구호를 내면화 하지 못하고, 붕 뜬 존재인 아들은 자의식을 문학으로 표출한다. 부끄러움과 분노의 절충 상태.

기형도는 영화를 보다가 급사했다. 나중에서야 그 영화가 <뽕2>라는 것을 알고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헌직, 아니 작가 역시 그런 전형을 떠올리게 한다. 동맹휴업 결의 대회에서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퀸카의 엉덩이를 쫓는 것을 보고난 후 자기 검열을 통해 투쟁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떨쳐버릴 수 없는 지식인의 그 자의식과 절망감. 울며 불며 엄마를 살릴 거라며, 집나간 중이 삼십년만에 귀향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주인공 헌직. 그런 자의식과 자기 검열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현재의 소중함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눙쳐지긴 하지만, 어쩐지 뒷맛은 씁쓸하다.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을 떠올린다.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써내려가려 한 그 소설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내가 국내 작가의 소설 읽기를 저어한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근자엔 의식적으로 국내 작가의 소설을 읽으려고 애쓰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잠들기 전 가방에 국내 작가의 소설을 집어넣지만, 아침에 출근할 땐 충동적으로 외국 작가나 장르 소설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모국어로 쓰여진 소설에서 나의 삶을 형성해 온 이 땅의 정서를 읽고, 공감하고, 감정의 동요를 겪는 과정을 싶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12월은 마감할 게 많은 달이다.  

여러 부정적인 의견을 써놓긴 했지만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은 잘 쓰여졌고,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소설시를 써야 하리라는 작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어머니라는 소재를 취하는 모험 아닌 모험을 하면서도 갖가지 함정은 잘 피해나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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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행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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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파티업체 '비밥'을 운영하는 요코야마 겐지는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 미타 소이티로라는 남자가 나타나자 그가 굴지의 대기업 미타 물산 사장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작업을 벌인다. 미타에게 자신의 이벤트 회사 연애인을 붙여준 후 임신을 빙자하여 야쿠자인 후루야 데쓰나가가 협박한다는 단순한 스토리였는데, 협박 중에 미타 소이치로가 단지 미타 물산에 다닌다 뿐이고 실제로는 연필깎이 공장 사장의 아들일 뿐이라는게 밝혀진다. 후루야는 분풀이로 요코야마의 포르쉐를 빼앗고, 급기야 고급 주택가에 미타의 명의를 빌려 도박장까지 개설한다.

요코야마는 스페어키를 이용해 도박장에 들어가 후루야의 돈을 훔칠 궁리를 하는데, 미타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이 날을 잡아 돈을 훔치러 간 날 정체불명의 여자가 나타나 그들을 최루가스로 기절시키고 돈을 탈취한다.

후루야에게 잡혀가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벌벌 떨던 둘은 뜻밖에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 여자가 돈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았음을 알게되고, 다시 찾아간 도박장에서 그녀와 조우한다.

그녀의 이름은 구로가와 치에, 도박장의 단골 시라토리의 딸이다. 시라토리는 치에의 어머니를 버리고 후처와 살고 있으며 세치 혀로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인물이다. 치에는 시라토리가 도박장의 고객들을 상대로 그림 사기를 쳐서 10억엔을 자금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포착하였고, 그 돈을 강탈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요코야마와 미타가 후루야의 푼돈을 훔쳐 도박장이 영업 중단되는 사태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눈에 치에에게 반한 요코야마, 과도한 집중력이 도리어 업무 능력을 방해해 고문관 역할만 하던 끝에 키리바시 공화국으로 이민갈 공상을 하던 미타, 그리고 사기꾼 아버지에게 복수를 꿈꾸는 치에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시라토리의 돈을 훔칠 궁리를 한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계획이 중국 마피아의 개입으로 꼬이기 시작하고 사건은 점점 혼미해져만 간다.

 

이라부 시리즈는 그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가 있었고, <남쪽으로 튀어>는 가벼우면서도 삶의 방식에 대한 작가의 진지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하지만 이번 <한밤중에 행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가볍고 빠른 전개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면이 오쿠다 히데오 소설을 읽는 이유였는데, 이번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4846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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