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 반反성장 복지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요시다 타로 지음, 송제훈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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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오바마에게 쿠바에 대한 미국의 봉쇄를 풀고 미주기구회의에 나올 수 있게 하라고 압박을 넣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쿠바, 그리고 오바마, 라틴아메리카....

 

쿠바는 오래 전부터 여행하고 싶었던 나라다. 이유가 뭐냐 물으면... 체 게바라의 나라이고, 천천히 가는 나라, 그리고 그 어둑한 골목 어딘가에 뭔가를 두고 왔나 싶게 정서적 공감대가 느껴지는 나라라서 그렇다. 유럽의 돌바닥도 좋아하지만 그들의 세련된 부유함은 제국의 피냄새를 안고 있기에 대체로 핍박받아온 민족으로서, 또한 사람이 함께 존중하고 살아야 좋은 세상이라고 소박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쿠바에 가면 그 중간 지점이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막연한 쿠바,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구조를 가진 특이한 나라임에도 소외되고 도태된 나라, 오바마라면 조금은 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놀라운 건, 주변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힘을 합쳐 쿠바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그들이 여러 국가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민족적 유대감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동북아 지역 여러 국가들이 한자문화권에 속하고 비슷한 유교문화를 지니고 있으나 공조와 공생이 전혀 되지 않는 것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불만이 있다면 마치 쿠바가 유토피아인 것처럼(필자 자신은 누누이 쿠바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음에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낮고 느린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쿠바의 그런 가난하고 질박한 삶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쿠바가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비참하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모르겠다. 자본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사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난일지는... 아니, 가난이라는 것이 불편을 넘어서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어떤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쿠바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는 말이 허황되게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쿠바에 자꾸 관심이 가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지난 세기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원의 고갈이나 인간성 말살 등 미래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쿠바의 건축, 농업, 교육, 의료 재난구조 시스템 들을 취재하여 보여주고 있다. 르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쿠바 정부에서 나온 공문 같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정부가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해결하려는 문화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런데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은 무슨 모순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늘 의문을 가졌던 점이 쿠바는 그토록 오래 카스트로가 집권했는데 (오래 집권해서 독재라고 하나?) 부패했다는 말이나 국민이 저항했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 점과 많은 독재국가들이 그러하듯 불안한 치안이나 내전의 흔적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수도 아바나의 낡은 집들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공무원인 건축 설계사가 각 가정에 방문하여 어린이까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건축에 반영한단다. 다만 건축자재가 부족하여 좋은 건축물에서 살기 어렵고 이주 등에도 제한이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도 거주 이전할 때마다 신고에 신고를 거듭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다. 또 한 편,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이 시대에는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 모순이 슬프기도 하다.

 

2008년 8,9월 구스타프, 이케라는 태풍이 왔지만 전자는 사망자 전무, 후자는 7명 뿐이었다고 한다. 허리케인 미셀로 국토 52%가 피해를 입었을 때도 사망자는 5명 뿐. 재해 방재 시스템으로 평상시 대피 훈련을 강화하고 막상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도 대피소 시설을 제대로 해놓아 신뢰가 있다고 한다. 시스템과 신뢰의 문제인 것 같다. 미국 뉴올리언즈에 허리케인이 왔을 때 약탈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뉴스와 비교가 된다.

 

아바나 광장의 초저녁 풍경을 묘사하면서 도시가 밝은 것은 아니지만 치안은 좋은 편이라 한다. 광장을 둘러싼 좁은 골목길에도 가로등이 환하고, 열려 있는 문 안에서는 할머니가 의자를 흔들면서 tv를 보고 있다. 하지만 가로등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최신식 에너지절약형 전구이다. 필자는 ‘여기는 ‘그리운 미래'다’, 라고 표현했다. 검소한 선진성, 지속가능한 성장, 느리지만 인간다운 세상, 지구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의료 교육 등 인간개발지표를 충족시키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 그런 유일한 나라로 쿠바를 꼽으며 일본인인 저자는 에도막부 도쿠가와 시대를 그리워한다. 가난한 권력자, 작은 정부, “힘 있는 자는 녹을 적게, 녹이 있는 자는 힘을 적게” 가졌던 시대, 지역 공동체, 인간적인 법 집행과 공평과 청렴이 공존했던 시대라고. 일본 역사를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리워할 만한 역사 속의 시대를 가진 그가 부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태평성대’가 있긴 했는지....

 

쿠바의 거리에 게바라의 얼굴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카스트로의 초상화는 거의 없다고 한다. 살아있는 지도자는 추앙하지 못하는 법률이 있단다. 법률이 있다고 그게 다 지켜진다는 말인가? 또, 장기집권했던 카스트로가 그것이 법이라서 지켰다면 그것을 독재국가라 할 수 있나? 더 확인해 보고 싶은 내용이다.

쿠바는 가난하지만 더 많은 안전보장이 있어 생활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예술가 로베르토 페레스 비스카이노가 말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는 쿠바 사회 전반의 장점인 동시에 문제일 것 같다. 최소한을 제공하는 국가, 그 이상이 불가능한 국가. 그 중간의 국민의 욕망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수용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은 과연(게다가 국제 공조 없이) 가능할까 싶다. 만약 우리가 통일한국을 건설하고 나서 지금의 쿠바를 넘어선 대안적인 훌륭한 시스템을 갖춘다고 기쁜 상상을 해 보더라도 그 이후, 마치 쿠바처럼 국제적으로 미움을 받고 고립당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참, 때 이른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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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 미드에서 과학을 보다 하리하라 사이언스 시리즈 3
이은희 지음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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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카페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무슨 책을 읽거나 선생의 눈으로 읽듯이, 이 저자도 생활에서 무엇을 보든 그것을 과학과 연관지어 보나 보다. 아니, 그에게 있는 어떤 경험이 '쉬운 과학 이야기'로 재생산되게 하는 필터가 되었나 보다. 만약 내가 미국 드라마를 좀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재미있었을 책이지만 전혀 모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과학과 버무리는 솜씨가 아주 좋다. 그러니 당연히 청소년이 있는 집에서라면 아이들을 위해 구해 보면 좋을 책이다.

나 역시 딸을 위해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만 그 전에 이 책을 어떤 부분들을 수업에 활용하기 위해 체크해 놓았다. 특히 아이들과 핵의 위험성을 공부하는 수업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책이 인용되었다. 브라질의 돌멩이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게 읽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이들에게도 세슘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뉴스에서 세슘, 세슘하면서도 그게 어디에 어떻게 위험한지는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수업에 책을 일부분을 활용하면서 책도 함께 가지고 들어간다. 여기서 인용했노라고, 도서관에 이 책이 있노라고. 내 독서력의 절반은 나를 위해, 그 나머지는 아이들을 위해 채워진다.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우습게 볼 필요가 없다. 요즘 청소년을 위한 책들의 수준은 너무 높거나 재미있거나이다. 그러므로 어른들,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굳이 자기가 관심을 깊이 갖고 있는 학술적인 어떤 분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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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아찌아 마을의 한글 학교 - 첫 번째 찌아찌아 한글 교사의 아주 특별한 일 년
정덕영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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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 책을 읽을 즈음 찌아찌아 마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하긴 어떻게 순수하게 한글을 그들의 문자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나로서는 여기에도 어떤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뒷이야기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정이 삐걱거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이 누군가의 음성언어를 표기할 문자로서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2009년에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사람들 말마따나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고,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20년이 넘는 중등학교 국어교사 자격과 경력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거나 아주 특별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면. 또 그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닐 터이고 말이다. 물론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국어 선생으로서 한국어 지식에 대한 총점검도 받을 겸 여러가지 목적으로 그 126시간의 자격연수를 받았고 시험을 치렀다. 교육과정이 매우 충실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할텐데 자격증을 어렵게 (시험이 어려웠고 합격률동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더랬다.) 얻었던 만큼 기쁨도 컸다. 중등교사자격증도 그렇지만 자격증을 얻는다고 해서 바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칠 것인가는 부딪치며 해결할 문제일 것이다. 가끔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한국어 (특히 어미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구나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할 정도다.

 

이 책은 '교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구체적으로 많이 언급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의 경험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므로 외국에 나가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것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모든 일에서 그러하겠지만 교사로서의 자격에서도 제 1 순위인 것 같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책들을 때때로 읽어야만 지금 나는 이 정도면 교사로서 그럭저럭 괜찮지 뭐, 하는 따위의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려울 때 열심히, 어려운 아이들을 열심히, 그렇게 가르쳐야 정말 선생이다.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다 알고 있고 여러 번 가르쳐 본 것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여 스스로 괜찮은 교사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세상 모든 것을 가르칠 수는 물론 없지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7차교육과정을 거치면서(지금은 개정 7차) 한국어의 문법적인 부분보다는 사회는 보는 눈을 기르는 방향으로 국어교육을 받고 있다. 지식이나 문법, 고전문학의 비중이 제법 있었던 6차교육과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러다 보니 한국어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국어가 4,5차시로 다른 교과에 비해 많은 수업을 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도 더 가르치고 싶고, 말하기 듣기도 부족하고 , 뭐 그런 거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한국어 조음, 발성의 원리나 문법 공부하는 시간에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남학생도 많다. 나도 개인적으로 고전문법 등을 가르칠 때 재미있다.

 

이주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의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그들이 말을 배워가는 그 과정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은퇴 후에 할머니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는 꿈도 꾼다. 무엇이 되었든 진정 글과 말로 세상을 활짝 여는 기쁨의 수업이 될 것이다. 배우는 기쁨, 가르치는 기쁨이 점점 사그라드는 '학교'는 그래서 점점 슬프다. 눈이 환해지고 뇌가 환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환해지는 진정한 배움의 학교는 이제 그 시대를 닫고 있는 것인가. 오래 공교육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이 길을 걸어온 내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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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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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입 밖으로 내 놓은 말이 생각 혹은 영혼을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은 마음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 말이라는 작은 그릇으로 옮겨 담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극히 희박한 희망을 가져보다가, 그것이 한 생에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떠날 요량이다. 물론  서로 다른 세계의 말을 할지라도 한 음절만으로도, 쉼표만으로도 전파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가끔 만나지기도 하기에 그런 만남을 위해 시를 쓰기도 한다. 대체로 이승의, 저잣거리의 말들은 너무 날것이거나 혹은 다 거짓인 고로 차라리 말을 않고, 아니 그저 듣고만 살려 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기 자신이 이 생활 속에서 말로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자로서 또 다른 세계 속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이해가 잘 되고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모국어 속에서 그런 답답함을 느낄 때, 우리는 때로 외국어로, 외계어로 도망간다. 시도 일종의 외계어다.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말.

 

소설 속의 그 여자는 상처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아마도 어떤 달변도 삶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을 여고시절, 그리고 아이를 잃은 지금, 느꼈을 것이다. 말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다. 그녀의 크나큰 절망을 표현해 줄 수단도 되지 못한다. 실어는 병이겠으나 왠지 이 작품 속의 그 여자는 일부러 그것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희랍어로 도망쳐 들어간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미 죽은 말. 말로는 쓰이지 않는 언어. 글만 남아 있는 언어. 때로 시인이나 소설가는 말로는 되지 않는 소통을 글로는 이루어 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러 모국어의 음성을 버리고 사어의 행간으로 자기를 숨기려드는 이 여자는 작가의 페르소나 같다.

 

희랍어 강사인 그 남자,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오래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이국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력이 있다. 그러고 보면 그도 모국어로 시원하게 소통을 해 본 날들이 삶에서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은 늘 벽에 부딪친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소통하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랑을 하더라도 세상살이는 100%의 이해가 불가능한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사랑마저도 하지 못했다.  이제 그가 모국에 돌아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은 말을 잃은 여인이다. 그래, 어쩌면 사랑이란 건 의사소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달팽이들이 더듬이로 서로를 느끼는 것, 몸으로 부딪쳤을 때 가장 민감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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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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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플라톤도 읽고 묵자도 읽고 중구난방이지만 고전을 듬성듬성 읽고 있지만 뭔가 옳은 소리를 하는 책을 읽고 싶지 '혐의'가 보이는 책은 뒤로 미루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렇게 미뤄지다가 최근에 내게 읽힌(?) 책이었고 나름 오해를 풀며 다가가게 된 책이었다면 손자병법도 그런 이유로 (아니 게다가 병법서니까) 아마도 이 생 전체에 걸쳐 읽을 책 목록에 아마 제일 뒤쪽 어디 있을 법하게 홀대받았던 책이었을 듯 싶다.

서점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생의 전략서인 듯 광고를 하길래 흥미를 가졌다. 머리 아플 때 읽으리라 하고 집어든다. 역시나 나는 학교에서 동료들과 아이들을 대할 때의 여러 상황들에 적용하면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인생을 통틀어 전쟁이라 보고 주변 사람들을 동료 장수, 내가 다스려야 할 병사, 혹은 적병, 적의 장수, 적의 군주로 바라보는 '색안경'을 일단 끼고,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전쟁 상황이 된다. 이건 결코 마음이 편한 상상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 인생관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늘 고민하는 일이지만, 인생이 내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몽상'이 되지 않으려면 현실감각이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주의자들은 그들 몫이 있다. 그들이 있어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준다는 것, 인정! 게다가 그들 삶의 안락함을 담보로 하여! 대개는 고결한 삶을 살다'가는' 그들을 존경하면서도 또 한편 이 진흙탕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멋진 전략이 절대 필요함 또한 인정! 그것은 전투일수도 있도 정치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것조차 전략이 필요한 전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순수한 이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귀한 만큼 그들의 이상을 뒷받침해줄 현실주의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런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살고 싶은 까닭에 조금 지저분할지 몰라도 현실이라는 전쟁과 전투 속에서의 나를 상상하고 내가 갖춰야 할 지략과 비법이 조금이라도 이 책에 숨어 있나, 찾아보려 한다.

 

나의 학생들은 나의 병사가 결코 아니며 비록 내가 불편해 하더라도 교장, 교감은 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책을 덮기는 했다. 학교가 전쟁터가 되어, 학부모를 구스를 수 있는 전략을 잘 알아야 하고 학생들을 엄히 다스릴 줄 알아야 하며 교장교감의 억지논리와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하는 현장이라면 지금 이 땅의 교사, 지금 학교 현장에 몸담은 나는 얼마나 비참한다. 그리고 여기서 소위 '승리'를 얻은들 그 얼마나 알량하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학교가 '사랑의 학교'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대개 사랑의 학교라는 말 안에 무수한 학생들의 희생과 방종, 교사들의 침묵과 굴종, 학부모들의 욕심과 주눅듦, 관리자들의 야망과 체념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 말이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을 뿐이지, 말 그대로라면 학교는 사랑이 넘치는 학교여야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치열한 전투현장, 학교에 적용해 읽고 있었다. 가령,

 

형벌은 높은 사람에게, 상은 낮은 사람에게...  라는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군주나 장수라면 이렇게 할 터이지만 고래로, 지금 현재 어느 나라에서나 아마도 대개의 지도자들은 거꾸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공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칭찬하는 게 맞고 상을 주는 게 맞겠지만, 이미 출발부터 다른 아이들을 놓고 상과 칭찬은 결코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성적이 바닥이던 아이가 힘겹게 오르는  자기 성적표의 고성에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낮은 사람'이란 지위와 책임을 말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교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리자들은 일반적인 지도자들처럼 부장교사들에게 당근을 주면서 일반교사들을 '다스리고' 싶어 한다. 평교사들은 부장교사와 평교사의 관계에 대해 부장교사를 '상급자'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지로 승급이나 승진의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위화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평교사도 자신이 부장교사가 되면 사람들 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 애매한 지위가 흔들릴까 불안해 하기도 한다. 그것을 관리자들은 이용하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젊은 교사의 말대로, 교장이든 교감이든, 앞으로 그런 관리자의 길로 나아갈 부장교사이든, 그들이 관리자가 될 '미래'에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후배교사'들이고 동료교사들이다. 윗사람이 아니라. "당신 교감될 때 윗사람들 다 나가고 없어~! 후배들 마음 헤아리고 상처받지 않게 잘 하시라~!"

 

사정이 급하면 상벌을 남발한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대목을 읽고 많이 웃었다. 물론 그 상벌은 역시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상벌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받는 사람들이)야말로 태평성대인지도 모른다. 상은, 받는 사람은 기쁠지 모르나 사실 그 안에 상을 받지 않은 사람(특히 받고 싶어 했고 자신이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받는 상은 벌이 될 수도 있다)을 아프게 하는 전략도 내재되어 있다는 면에서 벌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것을 무기로 쓰기도 한다. 교사들도 칭찬과 훈육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기술적으로 잘 쓰라고 배우고 있지만 상도 벌도, 누군가에게 다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깊이 헤아리지 않는다면 몇몇에게는 좋은 선생님일지 몰라도 많은 아이들에게 아픈 교사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때론 칭찬이 받는 이에게도 못 받는 이에게도 모두 독만 될 수도 있다.

 

잘 싸우는 장수는 불친절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만 내 경우에 이렇게 적용해서 반성을 해보긴 했다. 나는 대체로 친절한 교사라는 평을 듣는다.(엄격한 동료교사들이 그런 부분을 불편해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엄격하고 때로는 폭력을 통해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동료교사들을 '비교육적'이라고 못마땅해 한 적이 많다. 하지만 요즘은 과연 친철함과 깊은 이해가 반드시 아이들을 발전시키기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한다. 엄마같은 마음으로 안쓰럽게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미처 아이들의 진면목(사실은 매우 성숙할 수도 있고 사실은 매우 사악할 수도 있는)을 못보고 어리고 여리고 착한(지금은 잘못을 저질러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가르치면 잘할 것이다,) 아이들이라고 순진하게 잘못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아이들은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교육으로 그들이 좋아지고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냉철하게(100% 그런 건 있을 수 없겠지만) 판단하고 잘 키울 수 있어야 하는데 때로는 지나친 엄격함만큼이나 지나친 배려와 이해가 그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특히 예체능 교사들 중에 아주 엄격한 교사들을 많이 보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때로는 깊은 사랑이 깔린 엄격함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해는,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와 다른 교사들에 대해 폭넓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지 결코 나의 교육방식이나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배려와 칭찬 속에서 더 잘할 수 있는 학생이었던 것처럼, 푸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워서 더 많이 배우고 싶게 만드는 따뜻하고 친절한 교사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고, 분노하되 화내지 않으며, 근심하되 두려워 않고 즐겁되 기뻐하지 않는다. 라는 구절이 있다. 와, 이건 정말 멋진 표현이다. 교사나 부모의 미덕 중에 '엄격함'도 있다. 아무리 자애로운 부모라도 엄격할 땐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의 권위도 그렇다. 늘 다정한 선생님이지만 원칙에 어긋나거나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기준으로 엄격해야 한다. 엄격하다는 것이 무섭고 사납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 큰 소리를 지르고 매를 들고 욕을 하는 사나운 교사나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흔들리지 않고 훈계를 하거나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교사나 부모가 저 경지가 되려면 보통 인간은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 중에 평생을 갈고 닦아도 저런 경지에 완벽하게 이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변의 훌륭한 사람도 그렇고. 하지만 적어도 스승이고 부모이려면 제자나 자녀들에게 저 비슷하게는 보이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무실에서 아이를 야단칠 때 야단을 쳐야 할 때인데 짜증을 내고 있는 교사가 있다. 그 짜증이 듣기 싫어서 그런 행동을 덜 할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은 되지 않는다. 물론 무섭게 화를 내면서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다. 아이가 무서워서 조심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행동이 달라진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효과라는 면에서는 그런 것도 필요할지도 모른다.(요즘 학교폭력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류의 엄격함도 때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 병사를 지휘하거나 짐승을 사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학생과 자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니까.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매력 혹은 신뢰? 삿된 방법으로가 아니라면 마음으로 알아서 따르게 만드는 것은 사실 가장 큰 능력일 수 있다.  본문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 이익, 위엄, 명분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만약 장수나 교사나 부모가 마음으로 철저히 따르게 만든 뒤에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춰 다가간다면 최고의 만남이 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익이 없어도, 명분이 없어도 함께 움직여야 할 때도 많다. 하기 싫은데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능력일 터이다.

 

<육도> 장수의 결함 10가지가 나온다.

1. 용맹하지만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

2. 매사에 급히 서두르는 자

3. 돈을 좋아하는 자

4. 마음이 약해서 다른 사람을 혼내지 못하는 자

5, 지혜롭지만 겁 많은 자

6. 스스로 신의가 있다고 여겨 남의 말을 잘 믿는 자.

7.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챙기지 않는자 (이런 자는 누명을 씌워도 누구 하나 변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8. 똑똑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자.

9.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자(이런 자는 띄워주면 좋아한다.)

10. 나약해서 남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자.(속이기 쉽다)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몇 있는 것 같다. 아니, 나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체크리스트로 삼아 읽어 보았다.

 

손자병법 안에 비겁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영화나 소설 속 장수처럼 자기가 죽을 것을 뻔히 알고 돌진하거나 적의 왕에게 기개 좋게 호통을 치는 모습 대신,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전략을 구사한다. 내 옆에도 자기 입으로 스스로 '비겁'이 교육철학이라고 말하는 동료교사가 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농담만은 아니다. 교장이 부당한 지시를 내릴 때 그는 교무실에 와서 몹시 괴로워했지만, 그에게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은 떳떳하다고 말했다. 왜냐면,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뭐, 좀 대든다고 학교에서 쫓겨나진 않지만 앞으로 당분간 혹은 오래도록 학교에서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하겠지.) 가장으로서 자신의 행동은 떳떳하다는 항변이다. 칼자루 쥐고 있다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저들이 잘못이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내가 비겁한 건 아니라는 논리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나라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말 목숨이 걸린 문제라면 다를 수도 있다. 또,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문제에 대해 핏대를 올릴 필요도 없다. 또, (아까 말한대로) 교장은 반드시 '적'은 아니므로 그와 오래 공존하기 위해 적어도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 사태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정도를 전략이라고 말한다면 전략도 필요하다. 또 정말 큰 싸움을 위해 작은 싸움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 여기까지 써놓고 사실 좀 반성이 된다.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위의 사항들을 되새기려고 스스로 많이 애쓰지만 난 교장이 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고 언성 높이고 싸울 때가 많다. 싸울 수밖에 없다면 지혜로운 싸움을 하고 싶고, 성과를 얻어 내는 싸움을 하고 싶고,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죽이지 않고 상처 입히지 않고 무릎 꿇게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의 그릇이 알량한 정의감 혹은 자존심 때문이라면 손자병법의 '비겁의 철학'은 배울 필요가 있는 꽤 유용한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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