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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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떠나야지. 떠날 때가 되었어. 한 목소리가 스티븐의 외로운 마음을 상대로 부드럽게 말하면서 그에게 떠나라 했고 그의 우정도 끝나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그렇다. 그는 떠나야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상대로 다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떠날 거야』그가 말했다.

 

『어디로?』크랜리가 물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곳으로』스티븐이 말했다.

 

『그래』크랜리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살기는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힘이 들어서 떠나려는 거니?』

 

『나는 떠나야 해』스티븐이 대답했다.

 

『가기 싫다면 굳이 네 자신이 쫓겨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네 자신을 이단자나 무법자로 여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하는 얘기야』크랜리가 계속해 말했다. 『세상에는 훌륭한 신자이면서도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게 너에게 놀라우냐? 교회는 단순히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고 심지어는 성직자나 그들의 도그마도 아냐. 교회란 그 속에 있도록 태어난 모든 것들의 총집합체이거든. 나는 네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우리가 하코트 스트리트 정거장 밖에서 서 있던 날 밤 네가 내게 말했던 것이 너의 포부냐?』

 

『그래』스티븐은 크랜리가 장소와 관련지어서 생각들을 기억해 내는 데 대해 미소를 짓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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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런던에서 어떤 소녀가 마차를 탔어』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어떤 길모퉁이에서 한 화물차의 끌채가 그 마차의 창에 부딪쳐 창을 별 모양으로 부숴놓았어. 기늘고도 긴 바늘 같은 유리 조각이 소녀의 심장을 찔렀거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졌어. 신문기자는 그것을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불렀어. 그러나 그건 틀렸어. 내 정의에 의하면, 그 죽음이 공포나 연민과는 거리가 멀지.

 

사실, 비극적인 정서란 두 방향으로 바라보는 한 얼굴이며 각각 공포와 연민을 향하고 있지. 이 두 가지는 모두 비극적 정서는 정적(靜的)이라는 뜻이야. 아니, 극적 정서가 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부적절한 예술이 자극하는 감정은 욕망이냐 혐오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적(動的)이거든. 욕망은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소유하거나 찾아가게 하는가 하면, 혐오는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버리거나 떠나가게 하니까. 그러므로 이 욕망이나 혐오를 자극하는 예술은, 그것이 외설적이냐 교훈적이냐를 막론하고, 모두 부적절한 예술이지. 그러므로 일반적인 술어로 말해 미적 정서는 정적이라고. 마음은 붙잡혀서 욕망이나 혐오를 초월하도록 고양되니까』(315-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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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겉으로 잔잔한 우정을 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이 민족, 이 나라, 이 삶이 나를 만들었어』그는 말했다.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거야』

 

『우리편이 되도록 노력해 봐』데이빈이 거듭 말했다. 『너도 마음 속으로는 아일랜드인이면서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그만』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스티븐이 말했다. 『그들은 소수의 외국인들이 자기네를 예속하는 것을 허용했던 거야. 그들이 진 빚을 내가 내 삶과 몸을 바쳐 갚을 것 같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니?』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지』데이빈이 말했다.

 

『톤의 시대에서 파넬의 시대에 이르도록 명예를 아끼는 성실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젊음과 애정을 너희에게 바쳤지만, 너희는 그분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들을 적에게 팔아넘기거나 낙담케 했고 아니면 그분들을 비난하며 다른 사람들 편을 들곤 했었지. 그런데도 나더러 너희 편이 되라는 거니? 나는 차라리 너희 민족이 망하는 꼴부터 보고 싶구나』

 

『그들은 자기네의 이상을 위해 죽었어』데이빈이 말했다. 『우리의 날이 다가올 거야. 내 말을 믿어줘』

 

스티븐은 자기 나름의 생각을 좇으며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영혼이란 내가 말했던 순간에 처음 탄생하는 거야』스티븐이 막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야.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떄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에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데이빈은 자기의 파이프에서 재를 떨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너무 심오해서 내가 알아듣기 힘드는군, 스티비』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라가 제일 중요해. 아일랜드가 가장 중요하단 말이야, 스티비. 나라가 있고 난 후에야 네가 시인도 될 수 있고 신비론자도 될 수 있는 거야』

 

『너, 아일랜드가 무엇 같은지 아니?』스티븐은 냉혹하고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312-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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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스 하우스 뒤쪽 골목은 물이 질퍽거리고 있었다. 그가 젖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조심해서 디디며 그 골목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데 담 너머 수녀정신병원에서는 미친 수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예수님! 오, 예수님! 예수님!』

 

그는 성난 듯이 머리를 흔들어 그 소리를 귓전에서 떨어낸 후, 썩어가는 오물 사이를 허둥지둥 걸어가는데 혐오감과 쓰라림으로 인해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 어머니의 불평, 보이지 않는 미친 여자의 비명 따위가 이제는 그의 오만한 젊음을 꺾기 위해 불쾌하게 위협하는 수많은 소리로 들렸다. 그는 그 소리들의메아리를 저주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러나 그가 길을 따라 가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사이로 그에게 비치는 잿빛 아침 햇살을 맡을 떄 그의 영혼은 그 모든 참담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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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한 소녀가 개울 가운데 혼자 서서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술에 걸려 신기하고 아름다운 바다새의 모습으로 변모한 듯한 소녀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길고 가냘픈 다리는 학 다리처럼 연약했고, 한 줄기 녹색 해초가 살갗에 새겨 놓은 징표처럼 붙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순결해 보이기만 했다. 보다 충만하고 부드러운 상앗빛을 띤 허벅지는 엉덩이까지 드러나 있어서 드로워즈의 하얀 가장자리는 부드럽고 하얀 솜털 깃으로 장식되어 있는 듯했다. 대담하게 허리까지 걷어올린 검푸른 색 치마는 비둘기 꼬리처럼 뒤로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새가슴처럼 부드러웠지만 보잘것없었고, 검은 깃의 비둘기 가슴처럼 보잘것없지만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긴 금발머리는 소녀답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 또한 소녀다웠고 경이로운 인간적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가만히 서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앞에 와서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눈은 그를 향했고 조용히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경망스러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로 오랫동안 그녀는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고 있다가 조용히 눈을 떼어 개울물을 내려다보면서 발로 점잖게 몸을 이리저리 헤쳤다. 조용하게 출렁이는 희미한 물소리가 처음으로 정적을 깼다. 나지막하고 흐릿하고 속삭이는 듯한 물소리는 잠결에 듣는 종소리처럼 희미했다. 이리저리, 이리저리 물이 출렁이는 소리. 그러자 그녀의 뺨에서는 어렴풋한 불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 이럴 수가! 독신(瀆神)적인 환희의 폭발 속에서 스티븐의 영혼은 절규했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고 둑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의 뺨이 화끈거리고 몸은 불덩이 같았으며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는 멀리 모래밭을 활보하면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노래했고, 그 동안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던 삶이 임박해지자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외쳤다.

 

그녀의 이미지는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갔고, 그가 거룩한 침묵 속에서 느끼던 황홀경을 깨는 언어는 없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한 야성의 천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필멸(必滅)의 인간적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춘 천사요 삶의 아름다운 궁정에서 보내온 사자(使者)인 그가 황홀한 순간에 그를 위해 과오와 영광의 길로 통하는 문을 모두 활짝 열어젖히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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