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국어교육
이계삼 지음 / 나라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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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겨레 신문에서 이계삼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감성과 지성과 현실감각이 어우러진 글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또래쯤 된 소위 386세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0대의 젊은 교사다. 나이가 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은 그의 상념들이 매우 무겁고 진지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과거가 뒤에서 허리춤을 잡아끄는 지금 사람들의 우울과 염려같은 것이 도저히 그를 30대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도 9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자기는 80년대 학번을 정서를 지녔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90년대 초반, 대학은 아직 의분을 버리지 못했다. 전교조 세대이거나 거기 걸쳐 고등학교를 지나왔고 대학이 학생운동의 열기를 이제 막 꼬리떼기 하기 직전,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다 못해 음울하게 보아야 했던 (물론 그 세대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세대들이 있다.  

아니, 그런 세대 분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나 현실을 무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는 일은, 참 괴롭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을 잡아준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빠져 날아가려고 요동치는 풍선을 꼭 잡아 다치지 않게 하는 묵직한 추와 같은 이들이, 그들은 비록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라도 세상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힘이요, 나아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 무게라고 생각한다. 이계삼 선생은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전교조 활동가인 그를 무엇보다도 '교사'라고 부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뛰어난(?) 교장, 교감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활동가나 운동가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시인이나 문필가도 있었으며 공부를 많이 한 선생들도 있었지만 '교사'로서 뛰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사로서는 형편없지만 교장의 정치력을 현란하게 발하는 사람, 수업은 졸리기 짝이 없는데 정치가로 성공한 교사, 삶의 중심이 학교의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공부인 선생, 시는 정말 아름답지만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서 아이들과 동료교사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교사'는 교장이 되고 활동가, 정치가가 되고 박사가 되고 시인이 되는 발판이거나 부수적으로 딸린 이름이거나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수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이고 아이들을 꼭 끌어안는 선생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 아파서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시를 쓰게 했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더 해야만 했고 학교 현장에서 느낀 아픔과 아름다움이 그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거듭나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 교사 출신 ~~라는 이름이 붙은 명망가들은 많지만 정말 교사로서 훌륭한 이름난 사람(뭐, 물론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이름을 얻을, 얻으려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마땅하지만)이 없는 현실이 좀 슬프다. 교사들의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요, 정말 수업으로, 아이들과의 만남으로 교사가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이라서 그렇다 . 

이계삼 선생의 수업은 보고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자료들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늘 내가 중학교 국어교사인 것을 감사한다. 시험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건드려주는 수업을 할 수 있는 '국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정신, 세상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않아야 하는 문필의 정신이 국어과목에서도 살아숨쉴 수 있다는 것이 늘 고마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면 나는 지금의 고통에 2,3배 넘는 힘겨운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교장, 교감이, 학부모가 교육과정이 팔짱을 끼고 내 수업을 도대체 뭐하는지 지켜보겠다,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가차없이 너를 치겠다고 사방에서 벼르고 있는 세월을 20년 지나왔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그 모든 수업에 최선을 다했고 재미있어 했고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과연,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과 그렇게 잘 갈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업계는 신학기 초에만 고생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학사 일정의 변동 사항에 따라 수업을 조정하는 일만 하면 되지만, 보충수업계의 경우 방과후학습 지도비 문제까지 겹치고, 방학까지 포함해서 보충수업 시간표와 수강과목 인원 및 강사 조정 등으로 1년 내내 엄청나게 바쁘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수업계 담당 교사는 한 명인데, 보충수업계는 두 명이다, 담임교사가 학생 지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부분은 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 혹은 방과후학습 시간을 관리하는 데이다. 공식 교육과정과는 무관한 일에 제일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 

무슨 어록에 기록할 내용도 아닌데 나는 이 대목을 일부러 워드로 쳐서 저장했다. 어쩌면 이토록 똑같이 2~30년 전 학교 교무실 모습이 변하지도 않고 21세기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지, 중학교에서도 소위 '사교육없는학교'라는 모순어법으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이다. 우리 학교도 교육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방과후학교가 중심이 되고 있다. 가장 주요한 부서, 가장 주요한 업무는 수업이나 상담이나 학급운영이 아니라 방과후학교이다. 나라에서 억대의 돈을 지원받고 본 수업이나 기초부진아 지도에 힘쓰는 선생들은 왜 방과후수업에 참여하지 않는지 닦달을 당한다. 본수업 부실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항변하면 열의가 없어서 그런다고, 그러니까 공교육과 교사가 욕먹는다고 오히려 나무란다. 상담실은 무용지물이 되고 상담은 일탈학생 중심이 아닌 학습지도 상담으로 방향을 전환하란다. 학교는 경쟁과 성적향상의 목표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소리높인다. 수업을 잘하는 선생은 눈에 띄지 않지만 방과후수업을 잘하는 교사와 방과후수업에 아이들을 많이 보내고 모으는 교사가 칭찬받는다.  

아무도 중학교(초등학교도?)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 좋은 취지에서 도입된 방과후수업 정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한겨레신문 같은 데서조차 비판의 소리는 없다. 교사들이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면 저러니까 선생들이 편하려 든다는 말을 듣는 거란 비판이 돌아온다. 그래서 대안이 학교가 9시까지 불을 밝히고 바깥에서 학원선생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 말대로 우리 학교 수업계는 한 명이지만 방과후수업관련 업무를 맡은 교사들 모두 4명, 거기다 교육청 지원으로 들어와 있는 행정직원까지 모두 다섯 명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방과후수업 듣는 아이들이 먹을 석식신청서까지 그 교사들이 받는다. 학교 본 업무에서 쓰는 돈 씀씀이보다 더 큰 돈들이 왔다갔다 한다. 

학교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힘을 내야 하는데, 희망이 없으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은 아무 소용이 없는데, 분노와 슬픔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래서 이계삼 선생은 교단에서 열심히,공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자료를 마련하여 가르치고 아이들 가슴에 불을 지피고, 저녁에는 전교조 지회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다. 힘내라 이계삼, 힘내라 우리 아이들, 힘내라 이 땅의 교사들.. 우리 작은 얼굴이 세상을 바로 잡는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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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0-10-0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쑥 인사드립니다. 여러번 들렀지만 글만 보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리시는 글 잘 읽고 있노라고, 다른 서재지기들과 교류를 원하시지는 않는 듯하여 그저 다녀가기만 한다고요. 꾸벅!!! 건필하시기를....

구름배 2010-12-1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12월 아침에도 잠시 시간을 멈추고 읽고 느꼈습니다.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제 누리집에도 옮겨놓습니다. 고맙습니다.
 
손금닷컴 제프님의 손금의 정석 1
유종오 지음 / 여산서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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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선생님 중에 아주 영민하다고 학생들의 선망을 받던 잘생긴 총각선생님이 있었다. 스물 일곱밖에 안 된 나이에 철학적인 그의 언변과 태도와 행동과 더불어 이미 주역을 읽었다더라는 소문이 그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는, 그저 여고생들의 마음을 울리는 우수어린 총각이기만 한 이는 아니었고 그의 지성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전교조 사태로 해직될 때도, 그 이후의 변함없는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조금 냉소적이었던 나에게조차 그가 주역을 읽었다더라는 말이 깊이 새겨져 남아있다. 

그 어렵다는 주역을, 단지 누군가의 사주를 보는 책이 아니라 우주를 담은 철학책이라는 그 주역을... 나도 언젠가 읽어보리라, 기왕이면 그 선생님처럼 20대가 가기 전에...라는 결심은 바쁜 삶에서 잊혀졌고 30대 어느 즈음에 한번 펼쳐보았다가 도대체 왜 내가 이걸 읽고싶어 하는 걸까, 집착 혹은 지적 허영이 아니라면.. 하면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혹시 철학책이라더라, 라고는 했지만 그 안에 담겼다는 남의 운명을 볼 수 있는 열쇠가 10대의 나와 우리들을 흔들었던 건 아닐까, 내가 데미안이 했다는 독심술은 언젠가 나도 해 보리라 결심했던 것에서 한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욕심일 뿐인 것 아닐까. 

손금은 왜 알고 싶어졌나 모르겠다. 정말 손금이 운명을 말해준다는 확신은 없다. 오히려 관상은 과학적으로 그 사람의 삶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손금에 그런 과학성을 찾아볼 근거는 없다. 그런데 왜 그게 궁금했을까. 

몇 가지 사례들에 혹할 수는 있다.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주변에 좀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재미삼아 들여다 보았다. 당연히 내 손금을 모델로. 적어도 내 인생에 대해 어쩌구저쩍구하는 건 부담없는 일이니까.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많이 들여다보고 싶지만 손금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자기 운명은 어떤지 말을 해달라고 한다. 내 눈에는 아주 단순한 것 정도밖에 안 보인다. 나쁜 것이 보인들 말을 할 수도 없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어찌 믿고 말을 해주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손금은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타고난 무엇이 있다 해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고 갈고닦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나의 손금에는 내가 결혼을 늦게 하고 독립적으로 살 것이라고 (배운 대로라면) 써있으나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결혼한 편인데 그것은 남편의 강력한 기운이 나의 고집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는 권력운도 있고 지향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치관이 바뀌면서 내 인생은  '권력''자리'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후회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손금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운명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운명이란 게 있다고 해도 본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배우자 등 주변 사람들의 갖고 있는 운명과의 조화와 상충이 또다른 운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식이 설령 나쁜 손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좋은 기운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도 있고 좋은 운명도 나쁜 배우자를 만나면서 다 까먹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윤동주의 '소년'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이 귀절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작은 손바닥 안에 아름답고 슬픈 세상이 펼쳐진다. 그 강물 안에 그리운 이의 얼굴도 있고 세월도 흐른다. 그런 의미에서 손금은 한 사람의 인생이 흘러가는 강물일 수도 있겠다. 어떤 운명이 흘러가고 있는지 가끔 들여다본다. 재물복이 있네 결혼운이 있네, 가 아니라 내 인생이 여기만큼 왔다,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앞으로도 흘러간다, 여기 파란 강물을 따라.. 열심히 살면서 운명을 만나리라. 피해갈 수 없는 것도 있겠으나 슬픔 없다 할 수 없겠으나 좋은 인연들을 만나며 아름답게 살겠노라, 주로 내 손금을 바라보며 ,손금 공부는 일종의 명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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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꼬야 2013-05-3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가 너무좋아서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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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동생과 올케가 엄마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선물했다. 난 아직 읽기 전이었지만 대략 어떤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좀 탐탁하지 않았다. 치매 걸린 엄마를 잃어버린 이야기가 70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나 아직 늙고 싶지 않은 엄마에게 어떻게 읽힐까. 우울한 인생, 아직도 우울할 일이 남아있는 인생(엄마는 뇌경색으로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7년째 수발 중이다.)에게 이 우울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동생에게, 재미난 이야기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이야기를 드렸냐니까 엄마의 엄마를 생각하라고 그랬단다,참. 

엄마의 엄마는, 우리 엄마가 한 살 때 돌아가셨다. 우리 집에 늘 오셨던 외할머니는 엄마의 계모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렸을 때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다툴 때 '당신도 내가 배다른 자신이라고 나를 무시하느냐'는 말을 얼핏 들었다. 또 외가 종중 모임에 갔다가 엄마의 친모 묘를 보았다. 묘비명의 졸년도를 보고 엄마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물어보았다. 엄마는 계속 부인하다가 마지못해 인정하면서 너희 외할머니(계모이셨던)를 엄마로 알고 컸다, 다른 형제들하고 똑같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사위 생일날마다 오셔서 정말 떡벌어지는 생일상을 차려주고 가셨는데 다른 (배다른) 이모네도 똑같이 가서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를 친딸과 다름없이 여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성껏 하지는 못하셨으리라. 

어쨌든, 나는 엄마의 엄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리 기억에도 없는 친모라지만, 아무리 차별없이 잘 컸다 하시지만 친모가 없는 유아기를 보냈고 언제인가(스무 살에 시집 왔으니까 어렸을 때나 사춘기 때) 엄마가 친모가 아님을 알았을 터인데 그 외로움이 어떠했겠나. 엄마는 화통하고 따뜻한 여자가 아니다. 어둡고 무뚝뚝하다. 가끔 내가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의 나는 교사로, 엄마로 살면서 많이 밝아졌지만 어렸을 때 나는 말이 없고 잘 웃지 않는 아이였는데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이다. 그땐 그게 엄마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엄마의 우울한 성격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엄마에게 빌려온 것이다. 다 읽은 소감이 어떠냐니까, 그냥.. 재밌어.. 그러고 만다. 사실 나는 신경숙을 좋아하지만 안 읽은 지 오래됐다. 숙제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처음엔.. 우울한 이야기가 속상해서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우리 엄마 이야기가 오버랩되니까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나이 들어가는 모든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치매나 뇌졸중으로 자식에게 짐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자주자주 울면서 이 이야기를 읽었다. 특히 남편이 아내를 회상하는 장면은 많이 아팠다. 물론 가장 아프고 아름다웠던 장면은 아마도 중음신으로 차마 이승을 못 떠나던 '엄마'가 마지막으로 자기 태어나 살던 집에 들르는 장면이었다. 나도 엄마가 필요했다는 말,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자들이 많이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했던 엄마의 손길이, 엄마와 멀어지면서 얼마나 귀한 것이었나를 생각하고, 가끔 엄마를 만날 때마다 새삼스럽게 깨달아지는 우리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엄마가 없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이 이야기의 주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그 존재조차를 깨닫지 못했던 엄마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함이겠으나 나는 자꾸, 엄마가 없다는 것, 있다가 없어진 이야기 속의 그 엄마, '박소녀'뿐 아니라 지금 내 100미터 가까이 살고 있는 엄마가 없어진다면 하는 끔찍한 상상과 엄마 없이 자라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엄마없이 자란 내 제자들에 대한 생각까지 생각은 자꾸 뻗어간다. 입가에 묻은 밥풀까지 챙겨주던 엄마, 시든 떡잎 뒤란에 잡풀에까지 오롯이 손길을 미쳐 아이들을 다독이는 엄마의 손길을 미처 겪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무수한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아무리 모자라게 생각할지라고 나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우주에 무한히 감사를 느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일요일 아침에도 우리 엄마는 우리 집에 잠깐 들러 방금 흠뻑 물을 준 내 화분에 물기가 말랐다고 나무라고 간다. 엄마에 대한 감상에 젖고 있을 때 가차없이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나를 압도하는 우리 엄마, 푸근해서도, 다정해서도 아니지만 난 엄마가 있어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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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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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라는 것, 아니 그래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뭉클한 이유는 그 명제가 고귀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만큼 존엄한 것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학벌이 외모가 나의 존엄을 깎아내릴 때마다, 혹은 깎아내리려고 덤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내가 다른 이에게 그렇게 상처받은 것을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할 때마다 새삼 이 명제는 가슴 아프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으로 아이가 어른만큼 존중받아야 하고 여자도 남자만큼 귀한 존재이고 흑인도 백인과 똑같은 사람이고 평민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알며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은 '인간'이며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나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견해는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할 때마다, 그런 선언들이 절절한 것이다. 

나는,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뭐 누구나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생각해 왔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그랬던가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았다. 나는 아이들을 공부 못한다고 차별하는 선생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내 안에 장애인을 볼 때 움찔하는 마음처럼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남다른 면에 대해 움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바르톨로메는 장애의 몸에도 불구하고 영특한 재능도 있고 맑은 영혼과 자존의 영성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못 볼 뿐이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많은 장애인들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영성은, 있으리라고 짐작조차 못하기도 한다. 바르톨로메를 개 취급하는 공주도 나쁘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장애인을 보고 에구, 불쌍해서 어쩌나, 저렇게 살 바에는 태어나지나 말지.. 하고 혀를 차는 할머니들도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기 어렵다.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나를 하찮은, 혹은 없는 존재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것에 저항하지 못하면 살아남을런지는 모르나 내 영혼은 존재감 없이 날아가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개가 아니라고 외쳤던 바르톨로메의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 있는 것이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누구도 개가 아니다. 그리고 공주도 사람이다. 바르톨로메가 사람이듯이.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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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노래한다 창비청소년문학 20
권하은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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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딸보고 "야, 청소녀!" 이렇게 부르곤 한다. 청소년이란 말은 있어도 청소녀는 없지만 말이다. 성장소설에도 유형이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너무 다른 아이들의 내면을 언급하다 보니 성장소설에는 많은 일탈이 있고 어른들의 이해를 구하는 호소가 있고 때론 위악이, 쿨한 척하는 위악이 기승을 떨기도 한다. 명랑이든 심각이든 위악이든 쿨이든, 과장된 면은 있다. 소설이니까 그렇기도 하고. 

바람이 노래한다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주인공 '명지'가 뛰어난 존재도 아니지만 요즘 성장소설에 대세로 등장하는 '겉으로는 별볼일 없어 보이나 나도 꿈이 있는 청소년' 류가 아니고 목사 부모를 둔,  가정도 안정적이고 그림이라는 자기만의 세계도 있는 '멀쩡한' 아이일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친구나 가난한 친구를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봏고 대할  줄 아는 진지한 아이라는 것, 게다가 이 아이는 양갓집 소녀답게 착하게 모범적으로 살자, 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 사랑을 위해 뛰쳐나갈 줄도 아는 아이이다. 어쩌면 많은 소녀들은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특출할 것은 없지만 대체로 큰 말썽없이 자라나, 안에 숨겨진 자신의 욕망과 내면을 잘 추스릴 줄 아는 현명한 소녀들, 그러나 평범이란 이름에 묻혀 그 안에 강고하게 갇혀 있는 역동성들이 평가절하된... 그래서 어느 날 이 평범한 소녀들이 우정과 사랑을 위해 역동할 때 부모들이 '깜딱' 놀라 버리는... 나에게도 있었고 내 주변의 많은 여인들의 어린 시절이 있었고 내 딸에게도 있는 역동성을 가진... 

나의 여고시절에는 성숙한 소녀의 영혼을 친구처럼 맞이해주는 선생님들이 몇 있었다. 나야 남자중학생만 20년을 가르쳤지만(솔직히 여자 아이들의 복잡다단한 행동양식과 영혼과 철학을 감당할 자신도 없다.) 만약 여자아이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다면 별나라끼리만 통하는 전파의 만남을 이루는 듯한 영적인 만남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대도 없진 않다. 

주인공은 첫사랑을 잃지만 자기 스스로 성숙할 줄 아는 아이였다. 세 아이들이 우정이자 삼각관계를 건강하게(결과는 많이 아팠지만) 이끌어갈 수 있는 자기건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른들은 잘 몰랐다. 지금도 어른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도 한편 저 녀석들이 자기 인생을 충분히 이끌어나가리라 믿다가도 물가에 아기를 내놓은 듯 전전긍긍하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 후기에서 가슴에 묻은 사람 이야기를 읽으며 울컥했다. 이 사람도 이 소설을 쓰면서 사춘기에 대한, 첫사랑에 대한, 죽은 친구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았으리라. 누구나, 언젠가 그렇게 하고 싶은 어린 날, 젊은 날, 아픈 날이란 게 있지 않겠나. 글을 써서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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