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졌다는 편지

   1.


  이 세상에서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휜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詩 :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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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5-01-0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라진 땅에서 핀 꽃, 안쓰럽지만 예뻐 보이네요. 사실 생명력이 너무 강해 보이는 식물은 안 좋아하지만 저 꽃은 강한 생명력에 여리여리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강한 것이 모습도 강하다면 세상과 어울릴 수 없을 거예요.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이 부분이 좋네요. 좋은 시예요. 자꾸 읽게 되는 매력이 있어요.

플레져 2005-01-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호밀밭님의 말씀이 더 와닿네요. 강한 것이 모습도 강하다면 세상과 어울릴 수 없을 거라는..........
 

내가 가장 아프단다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詩 : 유안진



올 한 해 잘 견뎌준 나, 내년에도 잘 해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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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2-3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참 잔잔하게 가슴에 와 닫는군요. 퍼 갑니다.

로드무비 2004-12-3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장하세요.

내년에도 우리 함께 잘 놀아보아요.

하나님의 축복이 듬뿍 내리길......^^

플레져 2004-12-3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오늘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로드무비님, 님의 우정 고마웠어요. 잘 놀자구요~ ^^

2004-12-31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5-01-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참 좋네요^^
 

  목숨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내년이면 더 많이 잊혀져 있으며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詩 : 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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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정권의 시 산정묘지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쩡쩡한 얼음들의 결빙을 노래하는 그런 단호함이 마냥 좋았었거든요~

이 시는 그가 산에서 조금 많이 내려와서 쓴 시 같아요...

세상은 그런거라그런거라...

플레져 2004-12-2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정권시인의 시는 많이 읽지 못했어요.

시를 아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렸던지라...

찾아 읽기 보다는 누가 권해주고, 좋다고 하는 것만 읽었죠.

산정묘지 찾아봐야겠네요.

비로그인 2004-12-2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네요...왠지 내 이야기 같기도 하구...

플레져 2004-12-29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내 이야기 같은 시를 만나면 거기에 마음을 놓아버립니다.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잘 섞이도록...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

날 선 초승달 스쳐
살점 벌어진 저녁 바람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로
서녘은 저리 붉었다
벌어진 살점에
소금 한 줌 뿌리고 눈 뜨는 별의
비린 길을 걸으면
보도 블록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숱한 행인의 발걸음들
어느 발자국의 보도 블록에
불을 대고 엎드려
별들간의 거리를 올려다본다
그렇게 오래도록 드러누워 있고 싶지만
가던 길 간다, 갈 곳은 없지만
리드하는 저녁 바람이 행인의 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으면
발길에 툭, 걸리는 것이 있어
행인은 뒤돌아본다
언 강물 위에 박힌 돌멩이들처럼
보도 블록 그물코에 매달린 발걸음들
해 진 거리에서 묻는다
-여 보 세 요, 아직 막차는 남아 있나요?



詩 : 윤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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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4-12-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시는 참...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습니다요^^

파란여우 2004-12-2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푸~~~욱 내려 앉습니다....그래도 전 님에게 메리 클수마수입니다^^

플레져 2004-12-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여우님... 들뜬 기분을 갖지 못하는 친구가 있답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크리스마스란 말 조차 호사스러워 보여서요...

2004-12-2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4-12-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를 배려하는 플레져님께도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플레져님의 그 분께도 함께요.

잉크냄새 2004-12-2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차는 남아있습니다. 막차에는 제한시간이 없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손만 뻗으면 나타납니다. 저도 플레져님께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2004-12-2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굼 2004-12-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차를 놓쳐도..조금 기다리면 다시 첫차를 타실 수 있을거에요: )

플레져 2004-12-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잉크냄새님, 소굼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2004-12-25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서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나희덕 詩



john clang - surface,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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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2-2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여자는 저기서 자는건가요?

누가 오는걸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나....?

mira95 2004-12-21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 시 좋아요.. 저 그림도 마음에 들고요.. 퍼가요^^

잉크냄새 2004-12-2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세가 왜 저리도 편안해보일까요...^^

플레져 2004-12-2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나무 위를 향해 베개 들고 가는 여인을 보신다면...저 인줄 아셔요 ^^;;

비로그인 2004-12-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플레져 2004-12-2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 놀라셨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