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이승렬 지음 / 그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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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국부 논쟁은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공화국은 본래 고아여야 할 터이지만, 다들 상상의 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가치를 투사하려 든다. 인사청문회에서 대한민국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닌 김구 주석이 되었어야 했다고 이야기한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대표적이다. 비단 김구뿐 아니라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등 해방정국의 여러 지도자 중 누가 나라를 이끌었어야 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프로듀스 국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승렬의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이하 형성)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살짝 비켜서있다. 지은이는 한국 의회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인촌 김성수를 내세우지만, 결코 그를 국부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아도 이승렬은 영웅의 결단과 지도력으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역사관에 부정적이다. 그런 만큼 김성수는 좌든 우든 비범한 개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거스르는 안티테제에 가깝다. 국부에 맞서는 국부, 국부 아닌 국부인 셈이다.

 

형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승렬의 전작 제국과 상인(이하 상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상인에서 이승렬은 조선왕조부터 시작해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장기지속이 어떻게 한국 부르주아지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형성했는가를 촘촘하게 재구성한다. 책에 따르면, 한국 부르주아지를 특징짓는 성격은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대한 강한 의존이다. 조선시대 주요 상업도시는 연안의 항구가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내륙의 사행로를 따라 형성되었다. 개성의 송상과 한성의 경강상인 등 유력한 상인집단은 서구와 달리 (물론 이런 고전적인설명도 문제가 있지만)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부는 조세운반이나 사행비 마련처럼 어디까지나 관의 업무를 대행하는 에이전트/거간꾼으로 불린 것이었다.

 

한국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의존성은 대한제국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99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이다. 한성과 개성, 인천 상인들의 자본금과 정부 국고금으로 설립한 일종의 반관반민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경기도 인근에서만 쓰이던 백동화의 유통범위 확대에 노력하는 등, 철저히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주 고객이 황실이었던 만큼 대한천일은행의 흥망은 대한제국의 흥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며 은행 역시 1년 간 휴업하게 된다. 이후 일본 자본의 지원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11년엔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은행의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조선인 경영진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맡는 등 실권 없는 명예직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타성에 젖은 1세대 부르주아지를 대체할 2세대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것이다. 형성은 김성수로 대표되는 이들 2세대 부르주아지에 주목한다. 개항 이후 미곡무역을 통해 성장한 2세대 부르주아지는 개성 같은 사행로 도시가 아닌 서남해안의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삼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는 점에서 1세대 부르주아지와 달랐다.

 

무엇보다 이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이승렬은 미야지마 히로시의 전북형(全北型) 지주경기형(京畿型) 지주라는 틀을 빌려와 김성수를 이전 세대의 부르주아지와 차별화한다. 경기형 지주가 조선왕조 관료제의 일원으로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대추구에 만족했다면, 전북형 지주는 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인 계약서를 작성하고 선진농법을 도입하는 등 진취적인 경영자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성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관직을 사긴 했으나 이승렬은 착취를 위해 관직을 사는 것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관직을 사는 것은 다르고, 김성수 집안은 후자였다고 이야기한다.

 

김성수는 비단 진취적 지주, 경영형 지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경성방직을 대기업으로 키워냄으로써 농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도약에 성공했고, 동아일보를 운영하는 등 경제계를 넘어 사회, 문화계로의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드디어 한국에도 서구적 의미의 부르주아지, 3신분이 탄생한 것이다. 김성수가 1915년 양반사족의 공간인 경성 계동(북촌)에 근대적 교육기관인 중앙학교를 신설하고, 1917년 기호지방의 관료적 지주인 윤치소로부터 경성직뉴를 인수한 것은 부르주아지의 세대교체를 웅변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김성수와 같은 2세대 부르주아지의 이주로 경성은 중세적인 관료의 도시에서 근대적인 시민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1910년대를 거치며 싹을 틔운 시민의 씨앗은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쑥쑥 뻗어나가 꽃을 피우고, 전 조선에 홀씨를 흩뿌린다. 이승렬은 3.1운동을 계기로 김성수를 위시한 2세대 부르주아지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천도교 세력이 뭉쳐 시민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이야기한다. 관료에서 시민의 도시가 된 경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근대적인 철도망, 기독교와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민중 역시 고종의 장례식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온건하면서도 평화롭게 구체제와 이별했고, 비로소 백성에서 시민으로 거듭났다.

 

이후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하며 식민지 공론장의 형성에 이바지했고, 자치론을 주도하거나 합법적 민족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시종일관 온건개혁의 길을 걸었다. 해방이 이뤄진 뒤에도 김성수는 지주라는 출신계급을 배반하면서까지 농지개혁을 지지했고, 의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맞서 저항세력의 통합을 촉구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김성수로 대표되는 상층 지주, 부르주아지의 온건주의와 점진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이 동아시아 4(북조선까지 포함) 중 유일하게 의회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형성의 문제점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편집이란 걸 아예 거치지 않은 듯 보이는 난삽한 구성은 가독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포메란츠의 대분기처럼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내용을 뺀다면 분량을 절반 이상으로 확 줄여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상인같은 쫀쫀한 역사서라기보다는 벙벙한 역사사회학서인 만큼, 김두얼이 송호근의 탄생3부작에 했던 비판은 이 책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이승렬이 3.1운동 이후 형성되었다 주장하는 시민적 네트워크는 송호근이 같은 사건으로부터 추출해낸 환상형 공화 네트워크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비교의 문제다. 동아시아 4국을 아우른다곤 하지만 형성이 주된 비교대상으로 삼는 나라는 일본과 영국이다. 영국의 경우 의회주의의 성립에 상층 지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념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형성은 사실상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한 셈이다. 조슈번의 지원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자비로(=관에 의존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성수, 송진우와 대조하는 등, 형성은 일본에 관 주도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한국에 민간 주도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데 적잖은 공을 들인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조작업이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지은이의 틀에 부합하는 사례만을 추려내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형성의 방대하고 난삽한 구성 역시 두 나라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이승렬은 전전 일본의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농민의 지지를 받는 군부에 의해 압살되었는가를 다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서술하면서, 전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군국주의의 후예들이 일본 정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설명으로 갈음한다. 한국의 경우엔 상층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1920~30년대 자치운동과 1950년대 반 이승만 운동만을 부각하고, 1940년대 일제에 협력한 역사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군사독재 시절의 정경유착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이승렬은 자신의 가설을 지지하는 사례에 대해선 너무 많이 말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례에 대해선 침묵한다. 비단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다소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술된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는 자치론을 내세운 상층 지주의 선구안을 부각한다. 반면 어쩌면 이들이 토지개혁에 내몰렸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해방 이후의 혁명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독서를 주저하기엔 형성은 너무나 아까운 책이다.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던, 아주 흥미롭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성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이 길게 보면 축복일 수 있다는, 굉장히 위험한주장을 한다. 전작 상인에서 상세히 조명했듯 정치권력이 상업자본을 리드하는 방식의 근대화가 성공했더라면 부르주아지의 독립은 요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인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탓에오늘날까지 미쓰이 그룹을 비롯한 재벌이 정치권력에 종속된 일본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면 한국은 광무개혁이 실패한 덕에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김성수와 같은 부르주아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이승렬의 설명이다. 이들의 존재가 한국 의회정치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이승렬의 주장에 대한 반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부르주아지가 과연 얼마만큼 국가로부터 독립적이었는지, 오늘날 일본이 과연 정치권력 우위의 나라인지 등, 반박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20세기 한국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그간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 우위는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역사적 특질로 이해되어 왔다. 조선총독부와 그 뒤를 이은 한국의 군사정부는 전형적인 강한 국가, 사회의 전 영역을 계획하고, 간섭하고, 동원하고, 단속해왔다는 설명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요새 나는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가 과연 그렇게까지 전능한 존재였을지, 솔직히 조금 의심스럽다.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 모두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사회를 강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가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사회 역시 강하게거듭나지 않을까? 요컨대, “강한 국가강한 사회를 요청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상적인근대사회는 늘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식민지 사회식민지 공론장이 일종의 결여로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국가가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사회는 통념과 달리 훨씬 많은 일을 자율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 시대의 천도교나 군사독재 시절의 기독교가 그랬듯이 말이다. 국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승렬의 도발적인 주장은 20세기 한국의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를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포스트모던한 해석까지 갈 것도 없이, 이승렬의 주장은 보수주의의 맥락에서도 충분히 전용할 수 있다.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성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개조해버리려는 계몽주의의 마수에 맞서 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지 않았던가. 박정희 이래 한국의 보수주의가 강한 국가를 내세워 무언가를 하게 하는힘이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내버려두는힘으로 전환해도 좋을 듯하다. 특히 박원순 시정 10년을 거치며 지방정부와 너무 밀착한 나머지 활력을 잃어버린 서울시의 시민단체들을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오세훈이 잘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거리를 강조하고 그 상징으로 김성수를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형성의 주목할 만한 특징 또 하나는 귀족정에 대한 옹호다. /대통령과 사대부/귀족/의회, 백성/민중/농민이라는 세 세력의 협력과 길항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건 한국사회의 오랜 습성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혁군주정조에, 보수 정당이 장악한 국회가 노론에 비유되곤 했다는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세조를 전두환에 빗대거나 조선의 붕당을 근대적 정당에 견주기도 하지만, 어느 쪽을 옹호하든 왕과 사대부의 대립이란 도식은 아직까지 꽤나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난 예전엔 이런 비유가 비역사적이라고 여겼지만, 최근엔 생각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공론정치는 역시 훌륭해!”보다는 근대 의회정치가 그렇게까지 대단해?” 정도의 마음이랄까?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에 따르면, 근대 이전까지 서구에서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은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이나 귀족정과 친화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역사적으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선거제는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후보의 구조적, 선천적 탁월성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마넹은 중국의 과거제는 똑같이 공직을 불평등하게 분배할지언정 최소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은 존재했다는 점에서 선거제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능력주의와 공정담론에 가해지는 날카로운 비판이나 경화거족의 신분세습 수단으로 전락했던 조선후기 과거제의 변질에서 알 수 있듯, 과거제는 선거제만큼이나 귀족주의적이다. 즉 선거제와 과거제는 기능적으로그리 다르지 않으며, 사대부와 국회의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귀족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아시아의 몇 안 되는 공화국이자 완전한 민주주의국가요, 아직도 평등주의적 정서가 강한 한국인들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마뜩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의 귀족이란 비교적 넓은 의미로, 사람들이 흔히 귀족하면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는 엘리트에 가깝다. (써놓고 나니 조 모 전 법무장관이 떠오르지만 어쨌든...) 그리고 능력과 덕성, 품위를 갖춘 귀족의 존재는 순수한(=대표라는 불순한 매개를 거치지 않는)’ 민주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 꽤나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승렬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다. 2세대 부르주아지, 상층 지주, 시민 등 때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는 일관되게 김성수를 (넓은 의미의) 귀족으로 정의한다. 다만 이승렬은 조선왕조에서는 독립적인 귀족이 존재하기 어려웠다”(p.629.)고 이야기하며 김성수를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특수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조선시대 양반이 귀족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노비가 노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은이가 조선말~대한제국기 정치세력을 농업관료제로 퉁치지 말고 좀 더 섬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형성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귀족의 존재를 부각한다. 심지어 이승렬은 왕과 농민을 거대한 보수적 반동적 흐름의 두 축”(p.627.)이라고까지 표현하며 귀족의 역사적 의의를 옹호한다. 이는 단순히 김성수와 의회정치에 대한 옹호뿐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의미 역시 담고 있다.

 

가령 이승렬은 한국 역사학계의 거인 강만길이 국민주권에 대해 이중 잣대를 취한다고 지적한다. 똑같이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음에도 대한제국기는 주권이 황제에게 있었다는 이유로 근대로 규정하지 않는 반면, 조선 정조 대는 왕권과 민중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다며 한국의 중세에서 가장 근대 지향적이었던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강만길의 학문적 불철저함에 대한 비판을 넘어, 민족주의 사학 혹은 민중사학이 마주한 보다 근본적인 곤경을 겨냥한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의 일반의지를 실현할 주체로서 왕이나 대통령 같은 최고지도자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에 대한 이승렬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다만 그가 뉴라이트 진영이 국부로 내세우는 이승만을 일관되게 독재자로 규정하고, 김성수를 그에 맞선 의회주의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나는 사실 이영훈도 일종의 우파 민중사학자라 생각하고, 이승만에 대한 그의 숭배에 가까운 태도 역시 귀족을 배제한 왕과 백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입장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여긴다. 이승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귀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가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가 공유해온 국부 숭배의 대안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상 형성의 핵심 주장인 만큼 배링턴 무어에만 의존하지 말고 좀 더 탄탄하게 이론적 근거를 갖췄다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머리말에서 이승렬은 이 책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음에도 분열과 대립은 오히려 더욱 심해진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형성은 명백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고, 이승렬은 우리에게 김성수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은 자율적 부르주아지이자 왕/대통령과 백성/민중 사이에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옹호한 귀족/의회주의자로 새롭게 그려진다. 김성수가 한국 보수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진보성향의 한겨레형성에 주목한 둘 뿐인 신문사라는 사실은 퍽 고무적이다. 보수 진영의 말 걸기에 진보 진영이 응답한 것이다. 이 문제적인 책을 계기삼아 진보와 보수가 합리적 소통의 공간을 넓혀가기를 바라는 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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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평전 - 근대이행기 조선 정치사의 이면 고종시대 인물연구 총서
김종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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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은 조선정치사의 파천황적 존재다. 왕이 아니면서 왕의 아비가 된 자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정작 어떠한 공식 직함도 갖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막대한 권력으로 벌인 일들이다. 경복궁 중건, 호포제, 사창제, 서원 철폐 등 그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수백 년 된 적폐들을 과감하게 해치웠다. 대원군의 안티만큼이나 팬 또한 많은 이유 역시 역사상 이런 사이다를 보여준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특히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면서 정작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혹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은 더더욱.

 

  흥미로운 건 대원군에 대한 이런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그의 정치사상을 조명하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존 질서를 죄다 무시하고 깨부수는 파괴의 화신이란 이미지가 너무 강한 탓이다. 진짜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자라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대원군이 했다고 믿는다는 건 퍽 의미심장하다. 유교문명의 창시자인 공자조차 가만두지 않겠다는 사람이거늘, 사상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심리렸다.

 

  하지만 공자를 거스른다고 해서 사상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공자를 거스르기 위해서라도, 사상은 필요하다. 특히 그곳이 유교 탈레반의 나라인 조선이라면 더더욱. 김종학의 흥선대원군 평전(이하 평전)을 펼쳐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권력의 원천부터 실제로 행한 일들까지 무엇 하나 정상적인게 없었던 대원군은, 어떻게 자신의 비상함을 정당화했는가? 그는 어떠한 언어를 사용해 지지자를 모으고, 적을 규정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했는가? 요컨대, 대원군의 정치사상은 무엇인가? 이게 나의 질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평전은 대원군의 정치사상이나 그의 권력에 당위를 부여한 정치사상적 토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은이는 시종일관 대원군을 정치적 이념과 정치철학이 부재한 권력욕의 화신”(p.249.)으로 묘사한다. 기존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이다. 실제로도 지은이는 황현의 오하기문이나 매천야록, 박은식의 한국통사등 지금까지 숱하게 쓰였던 자료들에 의존한다. 그런 만큼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대원군에게 정말 정치사상 따윈 없었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정치사상은 없어도, 정치사상으로서의 대원군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당대의 맥락, 구체적으로 정조부터 시작해 세도정치를 거치며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권력이 과도하게 쏠린 상황에서 마침내 대원군이 기회를 잡은 과정을 정치사상사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에겐 비약이라며 욕먹겠지만, 다른 어떤 학문보다 비평의 성격이 강한 사상사 연구자라면 그런 과감함은 오히려 미덕일 수 있다. 당장 우리시대 최고의 평론가인 김영민의 전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실제로 얼마 전 출간한 태종처럼 승부하라에서 정치사상사 연구자 박홍규는 한비자나 마키아벨리 등을 사상적 도구로 삼아 태종을 새롭게 그려낸다. 하물며 역사학자인 후지이 다케시조차 푸코를 끌어와 이승만과 박정희의 통치방식을 나병모델(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페스트모델(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로 구분했다. (여담이지만, 후지이 다케시는 단편적인 사실들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속된 말로 야마 잡는능력이 정말 탁월했던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정작 그가 일본에서 석사논문을 마치기도 전에 한국으로 건너와 수업을 청강할 정도로 좋아했다던 지도교수 서중석이 실증의 역사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퍽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아직도 후지이의 칼럼 모음집 무명의 말들을 가끔 펼쳐보곤 하는데, 그의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김종학 역시 대원군을 정치사상사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작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이하 개화당) 말미에서 그는 대원군을 일종의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했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모두 무너진, 마치 자연상태와도 같았던 조선 말기에 오직 대원군만이 새로운 질서와 권위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평전에서 자세히 설명하듯 (사실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다) 실각 이후에도 개화당, 친청파, 일본, , 동학군에 이르기까지 이념도 지향도 제각각인 세력들이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빌리려 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틀을 만들어놓고도, 김종학은 정작 평전에선 대원군을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리바이어던의 자리를 가져간 사람은 청일전쟁 이후 주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다. 지은이는 수틀리면 아무나 픽픽 죽여버리는 대원군, 수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명성왕후, 독재자가 될 강인한 기질도 없으면서 독재자가 되고 싶어하는 박영효가 대립하는 혼란상을 종식시킬 사람은 오직 이노우에뿐이라는 윤치호의 한탄을 두 번이나 인용한다. 이렇게 대원군은 조정자에서 플레이어로 격하되고 만다. 결국 지은이는 사상없음의 정치사상이라는 역설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혹은 아예 도전하지 않았거나.

 

  『평전을 펼치며 기대했던 것 또 하나는, 조선의 정치시스템에 대한 지은이의 구체적인 평가였다. 김종학의 전작 개화당은 갑신정변이 단순히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쿠데타가 아니라 신분차별 철폐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그 주축은 박제가로부터 이어지는 중인과 상인 세력이었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지은이는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는데, 막상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 정도인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지은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물증인 역관 오경석과 의원 유대치, 승려 이동인이 조기에 퇴장하고 결국 정변은 김옥균과 박영효라는 양반 도련님들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중인과 상인이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다면, 갑신정변은 양반들 권력다툼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다소 무리해가면서까지 갑신정변을 중인과 상인을 위한 혁명으로 규정하는 만큼, 김종학이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무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는 놀랄 만큼 유능하고 단결도 잘 되는 양반세력이라는 지은이의 말은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김종학은 아예 개화파의 계보를 박지원-박규수-김홍집·김윤식으로 이어지는 체제수호파와 박제가-오경석-김옥균으로 이어지는 체제변혁파로 분리하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양반 신분제를 질타하면서도 김종학은 왕권과 신권이 견제와 균형을 이룬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 또한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다시 국가를 묻는다에서 잘 느낄 수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때는 왜 맞았고 지금은 왜 틀린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개화당을 읽으면 정작 책의 메인 빌런으로 설정된 친청파 엘리트, 대표적으로 김윤식이 오히려 진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건 그러한 설명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청에 의존하는 수구세력이라기보다는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근대적으로 변용하려는 합리적 보수로 그려진다.

 

 (김종학과 마찬가지로 개화기로 박사논문을 쓴 유바다 역시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가 근대 서구의 국제법으로도 정당화될 근거가 있었음을, 즉 서구와 동아시아, 전통과 근대가 꼭 충돌하지만은 않았음을 밝혔으면서도 정작 조선에 주어진 유일한 길은 김옥균의 완전독립밖에 없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어째서 다들 이리도 김옥균을 좋아하는 것일까? 마성의 사나이, 김옥균!)

 

  『평전에서도 김종학은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무너뜨린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개화당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요컨대, 대원군은 친청파 엘리트보다는 오히려 개화당과 함께 묶일법한 존재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빌리려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기에 질문해본다. 지은이는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긍정하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 지나친 도식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지은이의 총론이 워낙 칼칼하고 선명한 만큼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특히 그간 조선왕조의 역사적 성취로 평가받았던 군신간의 견제와 균형이 최근엔 하물며 군주조차 손댈 수 없었던 양반 엘리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장치로 평가받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 질문에 대한 김종학의 대답은 김옥균이나 대원군보다는, 오히려 김윤식에 대한 평가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간 김윤식은 친청파 엘리트 중 비교적 많이 다뤄지긴 했으나, 그를 조명한건 대부분 일본 학자들이었다. 그런 만큼 김윤식은 소국주의 내셔널리즘(기무라 간)”, “조공체제와 국제법 모두로부터 이득을 얻겠다는 양득론자(오카모토 다카시)”, “유교를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근대에 도달한 선각자(조경달)” , 일본과는 다른 조선/한국적 특수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소비되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김윤식에 대한 단행본을 쓴 국제정치사상 연구자 장인성 역시 그를 승출(乘出)의 사상가 요코이 쇼난과는 대조되는 근수(謹守)의 사상가로 정의했다. (장인성이 활동시기로 보나 역할로 보나 쇼난의 짝꿍에 훨씬 어울리는 박규수 대신 김윤식을 고른 건 조경달에 대한 비판보다도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기획은 아니었을까?)

 

  김종학이 그려내는 김윤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청에서 임오군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청군 전함과 함께 귀국해 대원군을 납치할 만큼 노회했고, 고종에게 자신이 대신 써준 반성문을 읽히게 할 정도로 거침없었으며, 무력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에게 국제법을 근거로 그 부당함을 설파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박규수 스쿨의 베드로-자로이자 청질서 아래에서의 근대화를 지향하던 속국자주(屬國自主)의 정치가, 전통적인 군신공치(君臣共治)의 현대화를 도모한 합리적 보수의 면모를 모두 갖고 있었던 야누스적 인물이었다. 치렁치렁한 수염을 달고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만년의 사진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김윤식의 다면성을 포착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김종학 밖에 없다. (굽시니스트도 있지만 그는 김종학의 개화당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했다.) 자신의 지향과는 정 반대편에 서있는 김윤식을, 그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 그리고 이를 깨부수고자 한 대원군과 개화당에 대한 김종학의 생각은 김윤식 평전이 나온 뒤에야 선명히 드러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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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필코 2021년이 다 가기 전에 올해의 책 결산을 올리겠노라 다짐했건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2022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게으르고 내실없게 살아왔지만, 2021년은 특히 더 그랬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고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저만 별달리 해놓은 게 없네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면승부 할 자신이 없으니 우회로를 찾다 오히려 더 꼬이고, 쉽게 가려고 꼼수나 부리다 제 꾀에 넘어가고 말이지요.

 

2021년은 책도 많이 읽지 못했네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100권을 채우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와 달리) 제가 책벌레이미지가 워낙 강한지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요 며칠 열심히 페이지를 넘겨가며 겨우겨우 101권을 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권수 채우기에 목숨을 거는 게 무의미하단걸 알지만,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정말로 해놓은 게 없는지라 조금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렇게 얼렁뚱땅 지나가버린 2021년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다면 좋은 교양서를 정말로 많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좋은 교양서를 쓰는 게 꿈인 사람으로서(좀 더 속물적으로는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수상!) 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웠고, 자극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단순히 어려운 주제를 알기 쉽게 요약·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양서가 주는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해 대담하고 발랄한 질문을 던지는 책들이 많아 반가웠습니다.

 

한 사회의 품격은 모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2021년의 한국사회는 제 생각만큼 망가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구석이 있다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물론 그 좋은 교양서들이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어떻게 하면 좋은 교양서가 좋은 시민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2021년의 책 열권은 전부 교양서로만 골라봤습니다. 2021년에 읽은 좋은 학술서는 나중에 긴 서평을 쓸 일이 있겠지요. (물론 교양서도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가나다순)

   

 

1. 대치동

대치동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정동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치동의 높은 교육열에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어떻게든 대치동에 발을 들이려고 한다. 조장훈의 대치동은 대치동을 향한 과도한 선망과 질시를 걷어내고, 이 별난 동네가 어떻게 한국 사교육 일번지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종합생태보고서다. 사교육과 부동산이 맞물리고, 입시정책이 급변하는 가운데 다품종 소량생산의 이점을 살려 전국의 학생과 학부모를 끌어 모은 대치동 생태계의 형성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지은이는 인류학을 전공했다지만, 부르디외를 자주 인용하는 것도 그렇고 사회과학자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도표까지 집어넣는 등 정작 책은 지극히 사회학적이다. 글의 구성부터 대안 제시까지, 논술선생님으로서의 에토스가 진하게 묻어나는 점도 재미있다. 이 책과 더불어 대치동 원주민으로 이제는 손주의 입시를 진두지휘하는 70대 할머니, 서울 변두리 자가를 팔고 대치동에 전세로 왔는데 집값이 폭등해 쫓겨날 위기에 놓인 40대 부부, 명문대 출신의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 30대 어머니, 저 멀리 용인에서부터 매일같이 대치동 학원을 오가는 고3 수험생 등 대치동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치동 앤솔로지가 한 편 나와도 좋을 것 같다.

 

2.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밥 꼭 먹고!”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만큼 밥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걱정과 애정을 전하는 수단이자, 인간다움을 이루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밥이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고도화된 시장과 발전한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낙관하거나, 농촌과 먹거리에 대한 목가적 환상만을 끊임없이 소환할 뿐이다.

정은정의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시장/기술만능론과 낭만적 생태주의가 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하는 농촌과 먹거리, 환경의 문제를 따뜻하지만 예리하게 짚어낸다.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유통업자의 트럭을 타고 도시로 실려와 자영업자의 손을 거쳐 따뜻한 밥이 된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과정 속에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떻게 누군가의 작은 편의가 누군가의 큰 고통이 되는지를 지은이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풀어낸다. 사회학이 사실상 통계학이 되어버린 지금, 숫자를 거의 쓰지 않고도 이토록 사회를 잘 실감케 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회학과 신입생 필독서로 지정하면 좋겠다.

 

3.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조선 사신단의 북경체험은 열하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삐딱한 양반 도련님이 청나라의 번화한 문물을 체험하고 폐쇄적인 화이관을 탈피하는,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른다. 미국 중국학의 기틀을 놓은 페어뱅크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건만, 정작 중화질서에 엄밀한 의미의 외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은연중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손성욱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는 조선인들이 한가한 유람이 아닌 치열한 외교를 위해 북경에 갔음을, 나아가 양반이 아닌 중인의 교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선 도달 가능한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그 세계 바깥을 보여주는 유일한 창이었던 북경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희망, 욕망을 이루고자 고군분투했다.

지은이는 19세기 조청관계 전문가로, 이미 훌륭한 논문과 서평을 여럿 내놓았다. 흔히 서세동점의 전환기로 이해되곤 하는 19세기 후반, 이 시기의 조청관계를 이해하는 틀은 근대전통/수구라는 이항대립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지은이가 이 틀을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에서 19세기 조청관계사를 써주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4.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지옥은 두려움만큼이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죽기 전까진 가볼 수도 없거니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지 아닐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지옥에 대한 상상력을 무럭무럭 키우며 불안을 달래고, 호기심을 채워왔다.

김태권의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지옥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 차마 말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지옥의 악마는 나쁜 사람을 벌주는데 왜 악하다고 여겨질까? 여러 종교를 믿으면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적어지지 않을까? 지옥의 일상은 어떻고 형벌은 언제쯤 끝날까?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온갖 기상천외한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마련하는 지은이를 보노라면, 역시 번뜩이는 상상력은 풍부한 독서에서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일본 만화 엉덩이 탐정이 함께 등장하는 건 아마 전 세계에서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한국의 에라스무스라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은 지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담한 상상과 엮어 읽기야말로 교양서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 점에서 이 책은 올해 읽은 가장 교양서다운 교양서다.

 

5. 신냉전 한일전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품는 생각은 특히 재밌는 구석이 있다. 한국은 한일관계가 프랑스-영국관계와 비슷하다 느낀다. 반면 일본은 한일관계를 아일랜드-영국관계로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한일관계가 어떻게 흘러왔느냐고 묻는다면, 한국보단 일본의 생각에 가까웠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해방 뒤에도 한국은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냉전의 최전선에 내몰렸으니까. 그러나 지난 20여 년 간 한국의 국력이 크게 성장한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정체했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한일관계를 뒤바꾸려는 모험에 나선다.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은 한국의 뒤집기와 일본의 굳히기가 엎치락뒤치락한 지난 4년의 역사를 샅샅이 살핀 끝에, 이 승부의 패자는 한국이라고 담담히 선언한다. 한국은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한미일 삼각구도를 깨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를 되게 할 힘은 없어도 아직 안 되게 할 힘은 있었던 일본은 한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끝내 역사적인 하노이회담의 좌초에 일조했다.

한일관계의 파탄엔 한국의 책임도 크다는 지은이의 중도적인입장은 한겨레답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분단체제 해소를 한국 외교의 사명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지은이는 지극히 한겨레적이다. 다만 이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도 중시해야 한다는 각론의 차이가 도드라질 뿐.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대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여기지 않는, 가령 중국을 보다 중시하는 중앙일보같은 곳이라면 신냉전의 정의 역시 확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냉전은 구냉전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한국은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중 어느 나라를 수단으로, 어느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6. 오답이라는 해답

과학사란 으레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과학사, 가령 한국과학사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해진 답을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빨리 찾아냈는가를 자랑스레 선전하거나, 반대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뒤쳐졌는가를 열을 내며 성토하는 기록이 되어버리곤 한다. 물론 비단 한국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과학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쿨하게 선언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김태호의 오답이라는 해답은 과학엔 정답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과학이란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설명 혹은 이야기인 만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선 오답으로 처리될 무수히 많은 과학이 그 시대, 그 지역에선 얼마든 해답이 될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한국과학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거리를 안긴다. 근대를 일본의 식민지로, 현대를 미국의 점령지로 시작했던 만큼 한국의 과학연구는 두 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과학사가 일본과 미국의 혼종인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일본식 발음)”적 존재에 그치는 건 아니다. 제국의 보편적 지식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만나며 상상도 못한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전의 양면인 자주-독자 프레임과 아류-열등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도 한국의과학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너무나 발랄하고 명랑하게 보여주고 있다.

 

7.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물론 사회적, 혹은 폴리스적 동물이란 해석도 있지만 넘어가자) 여기까진 다들 잘 알고 있다. 다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 만큼 정치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어달라는 납작한 결론으로 곧장 넘어가버려서 문제지.

김영민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는 다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해야 할 필연적인 당위가 생겨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말한다, 정치란 거대한 허구라고, 선거도, 투표도, 이를 가능케 하는 국가니 국민주권이니 하는 것도 전부 허구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허구를 통해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고, 무리를 이루고, 질서를 유지하며,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정치란 허구고 인간은 바로 그 허구가 있기에 비로소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8. 전국 축제자랑

누군가 “K-”를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이 책을 보게 하라. 김혼비와 박태하가 쓴 전국 축제자랑은 단순한 지역축제 탐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지역축제를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 해부도에 가깝다. 사람이 줄어가는 지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지자체의 눈물겨운 몸부림, 담당 공무원들의 헌신과 (의도된) 무심함, 지역주민보다 관광객을 우성한 구성, 온갖 요소가 맥락 없이 섞여 들어가는 혼돈의 도가니, 넘실대는 욕망과 밥벌이의 어려움,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정말이지 “K-”하지 않은가!

“PC이 풍자와 익살을 말살한 21세기 판 성리학으로 공격받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배꼽 빠지게 웃긴 이 책의 존재는 퍽 소중하다. 톨스토이가 그랬다던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적어도 이야기만큼은 반대인 것 같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재미없지만 재밌는 이야기는 저마다의 이유로 재미있다. 농담과 재미의 결이 이렇게나 다양하단 걸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9. 전라디언의 굴레

고등학생 시절 5.18을 맞아 광주로 답사를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5.18을 기억하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멀리서 온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친절함도 아니었다. 바로 1980년에 멈춰버린듯한 도시풍경이었다. 아버지가 부산 출신인 친구는 어떻게 호남에서 가장 크다는 도시가 이리도 낙후할 수 있냐며, 자기는 그 때 지역차별의 문제를 처음으로 느꼈노라고 아직도 얘기하곤 한다. 일베발() “호남드립이 이제는 20대 사이에서 하나의 유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전라도 출신에 대한 혐오와 멸시도 여전히 뿌리깊다. 이른바 호남문제는 지역차별과 계급차별이 밀접히 얽혀있는 셈이다.

조귀동의 전라디언의 굴레는 호남의 낙후와 저발전, 그리고 지역차별의 기원을 파헤친다. 지은이는 단순히 박정희 정권이 공장을 많이 짓지 않아서 전라도가 못 살게 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1950~60년대 내내 호남 출신이 정치권에서 소외됨으로써 기업을 키우기 위한 자원을 배분받지 못했고, 따라서 지역에 산업생태계가 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라도판 자민당 혹은 제도혁명당으로 군림하는 민주당이 중앙정부에서 받아온 떡고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폰팔이와 건설사가 지역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되어버린 현실은 그 결과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다만 동남권 식의 메가시티는 해결책이 아니다. 지역 간 연계가 밀접한 동남권과 달리 호남은 군산, 익산, 전주, 광주, 목포, 여순광 등의 도시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일단은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 지역정계에서 민주당 일당제를 깨뜨리고, 지방국립대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는 것만이 시도해봄직한 유일한 대안이다. 문제제기에서 대안제시까지,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책이다. 지은이가 쓴 김대중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

 

10. 지속가능한 나이듦

노화는 방 안의 코끼리다. 모두 그 존재를 알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어 한다. 몸은 점점 예전 같지 않아지고, 신도시 상가를 채우는 노인보호센터는 늘어만 가건만 아무도 이를 공론화하려 들지 않는다. 정희원의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이제는 노화라는 코끼리를 마주해야 한다고, 노화를 위한 사회계약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어폰 줄을 풀어가듯 지은이는 사회와 개인,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춤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과도한 공포나 낙관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도래할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현명함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이란 이처럼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논의를 위한 공통의 지반을 확인하고, 그 위에서 합리적 해결책을 도모하는 역량을 길러내는 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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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나이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희원 지음 / 두리반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관악 갑 후보로 출마한 김대호 씨는 지역 장애인 체육시설 건립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사실상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대호 씨의 발언이 장애인 차별이 아닌, “노인비하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점점 침침해지는 눈, 나도 모르게 절게 되는 다리, 예전 같지 않은 소화력 등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는 몸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장애인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폭발한 건 아닐까.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김대호 씨는 어쨌거나 노화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모두에게 드러낸 셈이다.

 

물론 코끼리의 존재를 인지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덩치에 놀라 호들갑을 떨며 잘못된 대책을 내놓거나, 최악의 경우 책임소재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자멸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흔치않은 책이다. 코끼리를 못 본 체 하지도, 그렇다고 그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노화라는 코끼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회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탁월함과 진지함에 여러 번 놀라며 책을 읽었다.

 

책은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다룬 1부와 노년의 질병에 대한 2, 사회 차원의 대안을 고민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목차를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없으니 순서를 뒤집어 보자. 지은이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대한 일각의 두려움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오늘날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폐지 줍는 노인들과,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은 꽤나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머지않아 노인으로 분류될 1960년대 생은 현 시점의 노인인 1930~40년대 생과 달리 비교적 건강하고, 아직 일할 능력이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앞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난다 해서 정확히 이에 비례해 부담이 커진다는 건 터무니없는 진단이다.

 

오히려 문제는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분류하는 현재의 기준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충분히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은퇴시키고, 연금까지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무려 70년 동안이나 바뀌지 않고 있는 노인의 기준을 조금씩 뒤로 밀어내서, 최종적으로 77세 정도로 상향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에 따를 여러 혼란과 저항을 알고 있기에, 지은이는 앞으로 15년간 1년에 4개월씩 노인 기준을 상향하고, 그 뒤에는 28년간 1년에 3개월씩 상향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만약 2022년부터 이렇게 상향을 시작하면 2065년에는 노인 기준 연령이 77세에 도달하므로, 국민연금 고갈과 과도한 총부양비 문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면서 사회적 저항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노인의 기준이 뒤로 밀리면, ‘젊은이의 기준 역시 똑같이 밀린다. 1950~60년대에 젊은 청년이 장군도 되고 건설회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당시 중위 연령이 19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20~30대는 오늘날 40대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1972년생인 유재석의 현재 나이는 1960년생인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던 때와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의 이경규와 지금의 유재석이 똑같이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1981년생은 만으로 쉰이 되는 2031년에야 1967년생이 만으로 서른이었던 1997년에 누린 사회적 지위에 이를 수 있다. 앞 세대가 똘똘 뭉쳐 기득권을 수호하고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서가 아니라, 생애주기가 전체적으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맞춰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개인 역시 더 길어진 삶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게 되었다 해도 노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 또 앞으로 노인이 될 60년대 생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노인인 30~40년대 생의 질병과 장애,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노화라는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지은이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라는 현재의 재가 중심 서비스에 의문을 던진다. 서비스 제공자가 여러 곳을 순회해야 하는 만큼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은 저밀도의 재가 중심이 아니라 고밀도의 시설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아마 눈 밝은 독자라면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원격의료의 도입 역시 고려해봄직하다.

 

나아가, 지은이는 보건복지부를 보건부와 복지부로 쪼개려는 일각의 움직임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노인에게 질병과 장애, 돌봄은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느 하나만 떼어내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노화가 진행되면 기력이 쇠하고, 병에 걸리기도 훨씬 쉬워지며,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점이 무척이나 자명한 만큼, 보다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보건과 복지의 긴밀한 연계는 꼭 필요하다.

 

노인 문제를 고민할 때의 이러한 복잡성은 노화에 따른 질병을 다룰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어도 노년의 질병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책은 간단명료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제 역할을 못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된 여러 지병과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가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복잡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무려 1년 넘게 소화 장애와 파킨슨병 증상이 멈추지 않던 70대 후반 A씨의 고통이 고작 진통소염제 한 알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통소염제와 함께 처방한 소화제가 신경계 부작용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처방받은 파킨슨 약이 구역과 구토를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소화제 처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일으킨 것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등산과 골프를 즐길 만큼 건강하던 A씨는,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흰죽과 미음밖에는 먹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주치의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급격히 의료자원이 풍부해지며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게 된 한국의 독특한의료시스템 역시 A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구토를 하면 내과 의사를 찾고, 손발이 떨리면 신경과 의사를 찾는 식으로 질병 중심의 진료를 받은 결과, 오히려 약물 사이의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A씨가 지난 1년간 복용했던 약들의 자서전을 꼼꼼히 살핀 결과 복잡계를 건드린 원인을 찾을 수 있었고, A씨는 밥과 김치를 먹고 지팡이 없이 병원에 걸어올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노인의학은 얽히고설킨 이어폰 줄을 풀어가는 일과 비슷한, 일종의 역추적 문제풀이인 셈이다.

 

이렇듯 노년의 질병은 원인을 찾기도, 상태를 호전시키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화에 대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노화를 (아예 막을 순 없지만)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격적으로 노화에 따른 변화가 진행되는 50대 이전에 이를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다. 마치 적금을 드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조그만 실천이 노화의 그래프를 최대한 길고 완만하게 연착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언한다, 기술이 발전해 노화를 멈추고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무병장수를 선물하리라는 희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잘 하기 위해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생목의 오류. 심지어 지은이는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생에 비해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와 불량식품에 둘러싸여 생활한 1980~90년대 생의 평균수명이 더 낮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마저 내놓는다. 한때 트위터에서 유행했던 글처럼, 우리는 고장 난 스마트폰 같은 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이 운명은, 아무리 영양제와 건강식품을 챙겨먹는다고 한들 절대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방법은 단 하나, 절식하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길 뿐이다. 특히 절식! 설탕은 금물이다. 탄수화물도 줄일수록 좋다. 인간은 좀 적게 먹는다고, 식사횟수 좀 줄인다고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해진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어차피 고기를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노인인구가 늘어난다면 대체육 시장이 발달하고 소고기는 최상류층의 사치품이 될 테니 미리 적응한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고기를 줄이면 된다.

 

당연하겠지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아니, 동의하지 못한다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로드맵이 너무나 따라가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이건 뭐 평생 수도승처럼 살라는 얘긴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저 노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데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된 전현우의 거대도시 서울 철도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나이듦역시 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다. 노인의 기준은 몇 살로 잡을 것이며 새로운 기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라이프 사이클은 어떻게 재조정될 것인지, 노인에 대한 의료와 복지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물적, 제도적 조건이 필요한지,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까지, 노화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할 사항이 이렇게나 많다. 노화라는 코끼리에 어찌 대처할지 몰라 쩔쩔매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계약을 고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첫 단추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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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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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정말 탁월하다, 고 생각했다. 이건 괴물같다, 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보통 젊은 작가에게 기대하는 건 천재성, 광기, 실험성, 불안함 등이다. 하지만 서이제는 놀랄 만큼 안정적으로, 원숙하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90년대 초반생(아마 92~94년생 정도?)의 삶을 그려낸다. 비슷한 또래의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자의식 과잉, 불안, 폐쇄성, 히스테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조나 달관을 가장한 위악을 부리지도 않고 정직하게, 일체의 비하나 연민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거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렇게 쓰면 이렇게 읽히겠구나를 충분히 고민하고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 에세이, 비평, 학술논문, 웹툰(작가는 영화를 전공했다지만 난 이쪽이 제일 잘 맞을 것 같다) 등 정말이지 다양한 장르가 소설에 녹아 있는 느낌인데, 작가가 글쓰기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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