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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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착한 소설이다. 완득이가 처음 나왔을 때 재미있는데 착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을 발견했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오즈>에서도 재미있고 착한주제의식을 발견한다. 백화점식으로 아이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사회적 이슈를 담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아서 작가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의 고단한 삶과 북한 인권문제, 빈곤층의 안타까운 사연과 빈부격차 문제, 그리고 노인 노동, 학교폭력과 자살, 구제역 살처분으로 인한 인간 존재의 회의, 그리고 그 과정을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 노숙자 문제, 유학생의 부적응, 폭식과 우울, 그리고 세 건의 자살 이야기...그 하나하나만 다루어도 훌륭한 소설이 될 많은 이야기들은 여기 다 담아내려 한다. 건강한 주인공이긴 하지만 도로시라는 여고생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듣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해결사 혹은 관찰자로 등장하는 건강한 소녀이미지는 한편 현실에 없기도 하고 한편 어딘가에 있기도 하다. 그맘때 여자아이들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한편 배려와 헤아림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다. 어리바리한 소년들보다 명민하게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영리함도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작가 말대로 누천년 내려온 모성성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여고생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많은 이웃의 아픔이라니...

 

결국 이 소설은 많은 아픔을 건강하게 이겨낼 에너지를 보여주는 착한 소설이다. 비참한 이야기들이지만 사실 전혀 과장되지 않은 현실들 그대로인데 그 해결 과정이 너무 순조로워서 이 현실적인 소설은 그만 판타지처럼 느껴지고 만다.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반드시 대안을 이야기해야 함이 아닐 수 있다. 현실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게 희망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하는 게 오히려 희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대안이 없을지라도 희망의 에너지를 그 작은 빛을 잃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수 있다. 요즘 많은 사회학자들이 절대절망을 흔히 말하지만 지나친 희망도 희망이 아니다. 좋은 발상과 좋은 소재, 좋은 문장과 좋은 인물들, 좋은 주제의식이었음에 감사드리고, 작가는 앞으로 이 안에 담았던 많은 문제들을 좀 더 세밀하게 담아내면서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에너지의 섬세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적 대안들을 담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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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비행 - 이경화 소설집, 가짜 같은 진짜 십 대 이야기 탐 청소년 문학 15
이경화 지음 / 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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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교사연수용 자료로 좋은 작품을 발견했다 <가해자>가 그것이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전이 대단하다. 얼핏 보면 피해자처럼 보이던 아이가 사실은 교묘하고 악랄한 가해자일 수 있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접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매우 공감이 된다. 소설 속에서야 진짜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끝나지만 사실 학교폭력의 먹이사슬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모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도 있다. 또한 아이들 관계만 보면 가해-피해가 명확할지라도 가해자인 아이가 살아온, 살고 있는 환경을 살펴보면 또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가해자라는 명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작품이 학생들 생활지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에 교사연수 자료로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학생들 말고도 담임교사, 학생주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어머니들 등 여러 어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정체(이해관계와 상처, 배경 등)가 갑자기 확 드러나지 않고 반전이 거듭된다는 면, 즉 뻔한 인물들(알고 보면야 뻔한 인물들이지만 처음에는 아닌 듯 보이고 인물의 행동이 의아하게 보이는 것이 이경화 작품의 매력이다)이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다. 교사들은 이 중 학생주임과 담임교사의 행동, 특히 담임의 행동에 자신을 비추어볼 것이 가능하다. 또한 화자의 어머니를 보면서 요즘 흔히 만날 수 있는 진상 학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며 교사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의 심리는 더욱 복잡하다. 학교에서 사안이 생겼을 때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결코 천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선설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사악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또 뒤집어 보면 아이들이 사악하고 교활해서라기보다 자기방어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교사들 중에서도 아이들이 아주 무섭고 나쁘(그런 아이들도 있다고, 혹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좀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나의 경우는, 어른도 그렇지만 사악하다기보다 미성숙해서, 교활하다기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혹은 자신의 행동이 미칠 영향을 미처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자꾸 원인을 헤아리게 되고 극단적인 악한 행동이 아니면 개선의 여지를 대체로 발견한다. 이런 교사들은 허용적이고 설득적이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서 동료교사들은 갈등을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자신은 합리적으로 대처한다고 생각하지, 지나치게 엄격하다거나 지나치게 느슨하게 아이들을 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과 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교사에 대해 비난하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다.

답은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교사들이 많이 나누어볼 필요는 있다. 사실 학교에는 극단적이고 부도덕하지만 않으면 다양한 생활지도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교사들마다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가치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다양한 것이 좋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과 방식이 다른 교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기에 딱 좋은 교재가 되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작가는 나라꽃을 피우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임이라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재해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세월호의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에 연결했다. 단순한 사고로 선장이나 선박회사의 잘못에 불과하다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지도자를 옹호하기 위해 애써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탈색시키려 노력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은 세월호를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상징이자 비유이자 묵시록으로 읽는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이것은 교육적 담론으로, 정치적 담론으로, 시대의 비유로, 위선자들에 대한 비아냥으로 해석될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로 비극과 절망을 읽었지만 이경화는 가만히 있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학생들, 의경들로 뒤집어보려 애쓴다. 마침, 허무하기 짝이 없는 세월호 청문회를 목격한 직후에 이 소설을 읽었다. 600일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아무런 극복의 대안도 생기지 않은, 21세기 민주주의, 선진국을 향해가는 나라에서 일어난 무고하고 엄청나고 무도한 이 사건.... 삶은 불합리할 때 가장 공포스럽다. 평화를 가장한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뒤집은 <GD 240>

이 소설은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및 사회적 지위가 전복되었던 소설. 그 소설의 영향은 그러니까 결국 남자들이 자신들이 1이어야 할 이유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여성들에게는 쾌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남성들에게 남녀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동지애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들끼리 여자들 안의 남녀차별주의를 극복하고 패배적 사고를 벗어나는 데에는 좋은 텍스트였을지 모르지만 남성 동지들을 끌어오지 못하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책이었다는 뜻이다.

 

동성애자를 마이너리티로 바라보는 사고를 전복하는 <GD 240> 역시 읽고 나면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불합리하게 소수자,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 역시 그러니까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의 폭력을 극복하게 할지에 대해서는 좀 부족한 점이 느껴진다. 물론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한 번 비틀어 풍자를 하고 싶었을 뿐,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면서, 어때,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메이저라고 너무 잘난 척하지 말자고, 이렇게 쿨하게말이다.

작가가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런 비판도 무의미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전복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남녀차별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대상이었고 차별하는 남성을 적, 혹은 공격의 대상으로 삼으면 남녀차별이 극복되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폭력을 이성애를 소수자로 만듦으로써 극복하려 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전복적 사고가 요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역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여성혐오로도 나아간다. 물론 요즘 나타나는 여혐에는 사회의 극우화가 일조한 면이 크지, 이것을 페미니즘 운동의 잘못으로 보면 안 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여성가족부라든가 정치적 이유로 악용되고 활성화된 일베로 인한 기형화된 사회현상으로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참에 건강한 페미니즘과 남녀평등의 방향을 새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경화의 작품은 일반적인 청소년 소설과 많이 달랐다. 학생들이 읽어도 교사가 읽어도 학부모가 읽어도 될, 읽어야 할 논쟁의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좋은 소설이란 게 때로는 좋은 가치를 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작품이 좋은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청소년 소설 중에서 청소년이란 이름이 붙는 바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작품이 꽤 많다. 어른들이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바이다. 특히 교사들께서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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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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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에 교직과목 특강을 나가면서 이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았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프레이리는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교사를 희망하지 않아도, 학생들에게는 필독서였던 기억이 있다. 특강에서 어떤 교직관을 세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육학 책들을 살피다가 이 책을 집어든 순간 역시 프레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이, 적어도 대한민국이 아직도 별로 변하지 않았거나 프레이리가 일찍이 혜안을 지녔던 것이거나일 터이다.

마침 젊은 교사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던 만큼 이 책은 쉽고 간결하게 교사들이 어찌 교단을 지켜야 할지를 설파한다. 그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자였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완고해 보일 정도로 엄격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단호한 교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싸워야 함을 강조하지만 수업이나 생활지도에서도 교사 자신을 전문가로서 벼리는 데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교사들이 이 책을 다시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정치적 투쟁만이 교육적 개혁의 전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과 교사의 본문을 헷갈리지는 않는지, 방임과 인권, 자유를 혼동하지는 않는지... 혹은 거꾸로 입으로는 인권과 진보를 말하면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런데 프레이리를 놓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학자를 다루어서 불편했다고 강의평가에 쓴 학생이 한 명 있었다. 특강에 참여한 네 명의 교사들에 대해 진보적인 교사들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의 교사도 특강에 참여했더라면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사실 특강에 참여한 교사 중 소위 진보적 성향의 교사는 한 분이 더 있었을 뿐이고 다른 두 분은 어떤 정치적 입장도 가지지 않은 교사였다.

80명의 학생 중 단 한 명의 의견이니 무시해도 될 법하지만 나는 내내 그 의견이 마음에 걸렸다. 프레이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그를 중심으로 교직관 수업을 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섞이게도 마련이니 학생들 중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지닌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학생이었다면 굳이 진보적 교육학자가 불편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은 원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라면 다양한 학자와 이론들을 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곳이니까. 예비교사들이 좀 더 진보적이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잘못된 것일까.

 

프레이리는 교사들에게 묻는다. ‘권위주의적인 학교 행정 아래 굴복하는 양육자보모가 될 것인가, 민주적인 학교를 꿈꾸는 저항하는 교사가 될 것인가.’그의 답은 교사의 역할은 행정가들의 거만함과 무한권력에 맞서 품위 있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다.

프레이리는 철저히 공부하는 전문가로서의 교사가 되라고 젊은 교사들을 독려하면서 어설프게 보모노릇이나 하는 게 교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교실에서도 아이들을 방임하는 것을 자율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육이 온정주의적 과업이 아니라 전문가적인 일임을 명심하라고 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보모교사는 행정의 시녀가 되어 아이들을 양치기처럼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교사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의미이지, 아이들에게 무한사랑으로 열린 가슴을 가진 교사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육자가 될 것인가, 저항하는 교사가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시기는 브라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교사의 위상을 고민할 때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교사들은 사랑으로만 가득 찬 순종적인 보모도 거부하지만 저항하는 교사도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직업적 조건의 달콤함으로 교단의 모든 스트레스를 감내하려는 직업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요즘 젊은 교사들은 직업으로서 교사의 자리에 서서 아이들에 대한 헌신도, 자기를 희생해가며 정책을 변화시키려는 열정도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무기력한 대다수의 교사들이 그랬듯이 수업도 대충, 열의도 없음, 마지못해 월급날만 바라보며 가끔 들어오는 촌지에 대해 도덕적 감수성도 전혀 없었던 교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진정한 교사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업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고 불의에 대해서는 정의로우며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되 싸울 때는 열정으로 나아가는.... 그런 교사들이 예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소수였고 게다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음과 같은 프레이리의 주장은 21세기인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신선하다. 교사가 진정한 전문가가 되려면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프레이리는 어린 대학생에게만 아니라 26년차인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사는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이 지식을 전수하는 일은 아니다. 학습자들이 사고하는 주체가 되고, 그들도 교사들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비로소 학습자들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배우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몰랐던 바를 점차 알게 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전에 알았던 바를 새롭게 다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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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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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 전작의 통통 튀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목수정의 매력은 진보의 묵직한 이데올로기를 발랄한 필체로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메모할 것이 가장 많은 책이 되었다. 직접 인터뷰한 내용에 특유의 매력적인 글빨(!)까지, 진정한 좌파정신이 돋보이는 책이다. 왜냐하면 유명인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을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그게 진짜 진보 아닌가? 권력이나 허명이 인터뷰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 이름과 공적을 좇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평범한 고수들을 놓친다.

 

프랑스 낙태 합법화의 역사

아직도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프랑스의 역사가 있다. 그들은 낙태를 합법으로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일을 유명한 여성 명사들이 나서서 했단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자들은 외모만 여성이지 사회적으로는 남성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약자로서의 여성의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는, 남자보다 더 가부장적인 여자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배우와 작가들이 낙태 합법화에 힘을 실었고 그 유명한 시몬 베이유도 최전선에 섰다. 얼마나 절묘한가, 당시의 보건부 장관이었다니! 이 책에는 전설적인 장관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온다. 자크 랑이라는, 미테랑 당시의 전설적 문화부 장관이란다. 예술고에 자연계와 인문고 말고도 응용미술이라는 옵션을 만들었다 한다. 관료는 관료일 뿐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는데 아니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장이든 교감이든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 일을 맡았을 때 맘껏 기량을 뽐낼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일하는 이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나, 관성에 발목 잡히지 않고 창의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든가... 단지 우리에게는 저런 멋진 인재가 없다고 한탄할 일만은 아니겠지. 그래도 어쨌든 부러운 게 사실이다.

 

삶과 운동이 분리되지 않는 진보

또 하나는 좌파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고급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발레리가 있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자신의 뿌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삶과 운동을 분리하여 정신은 진보나 생활은 자본주의적으로 하는 많은 한국의 진보처럼, 예술을 하면서도 상업성을 벗지 않는 것을 삶의 지혜인 양 포장하는 한국의 예술가들처럼 몸 따로 정신 따로, 이념 따로 현실 따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사상과 현실이 다르면 사는 게 힘들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괴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에게 자동차 같은 이기적 문명을 이용하는 일은 자기 신념이나 양심에 배치되는 일이라 마음이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엄존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타협 혹은 배신이고 어디부터가 지혜로운 공존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차피 이 현실을 뒤집어엎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하면 내 영혼과 사상의 순결을 지키면서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마땅하다.

 

문화는 모두의 것

베르나르 아스크노프가 문화는 모두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펼친 모두를 위한 루브르운동도 재미있었다. 운동 자체보다도 그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료를 받지 말라고 펼쳤던 이 운동이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그 결과로 실지로 미술 관련인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싸움이라기보다 운동을 펼치고, 또 그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니.... 늘 지는 싸움만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마이너리티로서 참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무료입장이 되면 관람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목수정은 말한다. 쫓기듯 본전 뽑듯 다니지 않고 산책하듯 다니며 영감을 얻는다고. 한때 학교가 아닌 시내 중심가의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다. 몸은 늘 피곤하고 정신이 피폐하던 때, 나는 취재하러 나간다 하고 (우리는 마감 때가 아니면 미술관이나 전시회나 서점에 가는 일이 허용되어 당당히 중앙박물관에 간다고 말했다) 그때는 경복궁 옆에 있던 국중에 가곤 했다. 평일 낮 시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서 온갖 상념에 빠졌던 시간, 작은 스케치북에 유물을 옮겨 그리며 상상력을 펼치던 시간들. 그때는 다시 교단에 돌아올 일이 아득했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교사로 성장시키는 데 또 하나의 힘이 되었다. 문화를 가난한 자에게도 여는 일은 결국 국가의 재산을 늘리는 일이 될 것이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도 인문과 철학을 가르치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큰 감명을 준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에 들어온 청소년 이민자들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에마뉴엘 선생님 이야기이다. 목수정은 자신의 경험에 빛어 이방의 언어로 말하는 일이 얼마나 자아를 위축시키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교육을 받아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에서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면 그럴 수가 없다. 에마뉴엘은 그래서 수업 시간에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나라 말로 교재인 <오디세이>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들의 그 빛나는 자존감을 포착한 것이다. 프랑스어를 가르칠 때도 <오디세이>를 교재로 삼아 뿌리 뽑히고 떠돌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면서 문학적 향기도 놓치지 않게 했다 한다. 쉽게 생각하면 이방의 언어를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철학이나 사상이나 정서가 담긴 교육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중학교 남자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때마다 그 정서를 전하기 참 난감함을 느끼는 나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들을 전달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국에서 온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에마뉴엘은 감성도 자아성찰도, 자존도 놓치지 않는단다. 나에게는 참 충격적인 각성의 시간이었다.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학교 이야기에 가장 귀가 솔깃해진다. 초등학교 수위 아저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참 재미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이는 69세란다. 65세 정년 후 의무는 사라지고,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란다. 정년을 앞둔 초등학교 수위인 토마가 임대주택을 못 구해 쩔쩔매자 500명 학부모 중 450명이 서명에 동참해 구청장에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학부모들의 집단지성이 오직 자기 아이들의 이기적인 이익에만 국한되는 대한민국과 달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가끔 학교에서 관리실이나 행정실 직원을 대하면 저이들은 우리 아이들이나 교사를 어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처럼 여겨진다.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 혹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수위아저씨 토마는 교사는 아니지만 학교 아이들한테 관심도 많고 교사들과 아이들의 관계도 밝은 눈으로 다 보고 있다.

 

전에는 교사가 결근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교사들이 넉넉히 있었다. 그런데 5~6년 전부터는 그게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학부모가 더 이상 학교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 학교에는 여전히 학교가 자랑하는 진주 같은 고학년 담당 교사들이 있다. 저학년 때 좀 부실하게 공부했던 아이들도 고학년이 되면 모두 완벽하게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 학교를 떠나게 된다. ... 눈과 귀가 선생님에게 완벽하게 집중되어 있고 아이들의 눈은 선생님 앞에서 빛난다. 그걸 보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지적인 열정으로 고양되어 잇는지 알게 된다. 교사들은 그 어떤 아이도 자포자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 얼마나 멋진 학교인가. 프랑스에 관한 다른 책을 읽으면서, 유치원 교사가 전문가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학부모들 역시 전적으로 교사를 신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탄탄한 사회는 이런 것이겠지 싶다.

 

진정 프랑스가 부러운 이유

프랑스는 환상의 나라이다. 아마도 그야말로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라고 부조리가 없을 수 없지. 그럼에도, 프랑스는 이 땅에서 100년 내 이루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혁명과 민주주의 가치를 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이다. 혁명의 와중에서 아름다움을 버리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때도 68혁명 때도, 테러를 당하는 와중에도 품격 있는 아름다움의 문화가 그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채운다. 그건 값비싼 고급스러움과는 다른 것이다. 80년 광주항쟁 때, 열흘 동안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품격 높은 인간의 현장과 비슷한 느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적은 데 비해 프랑스는 언제나, 싸울 때도 정치를 할 때도 일상을 누릴 때도 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게 진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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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의식의 방 -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김서영 지음 / 책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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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이 많다. 꿈 때문에 다음 날 수면부족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꿈을 즐긴다. 마치 또 하나의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기억하건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서서히 색깔이 있는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동물의 시력이 진화하듯 나의 꿈의 선명도는 진화해 왔고 지금은 굉장히 섬세한 풍경과 느낌을 실감하며 꿈을 즐긴다.

꿈을 꾸면 다음 날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하려 이것저것을 찾아보았다. 동양적 꿈 해석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내 꿈이 예지몽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을 후반영하는 경우는 많았다. 그런 의문들이 이 책을 만나고 나서 많이 풀렸다. 이 책을 통해 꿈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서영은 프로이트를 연구한 심리학자이다. 자신의 꿈 일기를 쓰면서 융의 분석심리학에 관심을 갖는다. 전에도 내 꿈의 해석이 궁금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어 보았지만 내 심리상태를 해석해주는 접점을 만나지 못했다. 융을 읽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꿈의 무의식 반영이 그저 학술이론으로만 읽혔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김서영을 만남으로써 나는 융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그래, 아무 것도 예지해주지는 않지만 힘을 주기도 하고 들여다보게도 하고 위로해주기도 하던 내 꿈의 정체는,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일 수도, 그림자의 경고일 수도, 아니무스의 반영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늘 미진하고 찜찜하게 남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의심은 이 책을 통해 명확해졌고 이후에 만난 다른 심리학 책을 통해 그 이해를 깊게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아무리 읽어도 허방다리를 짚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은 연대라든가 사회라든가 통시적 관점이라든가, 그런 부분들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연대와 배려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학문을 연구한 결과 이 세상은 희망이 없으며 어떠한 노력도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과연 학문이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프로이트를 읽으며 느껴졌던 갈등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 책 직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프로이트 이론의 사회성 결여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저자 김서영이 과연 전공을 버리고 분석심리학으로 완전히 발을 옮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융을 통해 공허함을 메우고 위로를 받았다는 지적에는 매우 공감을 한다. 나 역시 김서영을 통해 다시 만난 융으로 내 꿈을 재해석하면서 위로의 세계인 꿈의 세계로 다시 나아간다.

 

융은 대극을 통합하라고 조언하고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김서영은 프로이트와 융 모두를 끌어들여 자기 꿈을 해석하는데 자기 전공이 아닌 분석심리학에 더 끌린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고 (특히 동양인들에게는) 꿈이나 자의식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비해 융은 보다 신화적이고 신비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권 안 되지만 융의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더 많이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김서영의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놀라운 것은 그와 내 꿈이 일치하는 바는 거의 없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여자 아이남자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왜 한국적 해몽에서 불길하다고 하는 여자아이 꿈을 자주 꾸는 건지 늘 궁금했는데 김서영은 그것을 자아라고 해석해준다. 근심이 아니라 자아인 것이다. 남자 역시 불안감이나 걱정거리가 아닌 나의 아니무스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남성적인 것들은 여자로서 내가 남성에 대해 갖는 성적인 욕구나 불안이 아닌 내 안에 숨은 남성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개는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나의 아니무스는 아마도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불안이나 억울감을 대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남자로 태어난다면 나는 락 가수로 살고 싶다. 헤비메탈을 크게 틀고 빨간 록스타를 미친 듯이 몰고 가다 동해안 절벽 아래로 던져져 죽어버리는 상상 속의 나는 나의 그림자이다. 현실의 나는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지만 내 안에는 많은 열정과 욕구가 있다. 분노와 억울감도 많다. 안정적인 사람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 더,

책에서 나는 꿈 속의 치유자존재에 대해 주목했다. 김서영은 꿈속에서 좋은 남자, 좋은 여자들의 존재를 자주 만난다. 힘들 때 치유자 역할을 하는 어떤 존재가 꿈에 그렇게 발현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치유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재작년에 책을 출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책을 쓰기 이전에 소소한 글쓰기 작업을 독려했던 안준철 선생님과 이상대 선생님에서 시작하여 잠깐의 만남에 그칠지도 모를 매체의 기자들까지... 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대개는 여성들인) 활동가들, 어머니들... 그리고 그때부터 내 꿈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꿈 속 세상의 배경도 많이 달라졌고 등장인물도 달라졌다. 늘 너무 넓어서 문이 다 닫혀 있는 건지 불안했던 집,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잠금장치가 확인되지 않았던 미로 같던 집은 넓고 깔끔한 집으로 바뀌었다. 낯선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내게 호의적이다. 그들을 김서영 말대로 조력자들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꿔 생각해 보자.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치유가 조력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후배들이 나를 만나서 교사로서의 자기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면, 보수적이고 무력한 교사가 아닌 창의적이고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그런 역할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어떤가. 선생님은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저를 믿어줄 것이라 생각한다는 제자들. 그들에게 나는 든든한 조력자일 것이다. 그들이 불안과 걱정의 꿈을 꿀 때 나는 그들 꿈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어깨를 잡아주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아 주고 어두운 복도에 불을 밝히며 앞장을 서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참 많지만 긍정적 해석이 제일 마음에 든다. 꿈이야 늘 꿈보다 해몽이지만 상담도 그러하듯이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피드백이 가며,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꿈 때문에 내 삶이 더욱 칙칙해질 것이라면 그런 해석은 듣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김서영이 꿈의 긍정적 분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석심리학적 해석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대학생 때 읽었던 융을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융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힘과 긍정적인 피드백에서 어떤 길잡이 등불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김서영 책은 따뜻했다. 다른 이의 꿈 분석 사례이기는 하지만 가출한 아이를 만나려는 사회복지사 이야기는 교사인 내게 새삼 나의 역할을 일깨워 주었다. 또 마지막에 세월호를 언급하며 아파했던 부분을 읽으며 자기 공부를 사회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가끔 공부는 공부, 이론은 이론이지만 삶과 실천과는 무관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현실에서 아팠던 것을 공부로 찾고, 배운 것은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한 언급이 고마운 것이다.

 

많은 책들은 스며들 듯 내 인생을 가만가만 다독였지만 이 책처럼 인생의 방향을 바꿔주는 책들도 더러 만났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다시 융을 읽는다. 어쩌면 겉핥기로만 공부했던 심리학이 내 인생에 중요한 방향키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중요한 역할을 김서영이 했다. 책 속의 그는 늘 책상에만 앉아 있는 서생(書生)인 듯이 자신을 묘사했지만 만약 내가 그의 책으로 비롯해 심리학을 조금이나마 깊게 공부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킨다면 결국 그는 씨앗을 심은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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