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공동교재를 개발하고자 노력한 결과, 2005년 동아시아 공동의 근현대사 인식을 목표로 한·중·일 학자와 시민이 공동으로 펴낸 <미래를 여는 역사>가, 2012년에는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한국, 일본,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이들 책은 주변 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관계사와 민중생할의 이해를 모색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단체나 경로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다양한 공동역사교재들이 개발되었다. 한국의 서울시립대학교가 주축이 된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의 도쿄학예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교육연구회는 10년에 걸친 공동연구와 토론 끝에 <한일 교류의 역사>를 펴냈다. 한국의 전국역사교육모임과 일본의 역사교육자협의회에 속한 역사 교사들의 간의 교류는 <마주보는 한일사>로 결실을 보았다. 한국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와 일본 히로시마교직원조합 소속 역사교사들은 <조선통신사>에 이어 <한국과 일본, 그 사이의 역사>를 펴내면서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히 많은 공동의 역사 경험을 가지고 있다. 두나라가 함께 겪은 역사적 사실을 각 나라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갈등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어느 한 나라가 가해국이고 다른 나라가 피해국인 역사적 사실의 경우, 생각의 차이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역사 해석이나 서술 차이를 극복하고 역사인식을 공유하려는 노력은,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역사상을 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화해를 통해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41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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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중사>의 간행은 1980년대 중반 사회민주화 움직임이 배경이 되었다. 사회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학계에서도 진보적 학술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은 과연 '학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지난날 연구실에서 안주하던 것을 반성하고 학문이 사회민주화를 촉진하고 사회변혁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현실과 유리된 역사 연구를 극복하고 사회 현실의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입장에 선 역사 연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생겨났다. 이른바 '민중사학'의 출현이었다. <한국민중사>의 집필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역사학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280쪽)

 

문학에서도 노동자나 농민, 도시 빈민 등 민중의 삶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나왔다. 개발의 열풍 속에서 삶의 막다른 길로 내몰린 철거민 이야기를 다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난쏘공'이라는 애칭과 함께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농촌의 현실을 다룬 이문구의 <우리 동네>,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윤락녀를 통해 사회구조의 모순을 밝힌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나중에 원저자가 이동철로 밝혀짐), 도시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이 발표되어 민중에 대한 관심을 높혔다. (282쪽)

         

 

 한국역사연구회는 1989년에 대학 교양과정 강의용 한국사 개설서인 <한국사강의>를 낸 데 이어, 1992년에 본격적인 한국사 통사인 <한국역사>를 펴냈다. <한국역사>는 사회구성체의 발전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각 시대의 사회구조와 변혁 세력의 형성·발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구로역사연구소도 민중 주체의 민족사를 취지로 1990년에 <바로 보는 우리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 책의 취지는 집필자들이 스스로 '바보사'라고 부르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바로보는 우리 역사'를 약칭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지배층이 어리석고 무식하다고 깔보던 민중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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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국정화는 자본주의와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다수의 출판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과서의 독점체제를 가져간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왜 MB정부나 박근혜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내세우는데 하는 짓은 정 반대인지.

 

1970년대 박정희정권은 교과서를 국정화로 바꾸는 과정역시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뒤 국정이라는 이름을 1종이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바꾼다.

 

검인정교과서사건은 유신정책 등을 덮으려는 표적수사였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정희정부는 초·중·고 교과서의 발행제도를 바꾸면서, 상당수의 주요 과목 교과서를 국정제로 발행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했다. 더구나 교과서 국정제와 함께 진행된 단이론 교과서 정책은 1977년에 '검인정교과서 사건'을 낳고 말아싸. 1977년 2월에 경찰과 국세청은,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가 1974년부터 문교부와 국세청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교과서의 가격 인상, 내용 수정, 성일법인 지정 등의 특혜를 받아 거액의 부당 이익을 올리고도 탈세를 했다는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24쪽) 

국정교과서를 급하게 만드려는 시도는 박정희정권때나 박근혜정부때나 똑같다. 급하게 만들려고 하는 태도가 그렇다.

국정 국사 교과서를 1974년부터 사용하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문제는 이에 맞춰 교과서를 발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국정교과서 편찬은 시간을 다투는 매우 촉박한 작업이 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 발표 날짜를 디데이로 하고, 여기에 맞춰서 국사교과서 개발 일정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 디데이가 언제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계획을 보면 당시 정부가 1974년부터 국정 국사교과서를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급히 국사교과서 개발을 추진하였는지 보여준다.(213쪽)

 

국정교과서는 독과점의 문제를 안고있다. 그래서 박정희정부는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는 회사를 만들기도 하는데, 지금의 미래앤인가 싶다. 아마도 그 과정에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갔을 거라 생각되지만.

정부는 국정 국사 교과서의 발행을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에 밑기는 방안을 추진했다.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는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들이 함께 출자하여 만든, 교과서의 생산과 공급을 주업무로 하는 회사였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발행권을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에 맡긴 것은 교과서의 국정화에 따른 출판사와 검인정교과서 저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교과서 국정화 조치가 특정출판사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출판업계의 의심을 해소할 목적도 있었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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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전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자본주의 맹아라는 부분을 공부한 기억이 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뉴라이트, 혹은 교과서 좌편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옛날 식민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 연구의 과제는 여전히 여전히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숙사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식민사학의 논리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이 강하고 영향이 큰 것은 당파성론과 타율성론이었지만, 식민사학의 뿌리는 일선동조론과 정체성론이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보의 한국 병합이 두 나라 민족을 원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선동조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지 못하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한국이 독립된 뒤로, 일선동조론은 더 이상 그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정체성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국제사호에서 통용되던 논리였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은 강국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너희는 세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발전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의 이치이다. 그러는 편이 너희도 발전을 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제국주의 논리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특히 조선은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 극심한 당쟁, 성리학만을 떠받드는 사상적 경직성, 봉건사회 결여론 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이런 논리들을 여러 측면에서 반박하였다.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깨뜨리는 것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길이었으며, 한국사 연구의 핵심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의 실천은 실증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한국사 연구는 두 가지 측면을 밝혀야 했다. 하나는 한국사도 역사발전의 일반적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영향력 없이도 한국사가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55쪽)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연구는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 집중되었다. 한국사에도 자생적인 근대적 발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연구는 조선후기 한국사회 내부에 자본주의 맹가가 존재하였음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

조선후기 농업에서는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하여 견종법(골뿌림법) 등 농법의 개선과 이모작 등 효율적인 농지 이용으로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경영형 부농이 생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 농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상업에서는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특권상인들의 경쟁하였다. 상인들중에는 막강한 자본력으로 물품을 독점하는 도고상인들도 나타났다. 수공업에서도 점차 민영수공업이 성장하였다. 일부 대상인들은 선대제를 도입하여 수공업자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자유수공업도 마타났다. 상인들은 자본을 동원하여 광산경영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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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교육의 역사 -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역사교육이 걸어온 길
역사교육연구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에서 역사교육이 시작을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전기 <동몽선습>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몽선습>은 역사서라기 보다는 중국중심의 충, 효 등이 강조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자국사라는 개념이 생겼다.

<동사강목>은 유교적 도덕 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강목체 역사서답게 대의명분과 충성, 절의라는 도덕 기준에 따라 자국사를 바라보고, 절의를 지킨 인물과 애국 항재을 강조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하던 견해를 부정하고,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기준이 지리에 있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전통적 화이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강목체 사서의 기본 특징인 유교적 교훈 중심의 정치사, 사대부 중심의 역사인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자적인 자국사 연구와 편찬에서 일대 획을 그은 책이었다. (55쪽)

 

조선말에 이르러서 주체적인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지만, 일제시대 들어 역사교육자체가 말살되는 데에까지 이른다. 일제시대의 국사는 일본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는데, <보통학교 국사>가 대표적이다.

"천황은 히로시마 대본영에 계셨는데 좁은 집무실에서 밤낮으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셨다. 그리고 황송하옵게도, 출정군인과 고락을 함께하시겠다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숨기시고 마디마디가 에이는 혹한에도 스토브조차 사용하지 않으실 정도였다. 그리하여 출정 장병은 집을 잊고 몸을 던져서 점점 충성과 용맹을 나타내고, 국민은 모두 이것을 후원하여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사에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와 같은 커다라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보통학교 국사 하권, 134~135쪽>"

 

천황의 솔선수범과 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당파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율곡은 이것을 걱정하여 그 싸움을 그치게 하려고 힘을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고, 점차 많은 당파를 만들어 각각 정권을 잡으려고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려 꾀하매, 이때부터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도 조선인 사이에 노,소,남,북 4색의 구분이 있음은 그 잔재이다.<보통학교 국사>하권 11쪽"

 

<보통학교 국사>에는 위대한 일본제국의 역사상과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상이 하나의 교과서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친 것이다. (115쪽)

 

일제강점기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역시 역사에 개입하게 하는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교육을 국민통합과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광복 이후에도 교육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렇듯 한국사교육을 민족의식과 국민의식 형성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려는 과도한 정책적 의도와 경향은 황국신민화 정책기의 역사교육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150쪽)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해방 직후만 해도 역사교과서에 38선의 성립과 남북 문제에 관해 미국과 소련 양쪽에 공평하게 책임을 돌리는 서술이 우세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민족의 대립이 동족상잔으로 이어지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외세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다른 반쪽이 가장 중요한 적으로 등장하는 적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경계의 대상이었던 외세가 '새로운 적'인 민족의 다른 반쪽을 넘어서기 위한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다. 전쟁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속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핵심 사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남북 양쪽에서 정권 유지와 반대 세력 축출에 6·25전쟁과 남북 분단을 활용하는 폐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169쪽)

 

역사교과서과 본격적으로 정권의 홍보물로 전락한 것은 박정희시대 후반부부터이다.

1969년 교육과정의 부분 개정 이후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변화를 살펴보면, 각 시대별로 대외관계를 중시했으며, 현대사 부분에서 베트남 파병,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국가비상사태 선언, 남북 대화 등 구체적인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5·16 쿠테타를 혁명으로 부르면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 개정은 이후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방향을 보여주었으며,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출발점이 되었다.(177쪽)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국적있는 교육'을 강화하며 국사교과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아울러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을 역사 읽기 교재로 활용한다.

"고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는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발휘되었는데, 특히 이것은 무인의 전통으로 이어져, 일찌기 거란과의 항쟁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거니와, 몽고와의 항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라거나, "삼별초가 3~4년 동안에 걸쳐 대몽 자주 항쟁을 벌인 것은 역시 고려 무인의 전통적 기백을 드러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라는 <시련과극복>의 서술은 무인의 국난 극복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단적인 사례다. 이러한 서술은 박정희 정부가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192~193쪽)

 

그런데, 이러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역사교과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1994년에 있었다. 당시의 역사연구를 반영하여 6·25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바꾼다거나, 4·3항쟁으로 용어를 바꾸고 이승만과정의 독재화 과정 및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등에 객관적 서술을 권고했는데, 이는 보수 우파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개정 시안의 내용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과 단체들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시안의 내용이 '위험한' 민중사관에 근거하여 북한을 지지하고 남한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비판에 직면한 교육부는 논란이 된 용어나 내용을 대부분 종전의 교과서와 같이 되돌렸다. ...

이 사건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으며, 정권의 홍보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에 대한 보수·우익의 반격이었다. 민중사학이나 기존의 교과서 비판에 맞서 보수·우익 관점의 <국사>교과서 서술을 그대로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의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은 2000년대 들어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와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과 역사 이념 논쟁으로 이어졌다.(222쪽) 

 

2000년대 후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다시 역사교과서에 손을 댄다.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나타나 역사전쟁의 선봉에 선다. 금성출판사는 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뉴라이트 파동과 관련해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태동이라는 시각을 제시한다. 1980년대 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한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국사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성의 입장에서 보려는 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한 점 등이 비슷하다.

 

역사교육의 역사로 보면 우리에게 역사교육은 항상 왜곡으로 가득차 있다. 정치적인 공세는 다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는데까지 돌아간다. 역사계의 성과에는 눈을 감고 가르치고 싶은 것만 왜곡해서 가르치겠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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