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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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이 그립다.

문학의 상업성을 생각한다. 문학은 가난하고 겸손하기만 해야 하는 거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마케팅 잘 해서 정말 좋은 작품이 잘 팔리게 해야지 문학(책)은 늘 점잖은 척 팔짱을 끼고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품위 있는 독자라면 와서 읽든지 말든지 뭐... 이런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하는 거니까 어차피 자본의 세상에서 그나마 사람들의 ‘인간성’을 지키는데 문학이 해야할 몫이란 게 있는 거니까, 문학의 상업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화적 교양이 자본적 교양(?) 앞에서 고사되어 가는 요즘에는 더...

그렇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문학이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어 (좋은 작품인데도 안 팔리는 안타까움을 넘어) 진정한 값어치보다 과대포장되는 건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은희경의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니 그토록 선전할 만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라딘 홈피 상단의 배너가 불편하다.

창비 출판사를 아직 좋아한다. 옛애인 같은 느낌이다. 지금껏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련히 남아있는 그리움,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그 면모를 나이 들어서도 아직 간직하고 있기는 바라는, 젊은 날에 대한 경의로서의 추억... 창비에게 80년대의 창비 정신이 아직 남아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출판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때 애인이었으니까’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은희경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나쁘진 않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가 있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공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이전 것들이 나름 쿨하면서도 낡은 한옥의 어두운 퇴마루를 비추는 노란 가로등불같은 정서가 있었다면) 매우 진보했다. 현대적이란 느낌이랄까.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그래서? 그게 뭐? 이런 느낌이 자꾸 드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자랄 때 구세대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진 사고를 지니고 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의미있게 살기’에 대한 깊은 책임감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저 재미있는 것, 그저 참신한 것, 우리에게 그런 것에 점수를 줄만한 정신적 여유는 없는 것이다. 가끔 서구의 독특한 예술가들이 ‘왜 이런 시도를 하셨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재밌잖아요”라고 대답할 때, 와, 멋지다, 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우리라면 그저 ‘재미있어서’ 어떤 일을 구상하고 실천하긴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만한? 거기에 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에 재미가 더해질 때 높이높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의 선물이 그립다.

은희경의 새 작품들은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내용에 비해 헐거운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릴케의 시를 제목으로 삼고 싶었다는데 그 내용이 바로 그 느낌이라고 생각했나? 주인공은 도대체 왜 살이 빼고 싶었다는 것인가? 아버지를 이유로 대고 있지만 오래 헤어졌던 아버지에게 좋은(나쁜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 살을 빼려한다는 데에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을 잘 절제해서라고? 그래, 이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슬프다’라고 말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어느 독립영화의 화면에서 내레이션은 동수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라고 문어체로 읽지만 영화배우는 그냥 무심하고 뚱한 얼굴로 달동네 계단을 걸어올라 가고 있는 장면을 보듯이, 내면과 대사는(설명일 수도 있고)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

삶의 때를 묻힐 대로 묻힌 주인공은 15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가 잊었던 순수 따위를 다시 기억하는가? 버린 줄 알았던 존재감 희미한 원고와 정체 불분명한 이메일을 통해? 구질구질한 일상을 그린 듯 보일 수도 있는 홍상수 감독 같은 소설에 ‘유리가가린의 푸른 별’이란 장선우 감독 같은 제목이 왜 붙었을까, 아직도 별은 순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일까...

은희경 작품에서는 성별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작품 속에서 늘어놓는 (때론 작품과 별 무관하거나 과잉된, 박학다식을 자랑하는 듯한) 지식과 정보들은 중성적이거나 남성취향적인 것들이 많고 동화 이야기가 열거되는 ‘날씨와 생활’도 화자인 ‘소녀’에게서 여성성이 탈색되어 인형을 보는 느낌이 든다. (수금원은 매트릭스의 스미스 같은, 무성적이고 탈인간적인 느낌마저 든다) ‘고독의 발견’에 나오는 난쟁이 여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 거리감을 둔 사람의 정서분리-역시 인형을 보는 듯한- 가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것과 닮진 않았지만 마치 꿈속의 장면인 듯 편집된 영화의 장면인 듯, 현실과의 개연성에서 난감한 장면들이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은 고독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다.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고발도 주장도 아니다. 소설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시도라 할 만큼 낯설지는 않다. 그럼 뭔가?

해설을 쓴 신형철의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 ‘은희경은 장르다’. 남다르다, 특이하다는 면에서? 그래도 나는 ‘새의 선물’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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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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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편견이 허상을 만들어 나를 가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일은 참 어렵다. 공지영 소설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데, 게다가 90년대 뜬 작가들의 특성 자의식 과잉, 쿨한 척하기를 넘어 거의 시니컬한 시선(자기의 타자화? 그러면 고통도 덜하긴 하더라만)도 덜하고(덜하다기보다 공지영 소설은 작가의 나이에 비해 매우 80년대적 정서가 강하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아니야아니야, 공지영은 진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걸까.

출판사들이 공지영이나 최영미나, 미모가 되는 작가들의 사진을 크게 띠우면서 광고 작전을 폈던 것도 그들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그들 작품의 무게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괜찮은 출판사나 힘있는 평론가들을 만나지 못해 묻혀버리고 마는가 말이다. 실없는 생각이지만 더 예뻤다면, 창비를 만났다면 떴을 소설가나 시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다. 어쩌면 공지영은 그가 젊은 시절 혐오했던 바로 그 '자본의 논리'의 덕을 본 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공지영을 멀리 하게 했다. 한편 그것은 매력 있는 여자를 여자들이 싫어하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피식 웃기도 한다. 그녀가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고 여성지가 좋아할만한 삶의 이력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 일찌기 주목을 받은 여류작가가 아니고 좀 못생긴 작가였으면 나는 그녀를 좋아했을까?

아니 따져 보니 '봉순이 언니'를 제외하고 나는 거의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아주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사실은 매우매우 공감하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안 읽는다고 버티다가 아니지, 의무적으로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손에 쥐었다. 역시나 재미있고, 또 감동적이다.

영화화되면서, 사형제 폐지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주장'을 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다. 만약 그런 주장이라면 윤수처럼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사람말고 정말 죄질이 나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어야 했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동생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았던 말하자면 윤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15년형만 받고 도망가 버린 '그놈' 같은 사람을 설정해서, 이렇게 밑바닥밑바닥 인간이지만 그래도 그가 그토록 인간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의, 학교의 부모의 책임임을 강조하고, 사형 직전 그 짐승같은 이가 회복해낸 인간성을 이보란 듯이 증거물로 들이밀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 치열한 인간탐구, 제대로 사형제 폐지론을 담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형수와 상처받은 상담자는 또한 자본의 논리에 매우 잘 부합하는 상차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윤정은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게 아니라 엄마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위무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윤수 또한 그러했다. 네살 아이를 때려죽인 열살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온 그 엄마의 태연함은 아이의 영혼을 유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힘들고 무겁다. 소설적 설정으로 필요했기에 그토론 그악하게 그려졌지만 윤정의 엄마는 딸을 사랑하지 않은 거였을까 과연?  집안의 체면과 허영 때문에 딸의 상처를 덮어버릴 수 있는 엄마로 그려졌지만 꼭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엄마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거나 상처를 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교에 오는 엄마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지하기도 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특수한 경우 잘못된 운명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자기자신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삶의 질곡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아니 거의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은 잘못된다. 그리고 그 모두가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다. 엄마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족한 엄마를 만나도 자기만의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극복한다. 그리고, 엄마가 힘겨워할 때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둘이 같이 잘 해나가라고 어린 남녀는 '결혼'이란 걸 해서 서로 시행착오도 겪고 쩔쩔매기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 아닌가. 가끔, 전쟁통에 살았다면, 내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다면, 남편이 없거나 무능했다면, 나는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들 입에 들어갈 것을 구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을 해보면서, 내 엄마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엄마란 참으로 근원적인 어떤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엄마들이 행복하고 똑똑하면 아이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처받는 엄마들이 줄어들면, 상처받는 아이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또, 나는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많은 '상처받은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족한 엄마, 아픈 엄마, 이기적인 엄마들이 그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주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상처를 줘서 프게 된 이 아이들을 나는 교사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윤수가, 비록 엄마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지만 모니카 수녀같은 사람을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 만났다면 달랐지 않았을까. 나의 학교 아이들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제 2의 부모이다. 잘 자라고 있는 행복한 아이들에게도 그러해야 하지만 집에서 상처받고, 그나마 학교에 와서 친구들이랑 뒹구는 게 그나마 위안인 아이들에게 교사는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최후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을 지켜주는 '보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무거운 일인데 '아이'들을 사랑하며 키우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과제이다. 이 무거움, 자의식의 늪에서 혼자 종알거리는 소설들보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과 고함과 부들부들 떨림으로 가득찼던 이소설이, 아직은 뭔가 그야말로 2프로 부족한 듯한, 버리지 못한 허위의식이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소설이 그래도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후기에 등장한, 여자 죄수들 중 '공지영 싫어요' 했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했다는 그이, 어쩐지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웃었다. 작가가 어떤 비난 받을 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대도 이만큼 재능있는 사람이 이만큼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고맙다. 공지영씨, 열심히 삽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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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18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 소설을 엄마 혹은 진정으로 따뜻한 모성으로 부재로 본 시각에 공감해요.
역시 예리하십니다.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은 누가 선물해 줘서 나중에 읽었지요.

프레이야 2007-06-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maroo 2007-06-0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공감합니다.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rancet 2007-06-10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부족하다는 공지영 작품론에 대해 지지합니다. 교사가 제2의 부모 역할을 해야한다니, 님은 이미 좋은 선생님 같네요.

2007-06-1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woomuse 2007-06-1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 정말 공감하고 저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잘못된 사랑을 한것에 뒤늦게 나마 후회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해 하기도 합니다. 제가 사서로 있는지역도 매우 환경이 열악한 곳인데 정말 가정에서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져 심신이 힘들고 지친 아이들이라는것을 실감합니다. 앞으로는 학교 시스템에 심리상담이라는 과정에 넣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친구 아들이 다니는 한 중학교에서는 한 학기동안 벌써 두 명이나 자살을 했다는 군요. 벽지지역이나 도시지역이나 모성의 부재. 또는 잘못된 부모의 사랑에 가슴 멍드는 영혼을 위해 처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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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 교사나 학부모, 특히 자기와 성(性)이 다른 자녀를 둔 학부모는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내가 있는 학교에서는 이 책으로 교사들이 독서토론 겸 연수를 했다. 이 책을 교재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 책이 그렇게 좋은 책이냐고.

좋은 책? 감동을 주거나 유용하거나 재미있거나 의미있거나... 그런 책들을 좋은 책이라고 부르는데, 임상 보고서인  이 책이 과연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옳다'라고 단정하며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좀 있다. 남녀차별의 골이 메워지려면 아직도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 시대에, 남녀 아이들을 똑같이 가르치자 외쳐도 모자랄 판에, 제국주의의 유물인 남자고등학교 여자중학교를 벗어나 남녀 공학 속에서 올바른 성정체의식을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매우 다르니 다르게 교육하자'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오해의 여지도 많이 가지고 있고 위험할 수도 있고 선정적일 수도 있다. 그런 혐의가 들수록 이 책을 읽어 보시라고 권한다.

나는 남자 중학생들만 18년째 가르치고 있는 여교사이다. 집에는 중3짜리 남자 아이와 5학년짜리 여자 아이가 있다. 아직도 학교 아이들이 이쁘기 짝이 없지만 최근 몇 년, 남자 아이들의 수성(獸性)에 회의가 들곤 한다. 서열적 질서, 폭력성, 무배려... 그리고 내 아들이 점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하게 커가면서 아들에게서도 학교 아이들에게 넌더리냈던 면면들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싸잡아 '남자들은 애나 어른이나 다 그런 건가' 하는 회의가 들면서 사랑이 식는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권태감이 드는 중이었다.

가령, 강압적 명령과 체벌보다는 대화와 설득을 방법으로 택하는 여교사들을 남학생들은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 교사가 느끼는 감정은 배신감, 그리고 남자의 비열함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은 남자 아이들에게 교육적 의사소통 방법으로 적절한 것은 조곤조곤하고 섬세한 타이름이라기보다(그들은 대개 그것을 잔소리라고 여긴다) 짧고 강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행동의 수정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아이들이 대화와 상담, 인격적 존중 대신 폭력과 강압, 수직관계를 더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방법과 기법적인 면에서 그런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다고 하여 '모든'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교사라면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적 특성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40명이면 40명이 다 너무나도 다른, 빛나는 소우주임을 알아야 한다.  남자아이들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다뤄야 해, 라는 교훈을 이 책에서 얻어가자는 뜻이 아니라, 가령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반응을 보일 때 도대체 저 녀석이 왜 저러지?가 아니라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달리 대체로 이러이러하다더라, 그러므로 저 행동은 교사인 나를 무시해서나 이 자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남자아이들의 일반적인 특성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들의 여러가지 행동들, 부르면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 딸에 비해 책읽기를 싫어하는 것, 자기 아빠가 회사에서 하듯 회의식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시간을 못견뎌하는 것 따위들이 많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딸아이는 논리적이고 지적인데 아들 녀석은 그에  못 미치는구나, 가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길의 제 1과 1항은 사랑하라, 그리고 이해하라, 이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교수법도 안 통한다. 여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우리 남중으로 온 한 여선생님은, 자기 수업에 눈 반짝이는 여고생들의 반응은 거의 예술이었지만 남중 아이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며 한숨을 쉰다. 우리가 아이들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 아이들마다에 다른 수업방식, 교육방식을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좋은 책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모든 주장과 증거들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읽으면서 끊임없이 아, 그랬던 거구나! 아니, 정말 그렇단 말인가? 이게 정말 사실일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문제들을 만났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그리고 결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차별하라는 내용이 아니다. 흔히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말라, 고 말하는데 이 책은 바로 '차이'에 따른 교육방법에 대해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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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를 인정하고, 제대로 알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군요. 전 딸만 키우다보니
남자아이들의 성향(더군다나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짧고 강하게 지적하고 수정방향을 안내하는 방식, 이걸 모르고 저처럼 조근조근
말하고 있으면 잔소리만 되는군요. 좋은 책에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logos678 2007-05-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도 중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있어요.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인 것 같네요~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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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도 윤대녕이 좋아졌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여자 작가들은 자기를 대신함에 틀림없는 소설속 '여자'한테 너무 함몰되고 남자 작가들에게는 너무나 대상화된다. 오직 사랑의 대상. 윤대녕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늘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화자의 성적 대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별다르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이전 소설들의 자의식의 늪에서 오만한 눈빛에서 조금은 빠져나오려 애쓴, 그래서 이전에 자신의 '근원'에 대해 고민했던 그가 이제 사람들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말하자면 그도 늙어가는지 혹은 성숙하는지, 그런 인상이다.

하긴, 나에게,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리워하던 시절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만 그런 줄 알았다가, 남들은 생각도 환상도 없이 생활만 있는 줄 알았다가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러한 아지 못할 그리움들이 있음을 나이들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해이다. 공감이겠지.

윤대녕의 공감이 서늘하다. 영영 다시는 돌아나오지 않을 대숲(나에게는 비오는 바닷가이다), 뭔가를 찾아헤매다니는,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 먼 곳을 다녀온 흔적 또는 추억,  집...그 이유가 어머니 혹은 아버지 혹은 생살 베어내듯 헤어진 정인이든, 무엇이든 사람들은 아득한 그 무엇을 하나씩 가지고 그걸 찾으려 애쓰거나 집착하거나 아예 거기로 가서 묻혀버린다. 차라리 행복해 보인다, 차라리 행복해 보인다...

하긴, 내가 소설을 쓴대도 남자의 존재를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로부터 받은 사랑, 받고 싶었던 사랑을 소설에 녹여내기만도 바쁘고 달콤하고, 그 이상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이해를 해놓고도 윤대녕이 이 부분을 조금 극복해 주면 나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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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학교 - 달콤한 육아, 편안한 교육, 행복한 삶을 배우는
서형숙 지음 / 큰솔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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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글쓴 이의 의도는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겠지만 결국 '좋은 대학 가기'가 오늘날 교육의 궁극적 목표임을 이 책이 오히려 부추기지는 않는지?

지은이가 존경스러웠고 교육방식도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어미로서의 자부심이 덧붙여진 것일지라도 그집 아이들, 한 번쯤 보고 싶을 만큼 괜찮은 아이들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책이 출판이 될 수 있었고 뜰 수 있었던 결정타는 역시 그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떨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잘 키워진 아이들,  대학을 가지 않았거나 소위 말하는 별볼일 없는 대학을 갔더라도 그 아이들의 품성이며 자질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여러 갖춰야 할 바탕 중 일부이고 대학 입학에 자신의 실력만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이 작용한다 전제한다면 그집 아이들도 좋은 대학을 못 갔을 수도 있는데, 만약 그랬더라도 이 책이 이토록 칭송을 받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결국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 자녀 교육의 성공 여부는 좋은 대학을 갔나 못 갔나이고 이 책도 그런 열망에 사로잡힌 어미들 가슴에 호기심의 불을 지폈다고 본다.

둘째, 저자는 '사랑으로'라고 말하지만 과연 단지 '사랑만으로' 교육이 되는 것 맞는지.

서형숙 씨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 이의 정력, 열성, 인격 모두가 부럽다. 하지만 한 편, 나 역시 그이 못지않게 우리 아이들을 간절히 사랑하며 그이가 했던 방식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방식들로 교육을 해왔다. 교육이란 게 들이붓는 것(정성)과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지만은 않음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확인하고, 다만 기대의 눈높이를 너무 높이지 말라고,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지금 힘겨워하고 빌빌거리는 저 아이들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여전히 불행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보자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다독인다.

내 아이들(집과 학교의)은 어쩌면 좋은 대학을 못 갈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한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것이 '덜 성취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되게 된 데에 작용한 것들은 유전적인 것, 천성적인 것, 경제적인 것, 등등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어미인 나의 부족함도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사교육에 휘둘리는 불행한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억지 학원 보내기 따위는 하지 않았고 다만 기회를 많이 만나게 해주려 시간 날 때마다 연극을 보고 캠프를 보내고, 집 마루를 온통 어지럽히고 창문 가득 그림을 그리게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 내 아이들은 내세울 것도 무엇도 없고 학원도 학습지도 해 본 적이 없기에 공부도 잘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서형숙씨가 자녀들을 학원으로 내몰지 않아서 공부를 잘 하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학원을 보내지 않아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라 믿는다. 나는 본질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집 아이들과 우리집 아이들을 달리 볼 것이다. 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좋은 대학을 간 아이들과 (어쩌면) 아닌 아이들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순수한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슬펐다, 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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