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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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 시리즈 전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제주 편’은 구입하지 않았다. 요즘 너무 많은 책을 구입하여 스스로도 언제 저 책을 다 읽을까 싶은 상태다. 그것도 대부분 생각을 많이 하며 읽어야 할 책들이다. 그런 이유도 있고, 여지껏 유홍준 교수가 먼 친척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이 읽어온 그의 글 -물론 읽을 때마다 실망해본 적은 없으나-, 이제는 그의 생각을 알 만큼 많이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학교 도서관에 있기에,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집어들었다. 역시 그의 글은 앞으로 열 권이 더 나온대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제주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친구에게 찾아가고 싶고 고등학교 때 미술을 가르쳐 주셨던 강요배 선생님도 뵙고 싶어졌다. 그들을 만나고 난 후 발로 걸어 제주를 다니는 상상도 해본다.

 

문화유산이나 자연을 접하는 그 밝은 눈의 지적인 충족감은 여전히 새롭고 깊고 아름답다. 하지만 내가 새삼 감탄하는 점은 따로 있다.

얼마 전 대선 찬조 연설을 하기 위해 TV에 나온 유홍준 선생을 보았다. 그가 지지하는 후보의 인간적인 면모를 실제로 본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펼친다. ‘구라’ 소리까지 듣는 그가 카메라 앞에서 지나치게 ‘얌전’한 것에 약간 실망도 하고 강력한 언변을 구사하여 후보를 드높이지 않는 것도 좀 아쉬웠다. 하지만 역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그의 시각은 남다르다는 생각도 했다. 본질을 보고 진정성을 보는 데 취약한 오늘 날의 사람들에게 저 방식이 먹혀들어갈지를 차치하고라도.

 

평범한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시각

그런 선생의 시각은 이 책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p122의 소제목은 ‘만장굴 입구를 찾아낸 부종휴(초등학교 교사 이름)’다. 그 다음 책을 넘기면 ‘김녕사굴을 지킨 김군천 할아버지’라는 제목, 그 다음은 ‘당처물동굴과 김종식 김옥희 부부’다. 이 동굴 입구 문화재 안내판에는 “1995년 밭을 정리하던 중 지역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 지역주민은 김종식 김옥희 부부인데, 왜 이름을 밝혀주지 않는 것이냐고 유홍준은 항변한다.

지난 번에 출간된 6편의 부제가 ‘인생도처유상수’였던 게 아주 인상 깊었었다. 유홍준 같은 고수가 숨은 ‘상수(上手)’들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다르지 않다. 제주의 자연을 발견하고 보전하는 데 힘쓴 평범한 제주민들, 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지도 보상하지도 않지만 유홍준 선생은 자기 책에 그들의 이름을 남긴다. 아, TV 대선후보찬조연설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높고 낮음, 권력이 있고 없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고개를 낮춰 풀꽃들이 뿌리내린 땅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한결같다는 것, 얼마나 어렵고 귀한 일인가.

아침자습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다가 잠시 마음이 벅차 고개 숙여 책 읽는 아이들의 머리꼭지를 바라본다. 이런 날은 잠시라도 ‘행복하다’.

 

해녀 이야기

영조 때 의 조관빈이라는 제주도에 귀양 온 문신이 <회헌집>에 실은 글에 잠녀들의 고생을 담고 “해녀들의 신세를 생각하면 전복을 먹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지금부터 나의 밥상에 전복을 올려놓지 말라고 하고 있다.” 하였다. 잘 모르는 분이지만 참, 따뜻하다.

해녀들은 대상군, 상군, 중군, 하군 등 계급이 있는데 이모 손에 이끌려 온 애기해녀를 가르칠 때 빈손으로 가게 되면 다들 하나씩 자기가 딴 걸 준다고 한다. 아까워서 작은 것 주는 해녀는 대상군이 못된단다. 대상군은 일기, 해녀들의 상태 등 모든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바다에 시체가 떠오를 때 그걸 찾는 데도 능력을 발휘한다.

진정한 능력자가 후배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 보인다. 특히 인정머리 없거나 이기적인 사람은 철저히 그 지도자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인데, 학교도 그렇고 지금 세상의 많은 조직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윗사람에게 잘보이려 드는 사람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해녀들 사이에도 그런 비리가 있었으려나?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라고 말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관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 가장 타락한 시기이다,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올 수도 있다, 비교적 정의로웠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희망을 접지 않고 살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고려에 대한 또다른 평가 - 다른 각도로 보기

<한국미술사 강의 제 2권> 중 유홍준은 고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른 시각을 보인다고 한다. 고려의 전란과 갈등은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중국은 더했다. 송은 금과 싸우고 몽골에 망했고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은 100년 정도 지속하다 끝내 자기 문화를 지키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하면 고려는 수많은 전란에도 근 500년을 지속한 저력 있고 건강한 나라였다.

 

또한 관덕정 돌하르방이 육지 돌장승보다 명작인 이유에 대해서는

“관이 민에게 강제하면 생명 없는 관제(官制) 작품이 되지만 민이 요구하는 것을 관이 받아들이면 명작이 나온다. ”라고 말한다. 대체로 관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내게 일종의 각성을 준다. 관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나티스트가 아닌 이상 관제를 부인만 할 수도 없다. 다만 하향적이냐 상향적이냐에 따라 관제의 역할은 달라지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른 게 아니다.

 

유홍준 특유의 재미난 입담도 여지없이 펼쳐진다. 각 청장들이 얼마나 업무범위가 넓은지를 하소연하는 장면이나, 팔도의 아줌마들이 한라산 철쭉제를 와서 펼치는 입담은 참 맛깔스럽다. 듣고도 넘어갈 수 있는 대화의 편린들을 한묶음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 우리는 글 읽는 즐거움을 더욱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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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히스토리아 1 - 불멸의 소년과 떠나는 역사 시간여행 피터 히스토리아
교육공동체 나다 지음, 송동근 그림 / 북인더갭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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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만화다. 역사인식이 훌륭하다는 말이다. 물론 더 치밀하고 정교한 '입장'은 학습만화의 특성상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태까지 '객관적'이라는 명목하에 강자의 기록을 역사라고 강변하거나 반성없이 되뇌이던 역사책들과는 정말 다르다.

 

무한반복, 불멸의 고통

말이 불멸의 소년이지, 가족을 잃고 터전을 잃고, 그 고통이 한 대에 끝나지 않고 시대를 반복해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불멸을 누가 누리고 싶을까. 하지만 단지 무한반복되는 비슷한 삶의 유형만은 아닌 것이, 피터의 몸은 소년이로되 의식은 자기가 살아온 수천 년의 세월만큼의 지혜로 채워진다. 그러면서 피터는 역사에 대해 '몸으로 체득한' 가치관을 갖는다. 가진 자들의 욕심과 그에 짓눌리는 대다수 민중의 삶은 고통이며, 그것을 감내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자유를 찾아 몸부림 치는 것이 참다운 '사람'의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또 노예야!

하지만 그렇게 장면마다 사건마다 시대마다 지치지도 않고 건강하게 아픔들을 이겨내는 피터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던 한 마디가 있다. 2권에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아동수용소에 올리버와 함께 등장한 피터는 자기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와 있는지 깨닫는 순간 절망에 휩싸여 외친다. "또 노예야!" 이 소년의 역사적 '사명이 그와 같은 소년, 소녀들이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적 소명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참 잔인한 일 아닌가. 그런데 그런 '불쌍하다'는 생각 뒤에 어떤 깨달음이 온다. 고대의 노예, 전쟁의 패배자, 수용소의 소수민족 등 약자들의 20세기의 이름은 무엇일까. 고아들의 수용소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이 아니더라도 피터가 21세기를 살아간다면 그의 이름은 '노동자'일 것이다.

 

21세기, 피터가 한국에 부활한다면

아마도 주인공이 소년이니까 아동노동을 다루지 않는 한 노동자로 묘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필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갖는 입장에서 주춤거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피터가 여전히 지치지 않고 역사를 헤쳐나가는 불멸을 살고 있다면, 혹시 피터가 한국에 와서 성인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며 "아, 아직도 노예란 말인가" 라고 외치지나 않을까. 노예인지 아닌지의 경계는 자기 삶의 결정권, 즉 자유가 있는지 아닌지 여부이지 않은가. 아니, 모르겠다. 그가 영원히 소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설정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느 학교 '야자'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면서 "난 자유로울 테야~!"라고 외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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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 안준철의 시와 아이들 벗 교육문고
안준철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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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면서, 선생님 얼굴을 여기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얼굴이 곧 그 사람이라고 말하면 외모지상주의가 되겠지만 안준철 선생님은 얼굴이 그 분의 삶을 그대로 닮고 있다. 보통 나름 명사 소리 듣는 분이 강연장이나 모임에 나오면 그이 가까이 가서 말도 붙여보고 싶으면서도 좀 멀리, 높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인데 이 분은 우리 학교에 계신 좋아하는 선배교사 같은 느낌이 들어 알고 지낸 사람인 듯 말을 걸게 된다. 조금도 당신이 어른이라거나 명사라거나 하는 권위주의가 없다. 그 선한 미소가 사람들을 덩달아 미소짓게 만든다.

 

나도 그렇게 몇 번 뵙고 같은 '안'씨라고 송구하게도 누이 소리를 얻어듣는다. 하지만 이런 다정한 대접은 내게만 돌아온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음에도 담임을 맡고, 오랜 시간 한결 같이 반 아이들 모두에게 생일시를 써주느라 밤을 지새우신다. 교육공동체 벗 까페

http://cafe.daum.net/communebut 에 글을 올리면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댓글을 달아주신다. 누구에게나 사랑과 관심과 칭찬을 주시지만 그 어느 것도 '의례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없다. 한 10년 전쯤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시인이자 교사로서 작은 명성을 갖고 있는 분인 줄 알았다. 그분이 명성을 기리지 않고 따스함으로 주변을 물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책을 읽을 때마다, 온라인에서 만날 때마다, 직접 뵐 때마다 느낀다. 그런 선생님이 아직 우리들 학교에 계시다는 게 고맙고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다. 아름다운 평교사의 귀감이다.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교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혼돈과 방황 속에 사춘기를 보내는 우리 학교 아이들 몇몇에게 생활상담부에서는 이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권했다.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 우리 학교에는 왜 이런 선생님이 없냐고 안타까워하면 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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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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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목적과,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은 ‘우리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우리가 스스로 잊고 산 건 아니냐구~!’ 하는 각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의 사례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목적에 더 잘 부합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점점 미국화 되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도 할 것이다. 경쟁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외향적인 사람들의 천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대한민국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나 내면 중시의 문화를 단시간에 깨뜨리는 부작용이 있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요즘 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미국은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했다.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지만 ‘성격의 문화’를 수용한 뒤로, 미국인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조용한 학생들을 말이 많은 학생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 한국은 아직 외향적 가치가 일반화되진 않았지만 점점 외향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대중에게는 침묵의 문화를, 리더에게는 다변을 요구하는 사회이다. 우리에게 침묵의 리더십은 없나? 외향적 리더십이 중심이 되면서 내면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성찰을 중시하는 불교적 가치관들은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서 다변과 달변, 나아가 권모술수가 ‘리더십’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많은 사례처럼, 귤이 탱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외향성이나 성격의 문화가 미국에서도 부정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아마도 20세기 미국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된 측면도 있을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내실은 빼고 겉에 드러나는 측면만 유입된 경향이 있다.

 

 

기업의 리더십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기술과 진정한 리더십 능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

- 말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기업들이 프레젠테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아이디어’보다 보여지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CEO들 중 상당수가 내향적인 사람들이다 - 빌 게이츠 등-.

미국의 금융위기의 주범들은 한 때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다고 인정받은 다변과 달변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리더십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게 했다. 이런 일은 사실상 미국정부도 하지 않았던가? MB는 아니었던가? 예전에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공약을 내세울 때의 망설임이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소위 ‘지도자’들은 강력하게 말하면 자신도 그 말에 스스로 확신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조용한 리더십은 없는가? 노자가 말하는 식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경지의 ‘요순정치’까지는 아니어도, 또한 강력함을 발휘할 땐 발휘하더라도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최고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학교조차 외부에 보여지는 행사를 잘해내는 사람이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외향적인 관리자 + 수동적인 직원, 내향적인 지도자 + 능동적인 직원의 조합이 오후려 기업을 잘 이끌 수 있다. - 내향적인 지도자가 오히려 외향적인 직원을 잘 이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직원의 자발적 활동을 보장하겠지?) 기업의 리더들은 말 많은 사람뿐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을 키울 필요가 있다.

학교도 그렇지 않을까? 관리자와 교사,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조화와 궁합은 중요하다. 어떤 경우라도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칫 독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에서

기도란 결국 내면의 추구, 묵상이어야 하는데 공동체적 지향으로 기도의 본질을 훼손하였다. 예수나 붓다나 항상 홀로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고요, 묵상,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예수를 큰소리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교회는 큰 소리로 복음을 논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묵상하는 사람보다 모여서 울부짖고 헌금하고 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는 무리들... 이것을 저자는 ‘공동체적 지향’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미국식 집단사고와 우리식 공동체 의식은 뭐가 다른가?

협력 모형은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배울 때 학습에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진보적인 교육이론이지만 결국은 기업의 팀 문화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근대 학교 교육의 목표가 가장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던 것과 비슷함.) 요즘은 기업계가 그룹으로 일하니까 학교에서도 그렇게 한다? 협력학습은 팀으로 일하는 기술을 향상시켜 직장생활을 잘하게 한다? 결국 기업의 이윤추구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 학교에서도 협력학습을 한다는 뜻이 된다. 일본이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 ‘협력학습’이 추구하는 바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지향하는 ‘협력학습’은 개개인의 뛰어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가치관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칫 기업의 ‘팀문화’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경종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의 학교에서 교사는 다음의 것들을 모두 학생들에게 어떻게 길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 개인으로서 조화롭게 자라기, 리더십 기르기, 독창적인 사람 되기, 배려와 존중으로 어우러지기...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혹여라도 자기의 경제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거짓 이윤논리에 놀아나는지를 경계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나 사려가 없다면 교사는 영혼 없이 학생들을 기업의 노예로 기르는 감독관에 불과한 사람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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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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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다지 즐겨 읽지 않는 나이지만 비교적 좋아하는 작가였던 박완서 선생. 수업 시간에는 그가 40세에 문단에 데뷔한 이야기를 종종했었다. 요즘이야 나이나 이전의 직업에 상관없이 꿈을 펼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지만 나만 해도 육아에 지치고 세월에 지치면서 세상의 상식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또 다른 삶’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박완서 선생을 통해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뒷부분은 주로 ‘죽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사람 이야기일 뿐이지만 연세가 많았을 때 썼기 때문인지 고인이 되신 분들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냥 소소한 일들인데도, 또 거창한 수사를 별로 쓰지 않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세밀하게 그 느낌을 살려내는지,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법정 스님 이야기의 세세함에 놀라면서, 한편 당신 스스로도 고인이 되어버리셨는데 맑게 살다 간 이들의 하늘나라 이야기를 듣는 듯 해 마음이 찡하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파일로 메모하여 저장하는 버릇이 들었다. 책에 대한 복습을 하는 것이다. 여기도 그런 구절이 몇 있다. 내가 선생이라서 (사실 박완서 선생은 학교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는 편인데도) 당신 마당에 핀 꽃들 이름을 외우는 이유를 대면서 ‘공부 잘하는 아이, 예쁜 아이 말고도 말썽꾸러기도 선생님이 쉽게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걸 알게 되면 나처럼 모든 평범한 아이는 평범 자체에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라고 썼다. 뜨끔하다. 나 역시 잘하는 아이 혹은 못하는 아이를 먼저 외우는 평범한 선생이다. 다른 선생들보다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고 늘 불러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을 많은 수업과 많은 학생 수 탓으로 돌리곤 했고, 평범한 아이들의 숨은 아픔에 대해서 교사들이 섬세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늘 갈파하면서도 정작 그 아이들에게로 더 많은 관심을 보내긴 했던가... 말썽 피는 아이들 건사하느라 허덕허덕한 무능한 교사는 아니었던가... 내년 새학기에는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눈에 띄지 않는 아이들’ 이름을 먼저 외우고 들어가리라, 그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리라, 다짐을 해 본다.

 

이건 별로 중요한 감상은 아니지만, 박완서 선생이 애주가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타고난 체질일 수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음주 문화’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은 그 분의 아픈 사연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 역시 적당히 취할 만큼의 음주를 자주 즐기는 사람으로서 어쩐지 공감이 되는 것이다. 술에 취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끄적거리는 시간이 참 좋다. 물론 식구들과 어울려서도 좋은 분위기에서 자주 마시다 보니 우리 집 아이들은 ‘술은 좋은 것’이라고 잘못된 가치관이 형성된 면도 있다. 고민은 되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즐거움이었는데, 선생의 술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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