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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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열심히 하자, 독서를 열심히 하자, 고 주장하면 계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미숙은 결국 그런 단순한 본질로 돌아간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해당될지 모르는데, 의식 있는 학부모나 교사들 중 훈육이나 강압이 없으면 그것이 곧 창의적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부뿐 아니라 독서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강요가 되어 자율성을 억압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자발성에 바탕을 두려다 보니 다양한 방식을 고심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강제를 하지 않다 보니 서과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이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결국 아이들 스스로 책 읽고 공부하기를 기다리며 멍석을 무수히 펴놓았던 이 선생, 이 어미를 언젠가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가기까지 세월은 무수히 흐른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도 되는 건지,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다 자라버리는 건 아닌지, 솔직히 고민이 많다.

 

근학서점맏딸이었던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 지금도 책을 좋아한다, 국어교사가 되어 우리 학교에서 유일하다시피한 학급문고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독서방법을 통해 아이들이 책을 읽게 하지만 절대 강요를 하지 않는다. 하여간 책과 밀접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상하게도 집의 아이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책을 인생 가장 큰 낙으로 삼고 살지만 꼭 책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 삶에 반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책을 가장 큰 무기로 살았던 내 삶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몸으로 아는 인생, 미모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삶, 다양한 재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인생도 있는데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책으로 위안과 방편을 삼았던 것은 아닌지.

 

책도 별로 읽지 않고 사교육도 거의 받지 않은데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은 나의 두 자녀는 너무나 당연지사, 학교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다행히 타고난 미술적 재능 덕에 큰 아이는 미대에 진학했다. 솔직히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따로 사교육을 받아 SKY를 가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수업 중에 열심히 듣는 정도였다면 어지간히는 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의 학교 성적을 위해 소중한 사춘기를 학원에서 썩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지나칠 정도로 참담했다.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은 견딜 수 있는데 왜 책도 안 읽는 걸까? 혹시 돌연변이 같이 머리가 지나치게 나쁜 아이들을 낳은 것일까? 특히 둘째는 특별한 재능으로 대학을 갈 것 같지도 않은데 공부조차도 하지 않았다. 1에서 고2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한 달여 동안 정말 단 한 글자의 공부도 하지 않고 아이는 잠자고, 먹고, 피아노 치고, 이 세 가지로 소일했다. 그리고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대학은 꼭 가고 싶단다. 검정고시를 보네 어쩌네 한다. 소고집이라 억지로 공부를 시켜서 되는 아이가 아니었다. 다양한 대안들을 함께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아이가 고2 5월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 운운했지만 헤아려보니 검정고시를 보기에도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허영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학은 꼭 가고 싶어 했고 그것도 재수는 싫다 했다. 남들이 초3 때부터 사교육 받아가며 준비한 대입시를 고2 때 비로소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아이 성적은 지방대 갈까말까 한 성적이다. 학원은 받아주는 데도 없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서 성적의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학원이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여태껏 딱 1달 다녀본 영어학원에서는 그 한 달 동안 영어 교재 6권을 떼게 했다. 못 외우면 남아서 마냥마냥 외울 때까지 하고 가게 해서 진저리가 난 아이는 다시는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겠다 했다. 그런 아이의 영어실력은 고2임에도 중2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원은 싫고 과외를 한다 해서 영어 과외를 8개월 했다. 그 다음부터는 혼자 인강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아이, 3 올라가자마자 성적이 쑥쑥 오른다. 영어단어 실력이 형편없어 발음기호도 제대로 못 읽던 아이는 일일이 모르는 단어를 전자사전에서 찾아 따라 읽고 외웠다. 저런 속도로 언제 수능영어 공부를 할까 싶을 만큼 미련하게 공부하는 아이지만 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그냥 두었다. 인강을 들으며, 과외를 할 때도 아이는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공부 계획을 짰다.

 

지금은 대입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역시나 단 1년 반의 공부로는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는 없어서 갈수록 눈높이를 낮춰야 했고 어쩌면 정시에 합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합격해도 아쉬움이 남아 재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1년 반 동안 아이가 이룬 발전과 성장을 보면 당장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게 뭐 어떤가 싶다. 사실은 네가 원하는 바가 따로 있다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던 부모였는데 결국 선택도, 그 길로 가기 위한 방법도 다 아이가 결정했던 것이다.

공부하는 방법도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하나 스스로 터득해갔다. 물론 중간중간에 아이를 촉발하는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믿음을 가지고 지켜봐 준 학교 선생님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준 과외 선생님들, 그런 선생님을 진심으로 믿었던 아이, 그리고 자기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엄마, 아빠와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던 신뢰의 끈... 아이는 천재가 아니었고 엄청난 노력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옆에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마음을 먹고 자신을 스스로 벼린다는 게 가능하구나, 그게 꼭 대학생활을 누려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때때로 공부를 즐겼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공부할 때가 가장 즐거운 사람이지만 나의 딸처럼 공부하는 맛을 알아갔던 적이 있었나 싶다. 요즘 아이들이 놓치는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았다는 점에서 내 딸이야말로 진정한 호모 쿵푸스. 물론 아래의 권학문에 비추면 나는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 부모는 아닌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수능에서 가장 자신 있던 언어영역을 망쳤지만 아이는 아쉬워하는 나에게 내가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의 의연함은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본 사람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인생에 비합리적인 불행은 있어도 앞뒤가 안 맞는 행운은 잘 찾아오지 않는 법인 듯하다. 원인만큼의 결과가 따라야 그나마 예측이 가능하고 준비를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노력은 좀더 계속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괜찮다. 아이는 좀더 성장할 것이다.

 

<권학문 勸學文> 북송 시대 문인 유영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가르친다 하더라도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 이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부모가 가르치는데 자식이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는 자식이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배우기는 하되 힘써 노력하지 않는 것/ 이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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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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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기를 읽는 일,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평을 읽는 일, 이것이 마치 파생상품처럼 또 하나의 책 읽기, 책 쓰기가 되는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사실은 나 역시 서평과 여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나의 경우,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는 일은 책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이며, 나의 시각이 편협에 빠지지 않았는지 자기 검열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대개 서평을 즐겨 읽는 이들은 본인 스스로 서평을 습관적으로 쓰는 이들일 것이고 책을 꽤 많이 읽는 이들일 것이다. 자기 수준과 경지에 대한 돌아봄, 점검, 검열(?)을 기꺼이 수행할 만큼 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반대로 겸손한 것이거나.

 

그러나 내가 정희진을 읽게 된 것은 그저 그 사람의 문장과 생각을 풀어가는 방식에 매혹되어서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읽었다는 책들은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영역들이 아니다. 아주 간혹, 겹치는 책들이 나와도 새롭게 남들이 뭐라고 했나 궁금한 책들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느낀 것, 내가 가졌던 의문과 비슷한 감흥을 그 사람도 기록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와 내가 비슷한 정서와 의식을 지니고 비슷한 시기를 관통해 살고 있어서일 듯한데, 그걸 확인하는 일은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 가령 광화문에서 열리는 여러 집회에(늘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나가 보면 다른 이슈의 집회 때도 보았던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는 일, 후원금을 모금하고 책자를 팔아주고 서명을 할 때 돌려막기 하듯이 우리끼리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서로 돕고, 서로 먹고 살게 해주고, 서로 이해해주고 힘을 모으는 일이니까. 다만, 그리하여 지평이 넓어지기는 하는가? 하는 면에서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뭔가 새로운 것의 발현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집회의 돌려막기에 비유할 만한, 읽으나마나한 서평은 그러나 그의 책에 거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은 내가 읽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는 책들이 많다. 우리 집에도 같은 학교 같은 국문과 같은 학번 동기인 남편과 나의 책은 접점이 없이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읽는 책에 남편은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둘 다 교육이라는 공통 화두를 지니고 있음에도 교육문제에 관한 책도 공유하는 바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이상하거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이가 세상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핵문제와 미래의 대안으로써 농업을 고민하는 남편과, 공교육 내에서 변화를 꿈꾸는 나는 자기가 읽을 수 있는 한계 내에서도 넘칠 만큼 읽고 싶은 책이 많다. 옆에서 읽고 있는 책이나 말하고 있는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놓지 않고 언젠가 읽어볼게, 혹은, 당장은 읽을 수 없지만 당신이 읽은 것을 이야기해줄래? 이럴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희진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사실 그의 관심영역은 매우 넓지만 특히’) 여성주의나 평화주의? 그리고 유난히 많은 우울과 자살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들이 사실은 내 관심 밖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게 책의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그다지 건질 게 없었다(그래도 알라딘 장바구니, 아니 보관함에 다 담아 두긴 했다. 마음을 열어둔다는 뜻이다). 나는 다만 정희진의 에 매혹되어 책을 읽었다. 책은 그저 매개일 뿐이다. 책을 통해 이 사람이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우울과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사유는 공동체로 뻗어간다. 자기 자신의 기질과 가정사도 언뜻언뜻 비치지만 근자감이나 자괴감이나 왜곡된 겸손 따위로 흐르지 않고 사유의 확장’ ‘약자에 대한 공감으로 발전된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정희진처럼 기질적으로 내향적이고 자기 지향적이고 자칫 책상물림이 되기 쉬운 이가 사유를 밖으로, 약자로 돌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많은 글쟁이들, 책 많이 읽은 이들이 현학적인 사고를 자기철학인 양 호도(사실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일이지만)하고 편향된 시각을 독특한 논리인 양 내세우기 쉬운데 정희진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문체나 글쓰기 방식도 독특하다. 말하듯이 짧게 툭 뱉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이나 글을 인용하되 흔히 글좀 쓴다는 이들이 자기 수첩에 찾아 쓰듯이 그렇게 현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책에서 읽은 말들도 정희진의 몸을 관통했는지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그래서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인데도 정희진의 글은 쉽게 읽힌다. 나는 이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몰라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래, 그런 견해도 있구나, 혹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자세로 읽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정희진의 서평집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자세를 배우고 책을 통해 세상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기만의 언어로 책과 세상을 이야기하는 태도를 배웠다고 해야겠다. 지금 머리 속에서 몇몇 서평가들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다들 말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며, 대중이 잘 읽지 않는 책, 혹은 어이없을 만큼 뻔한 책들에 대해 글들을 쓰기도 하는구나. 어떤 책을 읽어도 자기 안으로 귀결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해도 자기자랑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보석 같은 책에 대해서도 결국 책에 대한 정보 이상을 주지 못하고 (본인이 읽지 못하고) 마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정희진처럼 어떤 책을 읽어도 이 세상의 약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누구나 자기의 안경을 가지고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읽는 책들은 어떻게든 학교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문제와 연결고리를 갖듯이 말이다. ‘고작 선생이든 일개 선생이든 선생의 시각으로 책을 읽는 나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약자의 안경을 통해 책을 읽는 정희진 같은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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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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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를 읽는 내내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결국 서평을 쓰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덤과 같은 옛 책들의 높은 서가, 바르셀로나의 돌 깔린 거리들, 끔찍하고 아르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는 고택들... 그런 이미지들은 가득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는... 그리고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일단 기억하고 정리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들 중 중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었다. 그리고 분명 중요한 역사적 시기와, 그 시기를 살던 사람들의 아픔과 정치적 악행이 담겨있음에도 그것을 거시적으로 통찰해줄 철학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비록 서평을 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바람의 그림자>가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너무나 그리워서(그러니까 뭐랄까, 서사보다도 서정이 더 강한 느낌, 마치 시를 읽고 난 것같은 느낌이 좋았다고나 해야 할까) 결국 영문판 책을 샀다. 원어로 읽으면야 더 좋겠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니 할 수 없이 영문으로... 그렇다고 영어를 술술 읽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한국어로 다시 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그 분위기에 근접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지만 지난 번 읽은 <더 리더>처럼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번역본을 남길 생각이다. 아주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내가 처음 번역에 손을 댄 작품이 될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번역이 끝나면 서평도 쓸 수 있겠지.

 

그러던 중, 그렇게 어렵사리 다시 <바람의 그림자>를 읽던 중, <천국의 수인>이 나왔단다. 표지는 전작에 못 미치지만, 여전히 람블라 거리쯤으로 보이는 비에 젖은 돌과 가로등이 묘한 그리움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사폰의 '문체'가 좋았던 것도 같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작품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결과는? 역시, 줄거리가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왜 루이스 사폰에게는 독재정치의 어두운 역사가 그냥 배경사진처럼 해석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정치나 역사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반복 변주된다고 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에 거리를 두고 '쿨'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이 저자도 그런지 모르겟다. 나처럼 매 사안마다 눈물을 흘리고 분개하고 거리에 나가는 사람과는 좀 다른 부류인지도 모른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면서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아픔을 다루면서도 거리를 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읽은 <천국의 수인> 역시 그러했다. 역사는 겉돌면서 그 안에 담긴 고뇌와 사랑, 같은 좀더 원초적인 것들에 집중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좋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그래서 아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른 것이다. 작가가 '글쓰는 이'로서 작품에 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부분.. 주인공인 다니엘의 어머니를 죽이고 결국 나중에 문화부 장관이 되는 악당 교도소장 발스에 대한 부분이다. 소설가로서 다니엘의 어머니를 사랑한(어쩌면 다니엘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되었던) 다비드 마르틴에 대한 열등감으로 마르틴을 괴롭혔던 그가 결국 시기심에 못이겨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있는 이를 죽게 만들고 나중에는 '문화의 아이콘' 노릇을 하게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겐 문화예술인 출신의 장관조차 드물긴 하지만, 어쩌다 그런 지위에 오른 자가 있더라도 진정한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소위 '명성' 때문인 경우를 많이 보지 않는가. 문화권력으로서 그가 행한 악행은,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문화현장에서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어느 현장이나 비슷하게 일어날 수 있다. 수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교사가 교장이 되는 학교,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가 종교의 수장이 되지는 않는 현실... 리더가 된다는 것이 정신적 귀감이 되는 일 말고도 실제의 행정을 잘해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게 현실이라고 인정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발스를 보면 그래, 그건 독재정권 직후의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공감되는 바가 참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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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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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읽었는데 누군가 연필로 밑줄을 쳐놓은 흔적이 있는 게 아닌가. 교사가 빌렸을 텐데 밑줄을 치다니? 하면서도 그 부분을 읽어 보았다. 기억하고 싶은 급한 마음이었을 터일 텐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제가 저희 반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했던 것은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생님이 자유롭게 계속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교장선생님이 특별하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나무랄 데 없이 잘 해야 한다.”

이 일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어떤 교사가 학교에서 정한 교육적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우선 학교 관리진이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관행에 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너선 코졸을 좋아하는 면 중 하나는 그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지혜로운 교사이고 지도자라는 점이다. 위의 구절도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좀 씁쓸했다. 이 책을 빌려갔던 어떤 교사 - 나의 동료교사 혹은 후배교사일 그...-는 코졸의 실천성을 읽기보다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에만 주목한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실천성을 담보한 좋은 교사 출신 운동가가 꽤 있다. 저술이나 강의로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우리 교사운동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앞으로는 아마도 그런 방향으로도 많은 분들이 활약을 하시리라. 아직 우리에게는 '정치투쟁'이 교육 문제 해결에 더 유효했기에 많은 교사운동가들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조너선 코졸은 우리에게 별로 없는, 교사들이 학교 현장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활동가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는 거시적인 실천에만 앞장서는 사람이 아니다. '천상 교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예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인 교사의 조건에 학교와 사회를 이상적인 곳으로 바꾸려는 변혁의 의지와 능력, 학교 현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의지와 능력, 철학 있는 수업을 구성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과 깊이, 수업을 잘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과 지적 수준 등도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변화 발전의 가능성을 믿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의 행보를 기다리며 지켜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모두를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교사가 이 모두를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져야 한다. 혹은 거꾸로, 저 모두를 가지고 있다 해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사를 하지 말하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공립학교 붕괴는 남의 일이었다. 적어도 2008년 이전에는.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일제고사를 시행하고 자율형 사립학교를 세우면서 많은 이들은 우리도 미국꼴이 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걱정은 5,6년만에 현실이 되고 있다. 조너선 코졸이 지적하는 학업성취도를 중시하는 미국 공립학교의 문제, 사립학교로 특화되어 상대적으로 슬럼화되는 공립학교의 문제, 학교가 거대해지면서 아이들은 쓰레기 취급받는 문제들이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래 글에 나타난 '운동장을 없애고 휴식시간을 없앤 이야기는 학업성취도 평가가 시행된 초기, 쉬는 시간 10분을 5분으로 줄이겠다고 난리를 폈던 우리나라의 어떤 초등학교 이야기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수많은 도심의 공립학교는 성취도 평가를 통해 성취도가 낮은 학교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지원금 삭감을 포함한 제재를 받게 될 것이므로 사설 시험 준비기관에 돈을 내고 학생들에게 시험 준비를 시켜 줄 것을 의뢰한다. 이렇게 시험 준비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되면서 교수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자금이 줄어든다.

시험을 잘 보는 기술을 연습시키느라 정작 교과내용 수업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시험준비 시간을 위해 아이들 휴식 시간을 빼앗기도 한다(애틀란타에서는 계획적으로 아이들이 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동장을 만들지 않는다. 시키고의 성적 좋은 부촌의 몇몇 학교를 빼고는 휴식시간을 없애버렸다).

 

또 다음은 코졸이 지적한 미국 바우처 제도의 맹점인데, 한때 '방과후학교 활성화를 위한 각종 지원금과 제도가 학교 현장을 휩쓸었을 때가 떠올라 씁쓸하게 읽힌다. 바우처 제도를 위해 내려온 돈을 써야 해서 학급마다 집은 어려운데 방과후학교를 신청하지 않은 아이들을 '색출'하고 방화후수업을 신청하라고 설득하느라 담임들이 애를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단순하게 그래도 집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기회를 주려는 제도이니 좋은 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본질적으로는 결국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예산을 쓰는 일에 불과하고, 가난한 아이들이 정당히 받아야 할 세금의 혜택을 '성취도평가' 혹은 특정학교 살리기에 쓴 잘못된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우처 제도의 맹점

표준화 시험(성취도 평가)로 인해 교육계가 시장 경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우처 제도.

이들은 공립학교의 실패와 불평등한 분리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바우처 제도 등을 도입하여 마치 가난한 집 아이도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집 부모 역시 극소수이다. 가난한 아이들 부모 중에서도 바우처 제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아니다.

헤드스타트(취학 전 빈곤층 교육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조차 극소수이다.

학교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빈곤층 학부모는 극히 일부분이고 정부나 교육당국의 선전효과만 높다, 결국 학교 당국의 선택권만 넓어질 뿐(우리의 자사고에도 사회적배려자 전형이 있지만 선전하고 난 후 그 아이들은 대개 부적응하고 전출가는 경우가 많다).

바우처 옹호자들의 주장(학교 민영화를 지지하는 세력) - 사립학교나 혼합형 학교의 성취도가 더 높다는 주장을 한다. 바우처 자금은 학업성취도에만 맞춰진 측면이 있다,

 

조너선 코졸은 또한 '미니학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유치원~ 8학년 과정의 학교에서는 고학년이 보조교사 역할을 하면서 자기성장이 가능한 학교이다. 아이들이 '선배가 되면서 저학년을 위한 보조교사 역할을 한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나는 수업 중에 협동학습을 통해 조금 먼저 이해한 아이들이 친구들을 가르쳐 주는 방식을 활용하는데 코졸의 발상은 그것을 학교 전체로 확대시키는 양상이다. 친구나 후배를 '가르쳐주는' 방식은 도움을 받는 아이에게도 좋지만 가르치는 아이도 성장시킨다. 다만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학교나 교실의 인원이 적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졸은 미국 공립학교가 대형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내가 정작 좋아하는 부분은 "교육과정과 규칙 규준 목록과 외부에서 정한 교육방법 등이 아무리 훌륭하고 현명해 보인다 해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공감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구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수업 장면이다. 나 역시 온갖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머리가 복잡하지만, 아이들과 어떻게 수업을 하고 학급운영을 할까 구상할 때 가장 행복하고, 그것이 현장에서 따뜻하게 구현되는 과정의 행복감 때문에 학교를 견뎌올 수 있었던 사람이다.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 중 하나는 다음 수업장면이다.

 

코졸이 랭스턴 휴즈의 시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대부분이 흑인 아이들이었던 교실에서는 어, 지은이가 흑인이네!" 하는 술렁임이 일었다. 휴즈의 시 중 <지연된 꿈A Dream Deferred>을 읽어주자 한 아이가 다가와 어머니께 보여드리게 그 책을 빌려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고 다음 날 그 시을 외웠다며 반 아이들에게 읊어주었다....

아이들에게 흑인이 쓴 책을 보여주고 싶었던 교사의 열망, 아이들에게 누더기가 아닌 새 책을 읽게 해 주고 싶던 열망을 절절하게 말하지만 젊은 시절의 조너선 코졸은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교육과정을 위반했다고...). 교육과정에 없는 프루스트의 시를 읽어주었을 때는 칭찬했던 교장이 랭스턴의 시를 읽어주었다고. 어이없는 미국 교육현장이라고? 우리에게는 통일을 가르쳤다고 탄압받거나 학교에서 쫓겨났던 교사들은 없었는가? 꽉 막힌 이념 혹은 편견의 벽을 부수는 일은 미국 교사에게나 한국 교사에게나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그런 작은 문제에 대한 큰 희생을 감내한 싸움들이 쌓이고 쌓여 그나마 부자들을 위한 교육당국의 전횡을 조금씩이나마 막아내는 것이다. 남의 나라 교육 이야기지만, 그리고 바로 지금, 최근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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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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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을 내고 난 후, 책의 마케팅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가치도 그렇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나온 것들은 마케팅과 포장의 힘으로 그 가치가 더 살아나기도 하고 말기도 한다는 것.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좋은 가치관을 지녔고, 잘 읽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제목이 그럴 듯하게 자 지어진 덕에 좋은 책이 묻힐 염려도 없다. 방학 내내 식탁에서 야곰야곰 읽으면서 행복했다.

만화책 좋아하는 남편이 생일선물로 받은 <현미선생>을 다 읽은 직후인지라 아, 이본에도 이렇게 흙과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따뜻한 마음이 들어 좋았다. 글이나 사진이 간결하고 어여쁜 것이, 그들이 만드는 담백한 빵처럼, 소박하게 만든 고급스러운 여성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져 일부러 천천히 읽었다. 빵집이 있는 시골마을을 들여다 본듯 사진도 어여쁘고 주인장의 가족도 사랑스럽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전통의 자취도 아름답다.

 

 다만, 어째 이 책이 이토록 언론의 주목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아한 면이 있다. 이 책이 표방하는 가치대로라면 조용히 입소문으로 읽히고 퍼져야 더 어울린다. 그런데 미리 주요 일간지들에 소개가 되고 작가 인터뷰들이 실렸다..... 뭐 자본론을 언급하고 이윤추구를 하지 않는다 했으면서 자본주의적 유통방식으로 책이 알려지고 팔린다는 점이 좀 걸린다. 노력하면 더 잘 팔릴 수 있는 책들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겠노라고 '작게 낮게 느리게'를 표방하는 출판사들도 있는데 말이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느다는 말은 '돈을 더 벌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 벌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욕심이 끼어들면 초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에 동의하고 말고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부패'에 대한 생각은 공감하는 바가 많다. 우리는 흔히 '부패'와 '발효'는 인간의 입장에서 유용한가 아닌가를 따지며 다르다고 말하지마 근본적으로 생명의 전환이라는 면에서는 같다. 부패하지 않음은 순환하지 않음을 뜻한다. 큰 의미에서 자연은, 개체의 죽음들 앞에서도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패의 순환논리' 인 것이다. 그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는 면에서 이 책의 미덕을 높이 살 수 있다. 아이들과 핵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자주 보여주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 것도 좋았다. 핵 이후의 지구와 인류는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지구의 지혜라면어떤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이 '부해'라는 존재를 상상하게 했다. 만화영화는 나우시카의 존재와 더불어 '부해'를 제시함으로써 그나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핵은 닮은 점이 많다.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이기저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저자처럼 작은 움직임 속에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생명을 조화시킬는 사람은, 지금은  소수처럼 보여도 매우 많다. 우리 나라에서도 곳곳에서 작은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생협, 유기농사, 동네 도서관, 각종 소모임들... 지역에서 자가경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 거시 정치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런 작은 움직임들은 따로이면서 또 같이 언제인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길어진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는 날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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