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이동섭 지음 / 미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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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전에 보테로 전시에 가지 못했을 때 무척이나 아쉬웠다. 보테로의 그림을 보는 순간 확 그림에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건 뭐지.. 도대체 왜 이따위로 그리는거야 라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2015년 드디어 그의 작품을 만났다. 왜곡되어있지만 오히려 더 사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추상이 대세이던 시기였지만, 이처럼 보테로는 고전 화가들의 작품을 파고들었다. 미대 교수들은 그에게 고전을 따라할 게 아니라 그만의 스타일을 찾으라고 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회화란 무엇인지, 회화의 근본적인 체계는 어떠한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18쪽)

 

그리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라틴 문화가 담겨있다. 그는 콜롬비아 출신이다.

 

보테로가 추상보다 인물화를 좋아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인물화야말로 자신의 뿌리인 남미 문화의 전통과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 머물던 내내 남미 예술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남미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24쪽)

그들의 작품을 면밀히 관찰한 보테로는, 오로스코와 시케이로스의 표현주의 화풍보다는 리베라가 그린 거대한 크기의 멕시코 벽화에 더 끌렸다. 왜냐하면 벽화의 기하학적인 구조와 단순한 구성 등이 그가 좋아하는 회화 스타일, 특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보테로는 결정적인 요소 하나를 찾아냈다. 바로 그의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스타일로 자리매김한 거대한 조형성이다.

사실, 인물과 대상을 거대하게 표현하는 방식은 당시 남미 화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남미 벽화운동의 선구자로서, 화폭의 대부분을 전형적이고 단순화된 인물들로 채우는 리베로의 스타일은 보테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27쪽)

 

사실 그의 그림이 처음부터 둥글둥글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의 보테로가 프레스코와 멕시코 벽화 등을 통해 대상의 비율과 크기 등을 탐구했다면, 뉴욕에 정착한 60년부터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대상을 둥글둥글하고 풍만하게 묘사하는 '볼륨 기법'을 발전시켜 나간다. 거기에 고르고 밝은 색채, 외곽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형태 등 남미 민속 미술의 특징을 적극 참조했다. 60년대 초반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다소 거친 붓 터치는 후반기로 갈수록 확연히 부드러워진다. 형태는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색채까지 더욱 밝아지고 깔끔해진다. ... 이렇게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보테로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완전히 확립된다.(39쪽)

 

그의 볼륨감 넘치는 그림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왜 그렇게 그렸을까이다. 아름답기만 한 다른 유명 대가의 작품보다 그의 그림에 확 빠져든 것도 그런 느낌이다.

 

그는 단지 볼륨감 있게만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의 바탕에 라틴 문화가 있었던 것처럼 최근의 그의 작품은 전쟁과 학살과 아픔이 담겨있다.

총에 맞은 사람역시 볼륨감있다. 웃기게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게 그림에서 나오게 된다. 단순히 그림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아 .. 맞다. 지금 이런 일이 있지.

볼륨감 넘치는 그림 스타일로 인해 보테로가 삶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그린 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 깊게 뿌리 내닌 조국 콜롬비아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1990년 후반부터, 그의 작품들은 납치, 학살, 고문, 죽음과 같은 아주 현실적인 주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이던 유머나 여유는 사라지고 어두운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졌다.

최근에도 이와 유사한 주제를 그렸는데,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보테로는, 이라크 전쟁의 산물인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이라크 죄수들에 대한 미군의 잔혹한 고문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삶과 풍만함에 대한 보테로의 찬양은 잔인함과 고통에 대한 증오와 짝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74쪽)

 

전시에서는 그의 최근작들을 보지못했다. 보테로의 최근 그의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꼭 재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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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권 자유경제원장, 좌편향 역사 교과서 논할 자격 있나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지난 22일(현지시각) 자체 누리집에 올린 보도자료에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 교수의 저서 <위대한 탈출>의 한국어 번역판이 원전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은 채 변경됐으며,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이 책을 명백하게 피게티의 <21세기 자본>에 반하는 위치에 두려는 한국 경제학자 서문이 포함된 채로 출간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이러한 변경과 새로운 서문은 원저자나 프린스턴대 출판부에 의해 사전에 검토되거나 승인된 것이 아니다"고 명시했다.  "

http://www.nocutnews.co.kr/news/4493885

 

프린스턴대, "노벨경제학상 '위대한 탈출' 한국 번역책은 ' 왜곡 번역' "  

"아울러 성명에서 프린스턴 대 출판부는 "이 책을 명백하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반하는 위치에 두려는 입장이 담긴, 한국 경제학자가 쓴 서문이 포함된 채로 출간됐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책이 불평등에 관한 다른 저작들과 대조적으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 이 한국책의 서문은 새 번역에서 빠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http://news1.kr/articles/?2467855

이 책의 논란의 서문을 쓴 이는 현진권이라고 자유경제원 원장이다. 저자로부터 이런말을 썼다고 지적받았다. 나같으면 쪽팔려서 원장 자리 내려놓고 칩거에 들어가겠다. 그런데 좌편향 교과서 운운하고, 또 낙선운동 벌이겠다.

 

참 양심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 이런 사람은 출판계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한경BP도 마찬가지다. 이 따위 서문을 쓴 것은 두가지 이유로 생각된다.

첫째, 책을 읽지 않고 서문을 썼다. 그럼 양심도 없는 사람이다.

둘째, 책을 읽었지만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이건 범죄다. 서문을 다르게 써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

 

이 사람이 쓴 책들을 알아보자. 이런 사람이 쓴 책은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 제 정신이 아닌데 제대로 책을 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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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린 2015-10-26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제적 망신입니다...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 개정판
앙드레 살몽 지음, 강경 옮김 / 다빈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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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그는 참 잘 생겼다. 이탈리아 태생의 그는 그림을 찾아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뜨에서 그리고 몽파르나스에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려낸다. 유파도 없다. 그냥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는 중간에 조각에 뜻을 두었다. 잘 안됐다. 하지만 그 때 조각의 경험이 그의 그림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모딜리아니의 모든 여성상을 특징짓는 것은 긴 목이었다. 거기에는 희화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정열이 정신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모딜리아니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의 정열을 말로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포착한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색조를 만들어내는 데 신중했으며, 자기만의 형태를 생각해내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 두 가지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나는 조화로운 구성인 동시에 무한한 변화가 가능한 법칙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감이라고 불리는 것과 그 깊숙이 미적 감각이 존재하는 서정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코 보완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완전한 인물을 창조해내지는 않았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잘 몰랐지만,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와 인물상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세기 공통의 특색이 나타난다. 그것은 깊은 인간성의 상징이다. 정신, 나는 감히 시대정신이라고 말하지만 그 정신에 따라 최종적인 제약을 가함으로써 독창성이 비로소 나타는 것이리라.
(237쪽)

 

 

 책은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앙드레 살몽이 지었다. 개인 전기라기 보다는 친구의 입장에서 서술했다고 볼 수 있다. 한눈에 모딜리아니를 알기는 쉽지 않다. 다른 모딜리아니 전기를 읽고 이 책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만 읽어서는 모딜리아니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진은 모딜리아니, 피카소, 살몽)

 

평점 : 별셋인 이유. 모딜리아니를 처음 읽는 다면 나중에... 모딜리아니를 깊이 들여다 보고 싶다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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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거스 디턴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는데 한국 기사가 수상했다.

 

그래서 영문기사를 찾아봤다. 한국 기사와 다르다.

 

한국기사는 제목이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한다.', '반 피케티' 였다.

그런데 기사를 읽어보면 조금 다르다. 피케티가 앵거스 디턴의 불평등 연구에 도움을 받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가디언지를 보면 난민의 원인이 불평등이라고 말한 앵거스 디턴의 기사도 나온다. 뭔가 이상하다. 이런 내용이 SNS를 타고 널리 알려졌다.

 

저녁때가 되니 조선일보가 먼저 선수친다.

'앵거스 디턴 한국에선 '판피케티, 해외에선 ... '이라며 관점의 차이라고 어물쩡 넘어간다.

 좀 너무했다고 생각했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문기사를 검색할 줄 몰랐나 보다.

 

 

위대한 왜곡?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번역에 관하여

http://socialandmaterial.net/?p=33921

 

라는 글에 따르면

 

한국경제신문이 펴낸 <위대한 탈출>은 단순히 마케팅만 자기들 입맛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 부제목뿐만 아니라 부(part), 장(chapter), 절(section)의 제목이 대부분 바뀌었고,
  • 절의 경우, 원문의 절 구분을 빼는 동시에 없던 절 제목을 집어넣기도 했고,
  •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자기들 멋대로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 심지어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 어떤 경우엔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한국경제신문이 신문이라기 보다는 대기업 홍보기사 써주는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하다.

 

* 한국경제신문의 최대주주은 현대차이고 삼성,lg,sk까지 합쳐 40%쯤 된다. 나머지 주주 모두 전경련회원사 

 

젠장, 원서 주문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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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5-10-19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좌절입니다. -_-;;;; 이렇게까지 뻔뻔해서야.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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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노벨문학상은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선정되었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이름.

 

책을 들었다. 발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처럼 출근하고 퇴근한다. 월급도 평균적으로 받는다.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떠난다. 아내와 아이들도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체르노빌 사람이 되어버린다.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생물체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묻는다. "거기 무서웠나요?" "발전소가 어떻게 탔죠?" "무엇을 봤어요?" "아이는 낳을 수 있대요?" "아내는 안 떠났어요?" 순식간에 희귀 전시물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체르노빌레츠'라는 단어가 들리면 사람들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서 왔대!"(66쪽)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바로 며칠전 노벨경제학상과 관련해 조선,중앙,동아, 매경, 한경이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영문기사들을 좀 검색해봤다. 뉴욕타임즈를 읽다가 내가 발췌한 부분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There you are: a normal person. A little person. You’re just like everyone else — you go to work, you return from work. You get an average salary. Once a year you go on vacation. You’re a normal person! And then one day you’re turned into a Chernobyl person, an animal that everyone’s interested in, and that no one knows anything about. You want to be like everyone else, and now you can’t. People look at you differently. They ask you: Was it scary? How did the station burn? What did you see? And, you know, can you have children? Did your wife leave you? At first we were all turned into animals. The very word “Chernobyl” is like a signal. Everyone turns their head to look. He’s from there!

 

 

출판평론가 장은수씨는 SNS에서 이렇게 그녀를 설명했다. 그녀를 읽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국내 언론에서 알렉시에비치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면서 "목소리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작가 스스로가 밝힌 바도 있어서 못 쓸 표현은 아니지만,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 해외 뉴스를 살펴보건대 그다지 널리 쓰이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을 강조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뜻이다.

알렉시에비치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그보다는 "사실들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들의 역사"를 그려냈다는 평가가 절묘했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의 목소리" "소비에트 연방 또는 소비에트 연방 이후 개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는 말도 와 닿았다.

목소리가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고, 알렉시에비치는 여러 작품에서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침묵을 강요하는 정치적,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 없이 좋은 문학도 없다. 표현 그 자체에 정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정치가 표현을 만든다. 또 표현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 수천 명의 목소리를 누적해서 새로운 표현을 개척한 알렉시에비치에게 경의를 표한다.

 

선정이유와 선정에 대한 그녀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스웨덴 한림원은 이날 이에 앞서 알렉시예비치가 "다성적(多聲的· polyphonic) 글쓰기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용기를 담아내는 데에 기념비적인 공로를 세웠다"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날 벨라루스의 민스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을 수상해 개인적인 기쁨'을 느낀다"면서도 "이 상은 나를 위한 상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고통받아온(caught in a grinder throughout history) 작은 나라, 우리의 문화에 주는 상"이라고 말했다. 구소련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에 짓눌린 약소국의 비애가 담긴 말로 풀이된다.

그는 또 "전체주의 체제와 너무 쉽게 타협하지 말라"는 충고의 말도 곁들였다. 이어 "우리 시대엔 정직한 사람이 되기가 힘들다"면서 "전체주의 체제가 제안하는 타협에 쉽게 응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http://news1.kr/articles/?2453512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목소리들이 들려내는 소리에 담겨있는 아픔을 견뎌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4년동안 수술을 네 차례 했다. 이런 복잡한 병리현상을 지니고 살아남은 유일한 벨라루스 아기가 내 딸이다. 나는 딸을 매우 사랑한다. (잠시 멈춘다) 나는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다. 용기가 없다. 산부인과에서 돌아온 후로 남편이 내게 키스하면 나는 벌벌 떤다. 우리는 이러면 안 돼. 이건 죄야. 두려워 (135쪽)

그 좋은 어머니가 내가 체르노빌 출신 이주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놀랐어요. "얘야, 아이를 낳을 수 있겠니?" 그런데 우리는 이미 혼인신고를 했어요. 그이가 애원했어요. "집에서 나올게, 어디 세 들어 살자." 하지만 내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려요. "얘야, 아이를 낳는 게 죄인 사람이 있단다." 사랑하는 것이 죄에요.(164쪽)

 

사랑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첫 아이를 기다렸어요. 남편은 아들을, 나는 딸이 태어나기를 바랐어요. 의사가 나를 설득했어요. "임신 중절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남편께서 체르노빌에 오래 계셨어요."
운전기사인 남편은 사고가 난 직후 그곳으로 불려 갔어요. 모래와 콘크리트를 운반했거든요. 하지만 난 아무도 안 믿었어요. 믿기 싫었어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죽음까지도 ·····.
내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났어요. 손가락도 두 개 모자랐어요. 여자아이였어요. 난 울었어요. 손가락이라도 다 있었더라면 ·····. 여자 아이잖아요.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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