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사람은 몸으로 말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그 주제와 맞닥뜨렸다. 평소대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많이 남았다. 내 오전 스케줄은 주로 열시에 시작한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 생활이든 대개 그래왔다. 주부들이 짬을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전이 그 시간일 것이다. 한데 오늘은 열시 반에 약속이 잡힌 날이다. 젊은 엄마들은 아이 유치원 보내고, 집안 치우고 나면 그 시간이 되어야 모일 수 있다고 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내심 열시를 기대했던 스스로가 머쓱하고 미안했다. 오래 길들여진 내 생활 패턴일 뿐인데 그게 가장 합리적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이래서 역지사지가 필요한 거다.

 

 

 

 

  시간을 쪼개가며 바지런 떠는 형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스텐바이 된 상태의 비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침 화장실에 남편이 보던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지겨운 자기 개발서라니! 하면서 아무 데나 펼쳤다. 맘에 쏙 드는 구절이 나온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란다. '메라비언은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라는 사실을 발견한 심리학자다.(중략) 이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말의 내용보다 그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요소가 93%의 영향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마음으로 리드하라 』-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127쪽)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열심히 수다를 떤다. 이름하여 건전한 책 수다. 눈빛이 형형한 한 멤버 차례가 되었다. 그미는 눈동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단다. (그 때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미는 사람을 볼 때 눈동자를 눈여겨본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 그어 온 부분을 성심껏 읽어 주었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신뢰를 잃은 아이의 탁해진 눈빛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환경에 따라 순한 사람의 눈망울이 얼마든지 살기 서린 눈빛으로 변할 수 있다. 이 안타까운 장면이 계기가 되어 그미는 사람의 눈동자에 대해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면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다. 백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통박(?)으로 알 수 있다나.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읽은 메라비언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메라비언과 같은 결론을 숱하게 내렸다. 사람은 혀가 아니라 몸으로 말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모 작가는 눈빛이 참 불편하다.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화면 속에 비치는 그의 눈빛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하다. 대담이나 인터뷰일 경우 자연스러운 화면을 위해 카메라를 주시할 필요는 없는데, 그 때문인지 작가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될지 몰라 눈치를 보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인터뷰어가 여성일 경우, 옆으로 훔쳐보는 듯한 그 부자연스런 눈길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화면 속으로 들어가 시선을 적당한 어딘가에 고정시켜 주고 싶을 정도다. 어여쁜 인터뷰어나 아나운서를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쳐다보는 연습을 시켜드리고 싶은 것이다. 옆 눈길로 자꾸만 훔쳐보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작가가 특정 미인에게(어쩌면 여성 전반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작가의 불편한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미인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작가의 고지식한 성정 탓이라면 귀엽게 봐줄 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상대와 시선을 맞추는 연습을 하라고 주변인이 조언 좀 해줬으면 좋겠다. 자고로 사람은 몸으로 말하고, 특히 그 몸 중 눈빛의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을 터인데 삐딱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모양새는 신뢰감을 반감 시킨다. 아무리 좋게 봐줘서 쑥스러움 때문이라 하더라도.

 

 

 

  상대와 자연스레 눈길을 맞추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숫기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가정 방문 오신 선생님을, 놀러 온 오빠 친구를, 잘 생긴 이종사촌 오빠를 당당하게 쳐다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사람을 키우는지 지금은 그런 울렁증이 없어졌다. (시간의 때가 묻은 거겠지.) 아직도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지만 될 수 있으면 상대방과 눈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몸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 언어 매너가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울 게 많다. 동의를 구하는 상대에게 리액션으로 장단 맞춰주기, 기발한 아이디어나 조언 요구에 필터링해주기, 진정성 밴 눈빛으로 동정을 호소하면 더한 연민의 눈빛으로 화답하기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상대방도 그 정도가 적당해야 나의 몸 언어도 좋은 쪽으로 발동하게 되는 거다. 뭐든 지나치면 거부 반응이 이니까.

 

 

 

  어쨌거나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말을 한다니 말 조심 뿐만 아니라 몸 조심도 해야 겠다. 좋은 언어 습관도 연습이 필요하듯 몸으로 하는 말도 갈고 닦아야 한다. 우선 부정의 몸 언어부터 버릴 일이다. 혀에 든 욕보다 눈에 든 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일견 고고해 보이는 리액션 없는 무표정에는 탄력 있는 입 꼬리를 덧 올려보자. 타인의 약점을 못견뎌하는 냉소적인 눈빛에는 힘을 조금만 덜고 눈두덩이부터 웃어 보자. 찌들고 탁한 눈동자를 갈고 닦는 데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이 곁에 있다면 한결 도움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쉽게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니 주변에서 그 모델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내 탁한 눈빛과 이지러진 표정을 맑고 밝게 해줄 멘토를 찾아 길을 나선다. 그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도처에 있을 것을 기약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뱀, 너무 길다

 

 

  창 너머, 겨울비 추적추적 내린다. 한낮인데도 잿빛 기운에 겨운 자동차들은 미등을 켠 채 빗속 행렬을 잇는다. 저 질척거림 속 역동의 파노라마가 주는 청각 이미지도 만만찮을 터인데 실내는 조용하기만 하다. 빗소리나 자동차 소음 심지어 작은 바람결조차 새어 들지 않는다. 날로 진화하는 창호 시스템 기술 덕에 방음 효과를 톡톡히 보는 셈이다. 태초에 소리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듯, 저 모순되게 펼쳐지는 적요의 파노라마가 신기하기만 하다. 뮤트 상태에서 아주 역동적인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천식 기침과 만성 비염후유증으로 청력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소리 없는 풍경으로만 스치는 저 ‘부산한 고요’를 맘껏 즐겨본다.

 

 

  따뜻한 물 한 잔으로 기침을 누그러뜨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독서 모임 아이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책 좋아하던 실학자 이덕무는 ‘기침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읽지 못할 정도로 내 목은 뻑뻑해져있으니 그 말도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기침은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따라다닐 성가신 친구가 되어 버렸다. 며칠 새 컨디션은 더 나빠져 입술마저 부르텄다. 그래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기로 했으니 기운을 내본다. 머리며 어깨에 내려앉은 겨울비를 털어내며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다.

 

 

  시에 관한 책 토론답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나 책에 대해서 말문을 트기로 한다. 맏언니 같은 세온이는 론다 번의 『시크릿』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단다. ‘좋은 생각은 모두 강력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약하다고 우주에 선언하라’는 구절이 맘에 들어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나. 어라차, 시작부터 오늘 토론 주제의 중심부에 가 닿는구나. 정민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패랭이꽃>을 지은 정습명과 <시골집의 눈 오는 밤>을 노래한 최해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패랭이처럼 작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리라는 긍정의 삶을 노래한 정습명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삶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우울한 자화상을 읊은 최해는 불우한 생을 살았다. 긍정은 명랑을 낳고 부정은 비애를 낳느니라. 선현의 예를 들어, 긍정의 미학을 강조한 작가의 의도를 학생들이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귀여운 상연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들먹인다. 두꺼운 책이지만 맘 내키는 대로 아무 쪽이나 펼쳐도 건질만한 게 나온다나. 중학생의 감수성을 기왕에 잃어버린 나는 그런가, 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작가의 기발함, 창의력을 너무 기대했기에 실망 또한 큰 책 중에 하나였다.

식성이 까다롭고 말이 없는 기훈이는 의외로 『정의란 무엇인가』 읽기를 시도했단다.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말해주지 않는 그 철학 입문서를 중학생이 읽기엔 벅찼을 것이다. 우려한 대로 읽기 유보 중이란다. 중도 포기가 아니니 다행인가.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 것은 분명하지만 팔린 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문형 제목에 명쾌한 답을 얻고자 책 나무에 오른 독자라면 정의의 수많은 곁가지에 매달려 허우적대다 끝내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수현이의 얘기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긴 책에 대해 말할 때 수현이는 대뜸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 선생님께 들은 시 한 편이 너무 강렬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 다.”

  도대체 얼마나 감명 깊었길래?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녀석의 뒷말을 기다렸다.

  “프랑스 작가라고 들었는데 제목은 뱀이고 내용은 ‘뱀은 길다’라는 한 줄 시입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오늘 소주제 중에 정민 선생이 말한 <시는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한다, 다 말하면 안 되고 숨겨야 한다, 설명하는 대신 깨닫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수현이가 말한 ‘뱀은 길다’ 라는 시구는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가? 시를 아는 작가라면 저렇게 직접적인 문장으로 한 줄 시를 썼을 리가 없지. 의문을 가진 채 검색을 해본다.

 

 

  내 예상이 맞다. 『 홍당무 』의 작가 쥘 르나르가 쓴 <뱀>이란 시의 정확한 표현은 ‘뱀은 길다’가 아니라 ‘뱀, 너무 길다’였다. 그럼 그렇지. ‘뱀은 길다’ 와 ‘뱀, 너무 길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민 선생 식이라면 ‘뱀은 길다’는 시가 되기 어렵지만 ‘뱀, 너무 길다’는 차고 넘치는 시적 은유가 아니던가. 돌려서 말해야 하고, 숨길수록 좋고, 깨닫게 해야 하는 시의 속성 앞에 ‘뱀, 너무 길다’라는 이 한 마디보다 더 나은 촌철살인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 기관 직원들을 상대로 독서토론을 진행한다. 도서 구입 담당 직원이 몇 백 권은 족히 되는, 비교적 신간 도서목록을 전해준다. 토론할 도서를 정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주욱 훑어 보니 인문 교양 문학 쪽보다 자기개발, 건강, 에세이 등이 더 많아 보인다. 자기 개발서는 인문, 역사 쪽을 읽다 보면 절로 감이 생길 것 같은 환상 때문에, 또는 개인적으로 직장이 없는 관계로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반강제적으로 읽는 남편의 책들이 그런 쪽이기 때문에 볼 기회가 있는데, 그게 저거고 저게 그거인 것처럼 내용들이 비슷해 뵌다. 내가 절실하지 않으니 별 흥미가 없다. 건강 쪽은 꼭 챙겨봐야 할 책이긴 한데, 질병 컴플렉스가 심한 나는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비겁함으로(얼마나 그쪽으론 자신 없고 비관적인지!) 두려운 나머지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어쨌거나 그 분의 목록이 정말로 감사했으므로 그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책을 몇 권 골랐다. 그 중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이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다. 장정일 마니아까지는 아니지만 그가 쓴 독서일기라면 사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소설가일 때보다 서평가일 때가 더 신뢰가 가는 인물이다. 읽지 않고 책을 평하는 사람 이야기도 이 책 안에 나오는데, 나도 굳이 말하자면 그의 소설에 대해선  읽지 않으면서도 왠지 손이 안 가는 쪽이다. (미안도 하여라! 하지만 많이 좋아하는 작가니 미워하지 마시라, 작가여.)

 

  계획표를 짜면서 느긋하니 4월 말에 이 책을 집어 넣었다. 내가 먼저 읽고 작가가 권하는 책이라면 수업 시간에 덤으로 그 책도 소개할 요량으로. 직장 있는 회원들이라 책 읽는 게 마음만 앞선 분들이 많다. 해서 주당 한 권은 무리라면서 대부분의 책을 두 주에 걸쳐 토론하기를 원한다. 이름하여 선토론 후독서라고 이름지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 다이제스트와 맥 집기를 진행자인 내가 해주면 그들이 다음 시간까지 최대한 읽어와 토론하는 방식이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하는' 분위기이기에 나는 최대한 그들의 조력자가 되어 보기로 한다. 부디 그들이 업무에 시달리지 않고 책 읽기 도전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

 

  잡학다식한 독서광답게 장정일의 이번 독서일기도 흥미진진하다. 여담이긴 하지만, 방금 읽으면서 안 사실인데 난 그가 애독가이긴 하되 책 수집가는 아닌 줄 알았다. 한데 지금 그런 내 생각이 아리까리해진다.

 

  그는 확실히 애서광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벤야민이 작성했을지도 모를 애서광이자 수집가 설문지 31개 항목 중 0표 칠 것이 반도 안 된다.) 그럼 애서광이면 수집가이기도 한 것일까? 단언컨대 작가가 대답하진 않았지만 절대 수집가는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집가가 책을 읽게 되면 모을 수가 없을 테니까. 수집가는 책의 최대 기능인 독서로서 모으는 게 아니라 운명의 무대를 만나는 것처럼 책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지 그것의 실용성에는 무덜 관심을 둘 테니. 이를 테면 비싼 도자기에 밥 퍼먹고, 술 따라 먹으려고 도자기를 소유하려는 게 아닌 것처럼 수집가들 역시 밑줄 긋고, 접어 가며 제 머리 속에 지혜를 담으려 책을 수집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수집 자체가 예술적 허영 쯤으로 허용된다면 말이 될까?  그러니 애서광이자 수집가 확인용  31개 테스트 항목에서 그가 네 개만 x표를 했다고 해서 곧장 수집가의 대열에 세울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애서광이되 수집가와는 멀어야지만 영원히 독서 일기를 쓸 수 있을 테니까.

 

  각설하고 당신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테스트할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다면 이 책을 사서 읽으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먼 길

 

  참 오랜 만이다.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이 경우 '나만의 시간'이란 모니터 앞에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단 한 줄의 글이라도 건지기 위해 의자에 앉는다.  게으름을 물리치고 발딱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글 좀 쓰고 싶다는 욕구는 매번 내 안의 악마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기 일쑤였다. 쓰고 싶다는 열망과 쓰는 행위의 간극은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처럼 깊고 아득하기만 했다. 어느 작가가 말했단다. 침대에서 일어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라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겨운지를 말해준다. 절로 공감한다.  

 

  평생의 과업처럼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치면서도 정작 진득하니 엉덩이 붙이고 쓰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으름 탓이다. 그 어떤 면죄부도 얻을 수 없는 명백한 자기 발전의 적 게으름. 그걸 잘 알면서도 넘어서지 못하고 핑계거리만 찾았다. 백수과로사한다는 시쳇말처럼 속으로 온갖 바쁜 척을 해댔다. 생활인으로서 품위유지비도 벌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책임감도 완수해야 하고, 주부로서 집안일도 건사하는 척은 해야 하고. 변명조차 되지 않는 이런 핑계들은 내 박약한 의지의 이음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습관이 성패의 반을 좌우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쓰는 습관에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았다. 꾸준히 쓰는 것이 내게 정착되지 않은 것은 뒤집어 말하면 내 글쓰기 욕구가 그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위안처럼 시작한 글쓰기가 작은 별, 아니 숨은 별 하나라도 되어 반짝이게 하지는 못할 망정 욕망의 덩어리로 나를 짓누르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이지. 절절한 욕구는 순정한 목표를 낳고, 그 목표는 좋은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은 좋은 결실을 맺는다. 

 

  새해다. 새로운 결심처럼 내 안의 허영덩어리 하나 해처럼 불쑥 솟는다. 실은  새로울 것도 없는 그 덩어리가 내 몸이, 내 맘이 원하는 절절한 쓰기의 실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글 쓰는 책상까지의 거리가 가장 먼 길이 아니라 조금은 가까운 길이 되길 바라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꼼미 2012-01-20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제 게으름을 함께 채찍질 해주신 팜므님. 어찌 감사하다는 말로 다 표현 하겠어요. 기억해 주신것만으로도 새해 큰 선물. 페이스북과 블로그질에 서재는 멀리하고 있지만, 새해 맞으면서 팜므님과 똑같은 마음이었네요. 매일 매일 영문 책 한 권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중이지요. 필사 하면서^^; 위의 글 잘 읽고, 반갑게 나누고 갑니다. 혹시나 하고 블로그 주소 살짝 놓고 갑니다. 팜므님 서재 자주 들릴께요~ 글 열심히 쓰셔요~
 

 

만찬




  오늘 하루는 파란만장했다. 시험장으로 가야 하는 아들은 새벽부터 분주했고, 그런 아들을 태워줘야 하는 남편은 덩달아 바빴다. 나는 내 볼 일을 보고 오후에 합류하기로 했고, 딸은 나머지 세 식구를 기다리며 기숙사에서 대기 중이었다. 

  한나절 이별 뒤, 짜릿한 만남을 상상하면서 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린다. 남편이다. 그새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구나, 라고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일은 있을 리 없고, 준비물 중 하나를 아들녀석이 빠뜨리고 갔단다.

  칠칠치 못한 데다, 건망증마저 심한 엄마이자 아내를 둔 탓에, 나머지 세 식구는 ‘뭔가를 챙겨야 하는 주부’로서의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해서 다들 알아서 제 것을 챙기는 편이다. 하지만 덜렁대기가 제 엄마 저리가라, 격인 아들녀석은 가끔 그런 실수를 한다. 보통 집 같으면 엄마가 몇 번이라도 점검하고 확인할 만한 상황이이지만, 주부 자격 상실 상습범이라는데 어찌할 것인가.  

  아들을 생각하니 맘이 아팠다. 못난 엄마 만나 고생하는구나, 싶은 자책감만 밀려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들을 내려주고, 남편은 먼 길을 되돌아와 다시 서류를 챙겨서 떠났단다.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시외버스에 오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우여곡절 끝에 딸내미 기숙사 앞에서 가족 상봉을 했다. 오전에 있었던 상황을 얘기하느라 저마다 입이 바쁘다. 나는 조용히 상황을 정리했다. ‘엄마를 믿느니 개미발바닥을 믿어라!’

  진 빠진 세 식구의 얘기를 듣고 있던 딸이 말했다. 오늘 모두 혼절하도록 고생했으니 자신이 늦은 점심을 대접하겠단다. ‘우리 식구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고 큰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모두들 너무 배가 고팠다. 시계는 오후 세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기숙사 앞 상가에, 학생들을 위한 밥집이 지천인데, 약속이나 한 듯 밥값이 삼천오백 원밖에 하지 않는단다. 그 밥집 중 한 곳으로 딸아이는 우리를 안내했다.

  ‘꽃순이분식’이라고 쓰인 만찬장에 도착했다. 딸은 자신 만만하게 삼겹살 정식과 고등어 정식을 주문했다. 각각 이인분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각종 밑반찬과 요즘 비싸다는 김치는 기본인데다, 삼겹살은 산봉우리처럼 드높았고, 도톰한 고등어는  두 마리나 나왔다. 일반 시중에서는 그 값으로는 도저히 구경할 수 없는 메뉴였다.

  허겁지겁 배를 불리면서도 내 눈길은 식당 안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가만 살펴보니 가족주도형 사업체(?) 같았다. 자리보전할 것 같은 노할머니는 어눌한 손놀림으로 식당 한 쪽에서 마른 수건으로 수저를 닦고 있었다. 수더분하게 생긴 남편은 묵묵히 식탁 위를 치우고 음식을 날랐다. 주방장이자 계산원을 겸한 안주인은 주방과 카운터를 날다람쥐처럼 내달렸다.

  낮은 가격에 푸짐한 만찬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인건비를 절약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위한 식당으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방식인 것 같았다. 가족의 합심이 녹아 있는 만찬장을 보면서 가족을 지탱하는 그 힘이야말로 ‘작은 데서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헤아려도, 나 같이 실천하지 못하면 그건 못 헤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도 쓸 데 없는 자책인가?

  

  만찬에 초대해준 딸이 사랑스러운지 저녁에 남편은 정말로 회전식 만찬장에 우리를 안내했다. 화려한 도심 속, 공중을 천천히 떠도는 식당에 앉아 비싼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만은  자꾸 점심 만찬이 떠올랐다. 소박하든, 화려하든 만찬은 값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새기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12-1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믿느니 개미 발바닥을 믿어라~ㅋㅋㅋ
따님은 오찬을 대접했고 진정한 만찬은 남편분께서 회전식으로~~ 근사했겠어요.^^