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자의 이름과 그 사람이 쓴 대표적인 작품의 이름, 이 두 가지만 딸랑 알고 있는 경우만 하더라도 도대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겐 마키아벨리와 그가 쓴『군주론』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가볍게(?) 뛰어넘어서, 그보다 훨씬 더 묵직한『로마사론』속으로 풍덩 몸을 담그고 보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피렌체 사람인 마키아벨리가 내게는 어느새 몹시도 매혹적인 인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앞으로 차차 밝히겠다.
그런데 나는 『군주론』과 『로마사론』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의 말미에 딸린 105쪽 분량의 <마키아벨리에 대하여>를 무려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읽는데 더 열을 올렸다. 내게는『군주론』보다 '군주론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에 항상 바싹 따라 붙게 마련인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은 '이름'만 간략하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찰 정도이다. 그들을 대충이라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특히 『국가』와 『고르기아스』),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 단테(『신곡』),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데카메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모나리자>), 미켈란젤로(<천지창조>),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봄>), 갈릴레이, 셰익스피어(<리처드 3세>). T.S.엘리엇, 볼테르, 루소, 헤겔, 야콥 부르크하르트(『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등
방금 언급한 인물과 작품들 가운데서도 앞서 이야기한 경우가 거듭 반복된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만 아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오래 전에 '피렌체'를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록 마키아벨리의 무덤까지는 찾아가지 못했지만 단테의 생가에는 들렀었다.(그런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결국 단테의『신곡』도 읽었다.) 그리고 피렌체 땅을 밟았을 때만 하더라도 '과학자'가 확고한 꿈이었던 아들(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을 위해 갈릴레이의 무덤까지 데리고 가기도 했었다. 또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도 봤고, (그보다 며칠 앞서) 로마에 들렀을 때에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도 직접 봤었다. 그러니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피렌체 사람'인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이탈리아 여행의 추억'까지 곁들여 떠올리게 하는 것이어서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군주론』을 읽으면서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이름'만 들어왔던 체사레 보르지아를 마키아벨리의 생생한 필치로 직접 만나는 것도 반가웠고, 메디치 가문의 여러 인물들을 둘러싸고 급변하는 복잡한 정치 환경을 헤아려 가면서,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혁신적인 정치 이론을 '현실에 접목하고자' 애쓰는 마키아벨리의 치밀한 연구를 살펴보는 일도 몹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군주론』은 단기간에 너무 바쁘게 쓴 작품인 탓인지 '치밀한 논리 구성'이 돋보이는 웅장한 작품은 아닌 듯해서 약간 아쉬웠다. 냉혹하리만치 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솔직한 표현들이 조금의 체면치레나 가식도 없이 그대로 서술된 문장들이 가득차 있어 놀라웠지만 단지 그 '규모'가 미흡하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로마사론』을 읽어 보니 과연 '섬광처럼 번뜩이는' 마키아벨리의 혜안이 곳곳에서 번뜩이는 모습과 함께 웅장한 대건축물을 바라보는 듯한 치밀한 구성에 금세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얼마나 깊이 읽었고, 그가 익힌 역사적 사례들을 '당대의 정치 현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시켜 관찰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그런 역사 연구를 통해 '동서고금을 통한 불변의 진리'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려고 엄청나고도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던 셈이고, 그런 통찰에 가장 도움을 준 인물이 바로 로마의 역사가였던 티투스 리비우스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키아벨리의 생애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또한 그가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만나는 장면이다.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의 일은 수백 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부친인 베르나르도의 《회상록》이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발견되면서 비로소 밝혀졌다고 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1486년, 마키아벨리가 17살 때, 이버지를 대신하여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제본을 제본소에서 받아온 대가로 포도주 3병과 식초 1병을 받았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훗날 가장 기댔던 인물이 리비우스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도 하나의 '운명'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실로 엄청난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리비우스의 『도시의 건설로부터』 (Ab Urbe Condita)는 총 142권으로 되어 있다. 아이네이아스가 로마를 건설한 기원전 753년부터,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 Germanicus) 장군이 죽은 기원전 9년까지, 총 745년의 역사를 기록한 참으로 방대한 역사서다. 불행하게도 35권만 현존하고,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시기적으로는 1권에서 10권까지 기술된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293년까지, 그리고 21권에서 45권까지 기술된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167년까지가 남겨졌다. 비록 그 내용은 4세기에 만들어진 ‘요약’(Periochae)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마저도 원래 책과 일치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소실된 부분이 있다. 현존하는 저술을 통해 로마 공화정의 시작과 절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리비우스 - 로마는 재건될 수 있을까? (정치철학 다시보기, 2016. 7. 15.)
마키아벨리가 쓴『로마사론』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총 142권 가운데 현존하는 35권, 그 가운데서도 '초편 10권'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미루어 짐작해 봐도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작품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거의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문장을 책 속에 쉴 새 없이 쏟아내고 분석한다. 그가 살던 시대의 혼란스러운 정치 환경 때문에라도 그는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군주론』에서도 거듭 주장했듯이, "군주는 역사서를 읽고, 그것을 통해 위인이 남긴 행동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티투스 리비우스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두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플루타르코스와 몽테뉴를 꼽고 싶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과 몽테뉴의 『수상록』도 내게는 '이름'만 알려진 작가로 머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몽테뉴'의 경우에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1980년 겨울에 만났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무려 '10대'였다!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이 여럿 있으니 말이다. 플루타르코스와 티투스 리비우스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인데, 몽테뉴는 그 두 사람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살짝 비켜가기는 하지만, 마침 마키아벨리의 『로마사』에도 '플루타르코스'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그 대목을 여기에 잠깐 인용해 보고 싶다. 마키아벨리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직접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로마 인민이 그 광대한 영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실력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는, 최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로서 플루타르코스는 다음의 내용을 들고 있다. 즉 '로마가 차지한 어느 승리를 보더라도 모두 행운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라고 로마 인민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와 같은 행운이 초래된 것도, 인민이 다른 신은 다 두고라도 첫째로 '운명의 여신'의 신전 건립에 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티투스 리비우스도 플루타르코스의 이런 생각에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사서에서 로마인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려 말했던 것을 검토해 볼 때, 로마가 가지고 있던 실력을 운이 좋다는 것과 결부시키지 않고 실력만을 운운하는 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이런 의견에 찬성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의견에 가담할 사람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로마 정도의 발전을 이룬 공화국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어떤 공화국이라도 로마와 같은 큰 목적을 향해 국가 체제를 정비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대제국을 지배하여 다스렸던 것도 그 군사력 때문이고, 또 일단 성립한 대제국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국가를 운영해 나간 그 솜씨와 로마의 기초를 쌓은 사람이 궁리해 낸 독특한 방법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충분히 지면을 할애할 작정이다.(312∼313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로마사론)』,
제2권 제1장 <로마인이 광대한 영역을 확보한 것은 실력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기 때문인가>
티투스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대해서 덧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일례로,『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명의 인물이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에 거의 다 등장할 정도인데, 그만큼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과도 밀접하다. 플루타르코스가 리비우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둘은 생몰연대도 매우 가깝다. 이 두 사람에게 매료되었던 마키아벨리와 몽테뉴도 생몰연대가 매우 가깝다.) 대략 이쯤에서 접어야 마땅하다 싶다. 왜냐하면 내게 이 글을 쓴 동기를 만들어 준 '글뭉치' 하나를 여기에 마저 꺼내 놓아야만 내가 이 글을 끝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여기서 자꾸만 더 옆길로 샌다면 이 글은 너무나 길어질 게 뻔하다.
내가 말하는 글뭉치는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에 담긴 '티투스 리비우스' 관련 기록이다. 물론 이 글뭉치는 내가 몇 년 전에 『몽테뉴 수상록』을 읽고 나서 후끈 마음이 달아 올라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필사해 둔 것이며,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새로 첨가한 대목은 전혀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아예 몽테뉴의 『수상록』은 꺼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 글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게 된 것도 다 '글뭉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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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수상록에 담긴 티투스 리비우스 관련글)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 144
너무 상냥하고 잘 살펴보는 예지는 고매한 사업에는 치명적인 적이다. 스키피오는 시팍스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군대를 남겨 두고, 새로 정복해서 치안이 아직 의심스런 스페인을 떠나서 아프리카 땅으로 건너가던 때에, 단지 배 두 척을 가지고 적의 땅이며 야만인 왕의 세력권이고 신의도 믿을 길 없는 곳에, 아무 보증도 없이 인질도 잡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위대한 용기와 자기 행운과 높은 희망이 약속하는 바를 믿고 뛰어들었다. "우리가 보여 주는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티투스 리비우스)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173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작품 속에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한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 속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고,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문법상의 공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우리들 천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이 침투되어 있는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합니다.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528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냉담하고 둔감한 취미를 갖는 것이 주는 편리함은 역시 그 결과로 해서 좋은 것과 유쾌한 것을 누리는 경우에도 예민하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이끌어 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참한 조건으로는 즐겨야 할 것보다도 피해야 할 일이 더 많고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고통보다도 쾌락의 감각이 적다." (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 688
한 아르팡의 토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 전체에서 사람 열두엇만 뽑아 내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경향과 행동의 판단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인데, 우리는 그것을 무지와 부정과 무절제의 원천인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에 맡긴다. 한 현자의 인생을 광인들의 판단에 매이게 하다니, 그것이 될 말인가?
"군중의 의지보다 더 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티투스 리비우스)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 870
나라가 동란에 빠지고 국민이 분열되어 있는 마당에 박쥐같이 휘뚝거리며 마음이 어느 편으로 움직이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훌륭하다거나 명예롭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중도를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길도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운의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이다."(티투스 리비우스)
위험을 면하려는 열망 997
이것은 날마다 경험하는 바이지만, 우리가 위험을 면하려는 열망보다 더 위험한 경지에 빠지게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 위대한 장수의 증언이다. "대개 공포심이 덜할수록 위험을 덜 당한다."(티투스 리비우스)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 1161
플라톤은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병폐를 고치려고 폭력으로 평화를 문란케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고, 국민을 살육하고 피를 흘려 가며 하는 개혁을 용인하지 않았다. ······ 나는 이 방면에는 플라톤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였다. ······
나는 이런 일에 참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이런 가장 못된 사태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택하며, 아주 확실하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가장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자기 영혼의 구제를 찾고,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정부와 관리와 법률을 둘러엎고, 어머니(조국)의 사지를 찢어서 옛날의 적에게 갉아먹게 던져 주고, 동포애를 골육상쟁의 증오심으로 채우고, 마귀와 광귀들을 원군으로 청하면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한 평화와 정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해력이 우둔한 수작을 본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주 의심을 품어 본다.
야심과 탐욕과 잔인성과 복수심은 그 자체로서 본연의 기세를 충분히 갖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정의와 신앙의 영광스런 자격으로 뜨겁게 해 주고 부채질해 주자.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신보다 더 심한 기만은 없다. 그것은 신들을 구실 삼아 범죄를 은폐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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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마무리하고 뒤늦게 '사진 촬영'을 위해 몽테뉴 수상록을 꺼냈다가 거기서 정말 뜻밖에도 '마키아벨리'를 만났다. 난 정말 몽테뉴(1533∼1592)의 책 속에 마키아벨리(1469∼1527)가 언급되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몽테뉴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내 머리 속에 '마키아벨리'는 그저 그림자 같은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마키아벨리 Machiavelli, Niccolo 1469∼1527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 역사가, 피렌체 출생. 인문주의 교육하에 그리스, 라틴 고전 작가를 섭렵함. 광범한 독서로 인간 심리를 깊이 규명, 현실과 시대 풍조를 명민(明敏)하게 관찰했다. 피렌체 공화 정부에 들어가 국가적 중대사가 일어날 때마다 외교 사절로서 절충 역할을 해냈음. 《군주론》을 제출하여 국가의 성격과 종류, 국가 권력의 획득 방법과 유지, 국가 상실의 이유 등을 전장(全章)에 걸쳐 논하고, 정치 활동의 법칙은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되어 순수한 정치적 행위와 그 경험에서 추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나 정치가에겐 목적 수행을 위해서라면 반도덕적 행위도 용납될 수 있다는 그의 사상에서 '마키아벨리즘'이란 어휘가 나왔다. 문학 분야에서는 여성을 조소하고 비난하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풍자한, 《군주론》을 이상화한 여러 저술이 있다. 특히 《피렌체사(史)》전8권은 과학적 근대 역사의 시초라 함.(1296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인명 찾아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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