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2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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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폐기

만약에 권력이 지배자에게 위양된 의지의 총화(總和)라고 한다면, 푸카체프는 대중의 의지의 대표자인가?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왜 나폴레옹 1세는 대표자인가? 나폴레옹 3세는 불로뉴에서 체포되었을 때는 죄인이었는데, 그 후 그가 체포한 자들 쪽이 왜 죄인이 되었는가?

때로는 2,3명의 사람밖에 관여하지 않는 궁정 혁명의 경우도 역시 대중의 의지는 새로운 인물로 이동하는가? 국제 관계의 경우, 국민 대중의 의지는 정복자에게 이동하는가? 1808년에 우리 군이 프랑스군과 동맹해서 오스트리아와 싸움을 했을 때 나폴레옹으로 이동하였는가?

이들 물음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대답을 할 수가 있다.

(1) 대중의 의지는 항상 그들이 고른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의 지배자에게 무조건 위양된다. 따라서 새로운 권력의 발생은 모두, 즉 일단 위양된 권력에 대한 투쟁은 모두 참다운 권력에의 침해로밖에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다.

(2) 대중의 의지는 일정한 어떤 조건하에서 조건부로 지배자에게 위양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권력에 대한 압력과 충돌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 폐기까지도 지배자가 권력을 위양 받은 바탕이 되는 조건을 지키지 않은 결과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3) 대중의 의지는 지배자에게 위양되지만 잘 알 수 없는 또는 분명치 않은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여러 권력의 발생과 그 투쟁이나 성쇠는 대중의 의지가 어떤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위양되는 경우의 알 수 없는 조건을 지배자가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가에 따라 생긴다는 것을 인정한다.(1622-1623쪽)

 


의지의 자유 문제의 핵심

비록 분명히 표명되지 않고 있다 해도, 인간의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도처에서 느낄 수가 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역사가들은 어쩔 수 없이 이 문제에 도달한다. 역사의 모든 모순과 애매함 그리고 역사학이 나아가고 있는 잘못된 길의 근원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데에 귀결된다.

만약에 개개인의 의지가 자유라면, 즉 각자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역사는 모두 맥락이 없는 우연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1000년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게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법칙에 위배되는 그 사람의 단 하나의 자유로운 행위만으로, 전 인류에게 그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는 가능성이 파괴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만약에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법칙이 하나라도 있으면, 자유의사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그 법칙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두뇌를 사로잡아, 고대로부터 그 거대한 의의를 모두 포함해서 제기되고 있는 의지의 자유 문제의 핵심이다.(1637쪽)


 

1000번째로 착수할 때에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전과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경험이나 논리적 판단이 아무리 인간에게 제시해도, 인간은 같은 조건과 같은 성격으로, 항상 같은 결과로 끝난 행위에 1000번째로 착수할 때에도 역시 경험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미개인이건 사상가이건 어떤 인간도 같은 조건 하에서 두 가지 행위를 생각한다는 것을 논리적 판단과 경험이 제아무리 반박할 수 없도록 증명해도 이 (자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무의미한 생각 없이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유의 생각 없이는 인간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순간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욕망 또는 삶에의 의욕은 자유 확대의 요망이기 때문이다. 부와 빈곤, 명성과 무명, 권력과 예종(隸從), 힘과 무력, 건강과 병, 교양과 무지, 노동과 여가, 포식과 기아, 선과 악은 자유의 정도의 대소(大小)에 지나지 않는다.(1639쪽)


 

미장이

인간이 어느 때인지도 모르는 시기에 원숭이로부터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한줌의 흙으로부터 생겼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전자에서는 x는 시간이고, 후자에서는 x는 발생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 의식이 인간이 속하고 있는 필연의 법칙과 어떻게 해서 결부되느냐는 문제는, 비교생리학이나 동물학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구리, 토끼, 원숭이 등에는 근육, 신경 활동밖에 관찰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근육, 신경 활동과 의식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연과학자와 그 숭배자들은 교회 벽의 일면만을 칠하도록 고용된 사람이,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기화로 무턱대고 창도 성상도 발판도 아직 굳지 않은 벽도 회반죽으로 모두 칠하여, 미장이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것이 평평하고 밋밋하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 미장이와 같은 것이다.(1641쪽)



경험 과학과 역사

경험 과학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필연성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생명력이라고 부른다. 생명력이란 우리가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미지의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필연성이라고 부르고, 알 수 없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역사에 있어서의 자유란, 우리가 인간 생활의 법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알 수 없는 것의 표현 바로 그 자체이다.(1652쪽)



 

만약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하나 있다고 한다면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역사적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으로서, 즉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힘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천문학에서 천체의 운동에 자유로운 힘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법칙의 존재, 즉 모든 종류의 지식의 가능성을 분쇄하는 것이 된다. 비록 하나라도 자유롭게 운동하는 천체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케플러나 뉴턴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고 천체의 운동은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만약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하나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법칙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역사상의 사건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1652-1653쪽)

 

 

천문학과 역사. 자구의 부동성과 개인의 자유

한때의 천문학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역사 문제의 경우도 견해의 차이는, 모두 눈에 보이는 현상의 척도가 되어 있는 절대적 단위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문학에서 그것은 지구의 부동성(不動性)이었다. 역사에서는ㅡ그것은 개인의 독립ㅡ자유이다.

천문학에서 지구의 운동을 인정하는 어려움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감각과, 천체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역시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거부하는 점에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개인이 공간, 시간, 인과의 법칙에 종속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려움은, 자기의 개성은 속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거부하는 데에 있다그러나 천문학에서 새로운 견해가 분명히 우리는 지구의 운동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구의 부동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난센스에 도달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고 있지 않은 운동을 인정하면 우리는 법칙에 도달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도 새로운 견해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우리는 자신의 속박을 느끼고 있지 않으나, 우리의 자유를 인정하면 난센스에 도달한다. 그런데 우리가 외계, 시간, 인과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법칙에 도달한다." (1655-16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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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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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천재

 

역사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러시아나 프랑스의 위신, 유럽의 균형, 혁명 사상의 확산, 전반적인 진보 등, 여하간 일정한 목적의 달성을 향하여 위대한 인물들이 인류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연과 천재의 관념 없이는 역사의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만약에 현 세기(19세기) 초엽에 유럽에서 있었던 몇 가지 전쟁의 목적이 러시아의 위신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그 이전의 모든 전쟁이 없어도, 침략이 없어도 달성할 수가 있었다. 만약에 목적이 프랑스의 위신을 유지하는 일이라면 그 목적은 혁명이 없어도, 제국이 없어도 달성할 수가 있었다. 만약에 목적이 사상의 보급이라면, 책의 인쇄가 군대보다도 훨씬 잘 그것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목적이 문명의 진보라면 인간이나 그 재산을 무로 돌리는 대신에, 다른 더 이치에 닿는 문명 보금의 방법이 있다는 것은 매우 간단하게 추측할 수가 있다.

 

도대체 어째서 이것이 이런 형태로 생겼고 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것은 이런 형태로 생겼기 때문이다. "우연이 상황을 만들고 천재가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천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이나 천재라고 하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이 말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단계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질로부터 동떨어진 행위를 일으키는 힘을 본다. 왜 그것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1542-1543쪽)

 

 

 

우연과 역(逆)의 우연

 

무엇 하나 자기에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의의를 덧붙여서 모든 자기의 범죄를 자랑하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는 영광과 위대한 이상, 이 사나이와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인도할 이상이, 자유분방하게 아프리카에서 형성된다. 그가 무엇을 하든 모두 성공한다. 그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 포로 학살의 잔인성은 그의 좌가 되지 않는다. 어린이처럼 경솔하게, 이유도 없이 비열하게 아프리카를 떠나 고통받고 있는 동료를 그대로 남겨둔 것은 그의 공적으로 여겨지고, 적의 함대는 또다시 그를 놓치고 만다. 자기가 행한 행운의 범죄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자기의 역할을 다할 상태가 되어 아무런 목적 없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 1년 전에 그를 파멸시켰을지도 모르는 공화국 정부의 붕괴는 극한에 달해 있었고, 당파의 때가 묻지 않은 인간인 그의 존재는 지금 정부의 의의를 높일 뿐이었다.

 

그 사람만이,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만들어낸 영광과 위대(偉大)의 이상,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자기 찬미, 대담한 범죄,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이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에 필요한 인간이었으므로 거의 자기의 의지에 관계없이, 그의 우유부단과 무계획, 그가 하는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음모에 휘말려 그 음모가 성공을 거둔다.

 

우연이, 무수한 우연이 그에게 권력을 주고 모든 인간들이 상의라도 한 것처럼 그 권력의 강화에 협력한다. 우연이, 당시의 프랑스 총재들의 성격을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

 

…… 그런데 갑자기 그때까지 계속된 일련의 승리에 의해서, 실로 시종일관해서 그를 예정된 목적지로 이끌어온 우연과 천재 대신에, 보로지노의 코감기에서, 혹한과 모스크바에 불을 붙인 하나의 불꽃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역(逆)의 우연이 나타난다. 그리고 천재 대신에 유례없는 어리석음과 비열함이 정체를 드러낸다.

 

침략자는 패주하여 뒤로 물러났고, 다시 패주해서 모든 우연이 이제는 그의 편을 들지 않고 끊임없이 그에게 등을 돌린다.

 

파리ㅡ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폴레옹 정부와 군대는 붕괴된다. 나폴레옹 자신은 이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분명히 비참하고 혐오스럽다. 그런데 또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것이 생긴다. 동맹자들이 나폴레옹을 자기들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미워한다. 힘과 기능을 빼앗기고 악행과 간지(奸智)가 폭로된 이상, 그는 10년 전이나 1년 후에 그랬던 것처럼 동맹자의 눈에 무법한 악당으로 비쳐야 했다. 그런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우연에 의하여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1년 후에는 무법의 악당이라고 여겨진 인간이 프랑스에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섬으로 보내어지고, 그 섬이 그의 영지로 주어지고, 친위대와 무엇인가를 위하여 지불되는 수백만의 돈도 따라간 것이다.

 

(…)

 

프랑스를 황폐하게 만든 인간이 혼자서 음모도 없이 병사도 거느리지 않고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보초라면 누구나 그를 잡을 수가 있었는데 기묘한 우연으로 누구 하나 그를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루 전에 저주하고 1개월 후에도 저주하게 될 이 인간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이 인간은 총괄적인 마지막 막을 납득이 가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직도 필요한 것이다.

 

그 막은 끝난다. 마지막 연기가 끝난다. 배우는 옷을 벗고 눈썹과 입술연지를 씻어내도록 명령된다ㅡ그는 이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이 고독하게 자기의 섬에서 스스로 자기에게 비참한 희극을 연출하고, 정당화가 이제 필요 없을 때에 자기 사업을 정당화하려고 쩨쩨한 책략을 꾸미며 거짓말을 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사나이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힘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온 세계에 알리는 데에 수년의 세월이 흐른다.

 

모든 일을 꾸몄던 자가 연극이 끝났을 때 배우의 옷을 벗기고 우리들에게 보인다.

 

"보시오. 당신들이 믿었던 것을! 이거요! 이제 알겠죠? 이 사나이가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움직였다는 것을."

 

태양이나 우주 공간의 하나하나의 입자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지만, 너무나 거대해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전체적인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도 자기 자신 속에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은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전체의 목적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꽃에 머물고 있던 벌이 어린이를 쏘았다. 그래서 어린이는 벌을 무서워하고, 벌의 목적은 사람을 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꽃 속에서 꿀을 따고 있는 벌에 정신이 팔려, 벌의 목적은 꽃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양봉가들은 벌이 꽃가루를 모아 벌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 벌의 목적은 꿀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양봉가는 더 자세히 벌들의 생활을 연구하여, 벌은 새끼를 기르고 여왕벌을 양성하기 위해 꽃가루를 모으고 있으며 그 목적은 종(種)의 유지에 있다고 말한다. 식물학자는 암수가 서로 다른 식물의 꽃가루를 몸에 묻혀 암꽃으로 날아옴으로써 벌이 수분(受粉)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식물학자는 그것을 벌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식물의 확산을 관찰해서 벌이 그 확산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찰자는 이것이 벌의 목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지(人知)가 분명히 밝힐 수있는 제1, 제2, 제3의 어느 목적에 의해서도 모두 밝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목적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 인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궁극적 목적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벌의 생활과 그 이외의 생활 현상과의 상관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역사적 인물과 여러 국민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1545-1551쪽) 

 

 

 

시시한 대상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시시한 것으로 보여도 하나의 대상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을 향해 주의를 집중하면, 무한히 커지지 않는 시시한 대상은 없는 것이다.(1575쪽)

 

소년의 기억에 없는 아버지는 마치 하느님처럼 여겨져 그 모습을 공상할 수도 있었고,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조이고 슬픔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1584쪽)

 

(나의 생각)

 

어릴 때 부모를 잃은 톨스토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묘사이다.

 


 

늙은 여자

 

이러한 늙은 여자의 상태는 아무도 그것을 화제로 삼은 일은 없었으나 집안사람 모두에게 알려져 있고, 그녀의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모두가 될 수 있는 대로 노력을 하였다. 다만 니꼴라이, 삐에르, 나따샤, 마리야 사이에서는 서로 가끔 교환되는 시선이나 미소 같은 것 속에, 백작 부인의 상태를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그 이외에 또 하나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제 이 인생에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 이러한 일은 이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모두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한때는 소중하고 생명이 충만해 있었으나, 지금은 이처럼 비참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에게 순종함으로써 자기를 억제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라는 뜻이 나타나 있었다. 죽음을 잊지 말아라ㅡ하고 그 시선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 집안 식구 중에서, 멍청한 사람과 어린아이들만이 이것을 이해 못하고 백작 부인을 피하고 있었다.(1587쪽)

 

 

 

플루타르코스의 책

 

니꼴렌까는 방금 눈을 뜨고 식은땀을 흘리고 자기 침대에 누운 채 자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꿈을 꾸다가 눈을 뜬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투구를 쓰고 있는 자기와 삐에르를 보았다ㅡ플루타르코스의 책(그리스, 로마의 「영웅전」)에 쓰여 있는 것 같은 투구였다. 그는 삐에르 아저씨와 함께 대군의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1607쪽)

 

 

 

아버지도 만족해하실 일을 하겠다

 

'아버지가' 그는 생각하였다. '아버지가(집에는 잘 닮은 초상화가 두 개 있었는데 니꼴렌까는 한 번도 안드레이를 인간의 모습으로 떠올린 일은 없었다) 나와 함께 있어서 나를 만져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옳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삐에르 아저씨를 옳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비록 그 분이 뭐라고 하시든 간에 나는 이것을 하겠다. 왼손잡이 무키우스(불굴의 용기를 보이기 위해 적 앞에서 자기의 오른팔을 태웠다고 하는 로마의 전설적인 용사)는 자기 팔을 태웠다. 내 인생에도 같은 일이 없으란 법은 없잖아. 나는 알고 있다. 모두 내가 공부를 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공부를 그만 둔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하는 거다. 나는 단 한 가지 하느님에게 빈다. 나에게 플루타르코스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면 나는 같을 일을 하겠다. 더 훌륭하게 하겠다. 모두가 나를 알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모두가 나에게 열중하게 된다.’ 그러자 갑자기 니꼴렌까는 가슴에 흐느낌이 복받쳐 오는 것을 느끼고 울기 시작하였다.

 

"기분이 언짢아요?" 데사르가 물었다.

 

"아뇨." 니꼴렌까는 대답하고 베개를 베고 누웠다. '저분은 상냥하다, 좋은 분이다, 나는 그분을 좋아한다.' 그는 데사르를 생각하였다. '하지만 삐에르 아저씨는! 아,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버지! 아버지! 그렇다, 나는 아버지도 만족해하실 일을 하겠다 ……."(16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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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정이나

 

"그렇습니까, 정말 어느 가정이나 불행이 없는 가정은 없으니까요." 삐에르는 나따샤 쪽을 향하여 말했다. "실은 말입니다, 내가 구출된 바로 그날 나도 그 애를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이였는데 말입니다!"(1517쪽)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는 나따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의 화사한 손을 잡았을 떄,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정말로 이 손, 이 얼굴, 이 눈, 내게는 동떨어진 보물과 같은 여성의 매력이 전부, 정말로 이것이 전부, 영원히 나의 것으로, 나에 대한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안녕히 가세요, 백작님." 그녀는 삐에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어요." 속삭이듯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말과, 그것을 말했을 때의 눈과 얼굴 표정이 두 달 동안 삐에르의 무한한 추억과 행복한 공상의 대상이 되었다.

 

'난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어요 …… 그렇다, 그렇다, 그녀는 뭐라고 말했지? 그렇다,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어요 라고 말했지. 아, 얼마나 나는 행복한가! 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 (1532쪽)

 

 

 

마치 목욕탕에서 나온 것 같다고 말한 그날 밤부터

 

삐에르가 떠난 뒤, 나따샤가 놀리는 것 같은 기쁜 미소를 띠고 마리야에게 그분은 마치 목욕탕에서 나온 것 같다고 말한 그날 밤부터 그녀의 마슴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것,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으나 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나따샤의 마음 속에서 눈을 떴다.

 

모든 것ㅡ얼굴, 걸음걸이, 눈초리, 목소리ㅡ이 그녀의 내부에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녀 자신에게도 뜻하지 않았던 생명력, 행복의 기대가 표면으로 떠올라 충족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날 밤 이래 나따샤는 자기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신세에 대해서 푸념하지도 않았고, 과거 일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미래의 즐거운 계획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삐에르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마리야가 그의 이야기를 하면, 오랫동안 사라져 있던 빛이 눈 속에서 반짝이기 시작하고 아리송한 미소로 입술이 풀리는 것이었다.(1534-1535쪽)

 

 

 

나의 이해가 미치지 않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현재의 러시아 문헌을 보면 중학생에서 역사학자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알렉산드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이들 비난의 본질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그 본질은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 인간 권력의 최고의, 그 이상 없는 단계, 말하자면 역사의 모든 광선이 집중되어 눈부신 빛을 내고 있는 초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있다. 권력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음모, 기만, 추종, 자만 등,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에 노출되어 있는 인물,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유럽에서 생기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던 인물, 더욱이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습관, 욕망, 진, 선, 미에 대한 소원을 가진 살아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 인물이 50년 전에는 선량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점을 역사가는 비난하고 있지 않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즉 책이나 강의록을 읽고 그 책이나 강의록을 한 권의 작은 노트에 기록해왔던 교수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인류의 행복에 대해서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알렉산드르 1세가 50년 전에 무엇을 여러 국민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었다 해도, 알렉산드르 1세를 비난하고 있는 역사가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인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의 단계를 더듬어 보면 1년마다, 또 새로운 필자가 나타날 때마다 인류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므로, 이 예상은 더욱 당연하며 필연적인 것이다. 즉 행복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10년 후에는 악이 되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동시에 전혀 모순된 관점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폴란드에 주어진 헌법이나 신성동맹을 알렉산드르의 공적으로 하고, 다른 사람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의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유익했는가 유해했는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에 유익하고 무엇 때문에 유해했던가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다만 무엇이 행복인가 하는 그 사람의 좁은 생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1812년에 모스크바의 나의 아버지 집이 무사했던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군의 영광인지, 그렇지 않으면 뻬쩨르부르그와 그 밖의 대학의 번영인지, 그렇지 않으면 폴란드의 자유인지,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의 강대함인지, 그렇지 않으면 유럽의 균형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종류의 유럽의 개화, 즉 진보인지, 나는 모든 역사적 인물의 행동이 이들 목적 이외에 보다 더 보편적인 나의 이해가 미치지 않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540-1541쪽) 

 

 

 

인간의 생활

 

인간의 생활이 이성으로 지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갈 가능성은 없어지고 만다.(15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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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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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뚜조프에 대한 평가


자기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런 사람들은 더없이 슬픈 필연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자기네가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더없이 훌륭하고 격조가 높은 일이라고 망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꾸뚜조프를 비난하고, 전쟁 초기부터 그는 자기들이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일을 방해해 왔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뽈로뜨냐누이에 자보디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끄라스누이 부근에서 진군을 중지시켰던 것은 나폴레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폴레옹과 내통하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매수를 당하고 있었다는 등 여러 말들을 하고 있었다.

야욕에 정신이 없었던 같은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후세 사람과 역사가들도 나폴레옹을 위대하다고 인정하고, 꾸뚜조프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평가했다. 외국인들은 꾸뚜조프가 교활하고 음탕하고 연약한 조정 사람이라고 보고 있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그를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여, 러시아의 이름 외에는 쓸모가 없는 인형같은 취급밖에 받지 못했던 것이다.

1812, 13년에 꾸뚜조프는 그의 잘못을 노골적으로 비난받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최근 쓰인 역사에서도 꾸뚜조프는 교활한 궁정의 거짓말쟁이이며, 자신의 실패로 말미암아 끄라스누이와 베레지나 강 부근에서 러시아군에게 명예, 즉 프랑스군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잃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적인 이성이 인정하지 않는 위대한 인간, 그랑 톰(grand-homme)이 아닌 인간의 운명이다. 이것은 신의(神意)를 깨닫고 자신의 의지를 그것에 종속시켜, 항상 고독하고 드물게 보는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높은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에 속인들의 증오와 멸시라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은 그 행동이 이토록 일정불변하게 하나의 목적으로 향했던 역사상의 인물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또 그 이상으로 훌륭하고 그 이상으로 전 국민의 의지와 일치한 목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역사상의 인물이 자기에게 부과한 목적이, 1812년의 꾸뚜조프의 전체 활동의 도달 목표였던 목적처럼, 그토록 완전하게 달성된 실례를 역사에서 발견하기는 더욱 어렵다.(1479쪽)

 



 

국민적 감정

오늘날 이 사건의 의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10명 정도의 인간의 머리에 있던 무수한 목적을 사람들의 행위에 덧붙이지 않는 한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건 전체가 그 결과를 포함해서 우리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당시 이 노인 한 사람만이 여러 사람의 의견에 반대해서 이 사건의 국민적 의의를 꿰뚫어 볼 수 있었는가? 어째서 당시에 그 의의를 실로 올바르게 간파하고 활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한 번도 배반한 일이 없었던가?

발생하고 있는 현상의 뜻을 통찰하는 이 비범한 힘의 원천은, 그가 그 순수성과 힘을 완전히 간직한 채 자기 속에 유지하고 있었던 국민적 감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내부에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국민은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이 노인을, 실로 기묘한 방법으로 국민 전쟁의 대표자로 선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고의 인간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고, 그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는 총사령관으로서 자기의 온갖 힘을 인간을 죽이고 말살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 돌린 것이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위대한 이 인물은,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유럽적인 영웅이라는 허위의 형식에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 그 형식은 역사가 생각해낸 것이다.

종복에는 위대한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복은 종복에게 알맞는 위대함에 대한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482쪽)


 

흐느껴 우는 총사령관

 
“그런데 여러분 ⋯⋯.” 그는 주위의 소리가 가라앉자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얼굴과 표정이 변했다. 총사령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고, 무엇인가 가장 필요한 일을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대열 속에서 움직임이 생겼다. 지금부터 꾸뚜조프가 하는 말을 좀 더 분명히 알아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말이야, 여러분,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여러분은 고통스러울 거야.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참아 주시오. 앞은 멀지 않고, 손님이 나가주면 그때 쉬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노고는 폐하께서도 잊지 않으실 거요. 여러분은 괴롭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기 나라가 아니오. 그러나 저들을 좀 봐요, 어쩌면 저런 꼴이 되었을까.” 포로들을 가리키면서 그가 말했다.

“거지 중에서도 가장 심한 상거지 꼴이요. 그들이 강했을 때에는 우리도 동정하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동정해주어도 좋은 것이다. 그들도 역시 인간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어리둥절한 것처럼 공손하게 자기에게 집중되고 있는 눈길 속에서 자기 말에 대한 공감의 빛을 알아챘다. 그의 입술이나 눈가에는 여러 개의 별과 같은 주름이 되어 늙은이다운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고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말이오, 도대체 누가 놈들을 여기로 불렀단 말인가? 자업자득이지.” 그는 갑자기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리고 채찍을 한 차례 휘두르며 기쁜 듯이 크게 웃고, 우라 하고 외치고 있는, 열이 흩어진 병사들에게서 이탈하여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 번 빠르게 말을 달렸다.

꾸뚜조프가 한 말을 장병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장중하고, 마지막은 솔직한 노인다운 원수의 말의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가 깃든 그 말의 뜻은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노인다운 솔직한 말투로 표현된 기분, 적에 대한 동정, 자기의 정당함에 대한 의식과 결부된 장대한 승리감 - 바로 이 기분이야말로 병사 각자의 마음에 깃들어 있고 기쁨에 넘친,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는 외침이 되어 표현된 것이다. 그 후 장군 한 사람이 총사령관에게 포장마차를 보내라고 분부하시지 않았으냐고 물었을 때, 꾸뚜조프는 대답하면서 몹시 흥분한 상태로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1485쪽)


 

전쟁터에서도 빛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

"오! 하느님, 정말 굉장한 별이군! 추워지겠다." 그리고 사방은 조용해졌다.

별들은 마치 이제는 아무도 자기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검은 하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밝게 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떨기도 하면서 별들은 무엇인가 즐겁지만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서 바쁜 듯이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1495쪽)

 

 

 

자기의 사명이 다해졌다는 것

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궁정의 일에도 경험이 많은 노인, 같은 해 8월에는 황제의 뜻과는 달리 총사령관에 선정된 꾸뚜조프가, 황위 계승자인 대공을 군에서 멀어지게 한 사나이가, 황제의 의사에 거역하여 자신의 권력으로 모스크바 포기를 명령한 인물인 바로 그 꾸뚜조프가, 이번에는 자기의 때가 끝났다는 것, 자기 역할이 끝났다는 것, 저 가공의 권력이 이제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궁정의 여러 관계만으로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 즉 자기가 역할을 하고 있던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사명이 다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자기의 늙은 몸에 쌓인 육체적인 피로와 휴식의 필요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1497-1498쪽)



 

국민 전쟁의 대표자에게 남은 것


여러 국민의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운동이 있은 후, 이번에는 반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여러 국민의 운동이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전쟁을 위해서는 꾸뚜조프와는 다른 성질이나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의욕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꾸뚜조프가 러시아의 구제와 영광에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에서 서로의 여러 민족의 운동과 국경 복원에 새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꾸뚜조프는 유럽, 균형, 나폴레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격멸되고 러시아가 해방되어 영광의 정점에 선 후 러시아 국민의 대표자에게는, 러시아인으로서의 러시아인에게는, 이미 할 일이 없었다. 국민 전쟁의 대표자에게는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1502쪽)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한마디

그는 이제까지 그 어떤 것 속에서도 위대하고 심오하고 무한한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그것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그는 한계가 있는 사소한 일상적인 무의미한 것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는 지성의 망원경을 갖추고 먼 곳을ㅡ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 멀리 아지랑이 속에 숨어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대하고 무한하게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위대하게 여겨진 것은 유럽의 생활이고, 정치, 프리메이슨, 철학, 박애사업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약점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러한 상태일 때일지라도 그의 머리는 멀리 파고들어, 거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무의미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위대하고 무한한 것을 모든 것 안에서 보는 것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보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고 즐기기 위해, 이제까지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들여다 보았던 망원경을 버리고 자기 주위에서 항상 변화하고 항상 위대하고 심오한 무한한 인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더욱 마음은 가라앉고 행복을 느꼈다. 이제까지 그의 지적인 구축물을 모조리 파괴해 온 무서운 물음ㅡ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이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에 대해서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단순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한마디였다. 신의 의지 없이는 한 오라기의 털도 인간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는, 그 위대한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1504-1505쪽)

 

 

 

전에는 눈 속에 항상 감추어진 삶의 즐거움의 미소가 빛났던 그 얼굴에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엄격하고 야위고, 창백한 나이 든 얼굴이! 이것이 그녀일 수는 없다. 이것은 그 무렵의 추억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그때 마리야가 말했다. "나따샤예요." 그러자 그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힘들여 녹슨 문이 열리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부터 갑자기 훨씬 이전에 잊고 있었으며 지금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행복의 향기가 떠돌아 와서 삐에르의 모든 것을 감싸고 삼켜버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을 때 이미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것은 나따샤였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순간 삐에르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도 마리야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비밀을 알리고 말았다. 그는 기쁜 듯이, 또 괴롭고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자기의 동요를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뚜렷하게ㅡ의심할 여지가 없는 말 이상으로 분명히ㅡ그는 자신을 향하여, 또 그녀에게도, 마리야에게도,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이것은 단지 너무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삐에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끊어진 마리야와의 대화를 계속하려고 한 순간 그는 다시 나따샤를 보았다. 그러자 더욱 짙은 붉은 빛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더욱 격렬한 기쁨과 공포의 흥분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말이 막혀 이야기 도중에 말을 더듬다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삐에르가 나따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 얼굴을 보고도 알지 못한 것은, 그녀를 만나지 않게 된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위고 창백했다. 그러나 그녀를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바뀌지는 않았다. 삐에르가 들어온 처음 순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전에는 눈 속에 항상 감추어진 삶의 즐거움의 미소가 빛났던 그 얼굴에, 지금 그가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미소의 그림자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는 것은 다만 주의깊고 선량하고 슬프게 무엇인가를 묻는 듯한 눈뿐이었다.(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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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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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우스개 사이


'이건 위대하다!' 역사가는 말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위대한 것'과 '위대하지 않은 것'뿐이다. 위대는 좋고 위대하지 않은 것은 나쁘다. 위대한, 그들의 개념에 의하면 자기들이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어떤 특별한 동물들의 성질인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따뜻한 모피 코트를 입고, 파멸에 처한 동지는 물론 (그의 생각에 의하면) 자기가 그곳에 끌고 온 사람들을 버리고 그의 나라로 도망가면서, 이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느끼고 그 마음은 편안한 것이다.

"숭고에서 (그는 자기 내부에 무슨 숭고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온 세계가 50년에 걸쳐서 '숭고! 위대! 위대한 나폴레옹! 숭고와 우스개 사이는 단 한 발짝이다!'고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선악의 기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무가치와 한없이 비소(卑小)함을 인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은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선악의 척도가 있으므로 측정 못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소박, 선, 진실이 없는 곳에 위대함은 없는 것이다.(1460쪽)


 

경험 있는 소몰이

러시아군은 반이나 죽으면서 러시아 민족에게 어울리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므로 따뜻한 방에 앉아 있는 다른 러시아 사람들이 하기를 바랐던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은 러시아군의 책임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사실과 역사 서술 사이에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차질이 생기고 있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역사가들이 여러 장군들의 아름다운 감정이나 말의 역사를 쓰고 있을 뿐 사건의 역사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밀로라도비치의 말이나 어느 장군이 받은 포상이나 그들의 생각이 매우 흥미 있게 여겨지지만, 각처의 야전 병원과 무덤에 남겨진 5만 명의 문제는 그들의 연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흥미를 끌지도 못한다.

그런데 상신서나 종합 계획 등의 연구에 등을 돌리고, 사건에 직접 참가한 무수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내려가 보면, 이제까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또 매우 손쉽고 간단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해결된다.

나폴레옹을 군과 함께 분단하려는 목적은 열 명 정도의 머릿속 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없다.

국민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자기들의 영토에서 침략자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은 첫째, 프랑스군이 퇴각하고 있었으므로 저절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지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되었다. 둘째로, 이 목적은 프랑스군을 괴멸시키고 있던 국민 전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셋째로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에는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대군이 프랑스군의 뒤를 밟는 것으로 수행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달아나는 동물에 대한 채찍과 같은 작용을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경험 있는 소몰이는 동물을 위협하면서 채찍은 들어 올린 채, 뛰고 있는 동물의 머리는 때리지 않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1465쪽)

 

 

 

존재를 그만두는 것


사람은 죽어가는 동물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 자신, 자기의 본질이 눈앞에서 소멸해간다ㅡ존재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더욱이 사랑하는 또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삶의 소멸을 앞둔 공포 외에 단절감과 정신적인 아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상처는 육체적인 상처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죽음에 이르고 때로는 완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또 아픔을 북돋우는 외부로부터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안드레이 공작이 죽은 뒤 나따샤와 마리야는 똑같이 이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웅크리고 머리 위에 다가오는 무서운 죽음의 구름에 눈을 반쯤 감고, 삶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차 없이 아픔을 불러일으키는 접촉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벌어진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 거리를 재빨리 지나가는 마차, 식사를 재촉하는 목소리, 준비할 양복을 묻는 하녀의 물음, 더 나쁘게는 상처의 아픔을 쑤셔대는, 마음이 깃들지 않은 동정의 말 등, 모두가 모욕으로 느껴졌다. 또 그 모든 것들은 두 사람이 아직도 자기의 뇌리에서 울리고 있는 무섭고 엄숙한 합창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정적(靜寂)을 교란하고, 두 사람 앞에 순간적으로 나타난 불가사의하고 끝없이 먼 저편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1466쪽)



 

인생은 멈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순수하고 완전한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가 없다. 마리야는 자기 자신이 자기 운명에 대한 단 한 사람의 의지할 데가 없는 주인이며 조카의 후원자이자 양육자라고 하는 입장 때문에, 처음 2주일 동안 살아왔던 슬픔의 세계에서 나따샤보다 먼저 실생활로 돌아왔다. (⋯) 인생은 멈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야는 이제까지 자기가 살아온 혼자만의 명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또 나따샤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아무리 마음이 허전하고 마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심정이었다고 해도 생활의 여러 가지 까다로운 일들에 자기가 관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몰두하고 말았다. 그녀는 알빠뚜이치와 수지(收支)를 확인하고, 조카의 일에 대해 데사르와 상의하고, 모스크바로 옮기기 위한 지시나 준비를 하였다.(1467쪽)


 

 

뻬쨔의 전사


그녀가 홀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백작 부인의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의 얼굴은 주름투성인 데다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분명히 목구멍에 솟구치는 통곡을 실컷 소리 내어 터뜨리기 위해서 방에서 뛰어나온 것 같았다. 나따샤를 보자 아버지는 절망적으로 두 손을 흔들고 별안간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뻬 ⋯⋯ 뻬쨔가 ⋯⋯ 가봐라, 어머니가, 어머니가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면서 쇠약한 다리로 급히 의자 쪽으로 다가가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거의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갑자기 전류 같은 것이 나따샤의 온몸을 스쳐갔다. 무엇인가 무서운 힘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도록 내리쳤다. 그녀는 무서운 아픔을 느꼈고, 무엇인가가 그녀 안에서 찢겨나가 자기는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픔에 뒤이어 그녀는 그때까지 자기 위에 얹혀 있던 삶의 금제(禁制)에서 순식간에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를 보고 문 안쪽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무서우리만큼 거친 외침 소리를 듣자, 그녀는 순식간에 자기와 자기의 슬픔을 잊고 말았다. 그녀가 아버지 옆으로 뛰어갔지만 그는 힘없이 손을 흔들고 어머니가 있는 방의 문을 가리켰다. 마리야가 창백한 얼굴로 아래턱을 떨면서 문에서 나오자, 무슨 말을 하면서 나따샤의 손을 잡았다. 나따샤는 마리야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과 싸우는 듯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어머니 옆으로 달려갔다.

백작 부인은 기묘하고 보기 흉하게 몸을 뻗으면서 안락의자에 누워 머리를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쏘냐와 하녀들이 그녀의 손을 누르고 있었다.

“나따샤! 나따샤를! ⋯⋯” 백작 부인이 외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 나따샤를!”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밀어젖히면서 소리쳤다. “모두 저쪽으로 가줘요, 모두 거짓말이야! 전사! ⋯⋯ 핫, 핫, 핫! 거짓말이야!”(1471쪽)

 

 

 

마음의 상처


어머니의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뻬쨔의 죽음이 그녀의 생명의 절반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뻬쨔의 전사 소식을 받았을 때는 아직 발랄하고 씩씩한 쉰 살의 여자였던 그녀가 한 달 후에 방에서 나왔을 때에는 반은 죽은, 인생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한 노파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을 절반쯤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상처가, 그 새로운 상처가 나따샤를 삶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마음의 살이 찢어져서 생기는 상처는 육체의 상처와 마찬가지여서, 깊은 상처가 낫고 양끝이 붙은 후, 육체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에 의해서 비로소 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따샤의 상처도 나았다. 그녀는 자기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인생의 본질인 사랑이 아직 자기 내부에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랑이 눈을 떴다. 그리고 생명도 눈을 뜬 것이다.(1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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