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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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성남시에서는 청년배당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생소한 개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득은 일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임금없는 일도 상당히 많다는 점(자원봉사, 가사, 동네청소 등)을 생각해보면 소득과 일이 꼭 일대일인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 또는 시민배당이라는 생각도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곧 '상식'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은 심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상 이렇게 '사유화'가 진행된 것은 불과 몇백 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 생태적 위기, 불안과 팍팍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공유'라는 개념에 기반해서 재원을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불평등을 완화하고 불안을 줄이며,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생태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18쪽)

 

실제 시민배당을 실시하는 곳이 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는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자원을 재원으로 주민들에게 배당을 지급한 적이 있다. 사실 천연자원이나 기본자원, 토지나 환경은 개인의 소유라고 하기 힘든 자원이다. 그런자원을 공유재로 활용하여 수익을 국민, 시민들에게 배당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기본 삶을 위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에서 공유재를 활용한 기본소득의 보장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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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는 많은 책들이 소개된다.

그 책들을 읽어봄으로 아니면 책 정보라도 알아두면 독서를 확장시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는 리처드 세넷의 책이 네권이나 언급된다. 리처드 세넷 생소한데 이 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라딘 저자 파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몇 안 되는 미국인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2006년에는 헤겔상, 2010년에는 스피노자상을 수상했다. 1998년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란 평을 얻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를 비롯해 노동사회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계급의 숨겨진 상처>,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뉴 캐피털리즘> 등을 썼다

 

 

한두개 직장에서 한걸음씩 진급하는 전통적인 직업은 이제 퇴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 한가지 기술만으로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졌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세넷에게 가면쓰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간교가 아니다. "은폐의 가면이 반드시 자기방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의범절과 책략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을 가려주는 행동이다."(투게더)

마음을 쏟고 일을 하고 즐기려면 과거와는 다른, 아주 개인적인 방식의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리처드 세넷은 <뉴캐피탈리즘>에서 자본주의의 문화에 맞서기 위한 근본적인 가치로 장인 정신을 다시 불러낸다.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으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관객'으로부터 자유롭게, 오히려 진짜 '자기주도적으로' 일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다. (불평등사회의 인간존중)

 

      

 

태국에서는 '사눅'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 현재 활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뜻한다. .. 태국사람들은 사눅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어 모든 활동을 '사눅(재미있는)'과 '마이 사눅(재미없는)'으로 나눈다고 한다. (일의 발견)

"나에게 일이란 언제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놀이와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뛰는 회사)

"노력금지라는 게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은데 인위적으로 하려는 것들을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노력금지)

알랭 드 보통은 21세기 일의 현장 열 곳을 직접 둘러본 뒤 그 취재기를 엮어 <일의 기쁨과 슬픔>을 펴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눈다. ...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물학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작업은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픈 욕구에서 나온다. 행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픈 욕구에 응답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노동 윤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공장에 끌어다 앉히려던 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의 새로운 노동윤리는 장인의 성실성을 요구하면서도 장인을 장인답게 하는 자긍심과 주체성을 원하지는 않았다.

꾸준함을 칭송하던 과거의 노동윤리를 되살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좋은 방법 같지 않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이미 '단기간'이 '장기간'을 대체했고, 즉시성이 궁극적인 이상이 되었다. (액체근대)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지은이는 <일>이 "하루치 빵과 하루의 의미, 현금과 인정받음, 무관심이 아닌 경이로움에 대한 책"이라면서 133명 대부분이일에서 하루치 급료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열정'을 요청하는 사회적 명령 속에서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끌어내고 있는지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독일어에서 노동을 가리키는 아르바이트는 시련, 박해, 역경, 곤경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쓴 조지 쉬언은 "아이들은 뭘 하면서 목적을 묻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묻는 일도 없다"며 우리 모두가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가 달린다>를 쓴 마크 롤랜즈는 "놀이는 그 자체를 위해 하는 행위"라는데 본질적 가치가 있으며, "일로 가득한 삶은 놀이로만 구원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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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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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시대를 거친 윗세대는 젊은 청년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윗세대는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았다. 경제는 해마다 성장하고, 기업들은 사람들이 모잘랐다.

지금 현재 청년들이 하는 일이란 윗세대의 고졸이 하던 일을 대졸 청년이, 대졸이 하던 일은 MBA나 석박사들이 하고 있다. 그만큼 고스펙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보다 일자리가 모자른다. 성장이 정체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나 경제인들은 해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릴 대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청년들을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청년들 스스로가 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는 아주 더럽고, 재수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 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 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사람들은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일하며 살아왔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된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유인하는 데 골머리를 썩었다. 탈산업화된 시대에 접어든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산업시대에나 탈산업화시대에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111쪽)

 

 

소비 중심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소비수준으로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소비는 곧 능력이다. 그리고 고가의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록 능력있는 기업이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능력 있는 인간으로 치환되는 사회다. 벌어들이는 돈의 양으로 일의 성과가 측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벌이를 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카지노에서 게임의 자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칩 뿐이다. 무엇이 칩이고 무엇이 칩이 아닌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카지노가 지닌 권력의 핵심이다.(102쪽)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215쪽)

가정은 노동 공동체이며 교육 공동체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소비를 위한 재원을 공유하는 소비 공동체일 뿐이다.(217쪽)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 능력이라는 것도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건데, 결국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게 평가받는 쪽으로 능력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실상 능력에 따른 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경쟁에 의해 나라가 세워졌던 미국을 제외하고는(아마 한국도...)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사이에 세상은 능력을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을 넘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부모의 재력을 무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 환경의 덕이기도 하다.(144쪽)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50-60퍼센트 내외)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미국 사람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렇다'는 답변 비율이 70퍼센트 미만인 나라가 18개국 중 11개국이나 됐다.(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단 한 나라도 없다.) 능력주의가 공정 사회와 같은 말이 된 것이 그리 역사가 오래된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145쪽)

 

우리는 모두 내리막길에 서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 세대보다 돈을 못 버는 세대의 등장. 그런 우리에게 세상은 자기계발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세상이 원하는 논리에 맞춘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은 빠짐없이 '자기 주도'를 말하고, 자유롭게 꿈을 추구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적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숨어 있다. 자신의 주인공이 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그럴 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을 전제로 한다. 웃거나 울거나,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하는 관객이 있어야만 드라마는 성립한다. 고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면 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실 드라마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207쪽)

 

이 책에서는 이런 규정화된 직업을 떠나 자신만의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소개된다. 저자 역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노력을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내리막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내려가든 행여 재수좋게 오르막길에 올라타던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같이 살아야 한다.

원해서든 아니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정된 일터 없이 일해야 한다는 현실을 맞이할 것이다. 고정된 일터가 없더라도 여전히 활동으로서의 일은 존재한다. 따라서 동료도 있고, 고객도 있으며, 돈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세트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번 자신에게 맞는 일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앞의 말대로 `능동적 자유`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셈이다.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을 여러 일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 능동적 자유는 본성상 불안전성을 품고 있다. 여기서의 불안정성이란 당연히 경제적 불안전성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불안정성이다. 고정된 장소, 고정된 관계망의 밖에서 일함으로써 느끼는 불안정성은 단순히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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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조직 - 조직은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병들게 하는가?
앤 윌슨 섀프 & 다이앤 패설 지음, 강수돌 옮김 / 이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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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비전기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성과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조직구성원들 모두가 비전을 공유하고 그 비전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조직원이 조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초일류 기업은 일에 대한 집착을 바람직한 것으로 촉진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터스와 오스틴*은 기업에 대한 헌신이 사람들의 삶에 목적을 부여하며 자아 존중감을 회복하게 해 준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태도에 의문을 품는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여태껏 기업들에서 수용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온 것들이 사실은 개인과 조직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 그것도 빠르게 진행되는 질병이란 점이다. (40쪽)

(* 우리가 혁신의 문제를 좀 더 완전하게 숙고하려면 피터스와 워터스만이 쓴 "초우량기업의 조건"이나 피터스와 오스틴이 쓴 "탁월성을 향한 열정"같은 책도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조직이 돌아가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비전기업이 대두되면서 조직은 점점 더 실제와 거리가 먼 비전을 강조한다. 실제와 동 떨어진. 

흥미롭게도 우리는 조직이 내세우는 사명이 고상할수록 실제 행동은 표리부동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여기서 표리부동은 명시적 목표와 비명시적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할 때 두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 때, 조직은 경직된 부인의 시스템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런 행동에는 꼭 과장된 허장성세가 뒤따른다.

...

사명이라는 이름의 허장성세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사명감은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이러한 착각이 조직이 내세우는 사명이나 목표의 본질적 목적이다.(184쪽)

 

조직자체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중독물로 기능하는 경우, 조직의 사명이나 비전을 계속 강조하는 일은 그 조직의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직원들이 조직의 전망에 눈이 멀어 있는 한, 현실에 존재하는 괴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 구성원이 눈치를 챈다 할지라도 조직 내에 별 탈 없이 머물기 위해 아마도 침묵하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조직의 사명은 조직 구성원들에게 일체감을 부여하는 강력한 원천이다. (186쪽)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강요하는 것 중의 하나가 미쳐야 한다. 아니 사실 중년들에게도 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성공한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에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알콜중독자가 알콜 하나에만 관심을 갖듯이 그렇게 사회에 중독을 강요한다.

 

우리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중독을 조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면밀히 살펴보면 사회는 분명 중독을 촉진한다. 사회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란 따지고 보면 죽은 것도 아니요. 산 것도 아닌 존재, 그저 무감각한 좀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죽은 존재라면 당신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당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면 당신을 사회가 요구하는 숱한 일들이나 돌아가는 과정(일례로 인종차별, 환경오염, 핵 위협, 군비경쟁, 식수 오염, 발암 음식 섭취 등)에 대해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모난 돌을 정으로 쳐 내고','중독물fixes'에 휩쓸리게 하고, 우리를 '넋이 나간' 좀비처럼 만드는 것은 이 사회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결국 사회 자체가 중독을 적극 부채질할 뿐 아니라 중독자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92쪽)

 

그리고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일에 미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중독을 강요하고, 조직의 문제를 발견하기 보다는 조직의 지속을 위해 일에만 집중하기를 강요한다.

일중독이란 다루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중독이다. 일중독자들은 설사 그 질병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194쪽)

 

중독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개이이나 아이디어에서 무언가 잘못된 점을 발견할 경우, 그 사람이나 아이디어가 완전히 폐기 처분되기도 한다. 그 역도 성립하는데, 한 가지만 좋으면 모두 좋은 것처럼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일중독에서 뭔가 한 가지라도 좋은 게 발견되면, 그 전체 과정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일중독의 밑바탕에는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애착이 자리하고 있기에 일중독을 부정하거나 숨기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 그 애착이란 다름아닌 경제에 기반한 시스템, 즉 자본주의이며 그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사회구조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기독교가 이 둘을 모두 지탱한다.(201쪽)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런 중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회가, 특히 조직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결국은 중독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의 첫번째 진단은 중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독 조직이 아픈 조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273쪽)

 

이 책은 1988년에 나왔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굉장히 뛰어난 지적으로 느껴진다. 아니,우 오히려 사회는 점점 더 중독되기를 강조한다. 점점 더 세상을 가혹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은 강수돌 교수께서 했다. 그동안 자본주의 경제속에서 주체적 개인에 고민을 하셨던, 그의 이야기가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중독 시스템 처럼 보인다. 기업은 이윤과 경쟁에 중독되어 전 구성원을 일중독이나 돈 중독으로 몰아간다. 조직 구성원들은 조직 자체에 중독되기도 한다. ...

그리하여 온 사회가 중독 분위기에 물든다. ..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광고들은 우리에게 소비를 통해 누추하고 비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광고는 소비 중독뿐 아니라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권력 중독까지 정당화한다.(338쪽)

 

내가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이다. 세월호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이후의 대응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는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성장과 부에 중독되어 침몰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끔찍한 신호였다. 대한민국 전체가 일종의 중독 조직이요. 중독 사회였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시기라는 생각이 절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그 과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 보았다.

물론, 이 책 하나가 중독조직과 중독가 개인, 나아가 중독 사회를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다만 입문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개념과 통찰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조직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면.... 우리 삶의 사각지대, 조식 생활의 사각지대를 구석구석 비춰주는 손전등이 될 것이다.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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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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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잠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다. 어둠이 오랫동안 깔리는 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을 위해 소련은 백야를 연구하기도 했고, 미국은 잠을 안자고 비행하는 철새의 비밀을 연구하기도 했다.

목적은 사람들이 잠을 안 자고 지내는 동시에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14쪽)

 

잠은 근대의 적이었다. 17세기 중엽이후 철학자들은 잠이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 했다. 잠으로 인생의 1/3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사회에 전반적인 생각이다.

 

잠이 항상 적으로 취급된 것은 아니다. 산업화의 속도와 더불어 자본주의는 휴식이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산업은 잠과 상관없이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24시간 근무체제를 향해 나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왜 이토록 잠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잠의 기본적인 속성은 아무것도 안함이다. 사실은 그 동안에 뇌와 몸의 각 기관들은 쉬임없이 역할을 수행하지만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큰 장애물이다.

 

잠은 심오하게 무용하고 본래 수동적이며 생산시간, 유통, 소비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에 24/7 세계의 요구와 언제나 충돌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의 크나큰 일부분으로서 우리가 가짜 필요의 늪에서 해방되어 잠을 자면서 보내는 시간은 현시대 자본주의의 게걸스러움에 인간이 가하는 심대한 모욕들 가운데 하나로서 존속한다. 잠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시간을 도둑질해가는 것을 비타협적으로 방해한다.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불변의 요소로 보이는 것의 대부분은 상품화되거나 금융화된 형태로 개조되어왔다. 잠은 식민화하여 수익성의 거대한 엔진에 연결해 활용하는 게 불가능한 인간적 필요와 막간의 관념을 제기하며, 그리하여 전 세계적인 현재 안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변칙이자 위기의 현장으로 남는다. 이 분야의 모든 과학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잠은 그것을 이용하거나 변형하고자 하는 일체의 전략을 좌절시키고 곤경에 빠트린다.(26쪽)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원래 책이 좀 어렵게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사용되는 단어들도 익숙하지 않고,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잠에 대해 보다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렵지만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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