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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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겠는가?

 

위대한 것은 모두 그것을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한 요구로 새겨 넣기 위해서, 우선 섬뜩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흉한 얼굴로 지상을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독단적 철학, 예를 들면 아시아의 베탄타Vedanta 이론과 유럽의 플라톤주의가 이런 흉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온갖 오류 가운데 가장 나쁘고 지루하며 위험한 것은 독단론자들이 저지른 오류, 즉 플라톤의 순수 정신과 선 자체의 고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오류를 극복하고, 유럽이 이러한 악몽에서 벗어나 안도의 긴 숨을 내쉬며 적어도 좀더 건강한 숙면을 즐길 수 있게 된 지금부터 우리의 과제는 깨어 있음 그 자체이며, 우리는 이러한 오류와 투쟁함으로써 엄청나게 단련된 힘을 모두 상속받은 것이다.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과 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확실히 진리를 전복하고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인 관점주의적인 것을 스스로 부인함을 의미했다. 우리는 의사로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병은 어디에서 고대에 가장 아름답게 자라난 존재인 플라톤에게로 옮겨왔는가?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그마저도 타락시켰던 것일까? 소크라테스야말로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가 아닐까? 그 스스로 독배를 받을 만했던 것은 아닐까?" ㅡ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또는 대중을 위해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그리스도교 교회의 억압에 맞서 한 투쟁은 ㅡ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기 때문이다 ㅡ 유럽 내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화려한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렇게 팽팽한 활을 가지고 이제부터 가장 먼 표적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럽인은 이 긴장을 위기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씩이나 활의 시위를 풀고자 하는 대규모의 시도가 있었다. 한 번은 예수회 정신Jesuitismus에 의해서였고, 두 번째는 민주적 계몽주의에 의해서였다. 이 민주적 계몽주의는 실상 출판의 자유와 신문 구독 덕분에 정신 자체를 더 이상 그렇게 쉽게 '위기'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회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게다가 충분한 독일인도 아닌 우리, 선한 유럽인이며 자유로운, 대단히 자유로운 정신인 우리 ㅡ 우리는 여전히 긴장을, 정신의 온갖 곤경과 그러한 정신적 활의 긴장 전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마 화살과 과제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목표도 있는지……

오버엥가딘의 질스마리아에서

1885년 6월

 

 - 니체, 『선악의 저편』,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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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대담무쌍한 모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헬렌 켈러

 

 * * *

 

어린 시절에 내가 읽은 별로 많지도 않은 아동용 책들 가운데 하나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그 소설의 내용을 이제 와서 과연 얼마쯤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책을 자주 읽고 들려줄 수 있는 어느 '독서지도교사'가 내게 '그 책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 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낯설어 하며 매번 통밥을 굴리기 바쁠 것이다.('통밥'을 굴리는 얘기가 이 소설에 엄청 많이 나온다. '우리말 번역' 또한 '통밥' 그대로여서 나도 이참에 써봤다.) 그 모험소설의 내용을 새까맣게 잊은지도 너무나 오래 지났기에 그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장발장을 읽지 않은 애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어른이 다 된 후에 어느 누가 불쑥『레미제라블』을 바탕으로 시험을 한번 보자고 한다면, 대략 난감해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주 특별한 기억력이 아니라면 어릴 때 읽었던 아동용 고전 명작을 읽고 그 내용을 어른이 되어서도 줄줄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겨우 열 살이나 혹은 열세 살 무렵에 읽었을 법한 『톰소여의 모험』은 읽을 당시로만 따지면 어쨌든 무쟈게 재미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곧 독자였던 당시의 나와 거의 똑같은 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이 좋은 건 '어른들이나 걱정할 고민들'은 하나도 머릿속에 담아 둘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어린애들은 무엇보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장래'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어린 시절엔 세상이 온통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저지른 온갖 저지레 때문에 나중에서야 어른들로부터 크게 혼날 걱정만 빼고는, 늘상 '뭐 재미난 일이 없을까'를 궁리하기 바쁜 게 바로 어린 시절의 특징이리라.

 

까마득한 옛날인 70년대 초에『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절로 빠져든 '감정이입'을 이제 와서 다시 느끼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소설을 읽은 지 벌써 40년 이상이나 흐른 내게 '동심' 같은 게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나마 내게 한 가지 운이 좋았던 사실 하나는, 어릴 적에는『톰 소여의 모험』까지만 읽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전혀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묘한 우연 덕분에 어느날 문득 오십줄에 접어든 초로의 내가 다시금 그 말썽꾸러기 소년들인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집어들기 전부터 미리 걱정을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었다. 50대의 나이에 10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나'로 등장하는 소설을 과연 무슨 재미로 끝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소설은 숱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런 걱정일랑 따로 할 필요가 별로 없겠지 싶긴 했다. 괜히 엄청난 평가를 받는 고전들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아무튼 이 고전에 대해 걸출한 작가들이 내놓은 놀라운 평가부터 좀 들어 보고 나서 이 소설을 얘기하는 게 순서이지 싶다. 우선 헤밍웨이가 남긴 말부터 들어보자.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든 미국 작품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가 남겼던 이 말은 흔히 도스토옙스키가 고골의 가장 유명한 단편소설에 대하여 남겼던 평인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말과 비교되곤 한다. 고골이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자신이 활약하기 이전의 러시아 문학의 공허한 형식주의와 경직성을 완전히 파괴했던 활약상이 마치 마크 트웨인이 미국 문학에서 했던 역할과 적잖이 닮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싫어서 영국으로 건너갔던 T.S.엘리엇조차도 마크 트웨인을 격찬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지만,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 매력을 느껴 결국 구대륙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의 평을 들어보자.

 

트웨인은, 최소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만큼은, 본인이야말로 그 어떤 문학에서도 흔치 않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에게도 타당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발견한 작가들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나는 그를 심지어 드라이든과 스위프트와 나란히 놓고자, 즉 자신의 언어를 최신의 것으로 만든, 그런 와중에 ‘자기 부족의 방언을 정화한’ 그런 희귀한 작가 가운데 하나로 놓고자 한다.

 - T.S.엘리엇

 

엘리엇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한 건 그가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미주리주 최대의 도시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도 뉴올리언스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도시이다. 특히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강 유역 사람들만의 토속적인 사투리를 아주 맛깔나게 살린 것으로 유명한데, 엘리엇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숱하게 되살려 줄 그런 표현들에 특별히 매료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다. 조정래의『태백산맥』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벌교 사람들의 사투리에 매료되고, 이문열의『영웅시대』를 읽은 독자들이 그 작품 속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작가의 고향 사투리에 몹시 놀라며 반기듯이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부터 이런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이 그저 단순히 '어린이 모험 소설'에 그칠 수는 없다.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열세 살짜리 허클베리 핀이 도망친 노예 짐과 함께 '뗏목 여행'을 펼치는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가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작품성과 문학성을 얻게 된 것일까.

 

이 소설의 매력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문명'이 배제된'원시 자연 상태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펄떡이는 19세기의 낭만적인 미국'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국만큼 '새로움과 동경으로 가득찬 나라'도 드물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구대륙에 살던 온갖 지방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 바로 미국땅이었다. 보스톤이나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까마득한 옛날 인디언들이 살던 미시시피강 유역에 사는 미국인들의 삶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서두르는 법'이 온통 배제되어 있다. 문명화되기 이전 시대의 느릿느릿한 삶의 흐름들이 마치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유속만큼 완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폴리 이모가 샐리 이모한테 '톰 소여'의 소식을 편지로 전하더라도, 미처 그 편지가 닿기 전에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인 양 먼저 나타나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희대의 사기꾼인 '왕과 공작'이 우연히 어느 마을로 찾아가 막대한 상속 재산을 남기고 죽은 피터 영감의 형님 노릇을 한참 동안이나 대신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매력이라면 역시 '모험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어린 시절' 만큼 사람들이 쉽게 공유하기 쉬운 '시절'도 없다. 어느 하나 '불변적이고 고정적'이기 보다는 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상태에 가깝고, 거의 모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모험 그 자체의 연속'에 가까운 시절이 바로 어린 시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가는 허클베리 핀의 '뗏목 여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모험들'을 독자들 앞에 가득 펼쳐 놓는다. 이 신명나는 모험에 공감하지 못할 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들이나 어른이나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젊은 시절의 '무한한 변주 가능성'을『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음악에 빗대어 아주 멋지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라고 말이다. 주인공 헉 핀과 짐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 도전하고 '안주'하는 걸 한사코 거부한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과도 같은 '어린 시절'의 모험 충동을 자극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도망치던 흑인 노예 짐이 우연히 샐리 이모네 농장의 오두막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사실은 그가 '자유의 몸'이 된 상태였음을 알고 나서도, 굳이 죄수를 좀 더 그럴듯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헉 핀과 톰 소여가 꾸미는 '길이 남을 대탈주극'은 이 소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허클베리 핀과 흑인노예 짐이 '뗏목'에 의지해서 벌이는 모험은 한편으로는 '어른용 모험 소설'인『돈키호테』를 몹시나 닮았다.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와 함께 늙은 로시난테에 의지한 채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을 벌이는 그 이야기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을 굳이 꼽자면 아마도『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두 소설은 모두 작가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넘친다. 또한 두 소설 모두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는 모험 속에 삽입된 '주인공을 달리 하는 또다른 이야기들'이 너무나 그럴 듯하고 훌륭한 점도 몹시 닮았다.

 

이 소설이 풍기는 또하나의 묘한 매력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를 닮았다는 점이다.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눈물겨운 귀향'을 다룬 서사시는 어쩌면 '모험 이야기'의 원조격 작품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차이점 또한 『돈키호테』와 비슷하다. 오뒷세우스가 전쟁터를 떠나 고향 이타케 섬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겪는 온갖 모험과 고초 가운데 등장하는 여인네만 해도 그 수가 얼마였던가. 세이렌의 유혹 정도는 축에 끼지도 못한다. 칼륍소와는 아예 살림을 차렸었고, 마녀 키르케와도 부부처럼 지냈고, 나우시카아 공주에게도 새장가를 들 뻔 하는 등 숱한 여인과 사랑과 이별을 겪었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역시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는 동안 숱한 남정네들로부터 유혹을 받았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빼면『오뒷세이아』는 금세 시들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선 사랑 이야기가 아주 짧다. 어느 마을 대령의 딸이 '비밀 쪽지' 하나를 받고 적대적인 가문의 총각과 함께 느닷없이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를 빼면 다른 사랑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담백하다고나 할까.『평생독서계획』에서 클리프턴 페디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은 호메로스를 읽으면서 그리스의 서사시를 느꼈는데, 그와 똑같이 미국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미국의 『오뒷세이아』를 읽는다."고 말이다. '신화'는 사라져도 어쨌든 '서사시'는 계속 태어나는가 보다.

 

이 모험 소설엔 '사랑 이야기'가 빠지는 대신에 그보다 훨씬 단단한 감정인 '우정'이 담겨 있다. 바로 주인공 허클베리 핀과 도망친 노예 짐 사이에 싹튼 백인과 흑인 사이의 '우정'이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뗏목 여행에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던 건 아니었다.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웃집 노예였던 짐은 '남부지방으로 팔려가야 하는 신세'를 벗어나고자 '자유'를 찾아 무작정 도망쳐 나왔는데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미시시피강 한가운데 있던 잭슨섬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헉 핀으로서는 '도망친 노예'와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탄 셈이었는데, 당시에 도망친 흑인 노예는 누구든지 '신고'하는 게 의무처럼 여겨지던 때여서 소년조차도 '마음 속의 도덕적 갈등'을 심하게 겪는다. 그런데 짐과 함께 며칠을 살다 보니 그도 백인인 자신과 똑같은 인간임을 발견하고 차마 양심상 신고할 수 없게 된다. 도리어 그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결심하면서, 그게 죄가 된다면 '지옥에라도 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극명하게 압축해서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당시의 잘못된 법률과 사회 관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수준이었던가는 다른 많은 이야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적대적인 가문과의 대결에서는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들까지 서로 총을 들고 서슴없이 총격을 가한다. 살인과 폭력과 미신과 탐욕 등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횡행한다. '흑인 노예제도'를 둘러싼 뿌리깊은 인종간 갈등은 미국 사회의 야만성과 불합리성을 대표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이 골치아픈 문제를 '문명화'와 '교양'을 거부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헉 핀의 '마음 속 갈등'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부터 노예 제도와 인종 갈등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노예제도'를 다루는 작가의 입장은『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더불어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비교될 만하다. 왜냐하면 소로우는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도망친 흑인 노예의 도주를 도와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영화로까지 소개된 작품인『노예 12년』을 떠올려 보면 '그 당시의 흑인 노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절박한 문제였던가를 누구라도 금세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도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고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이상이나 더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무대의 공간 배경 또한 드넓은 미시시피 강과 뗏목과 증기선과 강변 마을과 농장 등이 전부여서 우리에겐 많이 낯설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우리들'도 한결같이 어린 시절을 틀림없이 보냈지만 미시시피강만큼 드넓은 강을 끼고 자라진 않았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문화조차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산업화 이전 시대의 미국땅'에서 펼쳐지는 물내음 물씬 풍기는 '뗏목 여행' 이야기가 우리에게 친숙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쨌든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작가의 이야기 솜씨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의 배경이 낯설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모험 본능'이 방해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허클베리 핀과 짐의 뗏목 여행에 대해 독자들이 느끼는 순수한 동경이야말로 우리가 늘 잊고 있었던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무작정 겁도 없이 뛰어들었던 '이런 시절의 모험 본능'으로 되돌아가고픈 '우리들의 원초적 귀소 본능'에 대한 자극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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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_Shin 2016-05-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 그 귀신 얘기 좀 해줘˝
암. 나중에 해주겠구먼, 이제 폭풍우가 가라앉고 있당께, 그러니 낚싯줄이나 살펴보고 미끼나 다시 달아놓는게 좋겠구먼...

『허클베리핀의 모험 』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일전에 오렌님 블로그에서 읽었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지 뭡니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나 무더운 여름날 같은때에 독서하기가 아주 좋았다는.... ˝

oren 2016-05-17 14:28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러셨군요. 정말 재미있는 얘기네요.

저도 첩첩산중인 시골에서(중2때까지 전깃불도 안 들어와서 호롱불 아래서 생활했던) 자란 터라, 이 소설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엄청 많이 떠올렸답니다. 여름만 되면 거미줄을 걷어 신작로를 따라 포플러나무에 붙은 매미를 잡던 추억, 까마득히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목소리도 우렁찬 말매미`를 잡던 일, 벌집에 불을 놓던 일, 한여름에 홍수났을 때 막 타작을 끝낸 보릿짚단을 띄워 급류타기 했던 일 등등..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떠올린 추억은 아무래도 낚시하는 일이었지요. 이 소설 속에서 헉과 짐이 수시로 낚시질을 해서 끼니를 해결하니까 말이지요. 저도 형이랑 둘이서 쏘낚시, 주낚시를 하면서 메기, 뱀장어, 세숫대야만 한 자라 등등을 엄청 많이 잡았거든요. ㅎㅎ

kj_Shin 2016-05-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은 고기들을 어떻게 하셨어요?

드셨나요? 파셨나요? 아니면 놓아 주셨나요?

oren 2016-05-17 16:02   좋아요 0 | URL
아주 큰 놈들은 어머니께서 가끔씩 읍내 장에 가셔서 파셨더랬지요. 지게 작대기만 한 장어와 세숫대야만 한 자라 등등은 강에서 건져올릴 때부터 ˝형, 이건 장에 내다팔아도 되겠지?˝ 하고 미리 짐작을 했었더랬지요. 가끔씩은 아주 큼지막한 뱀장어도 내다팔지 않고 양은냄비에 푹 고아서 왕소금을 쳐서 먹기도 했지요. ㅎㅎ

kj_Shin 2016-05-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었겠습니다. ㅎㅎ

yamoo 2016-05-2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톰 소여의 모험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하고 다른 책인줄 첨 알았네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얼른 구해서 읽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저도 어릴 때 만화로만 본 건데, 찾아서 제대로 된 완역본을 읽어 봐야 겠습니다! 걸리버여행기,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클루타르크스 영웅전...이거 어렸을 때 많이 구경만 하던 책들인데, 지금에야 읽을 리스트에 첨부 됐습니다요..^^

oren 2016-05-23 12:11   좋아요 0 | URL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시시피강의 추억』과 더불어 `미시시피 3부작`으로도 유명하더군요. 그런데 저 또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톰 소여가 등장하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이들 작품들은 `어린이 모험 소설`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흠 잡을 데 없이 뛰어난 작품이더군요. 마치『돈키호테』나 『걸리버 여행기』『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을 두 번 다녀오는 동안 그나마 강과 호수들을 더러 직접 구경할 기회도 있었고(콜로라도강, 허드슨강, 이리호 등), 캘리포니아의 레돈도 비치(Redondo Beach)에서는 바다로 뛰어들어가 수영도 즐겨본 적이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불현듯 언젠가는 꼭 한 번 `미시시피 강`에 가서 직접 한 번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기더군요. ㅎㅎ

조나단 2016-07-27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 읽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나 둘러보고 있었는데 .
정말 멋진 리뷰를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 교육.윤리 편
허승일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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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철학은 모든 교육의 머리이자 간판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학을 제일 중요시해야 하네. 비유로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많은 도시를 여행하고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도시를 골라 거주하는 것이 유익하네. 여기, 철학자 비온의 재치 있는 말도 있지. 구혼자들이 페넬로페에게 접근할 수 없으니까 그녀의 시녀들과 사귀었듯이, 철학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 역시 아무 가치도 없는 다른 부류의 교육을 받는 데 정력을 소모한다고 말일세. 그러므로 철학을, 말하자면 모든 교육의 머리이자 간판으로 삼을 필요가 있네.

 

신체를 돌보는 문제에 관한 한, 사람들은 의학과 체육학의 두 가지 학문을 찾아냈네. 의학은 몸에 건강을 심어 주고, 체육학은 몸에 튼튼함을 심어 주지. 그러나 마음의 병에는 철학만이 치료약이네. 그 까닭은 철학을 통하고 철학과 함께 해야 명예로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 정의로운 것과 부정한 것, 간단히 말해 선택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네. 그리고 인간이 신, 부모, 웃어른, 법, 낯선 사람, 관청 당국자, 친구, 부인, 아이 하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에도 도달할 수 있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신들을 경배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관리들에게 순종하고, 친구들을 사랑하며, 부인들을 공손하게 대하고, 아이들에게는 애정을 품으며, 노예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지. 그러나 이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할 때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고 불행할 때 지나치게 상심하지 말며, 더욱이 쾌락으로 방탕하지 말고, 성질을 부려 충동적이고 야비한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이것들을 나는 철학에서 생기는 모든 이점 중에서 으뜸가는 것으로 간주하네. 번영할 때 관대한 마음을 품는 것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고, 게다가 시샘을 품지 않는 것이 수양을 쌓은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이성으로 쾌락을 억제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표징인데,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정욕을 억누르지는 못하지.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철학과 정치적 능력을 결합해 혼합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완벽한 사람들로 간주하네. 그리고 나는 최대(最大)의 선(善)인 다음 두 가지, 즉 공적인 지위에 있을 때 세상에 유익함을 주는 삶, 그리고 철학을 추구하는 가운데 조용하고 아무 번민도 하지 않고 사는 삶, 이 두 가지를 소유할 때 이것들이 확고해진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네.

 

삶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지. 첫째는 실천적 삶, 둘째는 명상적인 삶, 셋째는 향락적 삶이지. 방탕하며 쾌락에 빠진 향락적 삶은 동물적이고 비천하지만, 실천이 없는 명상적 삶은 유익하지 않네. 그런데 철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실천적 삶은 세련미나 멋이 없지. 그러니까 누구나 가급적이면 공직 생활에도 참여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한 철학을 잡아 두도록 노력해야 하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자유인의 자식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중에서

 

 

철학도 역시 똑같다네

 

더욱이, 읽고 쓰기를 배울 때, 또는 음악 학습이나 체육 훈련을 할 때에는 첫 수업이 많은 혼란을 겪게 하고 힘들며, 그리고 불확실성이 따르게 되네. 그러나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둘 사이가 충분히 친숙하게 되고, 이해 덕분에 모든 게 매력적이고 타당하게 되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 둘 다가 쉬워지네. 철학도 역시 똑같다네. 철학은 확실히 처음 접할 때에는 철학의 용어와 주제가 무언가 낯설고 난해하지만, 시작부터 겁내 비겁하게 포기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요점 하나하나를 검토하고 일이 잘 진행되도록 매달리고 기다리다 보면, 숙지도가 생겨서 고생한 모든 일이 기쁨이 된다네. 그것은 오래 지체하지 않고 곧 와서 학습 주제에 풍부한 빛을 던져줄 것이고 또 덕을 사랑하는 열정을 고취할 것이네. 이런 열정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주제넘은 사람이거나 비겁자로 낙인찍힐 것이니, 그는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를 원하는 철학을 스스로 멀리했기 때문이네.

 

철학의 주제가 나이 어리고 경험 없는 학생들이 처음 접하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은 꽤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말려든 것을 알게 된 대부분의 의심과 오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마땅한데, 아주 정반대되는 성격의 사람들도 똑같은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네. 어떤 학생들은, 수치감과 강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에 질문하거나 자기들 머릿속에 확고히 잡힌 논쟁 문제를 제기하기를 주저하지. 그러고는 마치 다 이해한 듯이 동의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인다네. 또 다른 학생들은 어떤가? 불순한 야망과 동료 학생들과의 공허한 경쟁심에 이끌려, 자기들의 명민함과 쉽게 학습하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파악했다고 공언하지. 실제로는 그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말이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강의 듣기를 마친 후에, 저 겸양의 침묵을 지켰던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두고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필요에 의해 이번에는 더 큰 수치심을 안고 전에 이미 물었어야 할 질문들을 강의자들에게 애써 묻고서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네. 그러나 야심만만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젊은이들은, 끝내 자신 속에 깃들고 있는 무지를 덮고 감추기 위해 항상 애쓰고 있지.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이런 모든 어리석음과 가식을 털어버리고 배움의 길로 나서 유익한 모든 강의를 철저히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인내심을 갖고 클레안테스와 크세노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똑똑하기로 이름난 이들의 웃음을 받아들여야 하네. 이 두 사람은 비록 그들의 학교 동창들보다는 속도가 느린 것처럼 보였지만, 절망해서 학습을 피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지. 그러고는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목이 좁은 병과 동판에 비유해 농담을 하기도 했네.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힘들었지만, 그것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관했다고 말이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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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운명‘에 대하여

 

용기를 잃는다는 것은 철저한 패배를 의미한다. 철저한 패배를 원하는가?그렇지 않다면 용기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 플루타르코스

 

 * * *

 

플루타르코스에게 붙은 별명은 '최후의 그리스인'이다. 그는 아폴론 신전으로 유명한 델포이에서 가까운 카이로네이아에서 태어나서 스무 살부터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배웠다. 나중에 이집트와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로마에도 두세 차례 방문해 강의도 하고 집정관 등 여러 명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리스는 이미 로마의 속주가 된 지 2백 년이나 지난 때였다. 찬란했던 그리스 문학도 이미 쇠퇴기에 접어드는 때였다. 사실상 '로마시대'의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그가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리게 된 건 주로 그리스 주요 작가들에 아주 통달한 끝에 그리스어로 쓰여진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고대 그리스의 상징'인 델포이 신전에서 사제 노릇을 하며 고향 도시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점도 그런 별명을 얻는데 보탬이 됐을 성싶다. 그가 그토록 오래 신관으로 일했던 건 아폴론의 신탁을 받던 유서깊은 델포이 신전이 더 이상 황폐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 정도였으니 그에게 붙은 별명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가 쓴 대표작은 그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다. 원제는 『비교 열전』(Bioi paralleloi)인데, 23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붙었다. 애초에 그 책엔 이들 46명의 영웅들만 담겼으나, 나중에 그가 따로 쓴 '로마 황제전'에서 두 사람(갈바와 오토)과, 또 다른 제왕전 중에서 남아 전해지던 두 사람(아라토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후세 학자들이『영웅전』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책은 무려 50명의 영웅들의 전기를 담은 방대한 책이 되었다. 4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레욱트라, 만티네이아에서 스파르테군을 격파한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키케로는 그를 '최초의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가한 대(大)스키피오의 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른바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으로 모두 227개의 제목이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50편의『영웅전』과 78편의 『윤리론집』뿐이라고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 그가 쓴 그토록 많은 작품 가운데 그리스어로 쓰여진 원전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내가 알기로는 다음의 네 권쯤 되는 듯하다.(세 권은 읽었고, 네 번째 책은 요즘 한창 읽는 중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의 네 권 모두 그리스어로 쓰여진 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책이긴 하지만 한결같이 '완역'이 아니라 '발췌 번역'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원전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싶지만 도리어 원전의 명성이 우뚝한 만큼이나 독자들로서는 발췌 번역에 대한 아쉬움도 클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들 네 권의 번역본들은 저마다 꼼꼼하고도 풍부한 주석이 달린 게 특징인데, 번역을 맡은 분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에 대해 정통한 분들이니만큼 '풍부한 주석'이 딸린 번역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켠으로는 이 분들이 왜 아직까지도 '원전 완역'에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해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작품의 '원전 완역'을 애타게 바라는 독자들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겨우 네 권의 '발췌 번역본'을 읽은 일개 독자로서 '완역된 원전 작품'을 통째로 다 접하지 못하는 고전 번역 현실에 대해 약간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실마리를 슬쩍 엿보았다고 말한다면 나만의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든 '원전 완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비단 '원전 작품의 규모의 방대함'에만 달려 있는 문제만이 아니라, '원전 번역에 수반되는 방대한 주석 작업의 어려움'에서도 동시에 살펴봐야 옳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대한 '원전 번역'에 대해서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지금껏 나온 네 권의 '발췌 번역본'만 찬찬히 살펴보더라도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우선, 『플루타르크 영웅전』부터 살펴보자. 앞서 미리 얘기했듯이 이 작품에서 다루는 '고대의 영웅들'은 모두 50명이다. 그런데 '원전 발췌 번역'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은 각각 10명(천병희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44쪽)과 2명(김헌 주해, 『두 정치 연설가의 생애』, 307쪽)을 다룰 뿐이다. 그런데 두 번역본에 딸린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1,585개의 주석이 딸려 있고, 『두 정치 연설가의 생애』는 846개의 주석이 붙어 있다. 10명의 영웅을 다룬 번역본에 딸린 주석을 만약 50명의 영웅을 다룬 완역본으로 환산해서 산출해 보면 주석의 숫자는 무려 7,925까지 불어난다.(10명 : 1,585개 = 50명 : 7,925개) 또한 2명의 영웅을 다룬 번역본에 딸린 주석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추산해 보면 무려 21,150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온다.(2명 : 846개 = 50명 : 21,150개) 그러니 아무리 '원전 완역'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완수하기가 얼마나 힘겨울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은 어떨까. 사정은 여기서도 비슷하다. 그 책 또한 원전은 무려 78편의 작품이 담겨 있지만 국내엔 원전에서 딸랑 6편만 추려 뽑아 번역한『수다에 관하여』(천병희 번역, 279쪽)라는 책과 5편만 추려 뽑은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허승일 번역, 418쪽)이 나와 있을 뿐이다. 두 권의 번역본을 합쳐도 전체 작품의 겨우 14%(11/78) 정도만 번역된 셈이다. 그런데 두 권의 번역본에 붙은 주석은 어떨까. 『수다에 관하여』는 불과 6편의 짤막한 에세이만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석이 453개나 붙어 있다. 5편의 에세이를 담은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는 무려 761개의 주석이 붙어 있다. 이들 주석이 없었더라면 독자들은 도대체 이 책을 무슨 맛으로 읽을 수 있겠나 싶을 정도로, 번역자의 수고로움 덕분에 덧붙여진 주석 덕분에 내용들이 더없이 풍성하고 꼼꼼하고 정확하다. 만약에 『윤리론집』 원전을 이처럼 꼼꼼한 주석을 붙여서 모두 완역한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대략 14권의 단행본에 도합 8,608개의 주석이 붙을 정도로 방대한 책이 나와야 하는 셈이다.(11편 : 1,214개 = 78편 : 8,608개)

 

이런 사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플루타루코스의 『영웅전』과 『윤리론집』이 얼마나 방대한 저작이며, 그 두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주석이 딸려야 하는지 우리는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이들 작품에 대한 '원전 완역'이 여태껏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못하는 사정도 얼마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와 아울러 저 네 권의 '발췌 번역본'에 담긴 번역자들의 노고만 하더라도 결코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또한 앞으로 어떤 분들이 나타나서 지금처럼 꼼꼼하면서도 풍부하고 상세한 주석이 딸린 '원전 완역'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진정한 '플루타르코스 원전 완역'을 실물로 구경할 수 있을까.

 

 * * *

 

이왕에『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대한 번역본 얘기가 나왔으니 이 '유명한 고전'을 번역한 다양한 국내 번역본들에 대해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들을 두엇 덧붙여 볼까 싶다.

 

우선,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걸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내가 발견한 간략한 '참고문헌'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위에서도 언급했던『두 정치연설가의 생애』라는 책의 말미에 실린 목록이다. 역자가 번역에 참고했던 '참고문헌'인 셈이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8, 범우사, 1999.

박시인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6, 을유문화사, 1966.

이다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6, 휴먼앤북스, 2010∼2012.

이성규 옮김,『플루타르코스 영웅전』1∼2, 현대지성사, 2000.

외국어번역연구회 옮김,『플루타르코스 영웅전』1∼9, 한아름, 1994.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선집), 숲, 2010.

홍사중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2, 동서문화사, 2007.

 

내가 이 책들을 모조리 살펴볼 재간은 없다. 다만 이 가운데 휴먼앤북스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번역의 문제' 보다는 '주석'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크게 잃은 책인 듯싶다. 번역자가 고(故) 이윤기 선생님의 딸이어서 더욱 세간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대작 번역'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내놓은 번역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기대밖의 푸대접을 받는 듯해서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책이다. 이 번역본의 부실한 주석은 어느 알라디너가 예전에 선명하게 대비해 놓은 도표 하나만 보더라도 충분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천병희 번역본은 10명의 영웅에 대해 1,585개의 주석을 달았고, 김헌 주해본은 2명의 영웅에 대해 846개의 주석을 달았다. 그에 비하면 이다희 번역본은 차라리 주석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토록 부실한 주석이 달린 번역본을 독자들 앞에 버젓이 내놓았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다.)

 

<두 번역본의 주석 숫자>

 

 천병희이다희
뤼쿠르고스16321
솔론17115
테미스토클레스17927
페리클레스1438
알렉산드로스258 
마르쿠스 카토1126
티베리우스 그락쿠스46 
가이유스 그락쿠스33 
카이사르259 
안토니우스221 

(출처 :  http://blog.aladin.co.kr/keaton/4435362)

 

주목할 만한 또다른 번역본은 올해 4월에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두 권짜리『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고, '완역'이라고 내세우는 책이니만큼, 제대로 된 '원전 완역'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책이라도 감지덕지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세계의 모든 도서관에 불이 날 경우 목숨을 걸고라도 꺼내고 싶은 책"으로『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꼽았다는데, '원전 완역'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엉뚱한 이유를 앞세워 이 유명한 고전을 독파하는 일을 계속 외면할 수만도 없지 않을까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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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에 출간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알라딘 책소개 일부

 

[이 책의 특징]

 

# 동양의 사마천 『사기』와 함께 인물 전기 분야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전2권으로 완역한 전집(Complete Edition)입니다.
# 『하버드 고전 총서』, 『옥스퍼드 고전 총서』, 시카고대학의 <시카고 플랜>, 연세대 고전 필독도서 등 권위 있는 목록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불멸의 고전 작품입니다.
#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역동적인 영웅들의 매력적인 이야기에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습니다.
# 내용 이해와 몰입에 많은 도움을 주는 수백 개의 각주가 있습니다.
# 부록으로 전문가의 ‘해제’와, ‘플루타르코스의 생애’ 수록.
# 각각의 영웅과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 자료 수록.

이 책은 인물 전기 분야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전2권으로 완역한 것이다. 원제를 직역하면 『비교열전』이지만, 국내에는 『영웅전』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인의 이야기와, 이들 중 유사한 영웅 23쌍의 비교평가를 담은 작품으로, 교양으로서의 지식을 토대로 이야기의 극적 구성과 주인공의 도덕적 평가에 주력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영웅들로부터 용기, 지혜, 통솔력, 선과 악, 우정, 배신 등 2천 년 전에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들을 볼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인물부터 500년 전 시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략 105~115년에 영웅들의 삶을 거울삼아 후세의 자기 수양에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로부터 거의 2천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아 왔다. 수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온 이 책은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이 책이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평민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 책에서 즐거움을 얻었으니 그 영향이 한순간도 시든 적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서양사의 위대한 시기들을 이끈 영웅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생생하고 실감 나게 제공할 뿐 아니라, 걸출한 영웅들을 배출한 고대 세계 사람들이 품고 살았던 이상들을 구체적이고도 감동적인 형태로 소개한다. 이 책만큼 인류의 영원한 재산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책은 드물다.

 

고전을 고전답게 만드는 여러 조건 중에서 후세까지 오랫동안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단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하겠다. 그래서 『하버드 고전 총서』, 『옥스퍼드 고전 총서』, 『브리태니커 그레이트 북스』, 『시카고 플랜』 등 권위 있는 고전 총서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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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키케로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12-21 22:34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 *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가『대비열전』에서 그의 짝으로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붙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와는 달리 뛰어난 웅변술뿐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
  2. 루쿨루스와 미트리다테스에 얽힌 이야기
    from Value Investing 2017-01-08 01:52 
    영어에서 'lucullan'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군대 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러웠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루쿨루스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헬라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일찍부터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
  3. 몽테뉴와 플루타르코스
    from Value Investing 2017-02-08 00:22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 *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누가
 
 
붉은돼지 2016-04-23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윤기 선생의 딸 이다희씨가 번역했다는 플르타르코스 영웅전을 사려고 했는데 평을 보니 별로 좋지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이윤기 선생이 기획하고 일부 감수도 했다고 해서 기대를 했었는데 제가 바라는 번역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oren 2016-04-25 14:10   좋아요 1 | URL
이윤기 선생님이 생전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번역을 마무리하고 작고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그 분 특유의 걸판지면서도 맛깔스런 번역은 어느 누구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더랬는데 밀이지요...

yamoo 2016-04-23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아동용 전집이 무수히 많습니다. 제가 본 출판사만 10개도 넘는다는...80년대와 90년대 발간된 하드커버 전집들이 제가 가는 헌책방에 수북수북 쌓여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모르는 출판사가 더 있겠지요. 주석도 하나 없고 걍 되는 대로 잘라 짜깁기 한 책들이 대부분인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 유명한 책을 아직 소장하지 못하고 있군요! 동서판을 조만간 데려와야 할 듯합니다~ㅎ

oren 2016-04-25 14:29   좋아요 1 | URL
헌책방에 가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전집` 가운데 하나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던 듯해요. 어쨌든 `50명의 영웅들`을 다 담아낸 `완역본`을 읽긴 읽어야겠는데, `원전 완역본`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사정이니, `영어 중역 완역본`이라도 잘 골라서 읽어봤으면 싶습니다. 동서문화사에서 최근에 나온 `개정판`은 번역자가 `홍사중`에서 `박현태`로 바뀌어서 `세 권짜리`로 나왔더군요. 제목도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바뀌었구요. 새로 번역하신 분도 `영웅전`을 `완역하는데 10년을 바쳤다`고 하던데, 그 엄청난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직접 서점에 나가서 실물을 미리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소위 '인류를 대표한다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내리 세 판을 불계패로 당하고 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나,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 앞에서 우리가 옴짝달싹 못하고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당장 '북한 핵' 문제만 하더라도 어느 영특한 천재가 이미 오래 전에 찾아낸 '새로운 기술'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엄청난 계산능력'을 자랑하는 수퍼컴퓨터가 바둑의 최고수 한 명을 단지 내리 세 번 꺾었다고 해서 너무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기분이 영 말이 아니다. 제 꾀에 스스로 속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번 충격은 좀 쎄다. 백여 년 전에 니체가 '인류의 도덕'에 대해 거창하게 주장했던 말들도 오늘은 죄다 '알파고'에 대해 늘어놓은 말처럼 들린다...

 

 * * *

 

훨씬 후에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ㅡ 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 너희의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날개 달린 동물이자 정신의 벌꿀을 모으는 자로 항상 그 벌통을 찾아가는 중에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본래 한 가지 ㅡ 즉 무엇인가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 외의 생활, 이른바 '체험'에 관해서라면, ㅡ 또한 우리 가운데 누가 그런 것을 살필 만큼 충분히 진지하겠는가? 아니면 그럴 시간이 충분한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일에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몰두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없었다 ㅡ 거기에는 우리의 귀마저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신적인 경지로 마음을 풀어놓고 자기 자신에 깊이 몰두해 있는 사람의 귀에 마침 온 힘을 다해 정오를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그 사람이 갑자기 깨어나 "지금 친 것이 도대체 몇 시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 훨씬 후에야 귀를 비비면서 아주 놀라고 당황해서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체험한 것인가?"라고 물으면서, 더 나아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으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중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체험, 우리의 생활, 우리 존재의 열두 번의 종소리의 진동을 모두 세어보게 된다 ㅡ 아! 우리는 그것을 잘못 세는 것이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 ㅡ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제1절

 

 * * *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담하고도 냉철한 사유가 중의 한 명인 《도덕감의 기원에 관하여》의 저자가(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인 니체라고 읽을 것) 인간 행동에 대해 자기의 결정적이고도 통렬한 분석에 의해 이른 자기의 핵심 명제는 무엇인가? ······· 이 명제가 역사적인 인식의 망치질에 의해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면 언젠가는, 아마도 미래의 언젠가는 인류의 '형이상학적 욕구'의 뿌리를 발본색원하는 도끼가 될 것이다. ㅡ 이것이 인류에게 더 많은 축복일지 더 많은 저주일지,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어쨌든 가장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명제로서, 많은 결실을 맺으면서도 동시에 공포스러운 명제이자, 모든 위대한 인식이 갖고 있는 이중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명제이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6절

 

 * * *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대성'에 관해서라면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의 노래도 결코 빼놓을 수 없겠다 싶다.)

        코로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발명의 재능에서
기대 이상으로 영리한 사람은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간다네.
그가 국법과, 신들께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무모하게도 불미스런 것과 함께하는 자는
도시를 갖지 못하는 법이라네.

 - 소포클레스, 《안티고네》332∼372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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