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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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읽다가 때려쳤던 지난 번 책 이후, 그리고 ‘만들어진 신’의 중언부언에 질린 이후, 번역의 문제는 저자의 문제든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다시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두 가지. 개정판이 나왔다. 역자는 같은 사람이지만 번역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듯 수정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 책을 꼭 다시 읽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들이 군대에 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군대 간 지 벌 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서평을 쓰니 참 오래 읽고 오래 정리하고 오래 쓰고 있다 싶다.

아들 군대 간 게 이 책이랑 무슨 상관이랴. 군대를 가겠노라 했던 그 무렵 연평도 사건이 터졌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이 정권 끝나고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에게 군대는 무슨 원죄처럼, 빨리 벗어버려야 하는 어떤 짐처럼, 한편 삶의 전환을 꿈꿀 때의 도피처처럼, 끈적하면서도 불안한 애착관계 같은 이상한 존재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 생활 1년의 회의와 불안한 미래는 ‘이대로는 안 된다’(그럼, 군대 가면 뭐 달라지나?)는 위기의식을 갖게 했나 보다.그건 네 입장이고, 나는 어미로서 마음이 불안하다. 이 불안감의 근원이 뭔가, 자꾸자꾸 생각하다 온갖 기도와 주문으로도 가라앉지 않는 불안은 오히려 나를 쿨하게 만들었다.

‘나의 모성애는 감성이나 영혼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즉 나의 유전자가 간절히 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걱정이 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객관화시킬 때 오는 편안함은 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이 광활한 우주에서 먼지같이 미약한 존재임을 알 때,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가벼워짐을 느끼듯 말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마치 종교 서적을 읽듯, 과학에 기대 불안감을 위무 받을 목적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뭐, 책의 내용에서 당장 나온 것은 아니지만 암컷의 모성애가 수컷에 비해 강한 이유를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에서 나오는 것임이 뒤에 언급된다. 자식을 키우는 데 더 많은 공력을 들이는 것이 암컷이기에 대체로 동물들 대부분이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강하다는 점, 수태 기간이 짧고 생산, 양육의 과정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든 잘 보호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는 점, 이 책이 아니어도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답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는 과정에서 더 큰 위로를 받다가, 천천히 읽는 책의 진도는 어느 새 아들이 훈련소를 수료하는 시기를 따라잡지 못했고, 자대배치에 이병 적응의 시간을 겪는 동안 나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목적조차 잊어버렸다.

 

책 속에는 더 많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이타성’에 관한 대목도 재미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은,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다 유전자의 이기심이 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인간이 자식을 입양하듯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메카니즘의 작동 때문이지 결코 과학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성을 떠나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의 이야기와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서 본 황제펭귄의 행동을 묶어 ‘협력과 배려’ ‘공존과 공생’의 중요성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마련했다.

돌고래는 자기 친척이 아니어도 물 속에서 숨을 못 쉬고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 힘을 합쳐 수면 위로 밀어 올린단다. 포유류인 돌고래는 일정 시간 이상 물 속에 있으면 산소가 부족해서 죽는데 가끔 어린 돌고래나 병든 돌고래가 자기 힘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 폐호흡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죽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동족 보존을 위해 같은 동족을 구조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황제펭귄도 영하 50의 서식지에서 알을 낳고 살며 그 혹한을 이기기 위해 서로 어깨를 맞대로 몸을 옹송거리는데 이때 ‘허들링’이란 걸 하면서 바깥에 있는 펭귄이 조금씩 안쪽으로 자리를 이동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펭귄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결국은 공멸로 갈 것이다.

이것이 공생을 위해 유전자가 시키는 일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싶다. 결국 인간의 ‘복지 시스템’이라는 것도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에 의해서라면 공멸할지도 모르는 인간존재에 대한 유전자의 보호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빈자를 구제하지 못하면 종족 보존이 안 될 뿐 아니라 범죄와 전쟁으로 결국 공멸로 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는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새들이 배우자를 고르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다. 그 세계에도 행실이 헤픈 암컷과 바람둥이 수컷이 있다. 처음에는 이들이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자녀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하게 된다. 유전자 법칙에 의해 조신한 암컷, 자상한 수컷의 유전자가 더 잘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암컷은 수컷을 고를 때 자녀를 잘 돌볼 것 같은 수컷을 고른단다. 사람도 결혼의 조건에 남자를 고를 때 우수한 자녀를 만들어 줄 이성에게 끌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건강하고 매력적인 남자를 고르지만 외모가 별로여도 똑똑한 남자 역시 여자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유전자의 법칙 때문이 아닐까. 젊은 여자들이 멋진 남자에게 끌리다가도 결혼에 임박하여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면서 특히 자상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도 비슷한 이치 아닌가 모르겠다.

암컷 새들도 배우자를 고를 때 수태하기 전에 집이나 먹이가 준비되지 않으면 교접을 거부한단다. 우리 사회에 젊은 여자(남자도 마찬가지지만)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안전하게 자녀를 키울 조건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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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법, 정치언어학으로 분석하다 - 언어는 질서다, 언어는 정치다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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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에서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한문만 열심히 습득하고 ‘한어’는 중인 출신의 역관들이나 배우는 것으로 치부한 사실과 사어 취급을 당한 라틴어의 처지는 같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이로 인한 폐해도 막심했다, 문어와 구어는 공존해야 하며 문법지식이 없는 한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할지라도 높은 수준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늘 우리가 배우는 영문법은 누가 정립한 것인가, 미영식 문법이 일식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은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궁금했다. 또한 문법이 필요하되, 독해를 위한 문법이 아니라 ‘수험을 위한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아직도 학원가에는 80년대의 맨투맨과 성문기초, 성문기본을 가르치고 있다.

 

정치언어학,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좀 말라~!

글쓴이의 취지는 한국이 향후 다방면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을 위한 새로운 영문법이 필요하다, 정치언어학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고, 영어를 잘 습득하기 위해서 올바른 영문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인 듯하다. 또한 이 책이 비교언어학적으로 역사언어학적으로 영문법을 재정립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종으로 횡으로,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영문법책을 썼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과 취지를 달성했는지에는 의문이 많다.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있지만 언어학적으로 옳은 접근인지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소위 ‘정치언어학’이라 표현할 수 있으려면 지금 현재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내적인 정치현황(가령 분단이나 식민지, 독재의 역사의 잔재가 현대 한국에 미치는 영향과 영어권력의 관계 등)에 연관하여 영문법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방향제시를 했어야 옳지만 그러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필자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이 미래에 국제적으로 벋어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가 몹시 중요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그만큼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저자 신동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란 지금 여기서 생동하는 것이다, 현실언어가 중요하다, 또한 문법도 현실언어에 입각해 정립해야 한다, 언어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진 말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 주제가 분명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끌어들인 여러 가지 예들과 이론들이 적절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줄기를 제대로 잡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공부하기만 하면, 그리고 검증을 받지 않으면 공부한 물줄기는 강으로 바다로 가지 않고 엉뚱한 논밭으로 흘러들거나 심하면 가지 말아야 할 들판을 적실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제대로 줄기 잡고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느꼈다.

 

제대로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

‘명동사’니 ‘형동사’니 하는 생격한 표현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형동사는 러시아 문법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또 동명사니 분사니 하는 표현이 일본식 영문법 표현이라 주체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학자도 아닌 저자가 이런 표현을 마구 창조하거나 끌어다 쓰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고 싶다. ‘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말의 목적어와 영어의 목적어가 다르다는 점에서 Object를 목적어 아닌 다른 용어로 쓰고 싶어서 중국어의 빈어를 끌어왔나 보다.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보어와 한문 문장의 보어가 다르고 문법 개념에서 어떤 공통적인 용어가 통용되지 않는 점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은 일종의 법률적 약속인데 학술적 제안도 아닌 사견을 제시하는 것(검증도 되지 않은)이 옳은지 싶다. 역시 저자의 박학다식을 자랑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건 많은 사람이 중구난방 떠들어대면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논박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전문가가 있어도 그 말에 대거리를 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술이 취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려니 하고) 혹해서 읽었던 문장들이 알고 보니 자기 도취에 빠져서 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후의 저자의 모든 언술을 삐딱하게 잃고 있는 나를 발견하여 괴로웠다.

 

그러나 재미있었던 부분

물론 재미있게 여겨진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영어와 게르만어, 로만어의 비교와 발전과정은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중간태’, ‘아오리스트 시제(-하도다에 가깝다는 객관적인 시제를 말하는 것 같다. 영어의 현재완료형과 비슷하다나), 단수, 복수 말고 ’쌍수‘, 영어가 단어의 격(성분)을 문장 내 위치로 나타냈다는 것, 등은 신선했다.

또 영어의 굴절어미가 대거 생략된 까닭에 조동사가 꼭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왜 영어는 서술어에 여러 단어가 필요한가 하는 평상시의 의문에 답이 되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언어에는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어의 조사 띄어쓰기가 어렵다느니, 한국어의 조사와 어미, 접사의 경계가 애매하다느니, 영어가 발음과 표기에서 원칙과 일관성이 없다느니, 영어 조동사의 쓰임이 복잡하다느니, 하는 식의 문법에서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부분은 분명 있는데 여기서 그런 지적들이 등장하여 재미있게 읽었다.

 

그에게서 전제주의적 민족주의 냄새가 나

결미에서 저자가 ‘아멩글리시 일변도’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국제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기능은 ‘의사소통’에 있는 것이지 ‘미국인과 흡사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할뿐더러 의미도 없다. 영어가 국제공용어인 까닭에는 물론 지금 현재 미국의 위상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겠지만 과거 영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도 무시 못하게 이유가 되고 양적으로는 인도 영어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다양한 영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사람을 만나야 하는 비즈니스맨이나 유학생이라면 미국식 영어가 필수이겠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장은 옳되 그것으로 나아가는 정치사회학적 인식에서 저자의 사상적 공부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또한 한국이 국제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도 자칫 전제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갈 위험도 있다(위정자를 위시해 일선교사에 이르기까지 콩글리시로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p313 헐!). 소통의 도구로서의 영어가 공존과 공생의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그러므로 올바른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영문법’을 기대했던 나의 잘못된 판단이 스스로 아쉽다. 물론, 새로운 방법으로 영어 문법을 다시 한 번 공부했다는 즐거움은 있었다. 그냥 문법공부를 하리라, 했다면 만족하고 읽었을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뿐, 아니, 책값이 너무 비쌌을 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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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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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아니, 타고난 어떤 운명의 방향이라는 것은 분명 있는 것 같다. 역마살을 타고 나기도 하고 재운이 있게 타고 나기도 하고 부모와의 인연 같은 것도 분명 미리 만들어진 어떤 것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이 타고 나는 운명이라는 것은 과연 100%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 맞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니, 라고 답하련다. 가령 관상이나 손금도 운명예언적 기능을 하지만 손금 전문가나 관상가들의 이구동성은 손금도 관상도 세월이 가면서 변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주라고 하는데 이 사주라는 것이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사주와 만나 많은 변주를 낳는다. 또한 사주는 변하지 않아도 사람이 만나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주의 해석은 과거가 다르고 현재가 다르다.

 

가령, 나의 어머니는 아주 좋은 사주를 갖고 태어나셨다. 오행이 고루 갖추어져 있기 어려운데 그 균형도 좋다. 재운도 있다. 손금에도 재운이 있다. 하지만 엄마의 일생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남편으로 인한 고통이 그녀의 전 생애를 지배하였다. 자녀복이 넘치는데도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은 불행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남편, 즉 나의 아버지는 재물이 다 새어나가는 사주를 가졌나 보다.(아버지 사주는 모른다만) 즉, 아버지의 운명의 자장이 훨씬 세기에 어머니가 타고난 좋은 운을 억누르거나 잡아 먹는 형상인 것이다.

 

또한 나 역시 손금으로 볼 때 결혼을 늦게 한다고 나왔지만 다른 이에 비해 일찍 결혼을 한 편인데 이것은 남편이 일찍 결혼할 운명으로, 우리 둘의 만남에서 남편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손금에는 관운과 권력운이 높다. 하지만 20세를 넘어서면서 나는 타고난 나의 권력지향성을 학습으로 억눌렀다. 내가 습득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는 공생의 세계를 최고로 여기게 되었으며 권력지향에 대한 혐오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나의 남은 생에 내가 권력으로 나아갈 일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주체적 삶을 사는 이의 손금변주곡이다.

 

애니어그램을 공부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기질을 알고 운명을 읽고 유형으로 분류하는 일이 어쩌면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그게 운명을 규정짓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도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사주가 어떻다는 것은 대략 읽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아갈 방향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이 책의 저자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녀의 주장은 ‘나쁜 사주는 없다’이다. 각종 살과 충이 사주에 도사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시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오히려 역동적 삶을 일구어낼 수도 있음이며 사주의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좋은 요소들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주가 펼쳐 보이는 삶의 ‘형태’가 곧 그 사람이 느끼는 ‘행복’과 등치되지는 않음도 말한다.

 

책 내용 중에 메모

*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정신의 가치와 함께 가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들 때, 사주에 재물과 의식주 복이 있고 없음은 매우 중요했겠지만 현대에 와서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성이 너무 강하면 관계맺기나 공부에 실패할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 사주는 시간적 관찰이고 관상은 공간적 관찰이다. 사건이 길하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리는 건 아니다. 명리학(命理學)은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지도를 보는 것이다.

- 즉,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는 자료로 삼으라는 말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취할 것을 취하되 노력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열악한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버리지 않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저항과 투쟁이 있겠는가. 어떤 권력이나 자본도 그런 존재를 회유하거나 훼손시킬 수 없다.

- 개개인이 존중받아야 진정한 혁명이 가능함을 말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말이다.

 

*생명은 ‘타자들의 향연’. 같은 기운들끼리 놀면 불통이 된다.

만약 올해가 아주 흉한 시기라면 잠수를 타라. 욕심을 내려놓고 공부하라. 활인업하라.

요절할 팔자, 험난한 팔자인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공부나 직업을 택해 보시하면 막힌 운을 뚫을 수 있다. 사주팔자는 네비게이션일 뿐이다. 숙명론이 아니다.

지금 겪어야 할 것을 건너뛰어 버리면 언젠가 몇 배가 되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 ‘나쁜 사주’에 대한 고민과 저항을 저자는 이렇게 풀어준다. 사주가 나쁘다고 해서 인생을 안 살 수는 없는 거다. 또한 주어진 사주가 있다해 도 활용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쌍둥이 사주는 같지만 인생이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운명에 무릎 꿇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보적인 사고방식,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 민주주의의 형식적 확대와 자본의 무한한 증식으로 학교는 이제 서비스 센터가 되어버렸다. 관성은커녕 온통 재성만을 연마하도록 주입한다. 그릇, 혹은 내공을 기르는 힘이 관성이다. 이걸 연마하는 것이 청춘이고 학교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 학교에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장이 없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들을 모래알처럼 흩어놓기 바쁘다.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고 여차하면 갈라놓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학생들은 인생에서 인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 학교 당국자들과 엄마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웠어야 할 사회성, 인성을 도외시한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 개개인이 인성교육과 공동체 의식을 끊임없이 가르치기도 해야 하고 제도적으로 그것이 보장받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 젊어 고생을 사서도 하는 이유 - 산다는 건 절대 공짜가 아니다. 젊어서 살아야 할 것들을 대충 피해 간 존재가 있다면 중년이나 노년에 반드시 그 마디를 넘게 되어 있다.

 

* 지혜는 평화롭다. 무지와 평화가 손잡은 적이 없다. 지혜는 평화의 원천.

 

* 분노는 대체로 몸에 해롭지만 청정한 분노는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 식상이 없고 관성이 많은 사람은 - 사람들에게 많이 사주면 된다. 재성이 없는 사람은 재성이 많은 사람과 결합하고 관성이 태과한 사람은 관성이 부족한 사람과 연대하면 된다.

 

* 몸 안에 잉여가 쌓이면 담음이 되고 어혈이 되고 종양이 된다.

 

* 약속과 청소가 중요하다. 어떠한 과정을 거쳤건 일단 말로 내뱉은 일에 대해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청소를 일상화하라.(학생들에게 약속과 청소를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낀다.)

 

* 공부하는 방법 - 낭송과 암송, 필사 .. 몸에 착 달라붙게 하라.

공부가 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으로부터 받은 지식을 세상 속으로 다시 순환시켜야 한다.

 

* 우리는 모두 별로부터 왔고 다시 별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결코 가족적이지 않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것은 근대적 국가와 자본이다. 대가족은 번잡하고 기동력이 떨어진다 ‘효’라는 가치가 생산력보다 높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소홀히 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의 통제력도 약하다, 근대국가는 이 우발성 지수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사람들의 욕망을 균질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근대국가 - 대부분 자본주의 국가에서 -에서 ‘가족’이 강조되는 이유를 국가주의적으로 해석한 듯 보인다. 사회구조를 경제구조에 기반해 보는 시각이 때로는 분석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순진하게 살게 되기도 한다. 애국가를 부르며 가슴 뭉클해지는 1인으로서, 구조를 보기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의식화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 몸서리치기도 한다.)

 

* 진정한 소통은 관계의 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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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9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탈리아 기행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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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습긴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교육 모토는 '전인교육'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그때는 '그게 가능하기는 하냐?' 이런 마음으로 그것을 대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유능한 인재 육성'의 그럴 듯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 이전 시대의 '지덕체를 겸비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고 어찌 생각하면 자기들처럼 육체 강건한(군사적 무력까지도 겸비한) 그런 인간이 되라는, 학원에 대한 일갈로도 읽히긴 한다. 어쨌든 아무 의도 없이 나온 구호는 아니었겠지만 나도 이미 세뇌가 된 건지, 가끔 그 단어가 생각난다. 지덕체 겸비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인격까지 훌륭하며 문화예술적 소앙도 뛰어난 완벽에 가까운 인간들도 가끔 있긴 한 것 같다. 그들의 존재는 천연의 혜택인지 교육의 결과물인지 가정과 사회의 합동 예술품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교육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교육자로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과제이긴 하다.

 

괴테를 읽으면서 많은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문학작품은 대개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그게 뛰어난 줄 모르고 읽었다. 두 번째 읽은 파우스트에서야 비로소 대작의 소름을 느꼈지 고등학교 때 읽은 젊은 베르테르... 등에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로소 작품을 만든 작가가 아니라 인간 괴테를 만났다. 여행기는 뭐 그렇다. 소소한 일지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현대의 이탈리아도 아닌 19세기이다 보니 실감을 갖고 그걸 누릴 수는 없다.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은 있지만. 그런 읽기의 즐거움보다 괴테라는 사람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는 정말로 탐구형 인간이었다. 명성과 부를 지닌 사람으로서 당시로서는 드문 여행을 했을 터이니 이미 특권 속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권위 속에서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명성을 탐식했다면 그는 당시에만 풍미하고 말았을 알량한 문화권력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위대한 것은 끊임없이 배우려 들고 새로운 것을 알려 들고 배움의 한 길에 학생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던지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배우고 미술에 눈떠 가는 과정의 기쁨은 순수하다. 내가 이미 이토록 유명한 사람이거늘, 하는 오만이 없다. 맑은 영혼에서 예술이 나온다는 명제는 100% 참은 아니지만  괴테는 그것을 100% 당위로써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 원래 예술이란 그렇다며, 라고 새삼 자각하게 해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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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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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참 안 읽는 편인 건지, 편식을 하는 건지 몰라도 우리 독서모임에서 천명관을 읽자고 누가 추천했을 때 그가 누구지? 싶었다. 두 권의 두께까지는 소설이니까 그렇고,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속도감 때문에 그 두께의 부담도 금세 사라졌다. 앞 부분을 읽을 때에는 '키치'스러움을 느꼈다.  아하, 90년대에 유행하던(는?) 가벼운 말투 속에, 엽기적이고 기이한 사건 속에,  환상 속에, 비현실 속에 페이소스를 담는, 뭐 그런 소설인가 보다. 그래서 심지어는 군에서 휴가나온 아들에게 나중에 부대로 부칠테니 읽어봐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권 뒤쪽으로 가면서 박정희를 언급할 뿐 아니라 삼청교육대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소름 돋는다. 잘은 몰라도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것을 언급한 소설이나 작품이 있을까 싶다. 함부로 언급하기 미안하고 부끄럽고 무서운 근대사 속의 사건이 한둘 아니지만, 광주는 몸서리를 치고 나서 그 비극이 숭고로 전환될 수 있기에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는 그저 우리의 '치부'일 뿐이다. (요즘 인터넷 댓글 중 차라리 그때처럼 삼청교육대를 부활하여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는 식으로 어버이연합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누가 뭐래도 삼청교육대는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부끄러운 인권 사각지대의 역사일 뿐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마무리도 없고 시도도 없다는 게 더 문제다.)

 

이 소설에는 해학과 비장이 묘하게 섞여 있지만 (해학은 달관과 체념을, 비장은 초밀도 '레알'리즘을 통해 나타내는데 그것은 등짝을 마주 대고 있어 더 기묘하다. 남사당패가 공연할 때 쓰던 여러 얼굴의 꼭두와 같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소설이란 게 우리 삶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대리만족이든 카타르시스든 느끼게 해주는 임무가 있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좋은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우스꽝스런 말투와 그 안에 담긴 심각한 사건들 사이의 괴리는 일종의 장치이자 기법일 것이다. 우리 삶은 기실 미친듯이 심각하다가, 지나가고 나면 뭐 별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로 가득차 있거나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삼촌에게 부르스 리는 회망의 상징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쯤 있을 수 있다. 아니, 그런 거 없이 그저 생명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사람도 많고 굳이 그게 무얼까 생각해내려 애쓰는, 그러나 그런 거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그게 부르스 리든 조그만 자기 가게 하나 갖는 거든 언젠가 책을 내리라는 소망이든 뭔가 하나를 갖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특한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삼촌은 기특하다. 왜 하필, 이제 세상에서 한물 간(가고 있었던) 부르스 리냐고 물으면서 웃을 수는 있지만 그 하나가 왜 꼭 지적이고 거창하고 명예로운 것이어야만 하겠나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삶의 희망은 변하지도 않더라는 것. 우울증을 앓던 어떤 주부가 늘 가방에 청산가리 병을 넣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독약은, 언젠가 정말 힘들면 떠날 수 있는 열쇠였다.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 가방 속 청산가리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삶의 이유는 다 다르다. 그러므로 삼촌의 부르스 리는 정당하며, 누구도 비웃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막연하게 꿈을 갖다가 그것을 바래버리지 않았고 어쨌거나 그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루지 않았는가. 삼촌이 살아온 바닥의 삶이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이 그의 것보다 일반적이고 덜 고단하다고 해서 그의 인생을 폄하해서는 안 되겠다. 그의 부르스 리는 한결같아서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한다. 어떤 조건이든 어떤 과정이든 역시 삼촌의 사랑은 우직하다. 험난하기가 유행하는 조폭영화, 범죄영화 여러 편을 압축해놓은 듯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파란만장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못 할' 한 무도인의 순수한 생을 참으로 짧게 만들어 버린다. 하긴 누구의 인생이든 돌아보면 짧다. 우린 독자로서 겨우 두 권의 책으로 그의 50 평생을 돌아보니 험난은 하나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나? 아이들을 보면 저 녀석의 앞날이 어떨까 생각한다. 유난히 운이 나빴던 오래된 제자 아이가 생각난다. 맑은 아이였지만 온갖 싸움에 휩쓸리곤 했다. 주변 선생님들은 그 아이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아이를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건 진실이 규명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쨌거나 나의 안목으로 그 아이는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지언정, 나쁜 짓을 할 아이는 아이었다. 그렇지만 그 동네 아이들 패싸움 끄트머리엔 꼭 그 아이가 있었다.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무리가 끌려올 때 함께 딸려와 다른 아이들이 정학을 먹을 때(벌써 20년 전 이야기라 중학교에서 종학이 있었다.) 반성문 한장이라도 써야 했다.

 

그 제자 아이가 오버랩되는 '삼촌'은, 삶은 진흙탕이었으나 그 마음이나 인격은 유의원이나 유사장보다 더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유씨 부자의 삶을 갖고 싶은 게 현실임이 비극이라면 진정 비극이지만.

 

서술자인 '나'와 그의 '형'의 삶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촌의 삶이 미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대척점에서 보다 거시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캐릭터도 없다. 이러나 저러나 다들 비루한 세월을 건너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삼촌의 인생에 대비된 '나' 형제들의 삶도 참으로 구차하고 비겁하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을 이입하거나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하나씩은 있다면 나로서는 서술자 혹은 그의 형이 나의 삶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개새끼 한 마리를 사들고 가야 하는 서술자의 그럭저럭한 삶은 과연 '삼촌'의 삶보다 더 번듯하긴 한 걸까? 나름대로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삶에 맞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도 그의 모습에 비추어 잠시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게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큰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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