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번안의 시대 - L-049 연세근대한국학총서 59
박진영 지음 / 소명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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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줄 거야

메마른 가슴 속을 적셔줄 멜로디

슬픔의 기억들에 기쁨을 채워줄 거야

넘치는 음악 속에 리듬을~”

 

지난 515, 이화여대 캠퍼스에 울려 퍼진 노래는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오프닝 <나의 마음을 담아>였다. 이날 대동제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바로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명 주제가를 부른 성우 이용신! 그가 세월의 흐름을 보란 듯이 비켜간 청아한 목소리로 <나의 마음을 담아>를 부르자, 어린 시절 달빛천사를 보고자란 수많은 90년대생들은 그야말로 광광 울고야 말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용신이 이화여대 대동제에서 부른 세 곡 중 무려 두 곡이 한국 자체 제작 주제가였다는 사실이다. 달빛천사의 한국판 오프닝인 <나의 마음을 담아>와 일본판 오프닝인 <IU>는 완전히 다른 노래고, 이러한 차이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깐 똑같이 달빛천사를 보며 어릴 시절을 보냈다 해도,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추억하는 애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이 애니가 한국에서는 달빛천사, 일본에서는 満月をさがして(만월을 찾아서)로 불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설령 한국에서 주제가를 자체 제작하지 않고 일본 것을 번안했다고 한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제곡 <Butter-Fly>를 살펴보자. 일본판 주제곡이 나는 연약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러 가리라는 희망찬 가사인 반면, 한국판은 결코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날아오르리라는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국의 <Butter-Fly>는 일본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른 노래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의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을 열등아류로 폄하하곤 한다. 일본판에 자막 달면 될 걸 괜히 어색한 한국어로 작품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 그렇게 열등하다면, 이용신의 무대에 이대생들이 열광적인 떼창으로 응답했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어 더빙 달빛천사가 외려 일본어 자막을 달고 역수출된 현상은? 심지어 원래 애니메이션 쾌걸 근육맨 2의 자체 제작 오프닝이었던 <질풍가도>는 이제 야구팀 응원곡으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은 원본의 열등한 아류가 아니다. 오히려 90년대생들의 어린 시절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줬을 뿐 아니라, 애니 오프닝이라는 태생을 극복하고 다방면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라는 형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번역함으로써 한국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진 것이다.

어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소한(?) 장르도 이럴진대, 번역이 갖는 잠재력과 창조적인 힘을 좀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딱 알맞은 책이 있으니, 바로 박진영의 번역과 번안의 시대. 37회 월봉저작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번역번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해간다.

번역과 번안의 시대본적지는 도서관 십진분류법 상으로 800번대, 그러니깐 문학 관련 서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국문학 연구서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무려 화학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과 베이스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는 몇몇 국문학 연구자들과 달리 저자의 문장은 간결하고, 논리는 탄탄하다. 본디 300번대 서가에 꽂혔어야 했는데 잘못해서 800번대 라벨이 붙은 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견고한 책이다. 역시 가장 대단한 존재는 글 잘 쓰는 이과(출신)’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 가장 하찮은 존재는... 굳이 밝히지 않도록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그간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1910년대 번역과 번안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본래 한국 문학사에서 1910년대란 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로 대표되는 1900년대와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이 등장한 1917년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무풍지대였다. 일제의 압도적 폭력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기, 문학다운 문학이 등장하지 못했던 미숙한 시기라는 선입견이 1910년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1910년대야말로 한반도에서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이 모습을 드러낸 태동기라고 주장하며, 이를 가능케 했던 수단으로 번역과 번안을 지목한다. 사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곤 하지만, 서구 역사에서도 근대소설이 등장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물며 한문/언문의 이중언어 체계에 놓여 있던 한반도에서는 근대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세련된 자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노베이스인 상황에서 근대소설의 맛이나마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근대소설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다른 언어권의 작품들을 자국어로 최대한 그럴싸하게 소화해내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역사가 곧 번역과 번안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저자는 크게 번역/번안의 태도와 방법’, ‘출판/언론매체의 기능’, ‘소설 언어의 반응을 좌표축 삼아 1910년대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 1910년대에 이르면 소설은 인민을 계몽하고 교훈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순전히 읽는 재미를 위한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다. 1900년대를 풍미한 기능주의에 맞서 문예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번역할 때도 과감한 축약이나 생략보다는 원문을 오롯이 담아냄으로써 읽는 재미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안정적인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근대소설이라는 긴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제공했다.

비단 소설을 대하는 태도만 달라진 게 아니다. 근대소설의 감수성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게끔 언어 역시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된 종결어미가 ‘~에서 ‘~로 옮겨갔고, 따옴표와 문단 구분 등을 통해 작가의 서술과 등장인물의 대사가 구분되었다.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순 한글의 한국어 문장은 결국 일본소설을 번역하고 번안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위와 같은 혁신에 힘입어, 1912년 조중환이 일본의 가정소설 호토토기스불여귀로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번역소설과 번안소설은 신소설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주류로 등극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빛나는 성취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무정역시 번안소설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이 없었다면 결코 꽃봉오리를 틔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번역과 번안을 통해 한국어는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갔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했다. ‘식민지라는 한반도의 현실이 제국일본의 소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1910년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의 가테이쇼세츠(家庭小說)’를 어떻게 번안했는지 살펴보자. ‘가테이쇼세츠는 덴노(天皇)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조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는 결코 전면에 등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 작가들은 가테이쇼세츠가정소설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국가는 물론이고 국가와 연결된 봉건적 가족제도마저 철저히 지워버렸다. 국가와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한 건, 오직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부부관계였다.

이상협의 번안소설 해왕성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해왕성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일본어 번안소설인 암굴왕을 다시 번안한, 말하자면 재번안소설이다. 하지만 해왕성은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을 전환함으로써 원류는 물론 경유지와도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상협은 소설의 무대를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파리에서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역사적 배경을 나폴레옹이 재기를 노리다 100일 만에 몰락한 1815년에서 쑨원이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한 1894년으로 바꾸었다. 본래 제국의 낭만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 몽테크리스토 백작, 식민지 지식인 이상협의 손을 거쳐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

 

일본어 중역은 오랜 세월 한국 학술·문화계의 부끄러운 꼬리표였다. 많은 지식인들은 한국이 주체적으로서구의 학문과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일본어 번역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콤플렉스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도 일본식 어투 혹은 일본식 한자어를 몰아내고 순우리말로 돌아가야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한다.

하지만 일본어로부터 벗어난 한국어에 과연 돌아갈곳이 있을까? ‘일본어 잔재를 싹싹 긁어냈을 때, 우리에게 남은 순우리말은 얼마나 될까? 눈에 불을 켜고 일본어 잔재를 솎아내거나 일본어 중역이란 태생적 한계에 좌절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나름의 가능성을 찾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박진영에게 한국의 번역사가 곧 일본어 중역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분노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국어 텍스트는 번역이라는 매개변수를 통해서만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일본도 각각 라틴어와 한문을 번역함으로써 자국어를 창조했으니, 한국어가 일본어를 번역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갖췄다는 건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박진영에게 보다 중요한 건 한국의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번역이 과연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가, 번역이 독자적인 상상력을 짜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책에서 매개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서 번역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새롭게 조망하려는 담대한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일본의 가테이쇼세츠보다 진보성을 띄게 된 조선의 가정소설, 그리고 아예 반제국주의 유니버스를 새로 창조해낸 이상협의 해왕성은 그가 발굴한 빛나는 결과물이다.

<나의 마음을 담아>의 가치 역시 달빛천사의 분위기를 제대로살려냈다는데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화여대 대동제에서의 열광적인 떼창은 이 노래가 이미 한국문화 속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왕성, 그리고 <나의 마음을 담아>와 같이 원판에 휘둘리지 않고 보란 듯이 활개치는 맹랑한 아류야말로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가꾸어왔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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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 서강학술총서 108
박효근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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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된장

 

고등학생 시절까지 미디어에서 마주한 여성의 이미지는 저 두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간혹 어머니가 추가되긴 했다.)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성은 처럼 단아하고 아름답거나, 고작해야 된장인 주제에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존재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여성을 사람 아닌 무언가로 대했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나 역시 미디어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는데도 말이다.

여성은 꽃이다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 대학을 들어오고 나서였다. 바로 전 해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그간 억눌려온 여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메갈의 미러링을 접하고서야 지금껏 별 뜻 없이 던졌던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실은 얼마나 성차별적이었는가를 깨달았다. 한밤중의 산책처럼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들이 내 여성 친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존재만으로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남성이 나 뿐만은 아니었나보다. 메갈 이후, 그간의 삶을 반성하며 페미니즘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 남성 페미니스트를 보며 이상하리만치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SNS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네임드 남페미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아래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아, 여성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X잡고 반성하자!”

 

네임드 남페미들은 여전히 여성을 남성인 나와 다른 무엇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다. ‘된장이라는 꼭짓점을 갖는 납작한 선분 위에 피해자라는 점을 찍어 삼각형을 만들었지만, 이 조그만 삼각형 역시 여성을 가두는 족쇄는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시기 남페미들의 또 다른 강령이해가 안 되면 외우자!”였는데, 내 여성 친구는 이 말을 듣고는 그냥 이해가 안 된다는 거네라며 픽 웃었다. 삼각형을 통해서만 여성을 보려니 이해가 될 턱이 없었다. 결국 메갈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그 많던 남페미들은 대부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여성은 정형화된 이미지 이상이기 어려웠고, 이는 여성의 삶을 굉장히 재미없고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역사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막말로 비교적 최근까지의 여성사특정 사건으로 여성의 처우가 좋아졌냐, 나빠졌냐를 따지는데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다.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이러한 이분법을 과감히 무너뜨린다. 그는 남성 종교개혁가들이 부과한 규율에 완강히 저항하고, 이를 교묘히 이용했으며, 심지어는 창조적으로 전유해간 여성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톺아본다.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개혁과 통()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되살아남으로써, 해방의 기회이자 통제의 순간이었던 종교개혁의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성격 역시 더욱 생생하고 온전하게 드러난다.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저항전유’, 그리고 이용이라는 방식으로 종교개혁을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물론 각 파트의 주인공들이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택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평을 편하게 쓰려는 나의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할 따름...)

먼저 시대에 저항했던 16세기 주네브의 두 여성을 만나보자. 열성적인 종교개혁가였던 마리 당티에르는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려 히브리어까지 익혔던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는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자신이 쓴 글을 읽고 판단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여성이란 모름지기 정숙한 아내로서 남편을 섬길 따름이라고 여겼던 남성 종교개혁가들은 당티에르를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취급할 뿐이었다. 이들에게 당티에르는 비난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티에르는 암담한 현실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네브의 선술집과 여관,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작지만 의미 있는 반향을 만들어냈다. 당티에르는 여성 역시 신으로부터 재능과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예수께선 세상의 주류를 자임해온 현자, 박사, 성직자, 권력자들보다 약하고 경멸당했던 이들을 택하시어 대단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약한 자들이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당티에르는 남성 중심 지배질서의 타파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일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여성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렇게도 열심히 여성에 대해서만 비판하는가? 생각해보면 여성은 예수를 팔아넘기지도, 배반하지도 않았다.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유다라는 남성 아닌가? 수없이 많은 의례와 이단, 잘못된 교리를 만들고 조작하여 퍼트리는 사람들은 사실 모두 남성들이다. 불쌍한 여성들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고생하고 있다. ... 이런 상황을 볼 때 나는 당연히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처럼 당티에르는 주네브 종교개혁가들의 남성연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우리의 두 번째 주인공, 성 클라라 수녀원의 잔 드 뒤시 수녀에게 당티에르는 전혀 저항의 아이콘따위가 아니었다. 수녀는 연대기15357월 갑작스레 봉쇄수녀원에 들이닥쳐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배배꼬인 여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는데, 배배꼬인 여자가 다름 아닌 당티에르였던 것이다. 이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라니!

잔 드 뒤시 수녀에게 당티에르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자)들은 어디까지나 저항의 대상에 불과했다. 중세의 수녀원은 남성 중심 지배질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으나, 여성이 가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잔 드 뒤시 수녀 역시 수녀원의 기록 담당 서기수녀로 임명되고 주네브의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등, 평범한 결혼을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새로운 기회에 나름대로 만족했던 듯하다. 그랬기에 수녀는 자신이 평생 간직해온 신념을 위선이라 폄하하고, 회유가 먹히지 않을 경우 상스러운 폭력도 서슴지 않는 종교개혁 진영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부의 키워드가 저항이라면, 2부는 전유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저자는 16세기 주네브의 이혼소송기록을 통해 그 시대 여성들이 이혼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살펴본다. 본래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이혼을 허용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부정한 배우자라는 불순물을 제거해 가정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네브 여성들은 결코 종교개혁가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들은 이혼을 재혼할 수 있는 자유로 받아들여 이혼 뒤 곧바로 약혼 승인을 요청하거나, 자신과 아이를 보호해줄 가정이라는 외피를 빼앗기지 않고자 끝까지 투쟁하기도 했다. 주네브 여성들은 나약하고 수동적인 피해자라기보다는 약삭빠르고 적극적인 행위자였던 것이다.

보다 흥미로운 사례는 저명한 위그노 사상가인 필리프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아내였던 샤를로트 아르발레스트다. 그는 남편이 옛 친구인 앙리 4세 앞에서 가톨릭과 벌인 신학논쟁이 실은 위그노를 찍어 누르려는 잘 짜인 각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아르벨레스트는 퐁텐블로에 가있는 남편을 대신해 파리에서 논쟁의 부당함에 대한 글을 인쇄·유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위그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민주화운동가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과 마찬가지로 아르발레스트 역시 모르네의 바깥양반이었던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종교개혁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이란 온화한 가부장이 현숙하고 순종적인 아내를 이끄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비록 그 수장이 국왕일지언정) 가톨릭의 맏딸을 자임하던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된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위그노 여성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정을 일종의 전위부대로 재조직했다. 특히 아르발레스트는 모르네와 전통적인 아내-남편 관계를 넘어, 학문적 도반이자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로까지 나아갔다.

 

1부 그리고 2부와 달리, 3부에서 저자는 오직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한국에선 영화 <여왕 마고>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그는, 어떤 시대에도 인정받지 못한 타자의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16세기는 발루아와 부르봉이라는 왕조, 17세기는 귀족이라는 신분, 18세기는 여성이라는 성별, 19세기는 16세기라는 시대를 깎아내리려는 상징으로서 마르그리트 발루아라는 이름을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정작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그 시대 기준으로 지극히 평범했던 귀족 여성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에 저자는 시대의 욕망, 그리고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본인의 욕망까지 걷어내고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세심하게 추적해간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평생 여러 개의 가면을 상황에 맞게 쓰고 벗던 복잡하고 미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결혼 전에는 순결한 처녀였고, 결혼 뒤에는 충실한 아내였다며 당대의 남성 중심 지배질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건 무엇보다도 뛰어난 교섭자로서의 역량이었다.

 

“ ... 나는 과거에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능력과 역량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상당한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이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직감했다.”

 

실제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가장 아꼈던 가면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이자 강대국 프랑스를 지배하는 발루아 가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는 이 가면에 걸맞은 정치적 역할을 맡기를 갈망했으며, 이를 위해 보다 볼품없는가면을 이용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최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쓰이거나 그려진 소설과 만화를 읽다보면 고구마를 100개쯤 먹은 듯 답답함이 차오르곤 한다. 적지 않은 작품들이 쓸데없는 TMI와 자기연민, 불행배틀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외쳐대던 남성들아, 여성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의 거울상이기도 하다. 시스젠더 남성이기에 꺼낼 수 있는 배부른 소리란 걸 알지만, 문학의 역할은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는데서 끝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과 억압을 드러내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그러내주기를 문학에게 바라는 건,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역사서이자 학술서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이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6세기 주네브의 두 여성을 통해 우리는 억압의 다층성과 이에 맞서는 다양한 저항의 전략을 본다. 주네브의 이혼소송과 프랑스의 위그노 여성으로부터는 가부장적 질서의 창조적인 전유, 왕비라 불리지만 단 한 번도 왕비인 적 없었던 귀족 여성에게는 기민하고 영리하게 편견을 이용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이 21세기의 눈으로 볼 때 어떠한 한계를 갖든, 격동의 종교개혁기를 살아간 여성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 풍요롭다. 메갈 이후 잠깐 타오르다 금세 사그라진 수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 필요했던 건, 결국 여성이라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을까. 여성은 된장’, 그리고 피해자라는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쬐깐한 삼각형 따위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두꺼운 책이라는 사실을, 한때의 남페미들이 부디 깨우치길 바란다. 물론 나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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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전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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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이후를 중국의 근세로 여기는 독특한 사관을 제시한 근대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나이토 고난은 1921년 어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 역사를 공부할 때,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1467)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남의 나라 역사와 같은 정도로만 느껴지지만, 오닌의 난 이후는 참으로 우리들의 몸과 직접 닿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를 정말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以文會友(https://blog.naver.com/zentaur/220968438393)

 

과거는 낯선 나라다. 동아시아에서 소위 전통이라 불리는 풍습과 문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봤자 18세기 이후에야 등장한다. 사실 이 전통이 과연 현대 한국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물며 그보다 앞선 시대임에랴!

냉정히 말해 1500여 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지금의 우리와는 개미 눈곱만큼의 관련도 없다. 아직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약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하는 망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지만, 이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의 일이다. 온갖 억지와 비약을 무릅쓰고 고구려가 1000년을 더 이어갔다고 가정한들, 그냥 대동강-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된 한반도 위에 일본 같은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짧게 잡으면 20세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전의 역사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생각하는 게 편할 정도로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근세 이전의 역사가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역사를 잘못 공부해온 것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거울일 수 있다면, 그건 현재가 얼마나 우연적이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가장 진보한 시대도 아니요, ‘보편도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 그럴 수 있다. 오늘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특히 지금과는 데면데면한 시대의 역사일수록 거울로서의 쓸모가 커진다.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특수성을 더욱 쉽게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일수록 느끼고 배우는 게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만일 이러한 역사의 즐거움을 아직껏 느껴보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을 펼쳐보시라. 광개토왕이 무위를 떨치던 시기의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서북부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내가 지금껏 마주한 거울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인다.

 

역적전은 구체적인 줄거리보다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의미를 갖는 소설이다. 듀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전 한국 정통 사극이라는 장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고 했었어요. 그리고 그 문제점이 어떻게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제점과 연결되는지도 설명하려 했지요. 하지만 공부가 짧았고 시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관심이 충분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곽재식은 이 주제에 대해 저보다 더 깊이 생각했고, 그 결과물을 이 책에 반영했습니다.”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듀나가 이야기한 한국 정통 사극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용의 눈물태조 왕건에서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통 사극이라 불릴만한 작품들은 언제나 남성영웅의 이야기였다. 수염 기른 마초 몇 명이 폼 잡고 멋들어진 대사 하나 읊어주거나 뜨거운 눈물 좀 흘려주면 모든 일이 뚝딱 해결되곤 했다. 세상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터이거늘, 남성영웅의 희로애락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인다. 특히 삼국시대 전쟁물의 서사는 라노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이고깽(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 사극의 대안으로 등장한 퓨전 사극은 남성영웅에 맞췄던 초점을 (어디까지나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렸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그냥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2019년 대한민국의 20대 커플 같다. 가끔 방송사고로 18세기가 배경인 사극에 21세기 장비가 등장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퓨전 사극의 경우엔 그냥 대놓고 21세기 장비를 써버리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지극히 21세기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한다.

 

곽재식은 정통 사극처럼 역사를 남성영웅 깽판물’(남영깽?)로 만들어버리지도, ‘퓨전 사극처럼 21세기 사람을 그려놓고 5세기 사람이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역적전의 시대적 배경은 광개토왕이 한반도와 남만주를 주름잡던 4세기 말~5세기 초지만, ‘인물로서의 광개토왕은 그리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사건의 전개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태풍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역적전의 광개토왕은 마치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사슴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치로 물러난 남성영웅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사가노와 출랑랑은 각각 백제 머슴 출신의 요리사와 가야 귀족 출신의 칼잡이다. 역적질을 일삼았다는 명목으로 끌려온 사가노와 출랑랑을 심문하는 하한기는 가락국 태생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다라국으로 도망 와 판관으로 일하는 인물이다.

이밖에도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희비를 가르고, 인생을 뒤바꾼다. 아무리 광개토왕 같은 자연재해급 인물이 역사의 큰 방향을 결정한들, 그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역적전의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5세기 사람들 같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곽재식이 21세기에 소설을 쓰며 5세기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해보일 수 있지만, 어쨌건 그는 최대한 ‘5세기스럽게인물들을 그려냈다. 사실 역적전의 세 주인공은 굉장히 평면적인데, 이마저도 근대적 자아란 게 생겨나기 훨씬 전이 배경이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처럼 역적전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고 모범적인 소설이지만, 이 책의 진가는 역사서와 함께 엮어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작가가 탄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곳곳에 통념과는 전혀 다른 고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적전을 조금 더 깊게 읽어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이다. 작중에서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마치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 백제의 도성에 살던 사가노는 주인인 협지와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려다 신라 군함을 만나 가락국에 정착한다. 출랑랑 역시 집안이 몰락한 후 해적질을 하며 살아간다. 작중 흑막(?) 비스무레한 위치에 있는 용녀는 바다를 오가는 대규모 상단을 이끄는 선주로, 본래 가야 출신이나 육상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한다.

사람이 오가는 네트워크로서의 강과 바다, 그리고 이를 무대삼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해상세력의 역동성에 관심이 생긴다면 바다에서 본 역사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를 보시라. 전자는 13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고, 후자는 배경이 일본인지라 역적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역사의 중심은 육상의 정치권력이고, 해상세력은 어디까지나 이들에게 복속된 존재였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예컨대 이런 상상을 해보자. 전근대 한반도에선 중국인/일본인’, 중국에선 한반도인/일본인’, 일본에선 한반도인/중국인이라 불린 해상은 사실 동일집단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바다에 적을 두고 세 육지와 모두 교류하며 그때그때 출신을 둘러댄 건 아니었을까? 해상세력을 독립변수삼아 새롭게 본 역사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이동이다. 역적전의 사람들은 혼자 다니든 무리를 짓든, 원해서 간 것이든 떠밀린 것이든 여기저기 엄청나게 쏘다닌다. 사가노가 가락국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자신처럼 왜국으로 가려다 실패한 백제인들이 일종의 난민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가야 출신인 출랑랑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고구려 칼잡이였다.

고대인의 활발한 이동이 소설 속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건 동아시아 세계론의 실천과 이론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국경이 바뀌던 고대 동아시아에선 고향을 잃어서, 혹은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트고 사신을 오가게 할 필요성도 컸다. 요컨대, 당시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사이에는 오히려 그 이후 시대보다도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육상 정치권력의 통제력이 강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여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적극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납고 강인하다는 표현이 보다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칼잡이이자 무자비한 성격파탄자인 출랑랑, 그의 라이벌인 여당아, 가야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인 용녀까지,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오히려 사가노나 하한기처럼 남성 쪽이 훨씬 조신하다. 곽재식이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듯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한반도의 여성에 대한 좋은 책을 찾지는 못했다. 여러분께서 무지하고 게으른 글쓴이를 깨우쳐주시길 바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과거에 대한 상상력을 말살하지 말라는 글을 종종 접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풍요로운 오류척박한 진실보다 훨씬 좋아하는지라 이런 얘기에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상상력 운운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결과는 대부분 뒤틀린 욕망을 과거에 투사하는, ‘척박하고 위험한 오류이기 일쑤다. 곽재식의 역적전이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발랄한 상상력은 사료에 탄탄히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혹시 앞으로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거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한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조용히 역적전을 손에 쥐어주도록 하자.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자.

고대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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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과학책 읽기의 즐거움
이정모 지음 / 사월의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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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건대, 나의 꿈은 언젠가 역사SF를 쓰는 것이다. 왜 하필 역사SF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역사 전공자고 SF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물론 역사소설보다는 역사SF가 그나마 팔릴 것 같아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과학에 젬병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수학은 문과치고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이었지만, 과학은 문과 중에서도 못하는 축에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과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의 마인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역사SF를 쓰고 싶어지다니, 이를 어이할꼬!

이렇게 성인이 되고서야 과학에 관심이 생긴 문송이(문과라서 죄송한 사람)가 나 뿐만은 아닐 게다. 어떤 문송이는 나처럼 과학을 소스로 소설을 쓰거나 웹툰을 그릴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음식물쓰레기 버리듯 휙 넘겨버리던 신문의 과학면을 한 번 진지하게 읽고 싶어진 문송이도 있을 터다. 사실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 위한 지적 악세사리로서 과학 지식을 탐하는 문송이가 제일 많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니까.

물론 뒤늦게 과학에 재미를 붙여보려는 우리 문송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과학과 담쌓고 지내온 기간이 너무 길어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가 선정한 과학고전을 펼쳤다간 그날로 과학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른다. 불쌍한 문송이들에게 필요한 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좋은 교양서건만, 서울대는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프린키피아종의 기원따위를 추천해주고 있으니 원! 세상은 과학 좀 공부해보려는 문송이들에게 이토록 잔인하다.

하지만 문송이들이여, 이제는 울지 마라! 징징대지도 마라! ‘과알못이라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교양서가 나왔으니, 바로 이정모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이다. 저자 이정모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명한 과학 커뮤니케이터지만, 나는 그를 고3시절 <미생>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미생>에 등장하는 재미교포 스티브 한의 모델이 바로 이정모였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고 처음으로 알았다. 이런 중증 과알못이 강추하는 책이니, 얼마나 쉽고 재미있겠는가!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저자가 읽은 각종 과학책에 대한 서평 모음집이지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외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서평인가 신변잡기인가?” 책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 나와 있듯 이정모의 서평은 전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이 키우는 앵무새가 자신을 싫어해 딱 한번 과외를 짤렸다며 분해하고(새대가리 vs. 새의 천재성), 동생이 유치원에서 사람의 소화기관에 대해 배우는 것을 본 이후로 유치원 졸업생에 대한 열등감을 키워왔다고 고백한다.(, , 의 숨겨진 과학)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도 때도 없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홍보하고, 자신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쳐준 종로학원의 신일생, 조용호 선생님에 대한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책에서 종로학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나는 끝내 선생님들 성함을 외워버리고야 말았다. 누구라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아버린 기분이 들 것이다. 만약 길에서 저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삼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 것만 같다.

이처럼 이정모는 본디 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 쓰인 서평이란 글에서 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는 과연 저자가 서평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지 의문스러울 것이고, 저자의 TMI에 지레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정모는 매우 훌륭한 서평가일 뿐 아니라 독자를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의 서평이 훌륭한 이유는 다름 아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형식 덕분이다.

이정모는 책의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서평을 갈음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이 보고, 배우고, 느낀 온갖 것들을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책을 읽어간다. 저자가 책과 함께 웃고, 울고, 짜증내고, 위로받은 생생한 기록은 딱딱한 과학책에 개성을 불어넣는다.

게다가 이정모의 경험담은 단순한 썰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학책을 소개하기 위한 밑밥깔기. 이를테면 아버지를 모시고 브뤼셀을 여행하다 자동차로 왕궁 후문을 가로막은 이야기를 꺼내나 싶더니, 스리슬쩍 우주를 탐구해온 과학의 역사로 넘어가버리는 식이다.(“You are here!”) 그 솜씨가 마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기에, 과학책은 처음이라며 쭈뼛대던 문송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너무나도 재밌다. 난 지금껏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글쟁이는 만난 적이 없다. 도서관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틈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든 지난 사흘간 나는 정말이지 꼴사납게 쿡쿡댔다. 급기야 왜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예민하게 신경 쓰면서 물리적 올바름(physical correctness)’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대목에서는(물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공교롭게도 둘 다 약어가 PC!) 저자는 이렇게 남을 웃겨놓고선 뻔뻔스럽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본론으로 넘어가버린다.

이렇듯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기발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가볍고 얄팍한 건 결코 아니다. 저자는 짧은 지면을 요령껏 활용해 각 책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할 뿐 아니라, 상식을 뒤흔드는 촌철살인 역시 야무지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77개에 달하는 알찬 서평은 저마다 다루는 내용도, 꺼내드는 질문도 제각각이라 독자가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결국엔 하나로 수렴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모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과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도 않고, 복잡한 현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다.(파수꾼의 딱따기 소리) 그런 주제에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큰지라 과학자든 교회학교 교사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걸 이상한 설명을 갖다 붙이기 일쑤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과학이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되, 어디까지나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되, 모든 걸 다 설명하겠다는 오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만 예정된 파국을 그나마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다. 유머와 위트 사이를 도도히 흐르고 있는, 저자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저자에게 개인적인 고마움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과학책에 대한 서평이 아닌 글이 딱 한 편 있으니, 바로 나는 오늘도 주례사서평을 쓴다이다. 자신이 책의 장점만을 다룬 주례사 서평을 쓰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 글은, 역시 주례사 서평을 지향하는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남의 장점을 잘 보는 사람은 단점 역시 귀신같이 알아챈다. (일단은 내가 그렇다!) 이정모 역시 웃으면서 뼈 때리는 몇몇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눈물콧물 쏙 빼놓을 신랄한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주례사 서평을 고집하는 이유는, 시간과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나마 좋은 과학책을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요즘 정말로 책을 읽지 않는다. 글을 통째로 외우던 음유시인들이 금속활자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갔듯, 종이책 읽는 사람들도 유튜브로 인해 멸종해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어나 일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화자라면 더더욱!

현실이 이토록 처참한지라, (번역서를 포함해) 한국어로 쓰인 괜찮은 책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설령 책에 사소한 단점이 있다 해도 일단 사람들이 읽어야 이에 대해 얘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은 책이 널리 읽히는 게 먼저다. 책의 단점은 내게 개인적으로 질문이 들어올 때 얘기해줘도 늦지 않다. 요즘 들어 내 서평이 지나치게 호평 일색은 아닌가싶어 고민스러웠는데, 저자 덕에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도 열심히 주례사 서평을 써서, 언젠가는 역사책은 처음입니다만이라는 제목으로 주례사 모음집을 퍼내겠다! 물론 그때까지 한국 출판시장이 버텨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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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점기행 (보급판)
김언호 글.사진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책벌레를 자임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인생서점한 곳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책을 고르던 공손서점과 대학생이 된 지금 종종 들르곤 하는 홍익문고가 바로 그곳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 빠르면 당일에도 받아볼 수 있는 오늘날 구태여 서점을 찾는 이유는, 서점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신간의 제목을 훑노라면 왠지 지()의 최신 트렌드를 꿰뚫은 기분이고, 이름 모를 책에 푹 빠져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단골들의 취향을 꿰고 있는 서점 직원과의 수다도 빠질 수 없다.

서점이 선사하는 이러한 즐거움은 그러나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서점 자체가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신촌의 랜드마크이자 수많은 대학생의 안식처였던 홍익문고는 2012년 신촌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며 철거위기에 놓였다. 다행히도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홍익문고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홍익문고는 서점이 곧 건물주인, 굉장히 예외적인 사례다.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절대다수의 서점들은 시민들이 채 손을 쓸 틈도 없이 쫓겨나고 말았다.

서점에게 미래는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세계 각지의 서점을 찾았고, 그 기록을 묶어 세계서점기행을 냈다. 저자는 유럽과 미국, 동아시아의 서점들을 순례하며 여전히 꿈틀거리는 인문정신의 생명력을 느낀다. 800년의 세월을 품은 고딕성당을 개조해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 수많은 예술가를 키워낸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자유·저항정신을 이어가는 베이징의 완성서원, 어린이와 여성, 환경을 귀히 여기는 세상을 꿈꾸는 도쿄의 크레용하우스까지, 세계의 서점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읽기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저자가 찍은 서점들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으리라.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독립서점 미드타운 스콜라를 꾸려가는 에릭 파펜푸세와 캐서린 로런스 부부가 건네는 이야기는 짧지만 뼈가 있다.

독립서점은 대를 이어 운영하기가 쉽지 않아요. 정신노동이자 육체노동이거든요.”

그렇다, 서점운영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될 뿐 아니라 정신을 좀먹기까지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현실에선 더더욱! 지식을 얻는 수단이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옮겨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펼치기보다는 유튜브를 검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무턱대고 서점 문을 닫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인문정신의 토양인 서점을 지켜나갈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뜬금없겠지만, 서점을 좀먹은 정보통신기술이야말로 결국 서점을 되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언호 대표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한 정보통신기술이 서점을 되살린다니,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힌 도미니카넌 서점을 폐점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4000명 넘는 페이스북 회원들이었다. 뉴욕의 맥널리 잭슨 서점이 제작해주는 나만의 책은 구글에 의해 데이터베이스화되어있고 말이다.

1997,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는 거리의 소멸이란 책에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이 얼굴을 맞댈 필요성을 사라지게 하리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클릭 한 번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도 굳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오프라인은 굳이 따지자면 대체재라기보다는 보완재다. 나 역시 SNS를 통해 새로 나온 책이나 유명 저자의 강연회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한길사가 운영하는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이나 과학전문서점 <갈다>, 인문사회서점 <니은책방> 또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하고, 각종 강연과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오늘날 서점이 처한 현실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점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방법은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듯 온라인을 이용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상하이의 명문서점 지펑을 창립한 옌보페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서점이란 시대정신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공간이다. 서점이란 태생적으로 시민사회다.”

서점은 본래 출판사이자 살롱이었고, 사람들은 이 복합적인 문화공간에서 온갖 불온한 생각을 공유하고 연대의식을 키워갔다. 옌보페이의 말마따나 서점은 고립적인 개인과 경직된 국가사이에 놓인, 자유롭고 비판적인 시민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매개였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사회 각 분야가 전문화되며 서점은 순수하게 책만을 파는 공간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를 내다보는 지금, 서점은 오히려 출판사이자 살롱이었던 옛 시절을 적극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에겐 여전히 서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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