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춤추는 악어
김수우 지음 / 신생(전망)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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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여행을 다녀오면서 쿠바에 대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그 나라에 대해 잘 알게 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럴 리가 있는가? 12일의 여행, 단 열 권의 책으로 한 나라를 다 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난 쿠바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다 들어본 느낌이다, 라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말레콘, 올드 카, 헤밍웨이, 체 게바라.. 그게 쿠바의 전부는 아닐 테니 말이다.

 

<쿠바, 춤추는 악어>는 내가 읽은 쿠바 관련 책 중 가장 두껍다. 책의 두께가 일단 그러하지만(솔직히 읽기에 매우 불편했다. 한편으로는 팔리기 좋고 읽히기 좋게 적절히 분량을 조절하거나 두 권으로 분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하지 않은 출판사의 뚝심이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용도 두껍다(?). 쿠바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은 누구나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그래서 다른 관점의 책들을 만나기 어렵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블로그나 책들에서 반복되는지도 모른다) 김수우만큼 감성적으로 쿠바에 다가간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여행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생활이야기라고 해도 될 만큼 쿠바에 머문 시간도 길고, 남들이 다 체 게바라만 이야기할 때 일관되게 호세 마르티로 쿠바를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점도 남다르다.

 

김수우는 쿠바에게서 공존에 관한 대안을 발견한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현실적 실패 때문에 이제는 이 지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진 공존의 대안을 쿠바는 제시한다. 공산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나 부패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대안, 나라가 가난해도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체 게바라나 혁명의 성공, 혹은 카스트로의 정치적 성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김수우는 호세 마르티를 그 근원적 힘으로 여긴다. 현실의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을 수 있는 오래갈 수 있는 쿠바의 힘이 된 호세 마르티. 그래서 그런 역사적 영웅을 갖는 것은 민족이나 국가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국민적 영웅이 있었던가 돌아본다. 없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된, 혹은 부풀려지는 바람에 훼손된 영웅들이 얼마나 많던가.

 

작가는 공존이란 함께 자유로운 것. 그 자유가 배려가 시작되는 자리라고 말한다. 자유가 배려가 멋지게 만날 수 있음을 우리 사회는 겪어보지 못했다. 배려는 곧 손해라고 배워온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황막한가.

 

 

쿠바의 품격, 호세 마르티

호세 마르티의 문학은 단순한 문학이 아니다. 그의 문학은 사상을 담고 있고 사람들을 고무시켰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근원적 해결책을 탐구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민중의 언어로.

호세 마르티는 게으르지도 않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단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만약 열심히 살고 계시는데도 집이 가난하다면 아빠,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해?”라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 그건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열심히 일하는 아빠가 무능해서 불성실해서 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라. 그리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 그럴 때면 꼭 숙연해지던 아이들이 몇 있었다. 호세 마르티의 저 말은 이상하게 힘이 된다.

 

호세 마르티는 흑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그들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은 실상 가장 힘든 일을 한다. 세상은 대개 그런 그들의 희생 덕에 숨을 이어가기도 한다. 뭔가를 가진 자들이 누구 덕에 자신이 편안히 먹고 숨 쉴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저런 겸허를 얻기 힘들 것이다. 쿠바 거리를 걷다 보면 위축되지도 않고 거칠게 행동하지도 않은 흑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을 가장 경멸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품격을 유지하는지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묵었던 까사의 잘생긴 뮬라토 청년은 쿠바 여자들 참 멋지다(가무잡잡하고 멋진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많이 보았기에).”고 칭찬하는 우리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기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다. 못생긴 사람도 많다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다. 우리 눈에 그들이 멋져 보인 건 아마 얼굴이 검어도, 초라한 옷을 입었어도 위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상대적으로 위화감을 느끼게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웠고 자기가 피부가 희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자랑하는 문화도 없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다음 이야기이다.

 

몹시 붐비는 쿠바버스에 장애인이 탔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길을 비켜 그가 자리를 잡게 도와주었단다. ‘몸도 불편한데 복잡한 버스를 꼭 타야 했나라고 생각한 건 한국 사람들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그가 버스에서 내리려하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틈 없이 엉겨있던 사람들이 또 한 번 통로를 만들어 그를 내려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 장애인을 몇 걸음 안전한 데까지 인도해 주고 다시 버스를 탔다.(이야기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버스는 안 가고 기다렸다는 거다. 배차간격이 버스운전 노동자를 스트레스 만땅으로 만드는 한국에서는 인성의 문제뿐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쿠바인들의 일상화된 배려 문화를 김수우는 목격한 것이다.

 

물론 내가 여행 갔을 때 저런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곳곳에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많이 만났다. 친절은 매너가 아니라 삶의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혁명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계급과 차별이 버젓이 살아있던 식민시대와 친미 독재정권 시대를 거쳐 왔고 그것을 이겨냈기 때문에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곧 혁명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집 앞에 서서 한참 다정하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에게서는 사라져버린 광경 아닌가? 그런데 언제, 왜 사라졌던가? 더듬어 보니, 우리 삶에는 휴대폰이 개입했던 것이다. 쿠바에도 휴대폰이 있지만 흔한 물건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직 수다와 대화가 남아있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요르크 프리드리히는 사람들은 부드럽게 몰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란다. 왜 성장만이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가? 쿠바는 지속가능한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절대 빈곤이나 인간의 품위가 유지되지 않는 가난을 감수하자는 뜻이 아니다. 미국처럼 펑펑 소비하고 뒤처리를 남에게 넘기는 지구 위의 불평등에 눈 감은 채 가난해도 마음만 행복하면 돼.’라고 마음을 다스리자는 말도 아니다. 적정한 부, 적정한 경제 속에서 행복하기가 왜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안으로 쿠바를 눈여겨 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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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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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엘류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었다><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의미 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연금술사를 읽을 생각은 없었다. 한때의 열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 책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계기가 생겼다. 대통령이 이 책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높은 실업률과 학업스트레스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이 책 속의 담론을 인용하여 격려라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힘든 원인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았다는 점과 사회문화적 문제 해결의 노력이 없다는 점도 나쁘지만 작품의 오독도 심각하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은 하면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대통령의 언사를 접한 것은 책을 읽기 전이니 이와 같은 짐작은 내가 아는 코엘류가 그렇게 말했으리가 없으리라는 '짐작'이었을 뿐이라서 진실을 알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다 읽은 소감을 말하자면, 내게 재미난 책은 아니었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읽힐 만한 책이다. 이제는 너무 뻔한 환상적인 구조의 이야기가 재미있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잠언 같은 좋은 말들은 많다. 젊은이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지혜로운 멘토의 입장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나 보다. 어른들보다 더 각박한 현실에 일찍 노출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과연 그런 막연하고 환상적인 말들에 힘을 얻을 것인지는 자신이 없지만 말이다.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 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라고 하면서 친구 사귐보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도록 격려한다. ‘우리들 각자는 젊음의 초입에서 자신의 자아의 신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여.’ 자아의 신화라는 말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아마도 자기 자신을 찾으려 노력하라는 뜻인 것 같다. 이런 대목이 아마도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의 개인화의 문학적 구현이라는 평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이 들어 봐라, 내가 생각한 자존만큼 다른 사람도 자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겸손해지고 자기를 객관화하게 되지.’ 사춘기 시절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단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단계를 잘 딛고 일어나야 한다. 그 시기에 그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나이든 사람들이 오만한 것은 자기방어적인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자아를 중심을 놓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라는 물화된 사람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뿐이다. 학교에서 사춘기 아이들에게 너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에메랄드 채굴꾼 이야기는 우주가 도와준다와 더불어 오독되기 쉬운 에피소드이다. 한 에메랄드 채굴꾼이 전부 999999개의 돌을 깨뜨렸다. 너무나 힘들어서 마침내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돌 하나를 깨려는 순간(자아의 신화를 찾는 중대한 기로) 너무 화가 나서 그 돌을 집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 돌은 날아가 다른 돌과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메랄드를 내보이며 깨어졌다.... 아마도 코엘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숱한 노력들이 모이고 쌓여야만 성과라는 것이 다다름을, 그 전까지의 기다림이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내게 깊은 성찰을 준 이야기도 있다. 주인공인 산티아고가 이집트에 도착해서 한 크리스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다.

성지 순례가 일생의 목표라는 크리스털 가게 주인에게 산티아고가 왜 지금이라도 메카에 가지 않는 거냐고 묻자,

왜냐하면 내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메카이기 때문이지. 이 모든 똑같은 나날들... 초라한 식당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을 견딜 수 잇는 힘이 바로 메카에서 나온다네. 난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그런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 보았어.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그래, 사람들은 결코 이루지 못할지라도 을 갖는 게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그런 꿈은 무엇일까? 메카만큼은 물론 아니겠지만 나에게도 언젠가 이루고 싶은 작은 꿈들이 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해내지 못해도 그 꿈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점에서 나는 그 크리스털 가게 주인에게 공감한다. 하지만 또한 이 이야기는 나에게는 무엇이 그런 꿈이었을까를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읽던 무렵, ‘언젠가는이라고 미루어왔던 쿠바여행을 결행했다. 더 늙기 전에 가자. 그리고 새로운 꿈을 또 만들면 되지 뭐. 쿠바가 나의 메카는 아니니까. 인생 곳곳에 메카를 남겨놓으리라.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과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누군가 꿈을 이루기 앞서, 만물의 정기는 언제나 그 사람이 그 동안의 여정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시험해보고 싶어 하지. 만물의 정기가 그런 시험을 하는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네, 그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 말고도, 만물의 정기를 향해 가면서 배운 가르침 또한 정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세.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마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지.’

 

최선과 더불어 진심을 다하는 영성을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코엘류는 그의 문학작품만을 보면 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떠한 노력과 지혜를 다해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우주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주가 잘못된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자칫 운명론자가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은 멋진 우주를 만들려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기운을 내지 않는 젊은이가 있을 때, 그에게 다가가 우주가 도와줄 거야라고 격려를 해야 그게 진짜 어른이고 지도자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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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천사에게
김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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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는 책의 서두에서 단호하게 잡문은 없다.” 라고 선언하고 이 글들을 시작한다. 어떤 소설가는 평생 신문 등에 잡문을 쓰지 않은 것을 자랑했다고 하지만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자기 어깨를 내미는 문인들은 그런 순결주의를 오히려 경계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꾸려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잡문도 써야 하고 희망버스도 타야 한다. 시를 쓰던 가슴으로 높은 곳에 올라간 노동자들의 손도 잡아야 한다. 그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잡문이라고? 잡문이라 하면 오히려 세상의 아픔에 눈 돌리고 등 돌린 자들이 쓰는 글, 아니 곡학아세하고 폭군에 아부하여 글로 감투를 벌어보려 애쓰는 자들이 쓰는 글이 잡문이겠지. 김선우가 인용하는 조지 오웰의 말은 참 당당하지 않은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이다.

 

무슨 작품을 읽으면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앞으로 김선우가 쓰는 책은 모두 사서 읽겠다고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시가 아름다워서 좋아했을 터이고 아마도 그토록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쓰는 이가 용감한 글들을 망설이지 않고 쓰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그랬을 터이다. <부상당한 천사에게>에 실린 글들은 아마도 신문 등에 올린 글들은 모은 듯, 나로서는 익숙한 견해들이이었다. 그는 여전하고 건재하고, 더 당당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앞으로 나올 그의 시나 소설들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문학의 순수성 운운하며 마치 그 길이 아닌 길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으름장을 놓는 이들에게 김선우는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문학의 진정한 순수성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김선우는 내게 대신 독서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문인들은 아마도 글을 읽다가 필요한 문구를 만나면 따로 메모를 해두는 듯하다(나 역시 그런 메모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잘 찾지 못하고, 남의 말을 인용해 글을 쓰거나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김선우의 글을 읽으면서 독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복습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내 머리 속의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잘 찾아가게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새 책으로 책장을 채우게도 하는 좋은 책 친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단다.“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 부르지만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사회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얼마 전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연민이 동정에 그쳐 버리면 자선을 베푸는 이상인 아니라는 것. 힘들게 사는 이들을 돕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동전을 던져주는 구휼과 자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뛰어난 의지와 이상을 구조화할 지적인 능력이 있는 이라면 무슨 주의자가 되어서라도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목소리가 크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이라면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격동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처럼 어떤 능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도 연대의 이름으로 자기가 힘을 보태 세상을 바꿀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동전을 모아 나누어 먹는 일도 꼭 병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엽말단만 바꾸는 일로 자기 위안을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층간 소음 꽃으로 해결하기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심해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올라가 보니 노부부가 살고 있더란다. 그리고 그 후 소음은 줄어들었고, 김선우는 그것이 꽃의 힘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평범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의 인정’, 그리고 서로에게 다가가기라고.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나는 사립 남자중학교만 30년 가까운 세월 근무해오고 있다. 드세고 단순한 남중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작은 아이도 많고 표현이 부족한 아이도 많다. 거친 언사와 드센 눈빛, 말하자면 싸가지 없고 무례한 아이들도 많이 만난다. 여교사를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성적(性的)으로 모멸하려 드는 어린 아이들도 꽤 있다. 물론 어려운 가정에서 힘들게 자라 자기 안의 좋은 성품과 잠재력을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불쌍한 아이들도 많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만날 때 종종 책을 선물한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는 사진집을 건네기도 하고 지력이 높지만 세상을 거칠게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책들도 건넨다. <어린왕자><연어>, 김용택이나 신현림이 선별한 시집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도 늘 내 책상에 꽂혀 있다.

 

조금 얇게 말하면,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잘해주려 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저렇게 진지하게 만났던 학생 중에서 계속 함부로 행동했던 아이는 없었던 것 같다. , 물론 책 선물은 꼭 말썽꾸러기들에게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감성이 남달랐던 아이들, 고민의 깊이가 성숙했던 많은 제자들과도 함께 했다. 혹여 이 글을 읽는 나의 제자 중에 오해하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변명처럼 덧붙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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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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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고 어떤 진보 인사가 말했던 적 있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내가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호감의 기원은 저것이겠구나, 싶었다. 정작 프랑스에 가 보면 이방인 관광객에게 무뚝뚝한 그들이나 생각보다 너저분한 길거리에서 무슨 짝사랑의 염으로 여길 오고 싶어 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열광했던 프랑스는 와인이나 샹송, 패션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은 어차피 아니지 않았나. 혁명의 역사, 관용의 문화, 늘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습 같은 것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연인들이 처음 만날 때 사르트르가 어쩌니 저쩌니 철학 논쟁을 벌이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이 프랑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비정상 회담>에서 새로운 프랑스 패널 오헬리엉은 자기 나라의 단점으로 사람들이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게 좋은 점이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가진 자들의 불의에 눈감는 대한민국보다는 나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선진국에서 이미 18, 19세기 즈음에 극복하고 확보했던 시민의 권리나 인권에 대한 성문(成文)적 명시를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인위적으로 얻지 않았는가 하는 것 말이다. 식민지와 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겪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나마 근대적 헌법을 받아들여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해서 이리도 취약한가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탄탄한 민주 헌법과 인권의식을 전세계에 제공하는 역할을 한 프랑스의 역사를 부러워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요약하면 <제르미날>19세기 프랑스 광부들의 파업 이야기다. 시커먼 탄광촌의 비참하고 더러운 광경에 싹트는 달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소설은 소설적 재미와 더불어 대서사적인 구성을 갖춘 대작이다. ‘문학이 무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언가를 한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특히 프랑스 민주주의에 에밀 졸라와 <제르미날>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문학이 뭘 할 수 있냐?’ 는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198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프랑스의 19세기처럼, 문학이 곧 투쟁이었던, 아니 삶의 모든 영역이 투쟁 아닐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김지하가 젊은 대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고 조정래가 소설로 한국근현대사 공부의 불을 지폈다. 대학에서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는 데 <태백산맥>보다 좋은 실마리가 없었다. 그 소설에 대한 열광과 근현대사에 대한 궁금증이 <민중과 지식인><해방전후사의 인식> 독서와 맞물려졌다. 그리고 그런 동력은(물론 광주에 뿌리를 대고 있긴 했지만) 87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분명 힘이 세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 역시 그들의 혁명사와 맞물려 있으리라. 민중은 우왕좌왕하는데 지식인이나 문필가들은 간이나 보고 있는 형국이 아니었다는 것. 문학과 예술이 곧 혁명의 전선에 함께 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 지금도 그리하여 어떤 어리석은 정치적 결정에 국민들의 불평불만과 토론 습관은 끊임없이 간여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어리석음을 안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과정과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 된 혁명의 역사를 갖지 못한 우리가 프랑스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다. 다 자기들 손으로 (심지어는 시행착오조차) 일궈냈다는 점, 그래서 쉽게 뒤로 물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존중은 없고 동정만 있는 브루주아의 자선

<제르미날> 속의 브루주아들은 그저 사악하기만 하지 않다. 드뉠랭은 합리적인 사장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은 온유하고 인격적으로까지 보인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옹색하나마 연민과 선의도 갖고 있다. 물론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고, 때로는 극단적인 순간에 동정이라도 좋으니 구휼적 자선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베푼 선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그것은 사실 본질을 파고들어가 보면 가진 자의 오만이고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이 라 마외드 가족에게 베푼 것은 동정에 불과했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옷가지를 주는, 현실인식에서 멀리 떨어진 자선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선량함이 어떻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결국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고혈로 풍요를 누리지만 겉으로는 폭력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중산층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 도축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고 요리된 고기를 먹는 자들이 고상을 떨고 있는 형상이다.

 

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광부 가족들의 미덕은 극단적인 경우에도 자존을 잃지 않는다는 것. 아이들을 끌고 구걸을 하러 가야 했던 라 마외드도 끝내 인간의 품격을 잃지는 않았다. 파업 과정에서 브루주아들이 제시한 타협점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존감 때문이다. 그래서 당당해 보인다.

 

광부들의 지도자격인 에티엔 등 혁명의 선두에 선 사람들의 양면성을 다룬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의도의 시작이 순수했더라도 과정의 변질은 언제나 혁명을 망쳐왔다. 자기들끼리의 불필요한 논쟁, 혁명의 순수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 민중의 함성을 인기의 척도로 생각하고 연연해 하는 모습, 먼먼 중앙의 인정에 목매 언젠가는 노동이 아닌 언변으로 또 하나의 브루주아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 자기 안의 그런 욕망들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지 혁명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인간성을 고찰하는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문제는 언제나 고민하고 성찰하는가 아닌가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서서히 이기적으로 변하거나 심지어 악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에티엔은 나약함과 이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민중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다. 민중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그래도 무너진 갱도의 동생을 구하려 사투를 벌이다 폭사한 쟈사리, 남편과 아이들을 잃고 다시 일터로 나아가는 강인한 라 미외드, 갱도에서 죽음 직전에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카트린과 에티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평범하고 나약하지만 숭고하다. 오히려 삶에 기반한 욕망이기에 인간적이었고 평범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트린은 어리석었고 에티엔은 위선적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처절할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에티엔은 카트린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깨울까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줄 알면서 그가 그녀를 처음으로 가져서 그녀에게 아이를 배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슬픔이 복받쳐올랐다.’

 

 

'지금까지 그 어떤 소설도 아직 모호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열망을 이처럼 심오하고 진실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졸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과 사랑이 부럽다. 1902105일 몽마르트 묘지에서 거행된 졸라의 장례식에서 프랑스 북부 드냉에서 달려온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 제르미날을 연호했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졸라가 1866~1867 전후 프랑스 탄광들의 크고 작은 파업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이 더했던 것이리라. 그는 실제로 675미터 아래 땅속 갱도까지 내려가 보았고 탄광촌을 직접 방문해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여 <앙쟁에 관한 노트>를 작성했으며 이걸 바탕으로 제르미날을 집필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현실의 힘이 되어준 위대한 문학과 문학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토록 문학적으로도 강력하고 현실에서도 투쟁적이었던 문필가가 누가 있었던가 돌아보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문학이 정치나 혁명과 손을 잡고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이 생에는 이미 불가한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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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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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정여울 , 풀꽃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 선생이라는 점이다. 중학교에서 열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을까. 대학에서 문학의 본질을 가르치는 이들과 나를 같은 반열에 놓는 일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정체성을 문학선생에 놓는다. 물론 문학의 사회적 의미’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물었던 질문,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니?’)를 나 자신에게 되돌리는 그런 선생이라는 점에서 스토너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여울이 이 책을 극찬했을 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감은 당연하리라.

 

농업을 전공한 대학생이었으나 어느 교양 문학 수업에서 만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영혼을 한 대 얻어맞은 학생 스토너는 이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 학자 교수의 길을 걷는다. 문학과의 만남을 이토록 순정하게, 본질적으로 표현한 글이 많지 않으리라. 어떻게든 문학의 맨 얼굴을 잠시라도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충격과 감동을 잘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 그 순간이 어떤 한 지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 기분은 안다. 중학교 때 조지훈의 시를 읽을 때도 그러했고 하다못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의 감동도, 시리게 느꼈던 기억(그리고 더불어, 분석적으로 시를 가르쳐야 하는 아픔을 스스로 몸부림쳤던 국어선생님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이해했던가, 나는!)이 있다.

 

그는 평범한 1학년생들에게 문법과 작문 기초만 가르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 같아서 열정적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 일주일 동안 강의 계획을 짜면서....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간단한 작문 연습에서 아름다운 산문의 싹을 보았으며 자신이 느낀 것들로 학생들에게 활기와 의욕을 불어넣게 될 때를 고대했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스토너는 문학선생에 발 들여놓는 순간부터가 참 그답다. 순수하고 본질적이다. 그가 가장 빛나던 것은 물론 가르치는 기쁨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이였다는 데서 나타나지만 말이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깊은 희열을 주는지를 맛보고 이 삶을 지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아마 무대 공연을 하는 이들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책을 써서 독자를 만나는 이들도 다 나름대로 자신의 창작이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알 것이다. 수업은 그런 종류의 창작물이 아니지만 기획과 실연과 교감과 이후의 영향이 일관되게 만나는 일종의 예술이다. 수업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수업 듣는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자신의 수업이 얼마나 많은 전기적 자극을 주고 있는지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부글거림, 이글거림, 돋아남, 들끓음들이 생겨났는지를 느낄 때의 기쁨.... 스토너는 진정 그걸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결코 화려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선생이란 자리가 이토록 매력적이라는 것을 아마도 저자인 존 윌리엄스는 스스로 경험했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다른 장면들 스토너가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면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소설가의 편파적인 시각(스토너 편들기)이 불편했던 점을 조금이라도 언급하고 싶다. 스토너의 선량하고 우유부단한 성품과 달리 아내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스토너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사회적으로 진출하려는 욕구, 예술적 성취의 욕구를 마치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인 양 묘사하고 잇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고 본다. 양육방식의 차이도 그렇다. 부부의 불화는 양육방식의 차이를 낳고 그 갈등 사이에서 아이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아버지가 학자의 길로 딸을 이끌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망쳤다는 식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양육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부모의 불화가 아이를 불안정하게 키운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 암에 걸려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스토너의 모습이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나 자신이 곧 임종을 맞을 것처럼 마음과 몸이 함께 잦아드는 것 같았다. 만약,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몸 상태를 그대로 기록하고 죽는다면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로 정밀하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만날 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상상하지만 만약 병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몸의 쇠잔해짐과 더불어 정신의 힘도 약해지면서 이 삶의 피로함 뒤에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감기몸살이라도 심하게 앓을 때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잠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른 나를 데려가기를 바랄만큼 육체를 곤하게 저 심연으로 가라앉힐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 에너지도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다면, 슬프지만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도 스토너의 죽음이 슬펐던 것은 마치 옆에서 며칠간의 임종 과정을 다 지켜본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접한 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잦아드는 과정을 함께 한 시간들이 주는 그 세세한 아픔의 공유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으나 깊이깊이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런 죽음. 이 소설의 미덕은 잔잔해 보이면서도 정밀한 감성의 묘사와 전달에 있다. 문학을 만나는 감성, 잘 가르치고 싶은 열망과 희열, 죽음을 만나러 가는 과정의 고단함 등을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했는지 동종의 감수성과 정신영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모든 이가 이 즐거움을 공유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만큼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즐거움과 감성으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니까. 모든 이에게 문학이란 게 그토록 절실하고 아름답고 밀접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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