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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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이크 산책로의 가로수 잎은 햇빛을 받으며 바스락거리거나 속삭이고 있었다. 플란넬 바지에 화려한 블레이저 코트를 입은 날쌘 젊은이들로 구성된 크리켓 팀이 지나갔는데 선수 중의 한 사람은 긴 녹색의 위켓 가방을 들고 있었다. 조용한 옆 골목에서는 다섯 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독일 악단이 퇴색한 제복을 입고 찌그러진 금관악기를 취주하고 있었는데 청중들은 길거리의 건달배들과 한가한 심부름꾼 애들뿐이었다. 하얀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따뜻한 햇빛을 받아 석회암 판처럼 번쩍이는 창틀 위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열어놓은 다른 창문으로부터는 고음(高音)을 향해 점점 높아지는 음계(音階를 치고 있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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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노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그에게는 괴로웠다. 애들의 바보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기가 다른 애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클롱고우스 시절보다도 더 민감하게 느껴졌다. 그는 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 영혼이 그 동안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던 그 실체 없는 이미지와 실제 세상에서 맞닥뜨리고 싶었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인도하고 있던 어떤 예감은 그가 공공연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결국 그 이미지와마주칠 수 있을 것임을 말해 주었다. 아마도 어느 집 문간에서, 혹은 보다 은밀한 곳에서 오랜 지기(知己)들이 만나듯이, 마치 만나자는 약속을 미리 해두었던 것처럼,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채 단둘이 있게 되리라. 그러면 부드러운 감정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에 그는 변신하게 되리라. 그녀의 눈앞에서 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것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변신할 것이다. 그 마법의 순간에 연약함과 소심함과 무경험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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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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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공기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공기 속에는 저녁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바튼 소령네 농장으로 산책을 나가서 무를 캐어 껍질을 벗겨먹던 날 그 시골 밭에서 나던 냄새였고, 정자 너머 오배자나무가 있던 작은 숲에서 나던 냄새였다.

 

애들은 크리켓 공으로 멀리 던지기라든가 커브 공 및 느린 공 던지기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잿빛 공기의 정적 속에서 그는 공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조용한 공기를 뚫고 크리켓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다. 픽, 팩, 폭, 퍽. 분수대에서 철철 넘치는 낙수반(落水盤) 위로 물방울이 조용히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91쪽)

 

(나의 생각)

바로 이런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자주'가 아니라) 드물게 낑낑댔던가. 나는 고작 두 줄도 온전히 써내려 가지 못하고, 기어이 도중에 포기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저녁'을 도로 집어넣기 바빴을 뿐인데. 그리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답담한 가슴만 억누른 채 홀로 끙끙거리기나 할 뿐이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표현이 너무나 시적이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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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빈들 게으름이나 피우는 녀석 같으니라고!』학감이 고함질렀다. 『<안경이 깨졌습니다>라니! 예전부터 학생들이 즐겨 쓰던 속임수지 뭐냐! 당장 손을 내밀지 못하겠니!』

 

스티븐은 눈을 감고 손바닥을 위쪽으로 편 채 허공에 내밀었다. 학감이 손을 바로 펴기 위해 손가락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고, 곧 회초리를 쳐드느라 수탄의 소매가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막대기가 딱하고 갈라질 때와 같은 따끔하고 찌릿하고 얼얼한 타격에 그의 떨리는 손은 불붙은 가랑잎처럼 오므라졌다. 그 소리와 고통에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의 온몸은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고 팔도 떨리고 있었다. 화끈거리며 새파랗게 질린 오므라진 손 또한 허공에 떠다니는 가랑잎처럼 떨리고 있었다. 울부짖음이 입술까지 솟구쳤다. 그것은 용서해 달라는 호소였다. 그러나 눈물이 그의 눈을 뜨겁게 적시고 고통과 공포로 팔다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뜨거운 눈물과 목을 태우는 듯한 울부짖음을 억제하고 있었다.

 

『다른 쪽 손도 내밀어!』학감이 소리쳤다.

 

스티븐은 못 쓰게 된 떨고만 있던 오른손을 끌어당기고 왼손을 내밀었다. 회초리를 치켜들 때 수탄 소매는 다시 스쳤고 요란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미칠 정도로 강렬하고 얼얼하고 뜨거운 고통 때문에 그의 손은 오므라들었고 손바닥과 손가락은 핏기 없이 떨기만 하는 살덩이로 되어버렸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수치와 고통과 공포로 불타며 그는 겁을 먹은 채 떨리는 팔을 끌어들인 후 고통의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몸은 공포로 인해 마비된 채 떨고만 있었고, 수치와 분노에 쌓인 그는 목구멍에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울음과, 화끈거리는 뺨으로 뚝뚝 훌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꿇어앉아!』학감이 소리쳤다.

 

스티븐은 매맞은 손으로 옆구리를 누르며 재빨리 꿇어앉았다. 손이 매를 맞고 아프게 부풀어오른 것을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손이 딱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 손은 자기 것이 아니고 딱하게 여겨야 할 다른 사람의 손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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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냐고. 아니, 아니에요, 정말 아프다고요. 꾀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는 생도감의 손이 이마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생도감의 차고 축축한 손이 닿자 이마는 뜨겁고도 축축하게 느껴졌다. 끈적거리고 축축하고 싸늘한 것이 마치 쥐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쥐들은 두 개의 눈으로 살핀다. 그 미끈하고 끈적거리는 털, 뛰어오를 때마다 구부리는 그 작은 발, 그리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검게 반짝이는 그 눈. 쥐들은 뛰는 법을 안다. 그렇지만 쥐의 마음이 삼각 함수를 이해하지는 못할 거다. 죽은 쥐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죽은 쥐의 털은 바짝 말라 있었다. 죽은 것들일 뿐이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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