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월 11일)은 성소수자의 날이란다. 성소수자들은 퀴어축제를 열고 보수단체는 그 반대집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오늘 읽었던 책에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은 성소수자의 날" 서울광장 퀴어축제..동성애 반대 맞불집회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611142859087

 

오늘날 동성애와 성소수자 의제는 보수 개신교 세력과 우익 단체들이 '종북' 다음으로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가 됐다. 국가기구는 이런 목소리를 핑계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긍정하는 제도적 조치를 취하려 할 때마다 대다수 국민을 자칭하는 이들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면서 공적 공간에서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다루는 것은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가로막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반공주의(레드콤플렉스)에 더해 이른바 '레인보 콤플렉스'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상황은 일베 현상으로 대표되는 소수자 혐오의 부상과도 맞닿아 있다. 성소수자와 더불어 여성, 이주민, 종북 좌파, 전라도, 세월호 유가족 등 체계적 인 차별과 권력의 피해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의 표출이 희망 없는 시대에 좌절과 무기력이 낳은 공백을 채우고 있다. (230-231쪽)

 

 

혐오의 정치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미움받는 특정 집단으로 돌리는 마녀사냥의 정치이기도 하다. 혐오의 시대에 성소수자들은 출신율 저하와 에이즈 확산부터 국가 안보 위기, 심지어 건강보험료 인상의 주범으로서 가정, 사회, 국가를 위협 한다고 지목된다. 이주민 혐오나 여성 혐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주민은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지역을 더럽히고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매도당한다. 여성들은 특혜와 보호를 받으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김치녀로 비하된다.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 지배자들은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 구조를 개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양산하는 불평등과 불안은 혐오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극단적인 경쟁만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 민주주의와 인권 보 장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형식적인 수준일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역사적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겨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한 시대를 살펴보면 지배 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적 권리 전반을 후퇴시키고 소수자들을 속죄양 삼는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독일 민족의 우월함과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이주민, 성소수자들이 글자 그 대로 대량 학살당했다. 스탈린주의 소련에서는 동성애자를 파시스트로, 나중에는 자본주의적 일탈자로 비난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 선풍의 또 다른 희생양은 동성애자들이었다. '종북 게이'를 떠올리게 하는 코미 핑코 퀴어 commie pinko queer 호모빨갱이라는 표현이 당시 언론에 둥장했다. 최근 러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서도 서구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동성애를 비전통적이라고 비난하며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활용하곤 한다. 2008년 이후 지속된 세게적인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 상황에서 미국, 유럽 등에서 나치의 부상과 함께 성소수자 혐오와 이주민 혐오가 부각되기도 했다. 시민 혁명으로 오랜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통치가 부활하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있다. (235-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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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계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이름의 웹사이트가 생겼다. 대학에 몸담은 수백명의 여자들이 그동안 남자들에게 가르침당하고, 무시당하고, 말을 가로채인 경험을 그 웹사이트에서 공유했다. 또 내 글이 발표된 직후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데, 가끔은 내가 그 말을 만든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한 신조어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 ) 사실 나는 그 단어의 탄생과는 관계가 없다. 현실에서 그 개념을 구현한 남자들과 더불어 내 글이 그 단어의 탄생에 영감을 좀 준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정작 나는 그 단어가 약간 미심쩍게 느껴지기 때문에 잘 쓰진 않는다. 그 단어는 모든 남자에게 그런 타고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는 남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 들고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혹시라도 본문에서 내 뜻이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봐 부연하자면, 나도 애가 흥미가 있지만 미처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그 내용을 잘 아는 상대가 설명해주는 것은 아주 좋아한다. 대화가 어긋나는 것은 내가 알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내게 가르치려 들 때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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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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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 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 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 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15쪽)

 

저자 레베카 솔닛은 황당한 경험을 한다. 한 파티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상대방인 레베카 솔닛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종종 보게되는 장면인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 자신도 무언가 자꾸 설명하려 든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런 내용이 불편하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 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45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인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 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데에는 근본원인은 권위주의다. 그 권위주의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굳어져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무려 40세대를 망라하는 신약 마태복음의 가계도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이어진다(다만 요셉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아버지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언급 되지 않는다).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마태복음에 나온 예수의 부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일종의 토템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중세의 여러 예술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작성하는 가계도의 선조라고 일컬어진다. 이처럼 - 가부장제의, 가계의, 내러티브의 - 일관성은 삭제와 배제를 통해 확보된다. (103쪽)

여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또 있다. 이름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을 간직하 지만 대부분의 다른 문화에서는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붙는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최근까지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 앞에 ‘부인(Mrs.)을 붙여 불렀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는 가령 샬럿 브론테 이기를 그만두고 아서 니콜스 부인이 되었다. 이름은 여성의 계보를 지우고 여성의 존재마저 지운다. (105-106쪽)

 

실제로 사회제도 자체가 여성을 일관성있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성에 대한 권위는 배제된 여성위에서 만들어졌다.

여성에 대한 배제는 현실적으로 발생한다. 사회에서도 쉽게 발생하는 일들인데, 교수에 의한 조교에 대한 성폭력 문제나, 회사내 임원의 여직원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있을때, (남성과 여성의 발언이 있을때) 여성의 발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인식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의심하는 반응을 보 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 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 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 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 현들을 동시에 (154쪽)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즉 옷차림 등을 거론하며 차별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일어나지만, 나 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살인사건이 있었다.

한명의 비참한 젊은 남성 살인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가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금요일의 아일라비스타에서 우리의 평형은 깨어졌다. 지각판 사이의 긴장이 분출해 지진이 난 것처럼, 젠더의 영역들이 약간 이동했다. 학살 때문에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곳곳의 여러 추모제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치켜들었다면, 이 대화에서는 사람들이 생각과 단어와 이야기를 치켜들었다. 그것들 또한 어둠을 밝혔다. 어쩌면 이 변화는 앞으로 더 자랄 것이고 더 지속될 것이고, 더 중요해 질 것이고, 그리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가될 것이다. (197쪽)

 

그리고 우리도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묻어 두었던 것들에 균열이 일어났다. 여성이란 무엇인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얼마나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것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많이 식상하다. 너무 뻔한 좌파적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 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 의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잘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사빠띠스따(Zapatista) 혁명처럼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환경, 경제, 토착문화 둥둥 여러 관점을 폭넓게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운동들을 떠 올려보자 그런 운동이야말로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 즘의 미래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페미니즘의 현 재인지도 모른다, 1994년에 일어난 사빠띠스따 혁명은 지 금껏 진행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사업들도 무수히 많 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자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새롭게 상상하고 있다.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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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에 든 것은 김대식의 책들이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와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은 뇌에 대한 것들을 담은 책이다.

세상은 뇌가 보는 것이 아니다. 뇌가 아는 것을 본 것이 세상이다.(191쪽,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두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 자신이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뇌라는 프레임이 인식하는데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검 드레스 논란이다. 우리 뇌는 뇌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정보를 해석한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와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 있는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이 조금 더 추천할만 하다.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인간, 존재, 역사 등 좀 더 큰 의미의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물론 후반부에는 인공지능 시대를 이야기한다. 즉, 인공지능시대를 맞아 인간에 대해 되돌아보는 책이다. 이 책은 호불호가 굉장히 갈리는 책이다. 다루는 분야가 다양하다 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충분히 문제를 삼을 수도 있고, 때로는 기존의 이론들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김대식 교수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김대식의 인간vs기계>는 인공지능의 입문서로 그만이다. 인공지능을 설명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지능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들어간다. 설명은 무엇인지? 그것이 언어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약 절반에 가깝게 설명하는데, 조금은 지루해보일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 그간 인공지능이 왜 어려웠는지, 지금의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명확하게 보인다.

 

        

 

 인공지능 시대에 김대식교수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 리뷰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http://blog.aladin.co.kr/rainaroma/8492230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http://blog.aladin.co.kr/rainaroma/8493756

김대식의 빅퀘스천 http://blog.aladin.co.kr/rainaroma/8524551

김대식의 인간vs기계 http://blog.aladin.co.kr/rainaroma/852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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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6-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공지능에 관련되어 한국에도 좋은 작가, 좋은 책이 있었군요. 리뷰들의 주소까지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페미니즘도 그렇고 인공지능도 그렇고 관심분야를 파시는 스타일이신가 보네요. 부럽습니다. 저는 몇 권 읽으면 관심이 줄어들어서 우향님처럼 많이 못 읽겠어요ㅠ

친구신청하고 갑니다~^^

雨香 2016-06-23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궁금한 게 생기면 그쪽분야 책들을 좀 챙겨보는 편입니다.
종종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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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전에 읽은 책을 다시 들쳐본다)

 

인공지능이 이제서야 인공지능 다워진것은 왜 일까?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여기에 김대식이 아주 핵심적인 설명을 한다.

 

전통적인 인공지능이 지능을 획득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기계에 설명을 입력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 설명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설명을 하는 사람이 답을 알고 있어야 해요. 둘째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답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호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언어체제가 필요하다고 보면 됩니다. (33~34쪽)

라이프니치는 수학이 유일하게 오해가 없는 언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은 증명의 학문이기 때문에 주장하고 싶으면 증명하면 되고 증명됐다면 믿으면 됩니다. ... 언어를 수학으로 바꾼다는 것은 수학화된 언어로 계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치는 이진법을 만듭니다. 언어를 계산할 수 있는 숫자로 바꿔 준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0과 1의 조합으로 바꿔서 대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58쪽)

 

그렇다면 언어를 기호적으로 표현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기호들과 기호들 간의 관계도 수학적으로 표현을 해보자해서 만든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컴퓨터에서 사용하고 있는 불의 논리Boolean logic 입니다. 이 문법은 몇 개 안됩니다. AND, OR, NOT, NAND ···. 네다섯개만 있으면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죠. 이제 문자도 있고 문법도 있으니 세상일을 표현할수 있는 완벽한 언어가 생겼습니다. 세상일들 혹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호화시킬 수 있고 표현한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문법도 수학화하게 된 것입니다. (66쪽)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2,500년 동안 서양철학에선 모든 건 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가지고 2,500년 동안 연구를 했는데,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비트겐슈타인이 찾았습니다. NAND로 말이죠. 하지만 알고 보니 표현할 수 없는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그냥 침묵을 지키는 게 최고구나. 결론은 말할 수 없는 게 있구나'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로은 현대 뇌과학에서 말하는 들어오는 정보를 대부분 언어 처리 할 수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10퍼센트만 낸드로 표현이 되고 나머지 90퍼센트는 낸드로 표현할 수 없이죠. (140쪽)

 

기계에게 '우리같이 팔다리를 움직여봐'라고 아무리 말한다고 기계가 모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언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정보와 기능은 딥러닝 같은 방식을 통해 기계에게 학습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게 된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을 지켜야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의 딥러닝은 표현할 수 없는 건 학습을 시켜서 해결하겠다는 원리입니다.(141~142쪽)

 

설명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언어가 필요했다. 거기에 and, or, not 만 있으면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그런데 언어를 표현할 수 없는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존에 로직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계가 있던 것이다. 그런데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머신러닝이 해결하게 되었다. 그토록 힘들었던 인공지능이 왜 이제서야 인공지능스러워 졌는지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나 현실이 되었다. 터미네이터 이야기가 나오는 등 이제 인공지능은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은 위험한 상황이 되기에는 아직은 여유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그런데 알 수 없다. 기술이 발전해온 속도를 보면'이라는 단서를 단다. 김대식은 효과적으로 이를 설명한다. 1900년과 1913년의 동일한 장소의 사진을 보여준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면 정부가 주도하여 무인자동차를 더 상용화시킬 것입니다. .. 유인자동차를 금지시키는 법안 혹은 무인자동차만 생산해야 한다거나 혹은 새 차 등록은 무인자동차에 한한다는 법만 통과시키면 됩니다. .. 말도 안되는 상상 같지만, 150년 전까지 사람들은 말을 탈 줄 알았지만 지금 말을 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900년 부활절 아침, 뉴욕 5번가의 사진 속 거의 모든 운송수단은 마차였습니다. 딱 한대의 자동차가 있습니다. ... 하지만 신기하게도 13년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의 사진을 보면 모든 운송수단이 자동차입니다. 마차는 단 한대도 없어요.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 중 늘 걱정해야 할 부분은, 기술은 어느 한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특이점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 특이점은 나중에 알 수 있어요. 대체로 직선형태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이점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죠. 우리는 과거로 미래를 예측하다보니 현상태에서는 선형으로 증가한다고 예상하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 (268~270쪽)

 

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의 직관을 넘어섰다.

 

김대식은 인공지능 시대에 대해 더 많은 문제점과 사례, 그리고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산업혁명을 견뎌내고, 각 종 기술변혁시대를 견뎌낸 것 처럼 역시 인간은 이 상황을 해결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김대식은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의 시대에 인간은 공교육 제도를 도입했고, 자본주의를 사회를 지탱할 각 종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대비가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인공지능 시대에 쓸모없어질 전문직이 되기 위한 교육에만 열중할 뿐이다.

 

몇 몇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시대에 인간은 멸종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게 나쁜거냐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인간중심적인 생각으로 살았다.

 

인류는 1만 년, 2만 년 전부터 지구를 인간의 편의대로 다 바꿔놨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지 재해석했습니다. 공기가 깨끗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숨을 쉬어야 하니까, 숲을 베고 댐을 만드는 일들 모두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이리저리 바꿔놨습니다. 아무도 인간에게 이런 권리를 허락해준 적은 없 습니다. 인류가 그 권리를 스스로에게 줬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에서 인류가 제일 똑똑하기 때문이었죠. 지구에서의 알파 동물이니까요. 그리고 그 재해석의 마지막에 '그럼 사람은 왜 있어야 되나?'라는 질문은 우리가 사회적 으로 합의하여 서로 하지 않기로 한 거죠. (320쪽)

 

어찌보면 인간의 멸종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세대가 호모사피엔스의 마지막세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종은 종족번식이 목적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기억과 유전자를 후손에게 넘기는 것인데,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었고, 인간의 모든 것이 인공지능으로 넘겨진다고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쉬우려나.

 

한번 인간이 아닌 외부의 눈으로 인간-인공지능의 관계를 볼 필요도 있겠다. 그렇거나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하루 하루가 생존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과거의 산 업혁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19세기 에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혁신적 인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로는 프랑 스에서 공교육이란 것을 시작했습니다. 왜 공교육을 도입했을까요? 국영수라는 학습과정을 만든 거잖아요. 왜 국영수를 만들었을까요? 1차 산업혁명 때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글을 못 읽었습니다.

대부분 농부였죠. 글을 못 읽는 농부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공장에서 일을 시키려니 적어도 글을 읽고 계산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 당시에는 정말로 킬 러 애플리 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입니다. 글을 가르쳐주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어쩌면 살아남은 거죠. 우리는 인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291쪽)

둘째로 독일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보험제도지요. 셋째로 영국에서 세금제도가 생겼 습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모든 수입이 농업을 통한 것이었는데, 농업이 점점 사라지니까 기계에 대한 누진세 등을 만들어 산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죠.

이 세 가지 제도로 19세기 1,2차 산업 혁명은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산업혁명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향후 20~30년 후에도 벌어질 일이지만 인류는 아 직 아무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291-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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