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는 덫을 놓지 않는다
시드니 셀던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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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 콜로라도 덴버,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과학자들이 살해당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살해 당하기 전 워싱턴으로 가서 '프리마' 라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KIG라는 회사의 연구원이라는 점이었다.

KIG는 '문제가 있는 곳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모토인 씽크탱크 기업으로, 본래 앤드류 킹즐리라는 인류애 넘치는 사람이 CEO 였다. 앤드류는 분자 나노테크놀러지 연구의 공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전세계 기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불행한 사고로 뇌에 손상을 입자 앤드류의 동생 태너가 회사를 물려 받는다. 태너는 회사를 '돈 되는 곳'으로 변모시켰고, 현재는 비영리법인으로 시작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럴싸한 회사가 되었다.

어쨌든 연구원들의 사망 이후 미망인 두 명 - 화가인 다이앤과 모델인 켈리 - 이 남편의 사망을 파헤치던 중 KIG가 연관된 것을 알게 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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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Are You Afraid of the Dark? 로 200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2005년에 발표된 자서전 The Other Side of Me 이니, 사실상 소설로는 마지막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출판사로부터 받은 선납 원고료를 사망 전 반드시 갚아야 하는 데다가 남아있는 시간도 없는 상황" 에서 쓴 소설이라고 가정해야만 할 정도의 처참한 수준을 보여준다.

수수께끼 풀이 따윈 관심이 없고(범인이 소설 초입에 이미 공개), '프리마'란게 뭔지 독자가 궁금해 할테니 힌트를 마구 투척하는가 하면(KIG는 날씨 관련 연구 외에 하는게 않음), 원고료 받은 만큼은 써야했는지 개연성 따윈 개나 주고 우연과 행운의 여신을 겹치기 출연시켜 스토리를 끌고 간다. (여주인공 두 명이 프로킬러의 공격을 열 차례 이상 방어하다가 나중에는 그들을 살해함)

그러다 악당 태너의 처리까지 여주인공에게 맡기는 것은 작가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바보가 된 형 앤드류가 잠깐 정신을 차리고 날씨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태너를 비행기에서 추락시킨다는 설정으로(이 쪽도 정신 나간 것 같은 결말이긴 하지만) 마무리 짓는다.

돈 주고 사서 보면 안 되는 소설을 간만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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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킬러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4
제프 린제이 지음, 김효설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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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해리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과 생활패턴을 철저히 학습받은 연쇄살인범 덱스터는 본작에서 리타와 결혼한다. 이로서 적령기 남성이 거쳐가는 관문을 어김없이 통과하여 위장막 하나를 더 보탠 덱스터는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가고, 거기서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역겨운 예술을 경험한 뒤 연쇄살인범들의 천국 마이애미로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온 마이애미에서 덱스터는 시체를 활용한 또 다른 예술작품(?)을 접하게 된다. 첫번째 발견된 시체는 뚱뚱한 남녀였는데, 그들은 내장이 제거된 자리에 열대과일과 다이빙 용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시체는 연달아 계속 발견되는데, 머리가 사라진 자리에 열대꽃 한 다발이 꽃혀 있거나, 얼음과 병맥주가 내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가정을 거듭하며 범인을 추측하던 덱스터와 동생 데보라의 머리속에 살인범의 의도가 어쩌면 마이애미 관광청을 엿먹이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둘은 최근 관광청에서 해고된 자들의 리스트를 입수해 탐문에 나선다.

그런데 탐문에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보라가 알렉스 돈세비치라는 자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

분노한 덱스터는 알렉스 돈세비치가 연쇄살인범이라 확신하고, '검은승객'과 함께 즉흥적인 살육제를 벌인다. 그러나 피의 갈망을 충족시켜 흡족한 덱스터에게 들려온 소식이 다소 당황스러웠는데, 발견된 네 구의 시체는 사실 시체안치실에서 도난 당한 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알렉스 돈세비치가 데보라를 찌른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덱스터는 아버지 해리가 가르쳐준 원칙에서 한참 벗어난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한편 친오빠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에 혼란을 겪던 데보라가 칼에 찔린 후 경찰로서 계속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 없어 하며 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리타와 아이들 주변을 살인범이 맴돌고, 전편에서 팔다리와 혀까지 잘린 독스 경사가 여전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다가 내사과 직원 이스라엘 살구에로와 FBI요원 레히트, 데보라의 파트너 쿨터까지 모두 사건을 의심하고 나서자 덱스터는 사면초가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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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터> 드라마 시리즈가 <시즌 8> 에서 데보라를 어이없는 총기사고로 사망하게 만든 후 덱스터는 저 멀리 쫓아버리면서 폭력적으로 결말지은 지 8년 만에 <시즌 9>가 발표된다.

그러나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시청자에게 제작자는 덱스터가 아들 손을 빌어 차도자살 하는 결말을 던져 주고 '에라 나도 모르겠다' 식으로 최종 엔드 선언을 해버려 15년에 걸친 <덱스터> 애청자들을 분노와 허탈로 몰아갔다. 씁쓸한 마음과 <덱스터> 드라마를 추억하기 위해 원작 소설을 읽는다.

살인범은 알렉스 돈세비치의 동성 애인인 와이스라는 자로 시체를 활용해 예술작품을 만들고 관객의 반응까지 예술의 범주로 간주하는 다소 괴기스러운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덱스터는 전편에서 팔다리가 잘린 수상쩍은 정보기관 요원이자 데보라의 현 남친 카일 츄츠키의 도움을 받아 쿠바까지 살인범을 쫓아가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오히려 범인이 리타를 납치함으로서 기선을 제압 당한다.

하지만 범인이 친절하게도 덱스터를 의심하는 쿨터를 제거해준 뒤 행위 예술에 골몰하다 리타의 엉덩이 돌진 공격에 자신의 팔이 전기톱에 썰리는 바람에 사망하고 만다.

국내에 발표된 덱스터 소설은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Darkly Dreaming Dexter, 2004>,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Dearly Devoted Dexter, 2005>, <어둠속의 덱스터 Dexter in the Dark, 2007>, <친절한 킬러 덱스터 Dexter by Design, 2009>, <달콤한 킬러 덱스터 Dexter is Delicious, 2010> 이며, 미번역작품으로 <Double Dexter, 2011>, <Dexter's Final Cut, 2013>, <Dexter is Dead, 201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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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외 문학의 세계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최병근 옮김 / 책세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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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 >

제대 명령을 받은 공훈부대 대위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이바노프가 4년 만에 귀향하게 된다. 기차는 제 때 오지 않았고, 그 역시 귀향을 서두르지 않는 듯 했다. 아내와 두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음에도 그는 마샤라는 여자에게 집적대며 뭉그적거린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무언가 달라져 있다. 아내는 셰몬 예브세예비치라는 사내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던 듯 하고, 아직 어린 큰아들은 너무 어른처럼 굴었다. 아직 어린 다섯 살 나스차 만이 어린애다운 귀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셰몬이라는 사내와의 관계를 다그치며 윽박지르다 집을 나가 기차를 탄다. 마샤에게 갈 작정이었을까.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어린 아들과 딸이 그가 탄 기차를 좇아 뛰어오고, 자꾸만 넘어지는 모습을 본 그는 기차에서 뛰어 내린다. (1946년)

< 프로 >

프로샤의 남편 페지카는 집을 떠나 멀리 일을 하러 떠났다. 프로샤는 남편이 없는 빈 자리가 너무나 쓸쓸해서 공부도 잘 할 수 없었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우편배달부 일을 얻어서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엉뚱하게도 남편에게 자신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낸다. 남편은 곧 돌아왔고 며칠간 프로샤와 지낸다.

어느 날 일어나보니 남편은 다시 극동으로 일을 하러 떠나고 없었다. 프로샤는 이웃에 사는 하모니카 부는 꼬마 손님을 집으로 청한다. (1936년)

< 포투단 강 >

적군 병사 니키타 피르소프는 제대 후 이웃에 살던 류바와 결혼한다. 류바의 어머니는 시립학교 교사였고, 그녀의 집은 품격있는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예전에 니키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청혼하고자 했으나 주눅이 들어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그녀의 집이 몰락해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고, 품성이 착한 니키타가 류바를 돌봐주자 류바는 니키타에게 시집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니키타는 류바를 육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불길한 생각을 해댔다. 급기야 포투단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는 망상에 시달리다가 집을 나가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다.

꽤 오랫동안 노숙자 생활을 하던 니키타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니키타는 아내 류바에게 이제 "행복해지는 데 익숙해졌어"라며 안심시킨다. (1937년)

< 안갯빛 청춘 >

열네 살 올가의 부모는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의지할 곳 없는 올가는 이모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냉담했다.

어찌하다 적군 병사들의 도움으로 철도 요원 교육 과정에 입학하고, 기숙사에서 살 수 있게 된 올가는 열심히 공부해서 기관사가 된다.

화차가 떨어져 나간 열차를 통제하려다 사고가 난 올가가 깨어나서 보고 싶었던 것은 유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귀여운 아기 유슈카였다. (1938년)

< 기관사 말체프 >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말체프는 뛰어난 기관사였으나 번개를 맞아 일시적으로 실명하게 된다. 하지만 곧 시력을 회복해 무사히 운행에 성공했으나 법원은 과격하게 운전한 죄를 물었다. "나"는 그가 번개에 맞아서 시력을 일시 잃었던 탓이라고 증언했으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후 말체프는 실제 실험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지만 이번에는 시력을 영구히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말체프가 기차를 탈 때야 말로 예전의 활기를 되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가끔 그를 기차에 태워 운전을 보조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말체프는 기차와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다시금 시력을 회복한 것과 같은 환희를 느낀다.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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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노프 소설에는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막연한 미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조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도망치거나(귀향), 병리적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다.(포투단 강, 프로)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다시 현실로 복귀시키는 데 그 이후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 지는 모르지만 <안갯빛 청춘>의 유슈카나 <프로> 의 하모니카 부는 꼬마 손님, 즉 다음 세대에는 달라질 거라고 낙관하는 듯 보인다.

1917년 혁명과 연이은 내전, 스탈린의 독재와 숙청을 겪은 세대의 러시아 작가들이 흔히 그렇듯 플라토노프 역시 비평계와 정치권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돌아온 아들을 간호하다 폐병에 감염되어 1951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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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벤드에서 느린 왈츠를
로버트 제임스 월러 / 시공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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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틸먼은 주유소를 꾸려가는 아버지 밑에서 터프하게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대학도 장학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경제학으로 방향을 돌려 1970년에 교수 자격증을 따고, 1978년에는 정교수가 된다.

어느 날, 마이클 틸먼은 새로 부임한 교수 지미의 아내 젤리 브래든을 우연히 모임에서 만나게 된다. 둘은 처음 본 순간 서로에게 끌린다.

젤리 브래든은 마이클 틸먼이 '세상에 섞여 살기에는 뭔가 잘못 디자인된 것 같은 사람' , '두주불사에 19세기 뱃사람을 1980년대 세상에 조물주가 잘못 옮겨 놓은 듯한 사람' 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둘의 끌림이 마침내 고백으로 이어지지만 남편과 가정에 대한 의무감으로 젤리는 한 발 빼고, 둘은 그렇게 정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대학측에서 오리 연못을 폐쇄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자 마이클 틸먼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젤리가 오리 옮기는 것을 도와주게 되어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젤리는 그날 틸먼의 아파트로 간다.

하지만 젤리가 지미를 떠나 마이클에게로 오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젤리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나라 인도로 갑자기 떠나버리고, 지미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떠난 지 알지 못한다.

마이클은 즉시 본능에 따라 그녀를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나고 그곳에서 벨라유둠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한 젤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자야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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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월러의 본업이 경제학과 교수였는데, 작품의 주인공 마이클이 그렇다. 어쩌면 작가의 내밀한 욕망을 한껏 반영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채털리 부인의 연인> 플롯을 차용하여 진행되던 소설은 약간의 변주를 가하는데, 이로써 소설은 '야성을 가진 마이클 틸먼 교수 對 거세된 현대의 지미 교수' 가 아니라 '오토바이맨 對 혁명가 디렌 벨라유둠'의 게임이었음이 밝혀진다. 누가 승자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작가는 젤리가 프랑스로 떠나 한동안 방황하고 심지어 프랑스 남자와 침대에 갈 뻔한 짧은 에피소드를 삽입함으로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작가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도 나흘간의 짧은 만남을 - 어쩌면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순간에 불과한 시간 -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도 사랑이란 그 충만한 순간을 벗어나면 결국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랑의 감정이 충일한 나흘간의 순간을 곧 완성이라고 보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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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재원 아트북 8
박덕흠 지음, 박서보.오광수 감수 / 재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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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철도의 고급 관료였던 아돌프 실레와 어머니 마리 실레 사이에서 두 명의 누이인 멜라니와 엘피라 실레를 두고, 빈에서 40킬로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툴른(Tulln)에서 "성적(性的) 열정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로 혹은 "매우 비극적이며 신경증적인 화가"로 일생을 살았다고 혹평을 받기도 한 에곤 실레가 태어났다.

에곤 실레의 그림을 처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어머니 집에 갔다가 작은형 내외와 우연히 담양 메타프로방스 인근 카페에 갔는데, 주인이 에곤 실레를 애호하는 모양이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의 복사본을 실내 곳곳에 걸어 두었는데 묘하게 눈이 갔다.

한동안 그림만 찾아 보다가 그의 생애가 궁금해서 책을 샀는데, 실레의 다양한 그림들이 연대기 순으로 삽입되어 있어 꽤 만 족스럽다.

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이 모두 철도 고급 관리였다. 실레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재능도 이써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곳의 보수적인 교수 방법에 실레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한편, 당시 화단의 대표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실레는 클림트를 동경해서 끊임없이 <빈 분리파>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런 노력 끝에 실레가 17세 되던 해 45세의 클림트를 만나는 데 성공하고, 클림트는 실레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클림트는 실레에게 요세프 호프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데, 호프만은 그후 실레의 재정을 돕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철도 감독관이던 하인리히 베네슈(Heinrich Benesch)와 인연을 맺는데, 그 역시 미술 애호가로 실레의 작품을 다수 수집하게 된다.

1909년 4월 실레는 끝내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결성한 것이 <신(新) 예술 그룹> 이었다. 당시 주로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후에 화가 안톤 페쉬카(Anton Peschka)와 결혼하는 여동생 게르티였는데,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근친 혐의가 있었다.

이 시기 실레는 국제 무대인 <군스트 샤우>에 작품을 출품하는데, "병든 뇌의 기형"을 보여준다"는 혹독한 비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더 뢰쓸러 같은 일부 비평가는 그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이후 실레는 <빈 분리파>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비틀림의 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기 시작했고, 어린 소녀들의 신체에 대한 열망을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찡그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얼굴, 웅크린 몸, 긴장되어 폭발 직전인 신체, 남근상을 보여주며 자위하는 자신의 치부 등이 작품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기나 배꼽, 유두와 눈동자가 선홍색으로 강조되고 배와 겨드랑이 근육은 노란색으로 표현된다. 훗날 미술사가들이 '실레만의 선'으로 부르는 단호한 선들도 이 때 나타난 특징이다.

또한 극단적인 몸짓들이 작품에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당시 빈의 사교계를 울리던 무용수들(루스 생드니스, 이사도라 덩컨), 판토마임을 하던 동료 오젠 등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작품 성향과 달리 사람들은 실레를 무척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라고 판단했으며, 실레 역시 스스로를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레가 자화상 못지 않게 집중했던 분야가 누드화였다. 인체의 뒤틀림을 극한으로 몰아간 누드화 들을 통해서 실레는 성(性)에 대한 절박한 관심을 나타냈다.

1911년 발리 노이질을 만나 동거를 하며 그녀를 모델로 다수의 누드화를 그리게 되고, 모친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주를 한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반대하고, 비틀린 자화상들이 의뢰인들로 부터 외면받자 실레는 노일렝바흐라는 전원도시로 이주한다.

이 시기 실레는 랭보의 시에 영향을 받는 한편, 죽음이라는 주제를 차츰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1912년 4월, 마침내 실레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노일렝바흐 주민들도 실레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작품실에서 발견된 그림들은 그를 곤란하게 했다. 결국 21일간의 구금과 3일간의 징역형으로 끝났지만 실레 인생에서 충격적인 경험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실레의 구속은 뜻밖에도 '오해받는 천재화가', '박해받는 예술적 순교자', '불우한 시대의 고독자' 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노엘바흐 사건 이후인 1912년 11월, 실레는 빈의 부유한 제13지역에 새 거주지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하겐분트(Hagenbund)> 전시회에서 만난 사업가 아우구스트 레데러와 프란츠 하우어 등이 전시회 작품 상당수를 구입해 준 덕에 재정상태가 무척 좋아졌고, 하인리히 베네슈의 지원 등에 힘입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 실레는 예술가협회 <제마(Sema)> 회원이 되었고, <위대한 독일 예술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드레스덴의 아르놀트(Arnold), 함부르크예술협회, <뮌헨 시세션>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1914년 쾰른의 <미술공예협회>에 작품을 보냈고, <디 악티온(Die Aktion)>에서 실레 특집을 마련하는 등 클림트의 뒤를 잇는 또다른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대가로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

1914년 6월 합스부르크 왕조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작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은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실레의 나이 24세였다. 실레는 두 차례 징병검사를 받지만 건강이 좋지 못해 징집대상에서는 제외되어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해에 철도 공무원 집안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동안 동거하며 모델로 헌신했던 발리 노이질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결별이었을 것이다. 발리 노이질은 적십자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1917년 군병원에서 병사한다.

1914년과 1915년에 노골적 성 행위가 그려진 작품들을 그리던 실레는 1916년 징집된다. 오스트리아 남부 뮐링에 배치된 실레는 이곳에서 군인들의 인물화만을 그리다가 1917년 귀향하게 된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사망한 후 1918년 3월 개최된 <빈 시세션>은 실레가 클림트의 뒤를 잇는 대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서 팔려나간 작품들 덕에 실레는 명성과 돈 모두를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실레의 감정과 정서도 차츰 '안정'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대작 <가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공은 1918년 10월 31일, 스페인 독감이 실레의 생을 앗아감에 따라 끝이 난다. 실레의 아이를 임신한 에디트 실레가 죽은 지 3일 후의 일이었고, 실레의 나이 28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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