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는 아주 방대한 역사책이다. 서양 언어로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번역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해 전부터 훌륭한 번역본이 완역되어 나와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현재 민음사에서 나온 개정판을 보면 전6권에 무려 5,400쪽을 자랑하는데, 이는 저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민음사 판본으로 전6권에 4,150쪽이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동서문화사 판본으로 전3권에 2,019쪽인 사정과 비교해 보더라도 단연 압도적이다.
이 방대한 역사책은 총 13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기 본기』가 12장, 『사기 표』가 10장, 『사기 서』가 8장, 『사기 세가』가 30장, 가장 유명한 『사기 열전』이 70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 게 특색이다. 이 가운데 본기는 주로 황제들의 전기를 다루고, 세가는 제후들의 전기를 다루고, 열전은 이름난 정치가나 장군들 혹은 선비들이나 책략가들을 다룬다. 표는 각 시대의 연표를 기록하고, 서는 제도와 문화(의례, 음악, 책력)를 다룬다. 인물 전기로만 따진다면 모두 112장인 셈인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단지 50명의 영웅들을 다루는 데 비해『사기』가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도 방대한 인물들을 다룬 저술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12장의 전기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중국 최고의 스타(?) 황제였던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은 부분들이다. 『사기 본기』에 실린 <진시황 본기>와 『사기 열전』에 실린 <이사 열전>, <몽염 열전>, <백기·왕전 열전>이 진시황 시대의 역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가 『사기』 중에서도 유독 흥미로운 까닭은 간단하다. 진시황이 그토록 강력한 카리스마로 중국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만 과정 속에서 <분서갱유>와 <지록위마>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들인 카이사르, 브루투스, 안토니우스에 얽힌 이야기인 <브루투스, 너 마저!>에 필적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서갱유>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진시황이 대제국을 통일한 이후 선비들의 '정부 비판'을 강제로 틀어막기 위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훌륭한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부에 비판적인 학자들을 한꺼번에 생매장한 '언론 탄압'의 상징적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일부나마 인용하면 이렇다.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을 거두어 모두 없애 버렸다. 문학과 방술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요,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도사)를 부른 것은 배워 익혀 기이한 약을 구하게 하려 함이다. 지금 들으니 방사 한중이 떠나서는 보고하지 않고, 서불 등은 온갖 방도를 썼는데도 끝내 불사약을 얻지 못하고 한갓 간사한 이익만 챙긴다는 보고가 날마다 들려온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내렸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함으로써 나의 부덕함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유생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물어보도록 하니 어떤 자는 요사스러운 말로써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유생들을 심문했다. 유생들이 서로를 고발하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60여 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가 간언하여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먼 곳의 백성들은 아직 따르지 않고 있으며, 유생들은 모두 암송하여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상께서 법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을 옭아매니, 신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황상께서 이 점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에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했다.(242∼24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 짧은 이야기 하나만 하더라도 진나라가 일찍 붕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살펴봤듯이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는 올곧은 인물이었는데도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미움을 받아 변방으로 쫒겨나고 만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이 결국 진나라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멸망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시황이 순행을 나섰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을 때 크나큰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소에게 후일을 맡긴다'는 진시황의 친필 유서가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조작되고, 무능한 막내아들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 보자.
평원진에 도착했는데 병이 났다. …… 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옥새를 찍은 조서를 써서 공자 부소에게 보내 일렀다.
장례에 참석하고 함양에 안장하라.
그러고는 편지를 밀봉하여 중거부령 조고의 관부에 놓아 둔 채 사자에게 주지 않앗다.
7월 병인일에 시황제가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溫凉車 속에 안치하고 예전에 총애를 받던 환관이 참승이 되어 도착하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모든 신하가 전과 다름없이 나랏일을 아뢰었다. 환관이 온량거 안에 있다가 보고된 일을 결재했다. 공자 호해와 조고 및 총애를 받던 환관 대여섯 명만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았다. …… 조고는 곧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진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내린 밀봉 서찰을 뜯어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유조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바꾼 후, 공자 호해를 태자를 삼았다. 그러고는 다시 서찰을 만들어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주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일은 전부 「이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247∼24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열두 살에 황제에 오른 호해는 환관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했다. 조고는 온갖 감언이설로 이세 황제에 아첨하면서 진시황 시절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숱한 대신들과 관리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 감금하고 도륙했다. 이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진나라를 통째로 주무르기 시작한 조고는 진나라 통일의 일등공신인 이사마저 제거한 끝에 기어코 황제 자리를 넘보기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이야기가 저 유명한 <지록위마>이다. 조고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는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부분은 『사기 열전』의 <이사 열전>에도 상세히 나와 있지만, 『사기 본기』의 <진시황 본기>에서도 거듭 다뤄진다.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먼저 시험해 보려고 사슴을 끌고 와서 이세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말입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그러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를 따르며 아부했다.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을 빌려 중상모략하였다. 이후로 신하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25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세 황제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3년 만에 온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그 책임을 몽땅 조고에게 돌리려 한다. 낌새를 알아챈 조고는 미리 일을 꾸며 이세 황제를 제거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고는 이세황제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후임으로 내세운다. 진나라의 3대이자 마지막 황제에 오른 자영은 이내 '망국의 주범'인 간신 조고를 붙잡아 죽이고 삼족을 처형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진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틈을 타 거병한 유방에 의해 진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자영은 끝내 항우에게 살해된다. 황제 자리에 오른지 불과 세 달도 지나지 않을 때였다.
진나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상은 토붕와해(土崩瓦解)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켰다.(자세한 내용은 『사기 열전』의 <평진후·주보 열전>에 실려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 본기>를 마무리하면서 특별히 가생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나긴 글을 전부 인용해 놓았다. 나라가 어떻게 해서 어지러워지고 망국에 이르는가를 '울림 가득한 문장'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태사공(사마천)은 말한다.
"…… 주나라가 쇠퇴할 무렵 진나라가 일어나 서쪽 변경 지역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 이래로 차츰 제후들을 잠식하여 마침내 시황始皇이 되었다. 시황제는 스스로 공적이 오제를 뛰어넘고 영토도 삼왕보다 넓다고 여겨서 그들과 나란해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훌륭하다, 가생賈生이 추앙한 말이여! 그는 말한다.
진나라는 산동 제후들의 30여 군郡을 손아귀에 넣었고 나루터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에 의거해 무장한 병사를 정비하여 그곳을 수비했다. 그러나 진섭이 수졸守卒 중 어지럽게 흩어졌던 무리 수백 명을 데리고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쳤다. 활과 창 등 무기를 쓰지 않고 호미와 서까래와 몽둥이를 가지고 민가를 보는 대로 집어삼키며 천하를 거리낌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
이제 진나라 이세가 자리에 오르자 천하에서 목을 빼고 그 정치를 바라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추운 자에게는 해진 짧은 옷이라도 이롭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라도 달콤하다. 따라서 천하 백성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새로운 군주에게는 오히려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인仁을 행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만약 이세가 평범한 임금의 품행을 품고 충신과 현인을 임용하고 나서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의 우환을 걱정하고, 소복을 입고서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봉토를 가르고 백성들을 나누어 공신의 후예들에게 봉해 주고, 제후국을 세우고 군주를 옹립하여 천하를 예로써 다스리고, 감옥을 비우며 사형을 면제해 주고 죄인의 처와 딸을 노비로 삼는 추잡한 죄를 없애 그들을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서 재물과 화폐를 나누어 외롭고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일을 줄여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략히 하고 형벌을 줄여 그들의 후손을 유지하게 하며, 천하의 백성들에게 모두 스스로 새롭도록 하여 태도를 고치고 행동을 닦으며 각자 몸을 삼가게 하여 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위엄 있는 인덕으로 천하와 함께했다면 천하가 모여들었을 것이다. 설령 천하 안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기 처지를 편안히 여기고 즐기며, 오직 변란이 생길 것인가만을 걱정하고 교활한 백성들이 있더라도 군주를 배반할 마음이 없다면, 궤도에서 벗어난 신하도 그 지략을 꾸밀 수 없을 것이며 사납고 어지러운 간악함도 멈출 것이다. 이세는 이 방법을 행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무도한 것을 더했으며 종묘와 백성들을 훼손하고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형벌을 번잡하게 하여 사형을 엄하게 했고, 관리들의 다스림에 각박함이 심하고 상과 벌은 합당하지 않았으며, 세금의 징수에 한도가 없고 천하에 일이 많아 관리들이 관리를 할 수 없었으며,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임금은 구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사함과 거짓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위아래 사람이 서로 속이고 죄를 입은 자가 많아져 거리에서 형을 받아 죽는 사람을 보게 되어, 천하가 그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군후와 공경 이하로부터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롭다는 마음을 품었는데 몸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 모두가 그 위치를 불안해했으므로 쉽게 동요되었다. 진섭이 탕왕과 무왕의 현명함을 갖추지 못하고 공후의 존귀함에 의지하지 않았는데도 대택에서 팔을 걷어붙이자 천하가 호응한 것은 백성들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선왕들은 시작과 끝의 변화를 보고서 존망의 기미를 알아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삼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힘쓸 뿐이었다. 천하에 비록 바른 길에 거스른 행동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분명 호응하는 도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의를 행할 만하나 위험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그릇됨을 행하기가 쉽다." 라고 한 것은 이런 점을 말한 것이다. 귀하여 천자가 되었고 부유하여 천하를 소유했으나 몸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어서이다. 이것이 이세의 잘못인 것이다.
(272∼27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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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에는 사마천이 직접 쓴 부분 말고도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부분도 더러 담겨 있다. <진시황 본기>에는 후한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글이 덧붙어 있어 흥미롭다. 사마천과 가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중략)
이윽고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임용했다. 가슴 아프다, 이 말이여. 사람의 머리로 짐승처럼 우는 꼴이로구나. 위험하지 않았다면 죄악으로 인해 정벌되지 않았을 것이고, 죄악이 심하지 않았다면 허망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이르러서도 머무를 수 없었으며, 잔인하고 포악하여 때를 재촉했으니, 비록 지형이 유리한 나라를 차지했다 해도 오히려 국토조차 보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영은 순서를 뛰어넘어 자리를 이을 수 있었고, 옥관을 쓰고 화불華紱(아름다운 인수)을 차고, 황색 지붕의 수레를 타며, 관리들을 모두 이끌고 칠묘를 찾아뵈었다. 하찮은 사람이 적당하지 않은 지위에 올라 직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당황하지 않음이 없었고 눈앞의 안일함만을 날마나 꾀하니, 자영은 홀로 오랫동안 생각하고 근심을 없애고 아버지와 아들이 득실을 따져 가까이로는 집안 내에서 마침내 교활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선왕을 위해 역적을 정벌했다. 조고가 죽은 다음, 빈객과 친지들이 서로의 노고를 채 위로하지도 못하고,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술이 아직 입술을 적시지도 않았는데 초나라 병사들이 이미 관중을 도륙하고 진인眞人(유방)이 패상에 날아드니, 흰 수레에 인수를 매고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받들어 새로운 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정백이 두 손에 모정과 난도를 들자, 초나라 장왕이 물러나 버린 것과 같다. 강물은 터지면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썩으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의와 사마천은 말한 것이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 제사가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 [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추었다.
(279∼280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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