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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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백 배나 나쁜 것

 

백 배나 나쁜 것은 '관조하는 자들'이다 ㅡ : 나는 저 '객관적' 등받이 의자, 저 냄새를 풍기는 역사의 향락주의자, 반은 성직자 나부랭이며, 반은 호색가인 르낭Renan의 향기보다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르낭은 무엇이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지, 어디에 자신의 결함이 있는지, 이 경우에 어디에서 운명의 여신이 그 잔인한 가위를, 아! 너무나도 외과적으로 다루었는지를 이미 박수갈채를 보내며 가성(假聲)으로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으며, 또한 견딜 수 없다 : 그러한 장면을 보고서 더 이상 잃어버릴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참아내면서 보는 것이 좋다.ㅡ 나는 그러한 장면을 보면 분노한다. 그러한 '관객'은 구경거리(알고 있는 일이지만, 역사 자체) 이상의 '구경거리'에 대해 나로 하여금 화나게 한다. 이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나크레온풍의 기분이 된다. 황소에게는 뿔을, 사자에게는 크게 벌린 입을 준 이러한 자연, 그 자연이 나에게 발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 ······ 신성한 아나크레온Anakreon에게 그것은 단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밟기 위해서였다! 썩은 등받이 의자, 비겁한 관조, 역사에 대한 호색적인 내시 근성,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추파, 성 불능이 정의인 척하는 위선 같은 것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나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전적으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정직한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이것이 그 자신을 믿고 우리에게 못된 장난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무한한 것이 빈대 냄새를 풍길 때까지, 그 공명심이 지칠 줄 모르고 무한한 것의 냄새를 맡는 이 온갖 교태를 부리는 빈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하얗게 칠한 무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혜에 휩싸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피로한 자와 쓸모없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짚으로 만든 머리 위에 이상이라는 요술 두건을 쓰고 있는 영웅으로 분장한 선동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금욕주의자들이나 성직자들로 알려지기를 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단지 비극적인 어릿광대일 뿐인 야심만만한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이상주의를 믿는 이러한 가장 최근의 투기꾼들, 반(反)유대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적으로 아리아적으로 속물적으로 자신들의 눈을 까뒤집고, 가장 진부한 선동 수단인 도덕적 태도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남용함으로써 민중 속에 있는 멍청이의 요소들을 모두 불러일으키려고 한다(ㅡ오늘날 독일에서 온갖 종류의 정신적인 사기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정할 수 없고 이미 명백한 독일 정신의 황폐화와 관련이 있다. 이 황폐화의 원인을 나는 신문과 정치와 맥주와 바그너의 음악을 너무 지나치게 섭취한 데서 찾는다. 게다가 이러한 섭생의 전제가 되는 것은 우선 민족적 강박과 허영, "독일이여, 만방에 빛나는 독일이여"라는 강력하면서도 협소한 원리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현대적 이념'이라는 진전마비(震顫痲痺)이다). 유럽은 오늘날 무엇보다도 흥분제로 충만해 있고 그것을 발명하는 데 뛰어나다. 자극제와 브랜디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또한 이상의 어마어마한 위조, 이러한 정신의 브랜디도 필요하게 되며, 그러므로 또한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있는 불쾌하고, 악취 풍기는, 거짓의 사이비 알코올 냄새도 필요하게 된다. 나는 이 유럽의 공기가 다시 좀더 청정한 냄새를 풍기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조된 이상주의나 영웅의 복장이나 호언장담이라는 금속성 장난감의 뱃짐이, 얼마나 많은 설탕이 가미된 알코올성의 동정(상표 : 고통의 종교)을 담은 통[桶]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편평족(扁平足) 환자를 돕기 위한 '고귀한 분노'라는 의족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젹 도덕적 이상의 코미디언들이 오늘날 유럽에서 수출되어야만 했는지를 알고 싶다 ······

 

역자주) 진전마비 Paralysis agitans는 일명 파킨슨Parkinson 증후군으로도 알려져 있는 병으로 서서히 진행하며, 바른 보행, 특이한 자세, 근육 쇠약 등의 특징을 나타내고, 특히 노년기에 생기는 원인 불명의 병으로 보고되고 있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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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가장 악질적인 전염병_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

 

두려워해야 할 것, 다른 어떤 숙명보다도 숙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커다란 공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이다. 만일 어느 날 이 두 가지가 교미를 한다면, 어찌할 방법 없이 바로 가장 섬뜩한 어떤 것이, 즉 인간의 '최후의 의지', 허무를 지향하는 그의 의지, 허무주의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을 위한 많은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냄새를 맡기 위한 코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오늘날에도 들어가는 곳이면 거의 어디서나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공기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ㅡ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문화권이나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유럽'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이다 :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자, 패배자, 좌절한 자 ㅡ 가장 약한 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어디에서 사람들은 깊은 비탄이 실려오는 저 가려진 눈길을, 그러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바를 드러내는 선천적 불구자의 저 내향적인 눈길을ㅡ탄식하는 저 눈길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눈길은 이렇게 탄식한다 : "내가 다른 어떤 존재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희망이 없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이다 : 내가 어떻게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ㅡ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진저리가 난다!" ······ 자기 경멸의 이러한 땅 위에서, 진정한 늪지대에서 모든 잡초, 온갖 독초들이 자라나며,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작게, 그렇게 숨어서, 그렇게 비열하게, 그렇게 달콤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수의 감정이나 뒤에 남은 감정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여기에는 비밀스러움과 은폐의 냄새가 악취를 풍긴다. 여기에는 언제나 악의적인 음모의 그물이 ㅡ 잘난 인간들이나 승리한 인간들에 대한 고통받는 자의 음모가 거미줄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증오를 증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 무슨 기만인가! 무슨 호언장담이나 태도를 소모하고 있으며, 얼마나 '대단한' 비방의 기교인가! 이러한 못난 자의 입에서 어떤 고귀한 웅변이 흘러 나온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많은 달콤하고 끈적거리고 겸허한 복종이 젖어 있을 것인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정의 , 사랑, 지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 ㅡ 이것이 이러한 '최하층 인간', 이러한 병자의 야심인 것이다! 그러한 야심은 사람들을 얼마나 능숙하게 만드는가! 특히 여기에서 덕을 각인하는 것이나 심지어 울리는 소리마저도, 덕의 황금의 음색까지도 모방하게 되는 위조지폐자의 능숙함은 놀랄 만하다. 그들, 이러한 약자들이나 치료할 수 없는 병자들은 이제 덕을 완전히 스스로 독점했는데,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우리만이 선한 인간이며, 의로운 인간이다. 우리만이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들은 생생한 비난으로,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ㅡ 마치 건강, 성공, 강함, 자부심, 힘의 감정 자체가 이미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사악한 것처럼 말이다 : 오, 얼마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얼마나 그들은 사형 집행인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 가운데는 재판관으로 변신한 복수심에 들끓는 사람이 가득하며, 이들은 언제나 독침처럼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고, 언제나 입을 뾰족 세워, 불만족스럽게 사물을 보지 않고 기분 좋게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또한 저 허영에 찬 가장 구역질나는 유형의 인간이 없는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영혼'을 나타내려고 하며, 일그러진 관능을 시구나 기저귀에 싸, '마음의 순수'로 시장에 내놓으려는 거짓된 불구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 이것이 도덕으로 지위행위를 하는 인간이나 '자기 만족자'의 유형이다. 어떤 형태의 우월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병자들의 의지나 건강한 자들을 압제하는 사잇길을 찾는 그들의 본능ㅡ실로 가장 약한 자들의 힘을 향한 이러한 의지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있단 말인가! 특히 병든 여자는 지배하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하는 정묘함에서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병든 여자는 살아 있는 자이든, 죽은 자이든 이런 일을 하는 데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그녀는 가장 깊이 묻힌 것을 다시 파헤친다(보고스족이 말하기를, "여자는 탐욕스런 이기주의자이다"). 모든 가족, 모든 단체, 모든 공동체의 배경을 살펴보라 : 그 어느 곳에서든지 건강한 사람에게 대항한 병자들의 싸움이 있다.ㅡ대부분은 약간의 독이 섞인 분말가루를 가지고, 아프게 찌르는 말로, 교활한 인내자의 무언극으로, 그러나 때로는 또한 '고상한 분노'를 가장 잘 연출하고자 하는 요란한 몸짓을 하는 저 병자의 바리새주의로 조용하게 싸우는 것이다. 격분해 날뛰며 지르는 병든 개들의 목쉰 소리, 물며 덤벼드는 그러한 '고상한' 바리새인들의 기만과 격노, 이것이 과학의 신성한 영역에까지 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이자 벌레 먹은 자들, 이들 모두는 원한의 인간들이며, 지하의 복수에 완전히 몸을 떠는 토양이며, 행복한 자들에 대해 감정을 터뜨릴 때에도, 또한 복수의 가면무도회를 할 때에도, 복수의 구실을 만드는 데도, 지치지 않고 싫증을 모르는 자들이다 : 그들은 도대체 언제 최후의 가장 세련되고 가장 섬세한 복수의 승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 자신의 불행을,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인 것이다 : 그러면 이들 행복한 자들은 어느 날엔가는 자신들의 행복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고, 아마 서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다!" ······ 그러나 이와 같이 행복한 자들, 잘난 자들, 몸과 정신이 강한 자들이 자신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숙명적인 오해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전도된 세계'는 없어져버려라! 병자가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ㅡ이것이 그 유약화일 것이다ㅡ일이 없다는 것ㅡ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최고의 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ㅡ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병자의 모습을 경계하면서, 건강한 사람은 병자와 떨어져 있고, 건강한 사람이 병자와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 모든 일이 필요하다. 또는 간호인이나 의사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일까? ······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더 이상 심하게 잘못 인식하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ㅡ 위에 있는 자는 밑에 있는 자의 도구로까지 자신을 격하시켜서는 안 되며, 거리의 파토스는 또한 영원히 양자의 임무를 마땅히 분리시켜야만 한다! 그들의 생존의 권리, 음조가 틀리고 깨어져버린 종에 대해 완벽한 음조를 지닌 종(種)의 특권은 실로 천 배나 더 큰 것이다 : 오직 그들만이 미래의 보증인이며, 오직 그들만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병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며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해야 하는 것을 이들 병자가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들 병자가 어떻게 병자의 의사나 위안자나 '구원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좋은 공기가 필요하다! 좋은 공기가! 어쨌든 문화의 모든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자! 그러므로 좋은 사교 모임, 우리의 사교 모임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을 때에는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안으로 향하는 부패와 은밀한 병자의 벌레 먹은 자리에서 나는 악취에서 멀리 떨어지자! ······ 나의 친구들이여, 이것은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간직해두었을 수도 있는 두 가지 가장 악질적인 전염병에 대해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ㅡ 즉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에 대해서!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에 대해서! ······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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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 *

 

니체가 쓴 문장들을 타고 넘는 일이 결코 쉬울 리는 없다. 어떤 문장들은 몇 번씩 다시 읽어야 겨우 그 뜻을 단지 겉으로나마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높은 산봉우리처럼 느껴지는 억세고 가파른 문장들을 만날 때면 온갖 근육들을 다 써보아도 그 문장들을 딛고 올라서기가 몹시 힘에 부친다. 니체가 아무런 고려도 없이 그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런 험로와 경사와 높이를 일부러 문장 속에 숨겨놓았을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그런 문장들을 따라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듯이 낑낑거리며 힘든 산행을 하노라면, 숨이 너무나 가빠서 자주 헐떡거릴 뿐만 아니라 가끔씩 한숨마저 내쉴 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몹시도 소화하기 힘든' 단단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어쨌든 뒤로 물러서기 보다는 기어이 그걸 타고 넘어가 봄으로써 그 다음에 맞닥뜨릴 새로운 도전을 오히려 마음속으로 기다릴 때조차도 아예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들은 온갖 힘겨운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전망이 탁 트인 산마루를 올라선 느낌이 들 때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후줄근한 몸을 한순간에 식혀주는 듯한 상쾌한 휴식과 더불어 노고와 분투를 위무해 주는 듯한 따스한 격려마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겁게 휴식을 취하면서 문득 방금 지나온 가파른 산길들을 되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다시금 장차 새롭게 맞닥뜨릴 여정에 대한 부푼 기대와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니체의 문장들은 읽을 수록 빠져드는 치명적인 매혹을 지니고 있다.

 

비록 때때로,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듯 단단한 껍질로 중무장한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고 어금니 사이에 그 열매를 무작정 들이밀 때를 연상케 하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있다.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아무리 깨무는 데 쓰이는 턱근육들에 힘을 주어본들 그처럼 단단한 열매가 쉽사리 깨질 리는 없다. 니체의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나약하게 자신의 껍질을 쉽사리 허물고 깊숙히 감춰둔 속살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성급하게 내보이리라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땐 어금니에 맡길 게 아니라 차라리 망치라는 유용한 도구를 손에 들어야 마땅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빨의 야만적인 힘만 믿고 어리석게도 억지로 힘으로 억누르고 깨물어서라도 껍질 속에 숨은 열매를 맛보기 위해 애를 쓰는 꼴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라도 시도해 보지 않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아주 미약하게라도 내 이빨이 그 문장들의 표면에 약간의 자국이라도 낸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면 나로서는 충분하다고 느낄 때조차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어쨌든 다음 문장으로 꾸역꾸역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다 운이 좋을 때도 있다. 가끔씩이라도 단단한 껍질이 한순간에 와작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생기니까 말이다. 그럴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듯한 파도처럼 거세고 드높은 새로운 문장들과 또 싸워가며 어쨌든 앞으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득 힘겹게 지나온 길들을 한참이나 되돌아 가서, 그가 쓴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내가 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만날 때도 있다. 그 문장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오묘한 리듬과 심연처럼 깊은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나서 돌연 화득짝 놀라게 되는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던가. 그는 이미 열 살때 작시와 작곡에 손을 댈 만큼 일찍부터 비범했다. 열여덟 나이에는 벌써 <운명과 역사>라는 거창한 작품(?)을 마치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듯 줄줄 써내려갔을 정도였다.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더불어, 치밀한 분석능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전어에 대한 놀라운 재능, 타고난 문학적 기질들을 두루 갖춘 그가 '루터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언어의 천재'로 불리는 게 결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싶다. 우리가 이런 평가에 선뜻 동의한다면, 니체는 '루터와 자신' 사이를 지나갔던 수많은 '독일 문학의 천재'들을 모조리 따돌린 셈이다. 심지어 자신이 아주 예외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들'로 칭송해 마지 않았던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괴테까지도!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그가 쓴 문장을 어렵사리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밖에 접하지 못한다. 문체의 리듬뿐만 아니라 '문체의 속도'에 대해서까지도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부여할 줄 알았던 그를, 단지 가까스로 번역된 우리말로 겨우 희미하게나마 해독할 능력밖에 없는 딱한 독자들에 대해서라면, 그도 틀림없이 그런 사정에 대해 몹시 안타깝고 슬픈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사정을 조금 더 쉽게 유추해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저 그가 '문체의 속도'에 대해 남겼던 다음의 말을 한번 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문체의 속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고,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28절

 

이 독일 언어의 천재는 심지어 자신의 작품 속에 음악의 형식까지도 대담하게 도입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 속에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 형식을 부여했던 것이다!

 

빠르고 거친 음악의 속도로

 

니체는 이 책의 문체에 대해 여러 곳에서 계속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의 "문체는 격렬하며 자극적이고, 정교함이 가득하며, 탄력 있고 다양한 색채로 차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악의 저편》의 서평을 쓴 비트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섬세한 중립적 태도와 머뭇거리며 앞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의 속도로 씌어졌다면, 《도덕의 계보》는 빠르고 거친 음악적 속도로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빠르고 거친 속도로 기술함으로써 '어머어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고, 마침내 번개가 치듯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계보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제3논문은 이와는 다소 다른 색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의 형식으로 더욱 대담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해설> 중에서

 

니체의 문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들을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는 근육이 충분히 발달된 튼튼한 팔다리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예민한 감각과 함꼐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함을 거듭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더불어, 그의 문장들은 그저 한번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힘겹게 읽고 넘어갔다고 해서 충분히 해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어쨌든 그의 문장들을 따라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대로 '근면성과 우직성'도 함께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선악의 저편』을 다 읽고 나서 뒤딸린『도덕의 계보』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다시금 도돌이표도 붙지 않은『선악의 저편』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 책의 내용들을 힘겹게 필사하는 가운데, 저만치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니체의 문장들' 가운데서 발견한 다음 문장은 어쨌든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화가 덜 된 채로 억지로 집어삼켰던 문장들을 도로 끄집어내어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동안에 보다 부드럽게 잘근잘근 씹히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마치 소처럼 우직하게 그의 문장들을 반추하는 독자를 향해 그가 이토록 놀라운 격려의 말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더군다나, 니체의 책을 읽다가 마음 속으로 '소가 된들 어떠리...'를 읊조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만일 이 저서가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이전의 내 저서들을 읽었고 이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 전제를 함께 전제한다면, 이 저서는 아주 분명하다 : 사실 이전의 나의 저서들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차라투스트라' 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는 이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음,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존경심을 지니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 잠언 형식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이 형식을 충분히 진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경우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이 책 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다 : ㅡ 이 논문의 맨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놓여 있으며, 논문 자체는 이에 대한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는 가장 잘 잊혀진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ㅡ 이렇게 잊혀졌기 때문에 내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ㅡ .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 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되새김하는 것[反芻]을 말한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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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0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서문을 보니, 오만할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네요. 니체의 원전을 언젠가는 혼자서 음미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직은 해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시적 은유와 서사는 철학을 문학처럼 생각하게 만든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뭏든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철학이기도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철학이 니체의 철학이죠. *^

oren 2016-02-21 01:21   좋아요 0 | URL
니체는 오만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철학자라고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하지 싶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망신이나 조롱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지요. 그에게 혼쭐이 났던 인물들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세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유대인 여자(나자렛의 예수와 어부 베드로, 양탄자를 짜는 바울,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들 말고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철학자들도 니체의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었지요. 그러니 `저 돌대가리`로 불렸던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가령 이 책에서만 하더라도, 베이컨, 홉스, 로크, 다윈, 허버트 스펜서, 칼라일, 빅토르 위고 등등)은 니체로부터 얼마나 호되게 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책들도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조롱을 당한 책 또한 《성서》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누가복음>,<마태복음>,<로마서>,<요한복음>,<데살로니가전서> 등을 조목조목 빗대어 조롱한 대목들은 『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답니다.
* * *
ㅡ 그들에게 삶의 온갖 고통에 위로가 되는 것 ㅡ 미리 상정하는 미래의 축복의 환상을 그들은 어떻게 부르는가?
ㅡ ˝무엇이라고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입니까? 그들은 그것을 `최후의 심판`, 그들 나라, 즉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부릅니다 ㅡ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그들은 `믿음 속에서`, `사랑 속에서`, `희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ㅡ 충분하다! 충분하다!

- 『도덕의 계보』,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중에서

탕기 2016-02-2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말씀처럼, 니체는 소가 되어 묵묵히 밭을 가는 독자의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 어떤 외경의 영토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척 공감합니다. 가볍게 뛰어넘는 니체 관련 저서들을 보다가 그 책들을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르네요. 하물며 니체를 읽고 자랑질하는 사람들의 글은,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고명섭 씨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생을 한 번 들여다보고 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볼 참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수가 추천했던 것처럼 莊子를 읽고 카잔차키스를 읽어야겠고요. 미약한 머리로나마 지금껏 생각해온 니체의 위대함이란, 그 시작은 문헌학에서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는 아무런 인용도 없이 광인처럼 말을 내뱉어 그걸 읽는 사람들을 뒤흔들었던 것일 테고요.
나이의 문제일 뿐이라고 위무해봅니다만, 솔직히 저는 아직 Oren님처럼 니체를 되새김질 하는 작업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욕지기가 이는 때도 있는 걸요... 필사를 한 번 해볼까요? 저는 그다지 성실한 사람이 아니니, 모르겠습니다. 내공의 차이일 테지요. 오랜만에 니체에 관한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소가 배부르니, 다시 밭일을 하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oren 2016-02-21 15:15   좋아요 0 | URL
탕기 님 반갑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니체의 책들을 틈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때가 있었는데, 그의 문장들이 너무나 격렬하고 힘찬 데 놀라서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싶은 두려움과 외경을 느낀 적이 있었답니다. 마치 북한산 인수봉도 올라가 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히말라야의 눈 덮힌 고봉들을 쳐다본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꾸역꾸역 다른 책들을 읽다가 뒤늦게 만난 니체는 확실히 예전보다는 덜 두렵더군요. 그의 책 속에서 예전에 이미 봐 왔던 친근한 인물들을 더러 만날 수 있어서 그런 느낌이 더하는 듯싶기도 합니다.

니체를 읽는 매력은 암튼 그의 문장 속에 깊숙하게 숨어 있는 `니체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온갖 함의들`을 재삼 발견해 내는 기쁨에 있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류의 천재들이 생산해 낸 온갖 위대한 문헌들`을 온통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던 인물이니까요. 특히 저는 그가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온갖 작품들에 대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심오한 깊이와 이해를 드러낼 때마다, 그에 대해 경이를 넘어 경외감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더군요.

암튼 탕기 님께서도 `쟁기를 깊이 박은` 농부가 부지런한 소를 앞세우며 몰고 가듯이, `재 너무 사레 긴 밭들을` 부지런히 갈아 엎기를 바랄께요~~

yamoo 2016-02-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의 속도가 콱 박히는 군요!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노 인상깊어요~

니체를 읽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베르그손이 끝나면 니체를 읽어야 겠습니다!

oren 2016-02-26 14:46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의 문장들이 어디 예사롭지 않은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니체의 문장들 만큼 `절창`인 경우는 드물지 싶어요.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가끔씩은 다양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답니다. `그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앉아있다고, 혹은 서서 뜨거운 목소리로 소리 높여 외친다고` 그려보며 읽는다는 얘기이지요. 그렇게 상상하면서 읽을 때라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그의 문체의 속도나 높낮이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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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파괴자 에우리피데스는 또다른 흥미를 부른다. ˝『트로이아 여인들』은 전쟁의 영광을 모두 제거해 버렸고, 『메데이아』는 페미니스트 논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의 관계보다는 인간의 열정과 약점의 관계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보인다.˝(클리프턴 패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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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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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자신의 시대를 잘 보길 원한다면 멀리서 봐야 한다.˝고 말하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적당할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면 족하다.˝고 자문자답했다. 1,585개에 달하는 꼼꼼한 각주는 이 책의 가치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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