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만은 20세기의 사상을 주름잡아 온 십여 가지의 주제와 문제들, 가령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예술, 질병, 죽음을 서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서구인 특히 중산층 서구인들의 정신 상태,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등을 폭넓게 다룬다. 만의 특별한 재능은 이런 수준 높은 사상, 등장인물들의 창조, 소설 속 분위기의 설정을 잘 종합한다는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 * *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오르는 중이다. 풍문에 듣기론 이 '산'이 완등하기가 제법 험난하다고 들었는데 예상과 달리 아직까진 별로 힘겹지 않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어느새 4장까지 읽었다. 그런데 상,하권으로 나눠진 소설이 총 1,431쪽(상권 660쪽, 하권 771쪽)인데, 알고 보면 제4장까지는 고작 352쪽에 불과하다. 남은 3장이 장장 1,079쪽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해발 1,431미터 높이의 산을 오르는데 겨우 352미터까지 오른 셈이라고나 할까.

 

(1993년에 나온『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그런데 산을 오르다 보면 산행을 시작할 무렵의 몇십 분 정도가 특히 힘들다. 하지만 육체가 산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치게 되면 한결 마음이 가볍고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짜릿하게 맛보는 순간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로선 딱 그런 기분을 느끼는 지점에 온 듯하다. 소위 '호흡이 터질 때'를 지금 막 지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율유세계문학전집> 1, 2권으로 나온 『마의 산』은 판형 때문에 페이지수가 늘어난 측면도 있는 듯하다.)

 

소설 『마의 산』의 공간적 배경은 스위스의 산중턱에 있는 베르크호프 요양원인데,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인 한스 카스토르프가 해발 1,600미터쯤에 자리잡은 이 곳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는 문제를 자주 다룬다. '저 아래'에서의 '수평 생활'과 요양원 생활은 여러모로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마의 산』의 독특한 분위기에 '적응'하는 일은 독자가 카스토르프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호흡이 터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결정적인 이유를 들자면 그건 이미 어디선가 만난 듯한 '익숙한 문장'을 이 소설 속에서 벌써 세 번씩이나 만났기 때문이다. 높은 산을 오를 때나 먼 길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나 혹은 처음으로 대하는 작품을 읽을 때나 사정은 다 매한가지가 아닐까.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친숙한 무엇'과 만난다는 게 그만큼 '낯설고 힘든 여정'을 한결 가뿐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 말이다.

 

『마의 산』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반가운 문장'은 '시간의 흐름'에 관한 문제를 다룬 길다란 대목이었다.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만난 '익숙한 표현'은 '연애의 형이상학'을 다룬 대목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이 둘 모두는 공교롭게도 쇼펜하우어를 읽을 때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번째로 만난 글귀는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룬 대목인데, 이건 6년 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다가 눈에 띄어 스마트폰에 메모해 둔 문장이었다.

 

우선 문장이 짧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세 번째 문장부터 여기에 옮겨볼까 싶다.

 

" ……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이 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다들 멋있는 검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는 관을 바라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평소 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

 

이 대화의 전후에 어떤 배경이 깔렸든, 이 대화의 주인공이 누구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저장되어 있었던 문장을 『마의 산』을 직접 오르면서 어느 순간 불쑥 마주쳤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했다. 내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스마트폰에 넣어 놓은 '오래된 메모'를 여태껏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놀라웠다. 지금 다시 꺼내 보니 그 둘은 번역까지도 서로 완전히 일치했다. 또한 스마트폰에 넣어 둔 메모는 놀랍게도 '북플'로 공유할 수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터치로 까마득한 옛날에 메모한 내용을 통째로 이곳으로 끌고 올 수도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스마트폰을 바꿀 때마다 폰 속에 저장된 메모를 매번 일일이 옮겨 적느라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말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스마트폰을 바꿀 때마다 일일이 수기(手記)로 옮겨진 끝에 마침내 '북플 공유'를 통해 끌려나온 메모.

2011.2.27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2011.3.20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서구인들이 성서적인 의미의 ‘선과 악‘이라는 억압기제를 가지고 있다면 일본인들은 ‘계층의 허용범위‘라는 억압기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국민성에 비교우열은 없다. 베네딕트는 말했다. ˝일본인의 모순, 그것이 바로 일본인의 진실˝이라고.

2011.4.1
˝우리가 들은 것 중에 가장 큰 거짓말은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말이지만, 가장 큰 비밀은 왜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도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가 하는 것˝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중에서

2011.4.3
나는 몇 살까지 살까?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중요한 단계에 도달한 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
한결같이 열심히 생산적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장수하기 위해 따라야 할 지침들이다.

2011.9.10
토마스 만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주는 무엇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장례식에선 다들 엄숙하고 경건해지지. 평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나는 사람들이 가끔 경건해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2011.7.2
권이혁
그는 ˝내 목표는 웃으면서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권전장관이 젊은이에게 권하는 인생요령은 다음과 같다.

1. 젊었을 때부터 많이 걸을 것.
2. 남이 해주는 일을 고맙게 여길 것.
3. 즐겁게 살고 현명하게 늙기 위해 책을 많이 읽을 것.

 

펼친 부분 접기 ▲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만난 문장은 제법 길지만 여기에 한번 옮겨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문제와 '연애의 형이상학'에 관한 문제는 『마의 산』을 오르든 말든 어쨌든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해 볼 만한 문제이니까 말이다.

 

지루하다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다. 대체로 내용이 재미있고 신기한 경우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는 반면 단조롭고 내용이 없는 경우는 시간이 잘 가지 않고 더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내용이 없고 단조로운 것은 사실 순간과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르나, 아주 커다란 시간의 단위일 경우에는 이를 짧게 하고, 심지어 무(無) 같은 것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시간과 나날이 짧게 생각되고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 단위를 아주 크게 하여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시간의 흐름에 폭, 무게 및 부피가 주어진다. 그리하여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며 가벼운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 현상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하루같이 똑같은 경우 오랜 기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체험되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또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나중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한다. 다른 생활에 새로이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우리의 시간 감각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시간 체험을 갱신하고 강화하며 더디게 하여 이로써 우리의 생활 감정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소와 공기를 바꾸고, 온천 여행을 하는 목적도 이 때문으로, 기분 전환과 부수적 사건을 통해 심신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처음 며칠, 가령 6일 내지는 8일 정도 되는 처음 며칠은 젊은 날처럼 힘차고 활기차게 진행된다. 그러다가 그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점점 시간이 눈에 띄게 단축된다. 삶에 집착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서 삶에 집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매일매일이 다시 가벼워져서 후딱 지나가기 시작하는 사실을 감지하고 섬뜩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령 4주간의 마지막 주는 소름끼칠 정도로 빨리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물론 시간 감각의 쇄신은 막간 여행이 끝난 후에도 효력을 미쳐, 일상생활로 돌아간 뒤 새로이 효력을 발휘한다. 기분 전환을 한 후 집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은 역시 다시 새로워져, 폭넓고도 활기차게 체험된다. 하지만 이런 효력은 며칠간만 지속될 뿐이다. 일반적으로 외지에서보다 집에서 더 빨리 생활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노령으로 시간 감각이 벌써 무뎌졌거나, 또는 ㅡ 애당초부터 생활력이 약하다는 징조이지만 ㅡ 원래부터 황성하게 발달되지 않은 경우에는 시간 감각이 금방 다시 잠들어 버린다. 그리고 하루만 지나도 벌써 마치 집을 떠나지 않았던 양 생각되고, 여행이 하룻밤의 꿈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소견을 여기에 집어넣은 까닭은 한스 카스토르프가 며칠 후에 사촌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자신도 이와 유사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그는 말하면서 사촌을 충혈 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낯선 땅에 오면 처음에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거든. 말하자면 …… 그렇다고 내가 지루하다는 말은 아니야. 반대로 나는 왕처럼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러니까 회고해 보면 내가 이 위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있은 듯한 생각이 들어. 내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퍼뜩 생각이 안 날 정도야. 그때 네가 나한테 '내려가지!' 라고 말한 거 생각나? 나는 그때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돼.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이지 측정이나 오성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야. '여기 온 지 벌써 두 달은 된 것 같아' 라고 내가 말한다면 물론 말도 안 되겠지. 터무니없는 말일 거야. 그래도 '아주 오래되었다' 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202∼205쪽)

 

 - 『마의 산_상』, 제4장, <시간 감각에 대한 보충 설명> 중에서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이 마치 '철학책 속 문장'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토마스 만이 이렇게 '문학 속에 담은 철학'은 결국 쇼펜하우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다른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명쾌'하면서도 표현이 몹시 문학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상대적인 빠르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여기에 전부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그 대목을 '인용'하지 않으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마의 산』에 등장하는 문장을 서로 비교해 볼 도리가 없으니 '접어서라도' 인용하고 넘어가고 싶다.

 

 

접힌 부분 펼치기 ▼

 

 

 * 쇼펜하우어의 『삶의 예지』에서 발견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글들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사물과 또 다른 일면, 즉 의욕의 대상으로서 무서움을 알게 되며, 의욕적인 생활에 따르는 모든 장해와 근원을 체험하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깨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환상을 즐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고 한탄하여 회한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실망은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유년시절의 인생은 먼 데서 바라본 극장의 장식물과 같지만, 노년기의 인생은 그 장식물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밖에 유년시절에 평온과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미래의 영웅이나 학자, 농부, 시골사람 할 것 없이 서로 조용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개인차가 심해지고, 그 차이는 중심에서 원주까지 점점 멀어져 가는 원의 반지름처럼 점점 더 커진다.

우리 생애의 후반기보다 전반기가 더욱 이상적으로 보이고 후반기가 대체로 불쾌하고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생애의 초기에 행복의 실제를 믿고 이를 손에 넣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망과 재앙의 근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실패와 실망, 그리고 이에 따르는 불만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행복의 그림자가 여러모로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이것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손에 넣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생 자체가 공허하고 비참한 데 원인이 있다. 청년들은 그것을 처지나 환경 탓으로 본다. 그들은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자기 처지나 입장의 탓으로 돌리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만일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행복과 만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인생의 참된 모습을 알기 전에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눈에는 문학에 표현된 인생이 매우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자기도 한번 그처러머 실제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하나의 소설처럼 실현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무지개를 붙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대문소리......

인간의 전반기 특징이 이와 같이 행복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라면, 후반기의 특징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후반기에 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행복은 하나의 망상이요, 고통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식이 있고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행복보다는 차라리 견디어 나가기 쉬운 상태를 원하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처지를 원하게 된다. 나는 젊어서는 대문 소리가 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부터는 대문 소리가 들리면,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생명력, 즉 체력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36세까지는 그 이자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아서 오늘 소모한 체력은 내일이면 회복된다. 그러나 이 무렵을 고비로 그 후로는 자기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자본가가 된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아 지출의 대부분은 자연히 원상복구가 되어 이 무렵의 손실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손실이 점점 늘어가면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은 날마다 팽창하여 점점 뿌리를 깊이 박고, 오늘이라는 하루가 돌아올 때마다 어제보다 가난해진다. 그 동안에 그 감퇴는 물체의 낙하처럼 더욱 속도를 내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처럼 생명력과 재산이 날로 줄어든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은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년에 도달하고 나서 몇 해까지는 생명력에 관해 말하자면 이자 중에서 얼마간은 자본에 보태는 사람과 같다. 그렇게 하면 지출한 금액이 다시 자연히 충당될 뿐더러 자본도 늘어간다. 오, 행복한 청춘! 오, 서글픈 늙은이······. 어쨌든 인간은 청춘의 힘을 소중히 간수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하나의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짧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청년시절에는 그처럼 크게 보이던 인생이 꿈과 같이 덧없고, 다만 급격한 현상의 무의미한 교체로 생각되어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들여다보이고 또 마음에 스며든다.


청년시젏에는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더디다. 그러므로 일생의 4분의 1은 행복한 시기고 또 가장 길게 생각되는 부분이며, 그 동안에 기억하는 일들은 어느 시기의 기억보다 훨씬 많다.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누구나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그 밖의 4분의 3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계절에 있어서 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해가 너무 길어 지루하게 생각될 정도지만,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낮이 무척 짧아지는 대신에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노년기에는 왜 과거의 생애가 그처럼 짧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도 소중할 것 없는 대부분의 불쾌한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극히 작은 부분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길이도 짧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다.


 

http://blog.aladin.co.kr/oren/6854794

 

펼친 부분 접기 ▲

 

세 번째로 만난 '익숙한 문장'은 그나마 두 번째 문장보다는 조금 짧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여자들이 유혹적으로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그러한 자명한 사실 때문이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며,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인정받는 일이라서 이에 대해서는 거의 새삼스레 의식하는 일 없이 선뜻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는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를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관습이며, 엄밀히 말하면 거의 동화 같은 관습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동화 같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복장을 하고서도 풍기에 어긋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목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는 물론 다음 세대와 인류의 번식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249∼250쪽)

 

- 『마의 산_상』, 제4장, <사랑과 병의 분석> 중에서

 

 

이 대목에 상응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소위 <연애의 형이상학>에 나오는데, 이 대목 또한 '접어서' 인용하는 것으로 처리할까 싶다. '접기'조차 생략하면 이 글이 너무나 길게 늘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미래에 인간이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성욕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는 한편, 그들의 성격적인 특질인 본성(essentia)은 성애의 개체적인 선택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점이 변함없이 결정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일시적인 사랑에서 가장 뜨거운 정열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모든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진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는 이성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연애를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크게 보면, 다음 세대의 성립을 숙고하고 그 뒤의 무수한 세대에 대해 배려하는 진지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실 그것은 다른 정열같이 개인의 불행이나 이익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돌아올 인류의 존재와 그 특수한 양상에 관한 것으로, 이 경우 개인의 의지는 가장 높은 능력에 도달하여 자신을 종족의 의지로 돌아가게 한다.

연애란 엄숙하고도 뼈아픈 것으로, 큰 환락과 고뇌가 따르는 까닭은 종족에 관한 커다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몇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예를 들어 그것을 묘사했다.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즉 개인과 종족의 관계는 물체의 표면과 물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중략)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정사는 결국 자식을 낳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우여곡절은 부수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고결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내 주장이 지나친 실재론이라고 반박할 테지만, 이것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등장할 인류의 외모와 성격을 정밀하게 선정하는 일은 그들의 꿈이나 공상보다 훨씬 고귀한 목적이 아닌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목적들 중에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목적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랑의 뜨거운 정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정열이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극히 하찮은 일도 일단 이 목적과 관련 맺으면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연인을 위해 동분서주하거나 서둘러 접근하는 노력이나 노고는 언뜻 보아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대가보다 커보이는데,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말한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노고와 투쟁을 거쳐 현재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성격을 갖고 태어날 다음 세대의 인류다. 아니, 다음 세대의 인류는 벌써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면밀하고도 끈기 있는 이성의 선택에서도 나타나 있다.

(중략)

이제 문제의 핵심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이 깊이 뿌리박혀 개개인에게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 이외에 없다. 종족은 개체에 대해 분명 우선권을 가지며, 보다 직접적이고 큰 권한을 갖고 있다. 종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개체는 희생되어야 하는데, 개체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쏠려 있으므로 개체에게 이런 희생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다 해서 개체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게 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어 개체를 기만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개체는 이 환상에 미혹되어 사실은 종족에 관한 일인데도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이미 자연의 무의식적인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곧 탐스러운 환상이 나타나 이를 추구하게 된다. 이 환상이 다름아닌 본능으로, 그 대부분은 개체 의지가 아닌 종족 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자기 이상에 맞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면 남성은 미칠 듯한 정열을 일으키며, 이 여성과 결혼했을 경우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 환영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정열도 따지고 보면 '종족의 의지'며, 이것이 여성에 대해 스스로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보이며 그녀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한다.

(중략)

그런데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이 일단 그 정열을 충족시키면, 곧 미궁에서 벗어나 그처럼 열망했던 것이 얼마 안 가 실망을 안겨주는 일시적인 쾌락만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욕망에 대해 종족과 개체, 무한과 유한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충족으로  종족만이 실제적 이득을 보게 되나, 개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개체가 종족의 의지에 따르게 되어 지불한 희생은 그 자신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사용된 것이다. 모든 연인은 성교라는 큰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곧 속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종족의 도구가 되게 한 환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성적 쾌락은 최대의 사기꾼"이라는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종족의 영혼은 개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보다 월등히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고 자부하며,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건, 분주하게 사무를 집행하는 중이건, 페스트가 창궐하는 중이건, 또는 한적한 절 속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을 수행한다.

(중략)

사랑이 어느 유일한 이성에게 쏠리게 되면 굉장한 힘과 열을 내어, 만일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면 본인에게는 세계의 훌륭한 것들이 시들하게 보이고 나아가 목숨까지도 하찮게 생각되며 이 정열을 불태우기 위해 어떤 희생도 두렵지 않게 된다. 그 격정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으며, 때로 미치거나 자살까지 하게 만든다.

(중략)

질투가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정념(情念)인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만하고, 또한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는 일이 어떤 희생보다 크게 여겨지는 것도 납득이 된다. 영웅은 일상적인 일로 비탄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사랑의 비애에 대해서는 비탄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경우 비탄에 빠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 아니라 종족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데론의 훌륭한 희곡 《위대한 제노비아》제2막에 제노비와 데시우스가 등장하여 데시우스가 말한다.

"아, 하늘이여, 당신이 날 사랑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승리를 포기하겠소. 적진에서 도망쳐버리겠소."


여기서는 여러모로 이해타산적인 명예가 무시되고 그 대신 사랑, 즉 종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와 의무, 그리고 충성은 지금까지 유혹이나 심지어 죽음의 협박에도 저항해 왔으나, 종족의 이해 앞에서는 고분고분 양보하고 굴복해 버린다.


(중략)

일단 종족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면 개체에게만 관련되는 이해는 다 거기에 순종하며, 때로는 희생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인간은 자신에게도 종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며, 자기가 개체 안에서보다 종족 가운데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무엇 때문에 연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려고 하는가? 애인을 그리워하는 건 결국 그 사람 속에 깃든 영구불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밖의 것들은 오직 허망하게 생멸하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모의 감정은 우리 본성이 불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광명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를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성적 욕망에 의한 이성의 선택은 차츰 열기를 더하여 드디어 열렬한 사랑에 이르고, 이것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특수한 개성적인 소질이 종족 속에서 존속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략)

이 내재적인 본성이야말로 의식의 핵심이고 그 근저에 있으며 의식 자체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 즉 개개의 원리에서 떠난 물자체(物自體)다. 개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른 말로 '살려는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생명의 존속을 요구하며 죽음이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힘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을 생각한다』중 '사랑의 형이상학' 中에서
 

 

펼친 부분 접기 ▲

 

(『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밀라노를 거쳐 쮜리히에서 하룻밤 묵은 뒤 이튿날 인터라켄을 거쳐 알프스의 융프라우까지 올랐던 추억이『마의 산』을 읽는 동안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이 서재에서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들이 토마스 만의 손때가 묻은 채 오래도록 사랑받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다르게 보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렇게 해서 '호흡이 터지는 듯한 기분'을 가까스로 정리해 봤다. 아직도 『마의 산』을 다 오르기에는 까마득한데,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에 도취되어 너무 오래 쉰 듯싶다. 이제 호흡이 터졌으니 '발결음도 가볍게' 『마의 산』을 계속 힘차게 올라가 보자. 토마스 만이 보여줄 더 멋진 경치를 기대하면서...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그 자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옛적의 일이므로, 그 이야기의 곰삭은 나이는 일수(日數)로도 헤아릴 수 없으며, 이야기를 내리누르는 세월의 햇수는 태양 주위를 도는 혹성들의 수로도 헤아릴 수 없다.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 * *

 

토마스 만은 80세까지 사는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다. 『마의 산』, 『요셉과 그 형제들』, 『파우스트 박사』등이 유명하지만 정작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은 스물다섯 살에 완성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독일 철학자인 니체와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음악가인 바그너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였다. 그의 고향은 북독일 항구 도시인 뤼벡이었지만 10대 후반에 뮌헨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북부 독일과 남부 독일의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에 고루 영향을 받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민적 도덕률'을 중시하던 아버지와 '남국인의 예술적인 재능'을 지닌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으면서 '아폴론적인 성격'과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을 함께 타고났다는 점에서 남다른 특징을 보였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둘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1901년에 발표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고뇌와 갈등의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 초기의 작품이다. 『마의 산』으로 대표되는 중기(조화와 모색의 시기)의 작품이나 『요셉과 그 형제들』과 같은 말기(성숙의 시기)에 쓰인 작품들보다 훨씬 읽기가 쉽다는 이유 때문에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 되었다.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부덴브로크 일가의 4대(代)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작품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누구나 겪는 가족의 출생, 결혼, 이혼, 성공과 실패, 죽음 등이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사의 저변을 흐르는 또다른 주제인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한 시민 계급의 성장과 몰락'도 함께 다룬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가끔씩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른 장편 소설들인『까라마조프 형제들』이나 『전쟁과 평화』를 함께 떠올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두 편의 러시아 소설과 오버랩되는 부분은 그리 넓지 않다. 세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나 거창한 다른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부류의 소설이며, 그런 면에서 토마스 만의 소설이 훨씬 더 가족적이다.

 

부친 살해, 죄와 벌,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묵직한 주제가 심연처럼 끝모를 깊이로 독자를 끌고 내려가는『카라마조프 형제들』과, '거대한 조국 전쟁'을 배경으로 볼콘스키 가문의 사람들과 로스토프 가문의 사람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운명의 변천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역사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고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드는『전쟁과 평화』에 비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때로는 너무 평화로운 가운데 행복이 넘치며, 때론 너무나 고요한 가운데서도 슬프고 우울하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는 외부 환경의 격변은 '가족 회사의 번영과 쇠퇴' 말고는 달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문의 구성원들 각자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각기 어떤 시기에 어떤 개성들을 발현시키면서 삶을 꾸려나가는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가 주된 이야기 줄기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진지한 삶의 성찰' 같은 태도는『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세 작품 사이의 '연관'을 찾는다면 토마스 만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공히 '형제간의 갈등'이 소설의 전편을 오래도록 지배하고 있다는 점과 토마스 만과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공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 이처럼 평화로운 가운데 행복해 하고 고요한 가운데 우울하고 슬픈 이유는 무엇보다도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삶이 작품에 깊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소설 속의 분위기'와 아주 흡사한 삶을 살았다. 단적으로 토마스 만 가문의 선조들도 독일 북부의 부유한 상업 도시인 뤼벡에서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사업체를 운영했고, 작가의 아버지 역시 뤼벡의 시의회 의원이자 도시의 제2인자 였다. 그는 1890년 그의 나이 15세 때 <요한 지그문트 만 상회> 창립 백 주년 축하회를 생생히 목도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상회는 해산되고 그 다음해인 1892년에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과 함께 뮌헨으로 이주했다. 소설 속에서도 <부덴브로크 상사>는 100주년을 맞아 거창한 축하행사를 벌인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독자들이 도리어 놀랄 정도다.

 

긴 이야기의 시작은 1835년부터다. 번창일로를 걷는 <부덴브로크 상사>의 리더인 일흔 살의 요한 부덴브로크(1세)는 멩 가의 대저택을 새로 구입하고, 온 가족들은 기쁨에 넘쳐 행복해 한다. 가문의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남달리 부지런하고 성실한 태도로 사업에 전념한 덕분에 '오늘날의 영광'에 이르렀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그만큼 남다른 근검절약과 절제와 근면성실이 뒷받침되었던 셈이다. 가죽표지에 싸인 두툼한 노트에는 '가문의 역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구성원들은 모두 자부심이 넘친다. 사업을 돕는 직원들과 가사를 돕는 하인들까지도 모두 하나같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다. 쇠퇴의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덴브로크 가문의 가훈은 이렇다.

 

<나의 아들아, 낮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밤에는 조용히 쉴 수 있도록 해라.>

 

그로부터 6년 후 안토아네트 노부인이 사망하자 요한 부덴브로크(1세)도 급격히 몸이 쇠약해져 사업에서 손을 뗀 후 1842년에 사망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부덴브로크 영사는 현명하고 활동적인 장남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16세의 어린 나이에 회사일에 참여시킨다. 영사의 큰 딸인 토니는 고상한 척하나 허영심이 강하고, 셋째인 크리스찬은 끈질기지 못하고 어딘가 경솔하다. 막내딸인 클라라는 진지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 모두가 애정 어린 가족애로 결속된 데다가 풍족한 환경에서 별 탈 없이 자라난다. 뤼벡 시내에서 경쟁할 만한 새로운 신흥 가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지나치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토니는 '교육'을 위해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훗날까지 인연을 이어갈 귀족 가문의 귀엽고 아리따운 소녀들을 여럿 사귄다.

 

토니가 기숙학교를 마치고 다시 대저택으로 돌아온 어느 날, 집안에 낯선 손님이 명함을 들고 찾아온다. 부덴브로크 가문에 첫 번째 충격을 가할 인물인 그 사나이의 이름은 그륀리히였다. 그는 어딘가 마뜩찮은 언행으로 토니의 눈밖에 나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 적잖은 호감을 얻고 돌아간다. 잦은 방문 끝에 그는 토니에게 청혼하기에 이르지만 토니는 언감생심이어서 결단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아예 드러눕는다. 심신이 쇠약해진 끝에 가족들의 여름 휴양지인 트라베뮌데로 홀로 요양을 떠나고, 한적한 바닷가 시골집에서 묵던 그녀는 진보적인 의대생 모르텐을 만나 첫사랑을 느끼고 행복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집요한 성격의 그륀리히가 시골까지 찾아와 둘 사이에 끼어 들어 훼방을 놓고, 끈질긴 청혼 공작 끝에 토니는 마지 못해 함부르크 사업가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스무 살에 함부르크로 시집을 간 토니는 딸 에리카를 낳고 행복해 하지만 어딘지 공허롭다. 머잖아 그륀리히가 오랫동안 저질러온 '분식회계'가 들통나고 파산위기에 몰린 그는 장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부덴브로크 영사(2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딸과 사위를 도와주려고 '그만한 금액을 빼내면 회사도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문제였다. 여기서 부덴브로크 가문의 딸 토니가 아버지 앞에서 보여준 단호한 모습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좋아요! 됐어요! 절대 안 돼요!」그녀는 그륀리히에 대한 혐오감보다 <회사>라는 그 한마디에 훨씬 더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빠까지도 파산하려고 그러세요? 됐어요! 절대 안 돼요!」 그륀리히는 장인에게 애원하고 나중엔 협박까지 하지만 부덴브로크 영사는 꿈쩍도 않는다. 사위와 냉정히 결별한 그는 딸과 손녀딸 에리카를 데리고 뤼벡으로 되돌아가고, 그륀리히는 이내 파산하고 만다. 사위가 잔뜩 기대했던 장인한테 들었던 말은 이랬다.「지불능력을 과시한답시고 돈을 인근에 있는 하수구에 던져 넣을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청혼 단계에서 세밀하게 진행되었던 그륀리히에 대한 '신용도 조사' 마저도 조작된 것이었음은 나중에 밝혀졌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은 장남 토마스는 모방하기 힘든 근면함과 정확하고 빈틈없는 일처리로 부덴브로크 상사의 경영을 맡아 능숙하게 대처한다. 다만 차츰 성장할수록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경거망동하는 동생 크리스찬이 늘 말썽이었다. 동생을 회사 일에도 참여시켜 보지만 일처리가 너무나 미숙하고 부실하여 형과 갈등만 일으키다가 끝내 회사에서 쫓겨난다. 크리스찬은 이때부터 어느 한 군데 진득하니 적을 두지 못하고 평생을 부초처럼 떠돌며 생활한다. 멩 가의 저택에는 바깥 생활에 지쳤을 때만 잠깐씩 되돌아올 뿐이다. 

 

돌싱녀가 된 토니는 친정으로 되돌아온 이후 한참 동안이나 <과거사> 때문에 침울해 하지만, 이내 특유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저 불운했을 뿐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사기꾼 남편 그륀리히'를 들먹이고 욕을 하고 다닌다. 그러는 사이에 기숙학교 동창생이던 귀족 소녀들은 하나둘씩 명문가 귀족 집안으로 보기 좋게 시집을 가면서 토니를 자극한다.

 

1855년에는 요한 부덴브로크(2세)는 지나친 긴장으로 몸이 병약해져 어느날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만다. 이듬해에는 크리스찬 부덴브로크가 8년 만에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온다. 그는 가족들이 기대했던 방향보다 훨씬 더 나쁜 쪽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반면, 젊은 나이에 커다란 무역 상사의 대표가 된 토마스는 어느새 진지한 위엄이 얼굴에 배어 들고 머잖아 <네덜란드 영사>의 직함까지 얻는다. 두 형제 사이의 성장 곡선이 완전히 정반대로 향한 지 오래지만 더이상 서로 용인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두 형제는 서로에 대해 잔뜩 쌓인 악감정들을 쏟아낸다. 다툼 끝에 퍼부운 막말이 서로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한 끝에 두 형제는 다시는 안 볼 사이처럼 멀어진다. 이때 그들이 치고받은 대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표현도 빠지지 않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

 

사업차 암스테르담에 체류중이던 토마스로부터 어느날 '열의에 찬 편지'가 영사 부인에게 날아든다. 기나긴 편지에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기쁨으로 가득했다. 상대는 마침 여동생 토니의 기숙학교 동창생인 게르다 아놀트선이었다. 그녀는 진품 스트라디바리를 켜는 부유한 음악가 집안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훌륭한 가문, 탁월한 미모, 많은 지참금, 예술가라는 고상한 이미지끼지 어느 하나라도 만족스럽지 않은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내 양가 가족들끼리 만나고 약혼과 결혼이 부유한 가문끼리의 혼사답게 화려하게 치러졌다. 뤼벡 시내에선 이구동성으로「극상이야」라는 소문이 쫙 퍼져나갔다. 그러나 훗날 밝혀지게 되지만 토마스에게 있어서나 부덴브로크 가문에게 있어서나 화려한 미모를 갖춘 여류 음악가와의 결혼이야말로 '명백한 몰락 징후의 시작'이었다.

 

토니는 어느 덧 30줄에 접어 들어 다시 '새로운 결혼'과 '화려한 부활'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대로 딸만 키우며 홀로 지내기엔 인생 자체가 너무 따분한 데다가 자신은 여전히 미모와 자신감을 조금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문에 오점으로 남긴 얼룩도 어서 말끔히 지우고 싶었다. 때마침 양조장 사장한테 시집을 간 동창생으로부터 '꼭 한 번 뮌헨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그녀는 열 일 제쳐두고 그곳으로 날라간다. 거기서 그는 외양은 그다지 볼품 없지만 돈깨나 있어 보이는 홉 무역상 페르마네더 씨를 알게 된다. 머잖아 '뮌헨에서의 행복한 재혼 생활'에 재빨리 뛰어든 그녀에게 남부 독일 생활은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못내 어색했다. 그러나 이제 막 새출발한 만큼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녀는 무진 애를 쓰며 살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으로부터 이미 온갖 험악한 말도 들었던 터였는데도 말이다. 가령,「입 닥치고 가만 있지 못해!」등등.

 

남편은 결혼 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사업체를 정리하고 '집세'만 받아 챙기는 한량으로 변신했다! 억장이 다 무너졌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허구헌 날 단골 호프집에서 카드놀이나 하고 매번 만취한 상태로 밤늦게 귀가하던 남편과 그녀는 마침내 어느 날 오밤중에 대판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불행한 사건과 마주했다. 그날 밤 남편으로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폭언까지 들은 토니는 쌓인 불만과 암담한 미래와도 영영 결별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밤새 짐을 꾸리고 새벽에 득달같이 딸을 깨워 서둘러 친정으로 돌아오고 만다.

 

두 번째로 친정으로 되돌아온 딸과 외손녀를 영사 부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오빠인 토마스는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남편의 잘못에 대해 펄펄 뛰고 성을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소해하면서 그와 인간적으로 좀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었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나중엔 또다시 가문에 먹칠을 할 셈이냐는 심한 말까지 내뱉고 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토니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토마스! 추문이라고? 내 인격에 먹칠을 당하는 치욕적인 일을 당했는데도 추문을 일으키지 말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게 오빠로서 할 말이야? 그래, 이런 질문을 내가 꼭 해야겠느냐 말이야! 체면과 사리분별이 좋은 것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톰. 나도 오빠만큼은 인생을 알고 있어. 추문을 두려워하는 곳에는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야! 바보 멍청이에 불과한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녀는 도대체 남편한테 무슨 험한 꼴을 당했던 것일까. 만취한 상태로 오밤중에 귀가한 남편은 집안의 얼굴 반반한 요리사 처녀와 '불륜의 레슬링'을 벌였다. 잠결에 깨어나 현장까지 목도한 토니는 격분해서 남편과 극언을 퍼부우며 싸운 후에 거실 소파에서 자려고 방을 나오다가 그만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는 남편의 폭언 한마디에 모든 게 끝장났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엄청난 말'을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막노동자나 개한테도 퍼부울 수 없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남에게 옮길 수 있단 말인가,(토마스 만은 짖굿게도 수십 쪽이 지나서야 토니가 들었던 폭언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알려 주지만 나는 토니를 위해서라도 그 말을 여기에 차마 옮기지 못하겠다! 궁금한 독자들은 책을 직접 읽는 수밖에.)

 

두 번째 결혼에서도 실패했다고 좌절할 토니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점점 더 그륀리히를 닮아 가는 에리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다. 마침내 교양은 없어 보이지만 우직하고 돈 잘 번다고 소문난 화재 보험 회사 사장 바인센크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그렇지만 믿음직했던 사위는 어느 날 갑자기 횡령죄로 기소되고, 몇 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서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니의 세 번째 결혼 생활'도 그렇게 파탄난 셈이었다.

 

토마스와 게르다 이놀트선 사이에는 병약한 기질의 요한 부덴브로크가 태어난다. 산모까지도 극도로 위험한 난산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토마스는 시의원에 선출되고 어부 골목에 화려한 새 집을 지어 이사한다. 회사는 창사 100주년을 맞아 뤼벡 시내가 들석거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지만 어린 하노에게는 그저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하게만 비친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생활하며 집안의 어른역을 도맡았던 영사 부인도 마침내 기나긴 사투 끝에 눈을 감고, 유산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상속 과정'에서 가문 밖으로 '유출'된다. 부덴브로크 상사의 사업은 예전처럼 좋은 수익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매출은 정체를 넘어 차츰 부진으로 빠져든다. 마침내 멩 가의 대저택마저 신흥 가문으로 떠오른 하겐슈트룀한테 '억울한 값'에 넘어간다. 크리스찬은 클럽이나 들락거리다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식을 둘씩이나 둔 과부 알리네 푸보겔과 결혼하지만, 도리어 그녀는 크리스찬의 정신 질환을 이유로 정신 병원에 수용시키고 만다.

 

시의원 토마스는 신체적으로도 병약하고 정신적으로도 음악에나 빠져드는 심약한 아들이 갈수록 걱정이다. 사업 부진, 음악 속에서만 살고 바깥 세계와는 소원하게 지내는 아내, 사업가의 자질은 찾아보기도 힘든 아들 등으로 갈수록 걱정과 괴로움에 번민하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어느 날 격심한 치통 때문에 이를 악다물고 치과를 찾아간 끝에 수술을 받지만 치료가 잘못되는 바람에 도리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정신을 잃고 길거리에 처박혀 쓰러지는 바람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는 평생 동안 몸에 먼지 하나 안 묻혔지 …… 아, 마지막을 그런 꼴로 장식해야 한다는 것은 치욕이요, 수치야!

 

졸지에 미망인이 된 게르다가 시누이이자 동창생인 토니에게 한 말이 그랬다. 그로부터 2년 후 어린 하노는 열네 살의 나이에 티푸스로 죽고, 부덴브로크 상사는 마침내 문을 닫는다. 남편과 사별한 뒤로 어부 골목에 새로 지었던 집마저 처분하고 아들과 함께 아답한 집으로 새로 이사해 살던 미망인 게르다는 이제 아들마저 잃자 홀로 아버지가 사는 암스테르담으로 쓸쓸히 떠난다.

 

부덴브로크 일가의 몰락은 경제적 실패 때문이라기 보다는 병약한 하노의 죽음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더 멀게는 바이올리니스트와의 결혼이 몰락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가문의 몰락의 원인을 길고 짧은 다양한 연원에서 찾는데, 대표적인 것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약화된 시민적 경향'과 '후손들에게서 뚜렷이 나타난 바다와 종교와 음악에 심취하는 경향'들이다. 이런 성향들이 '몰락에의 의지'의 표출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작가가 니체와 쇼펜하우어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영향이다. 오랫동안 부덴브로크 가문 사람들에겐 '음악'에는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하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그 성질상 도취와 망아, 몰락에의 욕구와 방종에 다름아니었고, 현실보다 음악으로의 도피 자체가 '일상적인 시민적 의무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였다.

 

무한정 향유하고 이용하면서 절제를 잃고 끊임없이 갈증을 호소하는 가운데 무언가 방탕한 요소가 나타났다. 그리고 탐욕 속에서 무언가 냉소적인 절망감과 아울러 열락과 몰락에의 의지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최후의 감미로움까지 빨아들임으로써 기진맥진하고 구역질과 넌더리가 나게 되었다. 급기야는 모든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후 맥이 풀려 오랫동안 나지막한 소리로 단조의 아르페지오로 졸졸 흘러갔다. 그러다가 한 음이 솟아올라 장조로 녹아내리더니 슬픈 듯 머뭇거리다가 소멸해 버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gkim 2017-08-1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oren님.그의 형인 하인리히만의 ‘충복‘이나 ‘작은 도시‘보셨으면 독후감 올려 주심 안될까요?

oren 2017-08-13 00:08   좋아요 0 | URL
하인리히 만도 뛰어난 작가라는 건 알지만 <충복>이나 <작은 도시>는 제목조차 금시초문이네요. 토마스 만의 작품도 이번이 처음이고요. 진작부터 읽고 싶었던 『마의 산』도 이제사 읽기 시작했는데, 은근히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서 왠지 푹 빠져들 것 같은 예감도 드네요.^^

bgkim 2017-08-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그러셨군요.절판된지 오래라 저도 몇년 전에 겨우 헌책으로 구해놓고 읽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네요.oren님!마의산 다 보심 꼭 독후감올리세요.많이 궁금해요.시간 나심 요셉과 그의형제들도 보시길 감히 추천해요.무더웠던 이번여름 수고하셨어요.

oren 2017-08-13 14:52   좋아요 0 | URL
『마의 산』도 읽고 나면 독후감을 남겨보겠습니다. 불끈.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동네 도서관에 가서 몇십 분 동안 살펴봤더랬습니다. 토마스 만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단연 ‘압도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작이더군요. 과연 저도 그 책을 읽을 날이 있을까 잘은 모르겠는데 하여튼 bgkim 님께서 추천해 주시니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bgkim 2017-08-1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응원 할께요.

oren 2017-08-13 14:59   좋아요 0 | URL
네.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모든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다."

 - 밀란 쿤데라

 

 * * *

 

소설을 다시 읽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오래 사귄 친구를 다시 만나는 반가움과 닮은 점도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품이든 감동깊게 읽고 나면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느새 친구처럼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친구에 대한 '우정'부터 앞세우게 되고, 쓸데없는 '경계심' 따위는 전혀 품지 않게 된다. 그 친구의 성격과 마음 씀씀이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그를 의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여태까지는 소설 작품을 재독한 경험이 거의 없다. 내가 읽었던 어떤 책에 의하면, 어떤 소설가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무려 3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나는 그 소설을 며칠 전에 겨우 끝냈는데, 언제 다시 읽을지는 아무런 '기약'이 없다. 그 소설이 재미가 없어서는 물론 아니다. 소설 하나를 30번씩이나 읽는 대신 다른 책들로 서둘러 발길을 옮기고 싶은 생각이 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반복 독서'의 즐거움을 영영 무시할 수는 없다. 마음에 드는 친구를 어렵사리 사귄 경우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 친구를 한사코 제쳐 두고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무던히 애쓸 필요가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친숙한 친구를 다시 만나기를 계속 주저한다면 그건 어쩐지 이상한 얘기로 들릴 게 틀림업다.

 

오랜만에 돈키호테를 다시 펼쳤더니 내가 궁금해서 찾아 읽은 대목의 뒷부분이 몹시 궁금해졌다. 마치 친한 친구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얘기를 절반쯤 듣다가 만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다시 찾아 읽은 돈키호테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여전히 즐겁기만 하다.

 

자신의 서재가 '엄숙한 검열'을 당하고 난 뒤에 돈키호테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반적인(?) 독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의 돈키호테는 그런 상황을 아주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기 싫을 뿐 아니라, 일부러라도 그런 상황 속으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소설의 원문'과 '내멋대로 붙인 주석'을 한데 뒤섞어서 적었다. PC 화면에서는 박스와 색깔로 뚜렷이 구분되나, 북플로 읽는 분들은 그런 구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니 가급적 'PC버전'으로 전환해서 보시면 좋겠다.)

 

그날 밤 가정부는 집과 마당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 중에는 서고에 영원히 보관되어야 할 책들도 있었지만 검사자의 태만과 책의 운명이 이를 허락지 않았으니, 죄인들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곤욕을 치른다는 속담이 이로써 증명되었다.

 

돈키호테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부와 이발사가 내린 처방들 중 하나는 서재를 벽으로 몽땅 봉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 책을 못 찾게 하고 ㅡ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ㅡ 그에게는 마법사가 책과 서재를 비롯한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 일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틀 뒤 돈키호테가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있던 곳에 서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저리 찾아 헤매야 했다. 그는 문이 있던 곳에 가서 두 손으로 문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말 한마디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가정부에게 자기 책을 넣어 둔 서재가 어느 편에 있었는지 물었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충분히 들었던 가정부는 그에게 대답했다.

 

「무슨 서재를 찾으시는데요, 나리? 이 집에는 이제 서재도 책도 없어요. 그놈의 악마가 몽땅 가져가 버렸지 뭐예요.」 

 

「악마가 아니었어요.」조카딸이 말했다. 「외삼촌이 집을 나가신 후 어느 날 밤 한 마법사가 구름 위로 와서 자기가 타고 온 뱀에서 내리더니 서재로 들어갔어요. 그 안에서 뭘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잠시 뒤 그가 지붕을 타고 날아가자 집이 온통 연기에 휩싸이더라고요. 무슨 일을 했는지 가보니 책도 서재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나 아주머니나 생각나는 거라곤 그 사악한 늙은이가 떠날 때 큰 소리로 한 말뿐이에요. 자기는 그 책들과 서재 주인인에게 남모르는 적의를 품고 있어 이 집에 해코지를 한 것이니 그 결과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자기 이름이 현자 무냐톤이라고 했지요.」

 

「프리스톤116이라고 했을 게다.」돈키호테가 말했다.

 

태연자약한 돈키호테의 대답이 과연 걸작이다. 조카딸의 '지어낸 이야기'에 도리어 한 술 더 뜨니 말이다.

 

(번역자의 주석)

116 『돈 벨리아니스』가상의 원저자는 현자이자 마법사인 프리스톤이다. 앞으로 보게 될 제9장에서 『돈키호테』의 저자를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법이다.

 

 

「프리스톤이라고 했는지 프리톤이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름이 <톤>으로 끝나는 것만은 알아요.」 가정부가 말했다.

 

「맞아.」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자는 영리한 마법사로 내 막강한 적이지.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내가 어느 때고 와서 자기가 아끼는 기사와 멋진 결투를 펼치리라는 걸 그는 마술과 학문으로 이미 알고 있지. 놈이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내가 그 기사를 이길 거라는 것도 말이야. 그래서 녀석은 나에게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하려고 드는 거야. 하지만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을 그놈이 거역하거나 피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걸 누가 의심하겠어요?」 조카딸이 말했다. 「하지만 삼촌, 또 누가 삼촌을 그런 싸움에 끼어들게 하겠어요? 불가능한 일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지 마시고 집에 편시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양털 깍으러 갔다가 도리어 털 깍이고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걸 모르세요?

 

「얘야.」 돈키호테가 말했다. 「넌 정말 뭘 모르는구나! 누구든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려는 놈이 있다면, 그 전에 내가 그놈의 수염을 죄다 뽑아 버리고 말 테다.」

 

그가 화를 낼 조짐을 보이자 두 여자는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기로 했다.

 

『돈키호테』를 읽는 또다른 재미 한 가지는 기가 막힌 옛 속담들을 실컷 맛보는 데 있다. 산초는 가히 '속담의 제왕'이라고 할 정도로, 입만 열었다 하면 배꼽을 잡는 속담을 쏟아낸다. '속담'에 그른 말이 없듯이, 산초가 속담을 섞어 쏟아내는 말들도 매번 지극히 이치에 맞는 말들뿐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보름 동안 아주 조용히 집에 있었다. 이전과 같은 정신 나간 짓을 되풀이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자기의 두 친구, 즉 신부와 이발사와 아주 재미있는 대화를 하며 보냈다. 그는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편력 기사들이며 편력 기사의 부활은 자신으로 인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신부는 그의 주장을 반박도 했다가 어떤 때는 수긍도 했으니, 그가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돈키호테와 내내 불화만 계속 되었을 것이다.(118∼120쪽) 

 

 - 『돈키호테 1』, <7. 우리의 착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이렇게 해서 '돈키호테의 서재'는 통째로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뒤탈도 남기지 않고 무사히 수습된다. 이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돈키호테가 다시 '편력 기사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는 대목이다. 바로 여기서 '서양 문학의 역사상 불멸의 인물'이 등장하니 그가 바로 '산초 판사'이다. 이 대목을 다시 만나는 건 언제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들여다 보는 듯한 짜릿한 흥분을 동반한다. 다른 분들도 과연 그럴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말이다.

 

이 기간 동안 돈키호테는 이웃에 사는 착한 ㅡ 이러한 표현을 가난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다면 말이다 ㅡ 그러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한 농부에게 간청했다. 돈키호테의 간절한 부탁과 설득과 약속으로 결국 이 가엾은 자는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돈키호테가 그에게 한 여러 가지 약속들 중 하나는, 만약 그가 기꺼이 자기를 따라나서 준다면 모험으로 아무리 못해도 어떤 섬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섬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약속에 끌려 산초 판사는 ㅡ 이것이 그의 이름인데 ㅡ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자기 이웃의 종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다음 돈키호테는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팔고 어떤 것은 저당 잡히며 모든 것을 헐값에 처분하여 적지 않은 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친구에게 방패 하나를 빌리고 부서진 투구도 최대한 잘 손질했다. …… 모든 준비가 끝나자 산초 판사는 처자식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돈키호테는 가정부와 조카딸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 얼마나 걸었던지 새벽녘이 되었을 때에는 누가 그들을 찾아 뒤쫓아 온다 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소설『돈키호테』는 이야기 전개 속도가 놀랄 만큼 경쾌하다. '산초'를 만나고 '정든 집'을 떠나는 대목이 이토록 간결하다. 플로베르나 톨스토이, 혹은 토마스 만이었다면 족히 여러 페이지로 늘려 놓았을 게 틀림없다.

 

산초 판사는 자루와 술통을 당나귀에 매달고 그 위에 앉아서 주인이 약속한 섬의 통치자가 되리라는 강한 희망에 사로잡힌 채 족장처럼 우쭐대며 가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처음 길을 떠났을 때의 그 방향과 그 길로 우연히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바로 몬티엘 들판으로,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아침나절이라 햇살이 비스듬하고 뜨겁지 않아 그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산초 판사가 주인에게 말했다.

 

「편력 기사 나리, 제게 약속한 섬 이야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요. 아무리 큰 섬이라도 전 문제없이 다스릴 수 있거든요.」(120∼122쪽)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와 모험을 함께 하는 동안 '섬 이야기'를 수백 번도 더 끄집어 낸다.(정말?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다. 그만큼 자주 꺼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돈키호테와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돈키호테와 함께 '편력 기사의 종자'로 따라다니며 온갖 곤욕을 다 치르더라도 결코 '동행'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 이유도 오로지 '섬을 다스릴 부푼 희망' 때문인데, 나중에 진짜로 그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꿈이 헛되다는 걸 절감하고 도리어 '평범했던 옛날'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한다.(나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건 '산초의 후회'가 애시당초 작가의 구상에는 없었다는 점이다.『돈키호테 1』이 너무나 빅히트를 치는 바람에 수많은 짝퉁 소설이 나오자 세르반테스는 하는 수 없이 속편 격인『돈키호테 2』를 썼는데, 이 이야기가 『돈키호테 1』과 너무나 긴밀하게 엮여 있어서 다시 한번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돈키호테 1』은 그의 나이 58세 때 출판되었고, 『돈키호테 2』는 그의 나이 68세때 출판되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는 우리가 갈망하는 '거창한 꿈'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황된 것인지를 산초의 '섬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 생생히 보여준다. 『돈키호테 1』의 초반부에서 시작된 '섬 이야기'가 진짜로 실현되는 장면은『돈키호테 2』에서도 절반이 넘어서야 등장하며 '소설의 클라이맥스'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http://blog.aladin.co.kr/oren/7329286

 

 - 『돈키호테 1』, <7. 우리의 착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 19쪽에 나오는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

 

이렇게 시작된 '두 번째 모험'에서 곧바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설『돈키호테』를 상징하는 그 유명한 <풍차 모험> 장면이다.

 

이런 말을 주거니 맏거니 하며 가고 있던 이때 들판에 서 있는 풍차 30∼40개를 발견하자, 돈키호테는 즉시 종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행운이 우리 일을 마련해 주는구나. 친구 산초 판사여, 저기를 좀 보게! 서른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인들이 있네. 나는 싸워 저놈들을 몰살시킬 것이야. 그 전리품으로 부자가 될 걸세.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싸움이며, 사악한 씨를 이 땅에서 없앰으로써 하느님께 크게 봉사하는 일인 게지.」

 

「거인들이라뇨?」 산초 판사가 물었다.

 

「저기에 있는 저놈들 말이네.」 주인은 대답했다. 「기다란 팔을 가진 놈들 말이야. 2레과나 되는 팔을 가진 놈들도 있군.」

  

「나리.」 산초가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닙니다요. 풍차입니다요. 팔로 보신 건 날개인데, 바람의 힘으로 돌아서 방아를 움직이죠」

 

「보아하니 …….」 돈키호테가 말했다. 자네는 이런 모험을 도통 모르는 모양이구먼. 저건 거인이야. 겁이 나면 저만치 물러나서 기도나 하게. 그동안 나는 저놈들과 지금껏 보지 못한 맹렬한 싸움을 벌일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돈키호테는 그가 싸우고자 하는 저것들은 절대 거인이 아니며 풍차라는 종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했다. 놈들이 거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종자 산초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가까이 갈 때까지 상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도망치지 마라, 이 비겁하고 천한 자들아! 너희들을 공격하는 사람은 이 기사 한 명뿐이다.」

 

이때 바람이 불어와 풍차의 커다란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돈키호테는 소리쳤다.

 

「비록 네놈들이 저 거인 브라이레오스보다 많은 팔을 휘둘러 댄다 할지라도, 네놈들아, 나한테 혼난 줄 알아라!.」(124∼125쪽)

 

여기서 '초딩 스러운' 질문 하나. 돈키호테는 왜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하고 산초가 그토록 말리는 데도 그리로 돌진해 들어갔을까. 이 질문은 앞서 나온 이야기를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금세 대답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서재'를 없앴던 바로 그 마법사 프리스톤이 '거인을 풍차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돈키호테 1』, <8. 굉장히 무섭고 결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풍차 모험에서 용감한 돈키호테가 행한 멋진 사건과 좋게 기억할 만한 사건들에 대하여>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 21쪽에 나오는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

 

풍차 모험에서 로시난테와 함께 크게 다친 돈키호테는 산초의 '제발 정신 차리라'는 충고를 듣고도 여전히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싸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변화무쌍한 것이네. 내 생각에, 아니 생각이 아니라 진실인데, 나의 서재와 책을 훔쳐 간 그 현인 프리스톤이 승리의 영광을 내게서 앗아 가려고 거인들을 풍차로 둔갑시킨 게야. 내게 품고 있는 그자의 적의가 이 정도란 말일세.

 

두 사람은 하룻밤을 길가에서 묵고 나서 곧장 다음 목적지인 푸에르토 라피세로 길을 떠난다. 거기서도 어떤 부인이 탄 '마차'를 호위하는 듯한 일행들을 공격하는데... 여기서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끊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은, 이 이야기의 작가가 바로 이 순간 이 대목에서 이 싸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끝맺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가 적어 온 것들 외에는 더 이상 돈키호테의 무훈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쓴 제2의 작가127 또한, 그토록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망각의 법칙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라만차의 천재들이 이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아 이 유명한 기사를 다루는 그 어떤 서류도 책상이나 문서 보관실에 남겨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희망을 갖고 이 재미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내는 일을 단념하지 않았다. 다행히 하늘이 그를 도왔는지, 제2부에서 보게 될 바와 같은 결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134쪽)

 

 (번역자의 주석)

127 세르반테스 자신을 가리킨다. 다음 장에서 알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작가는 시데 아메테 베냉헬리라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 『돈키호테 1』, <8. 굉장히 무섭고 결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풍차 모험에서 용감한 돈키호테가 행한 멋진 사건과 좋게 기억할 만한 사건들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돈키호테 1』의 총 4부 가운데 <제1부>가 묘하게(?) 끝난다. <제2부>의 시작 또한 '소설 『돈키호테』를 쓴 작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작가가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소설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법이 현란하기 그지 없다. 르네 지라르가 "돈키호테』이후에 쓰여진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거나 그 일부를 쓴 것이다"라는 지적이 괜한 말이 아니었음을 이런 대목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제1부는 용감한 비스카야인과 유명한 돈키호테가 서슬 퍼런 칼을 높이 쳐들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 적어도 명중하기만 하면 서로 석류처럼 갈라놓을 듯 무서운 기세로 싸우던 대목에서 끝났다. 정말 궁금한 대목에서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끊어 버리고도 작가는 나머지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지 정보조차 주지 않았다.

 

이것은 나128를 무척 슬프게 했다. 적은 분량이나마 앞부분을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는데, 내가 보기에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그 재미있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을 길이 없으니, 앞선 즐거움이 오히려 불쾌함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기사의 놀랄 만한 공훈을 기록해 둔 현자가 없었다는 것이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모든 관슴에서 어긋나는 일로 보였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작가 특유의 '매혹적인 이야기 전달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옛날 옛적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린 손주들에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다가도 갑자기 그 이야기를 툭~ 끊어버리는 일은 틀림없이 자주 있었으리라, '청자나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수법'이야말로 화자에게 더욱 매달리게 만드는 '작가의 고유한 능력'이 아닐까. 거기에 덧붙은 능청스러움과 익살은 덤이고.

 

(번역자의 주석)

128 앞서 세르반테스는 자기는 이 작품의 제2의 작가이자 계부라 했는데 지금은 작품의 화자로 등장하고 있다.

 

(중략)

 

한편으로는 돈키호테가 읽은 책 가운데 『질투의 환멸』이니, 『에나레스의 요정과 목동』과 같은 최신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도 최근에 일어난 일이며, 따라서 아직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더랃도 그 마을 사람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유명한 에스파냐의 용사이자 라만차 기사의 빛이요 거울인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전 생애와 기적들을 반드시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어지럽혔다. 돈키호테야말로 이 재난 많은 시대에 편력 기사의 임무와 그 수행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를 바로잡고, 과부를 돕고, 채찍을 휘두르고, 말을 타고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다니던 처자들이 어느 비열한 놈이나 촌놈이나 가공할 거인들에게 순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지난날에는 그런 놈들에게 당하는 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80년 동안 단 하루도 남의 지붕 밑에서 자지 않고 어머니가 낳아준 그 상태 그대로 무덤으로 간 처자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멋진 돈키호테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되고 찬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고 나 역시 여기에 들인 노력과 열성을 생각해서라도 이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늘과 우연과 행운이 나를 돕지 않는다면 세상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을 사람은 두 시간 남짓이나마130 누릴 수 있었던 재미와 즐거움을 영원히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책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거창한 모험을 떠나는 돈키호테의 임무라는 것도 자세히 알고 보면 이처럼 '단 두 줄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넘친다.

 

(번역자의 주석)

130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쓰면서 자주 자신의 작품을 낮추는 겸손함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을 쓴 후 2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놓는 책이라 그러한 듯하다.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 뭉치들을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역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훌륭하고 더 오래된 다른 언어를 해독해 줄 사람이라 해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운좋게도 한 사나이를 찾아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잡기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책 중간을 펼쳐 보더니 잠깐 읽다가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물었더니 이 책의 여백에 쓴 주석이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좀 읽어 달라고 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읽어 주었다.

  

「내가 말한 주석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솜씨만큼은 라만차를 통들어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 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비단 장수를 제치고 그 소년에게 돈 반(半) 레알을 줘 종이 뭉치와 잡기장을 모조리 사들였다. 만일 소년이 빈틈없는 아이라 내가 얼마나 그 물건들을 원했는이 알았더라면 6레알 이상은 확실히 받아 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어인과 함께 성당의 본당 회랑으로 가서 돈키호테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모조리, 더하거나 뺴는 것 하나 없이 에스파나 말로 고쳐 주면 원하는 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건포도 2아로바와 밀 2파네가로 만족하며 짧은 시일 내에 충실하게 잘 번역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 훌륭한 물건을 손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한 달 보름 조금 더 걸려 전부 번역했다. 다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중략)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약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작가가 아랍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민족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불구대천 원수이기 때문에 마땅히 써야 할 것들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토록 훌륭한 기사를 칭찬하는 데 펜을 더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 칭찬거리를 빠트리고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나쁜 행동에 나쁜 생각이다. 역사가란 사실을 정확하게 그대로 기록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개인의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한이나 편애와 같은 감정으로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이 이야기에 무엇인가 좋은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의 작가인 개 같은 무어인의 책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아무튼 이 이야기의 제2부는 전역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139∼144쪽) 

 

세르반테스는『돈키호테』의 원작자가 아랍 사람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이며, 자신은 그 이야기를 발굴한 제2의 작가라는 설정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의 창'을 마련한다. 이런 방식 말고도 소설『돈키호테』 속에는 돈키호테의 모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 없는 온갖 '액자 소설'이 여럿 끼워져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놀라운 솜씨로 엮어 넣음으로써 세르반테스가 단순히 '이야기'만 잘 지어내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 『돈키호테 1』, <9. 늠름한 비스카야인과 용감한 라만차 사람이 벌인 대단한 싸움의 결말이 나다>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8-09 2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oern님 덕분에 돈키호테의 감상 포인트를 짚고 가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8-09 22:17   좋아요 4 | URL
다시 읽을 때 보았네 /
처음 읽을 때 보지 못한 /
돈키호테와 산초의 다른 모습 /

라로 2017-08-10 15: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고 있는 [기싱의 고백]에서 이런 부분이 니와요. ˝(중략)지나간 일들에 대한 쓸데없는 지식을 내 기억 속에 저장하려고 애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아, 그러니 이제는 죽기 전에 [돈키호테]나 한번 더 읽을까 보다.˝
그런데 그 전에는 이런 부분도 있어요.
˝세르반테스라는 실수투성이의 작가가 자기의 ‘예술‘에 대해 너무 불성실했던 나머지 소설의 한 장에서 산초의 당나귀가 도난 당한 장면을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초가 대플(Dapple)을 타고 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도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이 글을 쓸 때 세르반테스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작가들도 깍아내리지만 결론은 훌륭하다에요.그러니 죽기 전에 돈키호테를 다시 읽을까? 뭐 이러겠죠. 저는 요약본만 읽어서 모르는데 정말 그런 부분이 있나요???ㅎㅎㅎ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방대한 양이라는게 첫번째지만, 그 것을 교정보자니 얼마나 함들겠어요.

oren 2017-08-10 16:38   좋아요 3 | URL
『기싱의 고백』에 『돈키호테』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그런 구절들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기싱의 고백』이 더욱 읽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기싱이 지적한 ‘실수투성이 세르반테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사실 『돈키호테』라는 소설은 처음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이미 ‘완결‘된 작품이었답니다. 말하자면 애초부터 『돈키호테 1』과『돈키호테 2』로 구상된 장편 소설이 아니었다는 얘기죠. 『돈키호테 1』(원제는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출간되자말자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자 숱한 사람들이 ‘속편‘을 갈망했고, 시중엔 <돈키호테 속편>이 실제로 여러 버전으로 유통되었다고 하더군요. 모두가 짝퉁인 셈이었죠. 보다 못한 세르반테스는 70을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돈키호테 2』(원제는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를 써 냈는데, ‘오리지널 속편‘을 갈망하던 독자들의 대환영을 받았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돈키호테 2>는 이미 완결된 『돈키호테 1』과 너무나도 절묘한 연관으로 엮어 있어서, 이제는 『돈키호테 2』가 없으면 소설『돈키호테』라는 작품 자체의 위대성이 떨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거죠. 후편이 나옴으로써 전편과 함께 진정으로 위대한 소설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르반테스가『돈키호테 2』를 쓰면서 『돈키호테 1』과의 긴밀성을 잃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썼던지 ‘서로 상충되는 얘기‘나 ‘엇박자‘ 혹은 ‘햇수나 나이 계산을 잘못 하는 등의 실수‘는 좀체로 발견하기 어려운데, 정작『돈키호테 1』에서는 ‘아주 사소한 실수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이지요. 심지어 등장 인물의 이름도 앞에 나온 것과 한참 뒤에 나온 게 서로 틀리는 경우까지도 종종 있고요. 그런데 그런 실수가 소설의 엄청난 분량에 비해서는 충분히 애교로 봐줄 만큼 사소한 것이어서 조금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기싱의 고백』에 나오는 실수는 분명 황당할 정도로 큰 실수이긴 하지만요. 사실 그것마저도 요절복통으로 웃기면서 온통 실수 투성이인 ‘기사 돈키호테‘에 비한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겠죠.^^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훌륭한 책들은 한 번만 읽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어쨌든 자꾸 생각나고, 적당한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그 책을 다시 펼치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궁극의 리스트』도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는 책'이라는 점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궁극의 리스트』는 '한꺼번에' 읽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총 408쪽이니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두꺼운 책으로 볼 수도 있다. 판형도 제법 클 뿐만 아니라 한 페이지에 박힌 텍스트도 매우 빽빽하기 때문이다.(한 페이지에 41줄씩 두 열로 혹은 세 열로 인쇄되어 있다.)

 

가령, 『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돈키호테』의 한 장은 11쪽 분량의 내용이 통째로 인용되어 있는데도 『궁극의 리스트』에는 똑같은 내용이 단지 3쪽을 살짝 넘길 뿐이다. 그렇다면『돈키호테』의 1부와 2부를 다 합한 1,720쪽 분량도『궁극의 리스트』와 같은 판형에서는 469쪽에 다 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1,720쪽 × 3/11 = 469쪽) 거꾸로 생각하면 『궁극의 리스트』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식으로 판형이 만들어졌다면 장장 1,496쪽으로 늘어날 뻔했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의 매우 간단한 결론 한 가지는 이렇다. 『궁극의 리스트』는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꼭 덧붙일 말도 필요하다. 이 책은 굳이 단번에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단번에 읽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해도 좋지 싶다. 숱한 이름난 고전들에서 나열된 '온갖 목록들'을 그대로 끌어다 옮겨 놓은 책을 도대체 무슨 수로 단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통독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재미로 그 책을 그런 식으로 읽으려고 애쓰는지를 도리어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게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인데도 왜 이 책은 한번 구경하고 나면 좀처엄 잊혀지지 않고 나중에 언젠가는 다시 그 책을 펼쳐보게 될까.

 

그 이유를 나는 두 가지 정도로 꼽고 싶다.

 

우선 첫째로,『궁극의 리스트』속에 인용된 책들을 우리가 미처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용된 책을 새롭게 읽고 나면 '옛날엔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 책과 책 속 문장들이 『궁극의 리스트』에서 어떻게 다시 '친숙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는지를 문득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궁극의 리스트』속에 담긴 텍스트를 많이 알고 있는 독자들은 그만큼 '움베르토 에코도 인정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나도 처음엔 이 책을 펼쳐 보고 내가 이미 읽은 책 몇 권을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반겼었다. 이 책의 특징은 우리가 한번쯤은 익히 제목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책들에서 골라 뽑은 '인용문'들로 가득하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에코'가 이쪽 저쪽에서 가끔씩 울리는 수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다른 책 속에 담긴 각종 목록에 관한 대목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책으로 꾸민 아주 독특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이 책의 256쪽과 257쪽을 한번 살펴 보자.

 

 - 『궁극의 리스트』 256쪽

 

 

 - 『궁극의 리스트』 257쪽

 

이런 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보니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늘상 둘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궁극의 리스트』에서 다시 만나는 텍스트가 몹시 반갑거나 아니면 그저 뜬금없이 생소하거나. 그나마 방금 우리가 살펴본 라블레의 책에서 인용된 대목들은 하나같이 '재미'라도 있어 다행이지만, 내가 미처 읽어 보지도 못한 책에서 인용된 '복잡하기 그지 없는 목록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가 직접 정리했다는 '천사들의 목록'을 한번 살펴보자. 도대체 이걸 무슨 '재미'로 다 읽을 것이며, 이와 닮은 온갖 목록들을 무슨 수로 한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웬만하면 책 한 권 붙잡으면 끝까지 읽고 마는 성격인데, 이 책은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서 저만치 밀쳐 두고 지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책들을 읽다가 '유난히 기나긴 목록'이 나열되는 대목을 만나기만 하면 '어? 이거 혹시 '궁극의 리스트'에도 담긴 목록이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나에게는 아주 가끔씩 들춰 보는 아주 이상한 책이 되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숱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책들은 얼마나 될까 하고 꼽아 보니 대충 다음과 같았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단테, 『신곡』

라블레,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괴테, 『파우스트』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이렇게 '이미 읽은 책' 속에 나오는 문장들을 고스란히 『궁극의 리스트』속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몹시 기쁘다. 그런데 아주 유명한 책들이지만 내가 여태껏 읽지 못했기 때문에『궁극의 리스트』에 담겨 있어도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멀뚱멀뚱 그저 눈만 굴리다가 다른 페이지로 슬쩍 건너 뛸 수밖에 없는 책들을 만나는 건 좀 괴롭다.

 

이번 기회에 그런 책들의 목록을 몇 권만 적어 본다. 많이 적을수록 창피하니까. 어쨌든 여태껏 못 읽은 이런 책들을 언젠가 읽고 나면 나는 다시금 『궁극의 리스트』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목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었이었는지를 움베르토 에코의 설명을 통해 다시금 찬찬히 되짚어 볼 생각이다. 어쨌든 『궁극의 리스트』는 그런 식으로 읽어야 할 책이니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바우돌리노』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우주 만화』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전집』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제 『궁극의 리스트』를 읽는 '두 번째' 재미를 얘기할 차례다.(첫 번째 이유와는 이미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는 여러 훌륭한 그림들이 아주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도 '훌륭한 목록들'이 숨어 있다는 게 움베르토 에코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독자들이라도 이 책에 담긴 훌륭하고, 놀랍고, 이색적이고, 인상적인 여러 그림들을 보고 나면 틀림없이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림에는 영 까막눈이어서 모르는 화가와 그림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화가들이 가끔씩은 눈에 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달리, 귀스타브 도레, 외젠 들라크루아, 알브레히트 뒤러, 르네 마그리트, 귀스타브 모로, 얀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 엔디 워홀 등.

 

여기까지가『궁극의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후부터 다룰 이야기는『돈키호테』에 얽힌 이야기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돈키호테』로 넘어가는 거냐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최근에 '몇십 권의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스트는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궁극의 리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지렛대로 삼아 글을 하나 썼다. 뜻밖의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난 뒤에 나는 대대적으로 책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누워 지냈던 책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책장의 지붕에 쌓인 먼지까지 털어내고 '책장 지붕과 방의 천장 사이의 틈'까지 책장으로 활용했다. 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내 방에서 누워 지내는 책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곧이어 난생 처음으로 떠나보내는 책들을 위해 '이별의 정'을 담은 고별사를 써봤다. 이번에도 반응이 뜨거웠다. 여름 날씨만큼이나. 수많은 댓글에 대해 답글을 다는 동안에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돈키호테의 서재'가 불쑥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쓰러져 잠든 사이에 자신이 아끼던 책들을 대부분 잃고 말았던 불쌍한 사람이었다. 중세에 대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푹 빠져 지내며 책을 낙으로 삼던 그에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책' 때문에 '돈키호테 삼촌'이 너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조카딸이 신부에게 '서재 검열'을 요청했고, 돈키호테의 책들은 대부분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에 '화형'에 처해지는 대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돈키호테가 갑자기 내 머리속에 떠올라 나는 얼른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었다.(서재를 정리하고 나니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저 밑에 깔려 지내다가 마침내 두 발로 단단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궁극의 리스트』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놀랍게도 '돈키호테의 서재에서 퇴출된 책들에 관한 목록'이 고스란히 전부 인용되어 있었다. 분량은 대략 3쪽이 살짝 넘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에서 무려 11쪽에 이르는 분량이 단 세 쪽에 다 담기다니, 『궁극의 리스트』는 알고 보니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를 압축파일처럼 담아 놓은 책이었다!

 

『궁극의 리스트』에는 심지어 귀스타프 도레의 그림까지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놀랍게도 열린책들에서 별책으로 펴낸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그림까지 보고도 아무 것도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다.

 

귀스타브 도레,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위한 삽화, 파리, 1863년.(385쪽에 담긴 그림)

 

 

『궁극의 리스트』에는 '책'에 관한 그림들도 아주 많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까지도 돈키호테를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서재가 이처럼 신중하게 '검열' 당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책벌레』(부분), 카를 슈피츠베크, 1850년, 개인 소장. (『궁극의 리스트』390쪽에 담긴 그림)

 

접힌 부분 펼치기 ▼

 

움베르토 에코가 『돈키호테』에서 골라 뽑아 자신의 책을 꾸몄던 바로 그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이 대목은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데, '세르반테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해학'에 금세 매료될 만큼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르반테스의 문장들' 속에 틈틈이 '나의 생각'까지 포함시켜 보았다. 이렇게라도 '나만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야 나중에 또 읽어볼 수 있을 테니.

 

돈키호테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신부는 돈키호테의 조카딸에게 그 모든 폐해의 원인이 된 책들이 있는 서재 열쇠를 달라고 했다. 조카딸은 두말없이 그것을 내주었다. 모두들 서재로 들어갔고 가정부도 따라 들어갔다. 서재에는 장정이 아주 잘된 커다란 책이 1백 권도 넘었고 몇 권의 소책자들도 있었다. 가정부는 책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나가더니 곧 성수가 담긴 나무 그릇과 성수 솔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신부님, 이거 받으세요. 이걸 방에 뿌려서 이 책들 속에 있는 그 많은 마술사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내몰아 주세요. 우리가 그들을 세상에서 내쫓고자 했다가 벌을 받아 오히려 마법에 걸리게 되면 큰일 난다니까요.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마녀 사냥'이 유행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러니 당대에 이 소설을 읽었던 독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이런 대화에 공감했으리라.

 

가정부의 순진한 말에 신부는 웃으면서 이발사에게 책들을 한 권씩 집어 달라고 말했다. 그것들 가운데 불에 던지지 않아도 될 책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조카딸이 말했다.「이 책들은 모두 해를 입히는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겨 둘 필요가 없어요. 창밖 마당에 던져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면 좋겠어요. 아니면 뒤뜰로 가지고 가서 모닥불을 피우든지요. 거기서라면 연기가 나도 괜찮으니까요.」

 

가정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두 여자들은 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지만, 신부는 책의 제목조차 훓어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여자들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다고 하는 데서 '책에 대한 돈키호테의 광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녀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독자들 또한 자신들이 '책을 사랑한 댓가로 주위 사람들한테 받았던 핍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때문에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공감을 획득한다.

 

니콜라스 선생이 제일 먼저 그의 손에 건네준 책은 『네 권의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다.

 

「이 책은 불가사의지.」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이 책이 에스파냐에서 출판된 첫 기사소설이라던데, 다른 책들 모두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네. 아주 사악한 분파를 만들어 낸 거짓 교리서인 셈이니 당연히 화형에 처해야겠지.」

 

「안 됩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이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쓰인 기사 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런 책 중에서 유일하게 용서해 줘야 할 겁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스페인 기사소설의 대표작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설책'이기도 하다. 돈 키호테가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살려 두지. 어디 그 옆에 있는 것 좀 보게.」

 

「이것은 ……」이발사가 말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합법적인 아들 『에스플란디안 무용담』이네요.」

 

「그런데 말이지 ……」신부가 받아서 말했다. 「자기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순 없지 않나. 아주머니, 이 책을 받아서 창문으로 마당에 던지시죠. 모닥불을 많이 피워야 할 테니, 이건 그 불쏘시개요.」

 

가정부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라는 대로 했다. 그 알량한 에스플란디안은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조가 아닌 '짝퉁'은 인정할 수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작가적 마인드가 엿보인다. 또한 책 속의 주인공인 '에스플란디안'을 의인화해서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음.」신부가 말했다.

 

「다음은요 …….」이발사가 받았다. 「『아마디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 있는 것은 모두 아마디스 가문의 무용담들 같은데요.」

 

「그렇다면 전부 마당으로 던지게!」신부가 말했다. 「핀티키니에스트라 여왕과 목동 다리넬 그리고 그가 부른 목가들, 아무튼 그 작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추악한 이야기들은 다 태워 버리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도 편력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것들과 함께 불살라 버릴 테니 말일세.

 

「저도 동감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저도요.」조카딸도 거들었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말했다. 「자, 이리들 주세요. 마당으로 가져가게요.」

 

그것들은 상당한 양이어서 그녀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대목에서 가정부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과감한 행동'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친 행동'은 철학자 베르그송이『웃음』에서 지적한 바 대로 '웃음'의 핵심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다. 또한 소설『돈키호테』에 담긴 수많은 '웃음 유발 장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두꺼운 책은 누구의 이야기지?」신부가 물었다.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입니다.」이발사가 대답했다.

 

「이 책의 작가는 …….」신부가 말했다. 「『꽃들의 정원』을 쓴 사람과 같은 인물이지. 아마 이 두 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사실적인지, 다시 말해 어느 것이 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란 어려워. 확실한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무례하게 떠벌리는 이 책들은 마당으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지.

 

「다음 책은 『플로리스마르테 데 이르카니아』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플로리스마르테 님이 거기 계신가?」신부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장 마당으로 가야겠군. 범상치 않은 탄생 일화와 꿈 같은 모험담은 많지만 문체가 멋이 없고 딱딱하단 말씀이야. 아주머니, 다른 것과 함께 마당으로 던져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신부님.」가정부는 신바람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은 『기사 플라티르』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오래된 책이지.」신부가 말했다.「그러나 사면할 이유가 없어. 다른 말 말고 다른 것들과 동행시키세.」

 

그래서 그렇게 처리됐다. 다른 책이 펼쳐졌는데, <십자가의 기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목이 성스러워서 좀 무식해도 용서될 수 있었겠지만 여기 <십자가 뒤에 악마가 있다>는 말이 있거든. 이것도 불 속으로 ……」

 

이발사가 다른 책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건 『기사도의 거울』이네요.」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1564년 작품), 『꽃들의 정원』(1570년 작품), 『기사 플라티르』(1533년 작품), 『기사도의 거울』등은 모두 실재하는 작품들이다.

 

「내가 잘 아는 책이군.」신부가 대꾸했다. 「그 책에는 레이날도스 데 몬탈반이 지난날의 대도둑 카쿠스가 무색할 정도의 대도둑인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열두 용사들, 그리고 진실한 역사가인 튀르팽 등과 함께 일을 벌이지. 사실 나는 이들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자 하고 있었네. 비록 어느 부분에서는 유명한 마데오 보야르도의 창의력을 이어 받았고, 기독교인인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도 여기서 자기 실을 자아냈지만 말일세. 만일 내가 아리오스토와 이곳에서 만나면, 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도 경의를 표할 수가 없지. 그러나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한다면 그를 받들어 모실 거야.」

 

(번역본에 붙은 주석)

마데오 보야르도(1441∼1494).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미완성 서사시 『사랑의 오를란도』는 아리오스토의 시 『광란의 오를란도』의 전편으로 여겨진다.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 이탈리아의 시인.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탈리아 말로 되어 있는데요.」이발사가 말했다.「이해는 못 하겠지만요.」

 

「이해해 봤자 좋을 건 없네.」신부가 대답했다.「에스파냐로 데리고 와서 에스파냐어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그 대장을 용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옮기면서 원래의 가치가 크게 줄어들고 말았단 말일세. 하긴, 시를 다른 말로 옮기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할 거야. 아무리 고심하고 솜씨를 발휘해 봐도 원작에는 미치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이와 같이 프랑스의 기사들을 다룬 책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뚜렷한 방침이 설 때까지 마른 웅덩이에 집어넣어 보존해 두라는 걸세.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와 소위 <론세스 바예스>라는 시들은 예외로 하고 말일세. 이들은 내 손에 들어오는 즉시 아주머니 손으로 넘어가서 가차 없이 불 속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이발사는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신부의 말에 동의하면서 적절한 조치라고 했다. 훌륭한 신앙인에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인 신부가 세상일에 대해 틀린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팔메린 데 올리바』였으며 그 옆에는 『팔메린 데 잉갈라테라』가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신부가 말했다.

 

「이 올리바는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불 속에 집어넣어 재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 잉갈라테라는 유일본이니 소중히 보존해 두도록 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오 왕의 전리품 중에서 발견해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싸워 빼앗았다는 그러한 상자를 이 책을 위해서도 꼭 장만해야 할 걸세. 이 책은 말일세. 이발사 양반,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네. 하나는 작품 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신중한 포르투갈 왕이 이 작품을 썼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 미라구아르다 성에서 일어난 모험담들은 모두 아주 훌륭히 잘 쓰였을 뿐 아니라 기교가 넘치지. 고상하고 명료한 구절들은 아주 정확하고 분별력 있는 그 인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니콜라스 양반, 이 책과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화형에서 제외시키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그냥 없애 버리세.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서 획득한 '보물상자'에 호메로스의 책을 넣어서 보관했다는 일화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소설『돈키호테』속에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들을 통해 세르반테스가 '고전'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대답했다.「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 이름 높은 『돈 벨리아니스』인걸요.」

 

「그 책은 말일세 …….」신부가 말했다.「2, 3, 4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성을 내는 대목이 많이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대황이 필요하다네. <명성의 성>에 관한 이야기 몽땅하고, 더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말도 안 되는 다른 이야기들은 뺴야 마땅하지. 그렇게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들 게야. 고쳐졌을 때야 자비나 정의를 베풀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자네 집에 두고 아무도 읽게 해서는 안 되네.」

 

「그게 좋겠군요.」이발사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기사 소설들을 살피는 일이 힘들 것 같아서 가정부에게 큰 책들은 모두 마당으로 집어 던지라고 했다. 바보나 귀머거리 여자에게 말한 것이 아니며, 아무리 멋있는 최상품의 천을 짜는 일이라 해도 그보다 책 태우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켰으니, 가정부는 한꺼번에 여덞 권을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한 번에 많이 집으려다 보니 그중 한 권이 이발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누구 작품인지 알고자 살펴보니 그것은 『유명한 티란테 엘 블랑코 기사 이야기』였다.

 

「이런!」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여기 백의의 기사 티란테가 있었다니! 이리 줘보게, 친구. 이 책에 빠져 이게 오락의 전부가 된 적도 있었다네. 이 책에는 용감한 기사 돈 키리엘레이손 데 몬탈반과 그의 동생 토마스 데 몬탈반, 그리고 기사 폰세카가 나오고, 용맹한 티란테가 알라노족과 싸운 이야기며 플라세르데미비다 처자의 재치며 과부 레포사다의 연애며 속임수며 자신의 시종 이폴리토를 사랑한 왕후의 이야기도 있다네. 정말이지 친구여, 특히 문체로 보아 이건 세계에서 제일 잘 쓴 책일세. 다른 모든 기사 소설과 달리 이 책에서는 기사들이 먹고, 잠자고 자기 침대에서 죽고, 죽기 전에 유언을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작가는 기사를 갤리선에 평생 집어 넣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들은 하지 않았다네. 이 책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 보게. 그러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렇게 하지요.」이발사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남은 이 작은 책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 책들은 기사 소설이 아닌 것 같네. 시집이군.」신부가 말했다.

 

한 권을 펼쳐 보니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여서, 나머지 것들도 모든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헀다.

 

「이런 종류의 책까지 다른 것들처럼 태울 필요는 없지. 기사 소설들처럼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주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오락물이거든.」

 

「어머, 신부님!」조카딸이 말했다. 「이것도 아까 그 책들처럼 태우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삼촌이 기사병에서 다 나으신 다음 이번에는 그런 책을 읽다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시게 될까 봐 그래요. 그것보다 더 큰일은, 시인이 되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사람들 말로는 그건 낫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힘든 병이라던데요.

 

「이 아가씨 말도 맞는구먼.」신부가 말했다.「우리 친구에게 앞으로 또 일어날지 모르는 곤란한 일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어. 그럼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부터 시작하지. 내 생각에, 이 책은 태우는 대신 현명한 여인 펠리시아 이야기와 마법에 걸린 물 이야기와 시들만 없애고, 산문과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명예쯤은 남겨 두는 게 좋겠어.

 

「다음은 …….」이발사가 말했다.「살라망카 사람이 지은 『라 디아나』속편이라는 것인데, 제목은 같지만 작가가 힐 폴로네요.」

 

「살라망카 사람이 쓴 책은 …….」신부가 말했다. 「마당으로 던져지는 형벌에 처한 것들을 따라가게 하고, 힐 폴로가 쓴 것은 아폴론이 직접 쓴 작품인 양 소중히 보관되어야 하네. 자, 그다음은? 서둘러야겠어, 늦어지고 있어.」

 

(번역본에 붙은 주석)

몬테마요르가 『라 디아나』를 썼는데 1564년 발렌시아에서 두 종류의 속편이 출판됐다. 하나는 살라망카의 의사 알론소 페레스가 쓴 『라 디아나』 속편이고 다른 하나는 발렌시아 사람인 힐 폴로가 쓴 『사랑에 빠진 라 디아나』이다. 후자는 최고의 스페인 목가 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이발사가 또 다른 책을 펼치면서 말했다.「사르데냐의 시인 안토니오 데 로프라조가 지은 『사랑의 운명에 관한 열 권의 책』입니다.」

 

「신부의 명예를 두고 말하지만 …….」신부가 말했다.「아폴론이 아폴론이고, 예술의 신 뮤즈가 뮤즈이며, 시인들이 시인이었던 이래 이 책만큼 재미있으며 그다지 엉터리가 아닌 책은 쓰인 적이 없다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온 이런 종류의 책들 중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말을 할 수 없어. 이리 주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급이라는 피렌체 천으로 된 승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네.」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그것을 받아 따로 놓아두었다.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이베리아의 목동』, 『에나레스의 요정』, 『질투의 환멸』인데요. 」

 

「그것들은 더 볼 필요도 없네.」신부가 말했다. 「아주머니의 저 속세의 팔에 넘겨주게. 이유는 묻지 말게. 말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까.」

 

『이베리아의 목동』(1591년 작품), 『에나레스의 요정』(1587년 작품), 『질투의 환멸』(1586년 작품) 등은 모두 당대의 베스트셀러(?) 였던 모양이다.

 

「이번 것은 『필리다의 목동』이에요.」

 

「그자는 목동이 아닐세.」신부가 설명했다. 「아주 점잖은 궁의 신하일세. 보물처럼 보관하게나.」

 

「이 큰 책은 …….」이발사가 읽었다. 「제목이 『다양한 시의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좋은 작품이 되었을 텐데.」신부가 대답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시를 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훌륭한 시들 사이에 들어 있는 천박한 몇몇 작품들을 솎아 내야 할 걸세. 작가가 내 친구이기도 하고, 그가 쓴 보다 영웅적이고 고상한 다른 작품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건 놔두기로 하세.」

 

「이것은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로페스 말도나도의 『가곡집』입니다.」

 

「이 책의 작가도 …….」신부가 대답했다. 「나와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자의 입으로 그의 시를 들으면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네.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뤄워서 사람의 혼을 빼놓거든. 목가가 길긴 한데 좋은 건 그리 많지가 않아. 이 책도 남긴 책들과 같이 두게.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저 책은 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테아』인데요.」 이발사가 말했다.

 

세르반테스도 내 오랜 친구지. 내가 알기로, 그 친구는 시 쓰는 일보다 세상 고생에 더 이력이 나 있는 사람이라네. 그 책은 무언가 기발한 구석이 있지만, 제시만 할 뿐 결론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속편을 약속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자비를 완벽하게 얻을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자네 집에다 간수해 놓도록 하게.」

 

이 대목에서 작가는 자신이 쓴 작품 『라 갈라테아』(1585년에 발표한 세르반테스의 첫 번째 작품)를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또한 '작가의 남다른 이력'을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1571년(24세) 자원입대했고 그해 10월에 참가한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왼팔을 잃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5년(28세)에 귀국길에 오르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고, 그 후 5년간 알제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나 모두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소설 『돈키호테』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데, '남 이야기' 하듯 자연스레 펼쳐내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뒷받침된 덕분에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하지요.」이발사가 대답했다. 「자, 이번에는 한꺼번에 세 권입니다. 돈 알론소 데 에르시야의 『라 아라우카나』, 코르도바의 심문고나 후안 루포의『라 아우스트리아다』, 그리고 발렌시아의 시인 크리스토발 데 비루에스의 『델 몬세르라토』이네요.」

 

「그 책들은 …….」 신부가 대답했다. 「모두 에스파냐어로 쓴 영웅 서사시로 최고의 걸작들일세.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지. 에스파냐가 낳은 가장 값진 보물이니 잘 보관해 두게.」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106∼116쪽)

 

 - 『돈키호테 1』, <우리의 기발한 이달고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멋지고도 엄숙한 검열에 대하여>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8-0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글을 읽다보니 고구려 동천왕 당시 관구검의 침략으로 수많은 국서(國書)가 불탔다는 기록이 떠오릅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많은 책이 상실되기 전(前)과 후(後)는 분명 단절된 세계로, 서로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연장선에서 ‘돈키호테‘의 모험 역시 이런 단절 이후 일어난 상황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이 불타지 않았다면, 돈키호테의 모험에 대한 동기도 불붙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 등등 입니다.... 분명 <궁극의 리스트>등 목록에 관한 책들은 움베르트 에코의 말처럼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전화번호부를 통해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듯, 우리의 소중한 이웃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듯이 ‘목록류‘의 책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책장 정리를 하셨으니, 마치 분갈이를 하신 듯 Oren님 책장이 싱싱해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oren 2017-08-08 11:12   좋아요 1 | URL
돈키호테의 모험은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면이 있지요. 처음엔 종자(從子)인 산초도 없이 홀로 떠났으니까요. 결국 며칠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되돌아온 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고, 자신이 아끼던 책들도 저렇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태워지지만 돈키호테의 확고한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자신이 읽은 책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된 상태라고나 할까요. 달리 보면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을 뒤로 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초기 단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돈키호테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인물이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지닌 인물이어서, 자신의 책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정도로는 결코 좌절할 인물이 아니었지요.

『궁극의 리스트』는 겨울호랑이 님의 말씀처럼 ‘내가 찾고자 하는 부분만 찾아 읽으면 그만인‘ 전화번호부를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목록‘을 발견하면 몹시 기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그런 묘한 양면성을 지닌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7-08-0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극의 리스트》. 제가 알라딘 가입하면서 처음으로 구입한 ‘비싼 책‘입니다. 책에 인용된 저서와 문학 작품 대부분 생소해서 안 읽고 넘어간 것들이 많았습니다. 관심 있는 내용만 골라 읽었습니다. ^^

oren 2017-08-08 13:42   좋아요 0 | URL
『궁극의 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아마도 ‘교열 담당자‘ 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앞으로도 가끔씩 저 책을 펼쳐 보긴 하겠지만 끝내 완독하지는 못할 ‘궁극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참 묘한 책입니다. 비싼 책이지만 계속 외면하기도 힘들고요.^^
 

 

내가 여기에 터를 잡고 머문 지도 어느새 훌쩍 10년이 지났다.

 

세월 참 빠르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은 나도 몰랐다.

그저 내 눈앞에서 흐르는 강물은 조금도 쉬지 않고 흐르고 또 흐르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나는 단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나도 함께 따라 흘러갈 수 없으니,

언덕 위에 서서 강물만 바라보다가 어느새 문득 늙어버린 여행객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내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나서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아까운 10년의 세월이 어느날 갑자기 훌쩍 건너뛴 느낌마저 든다.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어떤 친구들이 나와 함께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낼 지도 몰랐다.

아무튼 끊임없이 새로운 친구들이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 와서는,

아무런 '소개'나 '인사'도 없이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가 신이 나서 자신의 품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다른 친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의 이야기를 거기에 보태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도 이젠 다 잊어 버리자.

어쨌든 나는 이제 여기서 서둘러 떠날 작정이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급작스레 여길 떠나야 한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결국 나는 여기서 쫒겨 나는 셈이다.

아무튼 그런 세세한 사정을 일일이 밝히자면 몹시 부끄럽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여길 떠나는 이유나 나의 행방에 대해서는 차츰 알게 될 터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여기도 가만 보면 참 많이도 변했다.

내가 여기에 계속 터를 잡고 버티기엔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계속 '눈치'를 보면서 근근히 버티며 살아 왔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온갖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새로운 친구들'이 끊임없이 밀려 드는데,

나같은 구닥다리가 여기서 어떻게 계속 버텨낼 재간이 있을 수 있으랴.

 

솔직히 여기서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며 살아 남을 자신이 없다.

여기도 알고 보면 은근히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친한 녀석들은 지들끼리 더욱 단결하여 구닥다리나 외톨이들을 배척하기 일쑤다.

저들끼리 온갖 비밀스런 대화들을 속닥거리면서도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꼴이 보기가 싫지만 나같은 뒷방 늙은이는 그저 꾹꾹 참고 못 본 체할 수밖에 없다.

혹여 그런 불만을 입밖에 냈다가는 즉시 벌떼같이 일어나서 나를 내쫒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끝에 마침 이참에 깔끔하게 여길 떠나기로 했다.

아니다, 거듭 밝히자면 내가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쫒겨나는 게 맞다.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렇지, 이렇게 하루 아침에 여기서 쫒겨날 줄은 몰랐다.

 

신세 한탄일랑 이제 그만 하자.

이제 여길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홀가분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미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오래도록 죽치고 앉아 지내면서 재미있는 '세상 구경'도 참 많이 했다.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나도 막상 여기를 떠나자니 앞길이 막막하고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아, 되돌아 보면 이 좁은 공간에서 나는 얼마나 흥미로운 세상을 구경 했던가.

 

아는 거라곤 모르는 거 빼고 전부 다였지만 성깔 하나만은 언제나 까칠한 놈_니체 같은 놈,

온갖 유머를 다 갖췄지만 입이 걸레처럼 더럽고 가벼운 놈_라블레 같은 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잔뜩 늘어 놓는 놈_하이데거 같은 놈,

세상의 온갖 비밀은 저 혼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늘상 가르치려 드는 놈_쇼펜하우어 같은 놈,

하느님조차 우습게 알고 까부는 놈_리처드 도킨스 같은 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온갖 기막힌 말장난으로 세상을 비꼬는 놈_셰익스피어 같은 놈,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세상을 움직일 것처럼 위세 떠는 놈_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놈,

낮이고 밤이고 허구헌 날 줄창 글만 쓰는 놈_카프카 같은 놈,

저 혼자만의 '독특한 의식의 흐름'을 늘어놓는 놈_조이스 같은 놈,

 

아... 이젠 좀 지겹다, 이런 녀석들을 계속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떠나면 그런 더러운 꼴은 더 이상 안 보고 살 수 있을 꺼 아니냐.

이 참에 떠나자. 깔끔하게 떠나자. 차라리 잘 됐다.

다른 데로 쫒기듯 도망가더라도 여기보단 훨씬 나을 꺼다.

이대로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더는 못 버티겠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날 한 번도 심하게 쥐어박지도 않고 그럭저럭 대접해 줘서 고맙긴 하다.

사람이 오래 한 군데서 10년 씩이나 머물렀다가 이제 막 떠나는데,

그래도 '마지막 작별 인사'는 하고 떠나야겠지. 안 그래?

 

암튼 내가 며칠 전부터 짐을 꾸리고 있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얼씨구나 좋구나, 내 세상 왔네' 하며 입이 귀 잡으러 가는 놈들도 더러 내 눈에 보인다.

이왕 떠나는 마당에 내 그 녀석들을 일일이 불러 세우고 따져 보고도 싶지만,

아예 떠나는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저 다 용서하고 깔끔하게 떠나자.

 

비록 나는 오늘 여기서 영영 떠나지만,

남은 친구들이여, 여기서 오래도록 버티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재미난 세상 구경도 실컷 즐기고.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얼굴을 들이밀 참신한 녀석들도 잘 좀 대해 주고.

특히 나보다 훨씬 더 나중에 들어왔으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끝내 나를 여기서 쫒아낸 나쁜 놈들아.

내 말을 명심해라.

 

나는 이제 그만 가련다.

정작 길을 나설려니 막상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날은 또 왜 이리 덥냐?

 

·

·

·

·

·

·

·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우리들은 비록 이런 험한 꼴로 떠난다만, 살아남은 너희들도 이꼴 당하지 말란 법은 없느니라.

부디 몸 조심들 하고, 지금 있는 자리가 언제까지나 보장되는 거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명심하거라.

 

 

아이구.. 저렇게 험한 꼴로 보쌈을 당해 떠나는 친구들 보니 영 남의 일 같지 않구먼.

그래도 천장 바로 아래까지 바싹 기어 올라간 우리들이 몹시 부럽제?

우리들도 하마터면 느그덜과 함께 도매금으로 한 방에 훅~ 날라갈 뻔했지.

주인장한테 두손 두발 모아 싹싹 빌고, 켜켜이 쌓인 먼지까지 싹싹 닦아낸 끝에 우리도 간신히 피신했지.

여기 천장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와 숨도 못 쉬고 엎드려 있다만 내심 쬐끔 불안한 것도 사실이야.

아무튼 우린 여기서 또 한 세월 낚아 볼란다.

주인장이 어디서 얼굴 반반한 연놈들 끌어 들이면 그땐 우리도 끝장이제.

언젠가 주인장이 우리까지 마저 쫒아내겠다면 그땐 우리도 미련없이 떠날 꺼여~

 

 

 

저렇게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환하게 빛을 받으며 마음놓고 지내는 저 친구들은 도대체 누구들이여?

시도 때도 없이 주인장의 사랑스런 손길까지 받아가며 속살을 헤쳐보이는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상팔자여?

 

 

뭔 말이여? 이래뵈도 우린 태어날 때부터 느그덜과는 태생이 다르거든.

느그덜이야 고작 몇 년 반짝 하다가 이내 세상을 하직하기 바쁜 파리목숨들이지만,

우리들은 적어도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낼 작정으로 태어난 불사조 같은 존재란 말씀이야.

느그덜은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꺼여~

느그덜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녀 낸다는 뜻이 무슨 말인지 아는감?

 

 

 

우린 그래도 천방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 왔으니 한동안 잠이나 푹 잘란다.

혹시나 주인장이 나를 잊지 않고 어여삐 여겨 찾아 준다면 몹시도 고맙겠지만.

그래도 쫒겨 나지 않고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게 어디냐.

 

 

저 가운데 몸집이 뚱뚱한 녀석들은 뭐여?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더만 아주 좋은 자리를 잡았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와 조이스가 나란히?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아무튼 새롭게 좋은 자리로 옮긴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네. 암튼 잘혀 봐~

 

 

우린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더라도' 우리부터 건져내 주겠다는 호언장담까지 들었던 존재란 말이여.

그러니 자네들은 너무 배아파 하지 말고 속히 여길 떠나게. 무디 헌책방 가서도 몸 조심 하고~

거기서 먼지 푹 뒤집어 쓰고 모진 세월 견디다 보면 혹 마음씨 좋은 새로운 주인이 자네들 모셔갈 지 알아?

 

 

 

이 사람들아, 우리도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는 필설로는 이루 다할 수 없는 고생들을 겪었다네.

그러니 자네들이 우릴 보고 너무 배아파 하지는 말게나.

우린 한 몸에서 태어난 친형제들인데도 수 년 동안을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쳐다만 보고 지내왔다네.

그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적도 없었고, 함께 음식을 나눌 기회조차도 영영 없었다네.

내 형이나 아우가 덩치 큰 녀석들 틈에 끼어 짓눌리며 낑낑대는 모습을 쳐다보는 일은 또 어땠고.

이제 겨우 이산가족들이 상봉한 셈이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라고.

그러니 부디 우리들을 위해 축하의 인사나 건네 주고 떠나게. 암튼 몸 조심 하고.

 

 

쇼펜하우어 : 어, 니체 오셨는가? 자넨 사후 나이가 어떻게 되나?

니체 : 아이구, 사부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신지요? 저는 올해로 꼭 117살 됩니다만...

쇼펜하우어 :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나이를 제법 먹었네 그려.

자네는 살아 생전에 나를 몹시 흠모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 마음 변치는 않았겠지.

니체 : 하이고, 이제 겨우 사부님 가까이 자리 잡았는데, 그 얘기부터 꺼내시면 어떡합니까.

         이젠 사부님 곁에 왔으니 좀 더 자주 옛날 얘기도 나누고 세상 변한 이야기도 나눠보자구요.

쇼펜하우어 : 그러자꾸나. 그런데 저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저 빼빼마른 영감은 도대체 누군가?

니체 : 아이고, 쾨니히스베르크 영감이네요. 내가 저 영감 욕을 가끔씩 했던 걸 저 영감도 알고 있을까요?

쇼펜하우어 : 글쎼다, 하여간 인사부터 드리세. 저 영감은 어쩄든 우리에겐 둘 도 없는 스승님이 아닌가?

니체 : 그리시죠, 사부님.

 

 

여긴 또 뭐여?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책탑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던 곳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자리가 널럴하구만 왜 하필 이런 삼복더위에 우릴 내쫒고 난리를 피운 게야?

글쎄 주인장이 마누라한테 혼이 났다는구먼. 책을 너무 쌓아 놓는 바람에 장롱 문이 안 열렸다나 뭐라나.

우리가 이번에 쫒겨난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주인장이 마누라 한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기 때문이야.

아하, 그런 고약한 사정이 있었구먼.

글쎄 저렇게 장롱 위를 깔끔하게 비워 놓았다고 해서 저게 또 얼마나 갈지. 아무튼 두고 보자구.

 

 

얼씨구? 여기 자리잡고 있는 이 녀석들은 또 뭐야?

주인장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고상한 음악까지 함께 듣고 있었어? 아주 놀고 있네.

나 원 참, 볼수록 성질 돋구는 구먼.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빈 틈도 제법 있구만 그래.

왜 하필 우릴 기어이 쫒아내고 난리를 피우는 겨?

안 그래도 열이 달아 후끈거리는 이 삼복 더위에 말이여.

 

 

접힌 부분 펼치기 ▼

느닷없이 떠나 보낼 책들이 저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자니 몹시 안쓰럽고 안타깝다.

이럴 땐 '몽테뉴'라는 사람이 정말로 너무 부럽다. 그래도 그 사람을 계속 부러워 하지는 말자.

내 방 하나만으로도 족히 1,000권을 수납할 책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자.

(이번에 '책장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재고 조사'를 해 보니 딱 924권이었다. 보따리에 담긴 책 76권 빼고.)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29)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7-08-0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놀래라.
저는 오렌님이 알라딘을 떠나신다는 줄 알고 덜컹했습니다.
제가 뭐 오렌님께 잘못한 거 있나 괜히 뒷꼭지가 쭈뼛해 오늘은 이렇게 자진 출두했다는 것 아닙니까?ㅎ

쟤들도 할 말이 많겠지요. 한때는 서재에서 위용을 자랑했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가끔 아우성을 듣습니다.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으나 부디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더운데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oren 2017-08-05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갑자기 많은(?) 책을 한꺼번에 떠나 보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떠나보낼 책들을 바라보며 적잖이 안타깝고 서운한 느낌을 받고 있었더랬죠.
그러다가 갑자기 ‘천장 밑에‘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는 전면적인 재배치에 착수했답니다.
그 덕분에 숱한 이산가족들도 한 곳에 쪼르륵 모을 수 있게 되었고요.
그래도 떠나보내는 책들 입장에서는 저한테 꽤나 서운했을 듯해요.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 느낄 법한 솔직한 감정들을 써 보고 싶었는데, 그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겼던가 봐요.
stella 님 댓글 보고 한 가지 더 생각난 게 있답니다.
알라딘 서재를 ‘진짜로‘ 떠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제목을 달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죠.
알라딘 서재의 특징은 언제나 ‘떠날 때는 말없이‘ 에요.
물론 처음 등장할 때도, 오랫동안 잠수했다가 디시 되돌아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다크아이즈 2017-08-0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고전 다독하시니 글담에도 품격이!
내침을 당하는 책님들도 오렌님 서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oren 2017-08-05 23:11   좋아요 0 | URL
떠나 보내는 책들한테까지 따스한 위로를 보내 주시니 제가 다 고맙습니다^^
고전이 읽을 때는 때로 힘들고 벅찰 때도 있지만, 그걸 한번 읽고 나면 두고두고 써먹기 좋은 장점도 있더라고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오래도록 호소하는 매력이 있는 거겠죠, 작가님?

겨울호랑이 2017-08-0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oren님께서 갑자기 서재 활동을 그만두시는 줄 알고 놀랐네요.^^: 앞으로도 제게 많이 알려주셔야 하는데 말이지요. 더운 날 책장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남은 하루는 시원하게 보내세요^^:

oren 2017-08-05 23:16   좋아요 1 | URL
제가 늘 겨울호랑이 님 덕분메 도리어 배우는 걸요.
안 그래도 이번 기회에 ‘책장 위의 먼지까지‘ 털어내느라 땀 좀 흘렸답니다.
책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건 힘이 하나도 안 들고 생각보다 무척이나 재미있었어요.
제 손길에 따라 저런 거장들이 이리저리 서로 자리를 맞바꿔가며 줄서는 모습이 정말 웃기더군요.

hnine 2017-08-0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보내며 얼마나 서운하셨으면 이런 글을 쓰셨을까 짐작이 됩니다. 떠나는 대상의 입장이 되어보는거죠.
한 자리에 오래 눌러있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할일을 다 마치고 떠나는 모습도 좋아요.
저기 <축의 시대>가 눈에 들어오네요. 제가 읽을 수 있을까 눈여겨 보기를 1년 넘게 하고 있는 책이거든요.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알라딘 서재의 품격을 높이시는데 oren님의 몫이 얼마나 큰데요. 아닐거라 생각하며 읽었지만 얼마나 다행인지요 ^^

oren 2017-08-05 23:23   좋아요 0 | URL
책이든 사람이든 이별은 늘 슬픈 거죠. 그것도 얘기치 않게 찾아오는 거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hnine 님께서도 제가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함께 공감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축의 시대』는 다른 책에서 소개된 걸 보고 몇 년 전에 구입한 책인데 저도 여태껏 읽지 못했답니다.
hnine 님께서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셨다니 먼저 읽으시거든 꼭 좀 글로 남겨주시길 바랄께요~

포스트잇 2017-08-0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충격..제가 알라딘 서재를 이렇게 몰랐나, 멀쩡해보이는 이곳의 물밑에서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여..라고 놀랐으나, 가엾게도 oren님의 품을 떠나는 책들의 한탄가였군요.
몸은 떠나도 내용은 오래전에 oren님 마음속에 남겨뒀을테고, 끝까지이리 마음써서 송가를 불러주셨으니 책귀신으로 떠돌지는 않겠지요.
일단 저녁더위에 헥헥거리다 일순 간담 서늘~ 했었네요. ㅎㅎ

oren 2017-08-05 23:33   좋아요 0 | URL
저 책들이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지, 제게 ‘귀‘가 없어서 그 말을 듣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책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더군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책들을 의인화해서 글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많이 써냈었고요.
오늘 ‘책 팔러‘ 난생 처음으로 중고서점을 찾아갔는데,
마치 여태껏 애지중지 여물 주고 키워 왔던 소를 팔러 장터로 향하는 농부의 심정도 들더군요.
그렇지만 중고서점 책상 위에 올려지는 순간, 노련한 주인 아주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에 따라 순식간에 76권의 책들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깜짝 놀랐답니다. 제가 여사장님께 물어봤더랬습니다. 아니, 사장님,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골라내실 수 있는 거죠? 그랬더니 사장님 하시는 말씀이, 늘상 하는 일인걸요, 뭘.... 절반쯤은 폐기처분될 듯하고, 나머지 절반쯤이라도 용케 살아남아서 새로운 주인을 잘 찾아갔으면 좋겠더라고요.


막시무스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oren 2017-08-05 23:34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께서 이렇게 위로해 주시니 저도 괜시리 감동 먹네요! 고맙습니다^^

비연 2017-08-0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깜짝 놀라... 들어왔지 뭡니까..ㅜㅜ 에구 놀라라.. 하면서 장대한 책장들 구경에 넋을 잃어 봅니다.

oren 2017-08-05 23:37   좋아요 0 | URL
2001년엔가 저 책장을 산 듯한데, 생각보다 너무 튼튼해서 아주 만족하고 있답니다.
책장 지붕과 천장까지의 틈새까지도 이렇게 책장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도 너무 좋고요.^^

북다이제스터 2017-08-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쌈 당하여 버려지는, 눈에 보이는 맨 위 놓인 책 세권은 당연히 그런 대접 받아도 될 책으로 보입니다. ^^

oren 2017-08-05 23: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 보따리 속에는 ‘알라딘 온라인 중고가‘로 28,000 원짜리, 18,000 원짜리도 숨어 있답니다.
그걸 미끼상품으로 삼아 중고서점에 내다팔았는데 76권에 38,000원 쳐주더군요.
권당 500 원씩인 셈인데, 절반쯤이 버려질 책들이어서 그나마도 꽤나 값을 잘 받은 느낌도 들더군요.^^

라로 2017-08-0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이 글을 읽었는데 바빠서 좋아요만 눌렀어요.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도대체 왜요?˝라는 댓글을 달려고 벼르다가 마지막까지 다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참 멋진 분이세요!!! 제가 떠나보낸 200여권의 책들에게 사죄를 하면서....

oren 2017-08-07 09:01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러셨군요. 한때는 사랑받았다가 아무런 예고나 이별 통보도 없이 숱하게 버림받는 책들을 생각하면 짠한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라로 님께선 이미 200여 권씩이나 떠나보냈으면 이젠 책을 내다버리는 일이 ‘늘상 하는 일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이 글 쓰고 난 뒤에 문득 ‘돈키호테의 서재‘가 떠올라 그 대목을 다시 찾아 읽어봤답니다. 그가 애지중지 간직하던 수많은 책이 ‘그가 잠든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검열‘ 당하고 ‘화형‘에 처해지거든요. 돈키호테가 어찌나 불쌍하고 안타깝던지, 제가 다 울 뻔했답니다.
* * *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

오후즈음 2017-08-07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분들처럼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 가면 저도 이렇게 떠나 보낼 아이들이 많아서 마음이 울쩍하군요.
우선 가면 먼저 좀 쓰담 쓰담 해줘야 겠어요.

oren 2017-08-08 00:01   좋아요 0 | URL
가끔씩, 이별할 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해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 *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니체, 『선악의 저편』

무해한모리군 2017-08-08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 정리해야하는데 생각만 하며 해해년년이 흐르네요. 과감해져야 하는데.

oren 2017-08-08 18:58   좋아요 1 | URL
서재 정리는 정말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단점은 거의 없고(약간의 시간과 땀이 소요되는데, 이걸 꼭 ‘단점‘이라고 말하긴 약간 애매해서요.) 장점은 셀 수 없이 많답니다. 우선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고요,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책들을 주제별로, 혹은 저자별로 한 데 모으는 데 따르는 쾌감도 생기고요, 자신의 책 구매 습관이나 독서 습관에 대한 ‘새로운 통찰‘도 얻을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원하는 책‘을 아무 때나 재빨리 꺼내 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듯한 무력감에서 벗어날 때 느껴지는 통쾌한 기분을 어서 빨리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그랜드슬램 2017-08-1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여름 잘 보내셨죠? 항상 글 잘보고 있는데 진짜로 떠나시는줄 알고 덜컹했습니다^^ 이메일번호 보내주실래요?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oren 2017-08-19 13:07   좋아요 0 | URL
그랜드슬램 님께서도 여름 잘 보내셨는지요?
제 이메일 주소는 ojcojj@naver.com입니다.
늘 관심 가져 주시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7-08-30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