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잘되는 카페 - 맨땅의 창업 계획서부터 줄 서는 카페 경영 전략까지
전기홍 지음 / 마일스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그냥 그려러니 하고 책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관심있는 부분이 많았다.

 

저자는 카페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세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그냥 카페를 하면 좋을 것 같아"이들은 카페가 쉬워 보이고 카페가 멋있어 보여서 시작하지만 90% 이상이 망한다고 지적한다. 둘째, "커피가 너무 좋아" 카페창업의 의지가 높지만 커피에만 신경쓰다보니 카페운영은 잘 못하기도 한다. 셋째,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해야지" 이런 유형이 그나마 실패가능성이 적다고 말한다. 즉,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문제를 적절히 짚어냈다.

 

카페가 쉬워 보이는 보이는 사람들이 당장 마딱드리는 것은 넓게 잘 꾸며놓고(인테리어) 좋은 머신을 가져다 놓으면 잘 되는 줄 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SNS 활동을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 매장을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즉,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 위주로 몇년 전 유행을 끌었던 로스터리 카페도 요즘은 운영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커피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높아져 로스터리 카페를 찾던 이들이 조금씩 다른 것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실제 카페 창업과 관련해 목 좋은 곳, 운영방법 등에 실제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까페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이다. 까페에 관심있다면? 이대로 해도 성공할지는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

 

저자의 실전 조언 하나

하루 매출이 30만원 선인 매장에서 2,000만원짜리 에스프레소 머신을 설치한 것을 본 적이 있어. 장비 구입비용을 줄여 500만원짜리로 들여놓으면, 월세가 150만원이라고 할 때 10개월치 월세를 대신할 수 있지. 매출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고 하면 10개월은 너끈히 버틸 수 있어. 괜한 장비 욕심으로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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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때이다. 이 때 무너진 것은 장벽만이 아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카라얀의 시대가 끝나고 단원들이 직접 뽑은 아바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케스트라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무엇보다 혁신을 기대했다. 베를린 필은 아바도가 독자적인 음향을 지켜내면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기를 원했고, 예술적인 부분의 결정에 대해서는 오케스트라가 동등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가 젊은 음악가들을 베를린으로 불러오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

카라얀이 각종 축제에서 오페라 공연을 통해 레퍼토리를 넓혀나갔다면, 아바도는 아방가르드 음악, 아직 주목받지 못한 음악에 집중했다. 그렇다고 고전, 낭만주의 음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덕분에 불레즈나 아르농쿠르 같은 지휘자들이 활발히 베를린의 지휘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카라얀의 거부로 실현될 수 없던 일이었다.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양한 연주 기법을 습득하고 지금까지의 판에 박힌 음향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153쪽) 

 

런던에서는 한 작곡가를 기획했다면, 베를린에서는 한 주제를 기획한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의 새로운 시리즈 음악회를 기획했다. 각 시즌마다 하나의 특정한 주제를 정하고 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춤 영화, 낭송, 강연 등 모든 장르를 결합시켰다. '프로메테우스','파우스트', '셰익스피어', '독일 낭만주의의 방랑자들'을 거쳐 '파르지팔'이라는 주제에까지 도달했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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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도 말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그를 대표하는 관현악단이 되었지만 그가 오랫동안 지휘자로 활동한 곳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79년 프레빈이 떠난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당시 아바도와 런던 심포니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서로간의 신뢰가 쌓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리허설과 음악회 스케줄은 가히 살인적이었어요. 리허설은 하루에 세 차례씩 열리고, 단원들은 일주일 내내 일했죠. 게다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내야 했어요. 그런 상황인데도 아바도의 기대 수준은 늘 높았고, 우리는 그런 그와 함께 정말 멋진 연주회를 일구어냈죠. 절대로 마법처럼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아바도가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혹독하게 단련시켜 얻어낸 결과였죠.

당시 악장이던 마이클 데이비스의 말이다. (366쪽)

 

이후 그는 1986년 부터 빈필을 맡게 되지만, 빈필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아바도는 런던과 베를린에서 한 주제를 연주하는 시도를 한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도 매해 말러 순례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바도는 '구스타프 말러와 20세기'라는 야심 찬 시리즈 음악회를 기획하여 많은 청중들을 바비컨 센터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공연장의 좌석들은 즉시 매진되었고, 다음 해에도 한 작곡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는 음악회를 선보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음악회가 차례로 열렸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편, 367쪽)

 

런던 심포니와 같이 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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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의 호반도시 루체른은 음악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부활적 축제, 여름음악축제에 이어, 가을 피아노축제로 도시를 물들인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루체른이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LFO) 이다.

아바도가 창다한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틀는 이듬해 루체른 페스티벌의 부활절 축제를 책임지는 상주악단으로 지명됐다. 이 악단의 단원들이 성장해서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되자 1997년에는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개명했다. 2003년 이 악단을 모태로 하면서 세계 정상급 독주자와 실내 악단이 수석단원으로 결합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축제를 이끌고 가는 상주 악단의 결합을 맡았다.

 아바도는 그 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한 뒤, 미년 이 축제를 통해서 말러 교향곡의 대장정을 펼치고 있다. 베를린 필의 수석 단원들인 알반베르크 현악 4중주단과 하겐 중주단 등이 멤버로 참여했던 이 오케스트라의 진용은 흡사'클래식 음악계의 레알 마드리드'로 불릴만큼 화려했다. 사실 이는 70년대에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구상했던 축제 오케스트라의 부활이기도 했다. (399쪽)

 

 

아바도는 2003년 말러 2번을 시작으로, 2004년 5번, 2005년 7번, 2006년 6번, 2007년 3번, 2009년 1번과 4번, 2010년 9번을 연주한다.  

 

루체른 음악축제는 위의 사진의 건물인 KKL (Kunst- und Kongresshaus Luzern) 이 완성된 후 새로운 장을 맞는다. 여러 콘서트 홀과 미술관으로 이루어진 복합공연문화시설인 KKL은 이제 루체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만든 이 건물은 그가 특히 좋아하는 검은색과 특유의 단순한 선을 강조하였다 루체른 호수를 내렫보며 서 있다 KKL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이미 세계 현대 건축의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

검고 육중한 건물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검게 반짝이는 대리석과 유리의 세련됨이 한층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171쪽)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변화를 달가워 하지 않는 이도 있다. 뭐랄까 너무 잘 돌아갈 때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루체른 축제는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가족적이고 소박하고 친근하던 분위기는, 형식적이고 정형화되고 사무적인 느낌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KKL 이전의 공연에서는 쉽게 지휘자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던 것을 회상한다. 특히 아바도와 만났던 기억을..

 

어찌되었건 KKL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이 루체른 페스티벌을 즐기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있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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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 주연의 베토벤 바이러스를 한참 재미있게 즐겼다. 당시 강마에(김명민)은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원들을 대하는 모습은 거의 독재자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전문직종의 경우 그런 독재가 통하는 곳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요리의 세계가 그렇고, 예술의 세계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특히나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유명 지휘자들이 독재자처럼 군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니다. 아바도는 거의 대부분의 유명지휘자들이 독재자처럼 군림할 때 민주적인 비상업적인 지휘자로 유명하다.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태리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음악가로 유명한데, 아바도 패밀리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책에 실려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베르디 음악원에 들어갔다. 미켈란젤로 아바도(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그는 졸업 후 라스칼라 극장에 지원했다. 면접관이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출시학교 추천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그는 베르디 음악원에 갔는데, 음악원장은 마르첼로 아바도였다. (클라우디오의 형) 결국 추천서를 받지 못하고 다른 악단에 원서를 냈는데 그곳의 지휘자는 사촌동생 로베르토 아바도였다. 오케스트라를 포기하고 독주를 하기 위해 피아니스트를 찾았는데, 그녀는 누나 마리아 아바도 였다. 이번에는 작곡을 위해 악보 출판사를 찾아가 출판부장을 만났는데 역시 누나 루치아나 아바도 였다.

후에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양로원을 찾았는데 그곳에는 미켈라젤로 아바도가 있었다.

(클래식수첩,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2 및 인터넷 참조)

우스갯소리로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아바도 가문은 음악적으로 대단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부터 음악적 혜택을 보고 자란 아바도는 베르디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운다.(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와 같이 수학했다고 한다) 졸업 후 미국 미트로폴리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빈과 라스칼라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라스칼라를 1968년부터 1986년까지 이끌었고, 1979년에서 1988년 까지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맡았다. 이후 빈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을 거친 그는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가 된다. 그가 분명히 뛰어난 지휘자였던 것은 맞지만 카라얀의 뒤를 이어 아바도가 되었다는 것과 베를린 필하모니 단원들이 투표를 통해 그를 선출했다는 점에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2002년 베를린 필을 떠나 2003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꽃보다 할베에 나온 그 루체른) 평소 젊은 음악가들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스스로 말러 유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말러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그와 친분이 있는 내노라 하는 음악가들이 모여 1년에 한번씩 말러를 순례한다.

 

그 연주를 볼 수 있는 기획 DVD가 있어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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