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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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이 대세다. 긍정이 모든 일의 기본처럼 느껴진다. 요즘 긍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죄악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긍정에 대해 '긍정의 배신' 이라는 제목으로 모두가 긍정을 이야기할 때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경제위기의 근본은 바로 긍정에 있다고 진단한다. 다소 무리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긍정이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 긍정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2000년대인데, 2000년대 미국 경제는 호황이 지속된다.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긍정이 갖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경제학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긍정적 전망을 강요받는다. 미국식 긍정화를 선도했던 교회는 하나님이 집과 자동차를 주실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조차도 집과 자동차를 갖게 되는데 점점 장애가 없어지게 되고 이것이 긍정의 힘이라고 말한다. 긍정은 점점 부정이 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어느샌가 긍정은 강요가 되었다. 경제학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부정적 전망을 내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미디어는 온통 긍정적인 전망이 차지하고 그 뒤에 감쳐진 위험성을 경고하는 학자, 전문가들의 말과 글은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긍정적 사고와 서브프라임 위기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고 본 케빈 필립스는 '나쁜 돈'(Bad Money)에서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과 함께 번영 설교사 오스틴, T.D, 제이크스, 클레플로 달러를 고발했다."(254쪽)

 

최근에는 긍정산업은 과학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다. 긍정하고, 행복하고, 감사한 사람들이 오래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긍정이 가지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셀리그먼으로 저자는 그이를 실제로 두차례 정도 만난다. 저자도 지적하는 바이다. 생물하박사인 저자는 긍정이 수명과 연관되었다는 연구결과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긍정이라는 기준도 모호하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혈관계 질환과 관련해서는 과학적인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연구결과과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즉, 혈관계 질환 외에서는 긍정이 어떤 건강과 어떤 연관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긍정학자들이 주로 거론하는 수명이라는 것이 60~100세에 달한다. 거꾸로 맞춘 연구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추적한 것이 아니라 긍정산업이 대두된 시점부터 거꾸러 찾은 것이다. 수명에 연관이 큰 유전이나, 질병에 대한 고려가 없다. 예들들어 수녀였으니 다른 모든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하는(결과를 내기 위해 맞춘듯한 느낌이 든다.)

 

긍정을 기반으로 하는 동기유발산업은 이제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긍정학이 동기유발산업으로 발전한데에는 미국의 경제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부터 도입된 기업의 정리해고는 미국에서의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 긍정, 행복에서 출발한 동기유발산업은 정리해고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고 더더욱 기업의 문제도 아니고 자신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리해고는 더 좋은 기회라고 이야기한다. '누가 내 치즈~' 처럼.. 사실 동기유발산업은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긍정한다고 일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리해고된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뭔가 의심쩍다. 결국엔 정글같은 경쟁체제는 유지해야 겠고,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이 사회적 불만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부, 기업, 산업 그리고 기독교의 결탁!

 

개인적으로 '긍정'을 기독교에서 몰고 왔다면 불교에서 내세운 건 바로 '힐링'이다. 결국 '긍정'이나 '힐링'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긍정을 통해 사회를 버블로 이끌려는 경제계, 직원들에게 고통을 잊게 해주는 긍정이라는 아편이 필요한 기업들, 정권을 계속 누리려는 정치계 그리고 새로운 모티브가 필요한 종교계가 결탁한 대국민 사기극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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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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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편하다.

5명 모두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삶을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를 16년이나 붙잡고 있을 수 있다.

우연이라고 할까, 다섯명은 모두 대도시 교외의 '중상류'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로, 아버지는 전문직이거나 대기업 사원이었다. 자식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계층이었다. 가정 또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하고 이혼한 부모도 없었으며 어머니는 거의 집에 있었다. 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높은 명문고에 성적 수준도 꽤 높았다. 생활 환경으로 볼 때 그들 다섯은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13쪽)

 

이 책의 소재는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24쪽)이다. 다섯명은 캠프에 참여했다가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12쪽)는 느낌으로 한 그룹이 되었다. 쓰쿠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름에 색깔이 있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 다른 넷은 당연한 것 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아오(靑)','시로(白)','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14쪽)

그러나 쓰쿠루는 무언가를 짓는 다는 뜻의 '作'을 가지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多崎作).

 

이들 5명이 모이면 하나와 다름없었다. 나고야에서 만난 그들은 쓰쿠루가 도쿄의 대학으로 입학하고 1년 후 5명 그룹이 깨진다. 어느 순간 쓰쿠루는 그 모임에서 추방을 당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의 안에 있는 무거운 짐을 새로운 여자친구 사라가 눈치채고 그들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그리고 쓰쿠루는 16년만에 그들을 하나씩 찾아다닌다. 그가 자신의 추방이유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그 짐을 해결해야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그가 시로를 강간해' 모임에서 그를 배제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된다. 물론 그들은 쓰쿠루가 시로를 강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만난 구로(에리)의 설명처럼 모임을 지키기 위해 쓰쿠루를 떨쳐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 그들은 다섯일 때 완벽한 존재였다. 네 색깔의 균형을 잡아준것이 바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였다.  

 

쓰쿠루는 어릴 때 부터 역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역과 관련된 업무를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이름과도 관련되고, 5명의 그룹과도 연관된다. 다른 네명이 각각의 기차라면 쓰쿠루는 역이었다. 다섯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쓰쿠루라는 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소설적 완성도에서는 글쎄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독자는 가만히 읽고, 동화되기만 한다. 독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없다. 초반부에는 3인칭 소설이라고 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사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잘 짜여진 스토리가 되어 서로 잘 엮여진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구로(에리)는 너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필요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핀란드 부분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다섯명의 모임에 있어서 쓰쿠루의 역할이 너무 자세하게 설명이 된다. 굳이 그렇게 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색채가 없는 쓰쿠루의 역할과 역을 좋아하던 쓰쿠루, 그리고 쓰쿠루의 이름속에서 그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핀란드의 뒷부분에 가서는 중언부언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생뚱맞은 부분도 나온다. 프란츠 리스트의 Le Mal Du Pays 순례의 해. 소설의 제목으로 생각한 그리고 16년만에 과거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끌어다 맞춘 느낌이다. 클래식에 문외한이 아닌데도 라자르 베르만이 생소한데, 핀란드에서 라자르 베르만과 알프레드 브렌델은 비교하는 장면이란. (혹시 본인의 음악에 대한 자랑을 소설속에서 이딴식으로)

 

읽고나니 이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장정일의 독서평처럼 시로는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는데 왜 그녀가 교살당했을 때 쓰쿠루는 조사를 받지 않았을까? 여기저기 빈틈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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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자기계발서는 책으로 치지도 않는다. 예전에 누군가 올해 독서 목표가 100권이라고 했는데 읽는 책이 전부 자기계발서였다. 그에 대한 내 판단은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였다.

 

자기계발서를 부정하는 이유가 있다. 얼마전 출간된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제목처럼 이건 사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을 해봐야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쉬운 가정을 해 보자.

 

일을 하고 싶은 100명이 있다. 하지만 일자리는 80개다. 그리고 거기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라면 1명만이 성공한다

그 100명이 똑같은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자기계발서에 나온데로 일년 365일 노력한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20명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일하고 있는 79명은 성공할 수 없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싫어하고 책으로 치지도 않는 이유이다.

 

어쩌다 한번씩 기획회의라는 잡지를 읽곤하는데 재미있는 꼭지가 있었다. '자기계발 다시읽기' 자기계발서를 단순히 터부시 하기만 했는데 자기계발서를 문화적으로 접근한 방법이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니 '거대한 사기극'은 기획회의에 연재되었던 내용이 책으로 엮여저 나온 것이다.

 

생각해보니 2009년에 한국상황과 자기계발을 연구한 책이 출간되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신문에서 소개글을 읽고는 바로 구매했던 책이다.

 

기획회의 352호는 특집으로 '굿바이 자기계발'을 실었다. 이 참에 사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독서를 기획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민주화 이후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생겨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구조조정의 상시화와 지식기반사회라는 사회환경속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관리기법들이 태어나고, 각 개인들은 알아서 자기계발을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책은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기업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영관리기법들을 다루고 있어 관심이 간다. 다만 쉽게 읽기에는 조금 부담이 될 것 같다.

 

<자기계발의 덫>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가 정작 육아문제로 고민하는 자기 딸에게는 계획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말고, 벽에 걸린 시계가 아닌 마음이 하고 싶은데로 하라는 충고를 하는데, 이는 자신이 주장해 온 계획도구들을 자신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모순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계획도구로 많은 이의 돈을 긁어모았으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한... 이 책은 아마도 이렇게 미국에서 유명한 자기계발저자들을 파헤치지 않을까 싶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IT종사자, 문화산업종사자들 처럼 열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계발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 국가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긍정의 배신>은 바바라 애런라이크 배신3부작(노동의배신, 희망의 배신)과 같이 읽을 생각이다. 긍정의 배신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면만 보고,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긍정주의의 메시지가 불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저마다 자신의 쳇바퀴에만 열중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매트릭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유방암 경험에서 시작해 시중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의 메시지, 초대형 교회의 모순적인 설교, 동기 유발 강사들과 기업들의 커넥션, 그리고 세계를 재난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차근차근 더듬어 가며 '긍정주의'의 실체를 우리에게 전하는 저자의 시각은 날카로우면서도 시종 유쾌하고 재치 있다. " 특히 긍정주의가 가져온 문제점을 밝히는 점이 관심을 갖게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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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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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에 대한 반성을 담고 책을 주제로 독서중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기계발에 대한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사회적인 문제에서 독립시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으로 치부하며 개인의 능력을 계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더 이상 서점의 '경영 담론'은 경영 과학을 통한 생산성 증가 같은 전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미사여구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경영 담론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을 '관리'하고 계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경영'과 '삶', 혹은 '노동'과 '삶'은 하나가 되었다. 스펙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뻔한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 계발 도서를 읽으며 동기를 부여 받는다. 이런 방법은 '하면 된다'를 부르짖으며 공업화를 이룩한 한국인의 심성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투혼'을 통해 주어진 인프라 이상의 성적을 뽑아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는 '하면 된다'의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정당화한다. 국가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의주의 개혁, 한국에서는 IMF 외환 위기로 테일러주의가 붕괴한 자본주의 세계엔, 그리고 노동자의 열정을 착취하려는 '펌프질'만 남았다. '열심히'로는 부족했다. 그건 미적지근한 단어였다. 한 TV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열정을 갖지 않은 당신은 죄인이다. (102쪽)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경영의 대세가 된 것은 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이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면 회사는 정년은 아니더라도 꽤 오랜기간 직업이라는 안전장치를 제공해오던 회사와 직원간의 관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회사는 이제 직원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회사 자원의 하나인 인적자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회사 경영이 자원을 적재 적소에 활용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적자원은 깊은 지식과 함께 다양한 능력(역량이 불리는)을 갖춰야 한다. 이 틈을 타고 2000년대 자기 계발서들이 직장인과 예비 직장인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히 직장인에서 멈추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처지임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결국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가 나를 관리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일종의 불명예가 되었다. 이 사회의 노동자 수는 결코 줄지 않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새로 등장한 '자기 계발' 담론들은 그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50쪽)

...

각종 '경영의 기법'의 최종 과녁은 다름 아닌 '나'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언제나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경게를 늦추지 않고, 자발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혁신과 쇄신에 힘쓰는 '1인 기업' 으로서의 나.

이런 '경영 정신'의 뒷면에는 하나의 강박적 주문이 새겨져 있다. '나는 결코 노동자가 아니다. 내가 지금 노동자처럼 일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즉, 나는 누군가의 명령이나 받으며 시키는 일을 하는 그런 수동적이고 나태한 노동자가 아니다. 능력을 계발하고, 인맥을 형성하고, 몸값을 올리고, 비전을 갖고, 성공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자기 계발 담로은 '나'를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은 담론이다. 다이어트, 성형과 같이 육체를 관리하는 일이 자기 계발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51쪽)

사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일반적인 직장인이 아닌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왜곡되어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가를 보여준다. 프로게이머, IT종사자, 문화산업 종사자들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래서 돈이 아닌 열정이 중요하다고 강요한다. (영화시장과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보면 세계적이지만 영화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가 유지되기 힘든 수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돈을 따지고 들면 열정이 부족하다고 판단해버린다.)

 

하지만 책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사회전체와 맞닿아 있다. "사기계발"이라는 주제로 책읽기를 하다 보니 자기계발에 주제를 두고 독서를 하다보니 후기가 전체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개인 스스로가 경영자라는 마인드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산업이나 전체 노동시장이나 똑같다. 결국은 당신이 못해서 성공하지 못했고 실패한 것이라는... 사회와 국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참 염치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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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 - 테마미술강의 001
그리젤다 폴록 지음, 전영백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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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갱의 스커트와 엮어서 읽으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보니 고갱의 스커트에서 이 책의 저자 폴록이 거론되었다.

 

고갱은 과연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 미술가인가? 미술의 본원을 원시성에 찾아낸 작가? 이런 여러 평가들 속에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 이유의 저자 폴록은 고갱을 이렇게 평가한다. "폴 고갱의 작품이 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내러티브를 위해 환상적인 시나라오와 이국적인 미술의 무대를 제공하였다고 생각한다."(13쪽)

그리고 이에 더해 "미술사는 젠더, 성, 그리고 성적 차이의 문제를 억압하면서, 동시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아성에서 성전화한 예술과 예술가들의 성에 대한 거장들의 무비판적 축하의식"(12쪽)이라고 비판한다.

한국어판 서문을 보자면 저자는 "이 책은 '위대한 남성 자가들'에 대해 보통 거론하지 않았던 것들을 감히 말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8쪽)고 말하는데, 저자의 말처럼 위대한 미술가에 대한 찬양일변조인 출판물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폴 고갱의 시선에 대해서 저자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관광객의 관점이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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