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을 위한 심리학
정의석 지음 / 시그마프레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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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때, 평소 관심있었던 심리학을 꼭 듣고 싶어서 불문과 학생들의 심리학을 수강했던 기억이 난다. 꽤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쩐 일인지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다. 왜 심리학이 공부하고 싶었을까? 나는 어쩌면 고등학교 때 읽은 데미안에 나오는 ‘독심술’ 이런 것을 심리학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학교에 가면 꼭 심리학을 들어보리라 결심했던 것 같다. 독심술과 심리학은 전혀 다른 것이란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누구이며 내 마음은 어떠한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춘기에서 한발도 더 발전하지 못한 미성숙한 영혼인지도 모른다.

작년의 독서치료에 이어 올해는 미술치료 연수를 받고 있다. 수년 전, 전문상담교사 과정을 공부했지만 나의 심리학적 지식은 매우 일천하고 중구난방이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학생을 위한 심리학’을 빌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뭔가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주워들고 읽었는데, 머릿속에 많은 용어들이 난무하는데, 정리는 잘 안 된다.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의 그러하듯이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여러 가지 행동과 증세들에 대해 소화되지 않은 용어들로 해석하려 들곤 했었다.

반성은 실천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더 많이 공부하는 것뿐이다. 물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모색이 있어야 한다. 혼자만의 공부가 아니라 세미나나 어떤 집단을 통해 혹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야겠다. 


어쨌든, 반성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는 고백이다.
이 책은 아마도 저자의 교양 심리학 강의록인 듯싶다. 흔히 심리학 책들이 개론과 역사에서 시작되어 앞부분만 닳도록 외우게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구성이다. 일단 개념이 아주 쉽게 정리가 되어 있다. 물론 깊이는 없다. 그런데, 쉽게 설명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혹시 생각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탁월한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청중의 수준에 맞춰 쉽게 설명하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책을 칭찬해 주고 싶은 첫 번째 이유이다.
 

많은 통계 자료와 그림들이 쓰였는데,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게 활용되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칭찬할 요소이다. 강의 준비를 정말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을수록 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선생은 오늘 배울 분량을 잘 이해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혼자서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저자 정의석 씨도 그런 선생일 듯싶다.

얇은 공책 한 권에 필기를 해가면서 책을 읽고 그 공책을 버렸다. 아마 이 책에 나온 많은 용어들(이미 전에 들었거나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을 다른 곳에서 발견하면 아, 들어봤는데 뭐였지, 하고 또 헛갈릴 것이 뻔하다. 하지만 공책을 다시 펼쳐보기보다 새로운 책을 찾아 또 읽을 것이다.  교단 20년차 교사이지만 새학기마다 아이들 앞에서 새내기 선생처럼 긴장을 한다. 그렇듯 늘 심리학을 처음 대하는 대학생같은 그런 마음으로 상담공부를 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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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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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한다. 떠나 살고 싶어도 하고, 공부하러 나가고 싶어 하기도 하고, 여행을 한 번 다녀온 사람은 해마다 몸살을 하곤 한다. 한 번도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도 늘 꿈을 꾼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누구는 이것을 집단적 허영이라고 욕했지만 한 번도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 없던 그도 짧은 필리핀 여행과 신혼여행 이후로 달라졌다. 허영의 대열에 동참한 것일까?
  

해외여행을 허영의 산물이라고만 보기에는... 

물론 한국에서 외국경험은 그의 경제적 지위와 문화적 세련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과시하려고 외국을 꿈꾸는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억눌림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하고 일종의 백일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꿈을 꾸고 싶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걸어다니면서 꿈들을 꾸고 있는 것이다. 꿈을 잠시나마 실현해 본 사람은 더욱,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간절히.

외국여행을 가면 모두 와인잔을 기울이며 상젤리제 거리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가? 근사한 궁궐 뜨락을 거니는가? 굽 낮은 샌들을 끌고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피곤에 절어 배고픔에 치여, 백인들의 무심과 경멸에 속상해 하루 예산의 계산에 골머리 아파하며 그렇게들 다니지 않는가? 유학을 가서 이민을 가서는 또 안 그런가? 다녀와서 추억으로 남거나 내 삶이 어땠는지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똥폼을 잡을지언정, 그들 앞에서 폼 잡으려고 외국에 다녀오고 싶어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여행은, 이곳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 속에 숨은 일종의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천 년 동안 억눌린 원형적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최근에 급격히 터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갑자기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잊혀졌던 꿈에서 각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현실을 이겨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갑자기 드넓은 세상으로 열리는 이 가슴, 가슴들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나도 그런 갈망의 하나로 여행기를 즐겨 읽는다. 요즘 많이 나오는 가비얍은 여행기도 좋고 사진 혹은 스케치 식의 그것들도 좋다. ‘도시의 기억’도 그 맥락에서 손에 쥔 책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고종석이란 이름 때문에 샀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라면 좀 다른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런 기대와, 고종석의 필력과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를 함께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함께.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여행을 맞는다

맞다. 예술가는 예술가다운 여행을 할 것이고 나 같은 선생들은 선생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을 것이다. 김석철 씨가 건축물을 찾아다닌 책을 읽으면서 어차피 세상 모두를 다 볼 수 없을 때, 자기만의 프리즘을 갖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생각했었다. 기자가 본 세상은 어떨까. 고종석 씨는 기자로서 넘나들었던 ‘도시’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다. 취재를 위해 다녔던 (대개는 선진국의) 도시들은 분명 범부들의 여행기와 달리 읽힌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 이외에 그 지역에 대한 이러저런 지식들을 더 찾아내 곁들이곤 하는 것이야 비슷비슷하지만(일종에 독자들에 대한 노력의 모습이겠지) 기자로서 돌아본 세상 이야기는 좀더 지적이고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기 담긴 경험은 주로 다른 나라 기자들과 취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글은, 묘하게 감성적이면서 묘하게 객관적인 냄새를 풍긴다. 놀라운 것은 정치성이 거의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주 그런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 신문에서 고종석을 알게 된 나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배제된 정치적 발언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굉장히 개인적이고 ‘몽환적’(저자가 좋아하는 단어다)이고 예술적인 글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감성은 좋지만 예술적이라기엔 역시 기자였다. 저자는 일종의 ‘자유영혼’ 파임에는 분명한데 (그가 일 때문에 도시를 전전했다 하더라도 소위 역마살이 끼지 않고서야 그렇다 다닐 운명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기에는 지나치게 소심하기도 (혹시 겸손한 것일까) 또 안정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만히 보면 참 기자스럽다. 아, 물론 기자스럽다고 하기에는 그는 참 겸손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고 가진 능력(글솜씨나 여러 개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 그리고 글에 언급되지 않은 기자로서의 취재능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자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묘하게 감성적이지만 묘하게 객관적인 

내가 다녀 본 곳에 대한 부분은 반갑게 읽었지만 사실 관광객으로서 나의 기억과 취재기자로서의 기억의 접점은 별로 없다. 몽환의 여행기를 읽는다기보다 살짝 공부 무게를 실어 읽었다. 그러나 저자 자신에게는 자신의 열정적 시대의 일기장을 다시 읽듯 새삼스러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인 나에게 충분한 ‘사유’들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의도적으로 그 도시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많이 유보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랬을까.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부분들(홀로코스트처럼, 거의 고전이 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빼고는 언급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보통 여행기보다 무게감도 있고 가비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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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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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조금 의도적으로 샀다.  처세론적이고 실용적인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책을 읽으면 말을 조금이라도 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갖고 샀다는 말이다. 그런 욕심으로 산 책들이 욕심을 채웠던 적은 없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의도

그런데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이 책이 꽤 묵직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을 때 떨리지 않는 방법, 발성법, 호흡법, 발음을 정확히 하는 방법, 적절한 비유나 유머를 구사하는 법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을 기대했다. 한편,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대학에서 강좌를 개설했나,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고 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심정은, 한편 그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고 봐서 조금은 미안한 기분? 한편 내가 원하는 정보들은 아니었기에 책을 덮고 나서도 말하기 실전에 접근할 딱부러지는 무언가는 없다는 실망?(그런데도 여기 올라온 서평들은 이 한권으로 당신의 말하기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이니 영문을 모르겠다.) 처세론적인 책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에서 가치있는 책을 발견한 기쁨? 뭐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다. 

유정아 씨는, 말을 잘하는 비법을 한 마디로 '진심으로 말하기'라고 한다. 그이의 강의록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깊은 내면과 글쓰기로 다듬어진 정갈함에 바탕을 두고 충실한 강의준비로 내실을 갖추고 있으며 올바른 사회의식으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강의는 말하기 방법이 아니라 말하기 태도를 갖추는 데 핵심이 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공부의 기본은 태도일 것이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으로 듣기 수업을

중학교 생활국어에서도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단원이 다루어진다. 교과서 분량이 적지 않다보니 많은 교사들이 교과서 내용을 전부 가르칠 수 없을 때 말하기 듣기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발표하기나 토론, 듣기까지 꼭 수업을 하려고 노력한다. 중등 6년의 국어시간 중 나와의 국어 수업이 거의 유일하게 토론, 듣기 수업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그 중 꼭 하는 듣기 수업이 있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그림책을 가지고 한 분단이 함께 듣기를 한다. 교실에 남겨진 아이들에게는 친구소개하기 글을 쓰게 시켜놓고 각 분단의 첫째 아이들을 복도로 불러낸다. 거기서 그림책의 내용을 짤막하게  들려준다. 그 아이들은 자기 분단의 둘째 아이를 불러내 복도 여기 저기, 화장실, 계단 같은 데서 소곤소곤 내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한다. 둘째 아이는 셋째 아이에게, 또 그 다음 아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들어온 아이는 빨리 자기가 앞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활동지에 옮겨적어야 한다. 이 종이는 나중에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니까. 그렇게 끝까지 이야기를 전달하고 마지막 아이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다 적어서 교단에 나오면 발표가 시작된다. 발표시간은 아이들이 배꼽을 잡는 시간이다. 여섯 분단의 이야기는 다 다르고 그 내용은 심하게 왜곡된다. 그중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를 잘 전달한 분단에게 사탕선물을 나누어주고 나는 원래의 이야기를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다시 들려준다. 프랑스의 어느 고고학자가 신비한 거인의 나라를 찾아간다는 이야기, 하지만 인간들의 욕심으로 거인의 나라는 멸망하고 마지막 남은 아름다운 거인의 잘린 머리는 이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한 고고학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보인다."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나는 이 수업에서 교과서에 나온 대로 듣기의 유의사항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 올바른 듣는자세에 대해 가르친다. 그림책 속의 거인의 마지막 말은 말을 함부로 뱉는 인간들에 대한 슬픈 경고라는 것, 너희들도 고작 여섯 명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고 이야기가 왜곡되는지를 경험했듯이, 말이라는 것은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의 말에 진심을 다해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갖고 있는 진심을 다해 듣는 힘의 진정한 파워에 대해서도.  그래서 내 국어시간에 아이들이 자기 활동을 하다가 집중을 해야 할 때 내가 하는 말은 '듣는 자세!'이다. 이 말이 차려!나 여기 봐! 보다 훨씬 짧게 아이들과 내 눈동자를 맞추게 한다는 것은 나나 아이들이나 모두 신기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싸워 이기는 토론이 아니라 마음을 얻는 토론

다시 유정아 씨의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 '마음' 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유정아 씨의 '진심으로 말하라, 잘 들어야 잘 말한다.'는 정말 감사하고 기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세상을 좌지우지할 인재들이 세상을 지도(지배?)하는 오만한 리더쉽과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존경을 강요하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귀를 여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8장의 '토론'에서는 대학생 토론대회에 제자들을 데리고 나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말을 잘하고 논거자료를 많이 준비하여 승승장구한 팀이 아니라 상대방을 궁지에 몰지 않고 청중의 마음을 얻은 팀이 결국 토론에서 승리하는 경험,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이다. 토론은 흔히 '말싸움'이라서 끝까지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5공청문회에 증인 출석한 이들처럼 발혀내야 할 많은 죄들을 감추고 있는 간악무도한 자들이 아니라면 '싸움'인 토론조차도 윈윈게임은 가능한 것이다. 열렬히 토론하고도 마음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토론문화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도 하다. 

대화와 소통에 대한 관점도 매우 좋고 약자를 배려한 여성주의적 말하기 부분은 신비할 정도로 매력적인 글쓰기 솜씨를 살짝 엿보게 하여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사람 참 멋진 사람이다. 겉으로는 의연하고 안으로 맑은 사람 같아 보인다. 

20년차 국어교사의 말하기 공부

다시, 이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말하기의 기술을 전수받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른 책을 사거나 화술 화법 강의 같은 것을 등록해 들어야 할 것이다. 아, 국어교사인 당신은 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왜 그런 강의에 관심을 갖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할말이 있다. 나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아이들에게 온갖 말들을 하며 살아왔다. 나는 유머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진지한 교사이다. 그렇기에 더욱 진심을 다한 말이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는 것을 잘 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아이들을 졸지 않게 하려면 아이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나는 약간의 당의를 입히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화법이라면 때로는 유머라면 사투리나 연극적 몸짓으로라도 아이들을 더 즐겁게 수업에 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20년을 살아오면서 혹여 나는 말로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자기 몸에 이끼가 낀 줄도 모르고 구태의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워져서 자리에서 좀 일어나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알라딘 장바구니에 연극의 기술을 다룬 책들, 발성과 발음을 가르치는 책들을 담았다. 이 책들이 정말 '실용적이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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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2009-08-05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로서 일일신하려는 님의 자세에 박수를 보냅니다.
발성과 발음, 연극의 기술을 다룬 책 등을 읽고 사고하며 발전하는 교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님께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부럽네요... ^^~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콤 글로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쓴 마이리뷰(오늘날짜로 썼어요.)도 참고해 주시구요.

숲사랑 2009-08-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초등학교 교사를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는 활발하게 잘하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는 정착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2학기에는 경청하고 집중해서 듣는 자세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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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는 화가가 되신 스승이 있다.  제주도의 화가 강요배 선생님이다.  내 고교시절 내내 미술을 가르치셨던 그분은 졸업 후 얼마 안 있다가 전업화가가 되셨고 12월 동인전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셨다. 내 마음 속에는 내내 선생님의 그림 한 점 갖는  소원이 있다. 그러나 가난한 교사의 주머니로 작은 그림 한 점 갖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게다가 강선생님은 제주도의 대자연을 담는 대작을 주로 그리신다. 

그런 마음의 미진함이, 이름없는 화가의 것이라도, 작은 것이라도 그림을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어느 날 인사동에 남편과 나갔다가 김점선의 그림을 보았다. 두 마리의 흰 말이 서로 어우러지는 그림이다. 말들의 표정은 따스하지만 파란 바탕의 희디 흰 말은 맑고 서늘하다. 우리는 그 판화를 샀다. 그림치고 많이 비싼 건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호사였다. 이렇게라도 조금씩 그림들을 갖고 싶었다. 아직은  무명화가인 친구가 우리 결혼할 때 선물로 준 최병수의 '분단인' 판화와 참 어울리지 않아서 서로 멀찍하니 떨어뜨려 벽에 걸고 볼 때마다 흐믓해 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김점선 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손으로 벌어서 산 최초의 진짜 그림의 화가가 돌아갔다니 참 이상한 기분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우리에게 그림 선물을 주고 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 도서관에 빳빳한 새책으로 들어온 점선뎐을 작은 아이 시험공부할 때 같이 밤을 지새며 다 읽었다. 전인권? 한대수? 그런 이들을 만날 때의 그 느낌, 자유영혼의 냄새랄지, 생각의 틀을 잘 따라 걸으며 살아온 내 안에 숨겨진 자유영혼의 열망을 그들은 나 대신 살았을 것이다. 그것에는 어떤 이론이 없고 이데올로기가 없다. 그래서 특히 김점선 씨에게서는 어떤 사회성이 읽히지 않는다. 그의 예쁘기 짝이 없는 그림은 그래서인지 그의 자유분방한 행적과 좀 어울리지 않는 듯도 싶지만 한 편, 싸움도 잘하지만 먼 여행을 즐기지 않고 주로 자기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그의 내면에는 분방함 이상의 두려움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자기 손으로 머리칼을 잘라내고 아무렇게나 입고 사는 듯 했던 그 사람의 외향성 뒤에는 자기 안으로 한없이 스며들고 스며들어 책읽고 그림그리는 인간의 내향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강한 듯 보였지만 한없이 여린 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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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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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종교가 없다  

현재의 나는 무신론자이다.  아니 사실은 신앙을 갖고 싶으나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서'  종교를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맞다. 이런 나에게도 신앙의 역사가 있다. 물론 내게 이 책을 빌려준 동료나,  기꺼이 빌려달라 했던 나나 예수를 어떤 종교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과학적 의미의 예수를 언급했음을 확신하면서(왜냐하면, 저자가 김규항이니까) 읽었던 것이다.  시작도, 읽는 과정에서 만난 예수의 모습도 기독교적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 추억과 감상에 젖어서, 약간의 결기와 더불어 복잡미묘하게 예수를 생각해야 했다. 다른 이에게도 그렇겠지만 내 안에는 많은 예수가 있다. 

 

새벽기도를 다니던 6학년 아이 

초등학교 6학년때, 나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았다. 미아동 재래시장 뒷골목에서 주운 전단지에는 길잃은 어린 양 하나를 찾는 예수의 그림이 그려 있었다. 나는 그 전단지를 읽고 정말 머리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시장 안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목사도 없이 우리는 늘 검은 뿔테안경을 쓴 젊은 전도사 아저씨와 함께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아 소위 시장사람들과 함께 한 개척교회였나보다. 겨울방학에 불교신자인 엄마 몰래 새벽 5시에 손바닥만한 성경책(전도용으로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를 영어회화 카셋트 박스에 숨겨 새벽기도를 나갔고 불도 안 땐 냉골의 방에서 엄마 몰래 고린도 전서 13장을  몽땅 외웠다. 나는 진심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믿었다.  

그 믿음이 끝이 난 것은 호기심 많은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전도사에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게 100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데 그 전에 살았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간 거냐,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 할머니는 기독교가 뭔지 접할 기회조차 없었는데 아무 죄도 없이 지옥에 가야 하는 거냐, 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누구라도 여기에 답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진짜 궁금하므로.)  그 전도사는 '그렇다, 하지만 네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 너의 할머니도 우리 조상들도 구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전도사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온 젊은 청년이었던 것 같다. 어린 청년이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후 교회를 그만 나갔다. 하느님이 진정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내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원리 근본의 어떤 문제인지 한국교회의 논리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인지 그 전도사 개인의 미숙함인지를 아직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요즘도 가끔 독실한 기독교인들과 이 문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여전히 답답함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장 한 권을 가득 채운 성경 구절들 

나의 사랑하는 제자 중에 음악과 신앙으로 열심히 사는 아이가 있다. 정말 맑은 감수성을 가진 그 는 나를 찾아올 때마다 허공에 불고 놀 수 있는 비누방울도 만들어 오고 자기가 쓰던 색깔이 예쁜 볼펜도 가져오고 아르바이트 하던 목공소에서 얻은 자투리 나무로 작은 나무상자를 만들어 오기도 하는 아이이다. 스승의 날에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만 들고 일부러 생전 처음 와보는  우리집 동네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찾아와 우리집 우편함에 장문의 편지를 넣어두고 가곤 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어느 날은 파란 연습장 한 권을 놓고 갔다. 나는 또, 필기감이 좋은, 줄없는 연습장 한 권을 발견하고 나눠쓰자고 두고 간 줄 알았다. 나도 그런 공책을 참 좋아하고 그녀석이 그것을 알고 있을 법 하기에 그럴 듯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씨가 써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장 한 권 가득. 그 아이가 좋아하는 성경 귀절을 일일히 손으로 베껴 적은 것이다. 두레일기와 여러 통의 편지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온 녀석의 약간 날리는 듯한 손글씨가 가득했다. 로마서, 잠언, 그리고 주로 마태 복음이다. 중간에 쓰다가 지운 흔적, 힘들어서 글씨가 점점 늘어지는 곳도 있다. 편지에는, 온전히 선생님만을 위해 쓴 것이라고, 저는 여기 있는 말씀을 모두 믿는다고, 선생님이 함께 믿으시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적혀있다.  

 고뇌하던 청년 예수 

사춘기의 나는 뮤지컬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만나면서 다시 흔들렸다. 사실은 현대 기독교에 대한 조롱을 잔뜩 담고 있었던 그 뮤지컬은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유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라 했다. 유다의 운명에 대해 나약한 우리 인간들이 입을 모아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유다가 너무 불쌍해요.'라고 항변하는 의미였고, 유다는 악인이라기보다 영원한 저주에 갇혀서 스스로 자기 운명에 대해 조롱하면서도 한편 의연하기도 한(요즘 말로 쿨~한) 사내로 그려진다. 그런 설명들을 다 듣고 공연을 보았지만 나는 충격 속에 그 뮤지컬을 보고 또 볼 때마다 예수가 게쎄마네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수없이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예수는 결국 한없이 고독한 인간이었다.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직 그의 맑고 아픈 인간적 영혼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즈음 읽었던 사반의 십자가와 같은 소설 속의 민족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 건설 사이에서 고뇌하던 예수의 모습까지, 내가 사춘기 때 사랑한 예수는 온통 고뇌하고 마음 아파하던 여리기 여리던 30세의 사내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민중가요 속의 얼굴이 그을리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피흘리는 예수였고 정호승 시 속의 가난한 사내 예수였다.

창의적이고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예수를 부인할 수 있을까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변혁의 범주가 어디까지이든,  그의 의미가 사회적 혁명이든 종교적 개혁이든 간에 그는 누구보다 당시 기득권 사회에 대해 반사회적이었고 진보적이었고 놀랄 정도로 참신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인기인이든  수많은 안티세력을 지닌 문제 인물이었든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그가 진보적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가장 득세하는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서 진정한 예수는 가장 멀리 있다는 사실이 내가 단지 비기독교인이라서 그리 생각하는 것만은 아닐 터이다.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진보와 사랑, 두 단어로  우뚝 서는 예수가 다시 오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김규항 씨에게...

저자는 바리새인들을 오늘날의 어중간한 진보주의자 혹은 운동권,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이들이 심지어는 로마나 사두개인들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빗대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애매하기 때문에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진보주의자들 내부의 각성을 부르는 발언이라면 더욱 명확할 필요도 있다.  

물론 운동의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에 대한 지적처럼 공감이 가는 대목도 많지만 이런 내부의 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잘 모르고 오류를 행하는 경우와 전략적으로 거짓되게 운동을 떠드는 이와의 구분이 모호해 진보진영 대다수를  적대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이렇게 비판하는 김규항 씨는 과연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를 자꾸 묻게 된다. 이 책은 흐름이 매우 간결하고 담박하여 매우 마음에 들었고 저자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하다가도 그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그럼 당신은? 하고 묻게 된다. 나는 김규항 씨를 잘 모른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들을 알고 있고 그의 칼럼들을 자주 읽지만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기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과연 완벽하고 온전한 이들이 다른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던가?  저자의 기준으로 버려지게 될 자칭 타칭, 반성적, 전략적, 어설프기 짝이 없거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진보적 지식인의 범위는 너무 넓은지도 모르겠다. 명확한 논거를 대기 전에 뭉뚱그려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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