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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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서 보는 히말라야는 푸르고 맑다. 언젠가 저 곳에서 죽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등산을 질색하는 내가 그곳에 갈 기회가 있을까?

여행기가 좋은 점은 발에 물집 잡히지 않고 여행의 달콤함만 쏙 빼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즐겨 읽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무슨  빡빡하고 무거운 논리들만 꽉 차 있을 때, 비타민이 필요하기에 시를 읽고 무기질이 필요해서 소설을 찾는 것처럼,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여행기를 찾아 읽는다. 실제로 여행도 좋아하지만 여행기를 읽는 일이 때로는 여행보다 더 좋다.

 

물론 히말라야를 등반할 일은 내 생에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다른 독자들이 즐겁게 읽었다고 하지만) 등반을 상상하며 힘들었다. 평지를 하루 종일 걷는데도 견디기 힘들 저질체력을 지닌 나로서는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은 상상도 하기 힘드니까. 사실 이 여행기는 몸은 오르지 않아도 눈으로만 히말라야를 오르고 싶은 사람에게 즐거운 책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정유정의 체력이 부러웠을 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약간의 대리만족 이외에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밤중에 홀로 산을 오르는 그의 근성을 배우고 싶은 마음을 얻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어제 꿈에 히말라야에 갔다. 산에 오른 것이 아니고  작은 풀들이 깔린 나즈막한 초원과 마을길을 지난 것으로 보아 하산 후의 어느 마을 풍경쯤을 걸었나 보다. 아마도 나는 등반을 생략한 네팔의 마을을 탐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누구나 자기의 여행 스타일이 있고 다른 이의 여행방법에 대해 '그게 무슨 여행이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휴양이든 안식이든, 열정의 실험이든 자기 방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올라야 할 산 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현지사람과 현지음식의 경험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단지 그 하늘을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기는 당분간 꽤나 좋은 아이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여행기가 너무 범람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시인도 소설가도 일반인도 너도나도 여행기를 쓰는 시대라고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누구라고 쓰고 싶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누군가 쓴 여행기를 읽고 싶고, 언젠가 어디론가 가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라면 여행기는 대체로 매력적인 책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읽으면 더 좋고,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나만의 기록으로도 좋은 여행기는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 오래도록 서점에 한 코너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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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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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그때 죽음은 내게 참 먼 주제였다. 그냥 '생각할 거리'였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적'사고를 기준으로, 영혼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자잘한(좋게 말하면 치밀하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디테일한)  단계를 밟아나가야만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래, 대학 교양과목이라면 대상이 아직 논리구조가 잡히지 않은 어린 학생들일 터이니 이런 구체성이 필요할 것이며, 게다가 매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라지 않는가, 그러니 이해하자, 하고 조금은 견디며 읽어나갔다.

지루하긴 해도 책에서 얻을 것도 많았다. 나는 방과후수업이나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토론'반을 자주 운영하고 수업 중에도 토론수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책 속에서 제시되는 딜레마적 논제들은 토론에 활용하면 좋을 듯 싶은 것이 많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꼭 죽음에 맞닥뜨리지 않아도 나의 몸과 정신의 정체를 생각해 보게 한는 명제를 많이 던져준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에서 제시되었던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게 한 후 그것들을 모아 글을 쓰게 하고 두레별로 토론을 시킬 작정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영혼은 있을까?

- 나의 영혼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 육체와 영혼 중 무엇이 더 나의 본질일까?

-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은 무엇무엇이 있을까? - 몸, 생각, 느낌, 감각, 직관, 경험, 판단, 습관, 주변환경,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가족,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 사회적 지위, 매력, 전망....

-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 나는 죽은 후 어찌 될 것인가?

 

등등...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통해 과연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궁극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찾아보고 싶다. 그렇게 의미있는 주제로 나아가기 전, 그저 논쟁을 위한 논쟁만을 펼쳐도 시간이 꽉 찰 것이다.

하여간 글 자체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지루한 느낌은 있어도 이야기할 거리를 얻어서 나름대로 귀하여 여기고 있던 중,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올 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뉴스 속에서 만나는 무수한 죽음들, 공감의 영역이 좀더 치밀한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의 죽음들도 이렇게 피부에 와닿은 적은 없다. 아마도 단원고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통곡이 터져나오는 기이한 경험을 100일도 더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의 몸만 살아 있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그러니까 진정한 아버지는 10년 전 돌아가신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뇌의 좌반구가 하얗게 죽어 달변의 혀를 묶어버렸고 입으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아빠는 당신만의 꿈의 영역을 무언으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낭만주의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상상은 곧 깨어졌다. 뇌의 좌반구가 죽어 언어능력을 상실하면 그 언어로 할 수 있는 사고능력도 상실한단다. 그러니까 아빠는 그냥 하얀, 아무 생각이 없는 나날을 보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우리 곁을 떠나가실 때, 저렇게 고통을 겪을 바에는 얼른 떠나시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다 버리고 남의 손에 의해 목숨을 연명했다는 사실을 아빠도 많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남은 생을 다 희생해야 하는 엄마를 위해서도 아버지가 떠나는 일은 슬퍼할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가끔 생각한다. 좋은 아버지, 다정한 아빠인 적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그립고 아쉬운 것일까. 이미  10년 전부터 대화도 나눌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무슨 미련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단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 죽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이 영원한 단절감... 49재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이제 진짜로 이승을 떠나셨대, 이렇게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녕 아버지의 영혼이 있어 어디론가 갔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절에서 제를 지내며 무수히 읽었던 천수경 속의 그런 세계?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전에는 막연하게 죽음 너머에 무언가 반드시 있을 것만 같고 환생이나 윤회도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런 '희망'은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언젠가, 어쩌면 머지 않아 죽을 것인데, 나는 늙음과 죽음을 겁낸 적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어쩌면 죽음 너머 무언가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랬던것은 아닐까? 점점 그런 세상은 결코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죽음이 너무나 가깝게,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셀리 케이건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라면,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 육신은 동력이고 원천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그럴 듯하게 부르는 것은 뇌의 작용의 총합 혹은 신비화된 표현이다. 착한 영혼을 지녔던 사람도 아프고 난 후 강퍅해지는 일이 있다. 나도 수십년간 다듬어온 인격이 제대로 발현하려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극단에 처하고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다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생각은 또 바뀔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수많은 사유가 나를 사로잡고 방황하게 하리라. 정립되어 철학이 될 만한 무엇을 가진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죽는 날까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남고 싶다. 내 죽음을 어떻게 맞아도 그 이후에 무엇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도정일의 표현대로, 삶이란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살 일이다. 무엇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가, 그래서 단 한 번 사는 이 생에 최선을 다하게 한다는 결론으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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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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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놓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책의 분위기가 좋아서 샀다. 읽기 전까지 설레는 몇 안 되는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게가 있고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니면 가끔 감성을 다스리는 책을 읽어야 모자라는 비타민과 무기질을 섭취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쓴이는 파리에서 다시피아노 한 대와 조우하기를 바라 찾아 헤매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피아노 공방을 만난다. 그 과정이 아름답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혼자 한가롭게 파리 뒷골목을 거닐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공방에 들어가게 된다...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남편과 파리의 시떼 섬을 거닐었던 기억이 난다. 관광객이 아니라 생활인으로 파리를 살아간다면 어떤 기분일까....

공방에서 만나는 피아노의 장인 이야기는 낯설다. 우리에게 피아노는 연주가의 것이 아니었던가. ‘기술자가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것인가, 라는 편견... 자신이 전문 연주가가 아닌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집에 피아노 조율을 하러 온 분이 간단한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지 말고 늘 청결하게 다루어 줄 것을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섬세한 감각과 애정이 없다면 단지 기술만 가지고 그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나 역시 국민학교 4학년 때 몇 달을 배우고 바이엘 끝날 무렵 피아노를 때려치운 경험이 있다. 자력으로 노래 반주를 익혔으니 아주 음감이 없는 것은 아닐 터인데(중학교 때, 우리 삼남매 중어머니가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사들인 슘멜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물론 고향의 봄수준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피아노를 다시 배우리라 생각했다.

직장을 옮기는 와중에 큰 아이를 아직 시댁에서 돌보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남편이 퇴근하지 않은 저녁 시간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저녁 7시면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 비어 있는 연습실 열쇠를 주면서 선생님은 맘껏 연습하고 가라고 했다. 밤 열시까지 연습했어도 진도는 체르니 100번을 마치지 못했지만 그 혼자만의 시간은 아련하게 귀했다. 곧 둘째가 들어서고 첫 아이도 데려오느라 다음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피아노 강습은 그만두었고, 그때 실력이 늘긴 한 건지 긴가 민가 하지만 그 약 석 달 정도의 혼자만의 연습시간은 참 행복했다.

 

글쓴이가 피아노를 배우던 연습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건물 등 사이에 작은 광장 같은(우리의 마당 같은) 공간이 보인다고 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유럽의 풍경이 익숙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남의 것에 대한 동경이라니. 그런가 하면 이 책에는 그럼 문학적인 풍경 말고도 피아노에 대한, 피아노의 역사에 대한, 피아노의 기능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가 묘하게 짜여져 있다. 전문지식이 없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장인들의 숨결이나 피아노를 다루는 사람들의 애정이 잘 읽힌다. ‘영창 피아노이름도 나온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도 영창이다. 시집 올 때 엄마가 사주신 피아노. 태어날 아이가 치게 될 거라던 그 피아노를 정말로 우리 아이들이 즐겨 치고 있다. 아들이 치는 월광과 딸이 치는 플라워 댄스로 우리는 자주 행복해 한다. 그러고 보면 고급스럽고 우아하기만 했지 고향의 봄선구자를 넘어선 연주자를 만나지 못했던 1980년대의 그 슘멜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그립고 미안하기도 하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린 귀에도 깊은 데서 울리는 듯 고상하던 그 까만 피아노의 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집이 어려워졌기도 했고 아무도 치는 이 없어 결국 어디론가 팔려갔던, 마당있는 집의 추억과 함께 사라졌던 우리 어린 날의 까만 슘멜... 이 책은 내게 그런 추억도 되살려 주었다. 감성의 비타민은 충분히 채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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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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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아이들의 가장 큰 과제는 ‘학업’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일까. 사실 부모는 이것이 진정한 배움이라, 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 것은 ‘스승에게 가서 배워야겠지.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부모는 스승을 대신하여 배움이란 건 이런 것이다, 에서 출발하여 배움의 자세까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한다.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일 뿐이고, 부모가 가르치지 않아도 될 그것들을 가르치게 되는 현실은 공교육의 부실함과 학교 선생들의 책임 방기에서 온 것이 사실이란 게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손으로 익히는 일이든 글자를 익히는 일이든, 진정한 공부는 본인의 열망에서 비롯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무지한 스승>에 보면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교사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학생들이 만난다. 학생들은 결국 대역판을 놓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쳐 간다. 이 책을 보면서 <더 리더>를 사전을 놓고 읽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저런 과정이 가능할까, 에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고 공부해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딸 아이 이야기를 하자. 6학년때부터 날라리 경계선에서 자그마치 4,5년을 놀기만 하다가 급기야 고2 봄, 자퇴를 할까까지 고민을 하던 아이가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강남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쌓아올린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한다. 전자사전에서 영어발음을 찾아듣는 과정은 느리고 답답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다간 재수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진정 공부이다. 목표가 왜곡되었든 어쨌든, 저렇게 머릿속에 넣는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든 어떻든. 그리고 아이는 자기 몸으로 스스로 깨치고 나온 알껍질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그렇게 부딪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핀란드가 어떻고 미국교육이 어떻고, 지금 우리 교육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많은 대안을 찾는다. 어떤 방식을 들여와도 이 땅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불과한 이상, 어떤 방식도 실패하고 만다. 다시 <무지한 스승>으로 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서로 측은히 여기는 평등한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곧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될 것이다. ..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쾌락 중 가장 달콤하여 무리의 모든 욕구 중 가장 절박한 것이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고, 거기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닌 머리와 글로 하는 공부만을 성공의 열쇠로 삼는 세상에서는 진정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두레활동을 싫어한다. 특히 수행평가를 두레로 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에 인디언의 공부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겨우 편입이 된 체로키 족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하니 자기들끼리 책상을 붙여 앉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라’ 할 때는 항상 ‘함께 힘을 합쳐’ 해왔다는 것이다. 평가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국어 수행평가는 대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인데 그 때 능력보다는 해내는 과정, 과정에서의 성취, 그리고 성실성을 본다. 그러니 수행평가 아닌가? 이미 많은 것을 습득한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도 대체로 잘하긴 한다. 그러나 의외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있이 이 수행평가는 의미가 있다. 독해능력을 떨어지지만 토론을 잘 하는 아이,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중재능력이 뛰어난 아이, 시험은 못 보지만 글은 잘 쓰는 아이, 뭔가를 잘 만드는 아이...

두레가 공동 점수를 받으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누구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심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폭탄인 아이가 자기 두레에 들러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봤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이 과정 자체가 진정한 공부임을 설득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공동으로 행하는 수행의 과정이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고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리더십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이 사회의 리더가 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친구, 능력이 부치는 친구를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뭔가를 잘 만들고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도입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일부러 지하철 등에 매표창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일정 수준 인간이 일을 해야 할 자리를 남겨두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한단다. 일자리 창출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랑시에르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채널의 <공부 못하는 나라> 독일은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묻는다. 학업성적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럼 잘 사는 나라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높고 아이들 학업성적이 높은 우리나라는 행복한가? 아니, 잘 살기는 하는가 말이다. 결국은 몇몇 소수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우리 모두 놀아나는 것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공부 잘하는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한 나라. 여기서 대입시를 위해 매진하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엄마들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하고, 적어도 엄마가 스스로 아이가 지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 좋은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만 잘 갈무리하면 사회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막 돌아가고 있다면 내 자식만 잘 자라도록 바라는 모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이나 힘이란 게 진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러지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권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자’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가질 때, 즉 환상 속에서 극대화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말하자면 교육과 권력의 상관관계가 그런 환상 속의 두려움으로 극대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퍼트린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공포에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성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진정 수퍼맨의 파워를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모성이라면 그 힘을, 자기 자식을 채찍질하고 다른 자식들을 밀어내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거짓 이데롤로기를 걷어내는 데에 그 모성파워를 써야 할 것이다. 평등의 공동체, 나눔으로써 배우는 세상, 무지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식을 잘못 써먹어서 부끄러운 세상을 인식하는 그런 올바른 배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써야 그것이 진정한 모성애인 것이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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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라 다른 교육
하승우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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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이렇게 좋은 책이, 출판 마케팅 시스템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교육공동체 벗에서 나온 책들이 좋은 책이 많지만 서점에 판매대에 깔리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알음알음으로 팔리고 읽힌다. 교육공동체 벗의 정신은, 작은 모임들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 상업적 판매에 매진하지 않는다.

 

'벗'의 책들은 동료교사들에게 자주 선물하기도 하고 독서토론회에서 읽기도 한다. 그러면 대개의 반응이 이렇게 재미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책 어디 더 없느냐 한다. <생각해 봤어?><외면하지 않을 권리>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특히 교사들이라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의 시리즈는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1권에 저자로 (사실은 강좌를 진행한 내용으로 책을 엮은 것이므로 강사로) 참여한 나도 책을 받아본 후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제목이 선정(?)적이어서 그런지 책은 생각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그 2탄인 <상상하라, 다른 교육>은 제목도 참 멋지다.

 

교육공동체 벗은 작금의 교육이 더 이상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불가능'해졌다고 선언했다. 우린 망했다, 끝! 이런 선언이 아니다. 병든 환자에게 냉철하고 엄혹하게 현재의 상태를 알리는 것이다.아니다. 누가 환자고 누가 알린단 말인가. 우리 스스로가, 내 스스로가 나는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딛고 일어날 수 없으니까. 여태껏 많은 언론과 교육관료들과 교육학자들이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말했지만 교사들과 학부모들, 청년들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어설픈 문제제기와 지적질은 혀 끌끌차고 돌아서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는다.

교육불가능이라고?

이제 희망은 없다는 말인가?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도 겨우 일으켜 세울까 말까 한 지금 시점에서 불가능이라니!

대안은 없단 말인가?

라고. 그리고 그 불가능의 선언이 불편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한다.

용기가 있어야 이 단호한 선언에 귀를 닫지 않는다. 용기란 게, 꼭 앞장서 싸울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하고, 사랑하는 이의 몰락도 지켜봐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처절한 인정을 딛고서야 뭔가 하나라도 한다.

 

<상상하라 다른 교육>은 그렇게 폐허에서 조금씩 돋아나는 새싹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도 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중학교 교사인 내가, 가장 많이 아픈 우리 중등교육 현장에 선 내가 내일모레 죽을지라도 여기서 내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청소라도 해야 하고 앉아서 우는 아이를 달래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필자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교사인 이영주, 김수현 선생 같은 이들의 글에 많이 공감했다. 교사들 중에 똑똑한 이들은 학교를 떠난다. 더 의미 있는 공부를 하러, 더 영향력 있는 운동을 하러. 그래서 아무도 남지 않았을까? 아니다. 학교에는, 평범하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사들이 무수히 많다. 무기력하지만 싸울 의지를 버리지 않은 날달걀 같은 이들이 아직 꽤 있다. 그들은 '저처럼 평범한 교사가 뭘 많이 알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고 겸허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많이 공감이 된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려 한다. 내가 학교에서 겪은 일들, 해낸 일들이 비록 시시한 것들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서로 위안을 받는다. 나 혼자만 그런 거 아니었구나, 하고. 그래서 나도 자꾸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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