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수 오 분간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헤져 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詩 : 윤성택  美 : LauriBlank -  Winter




댓글(8)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ira95 2004-12-1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이거 퍼가요~~

날개 2004-12-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별로 안즐기는데... 이 시는 뭔가 확 와닿는군요..^^*

플레져 2004-12-17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저주 저 쥐어짜는 듯한 그림이 좋아요 ^^

날개님, 저런 시를 쓰는 사람... 부러워요 ^^

sooninara 2004-12-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에게 팍팍 느낌을 주는 시로군요..탈수 끝나고 엉킨 빨래 털려면..

정말 힘든데..그것이 집착이었구나..

플레져 2004-12-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엉킨 빨래 털때 집착도 털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님, 말씀 들으니 저두 고개가 끄덕끄덕...^^

로드무비 2004-12-17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사람이 삐딱해서 콩나물을 다듬으며 깨닫는 시, 그리고 이런 것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조금 좋군요.(무슨 말이댜?)^^

잉크냄새 2004-12-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어려운 싯구보다는 이 시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글귀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플레져 2004-12-1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 그냥 제 맘에 드는 걸 좋아하나봐요. 흠흠...^^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 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詩 : 함민복

美 : 멸치장수 할머니 - 김경렬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4-12-1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내 심장을 포갤수 없어서 그토록 그리워하는군요.

2004-12-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12-1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을 포갤 수 없는 그리움....

후...~

hanicare 2004-12-1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의 마티에르가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인상적이네요. 그리움이 늙으면 멸치장수할머니의 담배연기처럼 달고도 구수한 휴식이 되려나.

플레져 2004-12-1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가만히 저 시를 읊조리던 어젯밤, 심장을 포갤 수 없다는 것이 무지 서글퍼졌습니다. 그런데 왜 심장은 포개려고 그러는건가 싶었죠...체셔고양이님도 그 부분에 반하셨군요? ㅎㅎ 하니님, 너무 거친 그림같아서 올리지 않을까 했는데, 볼수록 또 당기더군요. 심장을 포갤 수 없는 그리움 처럼....

비연 2004-12-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군요...퍼감다..

플레져 2004-12-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눼, 비연님 ^^

2004-12-10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 Liberte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 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대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4-12-0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르니카 보구서 엘뤼아르 시집 사려고 보관함에 담았답니다.

2004-12-07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7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0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추천하고 퍼갑니다.

이 시 너무 좋죠?

저 사진도요.^^

플레져 2004-12-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블루님 따라해야쥐~ ^^

로드무비님, 저두요 저두요~~ 헤...제가 올려놓고는...^^;;
 
 전출처 : 에레혼 > 두 번 쓸쓸한 전화 / 한명희

 

 

두 번 쓸쓸한 전화

 

한 명 희

 

 

 

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다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떄문이겠는가

 

자꾸만 뾰족뾰족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마흔,

실업,

버스 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12-0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95 2004-12-07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도 너무 좋아요~~ 가슴이 와 닿네요..

니르바나 2004-12-07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과 실업과 두통보다 더 슬픈 것은 소통이 안되는 인간관계였나 봅니다.

전화선이 끊어진 것처럼 시가 전달이 안될 때 시인의 속은 냉장고 속 김치처럼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일겝니다.

플레져 2004-12-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런지는 뻔히 알고 있지만, 정면 돌파 하기 어려운 상황...

맞닥뜨리고 맞닥뜨리고... 그렇게 저무는 나날입니다...
 

  맨발

                  문 태 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져 2004-12-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랑 그림이랑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액면 그대로의 맨발 이기에...^^

플레져 2004-12-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지영양, 귀여운 지영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