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 어릿광대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단 말인가! ㅡ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 *


셰익스피어에 빠져 지낸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 흐른 듯하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동안에 다른 책들을 전혀 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흙 속으로 돌아간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머리 주위를 맴돌았을까를 떠올려 보면, 마침내 이토록 멀리 떨어진 나에게까지 찾아온 그토록 귀한 손님을 내가 먼저 함부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그를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천재인 그와 만날 기회가 반드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을 붙잡고 읽는 독자'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워낙 고명하고 저명한 분이어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분을 서로 다투듯이 열심히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세계 어디에선가는 틀림없이 '연극 무대'에 올려져 있을 것이다.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숱하게 재방영되고 있을 것이다. 숱한 그림으로 여러 화랑의 벽면을 장식한지도 이미 오래일 것이며,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전파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방금 전에도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바로 그 음악에 자극을 받아 기어이 셰익스피어와 음악을 연결짓는 이런 글쓰기에 이제 막 나선 참이다.


물론 내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세익스피어의 음악'은 절로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가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그 애틋한 주제가를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80년대 초반에 서울 시내 개봉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홀로' 몰래 '숨어서 보는 기분으로' 숨을 죽이며 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죽였던 숨이 다시금 멎는 듯한 순간들을 정말 여러 번 느꼈었다. 그토록 격한 감동을 안겨주는 러브스토리는 그 후로 영영 다시는 만나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 영화에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주제음악이 없었더라도 그 영화가 여전히 우리에게 그토록 매혹적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A time for us>가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치 <라라의 테마> 없는『닥터 지바고』를 떠올리는 것만큼 쉽게 상상하기도 어렵다.



A time for us Romeo and Juliet 1968


이쯤에서 한번쯤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을 들춰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열 손가락을 가지고도 몇 번씩이나 오므렸다 폈다를 거듭해야만 간신히 셀 수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드라마'로 본다면 과연 며칠이나 걸릴까. 이미 권위를 인정할 만한 곳에서 명백한 '견적서'를 내놓은 적이 있다. 자료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가 쓴 37편의 드라마는 러닝타임이 총 5947분(99.1시간)이다.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중지 버튼' 한 번도 누르지 않고 쉼없이 돌려도 꼬박 열흘은 지나야 끝을 볼 수 있는 셈이다.


01. Antony and Cleopatra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비극 170 분
02. Coriolanus (코리올라누스) - 비극 145 분
03.
Hamlet (햄릿) - 비극 212 분
04. 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저) - 비극 150 분
05. King Lear (리어왕) - 비극 183 분
06. Macbeth (맥베스) - 비극 146 분
07.
Othello (오셀로) - 비극 205 분
08. Romeo And Juliet ( 로미오와 줄리엣) - 비극 168 분
09. Timon of Athens (아테네의 타이먼) - 비극 128 분
10. Titus Andronicus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 비극 168 분

11. Henry IV, Part 1 (헨리 4세 - 1) - 시대극 148 분
12. Henry IV, Part 2 (헨리 4세 - 2) - 시대극 150 분
13. Henry V (헨리 5세 ) - 시대극 - 166 분
14. Henry VI, Part 1 (헨리 6세 - 1) - 시대극 188 분
15. Henry VI, Part 2 (헨리 6세 - 2) - 시대극 213 분
16. Henry VI, Part 3 (헨리 6세 - 3) - 시대극 210 분
17. Henry VIII (헨리 8세) - 시대극 165 분
18. Richard II (리차드 2세) - 시대극) 158 분
19.
Richard III(2DISC) (리차드 3세 (2 DISC)) - 시대극 230 분
20. Richard III

21. The Life and Death of King John (존 왕) - 시대극 155 분
22. A Midsummer Night's Dream (한여름밤의 꿈) - 희극 115 분
23.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아) - 희극 142 분
24. As You Like It (뜻대로 하세요) - 희극 150 분
25. Cymbeline (심벨린 ) - 희극 175 분
26. Love's Labour's Lost (사랑의 헛수고) - 희극 120 분
27. Measure for Measure (법에는 법으로) - 희극 145 분
28.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 - 희극 148 분
29. Pericles, Prince of Tyre (페리클레스) - 희극 178 분
30. The Comedy of Errors (코미디 오브 에러스) - 희극 108 분

31. The Merchant of Venice (베니스의 상인) - 희극 157 분
32. The Merry Wives of Windsor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 희극 170 분
33. The Taming of the Shrew (말괄량이 길들이기) - 희극 128 분
34. The Tempest (태풍) - 희극 125 분
35. The Two Gentlemen of Verona (베로나의 두 신사) - 희극 137 분
36. The Winter's Tale (겨울이야기) - 희극 173 분
37.
Troilus and Cressida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 희극 190 분
38. Twelfth Night (십이야) - 희극 128 분


이 많은 작품들을 오로지 '연극 대사'로만 이루어진 희극으로 읽을라치면 사정은 어떻게 달라질까. 대략 한 작품을 읽는 데 5시간씩만 잡더라도 총 185시간(37편×5시간)이 걸린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루에 다섯 시간을 꼬박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 쏟아붓는다면 그는 대략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는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전부 다 독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으랴마는.

책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다시 음악 얘기로 얼른 되돌아 오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음악가들을 일일이 다 헤아리는 건 물론 나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에도 얼마나 놀랍도록 광범위하게 스며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단순한 작업에만 주의를 기울일 작정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어떤 음악가에 의해 어떤 배경과 창작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그 음악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얼마나 훌륭하게 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겨를이 없다. 또한 그럴 능력이나 재주도 없다. 그런 주제는 내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난다. 나는 그저 내게 알맞는 정도로 이 둘을 '슬쩍 건드려 보는 데' 만족할 것이다.

이제 본론인 '셰익스피어 음악의 목록'을 잠시 나열해 보자. 거듭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가 아는 범위내일 뿐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베토벤

<템페스트>(원작 또한『템페스트』인데, 흔히『태풍』이나 『폭풍우』로도 번역된다. 작가 말년의 대표작이다.)
<코리올란 서곡>(원작은『코리올라누스』,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자신의 전기'를 가진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인데 셰익스피어가 '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 코리올라누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T.S.엘리엇의 『황무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여러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http://blog.aladin.co.kr/oren/9121191)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소개하는 마당에 셰익스피어의『템페스트』한 대목조차 인용하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렵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많은 작품에서 스스로 '음악'을 끌어들여 자신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장식한다.

     페르디난드
이 음악은 어디 있지? 공중에? 땅속에?
더 이상 안 들린다, 틀림없이 이 섬의
어떤 신을 시중든다. 해안에 앉아서
부왕의 파선을 울면서 다시 슬퍼했을 때
이 음악이 파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격랑과 내 격통을 아름다운 곡조로
가라앉혀 주었다. 그걸 따라 왔는데
(오히려 나를 끌고 왔겠지.) 사라졌다.
아냐, 또 시작한다.

『태풍』, <1막 2장>


Ludwig van Beethoven "Tempest" Piano Sonata No. 17. / Daniel Barenboim



Beethoven - Coriolan Overture, Op 62 - Muti

(지휘자인 무티의 모습이 2년 전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내한했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서 깜짝 놀랐다. 한참이나 어린 그의 모습을 보니 마치 '무티의 아들' 같은 느낌도 든다. 베토벤이 살았던 빈의 '황금홀' 연주라 더욱 반갑다.)



차이코프스키

환상 서곡 <햄릿>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템페스트>

Tchaikovsky Hamlet Overture, London Symphony Orchestra, Valery Gergiev Proms 2007

(베르디조차『햄릿』을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끝내 작곡을 포기했다는데, '셰익스피어 마니아'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정말 멋지게 성공했다. 나는 이 음악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당에서 만난 게르기에프는 두 번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 들려줬는데 이렇게 우연히 <햄릿>으로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갑다.)



Tchaikovsky: Romeo & Juliet / Gergiev · London Symphony Orchestra · BBC Proms 2007



Tchaikovsky: The Tempest / Abbado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오페라 <오텔로>
오페라 <팔스타프>(『헨리 4세』과『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 등장하는 희극적 인물 '팔스타프'를 그린 작품)

Thomas Hampson - Perfidi!... Pietà, rispetto, amore (Verdi: Macbeth)



Verdi: Falstaff - Final Opera - Metropolitan . James Levine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그 가운데 특히 <꿈 속에 살고 싶어라>

Anna Netrebko "Je veux vivre" in Romeo and Juliet by Gounod (HD Paris 2007)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그 가운데 특히 <결혼 행진곡>

'한여름 밤의 꿈'중 '결혼행진곡' 변주곡_호로비츠_손열음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Overture Op.21 by Masur, LGO (1997)



리스트

교향시 <햄릿>

Liszt - Symphonic Poem 'Hamlet'



드보르작

서곡 <오셀로>

Daniel Harding dirigerar Dvorak: Othello, ouverture



드뷔시

모음곡 <리어왕>


프로코피에프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Prokofiev Romeo & Juliet Suite



베를리오즈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극적 서곡 <리어 왕>

Berlioz: Roméo et Juliette - Radio Filharmonisch Orkest - Full concert in HD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맥베스>

Richard Strauss - Macbeth, Op. 23



쇼스타코비치


극 부수음악 <햄릿>


Shostakovich 'Hamlet' Film Music - Bernard Herrmann conducts



니콜라이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Otto Nicolai, The Merry Wives of Windsor, Overture - Gilberto Serembe, conductor

(오토 니콜라이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자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흔히 셰익스피어를 '뮤즈를 울린 극작가'로 표현한다. 뮤즈는 여신들이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조차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라는 말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그저 여신들로부터 '시적 영감'을 빌려올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신들이 무려 아홉이었다. 이 숫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근거는 호메로스가 제공했다.『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장례식 풍경' 속에 여신들이 딱 그만큼 등장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oren/7137045)

…… 그리고 모두 아홉 명의
무사 여신들이 서로 화답하며 고운 목소리로 만가를 부르기 시작했소.
그곳에서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르고스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오. 낭랑한 무사 여신의 노랫소리가 그만큼
힘차게 일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열흘하고도 이레 동안 밤낮으로
불사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이 그대를 위해 울었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

접힌 부분 펼치기 ▼

 

초기에 뮤즈 여신들은 세 명의 자매로 서로 속성이 유사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각각의 특성들이 나눠지고 구체화되어 갔으며 그 수도 아홉 명으로 늘었다. …… 뮤즈 여신들의 우두머리이자 ‘서사시’를 담당한 칼리오페(Calliope)는 서판과 펜을 든 모습으로 주로 그려졌다. ‘희극’의 여신 탈레이아(Thaleia)는 익살스러운 가면을 쓴 반면,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Melpomene)는 슬픈 표정의 가면을 쓰고 그리스 비극배우들이 신는 반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장엄한 종교 찬가’를 담당한 폴리힘니아(Polyhymnia)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베일을 썼다. ‘에로틱한 시’의 여신 에라토(Erato)‘서정시’의 여신 에우테르페(Euterpe)는 각기 리라(lyre, 고대 발현악기)와 플루트를 상징으로 가졌다. 합창과 춤의 여신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는 손에 리라와 작은 채를 들고 춤을 추는 자태로 그려졌다. ‘역사’를 관장한 클레이오(Cleio)는 앉거나 기대서 긴 두루말이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았으며, ‘천문학’을 관장한 우라니아(Urania)는 주로 막대기로 천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 출처 : 두산백과

펼친 부분 접기 ▲


셰익스피어가 뮤즈를 울렸다면 그는 필시 음악도 울린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을 의미하는 ‘뮤직(music)’도 결국 뮤즈 여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작가가 "음악을 잘 들어봐"라고 '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음악으로도'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셰익스피어와 음악은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로렌초

그리고 악사들을 밖으로 데려오게.

언덕 위에 잠자는 달빛은 참 아름답구나!

우린 여기 앉아서 귓전으로 스며드는

음악 소리 들어 보자. 고요한 밤에는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게 제격이야.

앉아, 제시카. 저것 봐, 저 하늘 마루에

황금빛 접시들이 얼마나 촘촘히 박혔는지.

보이는 천체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도

운행할 땐 어린 눈의 케루빔들에게

언제나 합창하며 천사처럼 노래해.

불멸의 영혼에도 그런 화음 있다지만

부패하는 이 진흙 의복이 그것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한 우린 듣지 못하지.


 악사들 등장.


이리 오게, 찬가로 디아나를 깨워 보게,

최고 고운 가락에 마님 귀가 열리고

음악에 이끌려 집으로 오시도록.   (악사들이 연주한다.)



         제시카

고운 음악 들을 때면 난 절대 흥이 안 나.



         로렌초

네 정신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야.

야생에서 뛰노는 짐승 떼를 보거나

여리고 길 안 든 수말의 무리를 지켜보면

그들은 몸속에서 피가 끓기 때문에

미친 듯 날뛰면서 힝힝 킹킹 울어 대지.

하지만 혹시라도 나팔 소릴 듣거나

그 어떤 곡조라도 귀에 와 닿게 되면

사나운 시선이 감미로운 음악의 힘으로

얌전한 응시로 바뀌면서 다 함께

멈춰 서는 모습을 볼 거야. 그래서 시인은

오르페우스가 나무, 돌, 강물을 움직였다 꾸몄어.

음악이 잠시 그 본성을 못 바꿔 놓을 만큼

무감각하거나 광란에 찬 것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음악이 없거나

아름다운 화음에 무감동한 사람은

역모와 계략과 약탈에나 어울려.

그자의 정신은 밤처럼 둔하게 움직이고

그자의 감정은 명부처럼 시커멓지.

못 믿을 건 그런 자야. 음악을 잘 들어 봐.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중에서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6-02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제로 한 모든 곡이 앨범으로 발매된다면, 앨범 CD 하나로도 부족하겠어요.

oren 2017-06-02 18:49   좋아요 0 | URL
설사 하나의 앨범 CD에 담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막상 ‘한정된 수요‘를 생각하면 발매하기 어렵겠지요.
그나저나 <셰익스피어와 음악>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혹시나 없나 살펴보니 역시 없네요.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라는 제목의 책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랜드슬램 2017-06-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세한 설명과 자료,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세익스피어 작품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니고 즐겨야 할 산이군요^^

oren 2017-06-04 13:16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도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즐기지 않으면‘ 그저 갈 길이 멀고 힘들고 따분하고 지치기 쉬운 산일 뿐이겠죠? 그런 면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의 표현만큼 셰익스피어를 적확하게 묘사한 인물도 드물다 싶습니다.

* * *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

셰익스피어도, 호메로스도, 단테도, 초서도, 눈에 보이는 세계 깊숙이 아득한 천상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수목조차도 단순히 사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상의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고, 곡물도 단순한 식료 이상의 것이 되고, 이 지구라는 천구도 아득히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상의 온갖 것은 말하자면 더욱 섬세하고 묘한 ‘수확‘을 우리 혼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깃드는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천지자연의 다양한 영위는 모두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는 ‘말없는 비밀문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대자연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자신의 회화를 채색하기 위한 그림물감으로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만 그는 그와 같은 현실세계의 현란한 고급의 두루마리에 넋을 잃은 나머지 그만한 대천재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결국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상징으로서 자연미 속에 잠재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덕 그 자체의 의의를 그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자연계가 말하는 실제의 이야기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 조셉 캠벨, 『신화의 힘』중에서


 *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따라가자면 그 곁가지가 너무나 많아 매번 곤욕을 치른다. 하르퓌아이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면 제법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을 두루 거쳐야만 '이야기의 얼개'가 완성된다. 나는 꽤 오래 전에 이 마녀새에 얽힌 신화를 몇몇 책을 통해서 읽고 나서 그 강렬한 인상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문득 니체의 작품 『선악의 저편』에서 정말 뜬금없이 이 마녀새를 다시 만났다.(http://blog.aladin.co.kr/oren/8597307) 그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이 마녀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찾아 읽었고, 글을 하나 지어볼 요량으로 신나게 자판을 두드려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고작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이렇게나 '수많은 곁가지 이야기'를 다 펼쳐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자꾸만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마녀새' 이야기를 최근에 '기가 막힌 장소'에서 다시 발견했다. 무대는 이탈리아 나폴리 앞바다의 어느 '무인도'였다. 좀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그 마녀새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태풍』속에서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엔 그 마녀새를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냈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다 만 '하르퓌아이' 이야기를 마저 쓸 힘을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반쯤은 '과거에 써 놓았던' 글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이번에 '다시금 이어 쓴' 글이다. '신화'는 몇 년 사이에 쉽게 바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쓴 글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쓰여졌다고 '변질'이나 '변색'을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다. 다소 먼 여정이지만, 어쨌든 이제 다시 떠나 보자.


이 마녀새를 다루기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장소는 '파가사이 항'이다. 파가사이는 텟살리아 지방의 해안도시다. 거기엔 고대의 수많은 영웅들이 '황금 양모피'를 찾기 위해 '지상 최대의 모험'을 떠날 채비를 갖춘지 오래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인물들만 하더라도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다.

 

원정대장은 이아손이 맡았다. '원정대원'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있었다. 고대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되어 '쌍둥이자리'에 오른 카스토르폴뤼데우케스도 동참했다. 이 두 쌍둥이는 제우스가 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와 사랑을 나눈 후 낳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온 인물들이다. 하나의 알에서는 카스토르와 헬레네 남매가 나왔는데, 이 헬레네는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헬레네다. 다른 알에서는 폴뤼데우케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 남매가 태어났는데,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물론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을 떠맡았던 아가멤논의 아내이자, 자신의 정부(情夫)와 짜고 귀환하는 승전사령관이자 남편인 아가멤논을 독살한 바로 그 여자다.

 

이들 쌍둥이 장수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헬레네 납치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을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크레테 섬'을 한 번 다녀와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섬에 갇혀 지내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나라의 왕비 파시파에가 황소에 반해 '교접'을 하고 얻은 괴물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였고, 그녀가 암소로 분장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당대 최고의 장인(匠人)이었던 다이달로스가 기가 막힌 솜씨로 빚은 '나무 암소' 덕분이었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필요가 있을 때 왕비는 다시 한번 다이달로스를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지어달라고 말이다. 그 미궁에서 첫 번째로 빠져나온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고, 그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홀딱 반한 '아리아드네 공주'가 '실'로 그를 묶어 준 덕분이었다.

 

어쨌든 해마다 아테나이의 젊은 처녀와 총각들을 공물로 바치게 해서 꿀떡꿀떡 삼켜 넘기던 공포의 괴물이 미노타우로스였고, 그 괴몰을 처치하기 위해 자진해서 미궁 속으로 뛰어들어갔던 인물이 테세우스였으니, 그가 임무를 마치고 아테나이로 무사히 귀환했을 때 받았을 환영행사가 얼마나 거창했을 것인지는 달리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자가 젊어서 한 때 자신의 친구와 공모하여 '카스토르와 폴뤼네이케스 형제'의 누이인 헬레네를 납치한 적이 있었다. 쌍둥이 장수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진 자신들의 누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고 다닐 무렵 그녀의 행방에 관해 '결정적인 제보'를 해 준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아카데모스였다. 누이를 찾은 쌍둥이 형제는 제보자의 공을 기려 그의 고향을 '아카데메이아'라고 부르게 했고, 아테나이 근교에 있는 그 마을은 훗날 플라톤이 철학을 가르키는 '학문의 전당'을 세움으로써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학원 이름이 바로 '아카데메이아'였다. 그 이름은 오늘날 숱한 학원과 학교뿐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에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상에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이야기가 순식간에 너무 곁가지로 흘렀다. 다시 고대의 항구로 되돌아 와서 그 배에 탄 영웅들을 다시금 살펴보자.

 

아르고스는, 원정대가 50명으로 짜일 것이나 그 대원 하나하나가 일당 백의 범 같은 장수들이어서 그 크기와 무게 또한 엄장할 것인즉 유념하고 배를 지으라는 이아손의 말에 따라 배를 지어놓고도, 모여든 장수들의 면면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50명의 원정대는 하나의 '미크로코스모스(소우주)'를 상기시킨다. 아이손이 이 미크로코스모스를 짜고, 배 지을 뜻을 세운 선견자(先見者)라면, 이르고스는 그 뜻에 따라 미크로코스모스가 깃들 그릇을 마련한, 천궁으로 말하면 헤파이스토스에 견줄 수 있는 섭리의 집행자다. 날개가 달려 있어서 하루에 천 리를 날 수 있고 하루에 500리를 걸을 수 있는 저 보레아스(북풍)의 두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는 이 선견자가 보고 집행자가 빚은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다리이고, 아틀라스를 대신해서 하늘 축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와, 말을 타고 걷는 것보다 둘러메고 걷는 쪽이 편하다는 스파르타의 역사(力士) 폴뤼데우케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팔이며, 새 우는 소리에서 모이라이(운명)의 발소리를 듣는 예언자 몹소스와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로 뱃길을 짐작하는 암피아라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귀고, 90리 밖에 있는 작대기가 참나무 작대기인지 소나무 작대기인지 알아보는 천리안(千里眼)의 망꾼 륀케우스와 밤에 보아둔 별자리로 낮의 뱃길을 짐작하는 천부적인 뱃사람 나우폴리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노래와 수금 가락으로 저승 왕 하데스를 울리고, 영원히 도는 익시온의 불바퀴를 멈추게 했던 트라키아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있고, 배를 몰고 산모룽이을 돌아가되 노수(櫓手)로 하여금 노 끝으로 산자락 꽃을 어루만지게 할 수 있는 보이오티아 최고의 키잡이 티퓌스도 있으며,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둔갑의 도사인 페리클뤼메노스도 있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헤엄친다는 수영의 명수 에우페모스도 있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인이나 영웅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신들에게 비는 인간을 썩어가는 인간이라고 믿는 참람한 인간 이다스도 있었고,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여걸 아탈란타도 있었으며, 신들에게 빌지 않는 인간을 오만한 짐승이라고 믿는 이피토스도 있었고, 동성인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알고 떠받드는 나약한 미소년 휠라스도 있었다.

 

더 있었다. 칼뤼돈의 멧돼지를 잡은 호걸 멜레아그로스도 있었고, 후일 트로이아 전쟁의 명장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되는 펠레우스도 있었고, 헤라클레스 덕분에 죽은 아내를 되살리는 아드메토스도 있었고, 테세우스와 함께 명계로 내려가 저승 왕에게 아내를 내어놓으라고 했던 페이리토스도 있었다.127∼12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고대세계의 가장 유명한 모험은 이렇듯 숱한 영웅들을 태우고 항구를 떠나면서 돛을 가득 부풀렸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었지만, 흑해 연안 콜키스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양모피'를 구하기 위한 '굳은 결심'만은 단단했다.


항해가 시작된 이후에 그들이 겪은 '온갖 우여곡절들'을 여기서 모두 얘기할 수는 없다. 원정대가 맨 처음으로 도착한 렘노스에서 '냄새 나는 여자들'을 마침내 해방시켜 준 몽환적인 이야기, 사모트라케를 지나고 헬레스폰토스를 지나 퀴지코스라는 나라에 들렀을 때의 불행한 이야기, 헤라클레스가 아끼던 휠라스를 샘의 요정에게 빼앗기고 중도하차하게 되는 애석한 이야기 등은 아쉽지만 모두 생략해야 옳다. 우리가 기어이 만나 보고 싶은 그 '하르퓌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라면 우린 재빨리 목적지로 '날아가듯' 달려야 하니까.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아르고 원정대가 마침내 닿은 곳은 흑해 초입에 있는 트라키아의 어느 해안이었다. 그들이 그 땅에 상륙해서 맨처음 찾은 곳은 언덕 위에 보이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하도 늙고 하도 마르고 하도 그을려, 발밑에 엇비슷하게 누운 그림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말은 이랬다.


"왔구나, 왔구나. 아르고나우타이가 이제야 왔구나. 왔구나, 왔구나, 보레아스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왔구나."


그 노인은 장님이었다.


"먹을 것을 좀 주어.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 모두 맛본 지 오래……. 하지만 지금 줄 것은 없어. 지금 주어도 나는 못 먹어. 아직은 먹을 때가 되지 않았어."


그 노인은 이내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나는 아게노르의 아들 피네우스야. 내 이름, 귀에 설지 않지? 나는 세상이 접시같이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세상이 휘페르보레이아(極北)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나는 헬리오스(태양)가 검은 너울을 쓰는 까닭도 알고, 셀레네(달)가 뜨고 지는 이치도 알아. 어떻게 아느냐고? 아폴론께서 가르쳐주셨지. 그런데 나는 포이보스 아폴론(빛나는 아폴론)이 모르는 것도 알아. 내 잘못인가? 나는 이걸 사람들에게 가르쳤어. 그랬더니 제우스 대신이 어째서 천기를 누설하느냐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벼략을, 조그만 것으로 하나 던지시더라고. 그게 무슨 벼락이었는지, 한 대 맞았더니 살갗이 떡갈나무 껍질같이 늙고 눈이 보이지 않아. 내 눈에는 자네들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알아. 자네는 젊은 대장 이아손이고, 자네는 트라키아의 풍각쟁이 오르페우스, 자네는 개똥 점쟁이 몹소스, 자네는 술장수 팔레로스…… 주신(酒神)의 사생아지? 그리고 저기 주먹 쥐고 서 있는 것은 쇠주먹 폴뤼데우케스…… 주먹에 피가 묻었구나. 뱃길이 남았는데 해신(海神)의 아들을 죽여? 그리고 자네는 달거리(月經)하는 무사로구나. 그 옆에 있는 것은 눈 밝은 륀케우스…… 눈구녕만 밝으면 무얼해? 심안(心眼)이 있어야지. 나 장님이라도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아. 제우스 대신은,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는 장님이 또 보기 싫으셨던 게야. 그래서 하르퓌아이를 보내어 나를 괴롭히는데…… 하르퓌아이 알아? 새야 새. 크키가 독수리만 해. 새는 새인데 대가리는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 사람이야. 물론 계집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이게 하르퓌아이야. 너희들도 곧 이 '제우스의 사냥개들'을 보게 돼. 이것들, 꼭 세 마리씩 짝을 짓고 다니는데, 끼니 때마나 나타나 내 먹을 걸 대신 먹고는 접시에다 똥을 싸 갈기고 날아가 ……. 물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보리죽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실과를 하나 먹으려 해도 날아와. 저승에서 탄탈로스가 물을 마시려고 하면 멀쩡하게 있던 물이 달아나버린다더니 나는 살아서 이 꼴을 당하고 있어. 아,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맛본 지 오래야."


이아손이 곧 아르고선에서 술과 고기를 내려오게 한 뒤에 음식을 한상 잘 차려 대접했지만 피네우스는 먹지 못했다. '하르퓌아이'라고 하는 요괴가 어느새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쏜살같이 내려와 덮쳤기 때문이다. 얼굴은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인데 나머지는 영락없이 새인, 참으로 요상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모습보다 더 요상한 것은 그 버르장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였다. 피네우스 노인과 아르고호 원정대원들이 코를 싸고 있는 동안 요괴들이 음식을 말끔히 핥아 먹고 접시에는 똥을 싸 갈겨놓고 하늘로 날아올라갔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풍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잽싸게 그들을 뒤쫓았다. 그들이 세 마리 하르퓌아이를 따라잡은 흑해에 떠 있는 조그만 섬 상공에서였다.


하르퓌아이는 섬을 돌다가 방향을 바꾸어 아마존의 나라가 있는 텔모돈 강 하구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집이 유난히 커 보이는 하르퓌아이 하나는 여전히 뒤처지고 있었다.

칼라이스는 이 뒤처진 것을 노리고 꼬리 쪽을 겨누어 칼을 둘러메는 순간 뒤따라오던 제토스가 소리쳤다.

"보아요, 무지개가 아니오!"

언제 섰는지 무지개가 하나 텔모돈 강과 구름 사이에 걸려 있었다.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여신 이리스와 자매 간이라는 말 들어보았소?"

제토스의 말에 칼라이스가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사이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보레아스의 아들들아, 너희들이 나를 아느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숨자 헤라 여신의 사자(使者)인 이리스 여신이 쌍둥이 형제를 불러 세웠다. 형제의 눈에는 무지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스 여신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칼라이스가 물었다.

"너희들 눈앞에 있다. 이제 제우스 대신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하르퓌아이를 더 쫓지 마라. 칼질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하르퓌아이는 대신께서 길들이신 대신의 사자들인즉 너희들은 칼을 거두고 돌아가거라."

"여신께서 하르퓌아이의 자매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돌아가야 합니까?"

"피네우스에게 내려졌던 제우스 대신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말이다. 내가 이리스 여신이라는 것을 믿느냐?"

"무지개 안에 계시니 이리스(무지개) 여신이겠지요."

"그러면 내가 제우스 대신의 몸을 받아 스튁스 강에다 맹세를 친다. 금후로는 하르퓌아이가 피네우스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피네우스는 너희 은혜를 입었다."

"저희들이 무엇으로 징표를 삼으리까?"

"피네우스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니 징표가 필요하지 않다. 칼라이스여, 네가 칼로 내려치려던 게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 '포다르게(빠른 자)'다. 포다르게가 왜 뒤처졌는지 알기나 하느냐? 자식을 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자식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 아비 보레아스(북풍)의 자식이다. 내가 칼질을 멈추게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포다르게의 복중에 든 형제를 죽였을 것이다. 쫓는 너희가 짐승이면 모르되, 인간이거든 뒤로 처진 것에다 칼질을 삼가라. 어린것, 늙은것, 아니면 새끼를 밴 것일 테니 ……."

쌍둥이 형제는 이리스 여신의 말을 믿고 피네우스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뒷 이야기지만, 하르퓌아이의 하나인 포다르게가 낳은 북풍의 자식은 두 마리의 말이었다. 트로이아 전쟁 때 명장 아킬레우스가 타던 두 마리의 말 '크산토스(밤색 털)'와 '발리오스(얼룩무늬)'가 바로 이 빠르기로 소문난 북풍과 포다르게의 자식들이다. 뛰는 것 중에 아킬레우스가 따라잡지 못할 것은 이 두 마리의 명마뿐이었다.(172∼174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쌍둥이 형제가 돌아왔을 때 피네우스의 오두막 앞마당에는 마침 푸짐한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고, 피네우스는 먹은 위에 또 먹고, 마신 위에 또 마셨다. 그리곤 아르고호 원정대 팀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이아손 대장이, '먹을 것을 누가 마련해주느냐'고 물었을 때 '희망이 마련해준다'고 한 내 말은 허사가 아니오. 에르피스(희망)가 내 옆에 없었더라면 나는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데스에 가 있었을 것이오. 나는 오래전에 그대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나는 그대들을 만나고, 이렇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술과 고기는 '희망'보다 내 '예지'보다 맛이 있구료. 제우스 대신께서는 그대들 만나는 자리를 꾸미려고 나를 연단(練鍛)하신 것이 아니라 참 술맛, 참 고기맛을 알게 하시려고 나를 굶긴 것만 같아요. 나는 이렇게 먹고 마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에욱세이노스, 저 적대하는 바다를 열 아르고나우타이여,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여기에서 뱃길로 이틀 거리 되는 곳에는 이 적대하는 바다의 문이 있어요. 그대들이 열어야 하는 이 문을 뱃사람들은 '쉼플레가데스'라고 부른답니다. '충돌하는 바위섬'인 것이지요. '에욱세이노스'라고 하는 저 검은 바다(흑해) 초입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섬이 바로 '쉼플레가데스'인데, 지금까지 이 두 섬 사이를 지나간 배는 한 척도 없어요. 왜냐, 이 두 바위섬은 뿌리를 땅에다 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델로스(떠 있는 섬)'처럼 물 위에 가만히 떠 있다가 그 사이로 뭐가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피네우스는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탁 맞부딪치면서 말을 이었다.


"…… 꽝 부딪친답니다. 이러니 배가 지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중략) 알겠소? 내 말을 명심하지 않으면 에욱세이노스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데스의 땅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것이니 그리 아세요. 그대들이 내 말대로 해서 이 섬 사이를 뚫어내면 쉼플레가데스가 다시는 맞부딪치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대체 무슨 말씀이시지요?"


점쟁이 몹소스가 물었다. 피네우스가 같은 예언자이자 점쟁이인 몹소스한테는 여전히 예를 갖추지 않고 꾸짖었다.


"너 같은 것은 천상 새점이나 칠 팔자구나. 세이레네스(사이렌 무리)가, 저희들 노래에 홀리지 않는 뱃사람을 만나면 자결하고 만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스핑크스가 제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오이디푸스 앞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그러니까 쉼플레가데스도 세이레네스나 스핑크스같이 ……."


"너 같은 것을 데리고 천기를 누설하라는 말이냐? 그것은 그렇고…… 이아손 대장은 귀담아 들으세요. 적대하는 바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라도,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뻐하느라고 마음 빗장까지 열었다가 슬픈 일 당하고, 슬퍼하느라고 삼가다가 기쁜 일을 만나는 수가 있는 법이오.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 그대들이 겪을 앞날도 이와 같을 것이오. …… 하면, 지나는 뱃사람에게 콜키스 땅이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며, 콜키스 땅에 이르면 그대가 근심해야 할 일은 콜키스 땅이 마련하고 있을 것이오."(176∼17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이렇게 해서 아르고 원정대가 '쉼플레가데스'를 무사히 통과하고 마침내 콜키스 땅에 이르러 황금양모피까지 얻게 된다. 무서운 용이 지키는 진귀한 보물인 '황금양모피'를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처녀가 바로 메데아 공주였다. 오비디우스는 콜키스의 공주가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게 된 사연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아손과 메데아 

 

그녀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이성으로는 자신의 광기를 이길 수 없자

"메데아야, 싸워봤자 소용없어!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신이 너를

방해하고 있어." 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런 것이거나 아니면 이와 비슷한 것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아버지의 명령이 너무 가혹해 보이는 거지?

그 명령은 사실 너무 끔찍해. 왜 나는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가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이 뭐지? 불행한 소녀여, 타오르는 불길을

네 소녀의 가슴에서 떨쳐버리도록 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어. 하나 어떤 이상한 힘이

싫다는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욕망은 이래라 하고, 이성은 저래라

하는구나. 더 나은 것을 보고 그렇다고 시인하면서도

나는 더 못한 것을 따르고 있어. 이 공주님아, 왜 너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며, 왜 낯선 세상과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거지?

이 나라도 네가 사랑할 만한 것을 줄 수 있어. 그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신들에게 달려 있어. 그래도 그가 살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기원할 수 있는 거라고.

사실 이아손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지?

비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아손의 청춘과 가문과

용기에 반하지 않을 수 있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준수한 그 용모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7권 10∼28


[이아손과 메데이아], 귀스타브 모로, 1865년, 오르세 미술관


 

숱한 인물들이 얽혀 있는 신화 속에서 어쩌면 '하르퓌아이'는 단순한 괴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르퓌아이'는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다가 기어이 신의 노여움을 얻게 된 인물이 겪는 '먹지도 못하는 불행'만 들려주는 단순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배고픔과 배부름의 엄청난 차이뿐 아니라 오랜 간난신고와 기다림의 고통, 그 끝에 찾아오는 만족과 보람, 분노와 증오, 관용과 화해 등등의 요소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연관을 맺고 있어서 여느 '마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들려주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이 '마녀새'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수 없이 이토록 '길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쓰다 만 글을 이렇게 다시 꺼내어 이어서 쓰고 나니 셰익스피어의 『태풍』이라는 작품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하르퓌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이미 충분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주요 등장 인물들이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마주한 장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절묘하게 등장시킨 하르퓌아이는 순식간에 나를 또다시 '새로운 경이로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미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이런 놀라운 이야기에 또다시 그토록 새롭게 더욱 놀라도록 '하르퓌아이'까지 등장시키다니. 그것도 어쩌면 그토록 알맞은 상황에 그토록 어울리는 마녀새를 그처럼 알맞은 때에 등장시킬 수 있단 말인가.


『태풍』은 셰익스피어가 만년에 쓴 최후의 낭만희극이지만,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만 놀라운 게 아니다. 등장인물들과 대사들이 두루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은 "신의 심판의 우의극(寓意劇)"으로 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뒤늦게 다시 생각해 보니, 동생의 쿠데타로 하루 아침에 밀라노의 군주에서 쫒겨나 무인도로 휩쓸려간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하르퓌아이'에게 시달린 피네우스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피네우스 또한 왕년에 트라키아에서 임금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프로스페로 역시 피네우스처럼 '세상의 비밀'을 알기 위해 '통치'는 내팽개치고 '책'만 들여다봤던 인물이다. 프로스페로가 척박한 무인도에서 고난을 겪는 모습도 황량한 언덕 위 찌그러진 오두막에서 홀로 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 그리고 프로스페로가 '12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복수할 기회'를 잡게 되는 모습도 '기다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철천지 원수들이 태풍에 휩쓸린 끝에 무인도로 떠밀려 온다.). 프로스페로가 결국 그들을 '포용'하고 '증오' 대신 '관용'을 베풀어 '화해'를 이루는 모습조차 '하르퓌아이 이야기'와 닮았다. 심지어 세익스피어는 『태풍』에서 '하르퓌아이와 자매지간인' 이리스 여신까지 등장시켜 멋진 시를 읊조리게 만든다. 그러니 내가 '하르퓌아이'를 이럴 때조차 못본 체 외면하고 지나치기는 너무나 어려웠던 셈이다.


           알론소

앞으로 나가서 먹겠다,

이게 끝일지라도. 상관없다, 최고의 시절은

지나갔다 느끼니까. 자, 동생과 공작께선

나가서 짐처럼 하시게.


천둥과 번개, 아리엘, 하르푸이아처럼 등장,

식탁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진기한 무대 장치에 의해

잔치 음식이 사라진다.


(중략)

     프로스페로

너는 이 하르푸이아의 형상을 멋지게

연출했다, 아리엘. 빼어난 흡인력이 있었어.

내 지시를 네가 꼭 해야 할 말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또, 넘치는 생동감과

놀라운 관찰로 급이 낮은 정령들도

본분을 다하였다. 최고급 마술이 통하여

나의 적들 모두가 정신 착란 상태에서

뒤엉켜 있구나. 그들이 내 손안에 있으니

한동안 발작하게 버려두고 난 어린

(그들이 익사했다 여기는) 페르디난드와

그의 애인, 내 사랑, 딸애를 보러 간다.    (퇴장)


 - 셰익스피어, 『태풍(Tempest)』, <4막 1장>


《폭풍우》의 미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

(앤터니 홀든/장경렬 옮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담긴 사진)



『그리스 로마 신화_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쓰고, 『신화의 힘』, 『변신 이야기』,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등을 두루 번역한 분은 이윤기 선생님이다. 그 분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매료되어 작고하기 몇 해 전엔 손수『겨울 이야기』를 번역해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분이『겨울 이야기』의 '앞과 뒤'에 잔뜩 펼쳐놓은 '해설'에는(무려 40여 쪽에 달하는데) 온통 흥미로운 신화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 말미에 그 분이 남겨 놓은 다음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안타깝기만 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민담과 관련이 있는 작품에는 이런 압축 파일이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이 압축 파일을 푸는 일이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번역하는 일은 이렇게 풀어낸 압축 파일을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7-05-29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화의 힘>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군요! 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펼쳐 볼 일이 없어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신화 관련 책은 손이 잘 안가네요. 오렌님은 여전히 ~ 두껍고 도전하기 힘든 책을 읽으시는 거 같아 부럽습니다. 간접적이나마 캠벨의 책을 접할 수 있으니 좋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30 11:10   좋아요 1 | URL
신화는 이상하게도 ‘진입 장벽‘이 있는 듯해요. 저도 그런 느낌을 꽤나 오래 경험했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 읽는 책들은 <셰익스피어 전집>에 담긴 작품들이랍니다. 대략 37편의 작품 가운데 절반쯤 읽었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읽으면 그리 멀지 않아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다 읽을 수 있을 듯해요.
 

 

(밑줄긋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책읽기


"저작에도 창조적인 저작이 있듯이 독서에도 창조적인 독서가 있다. 마음이 노력과 창의로 긴장해 있을 때에는 우리가 읽는 그 어떤 책의 페이지에도 다양한 암시들이 가득 차서 영롱해진다."

 - 에머슨(1803∼1882), 미국의 사상가, 시인.



"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톨스토이(1828∼1910), 러시아의 소설가.



"무엇이든 하루에 5시간만 독서하라. 그러면 당신은 박학다식해질 것이다."

 - 보스웰(1740∼1795), 영국의 전기 작가, 변호사.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이해하는 것, 그가 우리에게 시사하여 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 파게(1847∼1916), 프랑스의 비평가.



"독서에 소비한 만큼의 시간을 생각하는 데 소비하라."

 - 베네트(1867∼1931), 영국의 소설가.



"읽는 기술은 이미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다. 모든 독서는 언제나 하나의 재창조다. 독서는 끊임없는 발견이고 이미 새롭게 행해지는 모험이다."

 - 가이 미쇼(1879∼1955), 프랑스의 문학사가.



"책은 청년에게는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자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면 위안이 된다."

 - 키케로(B.C. 106∼43), 로마의  정치가, 철학자



"아침에는 일하기 전이므로 과학이나 철학과 같이 머리를 쓰는 책을, 일을 한 다음에는 약간 부드러운 내용의 책을, 오후에는 역사, 수필, 비평 호근 전기 따위를, 저녁에는 소설이나 시집을, 밤에는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책을 읽는 게 좋다."

 - 몸(1874∼1965),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가장 위대한 책이란 종이 테이프에 찍히는 전문처럼 두뇌에 새로운 지식이 박히는 게 아니고, 생명이 넘치는 충격으로 다른 생을 눈뜨게 하고 또 다른 생에서 생으로 여러 가지 정수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 롤랑(1866∼1944), 프랑스의 소설가, 평론가.



"과학에 관해서는 늘 새로운 책을 읽도록 힘쓰고, 문학에 대해서는 오래된 책을 읽도록 힘쓰라. 고전 문학은 항상 새롭다."

 - 리튼(1803∼1873), 영국의 정치가, 소설가 겸 극작가.



"읽는 것은 빌리는 것을 말한다. 독서하고 창작하는 것은 자기가 진 빚을 갚는 것이다."

 - 라히텐베르크(1742∼1799), 독일의 물리학자, 비평가.



"독서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만든다. 사색은 사려 깊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논술은 확실한 사람을 만든다."

 - 벤자민 플랭클린(1706∼1790), 미국의 정치가, 문필가.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7-05-25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중에서 몇 개 골라 댓글을 씁니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저처럼 다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글입니다.

˝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글을 읽었어요. 독서의 단점을 말하더라고요.

˝무엇이든 하루에 5시간만 독서하라.˝
- 하루에 보약을 세 번 챙겨 먹는 것도 바빠서 하루에 두 번만 먹고 있어요. 저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독서하겠습니다.
이것도 안 될 때가 있어요.ㅋ

oren 2017-05-26 00:41   좋아요 0 | URL
저도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을 부러워 한 적은 없었던 듯해요. 제 취향과도 영 맞지 않고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독서를 위해 남겨진 시간‘도 자꾸만 들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해서도 아무 책이나 붙잡고 읽는 걸 피하게 되고요. 헤럴드 블룸이 취했던 ‘독특한 고집‘도 ‘어떨 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싶기도 하더군요.
* * *
세계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헤럴드 블룸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해리포터 열풍에 대해서 “진부함에 강하고 상상력에는 약하다(Long on Cliches Short on Imaginative Vision)˝고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전자책의 선봉이 되었던 SF 작가 스티븐 킹이 작년에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에 대해 “스티븐 킹은 싸구려 스릴러 작가이며 그의 작품에는 문학이 주는 그 어떤 미학이나 독창적 지성이 없다”며 혹독한 비평을 했다. 헤럴드 블룸의 문학에 대한 입장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해줄 수 있는 것은 없는 듯하다.
 

 

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4_희곡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


햄릿은 호레이쇼를 찬양하는 데 있어 철저하리만큼 진지하다. 호레이쇼는 엘지노어의 법정에서 클라우디우스(햄릿의 숙부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가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햄릿은 호레이쇼에 대해 "진정 허다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조금도 없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관객으로서 작가가 주는 모든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호레이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격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데에는 관객 역시 보다 금욕적이고 현명해지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370쪽)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370쪽)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번에 걸친 햄릿의 독백이 나온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야훼나 예수, 알라에 대해서 엿듣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371쪽)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재성'을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때론 거기에 '창조적인 능력'이라는 은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햄릿은 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가운데 단연 천재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지적인 힘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반면 창조의 힘은 대부분 모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극중 극에 등장하는 왕의 연설이나 무덤에서 햄릿이 부르는 광적인 노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다.


희곡 『햄릿』은 주인공의 좌절된 창의성, 즉 햄릿 왕자의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햄릿은 실패한 시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71∼372쪽)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지나치게 무언가 첨가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삭제함으로써 교묘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햄릿』은 대작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372쪽)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말한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또한 동서양, 남녀,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지녔다.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였던 것이다.(372쪽)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햄릿』을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하는 일은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나 혹은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괴테, 톨스토이, 체호프, 입센, 조이스, 프루스트 등이 쓴 뛰어난 작품과의 비교도 또한 어렵다. 『햄릿』은 그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은 끝부분에 이르러서 실제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햄릿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몽테뉴가 아마 유일하게 유용한 비유가 될 것이다.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위대한 수필 「경험에 대하여」를 쓴 몽테뉴가 5막에 나오는 햄릿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햄릿보다 자신의 지혜에 더욱 관대하다. 5막에서 햄릿이 제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해도 결국 '은총'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성서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말하는 의미는 "무한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더 많은 삶"이다.(373∼374쪽)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햄릿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가 바다에 있을 동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이는 햄릿이 후손에게 전해질 자기 '오명'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을 보여 준다. 『햄릿』의 독자나 관객은 햄릿이 자신의 추종자 호레이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을 말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서 오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햄릿의 모호한 광증의 일시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햄릿에게는 엄청난 긴장이 가해진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미치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햄릿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는가도 모르는 채 커튼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다. 이후에 그는 환희만을 표명한다. 로젠크란츠와 길텐스턴은 기회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햄릿이 이유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햄릿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4쪽)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 우리는 "자, 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라는 햄릿의 자긍심에 가득 찬 적대감에 전율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자제된 위험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칼하진 않지만 우리들에게 다음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즉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밝히면서 냉정하게 말한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네."


햄릿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습을 본 호레이쇼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햄릿이 그들이 죽음에 대해 "그건 그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라고 말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 그들이 햄릿의 예일 대학 동창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햄릿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377∼378쪽)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아고처럼 햄릿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리는 이아고에게서는 이런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왜 힘릿에게는 매료되는가? 모든 허구적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복잡한 이 인물의 여러 가지 신비 중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념가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면 지난 200여 년 이상 동안 보편적 병폐였던 햄릿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378쪽)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


햄릿이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고통을 묘사했을 때 무대 위는 그의 어머니,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즈 등의 시체들이 널려 있고, 햄릿 역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했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해 자살로 몰아갔으며,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날 만했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여덟 명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햄릿'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놀라운 재능에 비례해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378∼379쪽)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


셰익스피어는 『햄릿』이후에는 복수극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장르를 작가가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극장성Theartricalty에 대한 극이다. 햄릿 이전의 그 어떤 서구의 희곡에서도 그토록 '극장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었다. 한마디로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이다.


1막에서 2막 1장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도착하는 2막 2장에서부터 클라우디우스가 '거짓 불에 놀라서' 「쥐덫The Mouse Trap」에서 도망치는 3막 2장까지는 극장성에 관한 막간극으로 이어진다. 4막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극은 모든 이들에게 각자 의미 있는 만화경 같은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마지막 5막은 불과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햄릿이 10년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부왕의 유령은 기억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부왕도 단지 오랜 기억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의 비극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연극과 배우들에 대한 거친 사색으로 이어지고,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초월적 비극 안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새로 탄생한 인간은 죽음이란 스스로를 조롱하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자기 인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 『햄릿』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또한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러한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79∼380쪽)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382쪽)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


『햄릿』이라는 극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주인공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변화무쌍하다. 모호한 전사-연인-아버지 없는 존재,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383쪽)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햄릿은 우리를 그의 의식의 심연 속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에는 이아고나 『리어 왕』의 에드문드 혹은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를 초월하는 허무주의가 존재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이아고는 다른 등장 인물이나 그들의 삶으로 '글을 쓰지만', 햄릿은 배우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불가사의한 짧은 노래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내기 때문이다. 햄릿은 '주제'와 '자세'라는 이중적 면에서 허무주의 시인이다. 독백의 언어에서, 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들에서, 언어와 자아를 포함해 햄릿은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383∼384쪽)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멋지게, 그러나 슬프게 시인이 아닌 배우로 만들었다. 독자들도 햄릿의 시에 매료되면서 그의 연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85쪽)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가 찰스 램을 대단히 존경하는데,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일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햄릿의 멋진 독백과 다시금 마주친다면, 절망적인 찰스 램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독자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유명한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구절은 사내아이나 남자들에 의해 연설 투로 너무 거칠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그 살아 있는 장소와 극의 계속성이란 원리에서 그렇듯 비인간적으로 괴리되어 있어서 내게는 완전히 죽은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햄릿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살육이 있기 전에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길 승산이 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마음에 얼마나 악이 들끓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는 자신의 훼손된 이름을 남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한다.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지금 와 버리면 장차 오지 않고, 장차 오지 않으려면 지금 올 것일세.

만일 지금 와 있지 않다면, 결국엔 올 것이라니까. 모든 것은 각오일세.       (389쪽)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훼손된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죽는다. 몰락과 부활, 어느 쪽을 기대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름이나 명예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모든 허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햄릿은 누구나 겪게 될 종국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389쪽)

































 

















헨릭 입센(1828∼1906)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내가 쓰는 글에는 트롤Troll이 있는 게 틀림없다. ㅡ 입센


나는 내 자신이 의식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일한다는 명예로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입센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가톨릭 주교다. ㅡ 제임스 조이스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


오스카 와일드는 공연 <헤다 가블러>를 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희랍 비극을 본 것 같은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1891년 와일드는 그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워낙 영민하므로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우리는 헤다가 자살을 찬양하는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만큼 우아하진 않지만 아름답게 목숨을 끊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적인 순교자도 아니고 무대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훨씬 좁지만, 헤다는 입센 시대의 노르웨이에서 중산 계급의 숨막히는 도덕성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만일 그녀가 이아고만큼 우리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면 뢰브보리도 결코 오델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입센은 거친 아이러니로 헤다 주변을 이류 인간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그들은 헤다의 아름다운 사악함의 완전한 잠재력에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00여 년간 작품 속의 그 어떤 인물 중에서도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 체호프의 작품에 나오는 여 주인공들도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고통당하고 또 고통을 가하는 헤다는 우리 가까이에 널려 있다. 입센은 글을 쓸 때 책상 위의 컵에 전갈을 두고 멜론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치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헤다 가블러는 바로 이런 작가의 감성의 산물이 아닐까.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


셰익스피어 이후, 대부분의 걸작 희극은 아일랜드 작가들의 작품이다. 윌리엄 콩그리브의 『세상의 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정복을 위한 굴복』, 리차드 브린슬리 셰리단의 『스캔들 학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오스카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존 밀링턴 싱의 『서방 세계의 플레이보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등이 그러하다.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은 위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이다. 이 작품은 신선함이 가득한 기적 같은 작품이며, 와일드가 쓴 두 편의 수필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거짓말의 부패」만큼 훌륭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


와일드는 자신의 최고의 희곡 제목을 『무관심한 것의 중요성』이라고 지을 수도 있었다. 앞서 살펴보 것처럼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이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을 위한 무관심한 거짓말이다. 와일드는 이 극의 철학에 대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든 사소한 일에 매우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모든 심각한 일은 '성실하고 의도된 사소함'으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알거논의 음식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난 음식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인간들을 증오해. 너무 가벼운 짓이거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


보르헤스는 "와일드는 언제나 옳거나 아니면 거의 언제나 옳다"고 말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아더 사이먼스가 언급했듯 와일드는 희곡 작가면서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인용에서 언제나 독창적이었다. 또 와일드는 품위 있는 자서전 작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이다.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만일 입센이 헤다 가블러라면, 와일드는 레이디 브랙넬이라 할 수 있다. 터무니없는 그녀의 행동은 극중 그 누구보다 앞서 있다.


레이디 브랙넬: (자신의 시계를 꺼내며) 봐라, 얘야. (그웬돌렌이 일어선다) 벌써 우린 여섯 아니 다섯 대의 기차를 놓쳤다니까. 하나만 더 놓치면 정류장에 적힌 글이나 읽고 있을 거야.


나는 이 구절을 『서구의 정전』이라는 책의 권두에 인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편집자들의 반대로 책에 싣지는 못했다. 나는 위의 구절이 2000년대의 독자들, 진정으로 정전이 될 만한 창의적 문학에 시금석이 되리라고 보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읽을까? 우리는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류장에서 그웬돌렌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그 누구도 모녀가 다섯 혹은 여섯 대의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기차를 놓치거나 한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레이디 브랙넬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자신의 관객이며 일정 관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그녀와 희곡의 익살맞은 위대성인 까닭에 우리는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계속 읽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3_장편소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


크게 소리내어 상대에게 책을 읽어 주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앞에 앉아 있다 해도 독서는 사회적인 행위로 바뀌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읽은 이유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과 스토리, 작가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소설이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 모두 그 세계의 미학과 정신적인 가치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지난 18,9세기에 그랬듯이 눈앞에 펼쳐질 제3의 천년에는 미학적 즐거움과 영적 통찰을 위해서 우리 모두 소설을 읽어야 한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소설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묘한 아이러니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열렬했던 관객들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한탄했지만, 내가 볼 때는 이 새로운 영상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마저도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프루스트도 사라질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다. 이런 지독한 시대에 소설이 많은 독자를 확보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암울한 이 시대 상황을 짊어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책장을 넘겨야 한다.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는다. 리어 왕도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법이 거의 없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때로는 아주 즐거운 듯 보이지만 아예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본인의 경우는 벤 존슨과 함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금방이라도 파탄 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변화, 다시 말해 자아를 심화시키고 내재화하는 작업이 서로간에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


허클베리 핀은 짐에게서 자신의 산초를 발견했기 때문에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무주의적인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아고적 속성 안에서 반反 산초 판자와 마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시킨 왕자와 돈 키호테의 고상한 "광증"은 비슷하다. 세르반테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게 생명을 달라!"


우나무노는 『돈 키호테』가 삶의 비극적 의미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광증"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시대에 죽음을 예찬한 스페인적 기질에 대한 항거였다. 그는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상처뿐인 전사라도 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언제나 폴스타프와 함께 이렇게 외친다. "내게 생명을 달라!"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산초 판자의 위대성에 있으며, 산초는 폴스타프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누지와 함께 우리 속의 죽지 않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독자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처럼 세르반테스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며, 활동적인 독자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 갇힌 사자와 마주친 돈 키호테는 사자들이 공격할지 어떨지 알고 있다.


그리고 돈 키호테, 산초와 함께 여행을 해 온 활기 넘치는 독자들은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지식을 공유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이는 그들이 비평가가 되어서 자신의 모험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이 소설의 제2부에서 세르반테스의 이토록 비상한 이야기 솜씨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20여 편이 넘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는 놀라운 기법을 사용했다. 독자와 관객은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2부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으로 들어가는 틈새를 잘라 버렸는데, 이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1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2부를 통해 다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는 바로크적이고 지적이여서 마술사들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다. 세르반테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표절자요 사기꾼들로 자신을 대신해 소설을 끝내려는 존재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


토마스 만은 돈 키호테에 관해 말하면서 "자기 칭송에 대한 영광으로 사는" 독특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산초는 너무나 영민한 나머지 거기까지 나갈 수는 없었다.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으로서 권위를 가졌다. 그 권위의 궁극적인 상속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더욱 진전시켰다.


또 다른 계승자로 『율리시즈』의 제임스 조이스를 들 수 있으며, 그와 프루스트의 사도며 『몰리』,『말론 죽다』, <무명> 3부작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


『돈 키호테』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나는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언급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탕달(1783∼1842)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보바리 부인』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처럼 거대한 스케일이며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작품이다. 그러나 하워드가 지적했듯이 고정된 형식이 없는 스탕달의 작품은 다시 읽어야 한다. 아마도 스탕달보다 더욱 셰익스피어적이었을 프루스트도 스탕달을 사랑했으리라. 왜냐하면 플로베르와 달리 스탕달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우리는 왜 스탕달을 읽는가? 내가 흠모해 마지 않는 그 어떤 작가도 우리를 공모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발자크는 『파르마의 수도원』을 "단 한 페이지에 책 전체를 담고 있다"고 격찬했다. 둔감한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하겠지만, 만일 당신이 어떤 풍미를 지녔다면 그 소설은 당신을 윟나 것이다.『파르마의 수도원』은 과장된 로맨티스트에게서나 가능할 법한 광기가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과 18세기 초엽 이태리로의 복귀, 즉 메테르니히가 워털루 전쟁 이후 복구하려던 셰계의 일부를 연대기화했다.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


스탕달은 항상 이성애적인 사랑의 심리학을 다룬다고 평가되었지만, 내가 볼 때는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열정적 사랑의 중심과 사랑에 빠졌을 때 병적인 면을 제외한 전부에는 허영심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았다. 스탕달 때문에 불안정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사랑에 빠지면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제인 오스틴(1775∼1817)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논할 때, 단편이나 시보다는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소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사회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만큼 현명한 작가였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마음에서 "위선"을 없애라고 충고한다. "위선적"이라는 것은 진부한 어투, 지나치게 경건한 표현과 집단적인 사고들을 가리킨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녀를 떠나 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함께 오스틴도 여성이 창의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 폴스타프, 이아고 등의 남성들을 창조했고 로잘린드, 포오샤, 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인물들도 보여주었다. 따라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남녀 모두에게 영예를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찰스 디킨스(1812∼1870)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표도르 미카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도스토예프스키는 셰익스피어처럼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만들었다. 『맥베드』와 『죄와 벌』은 공포와 연민의 정마저도 없애 주지 못하는 전율적인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를 전도시켜서 음침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맥베드의 이 끔찍한 숭고함을 공유하기 때문에 악몽 같은 환영이 현실이 되는 음습한 페테르스부르그의 여름을 겪으면서도 『죄와 벌』을 읽으며 절망을 초월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벽들은 추악한 노란색이며 현대 대도시의 공포는 보들레르나 디킨스에 필적하는 강렬함으로 묘사된다. 마치 맥베드의 마녀들이 사는 스코틀랜드에서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우리 역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죄와 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무엇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살인자가 되도록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성품의 젊은이로 근본적으로 품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남을 억누르기로 잘 알려진 스탈린 시대의 인민 위원들의 전례"라고 말한 사실에 감탄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악마적 패러디인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자기 처벌자이지만, 그의 매저키즘은 나폴레옹이 되고 싶다는 공언된 욕망과 일치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죄와 벌』은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함, 즉 어떤 특정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당파심이 강해서 맹렬한 관점이 언제나 글에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그의 계획은 나자로처럼 허무와 회의에서 독자들을 일으켜 세워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다.


체호프나 나보코프 같이 뛰어난 작가들도 그의 그런 태토를 참을 수 없어했다. 그들이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죄와 벌』을 매번 읽을 때마다 강력하고 사악한 시련을 발견한다. 마치 맥베드 자신이 쓴 『맥베드』같은 느낌이다.


















헨리 제임스(1843∼1916)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


왜 『여인의 초상』을 읽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는데, 무엇보다 독서를 통해 소득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의식을 육성하는 일은 독서의 주요한 이유다.


특히 정독은 주된 소득이 될 것이다. 독서에서 열정과 통찰은 독자들이 얻는 고양된 의식의 속성이다. 사회적인 정보는 과거나 현재에 상관없이 독서의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이다.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여인의 초상』은 우리가 면밀히 읽고 그것과 교감해 주길 원한다.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왜 읽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즉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고전의 최종적인 빛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고전의 최종적인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의미와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드러난 절대적인 창의성과 마주친다면 어떨까?


이 광대한 소설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르셀은 젊은 시절 프루스트의 초상으로, 19세기 마지막 10년부터 프루스트가 죽은 1922년까지 프랑스 사회의 미로 같은 회고담을 들려 준다. 이 소설의 주제는 다양하다.


미학과 아름다움, 매춘굴, 산 사람에게 들러붙은 죽은 자, 의상,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하여 우정, 습관, 남녀의 동성애적 도착, 질투, 문학, 그리고 서술자의 소설가로의 점진적 진화, 성적 질투심만큼이나 널리 퍼진 기억, 사디즘적 마조키즘, 바다, 잠, 그리고 시간 …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


니체는 가장 햄릿적인 진술의 하나로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말을 찾아 내면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말하는 행위에는 일종의 경멸감이 들어 있다. 프루스트는 셰익스피어와 달리 이 경멸감에서 자유로웠다. 주요 인물들은 프루스트의 관대함을 나타낸다. 이기적 에고이즘은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프루스트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표출하는 강한 관심이다.


감히 말하건대, 소설을 읽으면 질투가 완화된다. 그 가운데 성적 질투심이 가장 독성이 강하다. 이런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였다. 따라서 소설이란 '성적 질투심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고 축소해 볼 수 있다.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


프루스트는 우정이란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권태로움의 중간"에 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에게 현실이 얼마나 작은가를 보여 주는 두드러진 예"라고 말했다. 니체는 거짓을 소모적이라고 경고한 반면, 프루스트는 "완벽한 거짓말"은 새로움을 여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앞에서 진지한 소설 독자가 점차 줄어든다고 말했는데, 나는 프루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프루스트는 그 인물들을 시간의 신성들로 간주하며 우리에게 회고적 신성과 질투심을 보여 주는데, 이 두 감정은 실은 하나다. 프루스트의 남녀 주인공들은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성적 질투심과 투쟁에 사로잡힌 신들이다.


프루스트의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읽은 글 안에서 길을 잃곤 했던, 50년 전 방식대로 읽을 수는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토마스 하디의 『숲속의 사람들』에 나오는 메리 사우츠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을 때 나는 지독한 슬픔에 잠겼다. 작품 속의 여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현실은 어떤 경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프루스트의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보여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토마스 만(1875∼1955)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


『아이러니의 개념』을 쓴 덴마크의 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논쟁의 여지없이 셰익스피어를 아이러니의 대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고의 아이러니스트라 일컫는 세익스피어조차 햄릿이라는 인물 속에서 진실하면서도 이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전혀 없을 수도 있으리라. 독자들은 『마의 산』을 읽고 난 뒤에 카스토르프라는 인물에 대해 알 것이다. 그는 분명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마의 산』을 다시 읽으면서 만의 위대한 아이러니는 그가 카스토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카스토르프가 매력적인 젊은이긴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장편소설 1부_요약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조만간 그 형태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떤 통렬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뛰어난 소설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이러한 교훈은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변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기-엿듣기를 통한 셰익스피어적 변화의 패턴이 지배하지만, 만의 『마의 산』에서 카스토르프는 세르반테스의 계획을 따르며 자유주의 철학자 세템브리니는 그러한 카스토르프에게 지적인 산초 역할을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 변화란 로마 시인 오비드보다 중세의 영국 시인 초서의 뒤를 잇는 위대한 발명이다. 오비드는 초서, 크리스토프 말로와 함께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햄릿, 리어 왕, 안토니, 클레오파트라 같은 인물들이 변화한 것은 남의 말을 읏듣듯이 자신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는 자신의 갑옥솨 투구를 들고 다니는 에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로스, 그대는 내가 보이는가?"


자기가 한 그 말을 스스로 엿듣게 된 안토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독자들도 본인에 대해 엿듣고 놀란 후에, 자신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인식하고 반성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영어나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좋은 친구와의 밀접한 대화를 통해 쉽게 자기 반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정신적 변화를 초래하는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의해서 더 많이 변한다.


스탕달, 제인 오스틴, 도스토예프스키, 헨리 제임스, 프루스트 등은 셰익스피어의 패러다임을 좇았던 반면, 디킨스나 토마스 만의 경우는 모파상, 칼비노와 함께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더 가까운 작가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투르게네프, 체호프, 헤밍웨이, 보르헤스 등은 셰익스피어에게 더 큰 영향을 받은 단편 소설의 대가들이다. 또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할 미국 작가들도 토마스 핀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다.


훌륭한 독서가 세르반테스의 양식처럼 우리에게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최상의 서정시도 남에게 말하는 법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


외로운 독자는 사라져가는 족속이다. 또한 더할 나위없는 고독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되지 못하면 남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고대 랍비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었던 힐렐의 충고를 늘 기억한다.


"만일 내가 날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해 줄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또 그 언제인가?"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나 『율리시즈』의 조이스 같은 소설가는 등장 인물의 뒤에 있는 '수수께끼의 저수지'에 몸을 담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묘하게도 산초와 돈 키호테를 창조한 것을 드러내 놓고 찬양하는 세르반테스보다 더 깊이 인물과 동일시되어 있다.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조이스 역시 레오폴드 블룸(『율리시즈』의 주인공 이름)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고도의 기법을 구사했지만 결국에는 꿋꿋하고 인간적인 폴디와 하나가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현명한 수동성

거대한 문학을 접했을 때, 이를테면 단테의 『신곡』이나 헨리 제임스의 『비둘기의 날개』같은 작품에 미리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면 우리의 이해와 즐거움은 파괴되고 만다. 책을 펴는 순간 권력에의 의지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의지는 우리가 독서에 몰두하고 작가에게 관심을 빼앗긴 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잘 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방법에는 관심의 수용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워즈워스가 말한 "현명한 수동성"이 좋은 독서가 요구하는 관심과 최상의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1819∼1891)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

에이허브는 분명한 셰익스피어적 인물이다. 그는 리어 왕이나 맥베드와 비슷한데,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맥베드의 영웅-악당의 모습을 동시에 지녔다. 아홉 살 때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과 모든 선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소설을 이끌고 있는 화자는 유일한 생존자인 이스마엘이지만 말이다.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는 자신의 신성한 자아를 주장하고 불을 숭배하는 일이 옳은 것이었다. 에이허브는 "만일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셔 버리고 말겠다!" 라고 외치며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 선장에 댛나 짧은 분석으로 『백경』을 다룬 것은 이후 논의하게 될 모든 미국 작가들의 등장 인물 가운데 선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의 마음을 깊이 품었던 멜빌의 서사에 대해서 열정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핀천(1937∼2004 현재)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독자로서 내 경험에 따르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첫 번째 독서 어딘가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 멋진 부패함에 이끌려 읽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는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에 이해를 덧붙일 수 있었다.

반면『49호 품목의 경매』를 처음 읽었을 때 분노 자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읽으면서 순식간에 그것에 사로잡혔는데 그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 번 정도는 읽었으면 한다.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코맥 매카시(1933∼2004 현재)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발표되었던 15년 전보다 오히려 2000년에 더 적합해 보인다. 코맥 매카시는 멜빌과 포크너의 뛰어난 사도라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명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감히 말하건대, 핀천을 포함해 살아 있는 미국의 어떤 소설가도 『피의 오후』만큼 강력하고 기념비적인 소설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나는 독자로서 『피의 오후』를 완독하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매카시가 그려 내는 잔혹한 학살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폭력은 열다섯 살의 소년이 등과 심장 아래 총을 맞는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30년 뒤 홀든 판사가 옥외 화장실에서 키드를 살해하는 순간까지 잔혹함이 이어진다. 『피의 오후』에서 보여 주는 살인과 살육은 1999년 코소보의 폭력에 대한 유엔 보고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피의 오후』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보편적인 '피의 비극에 대한 정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성취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홀든 판사는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처럼 교활하며 악마적인 전쟁 이론가다. 이 작품은 뛰어난 언어, 풍경, 인간과 개념들이 폭력을 넘어 멜빌이나 포크너의 셰술에 견줄 만한 잔인한 공포의 미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랠프 월도 엘리슨(1914∼1994)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질감에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어 있을 때』만큼이나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읽어야 한다.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보상은 엄청나다. 이 소설은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그 의무란 미국이 아프리카 계열 아메리칸의 노예제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대의 니네베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파괴를 예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