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무처럼님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상"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완독할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있는데, `현대지성`에서 나온 이 책은 여태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네요. 요며칠 사이에 동네서점과 사무실 근처에 있는 서점을 찾아가 봤더니 최근에 개정판으로 나온 세 권짜리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만 있더라구요. 그 책엔 아쉽게도 `주석`이 전혀 없었지만 (제가 다른 책을 통해 이미 읽었던) 몇몇 인물들에 대한 전기 부분을 살펴보니 번역 상태가 별로 흠잡을 데는 없어보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동서문화사판으로 구매할까 마음먹고 있답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가 `출신 가문`에 대해 유별난 태도를 취하는 건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재미 삼아 그 부분을 인용해 보고 싶네요.

* * *

우선,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관한 얘기로 말문을 여는 게 좋을 듯한데, 나는 훌륭한 자손을 둘 부모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창녀나 첩과 같은 여인들과 함부로 동거하는 일을 삼가라고 권하고 싶네. 왜냐하면 아버지 쪽이든 어머니 쪽이든 태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천한 출신에 대해 지울 수 없는 수치감을 지니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이는 일생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그것을 이용하길 원하는 자에게 곧바로 비난과 모욕의 화젯거리를 제공해 주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는 지혜롭게도 이렇게 읊고 있네.

      가문의 주춧돌이 잘못 놓이면,
      후손은 꼭 불행해지는 법.


반면에, 아주 보물처럼 여겨지는 것이 고귀한 태생인데,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 후손을 적자(嫡子)로 낳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지. 사물의 속성상, 혈통이 근본적으로 천하거나 가문을 위장하는 사람들은 늘 의기소침(意氣銷沈)한 상태에 있게 되는데,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는 이를 매우 적절히 선언하고 있다네.

      남자란 비록 대담할지라도
      어머니나 조상의 불명예를 알게 될 때는
      언제나 노예처럼 되는 법.


훌륭한 양친을 가진 아이들은 물론 그 때문에 기쁨과 긍지로 가득 차 있네. 아무튼 사람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인 클레오판토스가 종종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항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동의해 주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의 어머니 역시 원했고,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원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고 말한다네.

(중략)

우리 조상이 간과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말해 주겠네. 무엇인가 하면, 자손을 위해 부인에게 다가가는 남편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거나 아주 조금 마셨을 때에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 왜냐하면 아버지가 취중에 어쩌다가 낳게 된 아이들은 술을 좋아하기 십상이고 과음을 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므로 디오게네스는 감정적이면서 정신 나간 한 젊은이를 보고,

      젊은이! 자네를 가질 때 자네 아버지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네.

라고 말했지.

 

 



-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자유인의 자식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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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는 모든 것이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붉은돼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저 또한 불현듯 바로 저기로, 말하자면 '에게'로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네요. 저도 그동안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가끔씩 '아토스'라는 지명을 만나왔던 터라 그 지명이 그리 낯설지는 않은데, 이토록 자세하게 '아토스'를 담은 책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혹시라도 누가 제게 '아토스'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저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가장 먼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부터 제 옆에 불러낸 다음에, 그 사람이 전해준 놀라운 이야기부터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지 싶습니다. 물론 고대의 저명한 시인들 가운데 호메로스나 오비디우스와 같은 인물들도 자신의 작품 속에 '아토스'를 더러 언급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저 아토스를 '험상궂은 산의 대명사' 정도로만 여기고 자신의 문장을 더욱 아름답게 꾸밀 목적으로 '시적인 표현 속에' 스쳐 지나가듯 담았을 뿐이더군요. 그에 반해 헤로도토스는 아토스에 대해서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더군요. 그래서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아토스에 대해 헤로도토스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인물은 일찌기 없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사람부터 여기로 불러내는 게 마땅하고 좋겠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년 전쯤에 '아토스'를 두고 벌어진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들을 살펴보자면 무엇보다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저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부터 들여다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조차 널리 알려진 가장 인상적인 장소들은 아마도 마라톤 평원이나 테르모펠레 협곡, 혹은 살라미스 항구 등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또 하나의 특별한 장소였던 '아토스' 또한 자세히 알고 보면 '페르시아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할 수도 있지 싶습니다. 헤로도토스가 쓴『역사』속에는 심지어 '전에 아토스 앞바다에서 그랬듯이'라는 표현이 마치 무슨 '관용구'처럼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토스에 대한 이해' 없이는 페르시아 전쟁의 흐름을 온전히 살펴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아래의 그림 속에 담겨져 있답니다.

 

 

위의 그림을 그냥 얼핏 봐서는 도대체 '아토스'가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무슨 역할을 떠맡았는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그림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보태기만 하더라도 누구나 금세 '아토스'에 얽힌 비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러면 우선 페르시아군의 침입로부터 먼저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할까요? 1차(BC492년) 전쟁에서는 결정적으로 '아토스 곶'에서 화살표가 되돌려집니다. 어디로? 다시 아시아 땅으로. 바로 그렇습니다. 기세등등하게 헬라스 땅을 삼키기 위해 나섰던 용맹무쌍하던 페르시아의 대군이 바로 '아토스' 앞에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깨박살이 나고 맙니다. 어쩌면 1차 페르시아 전쟁은 '아토스'에게 대패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지요. 바로 거기서 풍비박산이 난 페르시아 군대는 풀이 죽을대로 죽어 그리스 땅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떠나왔던 고향인 페르시아로 서둘러 되돌아가고 맙니다.

 

제2차(BC490년) 전쟁에서는 어땠을까요? 두 번째 헬라스 원정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아예 '아토스'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못합니다. '아토스'에 대한 엄청난 트라우마 때문에 그들은 로도스 섬, 낙소스 섬, 델로스 섬, 안드로스 섬 등을 거치는 온갖 난관이 도사린 '우회로'를 통해 간신히 아테네로 접근합니다. 그들에게 아토스는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한 곳이기 때문이었지요. 페르시아 군대는 결국 마라톤 전투에서 뜻밖에 마주친 '헬라스의 용맹무쌍함'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끝에 대패하면서 또다시 아시아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3차(BC480년) 전쟁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대전쟁을 준비하는 와중에 다레이오스 대왕은 이미 죽고(BC486년)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일찌기 상상조차도 하기 힘든' 어머어마한 대군들을 끌고 헬라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나섰을 때, 그들은 아토스를 과연 어떻게 지나갔을까요?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육군과 해군을 병행해서 이동시키는 이른바 '투트렉' 전략을 씁니다. 그런데 해군의 이동경로 가운데 결정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삼지창처럼' 바다를 향해 내뻗은 칼키디케 반도의 지협 가운데 아토스 산이 높이 솟아 있는 곶을 빙 둘러 돌아가지 않고, 지협을 '운하'를 뚫고 통과합니다. 결국 저 지협을 만나서,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배를 땅 위로 끌어올려' 건널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운하까지 뚫어서 건넌 페르시아의 함대들은 결국 살라미스 해전(BC480년)에서 대패하면서 거기서 대부분 수장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말지요.

 

자, 어떻습니까? '아토스'가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지가 이로써 어느 정도는 해명된 셈이 아닐까요? 만약에 헤로도토스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흥미진진한 얘기를 우리는 과연 누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을까요? 아토스에 얽힌 페르시아 군대의 이동 경로만 살펴봐도 몹시 흥미로운데, 여기에 더해서 그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던 주역들 가운데 몇 사람의 얘기를 살짝 덧붙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또 얼마나 더 흥미로울까요? 그래서 이왕 내친 김에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이야기'의 몇몇 대목들을 여기서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영화 〈300〉과 〈제국의 부활〉에서도 등장했던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뿐만 아니라 그의 고종사촌이자 두 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떠맡았던 총사령관 마르도니오스입니다. 우선 1차 원정부터 살펴보지요. 그러니까 다음에 묘사된 시대적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BC492년입니다.

 

이듬해 봄 다레이오스는 다른 장군들은 모두 해임하고 고브뤼아스의 아들 마르도니오스가 육군과 해군의 대군을 이끌고 해안 지방으로 내려가게 했는데, 마르도니오스는 얼마 전에 다레이오스 왕의 딸 아르토조스트라와 결혼한 젊은이였다. 마르도니오스는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에 도착하자 다른 장수들이 헬레스폰토스로 육군을 이끌고 가게 하고, 자신은 함선에 올라 함대와 함께 나아갔다. ……

 

(중략)

 

함대는 타소스에서 대륙으로 건넌 다음 해안에 바싹 붙어 항해하며 아칸토스까지 나아갔고, 아칸토스에서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다루며 수많은 함선들을 아토스에 내동댕이쳤다. 3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더러는 아토스 주위의 바다에 득실대는 해수(海獸)들에게 잡아먹혔고, 더러는 바다에 내던져졌으며, 더러는 헤엄칠 줄 몰라 익사했으며, 더러는 동사했다. 함대는 그런 변고를 당했던 것이다.

 

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르도니오스는 아쉽게도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1차 헬라스 원정에서 실패한 책임을 물어 페르시아 왕이 그를 장군직에서 해임했기 때문이었지요. 새로이 임명된 장군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헬라스 원정을 나섰는지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넘어가지요.

 

그들은 말들을 이들 군마 수송선들에 싣고, 육군은 함선들에 태운 뒤 600척의 삼단노선을 이끌고 이오니아로 항해해 갔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곧장 헬레스폰토스와 트라케를 향해 이오니아 지방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지 않고, 사모스에서 출발해 이카리오스 해로 가서 섬에서 섬으로 항해했다. 그들이 이 길을 택한 것은 지난해 아토스를 우회하다가 큰 손실을 입은 탓에 아마도 아토스를 우회하기가 심히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2차 원정에서도 페르시아 군대는 저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의 참패를 끝으로 결국 아시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차례의 원정 실패를 맛본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는 '아테나이 원정'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중에(그는 시종 가운데 한 명에게 식사 시중을 들 때마다 "전하, 아테나이인들을 기억하소서!" 라고 세 번씩 외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재위 36년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크세르크세스가 '선친의 유업'을 떠맡아 결국 3차 원정에 나서게 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엔 헬라스 원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를 전쟁에 나서도록 결정적으로 부추긴 인물이 바로 마르도니오스였다지요.

 

"전하, 페르시아인들에게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아테나이인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지금 당장은 전하께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이귑토스의 콧대를 꺾어놓으신 다음에는 아테나이로 진격하소서, 전하께서 후세에 길이 남을 명성을 얻으시고,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전하의 나라로 침공할 엄두를 못 내도록 말이옵니다." 이것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였다. 그러나 그는 에우로페에는 온갖 과수(果樹)들이 자라고 땅이 비옥한 더없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간들 중에서는 오직 페르시아 왕만이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말도 덧붙이곤 했다.

 

마르도니오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새로운 모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헬라스의 태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렇게 하도록 크세르크세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크세르크세스는 만 4년 동안이나 모병을 계속할 정도로 '3차 원정'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갖췄다고 합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는 '우리가 아는 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으며, 역사상 그 어떤 군대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점에서는 전설에 나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일리온 원정군도, 뮈시아인들과 테우크로스 자손들이 모집하여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에우로페로 쳐들어가서 트라케의 모든 부족들을 정복하고는 이오니오스 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페네이오스 강까지 내려갔던 군대도 마찬가지다.

 

이들 군대를 다 합치고 거기에 다른 군대들을 더해도 이번 군대 하나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아시아에서 헬라스로 이끌고 가지 않은 부족이 있었던가? 큰 강들을 제외하고 그들이 마셔버려 고갈되지 않은 물이 있었던가?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바로 '아토스'에 대한 상세한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지요. 헤로도토스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크세르크세스는 지난번 원정군이 배를 타고 아토스를 우회하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기에 지난 3년 동안 특히 아토스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 말하자면 케르소네소스의 엘라이우스를 기지로 삼고 그 앞 바다에 삼단노선들을 정박시켜놓은 다음,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부대원들로 하여금 채찍질을 당하며 교대로 운하를 파게 했던 것이다. 아토스 주민들도 함께 파야 했다. ······ 아토스는 바다로 돌출한 크고 이름난 산으로, 사람이 살고 있다. 아토스는 육지와 이어지는 곳에서는 반도처럼 생겼고, 12스타디온 너비의 지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아칸토스 해와 토로나 앞바다 사이에 있는 이 지협은 평야와 야트막한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토스 산이 끝나는 이 지협에 헬라스의 도시 사네가 자리 잡고 있다. 사네 남쪽 아토스 산 품안에는 디온, 올로퓍소스, 아크로토온, 튓소스, 클레오나이가 있는데, 페르시아 왕은 이 도시들을 육지 도시에서 섬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가 그토록 힘들게 '운하'를 파도록 명령한 건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후세에 기념비로 남기고 싶어 순전히 과시욕에서'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함선들을 땅 위로 끌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지협을 건널 수 있었는데도, 그는 삼단노선 2척이 나란히 노를 저으며 통과할 수 있는 너비의 운하를 파게'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훗날 언제쯤 그리스를 여행할 일이 있으면 2,500년 전 그 당시 페르시아 군함들이 노를 저으며 지나가도록 지협을 뚫은 '운하'가 아직도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여기까지 쓰고 난 뒤에, 혹시나 하고 '아토스 운하'로 검색해 보니, 아뿔사, 지금은 그 운하를 구경할 수 없다고 하네요. 네이버 지식인에 따르면 "이 운하는 결국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못하고 다시 땅 속에 파묻혔는데,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지진파 등을 이용해서 이 고대의 운하를 조사해보니, 운하 단면의 윗쪽은 300m, 바닥은 150m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빨간 점 두 개를 이은 것이 바로 '크세르크세스의 운하'라고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토스 운하를 뚫었다는 바로 그 지협)

 

 

(아토스 산)

 

어쨌든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아토스'에 관한 이야기기는 아쉽긴 하지만 대략 이쯤에서 접어야 좋을 듯하군요.(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왕에 제 이야기가 페르시아 전쟁터까지 깊숙히 발을 들여놓은 마당이니만큼 여기서 이야기를 조금 더 길게 늘여서 '살라미스 해전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특히 마르도니우스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만이라도 덧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도 잠시 품었더랬습니다만, 그랬다가는 제 얘기가 너무나 터무니없이 길어질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물론 제가 예전에 미리 써놓은 글 속에서 '마르도니우스의 기묘한 행적들'을 일부러 찾아보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는 여기서 글을 멈춘 보답을 온전히 다 돌려받는 셈이 되겠지만 말이지요..... http://blog.aladin.co.kr/oren/6934680)

 

'아토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처럼 터무니없이 길게 늘어놓다가 제가 갑자기 '아토스 운하'에 대한 이미지를 검색하기 위해 다른 창들을 띄워 봤더니 글쎄 어느새『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또다른 책까지 떠올리게 되지 뭡니까. 그래서 이참에 잘 됐다 싶어 마침 그 두꺼운 책까지도 펼쳐보게 되는군요. 거기엔 혹시 '아토스 운하'에 얽힌 무슨 재미난 이야기가 없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그 책엔 오래된 '케케묵은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그 대신 천 년에 가까운 수도원의 독특한 외양 뿐만 아니라, 수도원의 내부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 정도는 생생하게 코앞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좋더군요.

 

신화에 따르면 트라키아(Thracia)의 거인 아토스가 트라키아(Thracia)의 거인 포세이돈에게 던지려던 돌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 생긴 산이라 아토스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의 속주가 되기 전까지 고전주의 시대에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스트라보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아토스산을 수차례 언급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중에서

 

제가 '성산 아토스'를 방문했던 인물을 아직도 한두 사람 더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바로 그리스인들입니다. 맞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에게해로 둘러싸인 바다에 길게 누운 섬 크레타가 고향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입니다. 온갖 전설과 신화가 가득한 그리스에서도 특별한 섬 크레타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대학을 다닌 그가 아토스 산을 다녀온 일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그가 훗날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멋진 소설을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토스'는 카잔차키스에게 정말 특별한 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 또한 지우기 어렵더군요. 카잔차키스의 '작가 이력'은 워낙 파란만장한 면면들로 점철되어서 딱히 어느 한 해만 따로 떼어놓고 보더라도 결코 밋밋한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토스 산'을 여행했던 '젋은 한 때'는 그에게 유난히 더 특별했던 듯합니다. 아토스를 여행했던 무렵의 작가 연보를 여기에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년 전쯤에 있었던 이야기네요.

 

1914년(31세)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아토스 산을 여행함. 여러 수도원을 돌며 40일간 머무름. 이때 단테, 복음서, 불경을 읽음,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몽상함.

 

1915년(32세)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다시 그리스를 여행함. 〈나의 위대한 스승 세 명은 호메로스, 단테, 베르그송〉이라고 일기에 적음. 수도원에 은거하며 책을 한 권 썼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음. 아마도 아토스 산에 대한 책인 듯함. 『오디세우스』,『그리스도』,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초고를 씀. 10월 아토스 산의 벌목 계약을 위해 테살로니키로 여행함. 같은 달, 톨스토이를 읽고 문학보다 종교가 중요하다고 결심하며, 톨스토이가 멈춘 곳에서 시작하리라고 맹세함.

 

1917년(34세)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함. 이 경험은 1915년의 벌목 계획과 결합하여 뒷날 소설『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됨.

 

이쯤되면 '아토스 산'이 갑자기 카잔차키스에게 너무나 중요한(?) 산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작가는 실제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수도원 풍경'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한 작가의 소설 속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아토스 산'의 흔적을 찾다가 가장 웃지 못할 일은 결국 '돼지'까지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속에서 '수도원 살인사건'까지도 꾸며낸 작가가 '아토스'와 함께 '돼지'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제겐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더군요. 제 두 눈이 다 번쩍할 지경이었으니까요......

 

 수도승은 한동안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의 두 눈이 광채를 발했다.

「무얼 주시겠소?」그가 물었다.

「무얼 원하나?」

「절인 대구 1킬로그램하고 브랜디 한 병.」

 조르바가 허리를 구부리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네 속에 악마가 들어앉은 건 아닐까, 자하리아?」

「어떻게 아시지요?」찔끔하면서 그가 반문했다.

「나 역시 아토스 산에서 왔네. 그래서 그곳 물정은 좀 아는 편이지.」조르바가 대답했다.

 수도승은 머리를 떨구었다.

「그래요. 내 배 속에 악마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어요.」

 

 

곧 고원이 나타났다. 고원 저쪽에서 바위와 소나무로 들러싸인 성모의 수도원이 보였다. 바깥 속세와는 담을 쌓고 이 녹색의 고원 위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정상의 고결함과 평야의 부드러움을 깊이 있게 조화를 이루고 서 있는 수도원은 내 눈에 인간의 명상을 위해 고른 더없이 훌륭한 은신처로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서라면 맑은 정신은 인간에게 걸맞은 종교적 광희(狂喜)로 가꿔 갈 수 있으리. 험하고 초인간적인 정상도, 게으르고 풍성한 평야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다운 맛을 잃지 않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곳으로는 더도 덜도 아닌,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이런 곳은 영웅에게도 돼지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이런 곳이니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최고의 사원이 있을 수밖에. ······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중에서

 

 

제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한 가지 더 남았네요. 저도 이번에 붉은돼지 님의 재미난 글 덕분에『에게, 영원회귀의 바다』라는 책을, 그것도 이미 절판된 몹시도 희귀한(?) 책을 중고시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건져올렸답니다. 자칫 저 푸른 바다 밑으로 영영 잠겨버릴 뻔한 책을 이렇게 뒤늦게나마 발굴해서 좋은 글과 함께 소개해 주신 붉은돼지 님께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다시금 전합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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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4. 5 추가)

따라서 우리는 발작의 시작을 느끼기라도 한 양 가만있거나 달아나 평정 속으로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라네. 우리가 넘어지거나 남들을 덮치지 않으려면 말일세. 우리는 십중팔구 친구들을 덮치기에 하는 말이네. 우리는 아무나 가리지 않고 사랑하거나 시기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분노가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적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자식과 부모에게도, 심지어 신과 들짐승과 무생물에게도 분노하는 것이라네. 예컨대 타뮈리스는

 

황금을 입힌 뤼라의 양쪽 팔을 부수고

잘 울리는 현들을 끊어버렸다.

 

판다로스는 자신의 활을 "손수 분질러" 불 속에 처넣지 않으면 자신이 저주받아도 좋다고 했네. 크세르크세스도 바다에 낙인을 찍고 채찍질했을 뿐 아니라, 아토스 산에 편지를 써 보냈네.26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신과 같은 아토스여, 다루기 힘든 큰 돌들로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지어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대를 베어 바다에 던지리라." 분노가 하는 짓들은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우습기도 하다네. 그래서 여러 격정 중에서도 분노가 가장 미움받고 멸시받는 것이라네.

 

주석 26 크세르크세스(Xerxes)는 기원전 480년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아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침입한 페르시아 왕이다. 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놓고 아토스 산을 둘러가는 위험한 항해를 피하려고 반도의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고 바다를 채찍질하는 등 오만의 극치를 보였다. 헤로도토스, 『역사』7권 22∼24장, 35장 참조. 크세르크세스가 아토스 산에 편지를 써 보냈다는 이야기는 『역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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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4-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토스와 관련하여 저런 사연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오렌님은 희랍고전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ㅎㅎㅎㅎ 대개는 그냥 한두번 봐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ㅎㅎㅎ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예전부터 한번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오렌님의 페이퍼에 힘입어 저도 드디어 구입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문넣었습니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읽듯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세월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제가 아직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있는데요.. 이런 대작들은 결국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한 번 읽었다고 해도 뭐 기억나는 것도 거의 없지만서도 어쨋거나 읽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그런 한심한 생각합니다. ^^

oren 2016-04-04 16:51   좋아요 0 | URL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몹시 두툼한 책이긴 하지만, 한번 붙잡고 읽다 보면 `온갖 흥미로운 인물과 사건들`을 끊임없이 마주치는 재미 때문에 뜻밖에도 금세(?)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답니다. 물론 온갖 낯선 지명과 인명 때문에 처음엔 좀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만 어느 정도 참아내기만 하면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완독할 수 있는 책이랍니다. 아무려면 『로마제국쇠망사』보다 읽기 어렵기야 하겠습니까? 저도 『로마제국쇠망사』는 축약본만 읽었고, 완역본은 진작에 사 놓고도 `엄두가 나지 않아` 여태껏 읽을 생각을 못하고 있답니다. 물론 그 책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볼 작정이랍니다.

아, 참..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는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답니다. 순전히 붉은돼지 님 덕분에 말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다치바나의 책 속에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담긴 여러 흥미로운 얘기들이 여럿 인용되고 있어서 더욱 반갑더군요. 헤로도토스의 책 뿐만 아니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그리스 철학자 열전』등 제게 그리 낯설지 않은 책들도 짬짬이 소개되어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게다가 저도 늘 가 보기를 꿈꾸는 `에게 해를 둘러싼 숱한 고대의 유적들`을 코 앞에서 생생하게, 더군다나 아주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답니다. 언젠가 제가 그 책 속에 담긴 풍경들과 직접 맞닥뜨리는 감격스런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도 틀림없이 바로 저 책 속에 담긴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사진과 글들`을 이번 기회에 아주 제대로 만난 데 힘입은 바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다시금 상기할 게 틀림없지 싶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4-1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저도 무척 좋아하는 책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 책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oren 2016-04-12 00:01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저는 여태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라는 책만큼은 정말 좋더군요. 공감이 크게 느껴지는 글들도 참 많았고, 그리스와 터키 등지의 고대 유적지에서 저자가 홀로 느꼈던 `남다른 감회`와 마주할 때는 저도 마치 `그곳에서` 함께 머무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로 좋더군요.

고양이라디오 2016-04-11 23:58   좋아요 0 | URL
중고책으로 구입하셨다니 부럽습니다ㅎ 그리스와 지중해 꼭 가보고 싶어요ㅎ

oren 2016-04-12 00:0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는 이집트 쪽과 이탈리아 쪽은 두루 둘러봤는데, 정작 그리스와 터키 쪽은 가 보지를 못해서 이런 책들을 읽으면 아주 애가 탈 지경이랍니다. ㅎㅎ
 

 

어제 흑백으로 만든 영화 『동주』를 보면서 두 번 울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그 두 장면이 어쩌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송몽규 때문에 울었고, 또 한 번은 윤동주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먼저, 윤동주와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고 투사적인 기질을 지녔던 송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범죄사실'에 대해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가 끝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불찰'을 한탄하는 장면은 정말 격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목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순국 선열들이 조국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를 함께 바라보며, 남을 탓하기에 앞서 도리어 자기 자신의 구국 활동이 용의주도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저토록 처절하게 스러지고 말았던가. 특히 그 장면에선 가증스런 일본 고등경찰 때문에 뜨거운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열함이 동시에 겹쳐 떠올랐던 것이다.

 

뒤이어 윤동주 시인이 같은 형무소에서 송몽규와 매한가지로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 그 또한 '조국의 불행'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너무나도 연약하게 '한갓 시나 쓰면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서명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버티며 진술서를 마구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때는 시인의 타고난 천성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한없는 나약함'이 도리어 나를 슬프게 했다. 시인이 느꼈을 그 한없는 무력감과 차마 말로도 표현해 내지 못한 뜨거운 분노 앞에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쟁으로 점철되다시피 했던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피지배 민족이 겪었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정복자들이 보였던 '극악무도한 잔인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우리 민족은 '무수한 외세의 침입'을 잘도 버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도 '남의 나라를 억지로 짓밟은 부끄러운 역사'는 없었다는 일말의 자긍심이었다. 


어쨌든 3.1절 97돌을 맞아 여러모로 몹시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주변 정세'를 함께 떠올리면서, 아직도 과거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은 커녕 최소한의 교육조차도 여전히 생각할 줄 모르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학한 그림자마저 엿볼 수 있게 만드는, 기억에 남을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때맞춰 보게 된 이 영화를 내 글의 도입장치 겸 지렛대로 삼아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얘기를 사진들과 함께 잔뜩 늘어놓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에게 크게 누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라면 아마도 나의 못난 시도를 얼마쯤 눈감아 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독립운동'에 관해서라면 이미 가까운 주변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너무나 많은 형편이어서, 아무나 나서서 함부로 자신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내세우기가 꽤나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이런 얘기를 글로 써 본 적은 아예 없을 정도다. 다만 결국 '집안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동네 친구들'과는 그런 '선조들'에 대해 아주 가끔씩 얘기를 나누곤 해왔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은 틈날 때마다 가문의 전통과 위신을 결코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전수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오래 전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이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모시는 가문이었으니 늘 '자긍심'을 갖고 살라고 말이다.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우리 마을의 종가집 뒷편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사당에는 임금님께서 직접 친필로 썼다는 사액현판(賜額懸板)이 걸려 있다. 그 사당엔 임진왜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 우리 가문의 선조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분의 후손들인 우리 집안 사람들은 아직도 해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자손대대로 그분의 덕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게 바로 '불천위 사당'을 모시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니까 말이다.

 

또한 우리 마을엔 일제 강점기때 마치 윤동주 시인처럼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분도 계신다. 비록 이육사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에 비해서는 그 명성이 많이 뒤떨어지지만 말이다. 마침 그 할아버지께서도 일제 시대때 일본에 건너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바로 그  '릿쿄대학'을 나왔다.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전문 잡지를 창간하시며 왕성하게 활동하신 적도 있었지만, 끝내 시인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를수록 극심해지는  '일본의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낙향'하여 절필하고 칩거에 들어감으로써 '무언의 저항'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우리마을' 관련글들.

 http://www.dbdbstory.com/detail.php?number=1520&thread=22r08r04)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14

 

이쯤에서 나의 얘기를 다시 저 멀리 '백두산'까지 돌려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백두산 종주산행'을 끝내면서 뜻밖에도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겨우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백두산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던 '시인의 모교'를 찾기 전에, 잠시 '백두산'부터 좀 둘러보자. 국경일마다 울려퍼지는 애국가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니 말이다. 내가 백두산을 찾은 때는 2007년 8월이었다.

 

 

 - 고산화원(高山花園)에서 바라본 백두산의 모습

 

 

 - 5호 경계비에서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만난 야생화

 

 

 -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되돌아 서서 5호 경계비 쪽을 바라본 모습

 

 

 - 청석봉에서 한허계곡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 백운봉에서 녹명봉으로 이동하는 등산객들의 모습

 

 

 - 뒤로는 수백미터 낭떠러지인 외륜(外輪)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친구와 함께.

 

 

 - 마침내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천지의 모습(백운봉 근처에서 바라본 모습)

 

 

 - 드디어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 다 왔다. 우리 일행들 뿐이다.

 

 

 -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서 단체 사진 한 컷. 아직도 하산길은 멀기만 하다.

 

 

 - 악전고투끝에 종주산행의 실질적인 종착점이라 할 '장백폭포'에 다다랐다.

 

 

-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연길시에서 용정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원경 관광)

 

 

- 역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용정시내로 진입하기 직전에 버스에서 하차한 후 원경 관광)

 

 

 - 용정시내 대성중학교 교정 뜰에 있는 윤동주 시비,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영화『동주』에서 배우 문성근이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랬으나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마침 문성근 배우의 자택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끔씩이나마 그 앞을 지나칠 때도 있고, 그와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놀랬다.

 

 

 - 영화『동주』의 막바지에 감옥 창살 밖으로 비친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낭송되던 서시(序詩)

 

 

 - 우리 일행은 '용정'을 거쳐 두만강까지 진출했다. 두만강 푸른(?) 물과 푸른 버드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

 

 

- 백두산 잣, 벌꿀, 기념 부채, 백두산 사진, 백두산 기념 수건, 백두산 화석, 그리고 <윤동주 시집> ......

 

 

 - 우리 일행이 산행했던 <백두산 종주 코스>

 

 

 - 2007년에 백두산 종주 산행때 함께 데리고 갔던 아들 녀석이 어느새 180cm가 넘도록 훌쩍 컸다.

   그 당시 중2에 불과했던 녀석이 건장하게 자라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군복무중이다.

 

 

 -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끝내 옥사하고 만 시인 '윤동주'의 삶을 회상할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 『동주』를 보고 나서 그런지 학사모를 쓴 시인의 앳된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 1941년 11월에 쓴 <서시>의 육필 원고

 

 

 - <별 헤는 밤>의 육필 원고

 

 

 - <자화상>의 육필 원고

 

 

 - 윤동주 연보

 

 

오늘이 마침 3.1절이어서 그런지 이 글을 쓰는 동안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선구자 >라는 노래조차 그냥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그 모든 우리의 선조들께 오늘은 진심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드리고 그 분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 우리의 선구자이자 선조들이시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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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3-0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을 먹고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윤동주 문학관에 가족과 들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옥의 느낌을 재현해봤다는 한 개조된 콘크리트 방 안에 갇힌 채 시인의 동영상을 봤었지요. 그때 문득 부끄러운 회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유치한 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탓에 안으로 숨어들어, 그 시를 읽어보는 것조차 힘듭니다. 텅 빈 수레 같은 저의 역사 의식 탓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한참을 모자라지요.

제게 고전을 가르쳐주신 한 노교수께서 정병욱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셨던 까닭에 (가끔 당신께서 예의 대학 시절에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 등을 회고하실 때마다) 수업 시간에 윤동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가르침과 배움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저는 윤동주 시인과 그리 먼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위대한 정신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마음으로 글을 읽고 쓴다고 생각하면 정말 창피해집니다. 우물을 들여다봐도 제 눈에는 뭐가 보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 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p.s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제게는 언젠가 백두산을 꼭 올라가보자는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 땅을 밟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북녘의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함께 오르는 산은, 그것도 북녘의 대산은 의미가 다르겠지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주 부릅니다^^ 아, 그리고 아드님께서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서울에도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군요. 용정 대성중학교에도 물론 <윤동주 기념관>이 있어서 `조선족 처녀`의 설명을 통해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더랬지요. 그리고, 탕기 님의 아버님께서 산을 좋아하신다니 나중에 언제가 되든지 꼭 아버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다녀오시길 바랄께요. 너무너무 좋답니다. 백두산을 실제로 올라가 보면 천지의 그 광대함에 넋을 잃을 지경이랍니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아무리 백두산을 자주 봤더라도 실제로 가서 직접 보는 느낌하고는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있답니다. 정말 강추드립니다^^

프레이야 2016-03-0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가보았던 오일도 시비공원을 보니 무척 반갑습니다. 저 시비 `봄비` 옆에서 사진도 찍었지요.
윤동주와 같은 릿쿄대학을 나왔군요. 영양에 가게 되면 다시 한번 발걸음 하고 싶습니다.
영화 동주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페이퍼, 백두산 사진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나들이 삼아 갔다온 진주성 북문 입구 앞 모 커피숍 유리문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어요.
이북출신인 아버지가 좀더 젊었을 때 백두산을 다녀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금강산은 그 옛날 젊은 시절 몇 번 오르셨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진주성 한 바퀴 도는 것도 힘들어 벤취에 앉아 쉬고 있을테니 너희끼리 돌고 오라고 하십니다.
멋진 아들 군복무 건강히 마치고 오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4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께서 `우리 마을`을 다녀가셨었군요. 오일도 생가는 국문학자들과 국문학도들만 찾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하기야 프레이야 님께서도 이젠 작가님으로 불러야 마땅하니, 마땅히 다녀가셨을 법하기도 합니다. 우리마을 인근에만 하더라도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이육사 생가와 문학관, 이문열 생가와 문학관 등이 즐비하니 한번쯤 두루 다녀갈 만도 하지만 워낙에 오지여서 발걸음 하기가 쉽지만은 않지요..ㅎㅎ

프레이야 님의 아버님께서 이북 출신이셨군요. 그래도 그리운 금강산을 몇 번 가보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군복무때 금강산을 철책선 너머로 여러 차례 구경만 했답니다. 잠시나마 `금강산 관광`이 허용됐을 때 잽싸게 가 볼 걸 그랬나봐요...ㅠㅠ

cyrus 2016-03-0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와 함께 등산했던 날이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아드님이 저보다 잘 생겼고 듬직하군요. 멋진 남자 냄새가 납니다. 건강하게 전역하기를 바랍니다. ^^

oren 2016-03-01 22:4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들 녀석과 등산을 함께 한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답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하고 히말라야를 다시 오르고 싶은데, 아들 녀석은 `그 고생을 왜 일부러 사서 할까` 제게 되묻기만 한답니다. ㅎㅎ 사실, 백두산에 갈 때도 아들 녀석은 지금처럼 여전히 산을 별로 좋아한 것 같지가 않았는데, 그저 아빠가 함께 가자고 조르니 묵묵히 따라 나섰을 뿐이었던 터였지요. 성격이 워낙 좋아서 좀처럼 속을 썩히는 법도 없고 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듬직한 녀석이죠. ㅎㅎ

단발머리 2016-03-0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두산 사진도, 꽃사진도 너무 근사합니다. 듬직한 아드님도 너무 멋지구요.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아직 <동주>를 보지 못했는데, 듣게 되는 평이 모두 좋아서 기대가 됩니다.
어서 서둘러서 가봐야 할 텐데요. ㅎㅎㅎ

oren 2016-03-02 11:10   좋아요 0 | URL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던 적도 있었지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북녘땅을 통해 백두산을 다시 오르고 싶어요. 중국을 통해서 가면 꽤나 멀거든요.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라서 특별히 감동이 더하는 듯해요. 비록 전반적으로는 애잔하면서도 슬픈 영화지만, 그래도 감옥의 창살 밖으로 내다보이는 별들도 아름답고, 시인의 젊었던 학창 시절 모습도 풋풋하고 싱그럽답니다. 단발머리 님께서도 놓치지 말고 꼭 보세요~

yamoo 2016-03-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안 할 수 없는 글이에요! 아드님도 멋지고!!

저는 요번 주 쯤에 동주를 볼 예정입니다. 기대가 많이 되어 실망하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oren 2016-03-07 17:38   좋아요 0 | URL
영화 <동주>는 여운이 참 오래 가는 영화더라구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아직도 그 영화가 생각이 날 정도니까요. 야무 님도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길요~~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 김수영(金秀映), <오래된 여행 가방> 중에서

 

 * * *

 

어젯밤에는 아주 색다른 꿈을 꾸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이나 '꿈 속의 나'와 '실제의 나'를 몇 번씩이나 오가며 이런저런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꿈 속에서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있었다. 꿈에서 벌어지는 일은 늘 형식이 비슷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체 갑자기 '현실 같은 장면' 속으로 곧장 뛰어든다. 말하자면 글에서 상투적으로 만나는 수다스런 도입부나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에 보게 되는 온갖 자질구레한 광고나 예고편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선생님은 까마득한 옛날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반 아이들 몇몇은 어른으로 자라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몇몇 친구들을 '무대' 위에 불러내어 무슨 '연극'을 지도해 주고 계셨다. 물론(?) 내가 그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나한테 '주인공역'을 맡겨 주신 데 대해 속으로 무척이나 감개무량해 하면서 그 '연극 연습'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꿈을 꾼 지도 벌써 반나절이나 훌쩍 지났기 때문에 '연극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함께 무대에 올라와 있던 다른 친구들 몇몇에게도 여러 차례 연기할 역할들에 대해 이것저것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도대체 그 연극 내용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니 참 이상하다. 우리가 연습했던 구체적인 내용이 몇 번이고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를 듯하다가 이내 도로 잠겨버리니 도무지 그 연극의 주제를 다시 떠올리기란 앞으로도 영영 불가능할 듯하다.

 

꿈은 잠시 후에 장면이 바뀌었다. 물론 무대 위에서의 연기 연습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도통 모르는 상태인 채로. 꿈은 대개 그렇게 느닷없이 장면이 바뀌는 법이니 뭐 크게 상관할 일도 아니다. 바뀐 장면에서 선생님은 교무실 같기도 하고 일반 사무실 같기도 한 공간에서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나 역시 마치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홀로 당당하게 선생님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주 오래 전에도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아주 핸섬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분위기는 마냥 우호적이었고 사제지간의 온화한 정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에 다시 한번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선생님께서 어떤 방으로 나를 이끌고 가셨다. 말하자면 그 방은 꿈 속의 배경으로는 연극 무대와 교무실에 이어 세 번째 장면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선생님과 함께 그 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왠지 '연극 연습'을 하다가 말고 '선생님과 나' 둘만 거기서 쏙 빠져나와 '따로' 만나는 상황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음식점의 넓은 홀에 딸린 방처럼 느껴지는 다소 널찍한 그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다가 주춤하시더니 나만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방 안은 앉은뱅이 밥상이 서너 개쯤 놓여진 것으로 보아 음식점인 듯한 느낌이 더욱 분명하게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내 다시 돌아서서 홀 쪽으로 걸어나가셨다. 아마도 무슨 '먹을거리들'을 손수 챙겨오시려고 저러시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잠시 후에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오봉'이라고 부르는 은색의 넓은 쟁반에다가 음식들을 이것 저것 잔뜩 담아오셨다. 수정과를 담은 그릇도 두어 개 보였던 듯하고, 맛있는 떡과 형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다른 먹거리들도 얼핏 보였다. 물론 선생님은 두 손으로 그 '오봉'을 단단히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그 방에 붙은 미닫이 문을 제대로 열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나는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걸 보고 서둘러 문쪽으로 다가가 그 문을 좀 더 밀어서 열어젖혔다. 내 꿈은 딱 거기까지였다. 딱 그 순간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꿈의 마무리도 현실을 닮았다. 일부러 지어낸 일이 아니라면 어드메쯤에서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젯밤에 꾸었던 꿈은 너무나 생생해서 꿈 속에서 느끼기에는 정말 '현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새벽녘에 꿈에서 깬 뒤에도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꿈 속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다시 상기하느라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어쨌든 꿈 속에서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다 도와줄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특유의 따스함으로 나를 대해 주셨다. 아주 오랜 옛날에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늘상 받았던 실제의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선생님과 나 사이에 실제로 무슨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아서 학급의 반장을 맡았다던가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우리반에서 '반장'을 누가 맡았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엄석대와 같은 아이가 있었는지도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선생님 꿈을 꾸었을까. 그것도 무려 사십여 년 만에. 나는 그게 제일 궁금하다. 아주 오래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느꼈던 막연하지만 확고했던 '선생님의 나에 대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 꿈 속에서 장소를 세 번씩이나 옮겨 가는 동안에도 전혀 약화되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단단한 상태로 유지된 채 그게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 꿈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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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졸업 앨범 중 '꿈 속에서도 반가웠던'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페이지

 

 

 -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중 진짜로 잊지 못할 선생님은 4학년 때 우릴 가르치셨던 '이용 선생님'이다. 이 분과의 추억담을 이야기하자면 적잖은 분량의 페이퍼를 한참이나 써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꿈에 만났던 6학년때 담임 선생님 때문에 다시금 꿈같던 4학년때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40여 년 만에 선생님을 '분교'가 있던 우리 마을로 초대해서 다시 만났던 일들에 대해 언젠가는 꼭 한번 글로 옮겨봤으면 싶다.

('분교' 졸업사진. 산골 마을에 살았던 우리는 4학년까지만 다니고 5학년 부터는 멀리 떨어진 읍내로 진학했다.)

 

 

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金秀映)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샤를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꿈속에서 살고 싶어라' 동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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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초등학생, 중학생 교실에 있는 꿈을 꿔요.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동급생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점점 나이 먹을수록 과거에 대한 디테일한 것들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것 같습니다.

oren 2016-01-15 18:24   좋아요 0 | URL
아하... cyrus 님께서도 초딩, 중딩 시절을 보냈던 교실에 가끔씩 가시는군요. 꿈속에서 말이지요. 정작 크고 나면 우리는 꿈에도 그리는 그 교실을 다시는 영영 가보지 못하는 듯해요. ㅎㅎ

프레이야 2016-01-1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 추억이 방울방울, 훈훈한 사진입니다. 초등 6학년 사진은 아직 저도 가지고 있어요. 그때의 교실과 운동장, 나무복도가 생각나네요

oren 2016-01-15 18:26   좋아요 0 | URL
어린 시절에 우리가 보낸 풍경들도 분명 총천연색이었을 듯한데, 유독 흑백사진으로 다시 바라볼 때 더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그게 문득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16-01-15 18:43   좋아요 1 | URL
문득. 흑백사진을 추구하는 옆지기말을 빌자면 색을 뺀 것이 사물의 본질이라 생각한대요. 관념적이긴 해도 일면 공감되구요. 직관적으로요. 우리의 기억이란 것도 그런 성질을 띄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oren 2016-01-15 23:37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의 예사롭지 않은 댓글을 읽으니 뭔가 조금만 더 궁리해 보면 사물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느낌마저 생깁니다. `물질과 기억`에 대해 남다른 심오한 철학을 펼쳤던 앙리 베르그송의 글들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문득 새삼스럽게 떠오르고요. 그게 어떤 내용들이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서 오늘 다시금 찾아본 대목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유년, 청년, 장년, 노년은 단순히 정신의 시각, 즉 한 과정의 연속성을 따라서 밖으로부터 우리에 대해 상상하는 가능적 정지들일 뿐이다. 반대로 유년,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을 [생명적] 전개의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로 생각해 보자. 그것들은 실재적 정지들이 될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그 전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지들이 병렬되어도 결코 운동과 동등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생성된 것을 가지고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 것을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일단 사물처럼 놓인 유년에서, 가정상 그것만을 놓았는데, 어떻게 청년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의 습관적인 말하기 방식은 습관적인 사유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한 논리적 곤경에 처하게 한다. 거기서 우리는 별 걱정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언제나 허용되어 있다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지성의 영화적 습관들을 거부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라고 말할 때 그 표현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는 <어린아이>라는 주체를 놓을 떄 <성인>이라는 속성이 아직 적합하지 않으며, <성인>이라는 속성을 진술할 때 그것은 이미 <어린아이>라는 주체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년에서 장년기로의 이행으로 구성되는 실재는 우리를 빠져나간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성인>이라는 상상적 정지들만을 가진다.

오거서 2016-01-1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 저와 같은 반이었네요. 사진 속 장면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다르네요 ^^;

oren 2016-01-15 23:51   좋아요 1 | URL
아하... 五車書 님도 6학년때 4반 학생이셨군요. ㅎㅎ
아마도 제 또래들이 간직하고 있는 옛날 초등학교 졸업 앨범들은 전국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저 당시만 하더라도 제가 살던 시골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서 `호롱불`을 켜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할 때였고, 그 유명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지도 고작 서너 해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이다 싶은 생각도 드네요..

오거서 2016-01-16 00:09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사진 한 장 남았습니다. 앨범이 없어요. 그래서 빛바랜 사진의 느낌으로 그 당시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본답니다.

프레이야 2016-01-16 00:29   좋아요 1 | URL
두 분 4반이셨어요? 저는 7반이었습니다. 조금 떨어져 있었네요ㅎㅎ

oren 2016-01-16 01:19   좋아요 0 | URL
7반까지 있었다니... 프레이야 님께서는 굉장히 큰 학교를 다니셨군요, 혹은 나오셨군요. ㅎㅎ

프레이야 2016-01-16 10:34   좋아요 0 | URL
9반까지 있었더랬죠. 한 반에 80명이 넘게요. 오전반 오후반 나눠 수업하기도 했던 기억이‥

oren 2016-01-16 13:01   좋아요 0 | URL
9반까지 있었다구요? 그리고 한 반에 80명이 넘게요? 게다가 오전반 오후반까지도 있었다구요?
정말 `인구폭발`이 따로 없던 시절, 프레이야 님께선 그 한복판에서 학교를 다니신 셈이군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는 `분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년 같은 친구들과 늘 `한반`이었어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닌 학교는 전교생 숫자라고 해봐야 고작 90여 명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래도 시골 마을에 있는 학교 치고는 제법 큰 학교였던 셈이지요. 우리 마을에서 시오리(10리에 5리를 더한 거리) 가까이 떨어진 읍내로 진학해서 4반까지 있는 걸 보고는 굉장히 놀랬었죠.

yamoo 2016-01-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글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오렌 님의 꿈 이야기 재밌게 잘 봤어요^^

추억은 방붕방울이 생각나게 하는 글입니다.ㅎ

oren 2016-01-21 15:51   좋아요 0 | URL
추억은 늘상 내 몸 속 어디엔가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갈수록 가벼워져서 나도 모르게 차츰 바람처럼 빠져 나가면서 어디론가 영영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여겨져요. 그래서 우리가 내내 잊고 지내다가도, 그걸 다시 발견하는 순간,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몸 한켠에서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을 불러주기만 애타게 바라던 그 녀석을 다시 알아차리게 되면서, 그 녀석이 너무나 안쓰럽고 또 그 녀석을 너무 늦게 찾아낸 내가 너무나 무심하다 싶어서, 문득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올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김수영 시인의 저 싯구를 읽으면서 말이지요...
 
알라딘의 '안위'가 걱정이다
2015 서재의 달인 발표

 

 

기업들을 오래 관찰하다 보면 가끔씩 '불안한 징후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실마리들은 기업들마다 각양각색이어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경영진의 엉뚱한 짓'을 포함하는 '느닷없는 변화'를 들 수 있다. 그런 변화들 가운데 가끔 긍정적인 변화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변화'로 귀결되는 경우가 훨씬 더 흔하다. 예측 가능한 변화는 좋지만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급작스런 변화는 대개 '나쁜 조짐'으로 해석된다. 주식시장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피하고 싶어 한다.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어도 외부 환경 변화에 휘둘리기 쉬운데 갈피를 잡기 어려운 변화를 보인다면 누가 거기에 몸을 기대고 싶겠는가.

 

2015년 알라딘 서재 결산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서재의 달인' 급증이었다. 왜 갑자기? 알라딘 서재는 해가 바뀔수록 '쇠락하는 징후들'이 점점 더 만연하고 있는데도? 오랫동안 지켜오던 '선발 원칙'을 버리고 '서재의 달인' 엠블럼을 남발(?)하는 이유가 뭘까? 혹시 사용자들의 급격한 이탈을 막으려는 회유책의 일환은 아닌가? 그럼 사태는 자꾸만 더 악화될 뿐인데... 그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아아... 이렇게 '눈에 익은 단계들'을 거쳐 머지 않은 미래엔 '마침내 피할 수 없는 붕괴'가 찾아올 것이다...

확고한 1등 기업이 아니면 언젠가는 꼭 위기가 닥친단 말이야...

빌어먹을...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걸....  

 

그런 마음으로 뒤지기 시작한 '책 속 구절들' 속에서 발견한 글귀들은 다음과 같았다.

 

눈에 익은 단계들

나는 위기가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증권거래위원회가 있든 없든, 파탄을 몰고 올 새로운 투기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익히 눈에 익은 단계들을 밟아가며 다가오고 있다; 핵심 우량주가 붐을 일으킨 다음, 이류 종목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이어서 장외시장에서도 투기판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새로 상장된 주식을 둘러싼 또 한 차례의 끝물 장세가 지나가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붕괴가 찾아올 것이다. 이 일이 언제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빌어먹을 일은,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버나드 J. 라스커(1970년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으로 재직)

 

 

애매함과 딜레마

"원칙과 전례가 깨지면 안 되는 시기가 있는 반면, 원칙과 전례를 고수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때도 있다"

 

 

패닉에 대한 처방들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을 잡아먹는 법이다(Devil take the hindmost)", "재주껏 도망쳐라(Sauve qui peut)", "맨 뒷사람이 개에 물린다(Die Letzen die Runde)", 이런 말들이 패닉에 대한 처방들이다. 이와 비슷한 광경은 사람들이 들어찬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고 고함칠 때의 모습이다. 연쇄편지가 연출하는 과정도 이와 닮은꼴이다. 왜냐하면 그 연쇄고리가 무한정 확장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소수의 투자자들만 가격 하락이 시작되기 전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연쇄 과정의 초반에 참가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거나 곰의 꼬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은

1928년에 미국의 투자자들이 주식으로 선회하고 채권 매입을 중단하면서 독일에 대한 미국의 장기 대여가 중단되었을 때, 뉴욕의 은행과 투자회사들은 독일의 차입자들에게 단기 여신을 계속해주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거나 곰의 꼬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은-적어도 당분간은-그대로 가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눈먼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합리성의 경계선상에 걸쳐있는 세 번째 사례는 머리 속에는 합리적 모델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모델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비합리적 기대라기보다는 느끼지 못하는 지체(undistributed lag)의 사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프랑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마지노선(maginot Line)의 심리"다. 폰지는 "한 사람의 시야가 어느 하나의 사물에 고정돼 있을 때 그 역시 눈먼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유사한 지적으로 월터 배젓은 맬서스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생각을 좀처럼 없애지 못한다."

 

 

내가 무려 10년 이상이나 책을 읽은 감상들을 알뜰살뜰 기록해 오고 책 속 구절들을 꼬박꼬박 쟁여놓은 숱한 메모와 글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두 사라진다면 나에겐 그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알라딘이 망하면 큰일이다! 비록 이 회사에 단 한 푼도 투자한 돈은 없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많은 것들을 나는 알라딘에 의지하며 지내온 터였다. 그런 걱정부터 앞세우며 알라딘 서점에 대해 '약간의 정밀 조사'를 벌였다. 내가 '정확한 근거'가 필요할 때마다 뒤지는 곳도 따로 있으니, 거기엔 나름대로 합리적 판단을 내릴 만한 근거들이 얼마쯤 있으려니 싶었다.

 

그렇게 해서 간략히 찾아본 자료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젠장~

 

아직까지는 '급작스런 붕괴'를 걱정할 단계는 전혀 아닌데 내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알라딘이 비록 '확고한 1등'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단단한 고정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당분간 일평균 방문자수 15만∼17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듯하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는 느낌이다.

 

그럼 서재의 달인은 왜 이렇게 '느닷없는 변화'를 보인 것일까.

 

 

그 깊은 내막을 내가 알아낼 도리는 없었다. 알라딘에 그런 걸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다. 그저 알라딘이 요술을 부리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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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25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서재의 달인 선정자가 많아서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어요. 북플이 활성화되면서 글을 짧게 쓰고, 사진 첨부가 쉬워지기 시작했어요. 스마트폰으로 글과 사진을 올리는 북플 가입자가 부쩍 늘어났어요. 한해동안 북플 가입자 개인이 올린 글의 수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서재의 달인 선정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oren 2015-12-28 01:15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는 cyrus 님의 견해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걸요.. 저는 올해 `서재의 달인` 급증 현상을 보면서 왜 자꾸만 `폭우`가 쏟아진 후의 연못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겠죠. 정말로 `폭우`가 쏟아졌는지 아닌지를 말이지요...
* * *
˝당신이 만약 연못 속의 오리라면, 폭우가 쏟아지면 점점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올라가는 것은 연못의 물이지 당신이 아니다.˝
- 찰리 멍거

kj_Shin 2015-12-3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칙과 전례가 깨지면 안 되는 시기가 있는 반면, 원칙과 전례를 고수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때도 있다˝

서재의 달인 `느닷없는 변화`에서 원칙과 전례가 다소 큰 변화를 보인것 같습니다. 왜 이글을 읽는 지금 단기와 장기가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책을 봐야겠습니다.

oren 2016-01-02 12:31   좋아요 0 | URL
저는 저토록 큰 변화를 보면서 알라딘이 최근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줄 착각했더랬습니다. <서재의 달인> 선정 기준을 대폭 완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다고 해서 꼭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요. 다만 <서재의 달인>에 선정된 사람들조차 어리둥절할 정도로 뭔가 싸구려 상품을 `남발`하는 듯한 인상을 줘서 무슨 큰 이득을 볼 수 있을런지 저는 그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雨香 2015-12-3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이 두배가 되었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재 활동량 전체가 두배가 되었다면 이해가 갑니다만.
알라딘이 망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단 알라딘에 책 읽은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어서요.

oren 2016-01-02 12:34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사전`과 `사후`에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으니 사용자들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지요. 이젠 저도 `알라딘 정책`에 대해선 정나미가 너무 많이 떨어져서 그저 `그려려니...` 합니다. 다만 `앞으로도 오래도록` 망하지나 않았으면 싶은 바램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