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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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이란 타고 나는가, 길러지는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미술교육이 갖고 있는 틀거리, 그 한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야만 길러지는 어떤 것이 분명 있다. 혹자는 정규미술 교육이 창의성을 죽인다고도 하고 혹자는 어떤 위대한 화가의 자유로워 보이는 그림도 탄탄한 데생력에 바탕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최병수의 작품들이 눈물을 부르는 것은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젊은 날의 경험과 사고의 공감대 때문이리라.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충분히 최병수의 존재가 가치로웠을 것이다. 그림이 혹여 조악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던 그의 붓질 속에서 문득문득 발견하는 서늘한 아름다움, 그 미감에 난 더욱 놀랐다. 장산곶매의 그 구조적 아름다움을 보라. 그 규모를 보라. '초심불심'의 그 발상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보라.

집에는 우리가 결혼할 당시 민미협에서 일하던 친구가 선물한 '분단인'이 걸려 있다. 누군지도 모르고 쓰다듬어 보곤 했던 그의 연필 사인. 그가 하룻밤 새 그림값이 치솟는 스타 화가들의 허명을 눌러주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더이상 지금 같진 않겠지. 그런 날이 오리라는 희망이 박할수록 그의 존재는 안타깝고, 그리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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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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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은 최근 읽은 소설 중 거의 최고라고까지 생각했기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이 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빨강'이 최고였던 이유 중에는 그 복잡한 이야기나 구조 속에서도 흥미진진함이 강렬했던 것도 있다.

'검은 책'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하도 오래 들고 다녀서 책 모서리가 하얗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보았던 오래된 이스탄불 뒷골목이 '느껴져서'(그건 아마도 내가 관광지 위주로 다녀서 그랬을 것이다) 좋았던 점과, 그림에 관심이 있다 보니 미술과 동서양의 정체성, 역사적 언급 들이 마음을 끌었던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현대의 이스탄불을 세세히 그리는 '검은 책'이 오히려 낯설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책은 묘하게 마음을 잡아당긴다.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 문학작품을 읽는 곤욕스러움을 겪는 것은 청소년기 '세계명작'을 읽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래서 어느 만큼 영미, 혹은 유럽에 낯섦을 떨쳤다고 생각했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그것들은 내가 알고 학습하고 친해져야 하는 세상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던 것임을, 오히려 주류임을 자처하는 그 문화에서 이제는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왔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체성 찾기, 그리고 글쓰기. 혹은 글쓰기를 통한 정체성 찾기. 양상은 다르나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공감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글쓰기를 통해 발견하게 함을 많은 전문적, 비전문적 '저자'들은 안다. 글쓰기는 때로 작아진 자아, 상처받은 자아의 치유에도 쓰인다. 물론 갈립의 글쓰기는 온전히 자기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제랄'의 대역으로서이지만, 그래서 이제는 '제랄'로 살아가게 되는 갈립의 인생에 연민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글쓰기만이 생의 유일한 위안거리'라는 말에 어느 만큼 공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갈립, 당신은 누구지?  

이제 당신은 누구지?

'나'를 형성하는 많은 것들. 오로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형성된 습관들, 나의 길러진 재능등, 나의 만들어진 명성들, 그런 것들도 결국은 나를 이루는 그 무엇일진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후 갈립에게 남은 '나'는 과연 무엇일까. 오로지 자기자신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일생은 보낸(어쩌면 허비한) 그 왕자처럼, 그가 결국 그 자신을 찾았는가 묻고 싶던 그 왕자에게처럼 갈립에게 묻고 싶다. 이제 당신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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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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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적인 힘 - 엄밀히 말하면 바리의 능력은 주술이라기는 어렵다. 아픔을 읽는 것만으로 그렇게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리는 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동물이나 말없는 존재와의 대화도 가능한 아이였다. 발 마사지를 하면서 (발이란, 한 사람의 가장 낮은 곳 아닌가) 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이였다.

그가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 남편 알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환상 속에 만나는 많은 불쌍한 령들,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환상 속에서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설 속의 바리공주와 바리는 다르다. 그녀는 나약한 현실인이다. 그녀가 강한 부분은 꿋꿋이 살아간다는 것뿐.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바리이다. 사는 것은 고약하게 아픈 일이지만 생명의 본분을 다하여 열심히 사는 것.

그래서 어떤 이는 황석영의 바리는 치유도 해원도 하지 못하는 절망의 바리공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사람들의 발을 주무를 때, 그 어루만짐이 해원이고 치유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미약한가.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남의 발의 굳은 살을 어루만지는 것..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 상담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자주 괴롭다. 상담은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는 아니다. 좀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치료도 가능하겠지만 전문상담교사의 상담은 '들어주기'가 최선이다. 아이들이 쏟아놓는 상처들을 손도 대지 못한다. 남의 아픔을 들으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담이 끝날 무렵, 아이는 "그래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요."라고 말한다.

상담은 내담자가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마주 보게 만들고 이야기하게 만들고 응어리를 풀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가게 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성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참 느려터지고 비경제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나의 신념은 그런 느린 활동들이 세상을 덜 아프게 하고 덜 썩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리가 자기에게 오기를 바라고 그녀에게 발을 맡기는 것은 그녀가 성실하고 뛰어난 발마사지사라서가 아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주술성 때문만도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줄 사람이며 내 생애의 아픔을 들여다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바리의 생명수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녀는 분명 신화 속 바리공주보다 무기력하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남의 아픔을 자기것으로 하고, 결국 자기도 아픔 속에 함께하는 그, 진정성에 감동한다. 그런 이야말로 우리의 무당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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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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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이 책을 좋아한다.

책을 별로 많이 읽지 않은 아이도 어려워하지 않고 읽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감한다.

나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주인공이 자살을 하거나 시도하는가 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보고 좋을 때다! 그런 말을 쉽게 하지만 나는 10대 때 좋은 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날 뿐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나의 아들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것이 입시와 성적에 찌들은 지금의 세태, 억압투성이인 학교의 틀,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열여섯 쯤의 나이는 불안과 열정과 이상이 기묘하게 얽히는 시기이다. 하고픈 것이 많아 그것을 누가 가로막든 아니든 그 열정만으로도 몸살이 난다. 천상의 세계도 궁금하고 친구의 머리 속도 궁금하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의 나이이다. 도대체 뭐가 내가 도달하고 싶은 세상인지조차 몰라 하면서도 거기 닿아보려고 교회도 나가보고 연극도 보고 책에도 빠져보고 나쁜 짓도 해보고 싶은 때이다.

그리고,

자살을 꿈꾸던, 아니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시기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혹시 이 책이 그런 10대의 심리를 섬세히 보여주고 어루만져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목이 너무 불길해서 좋은 책이란 것을 알고도 먼저 권하지는 못했다. 내가 먼저 읽으면서도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이렇게 과감히 선언할 수 있는 아이는 누구일까. 그는 과연 어떻게 된 걸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는 물론 재준이가 죽음놀이를 하면서 쓰는 일기장의 구절이다. 맞다, 자기를 죽음의 세계, 피안에 놓고 객관화시켜 놓고 바라보고 싶은 나이다. 죽음놀이를 하는 재준이는 어쩐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은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고아원에서 모진 학대를 받을 때 자신의 몸을 객관화 시키는 마음의 훈련을 하던 그 아이.. 재준이는 평범해 보이지만 많은 평범한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어른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별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그저 헤헤거리는 태평하고 천진한 어린아이인 줄 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정말 그래 보인다기보다 그렇다고 믿고 싶어서 아이들을 그야말로 '아이 취급'한다는 게 더 맞는 거 같다) 나의 아들은 자신의 연애에 대해 "어른들은 다 아는 듯이 말하지, 엄마도 마치 우리들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말하지, 엄마가 모르는 게 있어", 라고 말하더라. 맞다. 나도 초등학교 6학년 이후 나의 엄마는 나의 세계를 단 10%도 몰랐다. 그 뻔한 걸, 도저히 알 리가 없는 그 속을  어른들은 왜 알고 싶어하고, 좀 안다고 착각하는 걸까.

재준이는 사고로 죽었지만 그것은 주변 사람들과 재준이의 친구 유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 책을 읽은 나의 제자들과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읽었을까. 나의 죽음, 그리고 친구의 죽음이 주는 무게를 이 책에서 읽었을까. 언제나 이야기 자체보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감정의 흔들림을 주목하는데 작가는 어떻게 이 무렵 아이들의 마음을 그럴 듯하게 재현해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많은 취재가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그 무렵을 되돌이켰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쉽진 않았을텐데. 무엇보다도 아이들에 관한 많은 고민과 문제들에 주목하던 이들도 차마 언급 못하던 '죽음'이란 주제를 만지작거릴 수 있던 그 용기에 박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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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1-2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 리뷰 반가워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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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나에게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모두 뒷모습을 남기는 느낌이다. 불사르고 간 인생들, 처절한... 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

삶의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성취한 이들이 아니다. 어떻게 서경식은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모아 놓을 수 있었을까. 그의 글을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처음 접했을 때도, 글을 쓴 사람이 너무 춥게 느껴져서 좋았고 또 안쓰러웠는데 지금도 그렇다.

한겨레신문에서 가끔 서경식의 글을 만나지만 뭐랄까, 일본식 말투가 조금은 이국적인 그의 글은 언제나 잘 읽힌다. 그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이 책 속의 글들도 딱히 그만의 문체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마치 인명백과사전처럼 객관적 사실들을 늘어놓고 가끔, 그들의 시가, 그들의 그림이 어떻게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가끔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데도 짧은 글 속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 - 시들, 사람들의 평, 그가 남긴 말들 따위를 배치하는 방식 - 때문인지 글은 참 술술 읽히면서도 쏙쏙 들어와 박힌다.

어쩌면, '누구'를 선정한 그이의 안목이 이 책을 눈에 착 감기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에는 낯설지도 모를 일본에서 유명한 몇몇 사람들을 소개한 것에 대해 조금은 미안해 하는 듯하지만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던 일본인, 혹은 일본에서 죽어간 활동가들의 이름을 알게 되어서 너무나 기쁘다. 아이미쓰, 가네코 후미코, 하세가와 데루...

얼마전 영화 '색계' 에 대해 잠시 생각했던 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상흔과 역사의 소용돌이는 결코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뿐 아니라 투쟁 또한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조국인 일군국주의에 의한 식민침탈을 조선인 못지 않게 가슴 아파했던 좌파 지식인들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시인들이 있었다. 우린 몰랐다. 중국도 비록 식민지가 되진 않았으나 일본의 만행에 피해를 입었고 친일행각을 벌인 이들과 그들과 맞서 싸우려 했던 애국적, 애족적, 혹은 친인류적 행동가들이 있었음을, 몰랐다기보다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도 일본에서, 중국에서 젊은 나이에 온갖 불명예와 육신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이 나온다. 아닌 것은 아닌데, 그런 생각에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이 따로 있지 않았는데 그들은 왜 만나 함께 싸우지 못했을까...

빅토르 하라의 노래 일부를 직장 메신저의 닉네임에 띄워 보았다. 짧은 향 하나를 올리는 기분이었지만. 어떤 이가 드디어 외국시인의 이름도 올리셨냐고 인사를 해서 기분이 묘했다. 태양은 빛나네, 빛나네, 빛나네... 아무것도 모르고 읽으면 남미의 뜨거운 태양을 연상하고 뜨끈한 열정과 행복을 느낄지도 모를 구절이다. 시란 게 단 한 마디의 울림, 사람마다 다른 받아들임일 수 있지만 태양과 별을 노래하는 그의 시가 나에게는 처절하게 느껴진다. 하필 그날 첫눈이 내린 다음이라 하늘은 참 파랬고 햇살이 눈부셔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진했다. 아름다운 태양이었지만 칠레의 하늘에 이글거리던 태양은 그런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빅토르가  언젠가 날아오르리라던 비둘기가 지금은 칠레의 그 하늘을 날고 있을까.

인간은 왜 이리 슬픈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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