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러니 우리가 규정한 바 있는 철학적 품성은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성장하여 온갖 미덕에 도달하겠지만, 적절하지 않은 곳에 씨 뿌려지거나 심어져 양육되면 신의 도움이 없는 한 정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아니면 자네도 대중처럼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가 소피스트들에 의해 타락한다고 생각하는가? 소피스트들이 사교육(私敎育)을 통해 젊은이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을 만큼 타락시킬 수 있을까?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최악의 소피스트들이 아닐까? 그들이야말로 완벽하게 교육시켜 남녀노소를 자기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한다는 거지요?" 하고 그가 물었네.

 

그래서 내가 대답했네. "그들이 민회, 법정, 극장, 군영 등 다중이 모인 공개석상에 함께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고함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남의 언행을 침소봉대하여 비난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할 때 그런다네. 더군다나 비난과 칭찬의 소음은 바위들과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되울려 갑절로 크게 들리네. 이럴 경우 자네는 젊은이가 사람들 말마따나 심정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교육이 이에 저항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이런 비난과 칭찬의 홍수에 휩쓸려 그 흐름이 이끄는 대로 떠내려가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아름답다고 하면 덩달아 아름답다 하고 추하다고 하면 덩달아 추하다 하게 되어, 결국 그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며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 선생님,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강제력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은 우리가 아직 말하지 않았네."

 

"그게 어떤 것인가요?" 하고 그가 물었네.

 

"이들 교육자들과 소피스트들이 말로 설득할 수 없을 때 행동을 통해 가하는 강제력 말일세. 누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자네는 그들이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벌금형을 부과하거나 사형에 처한다는 것도 모르는가?"

 

"물론 알고 있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다른 소피스트나 어떤 개인적인 발언이 그런 압력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아무도 싸워 이길 수 없을걸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물론 없겠지.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바보 같은 짓이지. 여보게, 그들의 교육과 반대되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미덕에 관해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갖게 된 성격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여보게, 인간의 성격은 그렇다는 말일세. 신적인 성격은 사람들 말마따나 논외로 하세. 잘 알아두게. 이런 정체에서 살아남아 제대로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의 가호를 입어 살아남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네."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그에 더하여 자네는 이 점에도 동의해야 할 걸세" 하고 그가 말했네.

 

"어떤 점 말인가요?"

 

"대중은 돈을 받고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소피스트라 부르며 자신들의 경쟁자로 여기지만, 이들 각자가 가르치는 것은 대중의 의견, 즉 대중이 집회 때 갖게 되는 의견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 역시 대중의 의견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 말일세. 그것은 마치 거대하고 힘센 짐승을 사육하는 사람의 경우와도 같네. 이런 사람은 그 짐승의 기질과 욕구를 잘 연구해서 그 짐승을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다룰 수 있는 방법, 어떤 경우에 가장 난폭하고 어떤 경우에 가장 유순한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네. 또한 무엇 때문에 여러 가지 소리를 지르는지, 반대로 어떤 소리를 내면 유순해지고 어떤 소리를 내면 사나워지는지 알게 될 것이네. 그는 오랜 접촉을 거쳐 이런 것들을 모두 배운 뒤 그것을 지혜라 부르며 하나의 기술로 체계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네. 하지만 그는 그 짐승의 이러한 취향과 욕구들 가운데 어는 것이 아름답거나 추한지 또는 좋거나 나쁜지, 또는 올바르거나 불의한지 실제로는 알지도 못하면서 오직 거대한 짐승의 반응과 결부시켜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네. 말하자면 그는 그 짐승이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 부르고, 그 짐승이 싫어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 부르네. 그는 이에 대해 달리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필요불가결한 것을 올바르고 아름답다고 일컫지만, 필요불가결한 것과 좋은 것의 본성이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관찰한 적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도 없네. 제우스에 맹세코, 교육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참으로 이상한 교육자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요"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림에서건 음악에서건 정치에서건 사방에서 모여든 잡다한 대중의 기질과 취향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가 이런 인간과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대중과 가까이 지내면서 시(詩)나 다른 예술품이나 국가를 위한 봉사를 과시함으로써 필요 이상으로 대중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그는 이른바 디오메데스적인 필연성(주석)에 따라 대중이 칭찬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일세. 한데 자네는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대중이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좋고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말을 듣고 가소롭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하고 그가 말했네.(343∼347쪽)

 

(주석)

Diomedeia ananke.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주석학자들에 따르면, 그리스 장수 디오메데스가 오뒷세우스와 함께 트로이아 성에 안치되어 있던 아테나 여신의 신상(palladion)을 훔쳐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던 오뒷세우스의 양팔을 묶은 다음 칼로 그의 등을 두드리며 군영으로 데려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플라톤, 『국가』, <제6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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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과 우정 사이

 

 

그래서 내가 말했네. "누가 무엇을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하려면, 그는 그것의 일부는 사랑하고 다른 일부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자네에게 상기시켜줘야 하나, 아니면 자네도 기억하고 있는가?"

 

"선생님께서 상기시켜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글라우콘, 자네가 그런 대답을 하다니 정말 뜻밖일세.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창때의 소년들을 보면 언제나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그들 모두가 자신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여긴다는 점을 자네처럼 사랑에 민감한 사람이 잊는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아니면 자네들 같은 사람들은 미소년들을 다음과 같이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네들은 사자코를 가진 소년은 귀엽다고, 매부리코는 제왕답다고, 이들 양극단 사이의 중간은 균형이 잘 잡혔다고 칭찬한다네. 자네들은 또한 피부색이 검은 소년들은 남자답다고, 피부색이 흰 소년들은 '신들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네. 벌꿀색이라는 말 또한 한창때의 소년이 안색이 파리해도 싫지 않아서 듣기 좋으라고 연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자네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온갖 말을 하며 한창때의 젊은이를 단 한 명도 퇴짜 놓으려 하지 않는다네.(474c∼474e)

 

 - 플라톤, 『국가』, <제5권>


 

 * * *

 

 

어쨌든 모든 사람은 한창 청춘일 때 어떻게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플라톤이 말하듯이 동성애의 상대자로서 사랑하고픈 남자를 충동질하여 호감을 사려는 행동을 함을 우리는 알고 있네. 그런 자는 피부색이 흰 소년들을 '신들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고 피부색이 검으면 '남자답다'고 부르는가 하면, 매부리코를 애칭으로 '왕답다'고 하고, 들창코를 '매혹적'으로, 혈색이 누런 소년을 '꿀 색깔'로 부르며 모든 상대를 환영하고 좋아하지. 사랑은 담쟁이덩굴과 같아서 어떤 버팀목에라도 찰싹 달라 붙는 데 재빠르기 때문이네.(22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파당 싸움과 전쟁 중에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네.

 

그들은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무모한 만용은 진정한 용기로, 신중한 기다림은 그럴듯한 비겁으로, 온건함은 겁쟁이의 구실로, 만사에 대한 명민한 이해는 어떤 일을 맡기에는 행동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가 아첨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주의 깊게 관찰하여 감시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낭비가 '베풂'으로, 비겁이 '자기 보전'으로, 충동이 '기민함'으로, 인색이 '검약'으로, 호색한이 '사교적이고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성 잘 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기백이 있는 사람'으로, 미천하고 온순한 사람이 '친절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들이지. 플라톤도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애인의 아첨꾼이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부른다고 말했네. 사자코의 애인은 '매혹적'인 사람, 메부리코의 애인은 '왕과 같은' 사람,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사내다운' 사람, 살갗이 희고 금발인 사람들은 '신들의 아이들'로 말이지. 반면에 '벌꿀 색조'의 사람은 순전히 혈색이 나빠 누르스름해진 애인을 애칭으로 기분 좋게 만든 말이네. 하지만 못 생긴 남자를 미남이라고 믿게 하고, 키 작은 사람이 키 크다고 믿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속이는 것도 아니고, 그가 앓는 상처는 가벼워 불치의 것도 아니네.

 

그러나 악을 덕으로 취급해 칭찬하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네. 그는 악에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기뻐하지. 그래서 자기 잘못에 대한 온갖 수치심을 못 느낀다네. 이것이 일종의 큰 재앙을 초래했는데, 시켈리아 주민으로 하여금 디오뉘시오스와 팔라리스의 야만적인 잔학 행위를 '불의와 부정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로 부르게 함으로써 큰 고통을 당하게 했네. 아이귑토스를 파멸시킨 것 역시 이것이었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유부단, 그의 종교적 심취, 그의 찬가, 그가 두드리는 북소리에다가 '경건심'과 '신들에 대한 헌신'의 이름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공화정 말기 당시에 로마인들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훼손시킨 것이었네. 안토니우스의 사치, 그의 무절제한 행위, 화려한 전시를 "권력의 신과 행운의 여신의 손을 적절히 이용하는 그의 유쾌하고 친절하고 고상한 행동들"로 두둔하려 했기 때문이지. 프톨레마이오스로 하여금 주색잡기에 빠지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네로에게 비극의 무대를 설치해 주고 그에게 탈을 쓰게 하고 편상(編上) 반장화를 신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그의 아첨꾼들의 칭찬이 아니었는가?

 

어떤 왕이라도 노래 한 곡조 웅얼거리면 아폴론 신, 술 한 잔 하면 디오뉘소스 신, 레슬링을 하면 헤라클레스 신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왕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 그래서 왕은 아첨에 의해 기쁨을 얻고 온갖 종류의 불명예스런 일에 빠져 들지 않았는가?(277∼28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선인(善人)을 아주 사랑하게 될 때매다 우리가, 플라톤이 말한 대로, 자제력을 갖춘 사람 자신을 축복받은 인간으로, "그리고 이러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는 동석인도 역시 축복받은 인간"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습관, 걸음걸이, 얼굴 표정, 그리고 미소에 탄복하여 정을 느껴, 열심히 그와 동참하려 하고, 말하자면 그 관계를 굳건히 하려 하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가 정말 덕 쌓기에서 진전을 보았다고 밍어야 한다네. 더욱이 다음 경우도 마찬가지라네. 우리가 선인들을 찬미하기를 그들의 밝은 행운의 시절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또 연인들이 서로 좋아해 상대가 말더듬이거나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라도 상관치 않으며, 또 슬픔과 비참이 가득한 속에서 실의에 차 눈물을 흘린 판테이아가 아라스페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아리스테이데스의 [도편] 추방, 아낙사고라스의 투옥, 또는 소크라테스의 빈곤, 또는 포키온에게 언도된 [사형] 판결 등등을 생각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심지어 이런 역경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덕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덕에 가까이 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연유이므로, 덕 쌓기의 진전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네. 이런 뷰류의 각 경험에 대해 에우리피데스는 이렇게 감정을 토로하고 있지.

 

훌륭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서나 영예를 찾느니.

 

왜냐하면 무서운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 공포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그것에 감복하여 본뜨려는 열정을 지닌 자는, 명예로운 것을 그냥 수수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네. 이런 뷰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어떤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취임하거나, 행운을 잡거나 할 때 자기들 눈앞에 현재 또는 과거의 선인들을 놓고 깊이 성찰하는 것이 한결같은 습관이 되었지. "이 경우 플라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에파메이논다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뤼쿠르고스 자신이나 아게실라오스는 어떻게 생동했을까?" 이와 같은 거울들 앞에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치장하고 습관을 고치며 천한 말을 자제하거나 정념의 발동을 끈다네.(404∼40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덕을 쌓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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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06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인용해 주신 글 속에서 플라톤의「파이돈」의 ‘상기‘, 「향연」에서의 ‘에로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중용‘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니 플루타르코스가 여러 차례 언급한 이유도 납득이 갑니다^^:

oren 2018-01-06 15:20   좋아요 1 | URL
아하.. 제가 인용한 글이 플라톤의 『파이돈』과 『향연』에서도 ‘다시‘ 나오는군요. 그 책들도 『국가』를 다 읽고 나면 읽어볼 참입니다.(『향연』은 예전에 읽어봤지만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 거의 없어요.)

플라톤의『국가』를 읽는 동안 곁에 함께 펼쳐 놓으면서 읽는 책들이 자꾸만 쌓여 갑니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와 비극 작가들의 작품을 너무나 자주 인용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루타르코스 등은 플라톤의 『국가』를 자꾸만 거듭 인용하니까 말이지요.(예전에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를 읽을 때, <플라톤의 국가>가 인용된 부분을 여러차례 표시해 둔 게 큰 도움이 되네요...)

cyrus 2018-01-06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책을 읽게 되면 oren님의 글을 많이 참고해야겠어요. 글 속에 포함된 oren님이 읽은 책을 읽어보고 싶어요. ^^

oren 2018-01-06 16:09   좋아요 0 | URL
플라톤의 『국가』를 뒤늦게(?) 새로 읽다 보니 이 책 속의 문장들을 여러차례 인용했던 다른 책들도 다시 생각나더군요. 아마도 이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은 제 짐작으로는 그의 직계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였지 싶은데(『시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만 봐도 그렇더라고요.), 그 이외에도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해서, 몽테뉴, 아담 스미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등등이 인용했던 유명한 문장들을 직접 만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네요.
 

 

그의 대화들을 교리의 일관된 시스템으로 읽지 말고, 유머, 재치, 정신작용, 신화라는 멋진 비유들로 가득한 지적 드라마로 읽으면 좋다. 대화들은,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못 생겼지만 매력적이고 짐짓 겸손한 척하는 소크라테스를 지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 클리프턴 패디먼

 

 * * *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직접 비춰보면서 읽는 것이다. 고전이 현실과 아예 동떨어져 있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때때로 고전을 읽는 '타이밍'을 잘 맞출 필요도 있을 듯하다. 그걸 일부러 겨냥하기가 무척 힘든 줄은 알지만 말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인 고전 속에 담긴 문장들이 내게 가장 재미있게 읽힐 때는 바로 다음과 같은 느낌이 찾아들 때다.

 

어?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어쩌면 이토록 자세히도 알고 있지?

 

이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그 고전을 갑자기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한다. 고전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갑자기 현실 속의 인물들과 급속히 가까워지거나 혹은 대체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예외일까? 아니다. 대학에 다닐 때 뭣도 모르고『국가』를 처음 읽었을 때는 이런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던 듯하다. 책을 읽는 사람도 바뀌고 세월도 많이 흐르다 보니 플라톤의『국가』도 아주 흥미로운 책으로 돌변한 듯하다.

 

 

 * * *


 

"갈라져서 여러 개로 분열되는 것보다 국가에 더 큰 악이 있을까? 또는 결속과 통일보다 국가에 더 큰 선이 있을까?"

 

"없어요."

 

"그런데 국가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시민이 같은 성공과 실패를 기뻐하고 괴로워할 때의 그 기쁨과 고통의 공유겠지?"

 

"물론이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러나 국가와 그 주민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크게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한다면, 개인 간의 이러한 감정 차이는 결속을 저해하겠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또는 '남의 것'과 '남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표현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겠지?"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가장 훌륭하게 경영되는 국가는 최대 다수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표현을 같은 사물들에 대해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국가이겠지?"

 

"물론이지요."

 

"또한 가장 개인을 닮은 국가이겠지? 예컨대 우리 가운데 누가 손가락을 다치면, 지배적인 부분의 휘하에서 몸과 혼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키는 유기체 전체가 그것을 감지하고는 몸의 한 부분이 당하는 고통을 전체로서 함께 느낀다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은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라네. 또한 고통을 느끼든 안도의 쾌감을 느끼든 인간의 다른 부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겠지?"

 

"네, 같은 원칙이 적용돼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선생님의 질문에 답변하자면, 가장 잘 다스려지는 국가가 그런 상태를 가장 닮았어요."

 

"그러니 개별 시민에게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일어나면, 그런 국가는 그 개별 시민이 자신의 일부라고 강조하며 전체로서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슬퍼할 것이네."

 

"훌륭한 법을 갖춘 국가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288∼289쪽)

 

 - 플라톤, 『국가』, <제5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전투에서 이겼을 때 전사자들에게서 무구(武具) 외에 다른 것을 벗겨가는 것은 좋은 관행일까? 아니면 그런 관행은 겁쟁이들에게 적군과 맞서지 않을 핑계만 대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시신 주위로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주 중대한 일인 것처럼 말일세.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약탈 관행 때문에 이미 많은 군대가 파멸을 맞았다네."

 

"물론이지요."

 

"시신을 벗기는 것은 돈을 밝히는 노예다운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적군은 갖고 싸우던 무구들만 남겨두고 생명은 이미 날아가버렸는데 죽은 시신을 적군 취급한다는 것은 여자답고 속 좁은 짓이 아닌가? 자네는 그것이 던져진 돌멩이들에는 화를 내면서도 돌멩이들을 던져대는 사람은 내버려두는 암캐들의 태도와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다르지 않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전사들이 시신을 벗기는 것을 허용해서도 안 되고, 적군이 장례를 위해 자기편 전사자를 들고 가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될 것이네."

 

"제우스에 맹세코, 절대 그래서는 안 돼요."

 

"또한 우리는 적군의 무구, 특히 헬라스인들의 무구를 신전에 봉헌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만약 우리가 다른 헬라스인들과의 선린관계에 관심이 있다면 말일세. 오히려 우리는 동족의 무구를 봉헌함으로써 신전들을 더럽힐까 봐 두려워할 것이네. 아폴론 신께서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 한 말일세."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헬라스 땅을 황폐화하고 집들을 불사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의 전사들은 적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내 생각에, 그들은 그중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되고 그해 농작물만 실어가야 하네. 내가 자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를 바라는가?"

 

"물론이지요."

 

"내가 보기에, '전쟁'과 '내분'은 이름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에 관련됨으로써 실제로도 서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같네. 내가 말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 가운데 하나는 동족 또는 친족끼리의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또는 남남끼리의 분쟁일세. 우리는 그중 동족끼리의 분쟁은 '내분'이라 부르고, 외국과의 분쟁은 '전쟁'이라고 부르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다음의 내 주장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지 살펴봐주게나. 내 주장인즉, 헬라스인들은 저들끼리는 동족이고 친족이지만 비헬라스인들에게는 남남이고 외국인들일세."

 

"네, 맞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과 싸우거나 비헬라스인들이 헬라스인들과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이 전쟁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타고난 적이라고, 그래서 그러한 적대행위는 '전쟁'이라 불리어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나 헬라스인들이 헬라스인들과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이 타고난 친구들이지만, 그런 경우에는 헬라스가 병들어 분쟁에 휘말려 있다고, 그래서 그런 적대행위는 '내분'이라 불리어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네."

 

"나도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방금 우리가 내분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한 사태가 어디에선가 발생해 나라가 내분에 휘말렸다고 가정해보게. 만약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농토를 황폐화하고 집들을 불사른다면 내분은 가증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양쪽 모두 애국심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유모와 어머니를 황폐화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 그러나 이긴 쪽이 진 쪽의 농작물만 약탈해가고 진 쪽을 언제까지나 전쟁을 할 상대가 아니라 언젠가는 화해하게 될 상대로 대한다면, 절제 있는 태도로 간주될 것이네."

 

"그래요. 후자의 태도가 훨씬 인간적이니까요" 하고 그가 말했네.

 

"어떤가?" 하고 내가 물었네. "자네가 세우고 있는 나라는 헬라스 국가가 될 것 아닌가?"

 

"그야 당연하지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훌륭하고 인간적인 사람들이 되겠지?"

 

"물론이지요."

 

"그들은 헬라스인들을 사랑하고, 헬라스를 조국으로 여기고, 다른 헬라스인들과 같은 종교 축제에 참가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동족인 헬라스인들과의 분쟁을 '내분'이라 여기고 '전쟁'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겠지요."

 

"그들은 언젠가는 화해하게 될 사람들처럼 싸우게 되겠지?"

 

"물론이지요."

 

"그들은 선의에서 상대방이 절제를 지키게 해주려는 것이지, 상대방을 처벌하려고 예속시키거나 파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은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것이지, 적군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렇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들은 헬라스인들이기에 헬라스 땅을 황폐화하지도 않고 집들을 불사르지도 않을 것이네. 그들은 또한 남자건 여자건 아이들이건 한 나라의 주민 전체가 자신들의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분쟁에 책임이 있는 적대적인 소수만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네. 따라서 그들은 우호적인 다수의 농토를 황폐화하거나 집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며, 이들 분쟁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죄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에 의해 죗값을 치르도록 강요받을 때까지만 적대행위를 계속할 것이네."(304∼307쪽)

 

 - 플라톤, 『국가』, <제5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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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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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리고 누군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누차 언급한 바 있는 원칙29과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네."

 

"그야 당연하지요."

 

주석

 

29 각자가 제 할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433b, 441d 참조

 

"우리는 또한 정의란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한테서 들었고, 우리 자신도 가끔 그렇게 말했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말했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니 여보게, 이처럼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는가?"

 

"아니요. 말씀해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찾아낸 지금 아직도 남아 있는 자질은, 우리나라에 그런 것들이 생기게 할 힘을 갖고 있고 그런 것들이 생겨난 뒤에는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그런 것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우리는 또한 다른 세 가지를 발견한다면 남은 것은 정의일 것이라고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33b)

 

"그렇다면 글라우콘, 우리는 또한 개인도 국가와 같은 방법으로 올바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 역시 아주 당연해요."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라가 올바른 것은 나라 안의 세 부류가 저마다 제 할 일을 할 때일세."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올바르고 제 할 일을 하는 것은 각자 안의 각 부분이 제 할 일을 할 때라는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물론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41d)

 

 - 플라톤, 『국가』, <제4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린 정의는 윤곽이 희미해서, 개인 안의 정의는 우리가 국가 안에 있는 것으로 발견한 정의와 달라 보이는가?"

 

"나에게는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비근한 예를 들어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네."

 

"비근한 예라니, 어떤 건가요?"

 

"우리가 예컨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을 통해 우리나라와 닮은 사람이 자기가 맡은 금이나 은을 착복했는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 사람은 신전을 털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적으로는 친구를, 공적으로는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겠지?"

 

"네, 멀어요."

 

"그는 또한 맹세나 그 밖의 다른 합의도 충실히 지킬 것이네."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 밖에도 그는 간통이라든가 불효라든가 신들에 대한 불경과는 어느 누구보다 거리가 멀 것이네."

 

"어느 누구보다도 거리가 멀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지배 또는 피지배와 관련해서 그 안의 부분들이 저마다 제구실을 다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게 유일한 원인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이제야 자네는 정의가 바로 그런 사람들과 국가들을 만드는 그런 힘이라고 확신하는가?"

 

"제우스에 맹세코, 확신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네. 그리하여 우리가 짐작한 대로, 우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운 좋게도 신의 도움으로 정의의 기원과 윤곽을 만나게 되었네그려."

 

"네, 그래요."

 

"그렇다면 글라우콘, 타고난 제화공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제화공 일을 해야 하고, 목수는 목수 일을 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야말고 사실은 정의의 영상이었던 셈이네그려. 그래서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것 같아요."

 

"정의가 분명 그런 원칙이라 해도, 정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누군가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적인 행위, 그의 진정한 자아, 그의 진정한 기능일세. 올바른 사람은 자신 안의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가 하거나 서로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음계에서의 세 음정, 즉 최고음, 최저음, 중간음처럼 세 부분을 조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자주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살게 될 걸세. 그리고 그가 이런 부분들과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부분들을 잘 훈련되고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여 여럿 대신 완전한 하나가 되면, 그때는 돈 버는 일이 됐든 몸을 돌보는 일이 됐든 정치가 됐든 개인 간의 계약 체결이 됐든 행동에 나서게 될 걸세. 그리고 이런 행위들 가운데 이런 심적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올바르고 훌륭한 행위라고 부르고, 이런 행위를 통제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믿고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네. 반면 이런 심적 상태를 언제나 깨뜨리는 행위를 불의한 행위라고, 그런 행위를 통제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부를 것이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좋았어"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국가와 이들 안의 정의가 무엇인지 찾아냈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하네."

 

"제우스에 맹세코, 아니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주장할까?"

 

"네, 주장해요."

 

"그 문제는 이쯤 해두세" 하고 내가 말했네. "다음에는 불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네."

 

"분명 그래야겠지요."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불의는 틀림없이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내전이요 참견이요 간섭이며, 혼의 한 부분이 전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네. 그런데 혼의 그 부분이 혼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그 부분은 정당하게 지배하는 부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일세. 그 밖에도 우리는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불의뿐만 아니라 무절제, 비겁함, 무지, 한마디로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렇고말고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물었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불의한 짓을 하는 것 또는 불의를 행하는 것과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지?"

 

"설명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올바른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혼에 끼치는 영향은, 건강에 좋은 행위와 건강에 좋지 않은 행위가 몸에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네."

 

"어째서 그렇지요?"

 

"건강에 좋은 것들은 건강을 낳고, 병적인 것들은 병을 낳네."

 

"네, 그래요."

 

"그리고 올바른 행위른 하는 것은 정의를 낳고,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은 불의를 낳겠지?"

 

"당연하지요."

 

"건강은 몸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병은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합으로써 생기는 것일세."

 

"네, 그래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물었네. "정의는 혼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불의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마다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미덕은 일종의 정신적인 건강 또는 아름다움 또는 좋은 상태이지만, 악덕은 일종의 병 또는 수치스러운 상태 또는 허약함인 것 같네."

 

"그건 그래요."

 

"그렇다면 좋은 생활방식은 미덕으로 이끌지만, 수치스러운 생활방식은 악덕으로 이끌지 않을까?"

 

"당연하지요."(255∼260쪽)

 

 - 플라톤, 『국가』,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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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oren 2018-01-05 00:2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 * *

 

연말이다. 다시는 못 볼 2017년의 끄트머리에 바싹 다가섰지만 이 순간들을 음미하는 사람들의 감흥만큼은 조금의 공통점도 없을 듯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걸 쓰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 다르게 쓰니까 말이다.

 

사실 '시간'이란 '공간'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직접 눈으로 봤던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느낄 뿐이다. 그래서 토마스 만도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 토마스 만, 『마의 산』 중에서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위대하다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는 '저 위대한 판관'이라고까지 극찬할 정도였다. 시간이 결국 모든 걸 밝혀주니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아주 능숙하게 처리하는 일꾼 또한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든 게 잊혀지니까.

 

그렇지만 인간은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은 극히 복잡다단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만 '기록'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절해고도에서 홀로 십수 년을 살았던 로빈슨 크루소도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무인도에서는 조금만 방심하더라도 날짜나 연도조차 잊기 쉬웠으니까. 자신의 나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섬에 온 지 열흘 내지 열이틀이 지났을 때 책과 펜, 잉크가 없으니 날짜 계산을 못하고 심지어 평일과 안식일도 구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나이프로 커다란 나무 기둥에 대문자로 도착한 날짜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기둥을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서 내가 처음 착륙했던 해변에 세워 놓았다. 나는 거기에 <1659년 9월 30일 처음 섬에 도착하다>라고 새겼다. 그리고 이 네모난 기둥 양 옆면에 매일 칼로 금을 새겨 날짜를 기록했다. 일주일때 되는 날은 다른 날보다 좀 더 길게 금을 새겼고, 매달 초하루도 그날만큼 길게 새겼다.

 

 -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중에서

 

 

월든 호숫가에서 몇 년 동안 홀로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다니엘 디포를 열심히 읽었다. 로빈슨 크로소야말로 '외딴 생활'을 막 시작하려는 그에게는 온갖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줄 '인생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 (52쪽)


주석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모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이처럼 '시간의 눈금'은 모두에게 중요하고 또 모든 걸 '구분'한다. 그러므로 해가 바뀌면 그저 '아라비아 숫자' 하나만 딸랑 바뀌지 않는다. 달력이나 다이어리만 새걸로 바뀌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의 나이가 순식간에 다 바뀌고 심지어 책마저도 나이를 먹는다. 어느 한 순간에 말이다.

 

유독 이맘때 알라딘이 고맙게 느껴지는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독서생활에 필요한 눈금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해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딱딱 '통계'까지 내어 준다. 심지어는 내가 해마다 작성한 글자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 글자를 소설책으로 환산하면 몇 권의 책이 되는지까지도.

 

오래도록 알라딘을 꾸준히 이용해 온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볼 만하지 싶다. 이토록 친절한 알라딘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서 이런 정직한 통계를 구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연말모임도 다 끝나고 모처럼 한가하니 이런  그래프도 그려보게 된다. 모든 통계들이 들쭉날쭉이지만 마지막 통계 하나만큼은 '우상향 추세'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어서 큰 위안이다. 미우나 고우나 제 글에 대해 기꺼이 '좋아요'를 눌러주신 모든 분들께 크나큰 행운이 함께 하시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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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라딘 통계 2018
    from Value Investing 2018-12-20 01:00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 * * 올해 연말은 기분이 영 꿀꿀하다. 그렇다고 올해 빼고는 매년 연말마다 기분이 뿌듯했던 것도 아니다. 올핸 경제도 연말로 올수록 점점 더 내려앉는 듯한 느낌인 데다가, 기분 좋은 뉴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오늘은 괜히(?) 알라딘에 들어 왔다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