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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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은 묘하게 매력적이고 묘하게 힘든 일인 것 같다. 광고와 여성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다. 더러는 대학 때 누구보다 멋진 시를 쓰던 이들... 만약 시인이 되었다면 한없이 드높은 곳에 빛났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아니 빛나지 않았더라고 고귀함을 간직했을 그들이 자본주의의 네온사인 앞에 자신의 빛을 보탬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거기에 녹여 없애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기도 하다.

 

박웅현에게는 드높은 무언가가 있다. 시적 감성도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있다.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정성도, 예술성도 있다. 그런데 그는 시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광고인이 되었다. 광고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적인 가치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적이어야 함에도 상업성이 예술성에 승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했던가. 어차피 광고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아무리 의식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웅현이 만든 삼성 광고를 보면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의 범위를 가늠해 본다. 아무리 아니라고는 해도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한다는 광고의 파장은 컸다. 그것이 이끌어낸 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박웅현답지 않다. 그렇게 영민한 사람이 그걸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김정운 이후 나는 요즘 좀 까칠한 것 같다. 재능은 분명 세상을 위한 축복인데 재능이 무의식을 만나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는지 아는 까닭에 좀 까칠해지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박웅현이 공동체에 해악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까워서 하는 소리다.

 

이 책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도종환의 시가 좋았다.  또 수험생 광고를 보다가 울컥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 책을 읽던 시점 둘째가 고3이었고 수시에 떨어져 정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라는 멘션은 수험생 자신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라면 참 성숙한 녀석이겠지만 기실은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험의 세계가 비장하다. 그 한 복판에 내 새끼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영웅입니다같은 광고는 (남 비교해서 좀 미안하지만) 이제현의 광고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있다. 인문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회적 의미, 정치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때로 정치색을 빼고 무색무취한 인문학 공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껍질 직전의 속살만 알겨먹()자는 의도로 매우 얍삽한 자세라 생각한다. 박웅현이 감히 인문학 광고를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와 같은 사회적 의식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좋은 광고 99개를 두고도 사람들이 삼성의 1등 광고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나머지 광고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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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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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잘 모르는 남의 문화에 기반한 책들을 읽을 때는 늘 이질감을 느낀다내가 읽는 이 입장이 아니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아마도 책을 모두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모르는 이야기대로,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즐기면 될 것이다. <신곡> 같은 책은 알알이 박힌 주석을 찾아 읽는 것이 쏠쏠한 재미일 수도 있다. 독서에 정석이 어디 있으랴.

 

의외로 단테는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지옥론을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테는 통찰력 있는 저자였지만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도 있겠다 싶어 웃음도 좀 나온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글 쓰는 이는 글로써 세상에 빛을 주기도 하고, 못다 한 고백도 할 수 있다. 기도의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고 글로써 복수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다 못한 말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도 그런 요소가 더러 보여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개인적 경험이 전부였다면 신곡이 고전이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당시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보편성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 있고 풍부한 상식과 역사적 고찰, 도덕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문학적 섬세함으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는 얼마나 정교한가.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니다. 어디를 가도 성소에 들르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기도와 독백을 올리며 나를 돌아볼 뿐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를 종교적 존재로 만나지 않고 붓다를 존경하지만 역시 신앙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경 속에 그려진 상상의 세계와 예수가 설파한 레토릭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매주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 독송을 하면서 아미타경 속에 그려진 극락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곳이 정녕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돌아보게도 만드는 것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은 참 섬세하다.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단테 이후 그의 지옥도나 천국도에 빚진 예술가들이 참 많을 것이다. 이중 눈에 띄는 지옥행자들이 있다. 3곡에는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지옥이 펼쳐진다. 하느님께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천사들의 지옥이기도 하다. 죽음의 희망조차 없이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는 자들에게 문 앞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써있다 한다. 희망 없는 지옥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때가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만지면서 아, 행복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바쁘게 일을 하다가 허기질 때, 이 일이 끝나고 곧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 행복하다. 간절히 읽고 싶은 책을 기다릴 때, 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아이들과의 즐거운 수업을 구상할 때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 없는 지옥이야말로 진짜 지옥인 것이다.

 

<신곡>은 대체로 기독교적 가치에 준해 그려졌으므로 11곡에는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한때 자발적 기독교 신자였으나 또한 자발적으로 교회를 뛰쳐나온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가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무언지조차 몰랐던 나의 할머니나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교회가 해준 답은 네가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였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납득을 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6학년의 가슴에 불신을 심어준 교회가 싫었다. 예수님이라면 다르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왔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 교회의 타락상이 싫어 거의 반기독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나의 신앙 역사는 그러했다. 지옥에 가고 싶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고 싶지도 않으니 어쩐다?

 

이간질한 자들의 지옥도 재미있다.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닌다고 한다. 부끄러워 하라는 뜻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피에 삶아지는 지옥에 들어야 하는 폭군들에게 신곡을 읽히고 싶다. 어느 정치인도 자신이 폭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틀러를 경배하지 말라, 그는 악마다, 라고 말하는 독일인을 보면서 우리의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어디까지를 폭군으로 규정해야 할까를 생각해 본적이 있다. 대개 박정희를 경배하는 이들 중 히틀러를 추앙하는 자가 나온다. 물론 박정희를 좋아하지만 히틀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둘은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수백만을 죽인 자와 박정희는 다르겠지. 그러나 정도는 다를지언정 독재자는 독재자, 폭군은 폭군이다. 미화는 금물이다.

 

무엇보다 가장 지옥스러운지옥은 34곡에 등장하는 배신의 지옥이다. 가끔 고민한다. 사랑이 더 중한가, 믿음이 더 중한가?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내가 한 생을 잘 살아내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그러나 믿음은?  그저 한 개인에 대한 믿음이든, 그것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을 어찌 용납할까 싶다. 그래서 그것은 배신(背信)이다. 사랑보다 뿌리 깊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며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배신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것이 유대 민족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것이 스스로 의식한 것이든 아니든, 잘못된 인식이든 결국은 배신이다. 가장 멀고도 깊은 지옥에는 배신자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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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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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엄기호

 

이 책은 나와 같은 교육공동체 벗의 이자 사회학자인 엄기호가 쓴 책이다. 제목이 무척 진하게 와 닿는다. 적어도 교사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여태까지 학교와 아이들이 병들어갈 때 가장 큰 주범 역할을 했던 것은 교사였고, 그러므로 교사는 가해자이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교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 나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사도 학교가 싫다정도였더라도 많은 교사들이 맞아맞아, 하고 가볍게 동감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싫다두렵다로 나아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남몰래 얼른 책을 집어 드는 시기가 되었다.

 

오늘날 교사들을 학교 가기 두렵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 더 이상은 통하지 않게 된 교사의 권위에 맞서 살벌한 눈빛을 날리는 아이들 때문에, 그리고 따박따박 자기 아이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끼리의 싸움조차 깨알같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왕따와 폭력와 송사가 난무하는, ‘손해 볼까 두려워 서로를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는이 사회의 적대적 분위기 때문에....?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교사들을 가장 괴롭혔던 관리자들의 횡포는 이제 별 것도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교장이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교사를 짜르지는못했으니까. 이제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교단에서 물러나게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장, 교감 때문에 힘들고 지쳤을 때는 아이들이라는 숨통과 출구가 있었다. 교사의 주된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아이들과의 교감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답답함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들과의 벽을 느끼고 적대적인 눈빛과 개김에 맞닥뜨려지는 순간, 교사는 이제는 더 이상 출구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엄기호의 글이 교사와 학생의 단절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단절의 사회적 원인을 짚고 있을 뿐 아니라, 교사들이 학교에서 느끼는 갈등의 꽤 중요한 부분임에도 별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동료와의 관계성 문제도 짚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공감하는 바다. 상대적으로 교사들의 스트레스 원인에서 동료관계가 덜 중요하게 비춰졌던 것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좋다면 동료들과의 관계를 좀 서걱거려도 상관없을 만큼 비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뒤집으면, 그만큼 학교에서, 특히 수업에서 교사들의 협업이 적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료와의 관계라고 말하면 수업이나 학급운영 등에서 서로 돕거나 교감하거나 서로를 발전시키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교무실에서 불협화음 없이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많은 교사들은 비교적 평등한 편인 동료들 간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경험하며 상처받아왔을 뿐 아니라,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점에서는 단지 교무실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정도의 동료관계로는 학교생활을 잘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학교 안에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갈등과 문화적 괴리는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고 결국 교육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실이다.)

 

혁신학교는 지금 현재 출구가 없던 한국 교육의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그것이 유일하게 옳은 대안이냐를 떠나서 그나마 차선 혹은 차악일지라도 말이다. 꼭 혁신학교가 아니어도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검토되는 대부분의 학교 형태, 교육과정, 교육철학의 기조는 소통과 협업이다. 아이들에게도 협동학습을 통한 자기주도의 학습 태도를, 즉 물고기 잡는 법을 길러주는 교육이 행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사들 스스로는 동료교사와의 협업 없이 혼자서 잘해내려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동료가 단지 분위기를 어그러뜨리지 말아야 하는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수업을 연구해야 하는 연구 동반자로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중노동일지라도 사람들을 힘내서 일하게 하는 것은 관계이며 관계망의 가장 튼튼한 기저는 그 직업의 목적이 되는 관계일 것이다. 교사에게는 그것이 바로 학생들이다. 그것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무진단에 우리가 공감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거라면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비교적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인 나도 가끔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착한 아이들이 다니는 안정적인 학교 분위기 덕에 큰 어려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던 나같은 경우는 매우 행운아일 뿐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꼬집었다. 교단의 희망을 말하는 자 아직 덜 아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 언젠가 넌더리를 내고 교단을 떠나고 싶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 진단을 넘어 대안을 말하고 싶다. 근거 없는 희망의 독을 뿜어서도 안 되겠지만 대안 없는 절망론으로 그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교육 불가능론을 어떻게든 뛰어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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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반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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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강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글투가 싫지 않다. 학문이란 게 딱딱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이든, 말이든. 그리고 유쾌 발랄함 가운데 진지함이 뼈대 있게 들어있는 것, 좋아한다. 그리고 솔직히 서점에 베스트 셀러 가판대에 깔려 있는 이 책이 진짜 읽고 싶었다. 호기심이 끌린 것이다. 그런데 마침 심리학 책이란다. 솔직히 신문에서 김정운의 글을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그가 심리학 전공인 줄은 몰랐다. 한겨레에 글을 쓰더니 조선일보에도 글을 쓴다고 했을 때나 방송에 나와 말하는 것을 들을 때나, 저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매우 궁금했지만 말이다. 교수이지만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이 살면 세상에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기여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유쾌발랄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발랄한 진보라면 최상이다.

 

부자이고 서구 혹은 외래 지향적이고 자기 삶을 누리는 진보는 나쁜가? 사람의 삶은 자기 경험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그걸 해낼 수 있는 이는 진정한 선각자’, ‘지도자일 수 있지만 현대는 그런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각자 자기 삶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가능한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정도만 해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 역시 삶의 한계를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는 누려도 되고 어디부터는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지금도 늘 부끄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도 인생을 즐기지 못하면 어떻게 사는가,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김정운에게 꼭 의식 있는 투사, 혹은 석학에게 기대할 만한 학문적 진지함이 없다고 해서 그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은 재미있다. 공감하는 바,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수업인데, 수업도 알고 보면 교육과정 + 교사의 지식이 만나는 예술이다. 교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교육과정과 결합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 멋진 수업이 탄생하기도 한다. 가끔 어딘가 가서 강연을 해야 할 일이 있다.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지만 어쨌든 해내야 하는 과제이니 충실히 준비를 하려 애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을 끌어 모아 잘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여태 구성’, ‘수업 준비라고 생각했던 것을 김정운은 편집이라고 명명한다. 그럴 수도 있다. 사실 책을 내는 일도 가끔 감탄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도서 편집자의 가치를 별로 못 알아주는 곳이지만 어떤 매체에 글을 실어보거나 책을 내 본 사람은 안다. 자기 글이 책자에 실리기까지의 과정, 그 편집의 미학을 말이다. 편집이 예술임을 완성된 책을 품에 안고 여러 번 느낀다.

 

책이나 매체를 통해 글을 발표하다 보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편집자와의 논의를 통해 멋지게 다듬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편집자의 의도와 독자의 반응을 통해 글이 자란다’. 필자는 나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안의 생각과 정보들이 재편집된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면 더 좋은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럴 땐 편집이 창조다라는 김정운의 말이 맞다.

 

하지만 편집이 가능하려면 그에 앞서 정보의 수집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질문! 단순한 정보의 수집은 공부인가, 아닌가? 정희진은 독서를 몸을 관통하는 일이라고 했다. 책 하나를 읽고 거기에서 얻을 정보를 메모하고 디베이스화하는 일과, 온 몸으로 그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사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어떤 읽기필요에 의해하게 되며 언젠가 유용하기에 정리할 뿐 받아들여지지 않는, , ‘독서가 아닌 말 그대로 정보 수집에 불과한 행위에 불과한 것도 있다. 만약 강사나 여행 가이드나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정보수집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몇몇 정보가 아닌 자기 분야에서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한 후 자기 것으로 편집하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공부는 그보다 본질적인 것에 닿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성이라 부르는 것은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 자기 몸과 밀착되는, 체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때라야만 나오게 된다. 저 사람 아는 것이 많구나, 가 아니라 저 사람 진짜구나, 라는 느낌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다. 진정성이 알맹이라면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많은 에피소드들, 근거 자료들, 더 멋지게 표현하는 방법은 전략과 기술에 해당하는 일이리라. 그렇다면 김정운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략으로써 편집을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들과 상담 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심리학책이라기에 목록에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분들이 이 책의 매력을 선택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어디에 심리학 이론이 있는지? 어떻게 사람의 심리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는 그 자세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 아이폰 광고가 소비자의 심리를 잘 이용했다는 이야기나 일본인들의 청결함이 프로이트적 항문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 심리학이라는 것인가? 심리학 책들이 새로운 이론까지는 제시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심리를 바라보는 철학, 혹은 초점을 두는 부분을 강조하는데 비해 이 책은 어떤 심리를 어떻게 바라본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여러 책들과 함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읽고 있다. 이 책도 지루하거나 무거운 책은 아니건만 아무래도 침대머리에서 <에디톨로지>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프롬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개념이 주어지자 사람들이 느낀 게 그야말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고 고찰했을 때의 무게와 김정운이 삶을 편집하라고 주장할 때의 무게는 다르다. 사람의 무게가 다르지 않느냐고? 김정운은 주변국 지식인의 억울함을 실컷 말했는데그 뼈대있는 농담, 즉 자신이 주변국의 이름없는 학자라서 소외받는다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의 학문적 깊이와 진중함을 먼저 돌아보라 하고 싶다. 아니면 유쾌발랄한 에세이로서 자기 책에 가치를 두든지.

 ‘석학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편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정보들을 모아 철학을 정립한다. 편집이 잘 되면 더 잘 팔리긴 하지만 내용은 없고 편집과 마케팅만 잘 된 책과, 잘 팔리지는 않지만 진정성 있는 책, ‘진짜인 책은 다르다.

 

저자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라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본다. 관점을 바꾸라는 의미이고 발랄하게,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자는 취지에서 재미난 책을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감사히 여기는 바이지만 그래도 뭔가 2%, 아니 20% 부족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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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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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다.

 

2014416,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국 30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중 254명은 열일곱 살 먹은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이었다. 이것은 사고인가, 사건인가?

전 국민은 기울어 가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왜 저 배가 기울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했지만 곧 그 의문은 왜 구하러 들어가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당시 해경은 물살이 거세서 들어가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이후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는 그 차가운, 그 깊은 바다 속으로 수많은 잠수사들이 들어갔다. 물위에 떠 있는 배에 산 목숨은 위험해서 구하러 못 들어가는데 40여 미터 아래로 가라앉아 무너져가는 배에 죽은 시신은 건지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세월호가 기울어진 원인이 과연 다 밝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과적, 평형수 부족, 노후 선박, 무능한 선원... 그런 요인들은 다른 많은 배들도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저러다 침몰하지, 그러나 그건 운일 뿐이지, 세월호는 운일 뿐이지.... 어디선가 음산한 마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을 (추정) 원인이라고 내놓았지만 그마저 선주가 변사하는 바람에 밝힐 수가 없단다.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것이 있는가? 과연 밝힐 수 없을 만큼 규명이 어려운 일인가?

 

생때같은 어린 자식이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은 부모들이 원인을 알고 싶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알려 달라, 처음에는 읍소했고, 나중에는 잠긴 목으로 요구했고, 더럽고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절을 해가며 빌었다. 그들은 뭘 그리 잘못했는가?

 

법과 국가는 개인들의 보복과 불합리한 문제해결로 인해 생기게 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손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그나마 합리적인 제도이다. 그래서 세월호가 침몰해 갈 때 구조는 국가가 할 일이라고 모두 말했다. 그래서 해경이 출동했고 민간잠수사들은 그것이 자기들 책임이 아닌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지 않는다 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선주와 회사와 선장과 선원들 때문이라고 치자. 아이들은 배가 침몰했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살아서 탈출한 사람들이 그 증거이다. 구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구조는 국가의 의무였다. 헌법 346,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에 국가는 대답을 했는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장면 중에는, 무고하게 죽은 자식의 원한을 갚거나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회도 국가도 법도 편이 되어주지 않자 부모가 직접 나서는 이야기들이 있다. 탈법을 저지르더라도 관객이 그 복수의 전선에 나서는 부모를 응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회가 부조리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과정도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의 부모는 분노를 모아 없던 능력을 발휘한다. 수사도 하고 변호사 역할도 하고 정보기관과도 싸우고 조폭들을 파헤치고 다니고 살인마와도 맞선다. 하지만 영화 속의 그 유능한 부모는 현실에는 없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300집이 모여 원망과 분노를 끌어 모아도 무력하기 짝이 없다. 원인을 알고 싶다고, 같이 조사하고 싶다고,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심지어 곡기를 끊었다. 그것은 싸움인가? 단식이 어찌 투쟁이 될 수 있는가. 투쟁이란 창을 들고 벽을 부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만큼 죽어간 아이들 못지않게 부모들도 약하디 약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제 그만하란다. 당신들이라면 그만할 수 있겠는가? 백년이 흘러 그 부모마저 죽어 백골이 된다 한들 그 원통함이 가실 수 있겠는가? 모든 원인이 다 밝혀지고 모든 책임자들이 다 벌을 받고 모든 배상과 보상을 다 받는다 한들 그래, 이제는 다 되었다. 마음 편히 내 자식을 저승으로 보낼 수 있겠다. 이제 내 마음에서 떠나거라.’ 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하물며 그 어떤 것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하란다. 무얼 그만 하라는 것인가?

 

다시 묻는다. 이것은 사고인가?

사고가 났는데 생떼를 부리는 것인가?

잊지 말자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은가?

짐승들도 새끼를 잃은 모정을 서로 어루만진다. ‘인간성을 잃었네라고 말하지만 그저 본성만으로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남의 눈물을 비웃어도 되는가? 하늘은 무섭지 않은가? 혹시 그 아이들은 당신이 죽인 것은 아닌가? 나는 오늘도 묻고 싶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묻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올해 어쩌다 보니 이러저러한 자리에 세월호 이야기를 많이 썼다.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쓸 것이다. 애도는 충분해야 하지만 세월이 가도 추모가 바래지지는 않는다. 억울한 죽음이라면 더더욱.

 

박민규는 시인, 소설가, 문학인들과 모여 세월호를 글로 애도하는 자리에서 눈 먼 자들의 국가라는 글을 썼다. 잘 쓴 글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시가 아니지만 글을 읽으며 절창(絶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잘 쓴 시를 뜻하는 이 말은, 그 한국어 어감 때문에 (창자)’를 끊어내는 느낌이 있다. 간절하게 내 마음을 표현한 듯한 시를 읽고 같이 울다 보면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공감을 느낀다. 문학이란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시가, 그런 글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세상에는 시인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박민규의 글은 간결하고 강력하고,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고 처절하다. 그의 마지막 말을 내 마음 대신 전한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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