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만일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에머슨이 유독『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심취했던 게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을 만난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칼라일은『영웅숭배론』까지 쓴 인물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같은 텍스트도 금방 눈에 띄는 형편이니 둘 다 '영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분명하다. 작가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워낙 폭넓고도 내밀한 일이니 둘 사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이야기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에머슨이 특별히 '불타는 도서관'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꺼내고 싶다고 언급한 저 세 사람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읽기 쉬운 작품이 아마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아닐까 싶다. 무려 50명의 전기를 담고 있어서 그 양이 방대하긴 하지만, 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워낙 생생하고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때론 박진감마저 넘쳐서 어떨 땐 만화책을 보는 듯한 몰입감까지 느끼며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이 지니는 독특한 한계는 그리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닐 듯싶다.


가령, 셀 수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지명들과 인명들과 족속들과 국가들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고역이다. 게다가 고대의 여러 신화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얽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등등에 대해서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서술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를 꾹꾹 참고 견디는 일도 힘겹다.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에 쓰여진 몇몇 이름난 고전들이나 그 시대를 특별하게 다룬 후세의 여러 작품들까지도 더러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난관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까마득한 옛날 책들을 읽는 일에서 옛사람들보다 영영 불리한 점만 타고난 것은 아니다. 고대 고전 작품과 현대와의 거대한 간극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가교들이 적잖이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술작품들'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그런 예술작품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면서 자주 놀랐던 게 바로 그점이었다. 웅웅전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나 지명 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들을 검색하기만 하면 으레 예상치도 못한 '훌륭한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데 몹시도 유익했다.


어젯밤에 내가 검색한 인물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넘어와서야 가까스로 만난 '포키온'이었는데, 마침 그를 알맞게 묘사한 그림들은 '추운 날씨에'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쯤인데, 포키온이 아테나이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기엔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전세계를 호령할 때였다. 선왕인 필리포스가 죽고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나이를 넘볼 때 이야기부터 들여다보자.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사절단이 전달한 결의문을 읽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그들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키온이 직접 찾아가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늘 신하들로부터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 포키온을 칭찬하고 존중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포키온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만일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멈추어야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전쟁을 하되 헬라스가 아닌 야만족들과 하라며 충고했다. 이처럼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 성격과 야망에 맞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헬라스를 이끌어 갈 나라는 아테나이일 것이라며, 아테나이인들에게 정치를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포키온을 친구이자 귀한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했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헬라스에서 눈을 돌려 '동방 원정'에 나섰다. 그는 곧 아시아로 넘어가 다리우스 대왕을 패주시켜 '위대한 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자 그때부터 편지를 쓸 때면 그 누구에게도 첫머리에 인사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키온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에게 무척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알렉산드로스가 포키온에게 100탈란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포키온은 돈을 가져온 이들에게 아테나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 돈을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신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께서는 오로지 장군만이 명예롭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치고 이 돈을 도로 가져가시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아래의 그림이다. 포키온의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표정도 몹시 인상적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신들이 놀라는 표정도 무척이나 생생하다. 그런데, 포키온의 발 옆에 놓인 세숫대야엔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알렉산드로스의 선물을 거절한 포키온>, 지오아치노 아세레토(1600∼1649), 17세기경, 낭트 미술관



사신들은 포키온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가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에서는 부인이 직접 빵을 만들었고, 포키온은 제 손으로 우물을 길어 손님들이 발 씻을 물을 떠다주었다. 그러자 사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가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 돈을 꼭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노인이 지나갔다. 포키온은 그 노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저 노인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절단은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간청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저 노인은 나보다 더 가난하지만 그다지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고 있소. 내가 만일 이 돈을 쓰지 않으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리고 내가 이 돈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오."(1348∼13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렇게 해서 포키온은 끝내 그 돈을 돌려보냄으로써, 그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돈을 보낸 사람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을 헬라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의 이러한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의 자신의 친절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자 포키온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돈 대신에 감옥에 갇혀 있던 헬라스 사람들 몇몇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이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부하를 마케도니아로 보낼 때, 포키온을 만나면 아시아에 있는 네 도시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다면 정말로 화를 내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왕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포키온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녀를 그린 그림도 '명화'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포키온의 첫 번째 아내는 조각가 케피소도투스의 누이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두 번째 아내는 포키온의 가난한 생활을 잘 견뎌낸 훌륭한 인품으로 아테나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언젠가 아테나이 시민들이 새로운 연극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 역을 맡은 배우가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들을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배우는 무대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출을 맡은 멜란티우스가 여배우를 매우 꾸짖었다.


"저기에 포키온 부인이 앉아 계신 것도 보이지 않느냐? 저런 분도 시녀 하나만 데리고 다니신다. 너는 여성 관객들에게 허영심만 잔뜩 채워줄 작정이냐?"


연출자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극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말소리를 듣고 관객이 동의하는 듯 크게 소리내어 박수를 쳤다.


또 언젠가는 이오니아에서 온 여인이 포키온 부인을 찾아와 자신의 보석 목걸이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키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보석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아테나이의 장군으로 계신 포키온뿐입니다."(1349∼13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후 마케도니아가 점차 강성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이후 휘하 장군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화되는 와중에 아테나이도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테나이의 수비대장으로 파견된 마케도니아군의 사령관은 메닐루스였다.


마케도니아군 수배대장인 메닐루스가 포키온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포키온은 이 돈을 거절하면서 자신은 메닐루스가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지난날 알렉산드로스의 돈을 거절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메닐루스의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메닐루스는 그 돈을 포키온의 아들 포쿠스가 받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포키온이 말했다.


"포쿠스가 만일 나쁜 버릇을 고쳐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이 아비의 재산으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버릇을 못 고치고 계속 낭비만 일삼는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 거요."


한번은 안티파트로스가 포키온에게 어떤 그릇된 일을 시키려고 하자 포키온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건 정말 못하겠소. 나는 당신의 친구이면서 앞잡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안티파트로스는 늘 아테나이에 두 친구, 포키온과 데마데스가 있다고 말했다. 포키온은 어떤 방법을 써도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고, 데마데스는 뇌물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1358∼135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한편 마케도니아 왕의 섭정을 맡은 폴리스페르콘은 아테나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포키온을 무너뜨릴 궁리를 했는데, 그 방법은 지난날 아테나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해외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선동가들과 고발자들로 하여금 포키온을 공격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혼란한 틈을 다서 협잡꾼인 아그노니데스가 포키온과 그 일파를 반역죄로 고발했고, 포키온과 그의 지지자들은 폴리스페르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 포키온과 그 일행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레에 실려 곧장 아테나이 법정으로 끌려간 뒤 사형을 받게 되었다. 어리석은 아테나이 군중들이 협잡꾼에게 속은 탓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둘의 죽음은 모두 아테나이의 잘못으로 빚어진 비극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조금 더 소개하면 이렇다.


감옥에 도착한 토디푸스는, 자신은 포키온과 함께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한탄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물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죽는 게 그렇게도 못마땅하오?"


포키온의 친구 하나가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포키온은 이렇게 대답핬대.


"아테나이 시민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포키온과 가장 친했던 니코클레스가 자신이 먼저 독약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자, 포키온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괴로운 부탁이로군. 그러나 내가 평생 동안 자네 소원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들어주겠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독약을 모두 마시고 나자 포키온이 먹을 독약이 남지 않았다. 감옥을 지키는 관리들은 12드라크메를 내야 독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친구를 불러 옥리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탁하며, 아테나이에서는 죽는 데도 돈이 든다고 한탄했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포키온의 적들은 그를 죽인 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을 아테나이 땅에 묻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포키온을 화장시킬 장작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선포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을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골육상쟁 끝에 일대일 결투에서 서로 죽이고 죽자,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오이디푸스 왕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법령으로 포고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고 오라비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다가 잡혀 크레온 앞으로 끌려가고 사형을 선고받고 석굴에 갇힌다. 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와서 아버지를 말려보지만 크레온의 생각은 확고하고, 안티고네는 끝내 목을 매달아 죽는다.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아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 《안티고네》733∼739행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뇌물'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 작금의 현실이 이내 선명하게 겹쳐 떠오르는 걸 참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점에 대해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다시 포키온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어느새 장면은 뒤바뀌어 '포키온의 장례 모습'에 이르렀다.


결국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코노피온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메고 엘레우시스를 지나 이웃 나라인 메가라에 가서 화장을 해주었다. 시녀들을 데리고 메가라까지 따라갔던 포키온 부인은 그곳에 빈 무덤을 만들고, 유골을 품속에 몰래 숨긴 뒤 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포키온의 유골을 벽날로 옆에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벽난로야! 착하고 용감했던 분의 재를 너에게 맡기니 부디 잘 지켜다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때 조상들의 무덤으로 고이 옮겨갈 수 있게 해다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질고 위대한 보호자를 잃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늦게나마 포키온의 동상을 세우고 그 명예에 걸맞게 다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포키온을 고발했던 아그노니데스를 잡아들여 사형시켰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였던 푸생은 포키온에 대한 그림을 딱 두 점 남겼다고 하는데 그 그림들은 모두 포키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평생 동안 조국을 위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멸사봉공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저토록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치 물건을 내다버리듯이 조국으로부터 버려지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풍경들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하고 균형잡히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화가 푸생은 바로 상상 속의 풍경을 저렇게 이상화시켜서 죽은 영웅의 위대성을 고결함과 숙연함으로 형상화시켰다고 한다.



<포키온의 장례식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1594 ~ 1665), 영국 카디프 웨일스국립박물관


푸생이 그린 두 번째 그림은 제목 그대로 아테네를 벗어난 한적한 교외에서 '포키온의 유해를 모으고 있는 포키온의 미망인과 하녀'를 묘사하고 있다. 하녀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경계하지만 포키온의 아내는 몹시도 꿋꿋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수습하는데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녀의 머리와 팔과 손 위로 눈부신 빛이 비치고 있는 모습도 몹시 인상적이다.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니콜라 푸생(1594 ~ 1665), 1648년, 영국 리버풀 워커 미술관


<포키온 편>을 읽으며 내가 살펴본 그림들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포키온의 얘기가 앞에서 내가 밑자락을 깔았던 '추운 날씨'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금방 이해하리라 믿는다.


역사가 두리스의 말에 따르면, 포키온은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거리를 걸을 때는 아무리 추워도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쩌다가 포키온이 외투를 입으면, 병사들은 오늘 날씨가 엄청 춥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1336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정말 매섭고 차다. 그런데도 어젯밤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무려 십만 명 이상이나 '뇌물을 주고 받은 재벌 총수와 대톨령을 구속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였다고 한다. 정작 '뇌물 장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 추운 날씨와 국민들의 분노에도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지내며 도리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뻐기고 있는데 말이다.


이 사태가 불거진 초기에만 하더라도 매일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나라냐' 싶더니만, 이젠 그 정도를 훨씬 더 넘어서 어느새 '저 사람이 도대체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이었던 포키온은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만 유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포키온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다 보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추악한 뇌물 이야기' 때문에 온나라 백성들이 이 혹독한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화문에 모여든 모습과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 이야기를 길게 옮겨 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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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영어에서 'Lucullan'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군대 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러웠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


루쿨루스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헬라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일찍부터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그의 연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다른 웅변가들은 광장에서는 마치 '상처 입은 참다랑어가 바다에서 날뛰듯이' 열변을 토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지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는 말만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유창하고 경쾌하게 연설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언제 어디서나 듣는 사람을 크게 감동시켜 탄식하게 만들었다. (90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쯤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내 머리를 스치는 불쾌한 기억을 여기에 슬며시 꺼내 놓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만의 사익을 위해 온갖 부끄러운 비리를 숱하게 저지르고 나서도 물불을 가리지 앟고 그런 궁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상처 입은 다랑어처럼' 몸부림을 치는 어느 대통령의 언설과 몸짓이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다시 떠올라서 하는 얘기다. 노트북마저 지참하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억지로 끌려간 듯한 애꿎은 기자들 앞에서, 도무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인 '종을 잡을 수 없는' 말들만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이' 계속 내뱉기 일쑤인 그녀의 말을 우리 국민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더 분노하고 탄식하며 들어야 좋단 말인가.


잠시 기분이 잡쳤다. 얼른 다시 고대로 되돌아 가자. 어쨌든 루쿨루스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해 교양을 익히는 데 마음을 쏟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갖 전쟁터를 누비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뒤에도 마침내 늘그막에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안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장군으로서 쌓은 업적 때문에 획득한 부를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쾌락과 사치에 쏟아부은 건 분명 지나친 면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가 루쿨루스를 키몬과 비교하여 설명한 다음 대목은 루쿨루스에게는 분명 아픈 데를 적잖이 후벼파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둘은 모두 부자였지만, 그 부를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모두 야만인들로부터 빼앗은 재물로 부를 얻었는데, 키몬은 그 돈으로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 남쪽 성벽을 쌓았고, 루쿨루스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다.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키몬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베풀었던 일과, 루쿨루스가 몇몇 손님들을 위해 호화찬란한 식탁을 마련했던 일 또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돈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사치와 향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일 키몬이 전쟁을 하지 않고 본국에 돌아와 한가롭게 지냈다면, 그도 난잡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술과 친구를 가까이하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 많은 사람은 전쟁이나 정치에서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면 작은 쾌락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장군으로 있다가 그대로 싸움터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그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으리라.(95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어떤 여성 지도자가 21세기에 와서도 온 백성들의 눈과 귀를 교묘하게 가리면서까지 자신의 엄청난 권력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전방위로 힘을 쓴 얘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루쿨루스는 당대의 여러 탁월한 장군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루쿨루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에 호시탐탐 로마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파죽지세로 복속시켜 나가던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이래로 오랫동안 로마를 곤란하게 만든 몹시 야만스럽고도 완강한 적이었다. 로마는 그에 대항해서 무려 20여 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이른바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렀는데, 여러 차례 미트리다테스 왕에게 패해 수많은 로마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미트리다테스 6세(B.C. 135년∼63년)의 조상, 루브르 박물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8∼84) 중에는 로마에서 '내전'을 일으켰던 술라가 이 전쟁에 참가하여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써 간신히 적을 제압했다. 그 무렵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술라를 반역자로 내몰던 상태였다. 술라는 결국 수세에 내몰렸던 미트리다테스를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고 그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사정이 더 급한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주역으로 참가했던 술라(B.C. 138 ∼78)


그 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3∼82)을 치르고 난 뒤 한동안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소강 국면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75∼65)이 다시 재개되었다. B.C. 77년에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도 거기에 호응하여 아시아에서 다시 로마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때 로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내고 아시아 속주에 대해서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파견하였다.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루쿨루스가 보여준 교묘한 전략과 엄청난 용맹은 결국 연전연승으로 계속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의 설명만 들어봐도 그가 3차 전쟁 중에 얼마나 빛나는 승리를 거듭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전쟁 공적은 루쿨루스가 키몬보다 뛰어났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티헬라스 강을 건너, 티그라노케르타와 카베이라, 시노페, 니시비스 왕궁을 그 왕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는 북쪽으로는 파시스 강까지, 동쪽으로는 메디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왕국을 거쳐 홍해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또 여러 왕들 세력을 꺾어 쫓기는 짐승처럼 사막이나 밀림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루쿨루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적을 무찔렀는지는 다음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키몬이 죽은 뒤에 페르시아 군대는 언제 그에게 당했느냐는 듯이 무기를 쥐고 다시 나타나,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 대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왕은 루쿨루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꼼짝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몇 차례 패한 뒤에는 맥이 풀려서 폼페이우스와는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보수포루스로 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티그라네스는 망토도 걸치지 않은 채로 무기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앞에 엎드려 자기 왕관을 바쳤다. 하지만 그 왕관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루쿨루스 승리를 빛나게 할 개선식에 전리품이 되었다.(956∼95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렇듯 모든 전투에서 거듭 빛나는 명성을 쌓았던 루쿨루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부하들과의 친화력 부족'이었다.


루쿨루스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말재주가 있고, 광장에서나 전장에서나 똑같이 신중했다. 그런데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기록을 보면, 병사들은 전쟁 시작부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그의 병사들은 키지쿠스와 아미수스 전투 때에도 한겨울에 야영을 해야 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적의 영토에서 겨울을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평이 컸던 것이다. 그런 로마군에 협조하려는 도시들도 있엇지만, 루쿨루스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면서 굳이 병사들을 벌판에서 재웠다. 병사들 불만과 불평은 로마 민중 지도자들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루쿨루스를 시기하고 있던 그들은 루쿨루스가 오로지 권력과 재물 욕심 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쿨루스는 킬리키아 · 아시아 · 비티니아 · 파플라고니아 · 갈라티아 · 폰투스 · 아르메니아 · 파시스 강까지 차지하고, 또 얼마 전에는 티그라네스 성까지 빼았았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헐뜯었다.(94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끝내 병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고, 이 틈에 민중의 환심을 얻은 폼페이우스가 새로운 장군으로 아시아에 건너오면서 루쿨루스는 군대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고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쿨루스가 이렇게 된 것이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장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친화력이 부족했다. 만약 그가 지닌 많고 훌륭한 장점들인 용기와 행동력 그리고 판단력과 정의감에 병사들 마음을 살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로마의 경계는 에우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더 멀리 아시아 끝과 히르카니아 해에까지 이르렀으리라. 다른 나라들은 티그라네스에게 몇 차례나 정복당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고, 파르티아 세력 또한 크라수스 때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자기 손으로 로마에 세운 공보다는, 남의 손을 거쳐서 로마에 끼친 손해가 더 많았다. 파르티아 국경 근처 아르메니아와 티그라노케르타와 니시비스 등에 세운 전승 기념비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많은 보물과 개선식 때 전리품으로 나온 티그라네스 왕관등을 본 뒤로 크라수스가 아시아 정벌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그곳 야만인 왕국을 오로지 전리품으로만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곧 파르티아군 화살을 맛보았으며, 루쿨루스가 이루었던 승리는 적군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용기와 전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94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여러 성가신 일들로 큰 시련을 맞았으나 뒤늦게나마 간신히 개선식만은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개선식은 다른 장군들처럼 성대하지도 않았고, 행렬이 길거나 전리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만인 왕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과 전쟁기계들로 커다란 플라미니우스 원형극장을 꾸민 것은 사람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선식 행렬에 나온 것은 중무장한 몇몇 기병들, 큰 낫이 달린 대형 전차 10대, 루쿨루스의 보좌관과 장군들 60명, 구리로 뱃머리를 감싼 군함 110척, 높이가 6척인 미트리다테스 황금 동상, 보석들이 박힌 방패 하나, 은그룻을 담은 들것 20개, 금술잔과 갑옷, 화폐를 담은 들것 32개 등이었다. 이 밖에도 노새 8마리가 황금으로 만든 긴 의자를 끌었고, 56마리의 노새는 은괴를 끌었으며, 107마리의 노새는 270만 개의 은화를 지고 있었다. 또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쳐부술 때 제공해 준 군자금과 국고에 낸 금액, 그리고 병사들에게 950드라크메씩 나누어 줬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판도 따라 나왔다.(9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개선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 뒤 루쿨루스는 제멋대로이고 행실이 나쁜 클로디아와 이혼하고 카토의 누이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루쿨루스 집안에서 맞아들인 여자들은 하나같이 방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 세르빌리아도 모든 면에서 클로디아에게 뒤지지 않는 끔찍하고 막돼먹은 여자였던 것이다. 루쿨루스는 카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얼마 동안은 참고 지냈지만, 마침내는 그녀도 내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정치에서도 은퇴했다. 그가 정치에서 은퇴한 것이 귀족들이 부패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영예에 만족해 남은 삶을 평화롭게 보낼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루쿨루스의 이런 변화를 두고서, 그가 마리우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내린 올바른 결정이라며 칭찬했다. 얼마 전에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을 정복해 찬란한 공을 세운 뒤에도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공명심과 권세욕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과 섞여 정치를 했는데, 그로 인해 무서운 죄를 저질렀고,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키케로가 카틸리나 사건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애를 보냈더라면, 또 스키피오가 누만티아와 카르타고군을 정복한 뒤에 은퇴 생활을 했더라면 훨씬 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으리라. 정치도 다른 모든 일들처럼, 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들도 운동선수처럼, 체력과 젊음이 다하면 새로운 상대에게 꺾이고 마는 것이다.(948∼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마 공화정 말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도했던 키케로(B.C. 106∼43)


노욕에 찌들어 부질없는 권력만 탐하는 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도리어 망가뜨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쾌락과 사치에 젖어 있는 루쿨루스를 비웃었다. 그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정치를 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일 못지않게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 루쿨루스의 정원_상상도


루쿨루스 일생은 마치 옛 희극과도 같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정치와 전쟁에서 웅장하고 큰 활약들을 보여주고, 나중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열며 흥청거리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가장 뒤에 나오는 장면에는 호화로운 저택, 사치스러운 목욕탕, 그림이나 조각들이 나온다. 그는 싸움터에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재산을 저택에 꾸밀 골동품들을 사 모으는 데 써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루쿨루스 정원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마 황제의 정원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큰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산에 굴을 파서 마치 공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집 주위에는 바다에서 둥근 바위들을 가져다 놓았고, 연못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바다 위에도 집 여러 채를 지었다. 스토아 철학자 투베로는 이 집들을 구경하고 놀란 나머지, 루쿨루스는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말했다.


루쿨루스는 또 투스쿨룸 근처에도 별장 여러 채를 지녔는데, 이 집들은 모두 경치 좋은 전망대와 많은 사람이 잘 수 있는 시원하고 넓은 방, 그리고 아름다운 산책길을 갖추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 놀러왔다가 루쿨루스에게,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겨울에는 살기 힘들겠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니, 나를 황새나 학보다도 둔한 사람으로 여기시오? 철따라 옮겨 사는 법도 모르는 줄 아느냔 말이오?"

(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저토록 화려한 저택에 살았으니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 내는 '진수성찬'이 어땠을지는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에 딸린 일화를 조금 인용해 보자.


루쿨루스가 날마다 먹는 식사도 잔치에 못지않게 푸짐했다. 식사때면 언제나 염색된 천을 씌운 긴 의자와 보석이 박힌 술잔들, 그리고 합창과 연극이 따랐다. 음식들 또한 온갖 진기한 요리들과 향기로운 음료들을 모두 갖춘 산해진미였다. 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음식을 먹었다.


폼페이우스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가 그에게 지빠귀를 잡아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 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하인이 나서서, 루쿨루스 저택에서 그 새를 기르고 있으니 거기서 얻어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알아보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토록 사치스럽게 사는 루쿨루스 도움이 없으면, 이 폼페이우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9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동방에 사는 어느 여자 대톨령은 '혼밥'을 그토록 고집했다고 하나 루쿨루스의 '혼밥 이야기'도 제법 유명해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그런 생활을 즐겼는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는 언젠가 로마에 찾아온 몇몇 헬라스 사람들을 여러 날 동안 푸짐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은 헬라스 사람들답게 자기들 때문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해서 다음부터는 초대를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그들에게 웃으며 말헀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대접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날에는 그가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음식이 꼭 한 사람 먹을 양만 나왔다. 그러자 그는 요리하는 하인을 불러 몹시 화를 냈다. 하인은 손님이 없어서 큰 잔칫상을 차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루쿨루스가 말했다.


"아니, 너는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손님으로 초대한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이 말은 온 로마에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950∼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왕 '혼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얽힌 일화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이 일화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도 등장한다.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B.C. 106 ∼ 48)


어느 날 루쿨루스는 홀로 공회당을 걷다가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만났다. 키케로와는 본디 가까운 사이였고, 폼페이우스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지휘권 문제로 다투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루쿨루스에게 인사를 건넨 키케로가 자신들을 식사에 초대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쿨루스는 더없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키케로가 덧붙였다.


"우리는 오늘 당신과 식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먹는 그대로만 대접해 주시오."


루쿨루스는 거북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러면 하루만 미루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꼭 오늘이라야 하고, 하인에게 미리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그가 하인을 시켜, 그가 홀로 식사할 때와는 달리 푸짐한 음식을 준비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다만 루쿨루스의 요청에 못 이겨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 하인 하나를 불러서, 루쿨루스가 오늘은 아폴로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손님들은 루쿨루스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루쿨루스는 집에 있는 여러 방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곳을 사용할 떄의 음식 비용과 여흥 종류들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방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 곧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형식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정해졌던 것이다.


아폴로라는 방에서 식사할 때의 비용은 5만 드라크메였다. 때무네 그날도 그많나 돈을 들인 식사가 나왔다.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는 식사 규모의 엄청남에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루쿨루스가 돈을 포로나 야만인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해 함부로 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온갖 전쟁을 치른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고 해서 오로지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며 산해진미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몽테뉴와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가까이 했다. 그는 도서관을 짓고 시민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을 갖추어 놓은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그는 좋은 책들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이처럼 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그 책을 널리 이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의 도서관은 늘 열려 있었고, 도서관에 딸려 있는 산책길과 열람실은 로마 시민들뿐 아니라 모든 헬라스 사람들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마치 무사이 신전처럼 즐겁게 드나들며,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루쿨루스도 자주 이곳에 나와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치를 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그의 저택은 로마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집이었으며, 때로는 시민들의 공회당이 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도서관을 갖춘 것은 철학을 사랑하고 여러 학파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학설과 필론의 지도로 발달한 신 아카데미이아 학파가 아닌, 그 무렵 석학이며 웅변가였던 아스킬론의 안티오코스를 대표로 한 구아카데메이아 학파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코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키케로를 비롯한 필론파 철학자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951∼95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나도 한번 저렇게 살아봤으면...' 싶은 소망을 품게 만들 정도로 '부럽게' 살았던 루쿨루스였지만, 그런 삶이 도리어 '수많은 민초들의 온갖 희생' 위에 터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라도 그를 다시 불러내어 심판대에 올려보면 좋겠다' 싶어서 쓴 작품이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쓴 <루쿨루스 심문>이었고, 작곡가 데사우는 오페라 작품으로도 만들어 놓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70769&cid=51211&categoryId=51211


한편, 로마의 이름난 영웅들과 여러 차례 건곤일척을 다퉜던 미트리다테스 왕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마치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비록 자신의 '열전'을 따로 갖지 못했다.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쓴 '50인의 열전' 가운데 <카이우스 마리우스 편>, <술라 편>, <루쿨루스 편>, < 폼페이우스 편>, <세르토리우스 편> 등에서 거듭 등장할 정도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고대의 이야기'에 특별히 심취했던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은 이 인물에 매료되어 결국 희곡 『미트리다트』를 썼고, 그로부터 얼마 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오페라 <미트리다테>를 만들어 그를 부활시켰다.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10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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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 판본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추억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1-08 20:32 
    oren 님의 플루타코스 영웅전 얘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먼댓글로 연결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네요. 제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제외하고 거의 최초로 읽은 책이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거든요(돈키호테, 아라비안 나이트와 더불어). 그런데 그때 읽었던 판본 제목이 ‘플루타크 영웅전’이었는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너무 어릴 때라 내용도 거의 기억
 
 
qualia 2017-01-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 흥미로운 「루쿨루스와 미트리다테스에 얽힌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숨어 있던 인연이 드러나고, 그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위에 제가 남긴 먼댓글에 중에 “플루타코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오타인데, 제 블로그에선 올바로 수정했습니다(위 먼댓글 맛보기에 나타난 부분은 수정을 해도 반영이 안 되는군요. 처음 잘못 써올린 것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 번역판본들은 그리스어 현지 발음과 표기가 아닌 영어식 발음과 표기를 채택해서 “플루타크”나 “플루타르크”로 음역했더군요. 해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플루타르크 모두 맞는 표기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또 다른 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는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더군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oren 님 글 덕분에 저는 오늘 여러모로 얻은 게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oren 2017-01-09 00:22   좋아요 1 | URL
저 또한 적잖은(?) 나이에 뒤늦게 (어릴 때나 ‘아동용‘으로 접하게 되기 쉬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흠뻑 빠져 지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답니다. 이 책이 워낙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언감생심‘ 완독할 엄두를 내기는 좀처럼 어려웠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까마득한 옛날에(1980년 겨울에) 딱 한 번 읽었던 ‘몽테뉴 수상록‘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게 되면서, 몽테뉴가 평생 동안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금 이 책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고교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셨던 여러 고대의 인물들(가령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브루투스 등등)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끔씩 떠올라, 언젠가는 이 책을 꼭 한 번 완독해 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더군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러 차례 귓등으로만 스쳐 들었던 ‘미트리다테스‘라는 인물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쳤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그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이미 숱하게 다른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도 놀라운 예술적 자극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답니다.
 


매우 늦은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이제 잠자리에 들겠지만, 잠을 자지는 못할 겁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꿈을 꾸게 되겠지요.
 - 프란츠 카프카, 1913. 1. 22

 * * *

카프카에게 꿈은 '잠 없는 밤에 벌인 투쟁'이었다. 그에게 꿈은 종종 환상적 글쓰기를 위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무서운 공포에 시달리게끔 하는 효과'가 더욱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직 꿈을 꿀 뿐입니다. 잠 없는 꿈을."

어느덧 다 저물어 가는 올 한 해를 되돌아 보니 문득 카프카가 그토록 자주 꾸었다던 '악몽'을 꾼 느낌마저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거대한 카드섹션을 만들어 보이며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과거는 이미 온데 간데 없이 다 사라지고 진짜 악몽만 남은 기분이다. 저마다 붉은 티를 걸쳐 입고 시청앞 광장을 붉게 물들이며 '대한민국~'을 한 목소리로 그토록 우렁차게 외치던 그런 때가 과연 있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고 척박하게 변해 버린 듯힌 참담한 기분마저 든다.

이제와 문득 꿈에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악몽'이 아닌 진짜 현실이었다.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다'던 일들이 무수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우린 그런 현실이 그저 '악몽'일 뿐인지 진짜로 벌어진 '현실'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살아온 느낌이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뒤늦게나마 그런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우리 스스로 힘겹게 찾아내고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11월 5일부터 주말마다 광화문을 찾아 '촛불'을 들었던 게 결코 헛일은 아니었던 듯싶다. 탄핵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5주 연속으로 찾았던 '광화문 촛불 집회' 가운데 내게 가장 울컥했던 순간이 바로 전인권이 부른 이 노래를 들으며 함께 불렀던 순간이었다. 그날은 마침 운이 좋게도 주무대와 불과 3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찌감치 자리잡고 앉아 있었던 덕분에 모든 노래들이 다 생생하고 좋았지만, 그래도 이 노래를 듣고 부르던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듯하다.

참으로 힘겨웠던 올 한 해의 모든 기억들은 이제 다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또 흘려 보내고, 우리 다 함께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언젠가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도 좋을 때가 올 것이다. 비록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아직 몰라도 '악몽'에서 벗어날 때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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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1 0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31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6-12-3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꿈을 꾸는 새해 되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편안하기를 소망합니다.

oren 2016-12-31 18:55   좋아요 0 | URL
어느새 새해가 코앞에 바짝 다가왔네요.
2017년에는 정말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두루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빌어봅니다^^
 
카토의 경우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 * *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가『대비열전』에서 그의 짝으로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붙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와는 달리 뛰어난 웅변술뿐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우정에 대하여』와 『노년에 대하여』가 아닐까 싶다. 그 두 작품은 그다지 길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지대한 관심을 갖기 마련인 '우정'과 '노년'에 대하여 다룬 작품이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고전 작품이기도 하다.


그 두 작품은 키케로의 작품이기는 하나 '키케로의 순수한 창작품'으로 보기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두 편의 작품 모두 주된 화자(話者)가 키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노년에 대하여』부터 살펴보면, 그 작품의 시대 배경은 B.C.150년이고, 대화 장소는 84세가 되는 대(大) 카토의 저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장로이신 마르쿠스 카토의 입을 빌리기로 했소. 장소는 카토의 저택이오. 그가 노년을 그토록 편안하게 보내는 것을 보고,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가 감탄하자 카토가 그 두 사람에게 대답한다는 설정이라오.


『우정에 대하여』는 '설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때는 B.C. 129년, 소(小) 스키피오의 사후 얼마 뒤 라일리우스의 저택에서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이 화제에 이야기가 미치자, 스카이볼라는 라일리우스가 우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오. 아프리카누스가 죽은 지 며칠 뒤에 라일리우스가 스카이볼라와 또 한 사람의 사위, 마르쿠스의 아들 가이우스 판니우스에게 해준 얘기라오. 나는 그 논의의 요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 책에서 내 방식으로 그것을 되살린 것이오. 그들 자신을 화자로서 무대 위에 올린 것은, '나는 말했다'거나, '그는 얘기했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눈앞에서 직접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오.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작품의 초반부터 한꺼번에 여러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나 낯설지 않은 사람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적잖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또 의외로 간단하기도 하다. 등장인물들만 요약하자면, '노년'을 다룬 작품은 화자가 '대(大) 카토, 라일리우스, 소(小) 스키피오'라는 것이고, '우정'을 다룬 작품은 화자가 '라일리우스, 스카이볼라, 판니우스'라는 얘기다. 두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화자는 라일리우스가 유일하다. 그는 '노년에 대하여'에서는 자신의 절친인 소(小) 스키피오와 함께 30대의 나이로 등장하지만,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시점의 대화를 담은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그 자신만 홀로 살아 남아 있었고 대(大) 카토와 친구인 소(小) 스키피오는 어느새 고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정에 대하여'는 라일리우스가 고인이 된 자신의 절친인 소(小) 스키피오와의 우정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사위인 두 사람(스카이볼라와 판니우스)에게 '우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는 설정인 셈이다.


키케로가 쓴 『우정에 대하여』는 그리 긴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 번역본(동서문화사판)에는 주석이 무려 142개나 딸려 있다. 그만큼 숱한 인물들과 사연들이 그 작품 속에 담겨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면 과연 그 짧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등장하는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무엇보다도 갑자기 그게 궁금해서 일부러 좀 세어봤다. 꽤나 많았다. 키케로(42번째), 대(大) 카토(18번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14번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39번째), 가이우스 그라쿠스(40번째), 코리올라누스(12번째), 테미스토클레스(7번째), 피루스(21번째). 대충 세어봐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천하의 영웅호걸 50명' 가운데 무려 2할에 가까운 인물들이 『우정에 대하여』에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노년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열전'을 가진 인물은 몇이나 될까 살펴봤더니 이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이 작품의 원제가 『대(大) 카토』였던 만큼 우선 대(大) 카토(18번째)가 맨 먼저 등장한다. 이어서 테미스토클레스(7번째), 파비우스 막시무스(10번째), 피루스(21번째), 아리스티데스(17번째), 솔론(5번째), 리산드로스(23번째), 마르켈루스(16번째) 등이 화자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결국 키케로의 짧은 두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 가운데 플루타르코스의 『대비 열전』에 자신의 독립된 '전기'를 갖고 있는 인물들만 하더라도 단순 계산으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 전체 가운데 3할이 넘는다는 얘기다.(16/50=0.32)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미리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갖고 있거나 책에 딸린 주석을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좀처럼 '명쾌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인물들의 가계도'도 간혹 있기 마련이다. 그런 집안의 인물들 가운데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은 바로 대(大) 스키피오의 집안으로 입양된 소(小) 스키피오였다. 키케로의 책『노년에 대하여』에 등장했다가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어느새 고인(故人)이 된 바로 그 인물이다. 이 인물을 둘러싼 가계도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부러 그림을 그려봤지만 '큰 그림'은 좀처럼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책마다 '그들의 관계'를 헷갈리기 딱 좋도록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서도 그런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지경이다.


다음은 내가 이번에 작심하고 꽤나 고생해서 만들어 본 '소(小) 스키피오'를 둘러싼 가계도이다.




얼핏 보면 꽤나 복잡하게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사실 위의 그림도 실제로는 '과감하게 생략한 인물들'이 매우 많은 형편일 정도로 간략하게 그린 그림이다. 대(大) 스키피오만 하더라도 친부에서 조부로 거슬러 올라가면 금세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 나타나고, 친부의 형님인 백부로 건너가고 또 그 후손인 사촌으로, 또 그 아랫대로 계속 더 내려가면 그라쿠스 형제들과의 '악연'까지도 금방 이어질 정도인데, 그런 인물들은 위의 그림에서 과감히 생략했다는 얘기다.(이보다 더 자세한 가계도는 다음 주소에서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위의 그림을 일부러 따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 http://en.wikipedia.org/wiki/Scipio-Paullus-Gracchus_family_tree )


위의 그림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 보면 '소(小) 스키피오'가 어디쯤 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에서 대(大) 카토의 저택에서 '대(大) 카토의 이야기'를 듣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아쉽게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따로 '열전'을 독립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 플루타르코스가 일부러 그를 제외했을 리는 만무하다. 사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판본'만 하더라도 여럿이고, 판본마다 '영웅들의 구성'도 각양각색인 것도 사실이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판본에서도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와 '대(大) 스키피오'조차 빠져 있는 게 현실이니, 소(小) 스키피오가 자신의 열전이 없는 데 대해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영웅전』은 23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의 전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19쌍은 두 사람의 성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그 밖에 두 명의 로마 군인 황제 갈바(Galba)와 오토(Otho)의 전기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로마 황제전 중에서 남은 것이며, 아라토스(Aratos)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의 전기는 따로 씌어진 또 다른 제왕전 중에서 남은 것을 후세 학자들이 『영웅전』에 포함시킨 것이다.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레욱트라(Leuktra), 만티네이아(Mantineia)에서 스파르테군을 격파한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Epameinondas), 제2차 포이니 전쟁(bellum Punicum) 때 카르타고 근처의 자마(Zama)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가한 대(大)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Maior)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전기는 나중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수다에 관하여』<옮긴이 서문> 중에서

한편, 소(小) 스키피오가 『노년에 대하여』에서 대(大) 카토의 저택에 갔다고 했는데, 이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누나(아이밀리아)의 시아버지(대 카토) 댁에 갔던 셈이다. 그때는 하필 B.C. 150년이어서 누나의 남편이자 자신의 매형은 이미 죽고 없던 때였다.(대 카토의 아들은 B.C. 152년에 사망했고, 대 카토는 그보다 3년 후인 B.C. 149년에 죽었다. 먼 훗날 로마 공화정 말기에 카이사르의 정적으로 맹활약했던 소 카토는 대 카토의 고손자뻘 되는데, 대 카토가 80대에 뒤늦게 새장가를 들어서 낳은 아들의 증손자가 바로 소 카토였다. 대 카토가 늦장가를 든 일화 또한『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손에 꼽힐 정도로 흥미롭고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위의 그림만 봐서는 소(小) 스키피오를 둘러싼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다양하게 얽혀 있는지를 모두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금 소(小) 스키피오에 대해서 '그림을 다시 풀어서 말로 요약해 보면' 이렇다.

① 그 자신은 '카르타고의 최후의 정복자'이자, '누만티아의 파괴자'로 불릴 만큼 뛰어난 군인이었다.
② 친부(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라스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영원히 끝장낸 '피드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마케도니아의 정복자'였다.
③ 친조부(루키우스 파울루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장군에 패해 전사했다.
④ 양조부(大스키피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자마 전투' 승리의 주역이었다.
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나란히 등장하는 '그라쿠스 형제'는 자신의 아내(샘프로니아)의 남동생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로마군이 마침내 아프리카 본토로 진군해서 '자마 전투'를 통해 대승을 거두며 '카르타고의 항복'을 이끌어낸 대(大) 스키피오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① 그는 자신의 아버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큰아버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모두 B.C. 211년에 한니발의 군대와의 전쟁터에서 한꺼번에 잃었으며, 장차 자신의 장인이 될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파울루스까지도 B.C.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에 패해 전사당하는 아픔을 지녔다.
②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처남이었고, 호민관으로 유명했던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신의 사위였다. 소(小) 스키피오는 자신의 병약한 아들(장남)의 양자였다.

이쯤에서 내가 위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던『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의 문장을 잠깐 인용해 보겠다.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파울루스는 뛰어난 용기와 신중함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려는 동료들에게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전투에 참여한다. 그러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동료들이 자신을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고 달아나자 혼자서 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 그에게는 아이밀리아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스키피오 장군과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가 바로 이제 이야기하려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이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중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자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버지는 대(大) 스키피오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누나인 아이밀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되고 만다. 아무리 뛰어난 플루타르코스라고 하더라도 이건 뭔가 '설명'이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걸 누구나 '그림'을 통해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스키피오 장군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父子之間'이 되는 '이런 이상한 관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문장 때문에 나는 인터넷을 한참 뒤지다가 결국 저 그림을 직접 그리게 되었다. 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키케로가 쓴 『노년에 대하여』와 『우정에 대하여』를 다시 살펴봤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책의 뒤에 딸린 200쪽에 가까운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도 다시 한번 살펴봤는데, 거기서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대(大) 스키피오와의 관계'를 아주 헷갈리기 딱 좋도록 기술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누이를 통해 대 스키피오와 동서지간이 되었으나, 대 스키피오의 장남은 병약하여 공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인 파울루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사람과 양자 결연을 맺었다. 그가 아이밀리우스 가문에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스키피오 집안에 들어간 푸블리우스, 즉 소 스키피오이다. 소 스키피오는 B.C. 185년 무렵에 태어나 B.C. 168에 친아버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따라 그리스에서 싸우고, B.C. 151년에는 군단 부관으로서 스페인 원정에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젊은 무인으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있던 B.C. 150년에 그가 대 카토의 저택을 방문하여 '노년에 대하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책의 설정이다. 명예로운 공직의 사다리를 건너뛰어, 보통 43살로 되어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그 뒤인 B.C. 147년, 그리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지휘권을 얻어 대 카토의 예언대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것은 B.C. 146년이다.(485쪽)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스키피오 가문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 얽힌 복잡한 '집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더라도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꼭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왜 그토록 훌륭한 자식들을 낳아준 자신의 첫 번째 아내와 이혼했을까? 그에 얽힌 대목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아이밀리우스의 첫 번째 아내는 집정관을 지냈던 마소의 딸 파피리아였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꽤 오랫동안 살다가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밀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파울루스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내와 이혼한 다른 로마인들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로마인이 이혼한 사람에게 물었다.

"부인이 정숙하지 않아서요? 아름답지 않아서? 아니면 자식을 못 낳았소?"

그러자 이혼한 로마인은 자신의 신발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신발은 멋지지 않소? 새것 아니오? 그러나 이것이 내 발 어디를 아프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뚜렷한 허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남들은 알 수 없는 성격과 습관 차이가 쌓이고 쌓여 이혼하는 부부들도 있는 법이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이혼한 뒤 두 번째 아내를 맞았다. 그리고 전처가 낳은 두 아들은 로마에서 가장 귀하고 훌륭한 가문에 양자로 보냈다. 큰아들은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집안 양자가 되어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왕 앞의 페루세우스 왕>

1802년,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부다페스트 미술관



한편, 소(小) 스키피오의 친아버지였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의 정복자'로 가장 큰 전공을 세웠는데, 그가 피드나 전투에서 대결했던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 페루세우스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 얽힌 이야기도 몹시 흥미롭다. 페르세우스가 얼마나 자기 목숨을 구차하게 애걸복걸했으면 후세 사람들이 저런 그림을 그려 '교훈'을 삼았을까 싶다.(이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건 물론 국회의 '탄핵 심판'으로도 모자라 끝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까지 받겠다고 구차하게 끝끝내 버티는 박대통령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페르세우스는 아이밀리우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아이밀리우스는 큰 불행을 당한 왕의 슬픔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부하들과 함께 그를 맞았다. 페르세우스는 그를 보자 비굴하게 땅에 엎드리더니 그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 초라한 모습을 본 아이밀리우스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가엾은 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텐데 어찌 그 기회마저 저버리는 것이오? 이런 모습을 보면 당신의 불행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고, 지금 처지가 불행하다기보다 지난날 영광이 과분하다 여기게 될 것이오. 당신은 지금 로마의 적답게 행동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 나의 승리까지 가치 없게 만들고 있소. 어떤 괴로움에 처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는 법이오. 그러나 로마인은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비굴한 사람은 경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을 내밀어 페르세우스를 부축해 일으켜 투베로에게 인도했다. 그리고 가족과 젊은 장군들을 막사로 불렀다. 아이밀리우스는 운명과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이 행운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만만해하거나, 국가와 도시 또는 왕국을 정복했다고 우쭐대는 것이 과연 마땅한 행동일까? 예를 들어 행운이 주는 승리라는 것 또한 불확실한 인간의 일들 가운데 하나이며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운명의 뒤바뀜을 목격한 군인은 인간의 나역함을 깨닫고 그 무엇도 영원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자만할 수 있겠는가? 남을 정복하고 나면 운명이 매우 두려운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법이네. 만물이 얼마나 빨리 변하며 저마다 운명이 돌고 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가장 기쁜 순간에도 슬퍼지기 마련이네.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한 시간 만에 짓밟히는 것을 보았을 때, 또 한때 수천 수만 병사들 호위를 받던 왕이 어느새 적으로부터 양식을 받아먹는 처지가 된 것을 봤을 때 우리라고 해서 이 권력을 영원토록 누리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헛된 자만과 어리석은 자부심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미래를 대비하자. 신께서 우리의 행운에 반해 내리실지도 모르는 것에 늘 준비하도록 하자."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페르세우스 왕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다운 떳떳한 모습이라곤 도무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만치 비굴한 자세로 끝끝내 구차한 목숨을 계속 이어간 끝에 기어이 로마까지 끌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사흘에 걸쳐 이어진 개선식'에 자신까지 덧보태 장식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자신이 빼앗긴 엄청난 전리품과 나이어린 왕자 둘과 공주 하나와 함께. 다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페르세우스는 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밀리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제발 자신을 행렬에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페르세우스의 비겁한 태도와 목숨에 대한 애착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선택은 언제나 그의 손에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겁이 많은 페르세우스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비겁한 그는 마침내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이야기가 한참이나 길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두 번째 아내로부터 얻은 두 아들 이야기'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내가 그렸던 저 위의 그림에서도 빼놓지 않았다.

아이밀리우스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처음 아내에게서 얻은 두 아들은 저마다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두 아들은 아이밀리우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아이가 개선식을 올리기 닷새 전에 열네 살 나이로 죽었고, 열두 살인 작은아이도 개선식이 끝난 지 사흘 뒤에 죽었다. 로마 사람들은 가혹한 운명의 섭리에 몸서리를 치며 그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운명의 신은 기쁨에 넘친 이 집안에 뛰어들어, 승리와 개선의 노래 속에 눈물과 비애를 섞어놓았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용기란 마케도니아군을 쳐부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행을 견디는 데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불행보다는 행운을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 자기 개인 슬픔을 나라의 영광으로 감추려고 했다. 그는 큰아들 장례를 치른 뒤 곧 개선식을 거행했고, 개선식이 끝난 다음 또 작은아들이 죽자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그는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불행을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예전부터 인간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만은 언제나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이 부드러운 바람처럼 순조롭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보고, 곧 불운한 일이 닥치거나 처지가 뒤바뀔 것임을 미리 짐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브룬디시움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이오니아 해를 건너 코르키라에 도착했고, 닷새 만에 델포이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다시 닷새 만에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소. 그리고 제사를 지낸 다음 곧 전투를 시작해 겨우 보름 만에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소. 나는 이토록 큰 행운이 오래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모든 일이 내게만 유리하게 돌아가고 적의 위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오. 내 운명이 곧 뒤바뀌리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적의 대군을 무찌르고 전리품들과 함께 왕까지 포로로 잡아 배에 태웠을 때였소. 그런데 우리는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온 나라는 기쁨과 찬사로 가득했소. 그러나 운명의 신이 큰 은혜를 베푼 다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소. 그리고 기어이 내 집안에 이런 커다란 불행이 생기고 말았소. 개선식을 하는 동안 나는 두 아들을 잇따라 무덤으로 보낸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더 불행이 찾아올까봐 두려워하지 않소. 오히려 마음이 놓이오. 내 성공에 대한 값은 이제 충분히 치렀으니 말이오. 인간의 운명은 정복자도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여신은 보여주었소. 나에게 정복당한 페르세우스에게는 아직도 자식들이 남아 있지만, 나는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올 한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국가적 불행 또한 수백 년 뒤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길이 전해질 만큼 미증유의 대사건으로 역사의 기록에 남을 것임에 틀림없다. 부디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이 먼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더이상 뻔뻔스럽고도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말았으면 싶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의 '촛불의 위대한 승리'까지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 한 해 온 국민이 이만큼 큰 충격과 불행을 겪었으니만큼 이제 앞으로는 당분간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믿어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피눈물이 나도록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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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구두' 이야기는 『몽테뉴 수상록』에도 나온다. 몽테뉴가 가장 사랑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던 만큼 몽테뉴의 책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향을 받은 문장들을 마주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몽테뉴 수상록』은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을 모방해서 쓴 책이었다.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1050쪽)

⑵ 플루타르크의 이야기, 한 로마 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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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역사가 예언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만일 미래가 예언에 열려있지 않다면, 그것이 실현되어 과거가 된다 해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가 뒤돌아선 예언자라는 것은 모든 역사 철학을 요약해주는 관점이다. 역사가는 물론 미래의 일반적인 구조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구조 자체가 사실은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시대를 잘 보길 원한다면 멀리서 봐야 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적당할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면 족하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


 * * *


톨스토이는『전쟁과 평화』에서 '역사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에 대해 대답하는 귀머거리와 같다'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눈 앞의 현실'을 일찌감치 멀리서 내다보고 거기에 딱 들어맞을 듯한 '좋은 선례'를 미리 충분히 남겨놓은 듯한 착각이 들 때가 도대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고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도 대(代)를 이은 독재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디오니시우스 1세와 2세였다.

(시라쿠사는 '참주들의 목록'만 하더라도 스무 명에 가까울 정도로 '독재 정치'로 아주 유명한 국가였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동해변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였다. 도시는 기원전 734년 또는 733년 코린토스에서 온 정착자들에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로마 공화국에 기원전 212년 정복되었고 그 후 시칠리아의 로마 총독 관저 소재지가 되었다. 독립 도시로서의 시라쿠사이 역사의 대부분에서 그것은 참주들의 계승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민주정과 과두정 시기도 있었다.(출처 : 위키백과)


디오니시우스 2세가 두 차례의 전제정치를 끝으로 마침내 자리에서 쫒겨나 코린토스로 옮겨졌을 때의 이야기가 결코 머나먼 고대의 사건처럼 들리지 않아서 여기에 조금 옮겨보고 싶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디오게네스까지 등장하는 일화여서 더욱 흥미롭다.


이보다 더 신기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부하 몇 사람과 함께 보물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히케테스 눈을 피해 몰래 티몰레온 진영으로 들어왔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초라한 시민의 옷을 입고 티몰레온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뒤 배 한 척과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받아서 코린토스로 옮겨졌다. 그는 부강한 나라에서 태어나 신분에 걸맞은 최고급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부왕이 서거한 뒤, 지금까지 10년 동안 전례 없이 심한 전제군주국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디온의 원정 뒤 12년 동안 온갖 고생을 겪었고, 그 가운데서 여러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남들에게 입혔던 고통보다 더 큰 벌을 살아오면서 충분히 받았다. 앞날이 창창한 아들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꽃 같은 딸들을 납치당했으며, 누이와 아내가 눈앞에서 병졸들에게 능욕당한 뒤 살해되어 강물에 던져지는 것까지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디오니시우스가 코린토스에 닿자 모든 헬라스 사람은 이 유명한 폭군의 얼굴을 궁금해했다. 그 가운데는 그의 패망을 속 시원히 여기며 그에게 모욕을 퍼부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 대부분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가 겪은 비극들에 동정심을 조금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그 섭리로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려하고 찬란했던 왕이 오늘은 코린토스에서 생선 시장을 기웃거리고, 향수 가게 앞에 앉아서 쉬거나 싸구려 주점에서 물 탄 포도주를 마셨다. 거리 여자들과 하찮은 일로 다투기도 하고, 극단 여가수에게 노래를 가르치느라 음악의 운율과 화성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그 무렵 사람들에게는 세상 여러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신기한 구경거리는 없었다.(463∼46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티몰레온>



플라톤디오니시우스가 코린토스에 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곳에서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시노페 사람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디오니시우스를 만났을 때 이렇게 애매하게 인사했다.


"아니, 디오니시우스. 당신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시는군요."


이 말에 디오니시우스도 걸음을 멈추며 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제 처지를 동정해 주시는군요."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정색하며 차갑게 말했다.


"동정이라니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그대처럼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은 당신 아버지처럼 독재자의 궁전에서 쓸쓸히 늙어 죽어야 마땅한데, 우리와 함께 청빈한 생활을 즐기시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오."(4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티몰레온>


이 대목에 이르러 디오게네스가 받아친 저 훌륭한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버티면 버틸수록 국가와 국민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더욱더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조차 여태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는 '청빈한 생활을 즐기는 자유'조차도 영영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 *

디오니시우스 1세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참주(재위 BC 405~ BC 367). BC 405년 참주가 되어 군사적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시칠리아섬으로 카르타고 세력이 뻗쳐옴을 막으려고 3번에 걸쳐서 싸움을 벌였다. 대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반도로 세력을 뻗쳤으며, 아드리아 연안에도 식민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문예애호자로 자처하여 플라톤을 초대했고, 비극작품도 썼다.


디오니시우스 2세

디오니시오스 1세의 아들. 숙부인 디온은 그를 이상적인 군주로 만들고자 플라톤에게 교육을 받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에 의하여 추방당하였다(BC 366). 뒤에 디온은 귀국하여 그를 몰아냈다(BC 356). 디온이 죽은 뒤, 다시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전제()를 좋아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쫓겨나, 코린트로 도망가서(BC 344경) 가난하게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문학에 취미가 있어서, 시와 철학 논문을 쓰고, 플라톤 ·아이스키네스 ·아리스티포스 등의 철학자를 궁전으로 초대했었다.


디오게네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 생활을 실천하였다.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



더 더러운 장소를 찾지 못해서


또 어느 사람이 그를 호화로운 저택으로 안내하고 이곳에서는 침을 뱉지 말도록 주의하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내뱉고, 더 더러운 장소를 찾지 못해서, 라고 말한 것이다. 단, 이것은 아리스티포스가 행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느 때 그가 '어이, 인간들이여'라고 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부른 것은 인간이고 쓰레기 따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헤카톤이 <잠언집> 제1권 가운데서 말한 것이다.


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만일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이길 바랐을 텐데, 이렇게 말했다는 것도 전해지고 있다.(357쪽)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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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리석고 조리 없는 말을 한다면
    from Value Investing 2017-01-25 23:48 
    (밑줄긋기)정신적으로 초라하다는 증거앞에서도 말했듯이, 디온은 디오니시우스 2세가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알려진 플라톤을 시킬리아에 초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
  2.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
    from Value Investing 2017-07-08 15:32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