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때 언급된 것 중에 하나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실시하는 나라였다. 일단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베트남의 경우는 유엔의 권고에 따라 국정제에서 검인정제로 바꾸려는데, 한국의 사례를 참고하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 검인정제에서 국정화로 가고 있다.

 

물론 국정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이 있긴 하지만, 국민 전체가 얼마 되지 않아 자유발행을 하는 것이 비효율적인 나라이다.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국정제를 실시한 적이 아예 없다. 일본, 독일은 20세기 초 국정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두 나라의 국정제를 통해 우리나라의 현실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우

 

나치 정권은 자신의 이념을 담고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교에서 가르치게 했다. 모든 과목에 걸쳐 국정도서가 개발되었다. 이 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독본과 역사 교과서였다. 나치 독일은 1939년에 학생들이 배우는 독본교과서로 <영원한 민족>을 만들었다. 이 책은 나치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반다원주의, 애국주의, 반유대주의가 이 책의 특징이다.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인종주의 성격을 드러냈다. 또한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중에 용기와 대담성, 자신보다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히틀러를 우상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51쪽)

 

독일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제국주의로의 길>은 대표적인 역사교과서로 꼽힌다. 이 책은 당시 독일, 즉 나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를 인간 발달의 가장 높은 단계로 여기고, 독일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국가로 성장했는지 서술했다. 지난 날에 대한 반성 없이 현재 사회를 발전의 관점에서만 보고, 이런 과정만을 서술해야 한다는 '긍정의 역사관'이었다. (52쪽)

 

학교교육을 통해 새로운 체제에 충성하고 히틀러와 그의 권위에 복종하는 마음을 독일인들에게 내면화시키고자 했다. 히틀러에 대한 충성 고백이 역사교육에서 이루어졌다. 제3제국의 건설과 히틀러의 업적이나 영웅성은 교육의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 소독일주의로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 보다 히틀러가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되었다. 교육은 히틀러 우상숭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53쪽)

 

일본의 경우

교과서 의혹사건이란, 교과서에 천황을 모독하는 내용과 성풍속을 어지럽히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채택과정에서 뇌물이 오갔다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기존의 검정 제도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면서 국정제를 도입했다. 이를 두고 일본 한계에서는 검정제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국정제를 추진했다기보다는, 국정제 반대 목소리를 누르기 위해 이 사건들을 이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56쪽)

 

전시에서 학교 교육의 목표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전사를 길러내는 것이었다. '성전'에 참가하여 천황을 위하여 죽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도록 교육했다. 교과서에서 천황은 '살아 있는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걸린 천황과 황후의 초상화인 어진영에 참배를 해야 했다. 교과서는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신민의 도리라고 강조했다.(58쪽)

 

이처럼 교육은 청소년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삼는 데 이용되었다. 일본 청소년은 물론 식민지 조선의 청소년들조차 태평양 전쟁을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천황의 병사로 전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바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였다.(59쪽)

 

일본과 독일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가가 국사교과서 국정제를 추진한 것은 사회적 분쟁이 심한 때가 아니었다. ··· 오히려 특정 집단이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들이 자신의 이념을 사회에 전파하고 권력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 도입한 것이 교과서 국정제다. 교과서 국정화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회 통합이었다.(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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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공동교재를 개발하고자 노력한 결과, 2005년 동아시아 공동의 근현대사 인식을 목표로 한·중·일 학자와 시민이 공동으로 펴낸 <미래를 여는 역사>가, 2012년에는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한국, 일본,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이들 책은 주변 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관계사와 민중생할의 이해를 모색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단체나 경로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다양한 공동역사교재들이 개발되었다. 한국의 서울시립대학교가 주축이 된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의 도쿄학예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교육연구회는 10년에 걸친 공동연구와 토론 끝에 <한일 교류의 역사>를 펴냈다. 한국의 전국역사교육모임과 일본의 역사교육자협의회에 속한 역사 교사들의 간의 교류는 <마주보는 한일사>로 결실을 보았다. 한국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와 일본 히로시마교직원조합 소속 역사교사들은 <조선통신사>에 이어 <한국과 일본, 그 사이의 역사>를 펴내면서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히 많은 공동의 역사 경험을 가지고 있다. 두나라가 함께 겪은 역사적 사실을 각 나라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갈등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어느 한 나라가 가해국이고 다른 나라가 피해국인 역사적 사실의 경우, 생각의 차이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역사 해석이나 서술 차이를 극복하고 역사인식을 공유하려는 노력은,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역사상을 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화해를 통해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41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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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중사>의 간행은 1980년대 중반 사회민주화 움직임이 배경이 되었다. 사회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학계에서도 진보적 학술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은 과연 '학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지난날 연구실에서 안주하던 것을 반성하고 학문이 사회민주화를 촉진하고 사회변혁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현실과 유리된 역사 연구를 극복하고 사회 현실의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입장에 선 역사 연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생겨났다. 이른바 '민중사학'의 출현이었다. <한국민중사>의 집필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역사학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280쪽)

 

문학에서도 노동자나 농민, 도시 빈민 등 민중의 삶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나왔다. 개발의 열풍 속에서 삶의 막다른 길로 내몰린 철거민 이야기를 다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난쏘공'이라는 애칭과 함께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농촌의 현실을 다룬 이문구의 <우리 동네>,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윤락녀를 통해 사회구조의 모순을 밝힌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나중에 원저자가 이동철로 밝혀짐), 도시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이 발표되어 민중에 대한 관심을 높혔다. (282쪽)

         

 

 한국역사연구회는 1989년에 대학 교양과정 강의용 한국사 개설서인 <한국사강의>를 낸 데 이어, 1992년에 본격적인 한국사 통사인 <한국역사>를 펴냈다. <한국역사>는 사회구성체의 발전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각 시대의 사회구조와 변혁 세력의 형성·발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구로역사연구소도 민중 주체의 민족사를 취지로 1990년에 <바로 보는 우리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 책의 취지는 집필자들이 스스로 '바보사'라고 부르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바로보는 우리 역사'를 약칭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지배층이 어리석고 무식하다고 깔보던 민중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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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국정화는 자본주의와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다수의 출판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과서의 독점체제를 가져간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왜 MB정부나 박근혜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내세우는데 하는 짓은 정 반대인지.

 

1970년대 박정희정권은 교과서를 국정화로 바꾸는 과정역시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뒤 국정이라는 이름을 1종이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바꾼다.

 

검인정교과서사건은 유신정책 등을 덮으려는 표적수사였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정희정부는 초·중·고 교과서의 발행제도를 바꾸면서, 상당수의 주요 과목 교과서를 국정제로 발행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했다. 더구나 교과서 국정제와 함께 진행된 단이론 교과서 정책은 1977년에 '검인정교과서 사건'을 낳고 말아싸. 1977년 2월에 경찰과 국세청은,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가 1974년부터 문교부와 국세청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교과서의 가격 인상, 내용 수정, 성일법인 지정 등의 특혜를 받아 거액의 부당 이익을 올리고도 탈세를 했다는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24쪽) 

국정교과서를 급하게 만드려는 시도는 박정희정권때나 박근혜정부때나 똑같다. 급하게 만들려고 하는 태도가 그렇다.

국정 국사 교과서를 1974년부터 사용하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문제는 이에 맞춰 교과서를 발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국정교과서 편찬은 시간을 다투는 매우 촉박한 작업이 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 발표 날짜를 디데이로 하고, 여기에 맞춰서 국사교과서 개발 일정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 디데이가 언제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계획을 보면 당시 정부가 1974년부터 국정 국사교과서를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급히 국사교과서 개발을 추진하였는지 보여준다.(213쪽)

 

국정교과서는 독과점의 문제를 안고있다. 그래서 박정희정부는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는 회사를 만들기도 하는데, 지금의 미래앤인가 싶다. 아마도 그 과정에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갔을 거라 생각되지만.

정부는 국정 국사 교과서의 발행을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에 밑기는 방안을 추진했다.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는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들이 함께 출자하여 만든, 교과서의 생산과 공급을 주업무로 하는 회사였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발행권을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에 맡긴 것은 교과서의 국정화에 따른 출판사와 검인정교과서 저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교과서 국정화 조치가 특정출판사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출판업계의 의심을 해소할 목적도 있었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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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전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자본주의 맹아라는 부분을 공부한 기억이 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뉴라이트, 혹은 교과서 좌편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옛날 식민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 연구의 과제는 여전히 여전히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숙사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식민사학의 논리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이 강하고 영향이 큰 것은 당파성론과 타율성론이었지만, 식민사학의 뿌리는 일선동조론과 정체성론이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보의 한국 병합이 두 나라 민족을 원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선동조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지 못하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한국이 독립된 뒤로, 일선동조론은 더 이상 그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정체성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국제사호에서 통용되던 논리였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은 강국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너희는 세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발전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의 이치이다. 그러는 편이 너희도 발전을 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제국주의 논리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특히 조선은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 극심한 당쟁, 성리학만을 떠받드는 사상적 경직성, 봉건사회 결여론 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이런 논리들을 여러 측면에서 반박하였다.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깨뜨리는 것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길이었으며, 한국사 연구의 핵심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의 실천은 실증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한국사 연구는 두 가지 측면을 밝혀야 했다. 하나는 한국사도 역사발전의 일반적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영향력 없이도 한국사가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55쪽)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연구는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 집중되었다. 한국사에도 자생적인 근대적 발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연구는 조선후기 한국사회 내부에 자본주의 맹가가 존재하였음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

조선후기 농업에서는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하여 견종법(골뿌림법) 등 농법의 개선과 이모작 등 효율적인 농지 이용으로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경영형 부농이 생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 농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상업에서는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특권상인들의 경쟁하였다. 상인들중에는 막강한 자본력으로 물품을 독점하는 도고상인들도 나타났다. 수공업에서도 점차 민영수공업이 성장하였다. 일부 대상인들은 선대제를 도입하여 수공업자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자유수공업도 마타났다. 상인들은 자본을 동원하여 광산경영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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