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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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따옴표 안의 문장은 모두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신 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참혹한 고통과, 그때에 얻은 삶은 의미에 대해 본인이 창안한 정신 치료법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토대로 풀어나간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가 합쳐진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기울이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기법이다. 즉,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제국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건설한 대규모의 수용소로, 이미 악명 높은 역사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는 발길질과 구타를 당하며,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에서는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단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있고,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인 곳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쓰인 글을 읽자니 작년 겨울부터 잠시 일을 쉬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에서 혼자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뿌리치지 못했을 때, 비록 수많은 또래들이 한순간에 하늘나라로 가게 된 국가적 재해였으나, 나는 감히 살아있단 이유로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군분투했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던 검도장에서는 고수들에게 죽도로 정수리만 맞다 오기 일쑤였다. 집에서는 룸메이트와의 불화로 매일 밤마다 인근 호수를 지칠 때까지 걷다 귀가했다.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보다도 절망스러웠던 건 상태가 영 호전되지 않아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자 직장 상사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 일이었다. 무력감에 지배된 나머지 매사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일을 두고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고 일컫는다. 정말 그랬다. 당시의 내가 휩싸여 있던 감정은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분노보다도,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 다 포기하고 싶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고, 그 혐오감은 이내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주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나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하였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의 말마따나 나를 괴롭히던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회사를 그만뒀고, 운동을 잠시 쉬고 본가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생은 여전히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미래를 기다릴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를 무한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다른 회사 구인 공고를 접하고 면접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익숙한 운동을 할 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 지 몰랐을 때와 달리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되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지나고 보니 강제 수용소에서 저자가 한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지 참혹한 기록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행복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니 나 또한 정진하고자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기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것뿐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비로소 이것이 단지 참혹한 강제 수용소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어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 주기를 원했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 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희생의 의미 같은―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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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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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누군가는 부르기만 해도 목 멜 그 이름을 제목 전면에 내세운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그의 아버지가 과거 빨치산으로서, 구례의 한 주민으로서, 누군가의 형이자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서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는다.

주제나 등장인물의 평균 연령, 진한 사투리만 놓고 보면 스토리가 꽤나 딱딱하고 무거울 것 같은데, 이야기의 포문은 “아버지가 죽었다”(7면)라는 제법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해 “이런 젠장”(16면)하고 유쾌하게 맺힌다. 자연스레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에 호기심이 생긴 독자는 3일장이 치러지는 동안 장례식장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때론 웃고, 때론 눈물짓는다.


1. 먼저 장례식장 한쪽에 어머니가 있다.

화자의 부모는 매순간을 혁명의 순간처럼 살아낸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공산당 선언』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된 아버지는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농부가 되기 위해『새농민』을 읽지만, 글로 배운 농사가 이론대로 되지 않자 유물론과 민족을 들먹이며 잔소리하는 어머니를 함구시킨다.

문제는 사람의 삶이 혁명의 순간으로만 구성되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언제나 단기간이고, 그 혁명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매순간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기에, 가정이라는 공간은 에너지를 비축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책 곳곳에서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화들을 소소하게 풀어내며, 전직 빨치산의 일상을 이해시킨다.

2. 장례식장의 다른 한편에는 아버지 때문에 어떻게든 피해를 봤던 일가친척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동생인 작은아버지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시기와 시대 탓에 해소되지 않은 원망으로 형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에는 대답 없이 끊을 정도로 냉담했던 그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복잡다단한 마음으로 형의 유골함을 붙잡고 오열할 때에는 독자들도 함께 사무친다.

3. 조문객의 태반은 구례 사람들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구례는 지리산 아래에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산에 들어갔던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는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고, 누구는 국군에게 총살당한 삼촌이 있기도 하는 등 별의별 사연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구례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란 대단한 게 아니다.

이를테면 빨갱이를 너무 싫어하는데 빨갱이가 집 앞에서 슈퍼를 한다면, 처음에야 먼 곳에 있는 다른 슈퍼에 갈 테지만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두 번 얼굴을 부딪치고 부대끼다보면 밉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정도 들고, 안 보이면 궁금하고, 어디 아프다 그러면 걱정도 된다. 책에서 그랬듯 각자에겐 사정이 있는 법이고(32면), 이해까진 아니더라도 인정하면서 사는 게 사람살이이라는 것을 우리는 구례 사람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걸핏하면 민중 운운하는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구례 주민으로서 어쩐지 마을의 해결사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본인의 일이 아님에도 이웃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돕는다. 이것이 시골의 정이고, 아버지의 마음씨다. 방물장수를 한 밤 재웠다가 마늘 반접이 없어졌더라도, 본인이 행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소설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은 동네가 작을수록 거리가 없기 마련인 시골에는 정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오지라퍼’들도 많음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도 사람들이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197면). 이런 마음들이 완전히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의 것, 즉 자신을 가공해서 보여주는 삶과는 대비되어 보인다.

도시에서는 외로움과 괴로움의 말들이 늘 들리지만, 시골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학과 유머로 묵은 고통을 이겨낸다. 자기 삶에 닥친 고통을 진심과 최선을 다해서 견뎌 내온 사람들이기에 절대 우울해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고통이나 슬픔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을 배울 수 있다.

4. 물론 장례식장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다들 돌아가고 아버지만 영정 속에 남아있을 때 화자는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230면) 그의 심리를 친밀함으로 묘사한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지면 어머니는 만들어주시지 않던 두터운 누룽지를 먹을 수 있음을 의미했고, 무등을 타곤 했던 따뜻한 날들에 대한 회고는 독자로 하여금 부모님과의 그리운 날을 떠올리게 한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추억 속에서 들추다보면 화자가 그간 당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를 여실히 알게 된다. 비록 빨갱이의 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 구례가 싫어 도시로 도망쳤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결국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로부터 자기 존재를 긍정하지 않으면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없고, 그렇지 않은 경우 삶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본인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맺은 관계가 주가 되면 외롭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구례에서 전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작은 공동체의 존재 의의로 봐도 무방하다. 앞뒤 없는 오지랖은 간혹 짜증스러울 때도 있지만 개입하는 만큼 관계가 깊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주어진 대로, 그런대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아버지를 향한 장벽이 무너지고 해방된다. 그렇다면 한국 전쟁 발발 후로 70년이 흐른 지금,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작가는 전직 빨치산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로부터 14년이나 지난 뒤에야 책을 출간하게 된 이유로 시대를 꼽는다. 6?25 당시 누가 나빴고 누가 덜 나빴나를 가르는 일은 ?분단 상황이라 어려운 점도 있지만? 당사자로 싸웠던 사람들, 혹은 당사자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한 옳고 그름조차 따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세대가 생을 마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죽음을 아버지 세대의 영혼과, 아버지의 장례식장 풍경을 한국 사회의 축소판으로써 동일 선상에 놓는다면, 향후 10년이면 혁명이니 이데올리기 하는 것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힐 것이다. 그렇다면 서서히 말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게 작가의 뜻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생겨난 모든 갈등과 상처를 해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소설의 역할은 그것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 빨갱이나 빨치산 같은 말들이 그 자체로 터부시되고 듣기만 해도 무섭고 괴로운 것이었다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한국사회의 갈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가볍게 보이지만 깊이 보면 무겁다. 내색은 않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을 구례 사람들이 보여준 삶에 대한 포용과 낙관, 강인함이 묻어있다.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웃음은 그 사람의 삶이 가벼워서 나오는 게 아니다. 슬픔을 겪은 자가 오히려 해학이 있고, 비극의 삶을 산 자가 오히려 유머를 가져다주는 법이니까.

그러니 감히 이것을 문학의 역할이라고 일컫겠다. 인공지능은 따라올 수 없는 창의적이고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소설의 힘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러니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인,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친구이고 이웃”이었던, 오죽하면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우리는 하염없이 그리워할 테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 P28

누구에나 사정이 있다. (…)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 P32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4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 P67

그 틈에 끼어 나는, 혁명가도 아닌 나는, 신념도 없는 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중이었다. - P123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 P159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 P181

아버지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덕으로 살기도 했다. - P18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 같았다. - P249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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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종이에서 스크린, 오디오까지 디지털 전환 시대의 새로운 읽기 전략
나오미 배런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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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우리의 읽기가 처한 현실

  • 우리는 ‘읽기’의 종류와 ‘독자’의 유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읽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디지털 도구의 도입으로 문해력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필요하다.

  • 읽는 눈의 움직임을 측정하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 신속운동(앞으로/뒤로/그 밑의 다음 줄로), 응시의 빈도는 읽기 기술과 텍스트의 복잡성에 비례한다. 디지털로 읽을 때와 종이로 읽을 때를 비교하면 유사하다.

    상대적으로 읽기가 부족한 독자는 후진 신속운동(방금 읽은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읽기 장애가 있는 사람은 더 오래 응시하며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다. 숙련된 독자와 평균적인 독자를 비교한 연구를 보면 읽기 기술이 나은 독자가 응시도 짧고 후진도 적다.

  • 성인과 어린이는 각각 얼마나 읽고 있을까?

    ⇒ 10대~50대 중반까지 ⅔가 종이책을 선호하며, 비교적 나이가 많은 독자들의 전자책 선호도가 다소 높다(글자 크기 조절의 이유 때문).

  • ‘어떻게 읽느냐’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일까?

    ⇒ 종이의 대안(혹은 보완물)으로서 디지털 스크린이나 오디오 기술의 잠재적 유용성이 읽기에 문제가 있는 저학년 학생들에게 초점을 맞춰오고 있다.

  • 학생들은 교사가 내준 읽기 과제를 제대로 하고 있을까?

    ⇒ 학교를 다니는 중 부업이나 전업으로 일을 하는 추세 때문에 읽기에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교수진들의 기대 또한 낮아지고 있다.

    ⇒ 카일리 베어kylie baier와 동료들이 2011년에 진행한 연구 결과에서 조사 대상 학생들의 32% 가까이가 과제물을 읽지 않고도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보고했다.

  • 학습용 읽기를 위한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 만약 텍스트를 읽는 목표가 빠르게 훑는 것이라면(가령 읽고 있는 글이 더 많은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점검하거나, 검색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특정한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면) 스크롤 방식을, 더 주의 깊게 읽기 위해서는 ‘페이지 분량’의 텍스트를 읽어라.

    ⇒ 모바일 기기가 자리에 없을 때(눈에 띄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을 때) 공감력을 높인다.

  • 종이책 읽기 전략 중 디지털·오디오 읽기에도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 다시 읽기, 따로 적기(노트하기, 단락 필사하기), 핵심어 열거하기, 요약하기, 질문에 답하기, 퀴즈 보기

(1장) ‘읽기’와 ‘독자’를 되돌아보다

A. 우리가 몰랐던 ‘읽기’의 다양한 유형

훑어보기: 핵심 파악하기
살펴보기: 특정한 무엇을 찾기
선형적 읽기: 이어서 읽기
깊이 읽기: 분석적으로 읽기
하이퍼 읽기: 재빨리 훑어보기, 살펴보기, 하이퍼링크하기(온라인 링크 따라가기)
일회성 읽기: 한 번 읽기
다시 읽기: 여러 번 읽기
폭넓은 읽기: 광범하고 다양한 주제
집중해서 읽기: 좁은 주제
꼼꼼히 읽기: 신비평주의의 용어, 텍스트 자체에 세심한 문학적 주의 기울이기
자세히 읽기: 일반적 용어, 텍스트에 면밀히 주의 기울이기
비판적 읽기: 분석적으로 읽기
단일 텍스트 읽기: 한 번에 하나의 자료만 읽기
복수 자료 읽기: 동시에 여러 자료 읽기


신비평주의에서 문학 읽기와 분석의 목표는 작품(특히 시)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미를 파악할 때 작가의 일대기나 작품이 쓰인 역사적 배경은 소환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 신비평주의자들은 비평의 임무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라 불렀다. ‘꼼꼼히 읽기’는 명시적으로 문학 테스트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텍스트 해석의 방법론에 적용되었다.

읽기에 관련된 변수들을 하나둘 검토하다 보면, 텍스트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매체가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B. 문해력의 개념이 변하고 있다

브라질의 교육가인 프레이리는 문해력이라는 개념이 단지 글을 읽고 쓰는 차원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해력을 세계가 어떤 식으로(사회적, 문화적으로) 작동해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봐야한다고 했다.

C. 읽기에서 촉감·후각·청각의 역할

D. 읽는 눈 들여다보기: 안구 추적

  • 안구 운동에 관한 간략한 설명
  • 안구 운동, 읽기 기술, 텍스트 복잡성의 관계
  • 종이로 읽을 때와 디지털로 읽을 때 안구 운동 차이

E. 읽기를 측정하기

  • 무엇을 측정하고자 하는가

    사전 지식은 독자가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속도뿐만 아니라 내용 이해도를 예측하는 데도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 읽기를 통한 이해와 듣기를 통한 이해 비교

  •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읽고 있을까?

F. ‘독자’를 이야기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

  • 나이·학년·발달·단계
  • 젠더
  • 읽는 이유
  • 읽기의 동기부여
  • 매체 선호도와 시험 성적에 대한 예측
  • 읽기 능력

(2장) 무엇을, 무엇으로 읽고 있을까

A. 글의 ‘장르’가 읽기에 미치는 영향

B. 교육 현장에 밀어닥친 디지털 읽기

경제 사정을 차치하고, 학생들이 교재를 구매하는 대신 대여하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 걸까? 대여를 할 경우에는 수업 과정이 끝나면 학생들 수중에 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기말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종이책 교재를 되판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들 해왔다. 하지만 책을 구매했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심지어 다시 한번 들여다볼 가능성이 있다. 좋은 교수법은 학습이 누적적이며 복습되는 것이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요컨대 질병의 위협이 완전한 한 권의 종이책으로부터 분절된 디지털 텍스트로 옮겨가는 데 일조한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런 이동을 가속화했다. 두 경우 모두 이동의 동기가 급작스러운 현실의 필요였지 교육적 선호에 따른 선택은 아니었다.

C. 읽기 연구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

D. 우리가 디지털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 읽는 방식: 페이지 넘기기 vs 스크롤하기

    코덱스codex(오늘날 우리가 책이라 부르는 것)이 개발되기 전에 긴 글은 보통 두루마리에 쓰였다. (중략) 두루마리를 읽는다는 것은 수많은 풀고 되감기, 즉 ‘스크롤’을 뜻했다. 코덱스(양피지 페이지를 점쇠로 한데 묶은 것)가 두루마리를 대체하기ㅏ 시작한 것은 기원후 1~2세기부터였다.

  • 주석 달기

E. 기술이 문제일까, 마음가짐이 문제일까?

  • 외적(물리적) 요인
  • 내적(정신적) 요인

(3장) 종이책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착각

A. 여가용 독서의 당혹스러운 변화

B. 학생들은 읽기 과제를 성실히 하고 있을까?

C. 교육 현장의 현실: 미국과 노르웨이 교강사 인터뷰

  • 읽기 과제물의 양

    설문조사에 참가한 노르웨이 교수진은 미국의 교수진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책을 과제물로 내준다고 답했다. (중략) 강좌당 읽기 과제물의 양을 보면, 이 역시 노르웨이가 상대적으로 수치가 높다.

  • 학생들의 읽기 과제 수행에 대한 교수진의 기대치

  • 최근 몇 년 사이에 읽기 과제물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 교수들은 디지털 기술이 학생들의 읽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까?

  • 학생들의 읽기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변화

    속도: “학생들이 너무 빨리 읽는다.” 장르: “학생들은 서사를 이전보다 덜 읽는다.” 주의집중 시간: “학생들의 주의집중 시간이 전보다 짧아졌다고 느낀다.” 복잡성: “복잡한 것을 더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으면 하는 학생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나로서는 학생들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이들 발언에 담긴 광범한 우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많은 교수들은 디지털 기술이 단순히 종이책과 같은 읽기 내용물을 담는 대체 용기가 아니라,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읽을지를 좌우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고 느낀다.

  • 비용의 문제

  • 학생들이 처한 상황의 변화

    “지금은 실용성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한다. 이런 압력은 학교 당국과 학생들에게서 온다. 이런 반인문교양적인 환경 속에서 ‘긴 글’ 읽기를 정당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중략) 이미 우리는 앞에서 많은 교수들이 읽기 과제물의 복잡성을 낮췄고, 이는 학생들이 읽기 과제로 내준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보았다. 한 노르웨이 응답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 교육은 읽기 능력 면에서 학생 집단의 훨씬 다양한 분화를 초래했다.”

D. 효과가 입증된 읽기 전략들

  • 종이책 읽기를 위한 전통적인 전략

    읽기는 빠르지만 손글씨는 느리다(적정한 생각의 과정을 늦추고, 시간을 잡아먹고, 모든 경쟁적 발언들을 밀어낸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손글씨의 최고 미덕이기도 한데, 그저 밑줄만 긋는 것보다는 물론 심지어 단락을 효율적으로 다시 타이핑하는 것보다도 낫다.

  • 종이책 읽기 전략이 디지털 읽기에도 맞을까?

  • 종이책 읽기 전략이 오디오 읽기에도 맞을까?

  • 전통적인 읽기 전략은 정말 효과가 있을까?

    유용성이 높은 기술: 실제 테스트 (우리 목록에서 ‘퀴즈 보기’라 부른 것) 유용성이 낮은 기술: 다시 읽기, 강조 표시하기와 밑줄 긋기, 요약하기

[2부] 가장 첨예한 질문: 종이 읽기와 디지털 읽기

  • 학생들이 생각하는 스크린 읽기의 장단점은?

    ⇒ 컴퓨터(와 다른 디지털 도구들)는 검색과 멀티태스킹, 하이퍼 리딩(하이퍼링크를 오가며 읽기)에 유용한 반면, 종이책은 길고 상세한 읽기에 아주 적합하다. 이는 유도성, 즉, 어떤 사물(혹은 여기서는 기술)의 유용성을 뜻하는 유도성이라는 개념과 관련있다.

  • 글의 장르나 분량은 읽기에 어떤 영향을 줄까?

    ⇒ 긴 텍스트에 있어 학생들은 확연히 종이를 선호하며, 이는 서사를 종이로 읽을 때의 물성이 (어린아이나 어른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독자가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확실한 것과 동일 선상의 연구 결과가 있다.

  • 공식화된 평가로 학생들의 읽기 능력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학부생들에게 정해진 시간 동안 종이나 디지털로 다소 긴(1000~1200자) 텍스트를 읽게 했더니, 독해 점수가 두 매체 모두 비슷하게 나왔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같은 과제를 주면서 시간을 스스로 정하게 했더니 디지털로 읽을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즉, 소요 시간은 줄었고, 독해 점수는 낮아졌다.

  • 소셜 미디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읽기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몇몇 연구들을 보면, 소셜 미디어를 오래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독해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 디지털 읽기에 우리의 마음가짐이 미치는 영향은?

    ⇒ ‘메타인지(마음가짐)’에 있어 독해력의 과신과 빠르고 얕게 읽는 경향을 유의해야 한다. 페이지 넘겨 읽기가 스크롤하기에 비해 독해에 유리하며, 디지털로 읽을 때 독해는 정보성 텍스트일 때보다 내러티브 텍스트일 때 대체로 유리하나, 질문 유형에 따라 다르다.

  • 종이와 디지털 중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독해력을 더 정확히 가늠하는 매체는?

    ⇒ 종이 자료는 각각 별개의 자료들인 반면, 디지털은 하이퍼링크된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종이로 읽든 온라인으로 읽든 주 자료에 관한 독해 점수가 거의 같았으나, 보조 자료에 관한 독해 점수는 종이로 읽었을 때 점수가 훨씬 나았다. 읽을 때 얼마나 많은 노력이 따른다고 느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하이퍼텍스트(디지털) 버전이 특히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웠다고 답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 복수의 온라인 자료를 잘 사용하게 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페이지 넘기기든 스크롤 방식이든 앞으로 읽어나갈 때 스크린에서 한 번에 편히 볼 수 있는 텍스트 분량이 최대가 되도록 (조절이 가능한 경우) 글자 크기를 맞춰라.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에 ‘페이지 내리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라.

    만약 목적이 선형적 읽기인데도 스크롤 방식으로 읽고 싶다면 읽는 동안에는 (적어도 한 곳에 맴도는 동안에는) 손가락을 스크린에서 떼려고 노력하라. 집라인 타듯 한 번에 읽어 내려가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페이지 분량을 읽고 난 후에는 다른 페이지로 옮겨가기 전에 읽은 것을 생각해보라.

(4장) 하나의 텍스트만 읽을 때 _읽기 연구 1

A. 어린아이들에게 디지털 책을 쥐여줘도 될까?

  • 갈팡질팡하는 부모들
  • 어린아이들의 읽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측면
  • ‘디지털 책’의 범위
  • 연구가 말해주는 것들

B. 학령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읽기 연구

  • 테스트의 질문이 읽기에 영향을 미칠까?

    많은 연구자들은 디지털로 읽을 때 이해도가 낮게 나오는 것을 두고 ‘피상화 가설shallowing hypothesis’의 증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로 읽을 때 종이로 읽을 때보다 정신적 노력을 덜 기울인다는 뜻이다. 얕은 읽기를 낳는 주된 원인 한 가지는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정신적 노력이 덜 요구되는 디지털 소셜 미디어에 막대한 시간을 쏟는 것이다.

    시간 압력이 높고 과제의 복잡성이 낮을 때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조건 속에 있는 수험자가 모종의 ‘컴퓨터 게임 모드’로 유도될 수 있다. 단순한 컴퓨터 게임에서 승리하는 데는 대개 속도가 정확성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텍스트 종류가 읽기에 영향을 미칠까?

  • 기술의 형태가 읽기에 영향을 미칠까?

  • 모든 것은 우리 정신의 문제일까?

C. 핵심 정리

(5장) 인터넷에서 여러 자료를 검색하며 읽을 때 _읽기 연구 2

A. 인터넷이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

B. 학교에서의 디지털 전환

C. 온라인 탐색, 학습의 지형을 바꾸다

  • 복수의 텍스트 읽기: 오래된 공부의 방식

  • 온라인 탐색의 짧은 역사

  • 온라인 탐색의 세 가지 핵심: 검색, 정밀조사, 종합

    첫 번째 쟁점(각 사이트의 결론은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가? 어느 사이트가 더 신뢰할만한지는 어떻게 결장할 것인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자료 사이트들의 상충 가능성이다. 온라인 자료들 간의 모순을 다루는 것은 학교 교육에서나 연구자에게서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중략) 읽는 과정에서 불일치는 텍스트들 사이에서 드러날 수도 있지만 하나의 문건 안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 종이로 읽기와 온라인 탐색, 어느 것이 수월할까?

D. 온라인으로 복수의 자료 읽기

  • 대표적인 연구 결과들
  • ‘복수’의 의미
  • 매체 선택의 문제: 종이냐 온라인이냐
  • 복수의 온라인 텍스트를 읽을 때의 성공률을 예측하는 지표들

E. 끝없는 논쟁: 내용이냐 그릇이냐

  • ‘진짜’ 자료가 주는 이점
  • 변별성과 촉감

F. 온라인 자료 읽기는 교육 현장을 어떻게 바꾸었나

  • 표준화된 시험에 온라인 복수 자료를 포함할 경우
  • 온라인 탐색이 읽기의 의미를 바꾸고 있는가

G. 핵심 정리

(6장) 학습을 위한 최적의 디지털 읽기 전략

A. 기억해두어야 할 것

  • 읽기의 목표가 무엇인가

    부모나 교육가가 자손과 학생들에게 갖는 바람은 그 이상이다. 즉, 읽기를 사랑하는 마음, 긴 글을 즐기고픈 욕구, 분석하고 숙고하는 능력, 배움을 성적 추구가 아니라 장기적 이로움으로 보는 눈을 길러주고 싶어 한다.

  •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 고려해야 할 요인에는 무엇이 있는가

  • 능동적 학습과 연결시키기

  • 종이 읽기의 장점을 디지털 읽기에 적용하기

  • 종이냐 디지털이냐가 아닌 둘 다

B. 어린아이들을 위한 디지털 읽기 전략

  • ‘어린아이’의 기준
  • 책을 읽는 목적에 맞게 선택하기
  •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 아이 혼자 볼 것인가, 부모와 함께 볼 것인가

C. 학생을 위한 디지털 읽기 전략 1: 단일 텍스트일 때

  • 읽기의 목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텍스트의 길이와 장르, 복잡성의 고려
  • 기술의 역할
  • 읽기에 집중하게 해주는 제안들
  • 두 가지 모두 이용하기

D. 학생을 위한 디지털 읽기 전략 2: 복수 텍스트일 때

  • 복수 텍스트 읽기의 목표
  •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읽기 전략
  • 가짜 뉴스에 대처하는 법
  • 온라인 자료의 진정성 가려내기
  • 두 가지 모두 이용하기

E. 디지털 읽기가 시민의식에 미치는 영향

F.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3부] 귀로 읽는 시대: 오디오와 동영상 읽기

  •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차이가 오늘날 시사하는 바는?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한 사회에서 대다수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뜻한다. 즉,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을 어떻게 얻는지, 사람들의 오락물은 무엇인지, 교회 예배는 어떻게 보는지를 말한다. 이런 활동들이 대체로(때로는 유일하게) 구술을 통해 일어난다면, 그것이 구술 문화다. 여기서 균형이 다른 방향으로 충분히 이동하면 문자 문화에 이르게 된다.

  • 글을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듣는 것은 꼼수에 불과할까?

    스벤 버커츠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책을 듣는 것은 읽기의 확장인가, 아니면 읽기를 단순화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것을 오락물로 바꿔놓는 또 하나의 기발한 방법인가?

  • 읽기와 듣기 중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은?

    ⇒ 글의 내구성, 속도에 대한 통제, 다시 읽기 쉬움, 단락을 훑어보거나 건너뛰는 능력, 텍스트의 이정표는 ‘종이책의 우월성’을 증명한다.

  • 글을 눈으로 좇으며 오디오북으로 듣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

    ⇒ 초보자와 발달 중인 독자, 읽기 장애가 있는 어린이, 제2 언어 학습자에게 결합은 이점이 있다.

  • 팟캐스트는 학습 도구로서 얼마나 효율적일까?

    ⇒ 팟캐스트에는 특별히 중요한 것을 강조해주는 굵은 글씨나 이탤릭체 같은 ‘표시 기능’과 학습을 강화해주는 도표나 그래프 같은 시각 요소가 없다. 또한, 오디오로 들을 때는 같은 내용을 글로 읽을 때보다 일부를 다시 들을 가능성이 훨씬 낮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건네고 “가서 공부해”라고 말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학습 동기를 불어넣는 최선의 교육 방식이 아닐 수 있음을 상기해보자. 교육적인 팟캐스트가 적절한 시각 자료와 결합되면 아주 성공적일 수 있다.

  • 동영상 과제물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 정신의 방황에 있어서는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간헐적 상호작용 활동(가령 단답 시험 보기)을 활용하면 학습 효과를 개선할 수 있다.

  • 오디오와 동영상에 주석을 다는 효과적인 방법은?

    ⇒ 상업적 도구들의 진화를 기대해봐야 한다.

(7장) 오디오북과 동영상 강의가 교과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A.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구술에서 문자로 문화가 바뀌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다. 먼저 글자로 인쇄된 텍스트의 가격이 낮아져 사람들이 사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만한 문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교육이다.

  • 구술시험에서 필기시험으로

B. 귀로 읽는 시대가 왔다

  • 오디오가 종이책을 대신할 것이라는 상상

  • 오디오 듣기 1.0 시대

  • 오디오 듣기 2.0 시대

  • 듣기도 읽기라고 할 수 있을까?

    오디오북을 듣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cheating인가 아니면 쉬운 방편인가? (중략) 북클럽에서 읽기로한 책을 읽지는 않고 귀로 듣는 것이 속임수인지 아닌지 옥신각신하느니, 오디오와 종이책을 완전히 호환 가능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말라고 윌리엄은 조언한다. 쉬운 텍스트라면 어느 쪽이든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어려운 텍스트라면 종이책이 이점이 있다. 하지만 운전 중이거나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 중일 때에는 오디오가 나을 수 있다. 그럴때는 다른 일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듣거나 읽을 때 뇌에 일어나는 일

C. 학습을 위해 오디오를 사용할 경우

  • 오디오의 학습 도입에 대한 의문

  • 종이책이 오디오보다 우월한가에 대한 연구

  • 팟캐스트의 학습 효과

  • 오디오북의 학습 효과

    오디오북은 읽기로 통하는 지름길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휘와 감정 지능을 구축할 수 있다.

  • 오디오를 들을 때 얼마나 집중하는가

D. 오디오와 텍스트를 함께 사용할 경우

  • 음향 효과가 입혀진 전자책의 탄생
  • 오디오+텍스트: ‘몰입 독서’가 가능할까

E. 동영상 학습을 둘러싼 몇 가지 쟁점

  • 동영상의 급부상

  • 동영상과 텍스트를 비교한 스페인, 독일, 미국 학생 연구

    이 연구의 저자들은 학생들이 글로 된 텍스트보다는 동영상을 ㅓ 피상적으로 ‘읽고’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주로 학습이 아닌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 동영상과 친숙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동영상에 의한 피상화video shallowing’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 동영상 강의와 오디오, 어느 쪽이 효과적일까?

  • 학생들은 동영상 강의에 얼마나 잘 집중할까?

F. 핵심 정리

(8장) 학습을 위한 최적의 오디오·동영상 읽기 전략

A. 오디오와 동영상이 글자 없는 교실을 만들까?

7장에서 본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은 글을 대하는 것처럼 오디오(그리고 동영상)를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디오와 동영상을 ‘가벼운 학습’쯤으로 여긴다. 교사들로 말하자면, 특히 대학교수의 경우 매체 간의 교육적 차이에 대해 철저히 생각해본 사람이 드물다. 대학교수들이 채용된 것은 강의 주제에 관한 전문성 때문이지, 가르칠 때 어떤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알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 대다수는 학생들이 듣거나 보는 것에서도 텍스트를 읽을 때만큼이나 많이 배울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연구 결과를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듣거나 보는 것으로 읽는 만큼의 효과를 거두려면 학생들의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사시ㅏㄹ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다.

B. 기억해두어야 할 것

  • 독자는 누구이며, 목표는 무엇인가
  • 오디오와 동영상 사용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문제
  • 종이 읽기와 강점을 오디오·동영상에 적용하기
  • 주석 달기

C. 어린아이들을 위한 오디오·동영상 읽기 전략

  • 오디오
  • 동영상

D. 학생을 위한 오디오·동영상 읽기 전략

  • 오디오만 사용하는 경우
  • 오디오+텍스트의 경우
  • 동영상만 사용하는 경우

[4부] 읽기의 미래

  • 소유 대신 경험을 좇는 오늘날의 태도와 디지털 읽기의 가속화는 어떤 관계일까?

    디지털 사물은 무게가 없다(추가한다고 해서 가방이 더 무거워지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서고의 공간을 차지하지지도 않는다). 편리하다(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 디지털로 읽을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달라질까?

    스크린 읽기는 대단히 편리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디지털 텍스트에는 ‘가치’를 많이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중략) 디지털 플랫폼에서 진지한 읽기와 관련한 과제는 단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 (그 결과 읽기를 얕게 만든다는 가설을 기억하라)는 것만이 아니다. 아마도 문제 중 일부는, 본질적으로 우리는 텍스트가 가상일 때는 말 그대로 종이에 찍힌 글자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낀다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 스크린 읽기 방식이 종이책 읽기 방식을 바꾸어놓았을까?

    ⇒ 대충 읽기와 훑어보기가 용이함, 개념 아닌 정보에 초점, 멀티태스킹의 기회, 읽는 속도, 오락적 가치

  • 왜 학생들은 종이책 읽기가 따분하다고 말할까?

    ⇒ 너무 길다. 단어가 너무 많다. 문자 보내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과 너무 다르다. “우리 나이대는 인터넷 사용을 너무나 좋아해서, 대다수는 책 읽기를 싫어한다. 책은 인터넷상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자책을 더 선호하는데, 더 인터넷 같아서다.” 예컨대, 1) 재미없어 보이고 2) 더 천천히 그리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읽어야 한다고 느끼며 3) 권위 있는 인물로부터의 정당화 때문이다.

  • 교육의 목표가 변화하면서 학생들이 얕고 짧은 읽기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학생들에게 읽기의 목적에는 정보에 대한 빠른 접속뿐만 아니라 가벼운 읽을거리에 열중하기, 또 그보다 속도가 느린 사색을 동반한 읽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도울 의무가 있다. 학생들과 아이들도 충분히 긴 글 읽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런 읽기를 학업 목표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 비관적 사고를 증진하는 것과 읽기 플랫폼을 선택하는 것의 관계는?

    우리는 우리가 선호하거나 지금 읽고 있는 것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 플랫폼을 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ㅏ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중략) 각 매체의 장단점(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의 우리의 읽기 마음가짐)을 자각한다면 그로 인한 문제를 보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 인터넷에 너무 의존하는 나머지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는 지금처럼 디지털 세계가 아니었을 때에도 수세기 동안 종이책을 읽을 때 정보를 검색하고 대충 읽었다.

(9장) 디지털 세계에서의 읽기 전략 짜기

A. 글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

B. ‘순간접속’ 문화는 우리를 어떻게 바꾸었나

  • 소유보다 경험을 중시

    이동성 때문에 물리적 소유를 줄이는 것을 두고 이야기할 때 쓰는 기술적 용어가 ‘유동성 소비liquid consumption’다.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다니고 싶을 때는 점점 디지털화된다.

  • 물질보다 디지털을 선호

  • 디지털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C. 종이책 읽기에 스며든 디지털 마음가짐

  • ‘읽을 때의 디지털 마음가짐’의 정의
  • 학생들이 디지털 읽기에 거는 기대

D. 디지털 세상에서의 읽기 전략: 양손잡이 문해력

(10장) 풍요로운 읽기의 시대를 만드는 법

A. 학교에서 종이책이 처한 역설적 상황

  • 현장에서 밀려나는 종이책
  • 종이책을 따분하게 여기는 학생들

B. 오늘날 교육의 목적

  • 학생들이 대학에 가는 이유

  • 디지털 기술은 비판적 사고를 길러줄 수 있나?

  • 인터넷이 없을 때,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캐스퍼스카이랩Kaspersky Lab의 연구는 심리학자 폴 마스든Paul Marsden의 말마따나 디지털 기기가 정신의 새로운 ‘플래시 드라이브’(휴대용 저장장치)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도록 이끌리는 과정을 조사했다. 캐스퍼스카이랩은 **‘우리를 대신해 디지털 기기가 저장하고 기억해줄 거라고 믿고서 정보를 잊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디지털 기억상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C. 학생들은 어떻게 읽는 사람으로 길러낼 것인가

  • 읽기는 빠르고 느리게, 얕고 깊게
  • 메신저만 탓하지 말라
  • 당신의 영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
  • 인생은 제한 시간 내 시험이 아니다

D. 모두를 위한 읽기 권장 식단

더 많이 읽어라. 읽을 때는 집중해서. 무엇으로 읽을지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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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3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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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맑고 온전해야할 일상이 조금씩 깨지고 금이 가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잘못된 선택, 예상 밖의 결과, 불운한 사고, 대중의 심리, 따라오며 괴롭히는 비난. 그 중 돈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인생은 이 세상에 과연 몇 개나 될까?
초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인터넷 세상에 푹 빠져있었다. 좋아하는 만화의 팬 카페에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회원들과 채팅을 하거나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곳에는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지식이 있었다. 나의 월드 와이드 웹(WWW, world wide web) 탐방은 어느 날 ‘이번 달에 전기세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 하는 엄마의 혼잣말을 듣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 한숨 소리가 유년의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나 때문이구나. 내가 컴퓨터를 너무 많이 해서 우리 집에서 돈이 새고 있어. 다 내 잘못 같았다. 그길로 하교하자마자 접속하곤 했던 팬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발길을 끊은 게 뭐야. 아예 컴퓨터 전원도 안 켰다.
그만큼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게 돈이랑 엮이면 더더욱.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며 그 이치를 자신의 삶에도 적용시켜보는 건 모름지기 다음 세대의 영역이라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돈의 가치를 깨닫는다.
『클로버』의 주인공 정인도 마찬가지이다. 정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단 둘이 볕이 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살아간다.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를 따라 폐지를 줍던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하교하는 길에 골판지나 폐플라스틱이 보이면 서슴없이 책가방에 주워 담는다. 고물상에 가서 그것들을 단돈 2천원에 바꾸고, 주인장 박 코치의 한화 이글스를 향한 분노를 참고 듣는다. 학원가 사거리에 있는 햄버거 집에서 주 3일 아르바이트도 한다. 배달기사 형의 푸념과 점주의 비양심적 행동은 모르는 척 하면서, 정인은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필터 없이 흡수한다.
나혜림 작가는 교편에 있을 무렵,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100만원을 모으고 싶다고 한 학생의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박혀있다고 했다. ‘100만원 그게 뭐라고’어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별로 어마 무시한 금액도 아닌 돈이 너의  평생소원이냐고.  그러나 그깟 돈 몇 푼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참고 발악하듯 살아가는 인생도 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때때로 ‘어떤 이는 펜트하우스에서 누군가의 집이 폭우에 떠내려가는 걸 구경하고, 그 집엔 빨래를 말릴 햇빛조차’ 없단 뉴스를 접하게 되는 것처럼, 과연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할 해와 비조차 현대 사회의 만인을 굽어 살피지는 않는다. 그 차이는 예수도 해결해주지 못할 돈이 만든다.
그런 정인의 인생으로 성큼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악마, ‘헬렐’의 존재이다.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고,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정인에게 헬렐은 수많은 ‘만약에’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 만약(萬若)을 만일(萬一)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지금과 다른 상황을 하나만 제시하면 모든 것이 뒤바뀔 거야.’라고 속삭이며 궁극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음식에 조예가 깊은 헬렐은 식품 전체의 향을 결정하는 0.01%의 냄새 분자를 언급하며, 자신이 인생의 향과 색을 결정해 줄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런데 정인은 이 세상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 잘 모른다. 오르톨랑이나 샤토 페트뤼스, 캐비어 같은 고급 식문화는 들어본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라면과 햇반으로 인생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찬장이 비어있으면 그날은 굶어야한다는 게 곧 정인네의 법이고 진리다. 만약 정인이 성냥팔이 소녀였다면 마지막 환각으로 보게되는 건 칠면조와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라면이나 햇반일 정도이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에서는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하지만, 이제껏 먹은 것이 별로 없는 정인은 자신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인생은 B(birth, 생生)와 D(death, 사死) 사이의 C(choice, 선택)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 포털에 검색할 때에, 최고 성능이 아닌데다 가격 또한 최저가가 아니더라도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라면 눈길이 가는 것처럼, 수많은 알고리즘 속에서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애쓰고 있다.
마케팅 전략에도 골디락스, 또는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라는 개념이 있다. 미끼 상품들이 섞여 있을 때, 사람들은 대게 중간 정도로 적당해 보이는 물건을 고르더라는 것이다.
이 알고리즘과 마케팅 전략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로 도달하는 길에 제한을 걸기도 되기도 한다. 꼭 맞는 선택보다 더 보편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당신이라면 그 섬세하고 자잘한 한계선이 무너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지 악마 헬렐을 통해 묻는다.
악마라고 하면 보통 사이코패스처럼 공감 무능력자, 혹은 남들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헬렐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귀여운 고양이로, 때로는 정인을 지극히 생각하는 동료처럼 그려진다. 
헬렐은 정인이 도피처가 필요할 때 찾는 쓰레기장에서 말동무가 되어준다. 고급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게도 해준다. 그럼에도 정인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소설 중반부까지 그의 손을 잡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를 그렇게 착하지 않다고 칭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영리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고, 꿋꿋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후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반문하며 복지관 선생님의 손길조차 거절하는 정인에게, 헬렐의 존재는 거부의 대상 그 자체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광야로 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 악마가 찾아왔던 것처럼, 주변을 이루는 모든 것이 모래처럼 부서지려 할 때 정인은 결국 헬렐의 손을 잡게 된다. 밑창이 다 떨어진 운동화, 주 5일 근무를 꿈꾸던 가게의 깨져버린 유리창,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 할머니. 모든 것이 나비 효과처럼 날아가고 있기에 정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이미 절망밖에 없을 위치에서 그리는 미래란 좀 더 근사해도 될 텐데, 어쩐지 헬렐이 보인 문 건너편에서 정인이 보는 장면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상상조차 자신이 아는 최선의 것에만 국한되어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엄연히 지옥,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아발론이라 불리는 곳이다.
아발론에서 정인은 세 가지 문을 넘으며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를 타게 되고, 재아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뒤 고급 호텔에서 할머니와의 식사를 하게 된다. 그동안 정인이 원했던 것들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정인이 간절히 진정으로 원했다고 하기에는 앞서 언급한 알고리즘 같은 선택 같아 보인다. 퍼스트클래스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데에서, 좋아하는 이성 친구의 대화는 헬렐이 불을 지핀 데에서, 고급 레스토랑은 헬렐이 데려간 호텔에서 보았던 메뉴판에서. 그러니 진짜 소원이라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다.
마테를링크만의 희곡 『파랑새』에서는 주인공들이 파랑새, 곧 진정한 행복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의인화된 행복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뚱뚱한 행복들로, 각각 사치스러운 행복, 소유하는 행복,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행복, 잠만 자는 행복 등의 이름을 가진다. 비록 백 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현대 사회의 우리에게도 빗대 볼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빈둥거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느끼는 행복은 사실 이 뚱뚱한 행복들, 다시 말해 한 꺼풀 벗겨보면 불행에 가까운 행복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제목인 클로버도 불행에 가까운 행복을 뜻한다. 클로버(trifolium)의 학명은 세(tri-)잎(-folium)이란 뜻으로 기본형이 3개 잎인 콩과 식물이다. 어쩌다보면 네 개의 잎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어, 왠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기분으로 즐거워지기도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 약속, 희망 등이고 ‘잎말’은 그 어느 식물도 가지지 않는다.
일본의 한 농부가 클로버 잎의 개수를 18개, 21개, 56개까지 개량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는데, 사진을 찾아보면 기괴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인간의 욕망이 잔뜩 들어가 있단 걸 증명해보이기만 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헬렐도 한평생을 부자로 살아왔지만 소문난 구두쇠였던 진 폴 게티의 말을 들먹이며 말한다. ‘가진 돈을 셀 수 있다면 그건 부자가 아니다’라고.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고. 
클로버의 열매나 씨앗, 꽃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잎만 보는 세태는 『클로버』 속에서 정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것과 닮아 있다. 동정과 무시가 기저에 있는 어른들의 시선은 아직 꽃도 피우지 않고 이제 막 생을 시작한 미숙한 생명체인 클로버를 잎의 개수만 보고 속단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은 희망과 욕망이 딱 떨어지는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후유증 없이 깨어나는 것 같지도 않고, 후원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해서 정인의 사정이 나아진다거나 태주의 놀림이 없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정인은 헬렐이 제시한 모든 만약을 거절하고 낡아빠진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지금은 그냥 한 번 더 진짜를 살아볼게요.’
그동안 스스로를 응달에서 사는 아이로 일컫던 정인은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나간다. '못난 꼴, 못난 마음을 훤히 비추는 빛이 싫어서, 비와 어둠 속에 숨고 싶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비록 미련하고 비굴해보이고 미완일지라도,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 보려고 말이다. 비로소 정인은 선택의 여지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파랑새를 찾게 된다.
모든 ‘만약에’를 뿌리치고 다시 돌아간 단칸방에는 여전히 볕이 잘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고해 볼 것은 주인공 정인의 이름 뜻이 빛나는 사람炡人이란 것이다. 그러니 부디 세상의 모든 빛나는 사람들이 주변의 응달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길에 짙은 어둠이 깔려있더라도, 당신이란 사람 자체가 빛이란 걸 불현듯 깨닫길 바란다.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는 햇빛과 달리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내는 달빛'과 더 닮아 있을 악마의 이름에조차 빛이 있는 것처럼, 어쩐지 나는 응달에서 피는 꽃을 더 응원하고 싶다.
힘이 드는 순간이 오면 그늘에서도 자라는 유머를 보여주는 클로버를 떠올려보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또 한걸음, 다시 한 걸음은 전혀 어렵지 않단 걸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동의할 수 없더라도, 유모레스크 인생이니까.


※ 이 책에서 가져온 몇 개 구절은 작은따옴표 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23/05/13 대구 고산도서관에서 진행한 저자 강연(’만약에’가 가득한 세상에서 선택의 가치)에서 참고한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 중에서) - P45

"’유모레스크’라는 곡이야. (중략) ‘유머 있는’이라는 뜻이래." 하지만 이름을 풀어서 설명해 주자 한결 외우기 쉽다. 그 뜻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 P60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 P124

정인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가 왜 화가 나는지도 몰랐고, 왜 눈물이 나는지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어 봤자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냥, 그게 할머니와 정인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못나 보인다 싶으면 학교 뒤꼍에 숨었고 약해졌다 싶으면 그림자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안 보이는 척, 모르는 척, 슬쩍 덮어놓고 살다 보면 지나갔다. 어떻게든 살아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됐다. - P136

정인은 쓰레기통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새벽에 수거차가 와서 날 싣고 가지 않을까. - P137

"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뭐가?" "난 괜찮았는데." "……." "뭐가 괜찮았는데?" 악마는 기어코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네 일? 아니면 네 집? 그것도 아니면 네 신발? 뭐가 괜찮았는데? 내가 뭘 괜찮지 않게 만들었지?" - P138

"재미있냐고? 재밌지 않을 리 없잖아? 폭력은 비디오 게임, 전쟁은 뉴스 속보, 착취는 초콜릿, 생명 경시는 모피 코트, 환경 오염은 아보카도와 스포츠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신명 나는 파티의 클라이맥스에선 돈이 비처럼 내려. 모두가 쇼를 좋아하잖아? ‘쇼는 계속될지어다!’" (중략) "난 야구였구나." "뭐?" 정인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는 지긋지긋한 이 시간이 누군가한테는 이야기고 스포츠고 파티인 거에요?" "바로 맞혔어! 하지만 넌 그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지. 평생 햄버거를 씹으며 진열장 너머 반짝이는 걸 구경만 할 거야?" - P140

"그분이 저한테 실망하면 어쩌죠? 저 그렇게 착하지 않은데. 저는 그렇게 영리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고 꿋꿋하지도 않아요." - P167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보기에 좋았다는데……. 정인은 빛이 싫었다. 못난 꼴, 못난 마음을 훤히 비추는 빛이 싫었다. 비와 어둠 속에 숨고 싶었다. - P168

"철이 당겨서 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헬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자란 식물에게는 늦거름을 줘야지. (중략)" - P176

‘해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비추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변형하여 인용)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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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영화 특별판)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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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혜기자/정세랑작가와 함께한 GV를 곁들여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원작을 먼저 읽는 사람과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 하나의 스토리에 기반한 작품을 감상할 때에 어떤 매체로 그것을 먼저 접하는가의 순서는 감상에 있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주요한 사건 구성을 이해하는 건 최초의 단 한 번 뿐이기에 우리는 때로 엄청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는 연재 중이거나 완결된 소년만화가 애니(J-Animation)로 제작되는 케이스이다. 흑백 갱지의 얇은 책 속에 촘촘한 선화와 대사로 표현된 만화는 음악과 색이 입혀져 다채롭게 움직이는 영상과는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는 캐릭터에 부여된 목소리와 화려한 액션이 거듭나는 경험은 대게 짜릿하거나 실망적이거나 둘 중 하나일테지만,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관계로 이동하면 그 인식의 차이는 좀 복잡하다.


영화를 먼저 보는 관객은 주어진 사건을 따라가며 실시간으로 주인공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장점이 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연출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별다른 언어적 표현과 미사여구 없이도 관객은 몰입할 수 있다. 영화가 너무 좋아 관련 정보를 찾아보던 중 원작 소설이 있는 걸 발견한다면, 빈 곳을 채워넣듯 다시금 세밀한 감정선과 서사를 보충하며 경이롭고 완전한 감상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소설을 먼저 읽을 때면 독자는 글로 표현된 문장을 바탕으로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속에서 주인공과 교감하며 상상을 뻗어나간다. 그러고 나서 영화를 보게 되면 나만의 이미지가 재현이 됐을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점인지 차분히 관찰할 수 있다. 모름지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이 복습 활동은 본인이 세운 세계를 좀 더 굳건히 만드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츠지무라 미즈키 작가의 소설 『거울 속 외딴 성』은 책 먼저 읽어야할까, 인기에 힘입어 나온 만화부터 읽어야할까, 아니면 최근에 개봉한 영화부터 봐야할까? 물론 책을 e-book으로 읽는 보기까지 더할 수도 있겠지만 그 얘긴 『다시, 책으로』(매리언 울프 저, 2019)나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나오미 배런 저, 2023)를 읽는 것으로 차치하도록 하고(다행히도(?) 『거울 속 외딴 성』은 e-book이 없기도 하다), 여전히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경로가 얼마나 많은지!


우선 나부터 말하자면,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이다혜 기자와 정세랑 작가가 진행한 GV에 참석하기 위해 후다닥 도서관에 가서 원작 소설부터 읽었다.


그렇다. 나는 원작부터 먼저 보는 부류에 속한다. 책을 읽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가서 몰아치는 스토리라인과 흡입력을 온전히 느끼는 선택지도 있지만, 내 고집이, <해리 포터>의 연재를 실시간으로 함께했던 자들이 가진 성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했다. 어떤 영화일지 미리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시간이 좀 남아서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GV의 문을 연 대화도 매체의 차이에서 따라오는 효과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다혜 기자는 애니메이션을 먼저, 정세랑 작가는 소설을 먼저. 직업상 특징 때문이었을까 헤아리며 그게 참 재미있다고 느꼈다.


내가 이 산업에 그저 소비자이자 관람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창작자의 시선이 궁금하기도 했다. 정세랑 작가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곧 열릴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스타워즈>를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도 참여했을 만큼 요즈음 영상 작업도 잦게 하는 편이기에 초대 손님으로 아주 적절했다(물론 요즘들어 신작 영화 GV에 가수나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을 초대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이 드라마화된 케이스로, 공개 후 호불호가 갈리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정세랑 작가는 인물의 외양적인 변화를 CG 처리 하거나, 장면마다 등장하는 엑스트라를 고용하기 위한 비용 등 제작비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버릇이 생겼다며 농담했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은 제약 없이 자유롭단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고코로가 소원 열쇠를 가지고 시계탑으로 향하는 엔딩에서는 공중을 돌아가는 나선형 계단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작에는 없는 오리지널 장면이다. 현관문 밖으로도 못 나가던 고코로가 자기 의지를 보이는 순간이라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하이라이트를 향해 나아가는 금빛 연출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아키의 정체가 후반부에서 밝혀질 때에, 책에서는 성이 바뀐 이유 등을 들먹이며 반전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는 이것을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다른 한편, 600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 소설이 영상화될 때 필연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책에서는 고코로가 학교에 가지 않을 때의 마음이라든가,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도 분노하거나 상심하는 등의 극적인 반응을 아주 자세하고 섬세하게 그렸으나, 영화에서는 감독이 이 과정을 고의로 잘랐다.


정세랑 작가는 읽는 데에 4시간 가량이 걸리는 이 두꺼운 책을 시각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가감할 지 조직하는 건 애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일컬었다. 만약 모든 심리 서술과 대화를 그대로 옮겼다면 게으른 각색이 되었을 것이라며, 만약 주인공들이 어떻게 친해졌고, 고코로가 어떻게 집 밖으로 나가게 됐는지의 결심 등을 샅샅이 집어넣었다면 섬세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었을진 몰라도 시각적인 힘을 싣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애니메이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과감히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빼버리는 것은 포기하는 것보다 의도에 가깝다.


이다혜 기자는 한 인물에 깊고 완전히 빠져드는 게 책이라고 한다면, 그 인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건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애니메이션이랬다. 독서에 시간을 들이다보면 고코로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다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란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압도적인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란 소리다. 마치 등교거부아들이 거울의 성 안에서 학교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그 상태만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이 늘어난 현상이 영상 매체 감상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 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거울 속 외딴 성> 영화가 애니 <귀멸의 칼날>처럼 화려한 액션이 없어 정적이고 루즈하다는 평을 남겼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런 움직임과 묘사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호흡과 쉼을 침묵으로 판단하게 된 지도 모른다. 억지스럽다거나, 뻔뻔하다거나, 플랫폼의 전환과 러닝타임의 한계로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눈에 불 켠 듯 찾아내고, 그 찝찝함을 관람하는 내내 곱씹는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요지는, 최선을 다해 선사받은 충분한 감동과 눈물을 잠자코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게 이 영화가, 이 전환이 쏘는 신호탄이지 않을까.


그래. 눈물. 이제 작품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책을 보면서 운 건 초등학생 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다 베갯잇을 적신 이후로 처음이다.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도 울었다.


『거울 속 외딴 성』은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등교거부 학생 7명이 각자 방에 있는 거울을 통해 ‘거울의 성’에 초대받게 되고, 그 안에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를 찾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제목에도 들어가고 작품에서 주요한 소재인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빛이 통과하는 창문과 달리 상이 거기에 반사된다는 점에서 많이 쓰이고 연출가들이 좋아하는 장치라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영화속거울(@mirrorinfilm)’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속 쇼트를 모으는 계정이 있을 정도이다.


『거울 속 외딴 성』의 거울도 어김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아상을 확인하는 비유의 대상으로 쓰인다. 7명의 아이들은 모두 거울 속에 들어가 자기가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거나 도망친다.


거울 성에는 공용 공간 외에도 개인 방이 주어지는데, 각자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후카의 방에는 피아노가 있다든가, 동화책을 좋아하는 고코로의 방에는 빼곡한 책장이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는 모두 성의 지킴이 같은 존재인 ‘늑대님’이 마련한 것으로, 알쏭달쏭한 힌트를 던지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지만, 본인이 간절히 원한 시간일만큼, 아이들에게 성에서 적응하고 서로 알아가거나 열쇠를 찾을 시간을 넉넉히 준다. 이는 어른의 입장에서 무척 자상한 태도로 읽힌다.

지금의 우리에게 학교 폭력과 따돌림, 등교거부란 이슈는 전혀 생소한 주제는 아니다. 실제로 GV에 참석한 관객들의 입을 빌리면, 학교 밖 청소년이었다가 예술가가 되는 경우가 은근히 흔하다고 하니, 자신만의 속도로 목소리를 찾게 되는 이야기 속 아이들은 어떠한 과장도 없이 시선을 끌지 않고도 피해자 입장에서의 고통과 그 심각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는 어른인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복수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단정지을 수 없는 편이다.


부모님과 대체 스쿨의 선생님에게조차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는 일을 겪은 고코로는 내향적인 사람이 자기방어적 표현과 발언을 못 할 때 얼만큼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 아키란 캐릭터도 의붓아버지의 위협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오고, 우레시노의 빵셔틀, 스바루의 무관심, 리온의 단절, 이 모든 것들을 다룰 때에 어른스러운 태도가 깔려있어 다시 읽어도 좋을 책이다.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그 나이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GV에서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아이들은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성을 떠날지, 소원을 이루는 대신 모든 기억을 잃을 지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들의 우정은 나이 차이 때문에라도 한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할 수 없고, 스치듯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 관계의 한시성을 뚜렷히 보여주면서도 이 또한 의미가 있단 걸 말해준다. 어떤 관계가 너무 좋다면 계속 유지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욕심 때문에 변질되거나 무너지는 경우도 빈번한 걸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일전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에서 정세랑 작가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지금 쌓고 있는 모든 인간 관계가 지친다고. 그랬더니 작가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사실 그 관계가 본인에게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억지로 붙들고 있을 필요 없어요. 그래, 정말 그렇다.

이에 더해, 같은 지역의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설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까닭은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같은 고통 속에 있다 해도 그 해결책이 아이들을 몰아세우는 방식으로는 쓰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책은 분명히 얘기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마주칠 갈등을 두고 ‘너는 매일 싸우고 있잖아. 싸우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줘야한다고. 싸워야만 하고 이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결국은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필승의 방법을 가르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들이 어떻다 해도 너는 존중받아야 하며, 지금 겪는 일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받아야 하는 고통이라고 얘기해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해, 라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다혜 기자는 이런 류의 작품을 '소원을 비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불렀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은 비록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단 걸 깨달을 때라면서, 강력한 목표인 '소원'을 향해 달려갈 때 결국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타인을 위해서 두려움을 뛰어넘었을 때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향한다. 상투적인 신파일지라도, 어김없이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 모두에겐 소원이 있고, 어쩌면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청소년으로 돌아간다면, 청소년문학을 사랑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마음껏 울고 위로받아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다. 굳이 어른들이 권장하는 책을 따라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테다. 빨간모자와 늑대와 어린양들을 사랑해도 된다고. 공감하고 슬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응원하는 건 진짜 용감한 일이라고 꼭 알려주고 싶다.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야.





p.s. 정세랑 작가는 동 작가의 <슬로하이츠의 신>, <야미하라>, <호박의 여름>도 추천하였다. 아마 청춘과 호러, 종교를 혼재하며 장르를 눈속임하는 추리 소설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취향을 저격했으리라(『슬로하이츠의 신』은 타 프로그램에서도 추천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뒷편에 실린 「마사의 책」도 추천하셨으니 참고하실 분들은 읽어보셔라. 나 또한 단순히 소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 <3000년의 기다림>과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가 떠올랐기 때문에 같이 추천해본다.




스바루가 나쁜 게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자신은 언제까지 이대로일지 모르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보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든다. 갑자기 초조해지고 두려워진다. - P456

성 안의 다른 친구들 또한 주위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그 사람이 그 아이들의 힘이 돼주기를, 하고 바란다. (…) 아키는 자신은 힘들 거라고 했었다. (…) 가능성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는 얘기다. 아키는 어떻게 될까. 다른 모든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 너도 네 인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라.’ ‘똑바로 해라.’라고 야단치는 것으로 끝. 즉 아무도 나를 위해 필사적으로 애써주지 않는다고 스바루는 생각한다. 그런 게 편하긴 하지만 한편 (…) -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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