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내 인생을 얼마나 좌우하나]

타고난 성격, 바꾸려면 부러질수도 (공개기사)
  
유머감각, 입맛은 환경 영향 커




성격과 지능뿐 아니라 각종 질병의 발생과 진행에 유전자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생활해나가는데 유전적 정보가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지에는 어떤 얼룩도 없기 때문에, 그 위에는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말들이 써질 수 있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위하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이상을 품었던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둥의 말이다. 그는 문화혁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했지만 결국 6천5백만명이 희생된 채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공산주의자들만이 이런 믿음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 미 하버드대 스키너 교수가 이끄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등장하면서 아동심리학자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행동특성이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자녀들의 성격이 부모의 양육방식에 따라 원하는 대로 고쳐질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빈 서판’(blank slate), 즉 백지상태라는 이런 주장들은 선천적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왠지 도덕적으로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인종청소를 통해 우생학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던 나치즘의 잔상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사람의 성격이나 지능은 정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주면 얼마든지 바꿔나갈 수 있을까?

자식들을 키워보거나 아이들을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렇지 않음을 인정할 것이다. 실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은 개인의 성격이나 지능에 미치는 유전적 영향력이 상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유전 영향 밝힌 쌍둥이 연구


빈서판에서처럼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새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1994년 페레즈(왼쪽)와 아라파트가 노벨 평화상을 탄 이후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은 쌍둥이 연구 결과 드러났다. 1979년 어느날 미국의 심리학자 토마스 부샤드는 태어나자마자 각자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쌍둥이가 40년만에 만났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흥미를 느낀 부샤드는 이들의 유사성과 차이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 깜짝 놀랄 사실이 드러났다. 두사람은 외모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은 물론 고혈압과 편두통을 비롯한 병력도 비슷했고 비만이 시작된 시기도 같았다. 게다가 둘 다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고 목공이 취미이고 농구를 싫어했다.

당시 심리학 정설과 너무나 다른 결과에 충격을 받은 부샤드는 이후 본격적으로 쌍둥이 연구를 진행해 특히 성격에 유전적 영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부샤드는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런 특성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지 않았다”며 “그러나 결국 증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성격은 크게 5가지 독립된 주요 특성으로 나눠진다. 즉 지적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 성실성(conscientiousness), 외향성-내향성(extroversion-introversion), 적대성-친화성(antagonism-agreeableness), 정서안정성(neuroticism) 등의 기준으로, 각 단어의 첫글자를 따 오션(OCEAN)이라고 부른다.

연구 결과 5가지 특성 모두 성격 편차의 40% 정도가 유전적 영향의 결과이고 가정환경의 영향은 10% 이내인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50%는 질병이나 사고, 친구 등 개인적인 특수 환경이 차지했다. 이런 결과는 어린 시절 경험이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과도 배치된다.

습관적인 거짓말이나 도벽도 아이 때 입은 정신적 충격의 결과라기보다는 대부분 유전적 소질 때문으로 보고 있다. 미 하버드대 언어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는 그의 저서 ‘빈 서판’에서 “유전학과 신경학은 어두운 마음이 항상 부모나 사회탓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범죄성향과 유전자가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X염색체에 있는 MAOA 유전자가 그것. 이 유전자는 활성이 높은 타입과 낮은 타입이 있다. 활동이 낮은 유전자형을 갖는 사람들은 공격성이 높은데 품행이 불량한 청소년들과 반사회 성격장애 성인들에서 흔히 발견된다.

흥미롭게도 유전자의 타입에 따라 환경의 영향력에 차이가 나타난다. MAOA 활동이 높은 유전자형은 어릴 때 학대를 받고 자라더라도 나중에 성격장애나 폭력성을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 활동이 낮은 유전자형은 커서 폭력범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성격 형성엔 다수의 유전자 관여


쌍둥이는 취미와 소질도 비슷하다. 국악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김진아(가야금), 선아(거문고), 민아(해금) 세쌍둥이자매.
흔히 ‘모험 유전자’로 불리는 D4DR 유전자도 성격과 관련이 깊다. 이 유전자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신호를 받는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데, 민감도가 높은 단형유전자와 민감도가 낮은 장형유전자가 있다.

장형유전자를 갖는 사람은 좀더 큰 자극을 얻기 위해 모험을 즐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 바람을 피우는 성향이 강하며 알코올이나 약물에 중독되기 쉽다. 담배를 끊기 어려운 사람은 유전자를 의심해볼만 하다.

지나치게 근심걱정이 많은 성격도 유전자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996년 독일 뷔르부르크대 정신과 레슈 교수팀은 17번 염색체에 있는 세로토닌 운반체(5-HTT) 유전자를 억제하는 DNA의 길이가 짧은 사람이 이런 성향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어 사교모임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물론 하나의 유전자가 성격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새로움을 갈망하는 성격의 원인 가운에 D4DR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 이하다. 결국 성격의 유전적 측면은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해 상호작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성격 형성에 유전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과 행복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다. 잘못 해서 혼을 내도 혹시나 아이의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맞벌이 부모의 경우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이 부족한 것에 대해 늘 죄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아동학대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부모의 태도는 자녀의 성격 형성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고난 성격을 억지로 바꾸려는 노력도 별 효과가 없다. 소심한 성격의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없앤다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게 하는 것 같은 방법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국의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 박사는 그의 저서 ‘게놈’에서 “사람의 기본 성향을 병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며 “소극적인 면을 타고났다고 말해 주는 것이 소극적인 것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쓰고 있다. 수줍음은 신경계의 흥분조절능력의 결핍에 기인한다. 따라서 부담이 적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통해 조금씩 적극성을 배우는게 더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성격차도 이런 면에서 접근하면 좀더 너그러울 수 있다. 배우자의 나쁜 버릇이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며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 해결책을 모색하면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사례가 많다.


열악할 때 환경 영향 더 커


성격이나 행동 모두가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은 아니다. 매력있는 현대인의 필수요건인 유머감각은 가정환경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입양된 형제들의 유머감각이 비슷한 반면 떨어져 산 쌍둥이는 차이가 있다. 음식 선호도도 유전성은 거의 없고 초기 경험이 중요하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어린 고객을 중요시하는 이유다.

한편 상황에 따라서는 환경이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헤어져 혼자 자란 생쥐는 신경이 예민하고 커서 새끼를 낳아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 조건에서는 유전자보다는 환경이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환경이 좋아질수록 역설적으로 그 영향력은 작아진다. 유전자가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범한 가정의 사소한 차이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매트 리들리 박사는 지난해 펴낸 책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ture)에서 “가정이란 환경은 결핍되면 질병에 걸리지만 어느 수준이 넘어가면 건강증진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타민C와 같다”는 멋진 비유로 환경의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지만, 의지로 의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성격을 억지로 바꾸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런 경구는 딱딱해지기 쉬운 책임감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서, 우리가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지 않도록 해준다. 그래서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인생관을 갖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쇼펜하우어를 좋아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될 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삶을 살지 않을까.


아침형 인간도 유전자가 맞아야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정 유형의 D4DR 유전자를 가질 확률이 높다. 이런 사람들은 약물에 중독되기 쉽고 담배를 끊기고 어렵다.
성격 뿐 아니라생활패턴도 유전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최근 ‘아침형 인간’ 신드롬으로 새벽부터 부산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낮에는 졸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소위 ‘올빼미족’이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성격이 소심한 아가씨가 하루아침에 ‘명랑소녀’로 바뀌기 어렵듯이 늦잠꾸러기가 ‘종달새족’이 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수면패턴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최근 밝혀졌다. 뇌에서 생체시계를 관장하는 부분을 작동시키는데 관여하는 Per3 유전자가 그 주인공. 영국 서레이대 시아몬 아처 박사팀은 올빼미족은 종달새족에 비해 이 유전자가 짧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루주기 생체시계가 24시간보다 긴 수면지연증후군(DSPS) 환자를 조사한 결과 75%가 짧은 Per3 쌍을 갖고 있었다.

결국 짧은 Per3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억지로 아침형 인간이 되려고 했다가는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로 보낼 확률이 높다. 물론 수면 패턴에는 주변환경이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의 신체리듬을 거슬러가며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는 것이다.

- 과학동아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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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5-1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그러니 이제부터 절대 기죽지 말아야겠다.
사실..그동안 사회에 팽배해온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 그노무 이론 땜시 한밤중형인 나는 정말 기죽고 찌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왜 나는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일까...음냐음냐...그러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뒷받침이 생겼으니 이 아니 기쁠쏘냐1
음하하하, 신나는 오후이다!

반딧불,, 2004-05-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첨에 밀키님이 쓰신 줄 알고..언제 심리학이랑 유전공학을 전공하셨나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정말 신납니다^^*

반딧불,, 2004-05-14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룰루..퍼가야지!!

밀키웨이 2004-05-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반디각시 진짜로 너무 하신거 아닙니까?
저를 어디까지 비행기 태우셔서 둥둥~~ 하실겁니까요?
이러다가 떨어지면 마냥 떨어지게 될까 겁나옵니다...^^;;
ㅋㅋㅋ

근데 진짜로 신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올빼미족 ^^

loveryb 2004-05-2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글들을 어케 퍼가나요.. 정말..퍼가려니 뭐 무슨 마이페이퍼 카테고리를
하라고 하는데 어케 하는지 영^^:::

밀키웨이 2004-05-28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러브비님
일단 러브비님 서재에다가 카테고리를 몇개 만드세요.
그러시고나서 퍼가기를 누르시면 그 카테고리 이름이 뜰거예요.
그러면 옮기고 싶은 카테고리를 지정하셔서 확인 누르시면 됩니다요 ^^

근데 맨날 이렇게 뒤로 밀린 글에 코멘트를 다시니 다시 찾아보기가 참말로 힘들구만요 ^^
정말이지 뉘시옵니까요 ^^
 

사람들은 대개 막연히 ‘나’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나라는 생각’을 불교에서는 아상(我相)이라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이고(Ego)라는 말도 쓰고 자아(自我)라는 말도 쓴다. 이 ‘나’라는 생각은 실로 일반적인 삶에서 겪는 거의 모든 심리적 고통의 근원이다. 그러나 막상 ‘이 “나”란 도대체 뭔가’ 라고 묻기 시작하면 참으로 곤란해 진다. 그 답을 찾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물 새 나가 듯 뚜렷이 잡히는 것이 없다. 이 ‘나’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매우 막연히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약 두 살쯤에 이르면 서서히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때 까지는 어린아이는 천지와 하나이다. 도와, 존재와, 전체와 하나이다. 개체로서 존재하되 스스로를 전체로부터 구분할 줄 모르고, ‘나’와 남을 달리 알지 못하며, 자신을 주장하거나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지도 아니한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이나 이 단계의 어린아이는 무아지경(無我之境) 물아일체(物我一體) 그 자체이되 스스로 그러한 줄은 모른다. 그 의식이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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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 데는 대개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 의식이 조금씩 발달됨에 따라 어린아이는 주변과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신체가 다른 사물과 분리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다치거나 뜨거운 것에 닿으면 고통스러움을 알게 되며, 단것을 먹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즐겁고 흥겨움을 느끼게 된다. 하여 ‘나’와 ‘나 바깥에 있는 것’을 분별하게 된다.
거울에 비치는 모양은 매일 같아 보여서 몸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同一視) 하기 시작한다. 부모나 형제 등 다른 사람들도 매일 같은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름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 하기 시작한다. 의식이 좀 더 발달함에 따라서 생각도 점차 복잡해 진다. 타고난 개성에 따라 스스로의 생각과 생각의 방식이 틀을 잡기 시작하고, 의견이나 주장도 생겨난다. 생각 의견 주장 따위를 복합적으로 마음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 마음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스스로 한정 짓게 나면, 나의 존재는 단순한 개체를 벗어나 개체성(個體性)을 띠게 된다. 이렇게 하여 몸과 마음, 즉 모양과 이름을 ‘나’로 아는 생각이 일단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대개 다시는 그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법이 없이 그런 줄만 알고 평생을 지내고 만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라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존재가 어찌 한낱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나, 한 줌 흙으로 변하고 말 몸뚱이의 모양새나, 허망히 떠도는 잡된 마음의 생각따위로 한정 지어질 수 있겠는가? 이름, 몸,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유용하게 쓰이는 것들이지만 이를 ‘나’로 알고 있으면 진정한 나의 존재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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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나’라는 생각은 대단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서, 두세 살 때에는 ‘나’ 밖에 모른다. “나 좀 봐”,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것 좀 봐”, “이건 내 거야” … 그야 말로 나, 나, 나, 내 것, 내 것, 내 것 뿐이다. 이를 유치(幼稚)하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심리 발달상 매우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기에는 어른들도 이런 유치함을 이해하고 다 받아주고 또 칭찬도 해 준다. 이 받아줌이 어린아이의 자신감 형성에 도움을 주며 심리적으로 성숙한 개인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필요한 영양분이 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이 ‘나’에 대한 집착과 자아 중심적 태도가 점차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대여섯 살이 되도록 이렇게 ‘나, 나, 나, 내 것, 내 것, 내 것’ 하고 있으면 어른들도 더 이상 잘 받아주지 아니할 뿐더러 칭찬은커녕 꾸중을 듣기 일수다. 대부분의 사람에 있어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이 ‘나’에 대한 집착과 자아 중심적 태도는 평생을 지속하고 죽음을 맞이 하도록 그 이상의 실존적 가능성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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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단지 모양과 이름에 그 바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모양은 몸이고 이름은 마음이다. 몸과 마음에 한정된 ‘나’만을 나로 알고 있으면 삶은 끊임없는 추구(追求)와 득실(得失)로 고단해질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내’가, ‘나’의 개체성이, 재미있고 즐거웠으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청년기도 지나고, 점차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이 개체성은 마침내 큰 짐이 되고 만다. 여태까지 모든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이었던 바로 그 개체성이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이 개체성의 존재가치를 정당화 해야 하고, 유치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충족되지 않아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몸과 마음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늘 어딘가 모자람을 느끼게 되고, 무언가를 구하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쉬지를 못한다. 또, 늘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 노력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눈길 마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견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얼마나 이루고 못 이루었느냐 또는 얼마나 이름을 얻었느냐 하는 등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는 정도에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누가 칭찬하고 알아주면 우쭐해지고 누가 비난하고 냉대하면 풀이 죽는 데, 평생을 이렇게 이리 저리 쓸려 다니고 나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어딘가 모자라는 것 같고 참된 평화와 깊은 만족을 알 수가 없다. 자아 혹은 아상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으로 지어낸 허구(虛構)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이 아닌 욕구의 충족은 일시적인 즐거움은 가져올지 모르나 깊은 정신적 만족을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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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만이라도 알게 된 사람은 이제 이고(Ego)를 없애고자 노력한다. 삶의 온갖 마음 고생이 이 아상에서 비롯함을 보니 어찌 이를 없애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고나 아상이란 떨쳐버리거나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니고, 떨쳐 버리거나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여 ‘나를 없애야 한다’ 혹은 ‘나를 죽여야 한다’ 하는 따위의 말들도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믿고 따라 하려 하면 참으로 고달파질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좋을 수가 없다.

아상이 아상을 없애려 하니, 없애려 하면 할수록 아상에 대한 믿음만 강해질 뿐이다. 아상이 실재(實在)한다고 믿는 한 무슨 노력을 어떻게 기울여도 아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단지 억지로 애써 겸손한 태도만을 좀 얻어가질 수 있을 뿐이나, 겸손이란 그 자체가 아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 겸손은 사실은 짓고 꾸미는 일이어서 거만(倨慢)함과 다르지 않다. 참된 겸손은 겸손하고자 노력할 줄도 모르고, 겸손해도 스스로 그런 줄을 모른다.

아상이란 단순한 생각 뿐이어서 그 실체(實體)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떨쳐버릴 수도 없앨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이를 직시하여 바로 알면 그것이 곧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이 ‘나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곧 해탈(解脫)의 시작이다.

참된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짓고 꾸미기에 마음을 바삐 한 것은 공맹(孔孟)의 허물이고, 이 간단한 도의 진리를 들고 구름 위로 넘어가 버린 것은 노장(老莊)의 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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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자 하는 마음은 아상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깨닫고자 하는 마음도 처음에는 아상으로 시작한다. ‘내’가 깨닫고자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나’, 혹은 ‘천지와 하나가 된 나’ 따위의 생각은 사실 아상의 극치(極致)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패기에 찬 젊은이가 산사(山寺)를 찾아와서 스승을 만나고는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젊은이의 진지함을 보고는 노승(老僧)은 흔쾌히 허락했다. 젊은이는 참으로 열심히 수련하였다. 많은 경전을 읽고 좌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염불이나 의식(儀式)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스승은 제자에게 숙제를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마음 공부가 어찌 되어가는지 보고서를 한 장씩 써올리게 한 것이다. 제자는 드디어 스승이 자기를 알아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여 매우 기뻤다. 첫 보고서를 쓰는 날이다. 열심히 먹을 갈고 붓을 적셔 다음과 같이 써 올렸다.

“그 동안 읽은 여러 경전에 의해서 좌선을 계속한 덕에 지난 달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경험을 했습니다. 마음을 비우자 밝은 빛이 머리 속을 채우는 듯 하였고 지혜가 샘솟는 듯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스승은 별 말도 없이 그저 마지 못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칭찬을 기대했던 젊은이는 좀 실망을 했지만 아무 말 못하고 물러났다. 또 한 달이 지났다. 젊은이는 다시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계속 염불과 좌선으로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 주가 지나자, ‘나’라는 생각을 잊었고, ‘나’라는 생각을 잊자 천지가 제몸 같이 느껴지고 우주가 제 마음 같이 느껴졌습니다.”

젊은이는 이 정도면 스승께서 감탄을 하겠지 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스승은 한번 슬쩍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돌아 앉았다. 제자는 실망이 대단히 컸다. 또 한 달을 열심히 수련을 한다. 그 동안 계속한 참선 수련으로 그 경지를 높인 젊은이는 이번에는 자신 있게 다음 달 보고서를 이렇게 올렸다.

“식음도 잊고 취침도 잊은 채 명상에 전념 했습니다. 그러자 아상(我相)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 우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의식은 태초(太初)의 무극(無極)과 하나가 되었고, 제 몸은 음양의 조화와 하나가 되었으며, 제 마음은 텅 비어 오갈 곳을 몰랐습니다. 이만 하면 깨달음을 얻었다 하겠습니까?”

스승은 이를 보자 슬픈 얼굴을 감추고자 그만 눈을 지긋이 감더니 못내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는 다시 돌아 앉았다.

“그만 물러가라.”

젊은이는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뭘 잘못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나도록 스승은 그 제자로부터 보고서를 받지 못했다. 거의 일년이나 지나서 궁금해진 스승은 사람을 시켜 젊은 제자가 어찌 수련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였다. 제자는 그 사람을 통해 보고서를 또 하나 적어 보냈다.

“깨달음이고 뭐고 누가 알게 뭡니까?”

편히 누워 있던 스승은 이를 보자 스승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 앉더니, 비로서 입가에 그윽한 환희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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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의 허구를 본 마음은 온 천하가 칭찬을 하여도 거만하지 아니하며, 세상이 비난을 하여도 아랑곳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려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고 비난을 피하려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얻음과 잃음을 하나로 알아, 재물과 명성이 찾아 오면 기꺼이 수용하여 옳게 쓰고, 떠나가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편하게 두어 제 본성대로 살게 하여 정신을 어지럽히지 아니할 뿐이다.

원글 출처 - http://www.dodam.org/ko/tao/understanding/i_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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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5-1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서재에 들렀다가 "참나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라는 말에 느낀 바 있어 예전에 갈무리해둔 거 올려본다.

반딧불,, 2004-05-14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네요...참 좋지요??
나를 죽이는 것...그 죽인다는 것에도 이미 나는 있는 것을...

밀키웨이 2004-05-1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각시, 제가요. 불교신자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 읽으면 참 좋더라구요 ^^
종교성을 떠나서보면 다 좋은 이야기이고 다 옳은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반딧불,, 2004-05-1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저도 성경도 좋아하고
성경이 없이는 어떤 서양사도 이해할 수 없음을 동의합니다.
당연하지요..
어떠한 경전이든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지도 않겠지요.

밀키웨이 2004-05-1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난 김에 그전에 성경이 어저구 저쩌구 한 글 어디 쳐박아놨는지 찾아다 올려놔야쥐~~ 룰루루~~~
ㅋㅋㅋ
알라딘 생기니 좋네요.
그전에 쓰고 쳐박은 글 다시 다 꺼내서 손보는 재미도 각별 ^^

반딧불,, 2004-05-1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그 글들 어디에 저장하는 겁니까??
멜에 저장하시는 건지...아니면...
아..제가 영 갈무리를 못하는지라 여쭤봅니다.
전 백프로 없어지거든요^^;;(사실 남길 만치 좋은 글도 아니지만서도)

밀키웨이 2004-05-1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거의 대부분의 긴 글들은 한글프로그램에서 작성하거든요.
그러니 어딘가 컴을 뒤져보면 흔적이 있더라구요.
이번에도 포맷을 새로 하면서 다 날라간 줄 알았는데 포맷하시는 분이 따로 저장해놓으셨더군요. E 드라이브에다가요.
가끔씩은 옛날에 내가 무슨 생각으로 글을 썼던고..그런 생각이 나서 뒤져보면 재미있지 않던가요? ^^
 
할아버지의 천사 비룡소 걸작선 56
유타 바우어 글 그림,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짜로 이런 수호천사가 내게 있다면? 내 고민을 다 알고 있고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한번 휙 읽었을때는 수호천사로 인해 할아버지의 삶이 곤고한 날들 중에서도 좀더 편했겠구나...했는데 다시 한번 더 읽어보니 수호천사로 하여금 할아버지를 끝까지 지켜주게 만든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것이 멋진 삶이었다고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그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그 일생 속에는 근대 독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멀리 있는 학교를 가는 길이 비포장인지라 커다란 웅덩이가 있기도 하고 가슴에 별을 달고 구별되어지다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유태인 친구, 전쟁과 배고픔에 시달리기도 하고 정해진 직업이 없이 걸인의 생활까지도 해보어았던 할아버지.

담담하게 들려주는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난 멋진 인생을 살았단다....난 정말 운이 좋았단다"로 맺고 있다. 그래...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이고 그렇게 삶은 환하고 따뜻하고 멋진 것이겠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에게 힘들고 어렵고 마냥 행복하지만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을 돌아보는 시기가 왔을 때  "난 멋진 인생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왜 내 인생은 이랬을까... 그때 이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이고....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놈만 아니었으면 진짜로 내가......등등등... 이런 후회로 점철되지 않기를 바란다. 늘 비관하는 사람은 끝내 비관하면서 죽게 되고 늘 낙관적이었던 사람은 죽음 조차도 낙관적으로 기다릴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내 죽음을 맞이하는 얼굴도 달라지겠지.

수호천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그동안 내가 더 많이 당하고 더 많이 상심하고 더 많이 힘들 수 있었는데 수호천사가 있어서 그래도 이만큼밖에 안 당하고 상심하다가도 금방 일어설 수 있었고 그만큼만 힘들었던 거였다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더 많이 힘들 수 있는 것을 수호천사 덕분에 내가 이길만큼만 힘들 것이고 또 나는 금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좀더 편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나님은 감당할만큼의 시험만 주신다고 하시니 말이다. 내가 희망을 품고 사는 만큼 수호천사의 힘도 강력하지 않을까? 

병원 침대 밑에 놓여진 소변통이며 출산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새밀하게 그려넣은 유타 바우어의 수호천사는 마냥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함도 치고 삐지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는 친근한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흐흐흐~~ 이런 천사라면 나이들어서 치매예방을 위해 같이 맞고도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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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는 말에 잔뜩 묻어나오는 것은 정겨움...따스함... 그리움... 그런 것일게다. 그런데 난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 두분이 모두 돌아가신 상태였기에 할머니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갖고 살았었다.

결혼을 하니 시댁에는 시골에 아직도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다. 이야기 속에서나 텔레비젼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시할머니를 상상했다. 하얀 머리에 조그마한 체구, 바지런하시고 정갈하신 모습, 손주며느리가 이뻐서 주섬주섬 밤이며 곶감같은 것을 챙겨주시는 그런 할머니.

그런데 이게 왠일... 명절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시골에 내려갔다 -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께서는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하시고 할아버지만 올라오셨었다. 할아버지는 정말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 정겨운 우리네의 바로 그 할아버지셨다. 그러기에 난 할머니에 대해서도 추호의 의심의 여지없이 달뜬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내려갔다. 그런데....허걱!

할머니의 첫인상은 너무너무 무섭다였다. 크지 않은 키에 실이 찌신데다가 목소리도 이상하시고 눈이 어딘가 불편하신지 약간 사팔뜨기처럼 보여 정말 엄마야...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할머니라고 하면 자신보다는 자손들 챙기시느라 늘 마음이 분주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할머니는 자식들이고 손주고 안중에 없으시고 그저 당신이 최고..셨다.  내가 낳은 아이가 당신의 증손자이신데도 이뻐라...이리 와봐라...뭐 그런 말씀 하나 없으시고 애가 점점 자라면서 시골집을 천방지축 뛰어나니자 정신없다고..애가 왜 저런대니? 자꾸 이런 말씀만 하시는 것이다. 뭐..내 애들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당신의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셨다고 시어머니께서는 원래 그러니 이해하라고 하셨지만.

시골에 가는게 점점 고역이 되었다. 7형제 중 둘째네의 며느리인지라 작은 어머니들도 많이 계셔서 시골에 내려가면 딱히 할일도 없고 어디서 무얼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다가 노상 내 아이들이 정신없다고 구박(?)하시는 할머니께 정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다가 시아버지는 왜그리 뭔가 내세우길 좋아하시는지.

시골에 내려갈 적마다 나한테 뭔가 따로 음식을 장만하라고 준비를 시키셨다. 시어머니는 가게를 하셔서 못내려가실 때가 많아 며느리인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아니, 솔직한 말로 작은어머니들도 안해오시는데 왜 손주며느리인 내가 해가야 한단 말인지... 더구나 왜 그런 걸 남자가 일일히 챙기고 살피려 드는지...꼼꼼한 시아버지는 내 숨통이 턱턱 막히게 할 때도 참 많다.

하여간..그랬던 분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양치기 소년마냥 위독! 위중! 준비하라! 이런 말을 들으며 넉달을 보내셨는데 이번엔 진짜였다. 하긴..결혼해서부터 할머니는 늘 올해를 넘기실 수 있을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오래 사시긴 오래 사셨다고 할 수 있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심으로 해서 그 긴긴세월을 오로지 할머니 병수발을 하시느라 보내신 할아버지께서도 이제 당신만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시골에 갔다가 올라올 때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 당신의 그 허허로운 삶이 너무 안스럽고 그 골진 얼굴이 너무나 풍상스러워서 말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또 말씀하시길 "저 양반, 할머니 돌아가시면 바로 따라가실 거야. 그동안 지탱해온 건 할머니를 누가 돌보나 그것 때문이었는데 할머니 가시면 저 양반도 중심을 잃어서 바로 가실거야"라고 하신다.

여러가지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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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5-1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하나요??
조금 시원섭섭하시겠어요....하지만....주위에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진다는건 뭐라고 말로 표현할수없는 공허함이 생기리라 생각합니다....그리고...난자리는 안다고...사람이 있을땐 모르겠지만....없을때 꼭 그사람이 생각이 나더군요!....아마도 시할머님의 살아생전 모습이 가끔은 님의 머릿속을 왔다,갔다할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은 스트레스를 덜 받으시겠군요!!....시댁어른들이 넘 깐깐하시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죠!!......그나저나....시할아버님의 건강이 좀 염려되네요!!....과부는 그래도 오래살수 있지만....홀아비는~~~~ㅡ.ㅡ;;.....님의 마음이 정말 싱숭생숭하시겠습니다....ㅠ.ㅠ

반딧불,, 2004-05-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시골 가시는 길인가요??
뭐라 표현하기가 힘드시리라 느껴집니다..
내 피붙이 돌아가시는 것하곤 또 다른 것이 시댁식구들이더군요..

모르겠습니다..아직까지 ...아이들이 귀찮다니 정신없다니 하는 분은 울 시아비지 빼곤 안계시니까...그래도 많이 예뻐해주시거든요..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제 열 살 생일에 돌아가셨지요..그 전 날 밤도 같이 잤었답니다..
편하게 돌아가셨고..임종 즈음때 저를 배려하느라...밖으로 내보내셨었지요..
그때 받았던 상처가..그때 받았던 황망함이 쉬 가시지 않는데...
어른들은 누구도 모르더라구요...장례준비에 바빠서...아마 그때부터 제 속으로 많이 파고들었던 느낌이 있습니다...고인의 명복을 빌구요..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이리 서글플까요??

물만두 2004-05-1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연엉가 2004-05-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명복을 빕니다.

밀키웨이 2004-05-13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맙습니다.
때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경조사에까지 인사를 해야 하는 인터넷...
제가 해야 할때는 가끔씩은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리 인사를 받으니 마음이 정말 훈훈해지네요.

비가 많이 와서 이래저래 생각도 덩달아 많았습니다.
제가 할머니께는 정이 많이 들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친할아버지마냥 그렇게 정이 들었거든요...
계속 서성거리시는 할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많이 슬펐습니다.
앞으로 시골집에서 어찌 혼자 지내실꼬...해서 더 그랬지요.

아직 제 두 아들녀석이 어리다 보니 이번에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내일이 발인인데 안가도 된다고. 오늘도 일찍 집에 가라고 해서 일찍 왔거든요.
비가 많이 내려서 산길이 장난이 아닐텐데...싶어 걱정이 되네요.
 

왜 스승의 날 선물을 하냐구요?
그렇게 물으신다면....깨갱~~ 할말이 없습니다.
걍..남들도 다 하고  스승의 날이기도 하고
제 아들내미가 가르치기에 쉬운 놈도 아니므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도 있고...하여간...그렇습니다...;;

그래서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이쁘고 정성이 가득한 것으로 고민고민을 했었더랬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동화를 준비했다가 왠지...좀 그래서..
솔직히 가격이 5000원인게 좀 걸려서라는 속물입니다요..-_-;;;

하여간 그래서 다시 준비한게 요거이옵니다.
이건 정말 제가 선물해서 퇴짜 맞아본 적 없는 겁니다. (하긴...싫어도 선물인데 뭐..싫다고 하겠습니까만은 ...;;;)

일명 명화가 그려진 컵받침.
세잔, 르노와르, 고흐, 모네, 무샤 등등등 이들의 그림이 그려진 컵받침 어떻습니까?
가격은 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진 받침 여섯개가 한세트로 일만 삼천원.

구경들 하소서.


로트렉


르노와르


세잔


무샤


모네 A

모네 B


고흐 A


고흐 B


드가 A


드가 B



예전에 제가 좀 우아하게 살던 시절...(애 없이 잠깐 신랑이랑 둘이만 살던 시절)
고흐 A세트를 현관 문에 조로록 액자처럼 걸어놓고 살았더랬지요.
뒤에 고리 만들어 실리콘으로 고정시켜서요.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한테는 모네의 컵받침을 내어서 차 대접하고 그랬었는디...ㅠㅠ
지금은 걍 머그잔에다가 아무렇게나 내어줍니다.


정사각형이고 크기는 지금 자가 없어서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팀버 8은물의 제일 큰 막대(이게 10cm던가요? 팀버의 것은 12.5cm짜리가 없으니 10cm가 맞죠?)보다 약간 작습니다.  
테두리는 금테가 둘러있고 뒷면은 코르크처럼 보이지만 맨질맨질하구요.

하여간 멋지고 특이하고 부티 팍팍 나지 않습니까? 흐흐흐

이 중에서 모네 A로 준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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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5-1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어디서 샀나요... 전 집에서 차 마시면서 아이들과 같이 그림보고 싶은디..

밀키웨이 2004-05-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29rental.com/shopping/goods.asp?cat_one=C&cat_two=E&cat_three=D

책울님, 여기입니다 ^^

밀키웨이 2004-05-1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러고 보니 타리님 오셨군요 ^^
ㅋㅋ 나무님 서재에서 방금 제 실수를 보고 왔습니다.
두글자로 줄이면 나무, 타리 요렇게 하면 된다는 말씀도 보고 왔구요.

정말로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