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느낌일까?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65
나카야마 치나츠 지음, 장지현 옮김, 와다 마코토 그림 / 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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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서로 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밥을 먹은적이 있다. 건성으로라도 사람들 말을 거들고, 호응을 해줘야겠지만 그마저 귀찮아서 밍숭맹숭한 분위기에 묻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소재가 떨어질 때 사람들은 다들 다음엔 무슨 말을 할지 머릿 속으로 그리는 것 같다. 김영하의 <포스트잇>에 보면 말풍선이란게 나온다. 만약 생각 풍선이 있다면 각자의 머리 옆으로 온갖 생각들이 적힐 수 있을텐데 그런게 존재할리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니 심심하다,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일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음식이 들어왔다.

 분위기는 전보다 나아졌다. 고기를 굽고, 양파와 버섯과 마늘 굽는 시점이 언제가 좋을지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요새 상추값이 올라서 삼겹살에 상추를 싸먹는다느니(몇달은 잠자고 있던 리뷰였는데 요새 또 고기값이 올랐으니 어영부영 시의성이 맞다), 삼겹살은 우리나라에서만 먹는다더라, 식용풀로 비계랑 살을 붙인다더라, 그런데 아치는 왜 고기를 안 먹냐(안 먹는 이유를 아마 몇 번 설명했던 것 같은데 매번 까먹고 또 묻는다) 등등의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다. 하는 일 없이 손 짧은 누구 앞에 반찬을 놔주거나 마늘 구운걸 기름장에 찍어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숨겨진 면들이 보였다.

 말을 조리있게 하고, 일처리가 깔끔한 누구는 얌체처럼 자기 먹을 것만 제 앞에다 놓고 오물오물 씹는다. 작은 일에도 괜히 놀라 별나게 봤던 누구는 고기 노래 부를 때는 까맣게 잊고 남들 입에 고기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지 부지런히 집게와 가위를 놀린다. 평소 표정이 '난 뭐든 심각하게 받아들여'인 남자 사람은 표정만큼이나 밥도 꽤 심각하게 씹는다. 그것 하난 일관성이 있다. 아침부터 수영으로 시작해 고구마 몇알 다이어트를 몇주째 하고 있는 여자 사람은 어느새 허리띠가 풀려있다. 허리띠를 푼 김에 좀 더 맘을 연건지, 원래 그렇게 맘 씀씀이가 예쁜지 객지 생활하면 힘들거라며 나는 물론이고 사람들을 챙겨줬다.

 아마, 말을 하고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말에 도취되거나, 다음 말을 생각하거나, 끊임없이 머리로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말의 가닥을 잡으려고 애썼다면 나는 정말 이런 것들을 보지 못했을거다.

 나카야마 치나츠의 '어떤 느낌일까'란 책은 잠시 자신의 감각을 닫았을 때 다른 것이 보이는 순간을 얘기한다. 

 히로는 궁금한게 참 많다. 말을 할 수 없을 때, 보지 못할 때, 그리고 다른 감각을 쓸 수 없을 때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히로는 친구들의 느낌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히로는 앞이 안 보이는 마리처럼 눈을 감고 어떤 느낌인지를 떠올린다. 히로는 마리에게 말한다. '보인다는 건 그런건가 봐. 조금밖에 들을 수 없는 건가 봐.' 귀가 안 들리면 어떨까. 엄마가 없다면 어떤 느낌일까. 히로의 친구가 히로를 보면서 그의 느낌을 이해하려는 순간, 히로를 관찰자로만 봤던 나는 바보 같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과하지 않은 단순한 그림체는 현란한 그림들보다 많은걸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의 그림은 다음 장을 재촉하는게 아니라 히로와 같이 어떤 느낌인지를 떠올려 보게 한다. 말 많은 내가 잠시 말을 멈춘 순간처럼, 고요하게 말이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감상적인 시선에는 곧 소거될 연민과 이유없는 죄책감이 있다. 그런 감정으로 그치기에 이 책이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 검은비님 때문에 알게 된 책인데 조선인님과 아영엄마님의 리뷰도 참 따스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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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의 악당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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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좀 의심스러웠다. 김혜수와 한석규란 조합도 그랬고, 이층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의 이야기일거란 부분에서도 과연 재미있을까 싶었다. 몸풀기처럼 느긋하게 진행되던 영화가 김혜수의 신경질적인 성격이 인물들간에 엇갈리는 상황이나 대사들과 마주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석규가 김혜수의 관심을 돌릴 목적으로 ‘아유, 귀여운 비관론자’라며 그녀 볼에 손을 대자, 해주씨인 김혜수가 몸을 흔들며 소리를 꽥 지른 부분에선 최근 오만 신경질을 다 내고 있는 내 모습과 겹쳐 머쓱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층의 악당>은 손재곤 감독의 전작 <달콤, 살벌한 연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연애 못해본 어설픈 박용우와 어쩌다보니 불면증에 걸려 신경질적인 김혜수의 상황이 빗어내는 웃음 코드, 뭔가를 숨기는 사람과 내력을 모르는 사람간의 엇갈림, 낭만적 연애론에 종지부를 찍는 점이 그렇다. 익숙한 상황을 비트는건 감독의 각본 <재밌는 영화>에서부터 익히 쓰여왔던 코드였다.  <이층의 악당>은 그 지점들을 좀 더 파고들며 캐릭터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잔재미로 채운다.

 <쩨쩨한 로맨스>가 발랄한 설정과 충분히 개연성 있을 수 있는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연애에 성공하는 여남관계의 활활 타오르는 낭만-여기서 말하는 낭만은 영원한 사랑,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상대에 대한 독점적 소유욕에 기반한 관계를 지칭하는 말임-을 얘기한다면 <이층집 악당>은 ‘연애해도 별거없잖아, 흥’이라며 콧방귀를 뀐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건방지게 쿨한건 아니다. 그들간엔 연애보다는 상도의가 남아 있고 관객들에게는 감정적인 강요(한국 영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처럼 쓰이는 ‘웃기다 울리기’)보다는 그저 잘 쓴 각본의 열린 결말이 있으니까. 물론 일각에선 큰 뼈대의 줄거리가 없다거나 상황과 대사로 웃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글쎄, 이 정도 재미를 주는 영화를 오랜만에 봐서 나로선 웰 메이드에 대한 미련이 없다. 혹시 손재곤 감독이 오랫동안 비슷한 작품만 만들었다면 변화가 있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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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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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하나 뿐인 어떤 동네, 어떤 관계, 어떤 사람들 이야기

혜정이가 간다.
정식이가 간다.
혜정이가 아픈 엄마 아빠를 대신해
정식이 손을 꼭 잡고 간다.
유월의 지는 햇살 속으로
빛나는 한때를 간다.
오누이가 간다.
아프게 간다.
당당한 걸음으로
아주 먼 길을 간다.

낮은 담에 기대어 꿈을 꾸듯 앉아 있다.

해바라기

새봄에 중학생이 되는 명호는 부두 노동자이던 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보낸 뒤 늘 이렇게 혼자 동생 명숙이를 업고 있다.
명호의 마른 어깨에는 아버지 대신 지켜야 할 엄마와
집안 살림까지 얹혀 있다.
명호는 어깨의 짐을 누군가와 나눠 지고 싶었고,
이제 큰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2000년 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명숙이가 동자승으로 절에 보내지기 때문이다.
명호는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던 짐 하나를 부처님께 내려놓는다.
어깨의 짐은 덜지만 명호는 혼자 남는다.
봄이 오면 명호는 동네 공장 담벼락에 혼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할 것이다.
갈래갈래 찢긴 아버지 주검 앞에서 울음을 참아 냈듯이
엄마 없는 캄캄한 밤을 함께 견뎌 낸 동생에 대한 그리움도 그렇게 참아 내면서 봄볕 아래 서 있을 것이다.

자꾸 잠이 와요
잠이 와요. 자꾸 잠이 와요. 집을 생각하면, 학교를 생각하면 자꾸 잠이 와요.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이 너무 무겁고, 어깨가 굳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잠 속에서 나는 아기가 돼요. 엄마 뱃속에서 웅크린 아기의 몸이 되어,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감싸져 보살핌을 받아요.
비 개인 하늘, 햇빛이 이렇게 좋아도 나는 자꾸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요. 너무 아프고, 너무 잠이 와요.

골목을 지나다 만만치 않은 놈을 하나 맞닥뜨렸다.
‘씁~ 알 만하나 사람이 남의 구역에서 뭐하는 짓이야’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꼬나본다.
그 당당한 기세에 눌려 골목을 되돌아 나가다 괘씸한 생각이 든다.
사실 그 골목에 있는 개집이 녀석의 집은 아니다. 본 주인도 얌전히 자기 집 안에 있구만
저도 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친구 집에 놀러 온 주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장 박았다.
그놈도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다.

용기

뒷집 대인호 할아버지 할머니는 60년 넘게 바다에서 일을 하셨다. 이제 폐선을 하고 집에만 계시려니 오죽 답답했을까. 할아버지가 식사도 잘 안 하신다며 할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개를 한 마리 데려다 키우기도 하고, 비둘기들 모이도 주면서 적적함을 달래려 하셨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 할머니의 빨랫줄에는 할아버지 생일상에 올릴 민어가 널렸다. 할머니는 “돈을 주고 생선을 다 샀다.”며 그게 참 웃기시단다.
빨랫줄에 민어가 걷히고 며칠 뒤 외출복 차림의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어, 경로당.” 헐~ 대인호 할아버지가 경로당을. 나는 그게 참 웃겼다. 재빨리 골목을 돌아 할아버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의 용기를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꼬마 눈사람을 만들 만큼만 희끗희끗 깜빡이며 첫눈발이 날렸다.
아이들이 만든 꼬마 눈사람.
어디서 주워 왔는지 싱크대 거름망을 멋스럽게 비껴 쓰고 담벼락 한구석에서 사그라지는 동네 집들을 배경으로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제 몸을 녹이며 슬프게 서 있다.
우리 동네가 그러하리라.
겨울이 되면 이곳은 한동안 홍역을 앓는다. 방송국 헬기가 동네 하늘을 돌며 구경거리를 찍어 대고 무슨무슨 기업의 직원들은 ‘사회봉사’라며 기업 로고가 선명한 울긋불긋한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동네를 누빈다. 동네 골목을 막고 한 줄로 서서 연탄을 나르고, 한 집을 골라 전시용 페이트칠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삶을 박제화해 박물관을 만들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해 대기도 한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을, 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웃음 띤 얼굴로 햇볕 아래 자연스레 사라지는 첫눈은 슬플지라도 의연하다.

오리야

나는 어떤 동네를 떠나던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어.
난 그때 너무 아프고 무섭고 힘들었거든.
낯선 이곳에서 외롭지 않냐구?
응, 조금.
하지만 괜찮아, 네가 있잖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어떤 동네 공부방 사람들이
내 옆에서 계속 날 지켜 줄 거야.

이제 내려 달라구
그래, 알았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안고...


치니님 소개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찍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건줄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골목에서 살고, 그 골목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떠나버린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골목에 남은 사람의 이야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엔 르포르타주류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보다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으로 웅얼거리는 것도 아니다. 잘 아는 사람을 그려낼 때 부딪히는 적당한 거리에 대한 고민을 저자는 간결한 문장으로 메우고 있다.
이 책 속엔 누군가 대안이 없다고 가차없이 잘라냈을 파릇파릇한 삶이 살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찌질하다고 하지만 우린 괜찮아요'가 아니라 사실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죽겠는 것도 아니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세찬 바람에 옷가지가 다 날라가버려 몸보다 맘이 더 시렵지만 바람이 그친 후 지붕을 수리하러 올라가야하는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 말이다.

동생을 업어주는 명호를 보며 금세 녹아내릴 눈사람을 바라보며 얼마나 맘이 시큰했던지. 어떤 동네를 보고 나서 이제 더 이상 나 좋다고 골목을 찍어대는 일을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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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자승으로 절에 보내지는 아이라니, 나는 왜 가슴이 아플까요.

사진으로는 저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소녀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정말 뭔가를 꿈꾸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일어날 어떤 행복을.

Arch 2011-01-26 14: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난 모든 사진이 다 좋았어요. 그중에서 좀 더 좋은걸 리뷰로 올렸지만, 모든 사진이 하나도 빠짐없이 괜찮았어요. 다락방은 그 사진이 좋구나,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자꾸 잠이 와요'란 사진도 좋아할 것 같았는데.


다락방 2011-01-26 16:44   좋아요 0 | URL
자꾸 잠이 와요는 좀 부자연스러워 보여요. 그래서 별로. ㅎㅎ

Arch 2011-01-27 14:53   좋아요 0 | URL
음... 다락방님 느낌이나 감상이 좀 더 세밀해져요. 난 그건 못봤네. 봤어도 좋다고 했겠지만.
그건 일테면, '페이퍼 쓰려면 다락방만큼은 써라'에서 생기는 자질인가요?

차좋아 2011-01-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는데 아치님의 리뷰를 보고는 (읽던중에)다시 처음부터 읽었어요.글을 읽고 그림을 보고 아치님이 올린 사진 나오면 한번 더 보고... 혼자 볼 때는 고개 삐뚜름한 멍멍이가 이쁜지 몰랐는데 지금은 너무 이뻐요. 같이 같은 때에 같은 책 읽고 있어서 좀 즐거워요^^

Arch 2011-01-27 14:55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도 읽고 있어요? 와~ 제가 신간을 바로 못읽어서 누군가랑 책 읽기가 잘 안 맞던데, 이번엔 도서관에서 일찍 사주더라구요. 반가워요! 저는 동네 개들이 참 좋아요. 저 녀석도 예뻤구요. 음...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어서 저도 좋은데요~

비로그인 2011-01-2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작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렌즈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rch님!
마음이 보고, 기록한 장면들. 옆에 놓여 있는 책에는 그런 장면들이 가득하더라고요.

건강한 삶과 희망이 담겨, 닮을 것 같아 더욱 마음에 담아 두고 싶더라고요 ^^

Arch 2011-01-30 20:18   좋아요 0 | URL
골목이 말을 걸다를 읽고 있는데, 두 책 다 골목을 얘기하고 있지만 서 있는 지점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살짝 감상적이기도 했지만, 그게 이 책의 미덕을 헤치진 않았어요. .

바람결님도 좋았다니 기분 좋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은 서재인들이 읽고 있거나 읽으신 것 같아요
 
사랑, 그 혼란스러운 - 사랑을 믿는 이들을 위한 위험한 철학책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규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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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선사시대에 대한 무지 덕택에 진화생물학의 창의적인 판타지는 여전히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현대 인류를 과거의 한 지점에 고착된 '더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어려움에 부딪힌다.
1. 완전히 생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논리적 법칙은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능력에 속한다.
2. 석기 시대 인간이 처했던 환경 조건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없다.
3. 생물학적 행동과 문화적 행동을, 그것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오래 전의 시공간 안에서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 
4. 우리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특징과 행동방식이 실제로는 석기시대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써 생겨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남녀 심리 연애서의 문제점
-- 손쉽게 확고한 토대를 얻고자 하는 바람에 따라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고 조작하거나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뒷받침해준다. 게다가 성의 화학작용을 설명하는 수많은 커플관계 지침서의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해석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수시로 월권행위를 한다는 데 있다.
 남녀 간에 호르몬 농도와 시상하부내 수용기가 실제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차이는 사고방식의 원칙적인 차이를 증명하지 못하며, 누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믿을 만한 진술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성격은 마치 온도계에서 온도를 읽어내듯 호르몬 수치를 통해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 생물학주의: 자연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방식, 자연이란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자연은 인간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생각해낸 이미지가 다다. 이런 주장은 주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생물학이 내놓은 모든 설명의 배후에서 개인적 해석과 문화적 패턴을 찾아내려는 운동은 어느 순간 불합리성의 영역으로 빠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다. (버틀러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한계)
---> 인간이 본성적으로 성역할에 고정되어 있는지 여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주어진 것은 생물학적인 성이다. 정체성은 '행위' 즉 습관, 감정, 자기 이해 등을 통해 생겨난다. 나의 성이 미리 결정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체화'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이다. 사회적 성이 단지 아주 느슨하게만 생물학적 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성역할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충분히 문제될 수 있다고 본다) 성역할은 여러 먼에서 상대적인데, 그것은 언제자 '타인'의 시선 아래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 생물학에서 항상 어떤 효용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보다 신학의 유산이다. 신학은 자연에서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인식하기를 원한다.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이해된 경제 이론들도 사람들이 걸핏하면 효용성을 부르짖는 데 한몫 했다. 

- 사랑의 생물학적인 유산은 아직 밝혀진바가 없다. 사랑은 유전적이고 신성한 번식의 사명에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은 사랑을 자극하는 중요한 재료다. 그러나 두개의 호르몬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상태를 형성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사랑은 호르몬 칵테일이 아니며, '사랑 호르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본능은 도움과 교정이 필요하다. 내 본능과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사랑에서 아주 멋지고 안심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본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사랑은 욕구이며 다양한 심상의 집합이다. 사랑은 필요를 통해 태어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각인되는 능력이다. 

- 우리 관심은 천편일률적으로 유전적이거나 이기적인 방식을 띠지 않는다. 우리는 파트너나 섹스 파트너와 사회적 게임을 즐기면서 상대의 시선에 자신을 투영한다. 우리 행위는 마치 당구공이 쿠션에 부딪혀 튕겨나오듯이 상대의 시선에 따라 반사된다. 우리의 삶, 성적 관심, 애착과 혐오, 자아상, 자존감 등은 이런 방식으로 '당구대'위를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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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 Paj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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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건 정말 내 것일까? 파주를 본 후 리뷰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무척 좋았던 느낌과 감상을 논리적이고 세심한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다른 분들의 영화평을 듣게 되었는데, 내가 좋다고 한건 감독의 전작과 나의 기대치-늦은 시간에 영화를 보러 1시간을 달려 갔고,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을 봤다는-를 만족시키려는게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고야 말았다.


 영화 초반은 산만했으며 어설프게 내뱉어지는 대사는 영상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적 미감을 해쳤다. 사건의 개연성이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선명함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머리 스타일 하나만으로 몇 년 세월은 거뜬히 넘길 수 있는 서우란 배우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목소리가 다였던 이선균을 음성은 이 배우가 갖고 있는 많은 장점 중하나로 느낄 수 있게 한 점은 좋았다. 배우 뿐만은 아니었다. 안개처럼 낱낱히 흩어져 분간할 수 없는 사건들과 감정은 막판에 맥없이 풀어졌고 엔딩은 갑작스러웠지만, 그 순간 난 정말 무언가 쓰고 싶을 정도로 달뜨고 말았다. 안개가 걷힌 후, 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풍경처럼 영화가 끝나자마자 비로소 영화는 자신의 정체가 어떤건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란 맘이 아니라, 이렇게 선명한 어조로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분명함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자질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나의 파주 감상기는 이렇게 편파적이다.


 영화는 세개의 축을 갖고 있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형부와 처제의 사랑, 죄의식. 세 축은 제자리를 벗어나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딜레마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되어가는 것을 묵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성욕이란건 꼴린다가 아니라 미치도록 절망스럽단 지시어는 아닐까란 생각 등등. 의도와 억측과 팽팽한 사건들이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쭉 진행되는걸 보면서, 통념에 호소하는 몇 가지 익숙한 코드를 보면서, 박찬옥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을 떠올려봤다. 끔찍하게 좋았던 감독의 전작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안개의 이미지 역시 설익은 은유로만 보이지 않았을까.


감독의 전작인 질투는 나의 힘에 비해서 파주는 이야기를 가공하고 표현하는 힘이 딸린다. 감독은 연대기적인 극의 연출보다는 인물간의 심리적이고 기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재능이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오는 작위적인 설정이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잘 만든 영화를 보고 싶은게 아니라, 박찬옥이 오랜만에 만든 작품을 보고 싶었던 나로선 별반 상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재능은 모든 부분에 골고루 나눠지는건 아니란 생각에 감사하단 감상까지 들고 말았다.


대체적인 평도 내가 생각하는 지점이랑 맞닿아 있다. 이 영화가 싫으면 조목조목 싫은 부분과 이유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가 초래하는 해악까지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좋은 경우에는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불투명하지만 참 몽롱해요란 감상이 다일 정도이다. 내가 쓴 영화 감상기는 영화로 밥벌이하는 사람의 리뷰라고 하기에는 수준 및 함량 미달, 직무유기이겠지만 다행히도 난 그저 관객인지라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맘껏 부풀려 환호할 수 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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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11-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당췌 이걸 보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Arch 2009-11-03 13:12   좋아요 0 | URL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미잘^^
'승질은' 했다가, 소심해서 댓글 고치는 아치~

머큐리 2009-11-0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었는데...평들이 조금 그래서..ㅎㅎ
근데 아치님글 보니까 봐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어오는데요...ㅋㅋ

Arch 2009-11-04 09:05   좋아요 0 | URL
그럼 제가 확 당길만한 얘기를 할까요? 서우가 무척, 무척 예쁘답니다. 전 이 배우가 너무 좋아요. 박찬옥 인터뷰에서 보니까, 이 친구가 공부하는 씬을 찍는데 노트에 '그 여자가 밉다.'뭐 이렇게 써놨대요. 그 여자란 바로 감독을 말하는건데,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조차 암호로 쓰는 나랑 비교된달까. 딱 그 점이 좋았어요.

프레이야 2009-11-04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저도 그런대로 좋았어요.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그렇게 모호하고 뒤죽박죽, 계통 없는 것인지도 모르죠.
이선균은 그동안 별로 관심 없는 배우였는데, 목소리 좋더군요.
아무튼 남자엉덩이 패티시즘이 있는 것 같은 박찬옥,
전작에선 제가 좋아하는 박해일의 엉덩이를 톡 까놓더니만 여기선 또..ㅎ

Arch 2009-11-06 17:1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전 거기까지 못봤어요. 섹스신이 그렇다보니 그게 또 엉덩이가 나오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사랑이란 감정... 전 여러가지가 보였지만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고, 어느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안개처럼. 아마도 감독의 차기작을 본다면 좀 더 분명한 호불호가 결정될 것 같아요.

무해한모리군 2009-11-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분 리뷰에도 언급되었지만 이선균이 갈등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을 선택한다는 점은 좋았고, 무척 매력적인 여배우를 가져다두고도 그녀가 상당히 보조적이고 간접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불만이었어요.

Arch 2009-11-07 13:56   좋아요 0 | URL
긁어주는 리뷰일 뿐이었어요.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