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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꾸뚜조프에 대한 평가
자기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런 사람들은 더없이 슬픈 필연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자기네가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더없이 훌륭하고 격조가 높은 일이라고 망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꾸뚜조프를 비난하고, 전쟁 초기부터 그는 자기들이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일을 방해해 왔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뽈로뜨냐누이에 자보디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끄라스누이 부근에서 진군을 중지시켰던 것은 나폴레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폴레옹과 내통하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매수를 당하고 있었다는 등 여러 말들을 하고 있었다.
야욕에 정신이 없었던 같은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후세 사람과 역사가들도 나폴레옹을 위대하다고 인정하고, 꾸뚜조프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평가했다. 외국인들은 꾸뚜조프가 교활하고 음탕하고 연약한 조정 사람이라고 보고 있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그를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여, 러시아의 이름 외에는 쓸모가 없는 인형같은 취급밖에 받지 못했던 것이다.
1812, 13년에 꾸뚜조프는 그의 잘못을 노골적으로 비난받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최근 쓰인 역사에서도 꾸뚜조프는 교활한 궁정의 거짓말쟁이이며, 자신의 실패로 말미암아 끄라스누이와 베레지나 강 부근에서 러시아군에게 명예, 즉 프랑스군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잃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적인 이성이 인정하지 않는 위대한 인간, 그랑 톰(grand-homme)이 아닌 인간의 운명이다. 이것은 신의(神意)를 깨닫고 자신의 의지를 그것에 종속시켜, 항상 고독하고 드물게 보는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높은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에 속인들의 증오와 멸시라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은 그 행동이 이토록 일정불변하게 하나의 목적으로 향했던 역사상의 인물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또 그 이상으로 훌륭하고 그 이상으로 전 국민의 의지와 일치한 목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역사상의 인물이 자기에게 부과한 목적이, 1812년의 꾸뚜조프의 전체 활동의 도달 목표였던 목적처럼, 그토록 완전하게 달성된 실례를 역사에서 발견하기는 더욱 어렵다.(1479쪽)
국민적 감정
오늘날 이 사건의 의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10명 정도의 인간의 머리에 있던 무수한 목적을 사람들의 행위에 덧붙이지 않는 한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건 전체가 그 결과를 포함해서 우리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당시 이 노인 한 사람만이 여러 사람의 의견에 반대해서 이 사건의 국민적 의의를 꿰뚫어 볼 수 있었는가? 어째서 당시에 그 의의를 실로 올바르게 간파하고 활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한 번도 배반한 일이 없었던가?
발생하고 있는 현상의 뜻을 통찰하는 이 비범한 힘의 원천은, 그가 그 순수성과 힘을 완전히 간직한 채 자기 속에 유지하고 있었던 국민적 감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내부에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국민은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이 노인을, 실로 기묘한 방법으로 국민 전쟁의 대표자로 선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고의 인간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고, 그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는 총사령관으로서 자기의 온갖 힘을 인간을 죽이고 말살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 돌린 것이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위대한 이 인물은,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유럽적인 영웅이라는 허위의 형식에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 그 형식은 역사가 생각해낸 것이다.
종복에는 위대한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복은 종복에게 알맞는 위대함에 대한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482쪽)
흐느껴 우는 총사령관
“그런데 여러분 ⋯⋯.” 그는 주위의 소리가 가라앉자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얼굴과 표정이 변했다. 총사령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고, 무엇인가 가장 필요한 일을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대열 속에서 움직임이 생겼다. 지금부터 꾸뚜조프가 하는 말을 좀 더 분명히 알아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말이야, 여러분,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여러분은 고통스러울 거야.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참아 주시오. 앞은 멀지 않고, 손님이 나가주면 그때 쉬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노고는 폐하께서도 잊지 않으실 거요. 여러분은 괴롭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기 나라가 아니오. 그러나 저들을 좀 봐요, 어쩌면 저런 꼴이 되었을까.” 포로들을 가리키면서 그가 말했다.
“거지 중에서도 가장 심한 상거지 꼴이요. 그들이 강했을 때에는 우리도 동정하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동정해주어도 좋은 것이다. 그들도 역시 인간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어리둥절한 것처럼 공손하게 자기에게 집중되고 있는 눈길 속에서 자기 말에 대한 공감의 빛을 알아챘다. 그의 입술이나 눈가에는 여러 개의 별과 같은 주름이 되어 늙은이다운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고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말이오, 도대체 누가 놈들을 여기로 불렀단 말인가? 자업자득이지.” 그는 갑자기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리고 채찍을 한 차례 휘두르며 기쁜 듯이 크게 웃고, 우라 하고 외치고 있는, 열이 흩어진 병사들에게서 이탈하여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 번 빠르게 말을 달렸다.
꾸뚜조프가 한 말을 장병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장중하고, 마지막은 솔직한 노인다운 원수의 말의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가 깃든 그 말의 뜻은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노인다운 솔직한 말투로 표현된 기분, 적에 대한 동정, 자기의 정당함에 대한 의식과 결부된 장대한 승리감 - 바로 이 기분이야말로 병사 각자의 마음에 깃들어 있고 기쁨에 넘친,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는 외침이 되어 표현된 것이다. 그 후 장군 한 사람이 총사령관에게 포장마차를 보내라고 분부하시지 않았으냐고 물었을 때, 꾸뚜조프는 대답하면서 몹시 흥분한 상태로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1485쪽)
전쟁터에서도 빛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
"오! 하느님, 정말 굉장한 별이군! 추워지겠다." 그리고 사방은 조용해졌다.
별들은 마치 이제는 아무도 자기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검은 하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밝게 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떨기도 하면서 별들은 무엇인가 즐겁지만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서 바쁜 듯이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1495쪽)
자기의 사명이 다해졌다는 것
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궁정의 일에도 경험이 많은 노인, 같은 해 8월에는 황제의 뜻과는 달리 총사령관에 선정된 꾸뚜조프가, 황위 계승자인 대공을 군에서 멀어지게 한 사나이가, 황제의 의사에 거역하여 자신의 권력으로 모스크바 포기를 명령한 인물인 바로 그 꾸뚜조프가, 이번에는 자기의 때가 끝났다는 것, 자기 역할이 끝났다는 것, 저 가공의 권력이 이제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궁정의 여러 관계만으로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 즉 자기가 역할을 하고 있던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사명이 다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자기의 늙은 몸에 쌓인 육체적인 피로와 휴식의 필요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1497-1498쪽)
국민 전쟁의 대표자에게 남은 것
여러 국민의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운동이 있은 후, 이번에는 반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여러 국민의 운동이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전쟁을 위해서는 꾸뚜조프와는 다른 성질이나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의욕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꾸뚜조프가 러시아의 구제와 영광에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에서 서로의 여러 민족의 운동과 국경 복원에 새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꾸뚜조프는 유럽, 균형, 나폴레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격멸되고 러시아가 해방되어 영광의 정점에 선 후 러시아 국민의 대표자에게는, 러시아인으로서의 러시아인에게는, 이미 할 일이 없었다. 국민 전쟁의 대표자에게는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1502쪽)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한마디
그는 이제까지 그 어떤 것 속에서도 위대하고 심오하고 무한한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그것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그는 한계가 있는 사소한 일상적인 무의미한 것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는 지성의 망원경을 갖추고 먼 곳을ㅡ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 멀리 아지랑이 속에 숨어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대하고 무한하게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위대하게 여겨진 것은 유럽의 생활이고, 정치, 프리메이슨, 철학, 박애사업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약점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러한 상태일 때일지라도 그의 머리는 멀리 파고들어, 거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무의미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위대하고 무한한 것을 모든 것 안에서 보는 것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보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고 즐기기 위해, 이제까지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들여다 보았던 망원경을 버리고 자기 주위에서 항상 변화하고 항상 위대하고 심오한 무한한 인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더욱 마음은 가라앉고 행복을 느꼈다. 이제까지 그의 지적인 구축물을 모조리 파괴해 온 무서운 물음ㅡ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이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에 대해서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단순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한마디였다. 신의 의지 없이는 한 오라기의 털도 인간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는, 그 위대한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1504-1505쪽)
전에는 눈 속에 항상 감추어진 삶의 즐거움의 미소가 빛났던 그 얼굴에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엄격하고 야위고, 창백한 나이 든 얼굴이! 이것이 그녀일 수는 없다. 이것은 그 무렵의 추억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그때 마리야가 말했다. "나따샤예요." 그러자 그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힘들여 녹슨 문이 열리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부터 갑자기 훨씬 이전에 잊고 있었으며 지금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행복의 향기가 떠돌아 와서 삐에르의 모든 것을 감싸고 삼켜버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을 때 이미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것은 나따샤였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순간 삐에르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도 마리야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비밀을 알리고 말았다. 그는 기쁜 듯이, 또 괴롭고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자기의 동요를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뚜렷하게ㅡ의심할 여지가 없는 말 이상으로 분명히ㅡ그는 자신을 향하여, 또 그녀에게도, 마리야에게도,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이것은 단지 너무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삐에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끊어진 마리야와의 대화를 계속하려고 한 순간 그는 다시 나따샤를 보았다. 그러자 더욱 짙은 붉은 빛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더욱 격렬한 기쁨과 공포의 흥분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말이 막혀 이야기 도중에 말을 더듬다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삐에르가 나따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 얼굴을 보고도 알지 못한 것은, 그녀를 만나지 않게 된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위고 창백했다. 그러나 그녀를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바뀌지는 않았다. 삐에르가 들어온 처음 순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전에는 눈 속에 항상 감추어진 삶의 즐거움의 미소가 빛났던 그 얼굴에, 지금 그가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미소의 그림자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는 것은 다만 주의깊고 선량하고 슬프게 무엇인가를 묻는 듯한 눈뿐이었다.(15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