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서재에 들렀다.  

이쁜  작가와 경주에서 만나 사진을 죽도록 찍었는데 

내 평생에 기꺼이 모델이 되주기는 첨이었다, 라고 

쓰려는데 글쎄,

내 서재 <마이리뷰>란 본문글이 사라졌다!!!  

유명 알라디너가 아니니, 해킹 당했을리는 없고 

그냥 검은 바탕 설정이라 안 보이는 거겠지. 

좌우당간 덧글만 남아 더덩실 출렁이누나. 

컴맹인 나는 그저 기다려 보기로 한다. 

내일, 아니 담 번 들를 때까지는 살아나겠지. 

바탕화면을 알라딘에서 설정해준 대로 내비둬서 그런가? 

이래저래 컴맹은 배짱을 가장한 체념, 포기로 산다. 

실제로는 게을러빠진 게지... 

빨리 서재 글을 살리도, 알라딘아~  

 

 

라고, 쓰고 저장하고 돌아서니 우라질~ 

화면이 바뀌면서 죽은 글이 살아났도다.  

자정 넘어가나 보다. 하여간 검은 바탕은 싫단다, 알라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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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11-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컴에서 문제가 발생 했을 때 대처 방안이 저와 무척 비슷하신듯 하여서 말이죠. '이쁜 작가와 사진을 죽도록 찍은 시간'이라... 참 특별한 시간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별들이 늪으로 흩어질 때

                                   




  한 순간이었다. 커브 길을 지날 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마주 오던 버스의 속도감에 짓눌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올라갔다. 자갈 깔린 갓길에 닿은 바퀴는 순식간에 튕겨 올랐다. 제어불능 상태가 된 핸들은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맞은편에서 통근 버스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다음엔 트럭 차례였다. 노련한 트럭 운전수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내 차를 피해갔다. 속도를 줄였다면 도리어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승용차 한 대가 뒤이어 지날 때 나는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최종적으로 차가 닿은 곳은 빗물 가득한 하수통로였다. 외곽길이라 정비되지 않은 늪 같은 하수도로 차가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날 비가 와 노면은 미끄러웠고, 하수량은 불어나 있었다. 구십도 각도로 기울어진 운전석으로 물이 금세 들어찼다. 살려주세요. 분명히 소리쳤지만 차 유리에 부딪힌 절규는 가슴팍으로 되돌아와 꽂혔다. 밖으로 퍼지지 않는 말의 무용함이 칼날처럼 휘감겼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휴대전화기가 들어 있는 핸드백에 손을 뻗쳤지만 허사였다. 충격으로 꽉 조인 안전벨트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것이 죽음의 실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차 오디오 데크에서는 영어 이솝우화가 불라불라 흘러나왔다. 무심결에 듣던 유쾌한 테이프가 장송곡처럼 들렸다. 손만 닿을 수 있다면 구조 전화를 거는 것보다 저 테이프의 스톱 버튼을 먼저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일 먼저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아들의 뱃살마저 살갑게 다가왔다. 아들아, 미안하다. 네 살도 못 뺐는데 이렇게 엄마가 힘들어하는구나. 아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자괴감이 빠르게 스쳤다. 예쁘지만 공부에 전념하지 않는 딸내미 얼굴도 어른거렸다. 딸아, 공부 안 한다고 눈 내리깔고 얼음장 분위기 만들던 엄마를 용서해라. 무뚝뚝한 남편도 생각났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만 빼면 언제나 내 편인 남편 옆에서 마음껏 웃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제 맘껏 쓰지 못하고 언제나 용돈을 구걸하던 남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겨우 발바닥까지 물이 찼을 뿐인데 심리적으로는 목울대까지 압박감을 느꼈다. 왜 글을 쓰겠다고 자신을 괴롭혔는지 가슴이 아파왔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맛난 것 해주고, 남편 출근길에 마음껏 배웅해주는 다사로운 엄마나 마누라가 될 것을. 재능도 없는데 실한 엉덩이만 믿고 자판기 앞에서 끙끙댔다니. 비록 눈썰미는 얕으나 날선 통찰이 있으니 언젠가는 글이 되지 않을까 고군분투해온 자신이 가엾기만 했다. 밑줄 쳐가며 두 번째 읽던 김훈의 남한산성 분홍빛 표지도 떠올랐다. 소설가의 문장으로만 보기 아까운 김훈. 어느 평론가처럼 에세이스트나 문장가라 불리는 게 나을 얄미운 작가. 그에 대한 문체 분석도 덜 끝났는데 왜 나는 늪으로 가야만 하나? 내 볼품없는 문장에 회의하고, 작가가 될 마음조차 없는 세상의 완벽한 글쟁이들에게 느껴야 할 질투나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반짝이기를 기다리는 별들 - 아이들, 남편, 좋은 주변인 그리고 아쉽기만 한 글에 대한 내 열정. 아직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왜 별들은 늪으로 가야 하나? 나를 조롱하듯 이솝우화 테이프는 잘도 돌아갔다. 양치기 소년을 지나 서울쥐 시골쥐를 거쳐 떡갈나무와 갈대에 이르기까지 윙윙대는 이국의 목소리는 내 욕망의 부질없음을 끝없이 질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서 저 테이프 소리를 듣는다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다. 간신히 발로 낚아챈 가방에서 휴대 전화기를 찾았다. 위급할 때 일일이를 누르는 거지. 어처구니없이 허튼 버튼을 눌러대고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정 여럿이 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물이 안 깊어요. 이상하리만치 바깥 소리가 안으로 잘 들렸다. 구급대원들이 오기도 전에 출근하던 장정들이 수렁에서 차를 들어 올렸다. 창을 열고 물기 묻은 옷깃을 여미는데 창피했다. 아이 슈드 비 어쉐임드 옵 마이셀프! 부끄러운 게 많은 내가 기도처럼 외워둔 한마디가 절로 나왔다. 다친 데는 없어요? 누군가 물었다. 왜 다치지 않았겠어요. 마음을 다친 걸요. 내 무사함을 알리려 고개를 저으면서 나는 속울음을 삼켰다.    

 

  가끔, 커브 길에서 흩어진 별들은 늪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별이 소중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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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실점




  “김장 마늘 찌났다.(찌어 놓았다). 필요하면 가져가고 안 그라만 이웃들 나나(나줘) 주께.”  



  엄마의 전화 목소리. 김장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웬 김장 타령인가 싶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맘을 안다. 차례 지낸다는 핑계로 추석에 찾아 뵙지도 못한 딸년에게 엄마는 그렇게 미끼를 툭 던져 보는 것이다. 엄마 식 표현대로 살림에 ‘게실러빠진’ 나는 그 실용적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알았어요, 엄마. 박서방 하고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마늘 딴 사람 주지마.”  



  엄마식 자식 사랑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나는 짐짓 마늘이 아쉬운 척한다. 당신 손수 사서 까고 찧은 마늘이 엄마집 냉동실에서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팔순 엄마에겐 아직도 손 가야할 막내딸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효녀는 못 된다. 아쉬운 게 없으니 먼저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궁금한 엄마가 안부를 물어오면 그제야 내가 무심했구나, 하고 반성을 하는 정도이다. 오죽하면 엄마는 ‘니한테서는 전화 오는 기 더 걱정된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싶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는 말은 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에게 가는, 멀지도 않은 그 길을 선심 쓰듯 달려간다. ‘과부 할매들의 사랑방’이라고 내가 부르는 엄마집 마당에 들어서자 윷놀이를 즐기던 할머니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하신다. 주인집 사위가 들어서니 배려한다고 괜히 어려워들 하는 것이다.  



  친정집엔 엄마처럼 남편을 먼저 보낸 할머니들이 하루걸러 진을 친다. 주로 십 원짜리 윷놀이를 하는데 할머니들만의 노하우로 만든 싸리나무 윷가락은 좀 과장하자면 던졌다 하면 모나 윷이다. 엄마의 성당 동료들이기도 한 할머니들은 연령대도 다양한데 질리지도 않는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엄마의 사랑방을 찾는다.  



  이웃을 맞이하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단다. 그때 엄마는 이불집으로 피정하듯 떠난다.  그곳은 엄마만의 또 다른 사랑방이다. 자투리 천으로 베개와 쿠션과 조각보를 만들며 노동의 신성함을 즐기신다. 폐품 활용한 엄마만의 작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면 원앙금침을 얻은 듯 충만해진단다. 살뜰한 엄마의 작품들은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이 된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병원 입원은커녕 몸져누운 적조차 없었다. 언제나 강인했다. 약한 몫은 차라리 아버지 차지였다. 지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를 대신하자면 엄마는 더 강해지고 더 자식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미도 날이지만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고,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니 같이 사랑하실 이 없다’는 고려가요 사모곡은 딱 우리엄마를 두고 한 노래였다.   


  그런 엄마도 이제 몰라보게 쇠약해졌다. 그건 이번에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집 앞 방죽에 올랐다. 출렁다리를 건너 건너편 유원지까지 가서 저녁을 먹고 올 참이었다. 사위와 손자의 호위를 받으며 딸과 손잡고 걷는 것에 엄마는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숨이 차고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언제까지나 다부지고 강한 엄마일줄 알았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었던 것이다. 팔순 노구의 엄마를 철없게도 나는 여전히 건강한 엄마, 강한 엄마로 생각했던 것이다.  



  유원지 나들이를 포기하는 대신 가까이 있는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사한 식당에서 그럴듯한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는 쉬이 젓가락을 입에 대지 못하신다. 물컹한 해물을 사위와 손자와 딸년 접시에 옮기느라 바쁘다. 엄마에게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는 ‘밥’ 이상의 그 무엇임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무심하고 딱딱하기만 한 내 속내도 뭔가 물컹한 것으로 차오른다.   
 


   엄마의 마늘 보따리를 안고 귀갓길에 오른다. 사위가 마련한 용돈을 엄마는 손에 잡히는 만큼 뚝 떼서 ‘뚱가 과자값 해라’ 하시며 차안으로 던지신다. 그리곤 골목으로 물러나 꼼짝 않고 서 계신다. 딸년 탄 차가 멀어지도록 하염없이 그대로. 그 모습 돌아보기 힘들어 나는 창을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엄마, 빨리 들어가.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고!” 
 


  대답 대신 괜찮다는 엄마의 손사래만 차창 넘어 아롱진다. 매운 생을 돌아온 엄마 같은 마늘 냄새가 차안에 진동한다. 맵싸한 눈물이 자꾸 맺힌다. 어스름 속, 갈바람에 일렁이는 대추나무 아래서 엄마는 그렇게 한 점 소실점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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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0-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멀어져 소실점으로 남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엄마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한 자녀를 보면서 당신들은 보람과 행복을 느끼시겠죠...
우리 친정엄마도 작년 다르고 올 다르고...이제 늙고 기운이 쇠하여지는 모습 보는 거 힘들어요.ㅜㅜ

다크아이즈 2010-10-05 21:15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잘 계시는 님... 힘이 되는 바지런한 님.. 제 게으름을 이해해줄 것만 같은 순오기님.

글샘 2010-10-03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내 맘 편한대로... 그렇게 살고 있죠.

다크아이즈 2010-10-05 21:17   좋아요 0 | URL
글샘님은 효자시지요? 너무 효자라도 사모님이 곤란하겠지만... ㅎㅎ

꼼미 2010-10-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셔도 그립고 안계셔도 그리운게 엄마인 것 같죠. 그래도 건강히 곁에 계신 어머니가 있으신 님이 부러워요...^^

다크아이즈 2010-10-15 19:37   좋아요 0 | URL
앗, 꼼미님 언제 들어도 정겨운 이름.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나요?

꼼미 2010-10-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주말에 짧은 여행 다녀왔는데 제 개인 블로그에 사진을 몇장 올려 놓았죠. 팜므님도 특별한 가을 만드시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말고사 시험기간이다. 사위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단지 내 버스정류장에도 한낮의 적요만이 감돈다. 주말이면 간편 복장에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들 모습은 간 데가 없다. 지금 저들은 저마다 열공(?)의 동굴 하나 파서 들어앉은 게 분명하다.

  중3인 아들녀석도 예외는 아니다. 오롯이 주말을 시험공부 모드로 바꾸긴 한 것 같은데,  몸과 맘이 영 따로 논다. 십 분이 멀다하고 의자 뒤로 물리는 소리를 내더니 냉동실 문 열기에 바쁘다. 목이 탄다며 한입 가득 얼음을 털어 넣다 못해 숫제 냉장고로 들어갈 기세다. 유독 열 많고 땀 많은 체질이라 요즘 같은 여름이면 하루에 속옷을 두세 벌씩 적셔내긴 하지만, 이건 체질 문제라고 이해해주기엔 무리가 있다. 공부에 집중할 맘이 없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공부 잘 한다고 평판이 난 학생들의 엄마들이 전해주는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학생들의 공통적인 학습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자기절제, 자기주도, 자기확신이 그것이다. 그 학모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아들녀석을 대입시켜보면  맘에 차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절제 부분부터 보자. 주말 오락프로그램을 본다 치자. 자기절제심이 강한 그들은 스스로가 정한 시청 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단다. 애처로워 보여 다 보고 공부해도 된다고 엄마가 권해도 좀체 흔들리지 않는단다. 정말로 그럴까 싶어 신기하고 부럽기만 하다. 아들녀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박이일’을 다 보고도 엉덩이가 무거워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십 분만 더 보고 일어난다고 약속한 것이 한 시간이 되기 일쑤다. 자기절제 같은 고상한 트레이닝은 너무 멀리 가 있다.   

  그 다음, 자기주도 학습 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런 태도를 제대로 심어주지 못한 건 엄마인 내 탓이 크다. 녀석이 중학생이 된 뒤에도 나는 없는 시간을 짜내서라도 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빨간색연필을 들고 있었다. 요령부득인 아들을 도와주고 싶었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그것보단 엄마로서의 욕심이 앞섰으리라. 일이년 매달려 같이 용쓰다 보니 내가 먼저 제 풀에 나가떨어지게 생겼다. 체력, 지력 다 한계를 느낀 상태에서 어느 날 문득,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자괴감만 일었다. 공부 모범생 학모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나야말로 녀석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망친 주범이 아닌가. 진짜 공부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만의 스타일과 방법을 터득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게 온전한 방식이고 백 번 옳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로서의 내가 보인다. 천하태평, 낙천적인 녀석의 방식 옆에서 아직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엄마인 내 몫이다. 그래도 색연필 들고 동그라미와 사선 긋기를 열심히 해대던 시간을 벗어난 것만 해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자기확신(자기욕심)이야말로 공부 모범생의 지름길이란다. 과외를 해야 하지 않을까, 무슨 과목이 부족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에게 공부 모범생들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믿어보라’고 확신을 준단다. 자신의 역량을 알고 나아갈 길에 대한 기대치가 있으니 그걸 자신감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녀석은 한 번도 스스로 뭘 해보겠다고 욕심을 내지도, 꼭 뭔가를 이뤄야겠다고 확신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십 분이 멀다하고 냉장고 문만 열어젖힌다. 각 얼음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가 싶으면 공부 다 했다고 책을 접고 나온다. 세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어도 삼십 분처럼 느껴진다는 공부 모범생의 길은 정녕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 지켜보며 속 타는 엄마야말로 각얼음이 필요할 지경이다. 열불 돋은 나도 아들 몰래 얼음조각을 집어 든다. 얼음 한 입 물고 냉정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모범엄마를 향한 지름길이겠지만 그런 현명한 결론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얼음은 너무 차고, 현실은 여전히 후텁지근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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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2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동병상련!
우리 아들도 이하동문입니다.ㅜㅜ
하지만 나는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노심초사하지는 않아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11   좋아요 0 | URL
언제쯤 맘 비우기가 될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노심초사하는 중입니다.ㅎㅎ 여전히 잘 계시지요?

꼼미 2010-07-2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니 글이 잔뜩 올라 있네요.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맘 참, 겪지 않으면 절대 모를 일이지요. '자식을 키우는 일이 바로 도를 닦는 일이다'라는게 제 생각^^

다크아이즈 2010-07-23 18:25   좋아요 0 | URL
도 닦느라 서재질도 제대로 못한답니다. 꼼미님과 저의 공통점이라면 바람처럼 스치듯 서재 행차 한다는 것? ㅎㅎ 여전히 잘 계시리라 믿으며...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
윤석홍 지음 / 산악문화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따끈한 시집을 선물 받았다. 윤석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을 낸지 십여 년 만이란다.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된 시집 제목은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산악문화, 2010)이다. 남산에 그렇게 많은 골짜기가 있다는 걸 시인의 시집을 통해 알았다. 남산에 대한 내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시편이 나는 미덥다. 산이 좋아 골골마다 행장 꾸리고 나섰을 시인의 모습이 시집과 오버랩 된다.

  아직 몇 편 밖에 못 읽었지만 그래도 리뷰 쓰고 싶은 욕심에 덜컥 연필을 들었다. 이런 시는 한꺼번에 몰아 읽어서는 안 된다. 숨겨 논 추파춥스를 혀끝으로 녹여먹듯 야금야금 읽어야 제격이다. 리뷰 제목 ‘시 한 편 건졌다’는 시인의 시 한 구절에서 따왔다. ‘비석대골’ (87쪽) 마지막 행에서 빌렸음을 밝힌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시를 발견하면 긴 글에서 맛볼 수 없는 야릇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시의 변방을 기웃거린다. 짓는 자가 아닌 읽는 자로서의 그 서성거림이 언제나 즐겁다. 세상에 시인은 많고, 좋은 시 또한 지천이니 입맛 따라 시를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윤석홍 시인의 시보다 그 인품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시보다 더 시적인 그 행보를 좇다보면 머리에 푸른 잎 돋고 이 봄날은 마냥 계속될 것만 같다. 산을 좋아하는 그의 생에 대한 눈썰미는 산에서 완성된다. ‘나비의 겹눈은 명확한 상을 버리는 대신 / 세밀한 움직임을 얻는다 했지요 /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는 봄날 / 거짓 없는 진행형을 봅니다 /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봄날도 진짜입니다’ (43쪽)라고 시인은 남산 정우골에서 읊조린다. 나비의 겹눈으로 보이는, 혼곤히 흔들리는 봄날마저 세밀하게 보면 진짜 봄날인 게다. 시인의 눈에만 이런 발견이 쉽게 친구 되는 것 같아 질투가 날 정도이다.

  몇 년 전 시인의 소식을 한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일 년 간 모아온 원고료 전액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당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큰 돈 아닌 원고료를 차곡차곡 모은 것도, 그것을 좋은 일에 쓰려고 맘먹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이 존경스러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발표하는 시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덕이 쌓이고 / 시간이 흐를수록 / 영혼이 맑아진다면 / 어느 날엔 깨달음의 / 소리도 들리’(37쪽)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이 내는 소리다. 시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다만 시가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고 있 것이다. 

  잠깐의 산행에서도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사람을 아끼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비옷이나 사탕을 나눠 주는 것은 당연하고, 산을 좋아한 나머지 널브러진 쓰레기와 빈 깡통을 줍는 것은 취미가 되어버릴 정도이다. 언젠가부터 시인의 기부 선행을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심한지 몇 년 만에 드디어 나도 시인의 흉내를 내볼 수 있었다. 내가 봉사하는 교도소의 회원들에게 일정 금액의 영치금을 넣은 것이다. 열세 명의 회원들에게, 내가 일 년 간 노동해서 번 돈의 일정 퍼센트를 기부했다. 그런 기특한 짓을 하고 가장 먼저 자랑한 사람은 물론 윤석홍 시인이었다. 착한 사람에게 착한 일 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만큼 기쁜 것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 / 이 환장한 봄밤’ (86쪽)을 가끔씩 맛볼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윤석홍 시인 같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 덕분이다. 착한 사람들은 덜 착한 나 같은 사람을 깨쳐줄 의무가 있다. 그것도 한 편의 시를 통해서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몇 번이고 돌아가야 하는 길 대신 / 사방에 길을 내어 빠르게 오른다면 / 우린 우리의 길을 잊을지 모른다 / 그 길에 두고 온 / 마음 한 자락마저 잃’ (92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래 묵혀가며 그의 시집을 들춰볼 것이다. 몸살 앓는 봄밤에 끙끙대면서도 이 글을 달갑게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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